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본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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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보르본 왕조
(1700~1808, 1813~1868, 1874~1931, 1975~현재)
1. 개요
2. 역사
2.1. 18세기
2.2. 19세기 중반
2.3.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
2.4. 20세기 후반
3. 카를리스타
4. 왕조명 변경?
5. 역대 국왕
6. 명단


1. 개요


Borbón. 18세기 이래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스페인 왕국의 왕조. 보르본은 부르봉 왕조의 '부르봉'의 스페인어식 발음이다. 시조 펠리페 5세가 앙주 공작이었으므로 보르본앙주 왕조라고 부르기도 한다.
2020년 현재 펠리페 6세가 스페인의 왕으로 재위 중이다.

2. 역사



2.1. 18세기


17세기 말 스페인 압스부르고 왕조가 단절되자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조, 그리고 바이에른의 비텔스바흐 왕조가 스페인 왕위를 두고 경쟁했다. 스페인 압스부르고 왕조 마지막 왕인 카를로스 2세는 원래 바이에른 선제후에게 왕위를 넘기려고 했다. 그러나 바이에른과 오스트리아가 스페인 국토를 분할할 비밀조약을 맺은 것이 들통나 격노하여 루이 14세의 손자인 필리프를 왕위계승자로 지목했다.[1] 루이 14세는 이어 필리프를 프랑스 왕가의 후계자로 지명, 궁극적으로 스페인을 합병하려고 했으나,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패배해서 체결된 유트레히트 조약의 결과 보르본 왕가는 스페인과 프랑스의 왕가로 분할되었다. 다만 왕위만 나눴을 뿐이지, 나폴레옹 전쟁 이전까지 프랑스와 스페인은 끈끈한 동맹으로 맺어져 있었다.
1703년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의 결과 안달루시아는 이제 영국군의 처분에 달린 듯이 보였고, 이 지방이 봉기한 것은 앤 여왕의 종교적 열광 때문이었다. 카탈루냐인들의 지지를 받고 있던 카를 대공은 1705년 마드리드에 입성했으나 1707년 펠리페 5세아라곤 왕국을 탈환하였다. 그리고 아라곤 왕국을 아예 없애고 법적으로 포르투갈을 뺀 이베리아 반도 전역을 통일했는데 법적으로는 이때가 스페인 왕국의 첫 탄생이었다.(그 이전에는 카스티야-아라곤의 동군연합 혹은 연합왕국 형태)
18세기 초반에는 결혼동맹으로 재미를 본 합스부르크 가문의 선례와도 비슷하게 이탈리아 국가들과 결혼동맹을 추진하여 파르마 공작과 양시칠리아 왕국 왕위를 획득하였다. 그러나 이 국가들은 1860년 이탈리아 통합 과정에서 사르데냐 왕국(전 사보이아 공국)에 병합되었다.
스페인 보르본 왕가는 계승전쟁 직후 나라를 수습하고 여러 개혁을 단행해 한 세기간의 평화를 가져왔다. 계승전쟁 이후 즉위한 펠리페 5세의 통치 덕분에 막장 상황은 어느 정도 정리되었고 18세기 초반부터 스페인은 중흥을 시작하였다. 그래서 18세기 보르본 왕조 시대를 스페인 계몽주의 시대(Ilustración en España)라 하기도 한다. 보르본 국왕들은 프랑스의 예를 본받아 행정을 강화하며 각종 개혁[2]을 시행하였다. 또한 유럽과 신대륙의 무역을 장려하고 국내 발전에 힘써 100여 년 동안 스페인은 태평성대를 이루었고 카를로스 3세 시기에 루이지애나도 획득하는 등 중흥하였다. 카를로스 3세는 예수회를 추방하고 종교재판 규정을 완화했다. 또한 캘리포니아와 애리조나 등 북미 식민지 경영에 적극적이었으며 북미 여러곳에 스페인 탐험대가 파견되었다. 영토상으로 스페인 제국의 최대 영토를 달성하던 시기가 이즈음.
