카를로스 3세
1. 개요
스페인 부르봉 왕조의 국왕. 나폴리 왕국과 시칠리아의 왕으로서는 카를로 7세이다.
2. 생애
펠리페 5세의 다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1732년부터 파르마를 다스리기 시작했으며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에서 합스부르크의 카를 6세를 누른 이후 1734년에 나폴리 왕국과 시칠리아의 왕위에 올랐다. 대신에 파르마는 동생인 펠리페에게 넘겼다. 1759년 페르난도 6세의 사망 후 스페인 왕이 됐으며 나폴리의 왕은 3남 페르디난도 1세에게 승계했다.[1]
스페인을 유럽 열강의 반열에 다시 올려놓는 것이 그의 지상 목표였다. 그러나 외교적 실패 때문에 그 목표의 성공은 매우 어려웠다. 7년전쟁에서 영국과 프로이센이 승리하자 카를로스 3세는 1761년 8월 프랑스와 공수동맹을 체결하게 된다. 결국 1762년 영국과 전쟁을 하게 되었으나 패하여 플로리다를 상실해야 했다. 이것 때문에 카를로스 3세는 미국 독립전쟁을 지원했다. 그러나 이 전쟁의 영향으로 식민지들이 혼란에 빠질 것을 걱정한 그는 중재에 나서게 된다. 그러나 중재는 실패했고 미국의 독립을 지지하지는 않았으나 1783년 베르사유 조약에서 다시 미국의 독립을 승인한다.
그는 영국과의 전쟁에서 스페인의 개혁이 필수라고 여기게 된다. 그래서 새로운 지방행정관 제도인 앵당탕 제도를 도입했다.
1766년 스페인의 마드리드와 각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카를로스 3세는 이것을 예수회의 책동 때문이라고 판단해서 프랑스와 협조해 교황으로부터 예수회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한을 얻었다. 그 전에 1767년에는 스페인 전 국토와 식민지에서 예수회의 추방을 명령했다. 카를로스 3세는 종교재판을 열면서 설득에 능한 인물들을 재판장에 임명했다. 1787년에는 국무회의를 설치하여 좀더 효율적이고 통일된 정책을 만들 수 있게 했다. 또한 개혁적인 교육정책을 펼쳐 16명의 바스크 귀족들에게 국우회를 결성하는 것을 허락하여 농공상, 예술, 과학등을 장려하게 하였으며, 마드리드의 경제협회 여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여선생들의 협회가입을 허가했다. 또한 농업정책도 펼쳤으나 지주층의 반발이 심하여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다. 또 상업에 대한 규제도 철폐하고 식민지를 포함한 전 스페인 영토에서 통상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하여 수출을 영국과의 전쟁 전보다 2배로 늘렸으며, 지방에 대한 통제도 강화했다. 카스티야 의회에 시 재정감독권을 준 것이다.
1788년 마드리드에서 사망하였다. 사후 차남 카를로스가 왕위를 계승해 카를로스 4세로 즉위한다.
3. 가족관계
왕비 마리아 아멜리아[2] 를 매우 사랑하여 금슬이 좋았으며 왕비가 그보다 먼저 죽은 뒤에도 그녀를 추모했다.
- 마리아 이사벨 : 1740년 9월 6일 ~ 1742년 11월 2일 : 2세
- 마리아 조세파 : 1742년 1월 20일 ~ 1742년 4월 1일 : 2개월
- 마리아 이사벨 안나 : 1743년 4월 30일 ~ 1749년 3월 5일 : 5세
- 마리아 조세파 : 1744년 7월 6일 ~ 1801년 12월 8일 : 57세
- 마리아 루이자 : 1745년 11월 24일 ~ 1792년 5월 15일 : 46세 - 레오폴트 2세의 황후.
- 펠리페 : 1747년 6월 13일 ~ 1777년 9월 19일 : 30세
- 카를로스 : 1748년 11월 11일 ~ 1819년 1월 19일 : 70세 - 스페인의 왕
- 마리아 테레사 : 1749년 12월 2일 ~ 1750년 5월 2일 : 5개월
- 페르난도 : 1751년 1월 12일 ~ 1825년 1월 4일 : 73세 -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왕
- 가브리엘 : 1752년 5월 11일 ~ 1788년 11월 23일 : 36세
- 마리아 안나 : 1754년 7월 3일 ~ 1755년 5월 11일 : 8개월
- 안토니오 : 1755년 12월 31일 ~ 1817년 4월 20일 : 61세
- 프란시스코 : 1757년 2월 15일 ~ 1771년 4월 10일 : 16세
4. 여담
그의 재위시절 스페인은 그 옛날의 리즈시절로 도약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그의 즉위하기 직전의 스페인보다 훨씬 더 부강해졌다. 여러모로 근대 이전 스페인 역사상 마지막 명군으로서 현재 스페인 유수의 명문대인 카를로스 3세 국립 대학이나 마드리드 재개발 같은 국가의 내부 기강을 다시 다져놓았다고 평가 받는다. 무엇보다 이 사람의 후계자들이 재상에게 휘둘리다 나폴레옹에게 그대로 털리거나, 아예 프랑스 강점기 당시에는 망명 중에 찌질거린거 말고는 한 것도 없는 주제에 왕좌에 돌아 온 후로는 폭정을 펼쳤던 양반들이다 보니...
[1] 장남 펠리페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어서 왕위승계가 불가능했고, 차남 카를로스는 스페인의 왕위를 계승해야했으므로, 나폴리와 시칠리아는 3남 페르난도가 계승했다.[2] 참고로 이 사람의 아버지가 작센의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3세인데, 폴란드 왕위 계승전쟁에서 오스트리아 측이 폴란드 선거왕으로 밀었던 작센 선제후다. 카를로스 3세가 이 전쟁에서 카를 6세를 격퇴하고 나폴리랑 시칠리아를 수복했고 당시 프랑스-스페인 연합이 스타스니와프 레슈친스키를 지지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하다. 특히 이 사람의 여동생은 카를로스의 5촌 조카인 루이 15세의 아들에게 시집갔다. 즉 카를로스는 루이 16세와 루이 18세, 샤를 10세에게 이모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