대외적으로는 프랑스 부르봉 왕조를 지지하여[3]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 프랑스 편을 들어 참가했고, 7년 전쟁으로 프랑스령 루이지애나를 획득했다.[4] 이후 루이지애나는 쿠바 도독령 산하 스페인령 루이지애나(Spanish Louisiiana)로 40년간 스페인 치하에 있다가 나폴레옹에 의해 1801년 다시 프랑스로 넘어갔다. 그러나 지리적 요인과 대륙에서의 전쟁격화로 실질적으로는 루이지애나에 파견된 스페인 관료들이 계속 이곳의 행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결국 나폴레옹이 루이지애나 판매로 이 지역을 미국에 넘겼을때 스페인, 프랑스, 미국 세 국가 대표는 세인트루이스에 같이모여 형식적으로 소유권을 차례대로 이양하는 퍼포먼스를 펼쳤다.[5]
미국 독립전쟁에서는 프랑스의 동맹자격으로 미국편을 들어, 펜서콜라 공방전에서 영국군을 격파하고 1763년 영국이 가져간 플로리다를 1783년 다시 획득했다. 1819년 미국과의 애덤스-오니스 조약(Adams - Onís Treaty)으로 플로리다는 미국에 할양했지만, 로키산맥, 스페인령 누에바에스파냐를 기준으로 국경정리를 했다. [6]
그런데 주요 동맹국인 프랑스에서 프랑스 혁명이 터지자 스페인 정국은 급속히 불안해져갔다.
1788년 왕위에 오른 카를로스 4세는 정치에 무관심했고 여자에도 관심이 없어 왕비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왕비는 자신에게 무신경한 남편 대신 다른 남자들과 어울리기 시작했으며, 그중에서 마누엘 고도이는 왕비의 근위병 출신에서 총리대신으로까지 임명되었다.
사실상 정치는 고도이가 쥐락펴락했으며 왕은 사냥에나 열중하며 놀기에 바빴고 그에 따라 고도이에 대한 백성들의 불만은 나날이 커져만 갔다. 프랑스에서는 나폴레옹이 등장했고 이때에도 스페인은 동맹국이었으나 나폴레옹에게 스페인 왕국은 속국 정도의 대우밖에 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스페인은 트라팔가 해전 후 그러한 친프랑스 정책을 버렸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1807년에 러시아에 승리를 거두면서 고도이는 다시 친프랑스 기조로 전환했지만, 프랑스는 더이상 스페인과의 동맹에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에 따라 프랑스와의 동맹도 고도이의 지배를 약화시켰고, 영국과 밀접한 관계를 모색하는 페르난파(페르난도 왕세자의 지지자)는 활기차게 활동을 하였다.
1808년 스페인의 국민들은 총리인 마누엘 고도이와 왕비인 마리아 루이사 그리고 무능한 왕의 전횡을 더는 참지 못하고 봉기를 일으켜 왕을 내쫓았고 왕세자 페르난도를 새로운 스페인의 왕으로 옹립한다. 그러자 스페인의 상황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나폴레옹은 화해를 주선한다는 목적으로 카를로스 부처와 고도이, 페르난도 7세를 비요나로 불러들이고 카를로스 부처와 고도이는 퐁텐블로 성, 페르난도 7세를 발렌시아 성에 가둔 뒤 자신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호세 1세라는 이름으로 스페인의 왕으로 세운다. 이로써 보르본 왕조는 잠시 단절된다.

2.2. 19세기 중반


이베리아 반도 전쟁이라는 혹독한 전쟁을 겪으면서 스페인은 프랑스 세력을 몰아냈다. 그러나 이때의 대가는 너무나 컸다. 본토가 완전히 황폐화된 것은 물론이고, 나폴레옹의 스페인 본국 유린을 본 라틴아메리카 식민지 크리오요들은 간섭 많은 본국에서 독립하고자 라틴아메리카 독립전쟁을 일으킨다. 멕시코의 미겔 이달고 신부와 호세 마리아 모렐로스 신부, 콜롬비아의 시몬 볼리바르와 아르헨티나 등지의 산 마르틴 장군 등의 활약으로 인해 스페인이 설치한 부왕령[7] 체제는 붕괴되어 현 남아메리카 국가들로 독립하게 된다.
나폴레옹에 쫓겨났던 페르난도 7세는 복위했다. 그는 4번째 결혼에서 드디어 자식을 갖게 되었다. 스페인은 보르본 왕조 이후로 살리카법을 따르고 있었기에 딸이 태어나면 차기 국왕은 동생 몰리나 백작 카를로스가 되어야 하는데, 어떻게든 자신의 자식에게 왕위를 잇게 하고 싶었던 그는 앞으로 태어날 아이가 딸일 것을 대비해 1830년 3월 18일, 살리카 법을 폐지했다. 페르난도 7세의 장녀 이사벨 공주가 태어난 뒤 몰리나 백작 카를로스는 포르투갈로 추방되었다. 왕은 카를로스를 지지하는 봉건주의 세력에 맞서기 위해 자유주의자들을 대거 포섭해 이사벨 공주의 지지세력을 만든 후 1833년 9월에 사망한다. 페르난도 7세가 죽자 포르투갈에서 돌아온 몰리나 백작 카를로스는 이사벨의 후계자 권리를 인정치 않고 스스로를 카를로스 5세라 칭했고, 그의 지지자들은 카를리스타(Carlista)라 불리며 이자벨파와 대립했다. 이에 자유주의자들은 이사벨 공주를 이사벨 2세로 옹립하였으며 결국 제1차 카를로스 전쟁이 벌어진다.
이 내전에서 이사벨파가 승리함에 따라 자유주의적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스페인은 전 인구의 2/3이 농경에 종사하는 국가였고, 자유주의자들이 펼친 개혁책은 이상주의에 입각한 비현실적인 정책들이었다. 이렇듯 이사벨 2세를 옹립한 자유주의자들의 정치적 무능과[8] 여전히 잔존한 카를리스타의 준동 등으로 스페인 정국은 혼란에 빠져들었다. 그러다가 1868년 프란시스코 세라노 장군과 후안 프림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부군이 항복하자 같은 해 9월 30일 이사벨 2세가 프랑스로 망명하고 새로이 사보야 왕가아마데오 1세를 스페인 왕으로 추대해 보르본 왕조는 잠시 단절된다.

2.3.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


사보야 왕조와 이를 뒤엎고 성립한 제1공화국은 엄청난 혼란상을 보여주어 결국 쿠데타로 보르본 왕정이 복고된다. 자세한 사항은 스페인 왕정복고 참조.
복고 후 왕위는 이사벨 2세의 장남 알폰소가 차지하여 알폰소 12세로 즉위하였고, 스페인에는 보르본 왕조가 복구되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카를로스파의 돈 카를로스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제압되었고, 알폰소 12세는 1876년 7월, 기존 헌법보다 자유로운 새 헌법을 통과 시켰는데, 새 헌법은 의회와 국왕을 동등한 지위로 놓고, 국왕의 입법 및 의회 소집권, 양원제, 표현과 결사의 자유를 보장하는 내용으로 스페인은 이때를 기점으로 확실한 입헌군주국이 되었다.
이즈음 스페인의 산업혁명도 진척되었는데, 1850년대 첫 장거리 전신통신이 도입되었고, 1848년 카탈루냐에 첫 철도노선이 개통되었다. 이후 1869년 마드리드 - 프랑스 국경 이룬을 연결하는 노선이 개통되었고, 1870년대 후반쯤에는 스페인의 대도시를 잇는 철도노선이 완비되었다.
대외적으로는 1848년, 군함을 파견해 차파리나스 제도(Chafarinas Islands)[9] 를 점령하였고, 1860년, 모로코와의 국경분쟁으로 시작된 전쟁에서 승리하여 모로코로 하여금 불평등조약인 와드라스 조약(Treaty of Wad-rass)을 체결하도록 하여 기존 점령지를 승인받고, 모로코 북부를 개방시켰다. 1884년 베를린 회담 에서는 서사하라를 차지하여 스페인령 사하라를 성립시켰다. 이후 스페인은 모로코로부터 이권을 조금씩 뜯어내다가 마침내 1912년, 프랑스와 함께 모로코를 분할하였다.
모로코에서의 개입은 성공적이었지만, 아메리카 지역의 전황은 그닥 좋지 않았다. 스페인은 도미니카 공화국을 아이티로부터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1861년, 도미니카를 재점령하고, 보호령으로 삼았다. 그러나 산티아고 로드리게즈가 주도한 도미니카 독립군은 아이티의 지원을 받아 끈질기게 저항했고, 1863년, 결국 스페인은 별 소득없이 도미니카에서 철수했다. [10] 쿠바에서도 1968년, 스페인 본국의 노예제도, 사법제도, 관세제도에 불만을 품은 크리오요 주도 하에 10년전쟁(1868~1878)이 발발하였다.
1885년, 알폰소 12세가 갑작스럽게 요절하자, 그의 유복자알폰소 13세로 즉위하였다. 알폰소 13세는 1902년, 친정을 시작했지만 스페인 정국은 보수당, 자유당의 잦은 내각교체로 시끌시끌했고, 1921년, 리프 전쟁(Rif War)[11] 초기 아누알 전투(Battle of Anuual)에서 진압군이 대패하여 정치적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애초 스페인 국민들은 제국의 재건을 위한 식민지 확장에 별 의지가 없었고, 미서전쟁의 패배로 스페인이 식민지를 처분하자 스페인의 경제는 오히려 빠르게 성장했다. 이런 상황에서 강경파에 직접 힘을 실어준것은 알폰소 13세 본인이었기 때문에, 모로코에서의 전황 악화는 그의 정치적 생명에도 치명타가 되었다. 결국 1923년,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가 일으킨 쿠데타가 일어났다. 그러나 리베라는 막후에서 알폰소 13세의 지지를 얻어 30년까지 독재정권을 유지했다.
세계대공황으로 인기를 잃은 리베라는 1930년 1월 실각하고, 알폰소 13세는 다시 입헌군주제로 복귀하기 위해 여러 수단을 강구했다. 그러나 1931년 총선에서 공화주의자들이 압승을 거두면서 다시 왕정이 쫓겨나고 스페인 제2공화국이 수립되었다.

2.4. 20세기 후반


스페인 제2공화국스페인 내전을 통해 몰아낸 프란시스코 프랑코스페인국을 수립했는데, 1947년에 공식적으로 보르본 왕정 복고를 선포한다. 그러나 1969년 공식적으로 후안 카를로스가 계승자로 지명되기 전까지는 왕이 없는 왕정(...)이었고 그 동안 프랑코는 섭정으로 독재를 행했다.
그리고 1975년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사망한 이후 후안 카를로스 1세가 즉위하여 보르본 왕조가 다시 이어진다. 2공화국 이전부터 왕정이 무능한 모습을 많이 보여준 탓에 왕정복고 이후에도 왕실에 대한 지지도는 높지 않았지만 후안 카를로스 1세는 프랑코 체제를 거부하고 민주화를 추진하였고 그 결과 의원내각제입헌군주제가 도입되면서 국왕은 실권을 잃었지만 보르본 왕조는 다시 스페인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3. 카를리스타


스페인의 왕당파 중 몰리나 백작 카를로스(카를로스 4세의 차남)의 혈통을 옹립하려 한 전통주의, 정통주의 세력을 카를리스타(카를로스파, 스페인어: Carlista)라고 한다.
카를리스타의 일방적인 주장에 의하면 현재의 스페인 왕실은 엄밀히 말해 보르본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들에 의하면 이사벨 2세(1830~1904)는 사촌오빠인 보르본 가문의 카디즈 공작 프란시스코와 결혼했으나, 정략결혼인 탓에 부부관계는 좋지 않았고 결국 여왕이 '''아직도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엄한 남자'''[12]에게서 아들을 봤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아들이 훗날 알폰소 12세로 왕위까지 올랐다. '''물론''' 공식적으로는 보르본 가문을 계승했기 때문에 여전히 보르본 왕조로 불린다. 애초에 알폰소 12세의 친부가 누군지 알 방법도 없고.[13]
사실 이 계승권 문제는 당시에도 꽤나 민감한 문제였다. 선왕인 페르난도 7세가 살리카법을 폐지하여 이사벨 2세가 즉위할 수 있는 명분이 되었으나, 여왕의 삼촌인 몰리나 백작 카를로스(자칭 카를로스 5세)는 살리카법을 내세워 여자인 이사벨 2세의 계승권을 문제삼으면서 알폰소 12세가 보르본 왕조가 아닌 사생아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보다는 남계인 자신이 적법한 후계자라며 본인, 아들, 손자 3대가 무려 3번에 걸쳐 내전을 주도한 일도 있었다. 그리고 그 후손들인 보르본파르마 가문[14]의 왕위요구자인 식스토 엔리케와 카를로스 하비에르는 '''현재까지도''' 왕위에 대한 야망을 버리지 않았다. 물론 단순히 왕위 계승 문제로 100년 동안 저런 건 아니고, 카를리스타가 단순히 왕위 계승 문제를 넘어 종교적 보수주의, 지역별 자치 문제 등을 둘러 싼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성장했기에 그랬다.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말년에 입헌군주제를 구상할 당시 그가 새로운 왕으로 누구의 혈통을 지명하느냐가 당시 스페인 정가의 최대 관심사였는데[15], 결국 그는 카를로스 5세의 후손 카를로스 우고 대신 이사벨 2세의 후손인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손을 들어주어 지금과 같이 왕위에 오르게 했다.
카를로스 우고와 카를리스타 세력이 프랑코에게 접근해도 대답이 영 미적지근하자, 본인의 성향과 친하게 지냈던 주변의 스페인 공화파 망명객들의 영향과 맞물려 이전까지는 골수 가톨릭 전통주의를 유지했던 카를리스타 운동의 반을 끌고 나가 '''사회주의 극좌 정당'''으로 바꾸어버렸다. 스페인 내전 당시만 하더라도 카를리스타 운동은 종교적 신념 때문에 우파에 속했지만, 종교적 전통주의만큼 카를리스타에 중요한 것은 자기들의 안방 거점인 바스크-나바라 일대의 지방 자치, 즉 정치적 전통주의였으며, 이들이 원했던 전통적 자치주의는 가치관에서도 전통 사회와 공동체를 파괴하는 자본주의적 근대성을 좌파들 못지 않게 미워했다[16][17]. 스페인 내전 당시 프랑코파의 승리에는 전쟁 발발 이전부터 스페인 우익들 중에 가장 조직화되어 있고, 무장 봉기의 전통이 깊었던 카를리스타들의 공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코는 지방 자치 전통을 뭉개버리고, 외부 자본들을 끌여들여 스페인 북부의 전통 공동체를 해체했으며, 말년에 가면 2차 바티칸 공의회로 인하여 가톨릭 교회와도 충돌하기 시작하니 더이상 프랑코와 같은 배를 타고 있다가는 독립적인 정치 세력으로 아예 말라 죽어버리겠다고 판단한 카를로스 우고 쪽에서 아예 극좌향을 선택한 것이다. 현재 카를리스타 정당은 이 카를로스 우고가 세웠으며 자생적 사회주의를 주장하고, 스페인 제2의 극좌 정당인 좌파연합(Izquierda Unida)이 세워질 당시 스페인 공산당, 생태주의 정당들과 함께 합당의 주축 중 하나였던 카를리스타 당(Partido Carlista)과 이 좌빨 왕족 형님(...)을 보고 복장이 뒤집어 진 나머지 가족들이 또 분열하여 세운 극우파 카를리스타 전통주의 교단 (Comunión Tradicionalista Carlista)이 있다. 그런데 둘 다 실질적인 정책에서는 지방 자치주의 좌파에 가깝다.

4. 왕조명 변경?


스페인의 현 국왕 펠리페 6세는 즉위한 이래 슬하에 레오노르 왕세녀소피아 공주밖에 없고, 아들을 낳을 생각이 없다며 더이상의 자녀 계획이 없다고 선언하였다. 때문에 펠리페 6세의 뒤를 이어 그의 장녀 레오노르 왕세녀가 스페인의 여왕으로 즉위할 전망이다. 이렇게 되면 원칙적으로는 훗날 레오노르 왕세녀의 남편의 가문으로 스페인의 왕조명이 바뀌겠지만[18], 20세기 이후 유럽 왕조에서는 모계로 계승되는 경우에도 왕조명을 유지하는 원칙을 세운 경우가 많으므로 스페인의 보르본 왕가도 왕조명을 그대로 유지할 가능성이 높다. 현재 대대로 여왕을 거쳐 계승된 네덜란드의 경우에도 왕가 이름은 암스베르크 왕가가 아니라 오라녜나사우 왕가이며, 엘리자베스 2세 사후 영국 왕가도 그대로 윈저 왕가로 계승될 예정이다.

5. 역대 국왕


대수
왕호
재위시작
재위종료
재위기간
비고
6대
펠리페 5세
1700.11.01.
1724.01.15.
23년 80일
[19]
7대
루이스 1세
1724.01.15.
1724.08.31.
229일

8대
펠리페 5세
1724.09.06.
1746.07.09.
21년 311일
[20]
9대
페르난도 6세
1746.07.09.
1759.08.10.
13년 24일

10대
카를로스 3세
1759.08.10.
1788.12.14.
29년 134일

11대
카를로스 4세
1788.12.14.
1808.03.19.
19년 99일

12대
페르난도 7세
1808.03.19.
1808.05.06.
48일

14대
페르난도 7세
1813.12.11.
1833.09.29.
19년 297일
[21]
15대
이사벨 2세
1833.09.29.
1868.09.30.
35년 1일
[22]
17대
알폰소 12세
1874.12.19.
1885.11.25.
10년 344일
[23]
18대
알폰소 13세
1886.05.17.
1931.04.14.
44년 342일
[24]
-
후안 3세
-
-
-
[25]
19대
후안 카를로스 1세
1975.11.22.
2014.06.19.
38년 219일
[26]
20대
펠리페 6세
2014.06.19.
(현재)
(재위중)
[27]

6. 명단


  • 이사벨 2세 (1830 ~ 1904) - 프란시스코 데 아시스 데 보르본 (1822 ~ 1902)


[1] 필리프는 스페인의 국왕 카를로스 2세의 이복 누나이자 루이 14세의 왕비인 마리 테레즈의 손자였다. 게다가 루이 14세의 어머니도 펠리페 3세의 딸 안 도트리슈였으니, 필리프는 2대에 걸쳐 스페인 압스부르고 왕조의 피를 이어받았다.[2] 프랑스를 본받아 중앙집권을 행하려고 하였으나, 스페인은 지역색이 매우 강하고 전통적으로 각 지역별로 자치가 행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완전한 중앙집권은 실패하고, 왕조의 영향력이 카스티야를 넘어서 옛 아라곤 지방을 장악하는 데서 끝났다.[3] 펠리페 5세 말기엔 잠시 동맹이 와해된 바 있다. 1718년에 일어나 1720년에 끝난 사국 동맹 전쟁이 그 이유인데 스페인의 왕이었던 펠리페 5세와 그의 부인 이사벨 디 파르네시오, 그리고 그의 총리인 쥘리오 알베르로니가 스페인 왕위계승전쟁 당시 잃은 이탈리아의 영토(나폴리 왕국, 시칠리아 왕국 등)를 탈환하고 프랑스의 왕위를 주장하고자 일으킨 전쟁이었다. 스페인에 맞서 신성 로마 제국, 네덜란드 공화국,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프랑스 왕국이 동맹을 맺었고, 사보이 공국이 5번째 동맹국으로 참여했다. 이 동맹군이 스페인을 격파함으로써 전쟁이 끝났다. 1717년 전쟁이 시작되었지만 공식적인 선전포고는 1718년에 이루어졌고, 전쟁은 헤이그 조약의 체결로 1720년 끝났다.[4] 이 당시 루이지애나라 함은 현재의 루이지애나주가 아니라 미시시피강 유역을 따라 형성된 미주리, 아칸소, 아이오와, 네브라스카, 사우스다코타, 노스다코타를 포함한 광범위한 지역이다.[5] 스페인 국기를 내리고, 프랑스 국기를 게양한 후, 프랑스 국기를 내리고 성조기를 게양했다. 이 날을 Three Flags Day라 부른다.#[6] 플로리다와 함께 북위 42도 이북의 오리건, 브리티시 콜롬비아, 유콘 지역은 지키기 어렵다는 이유로 포기되었다. [7] 스페인은 라틴 아메리카에 4개의 부왕령을 설치하였다. 리오 데 라플라타(아르헨티나, 칠레/1776년), 누에바에스파냐(멕시코와 현 미국의 남부 일부/1535년), 누에바 그라나다(콜롬비아 등지/1717년), 페루(1543년)의 4개이다.[8] 당시 스페인의 정치체제는 귀족 공화정에 가까웠고, 왕은 이름뿐인 존재였다는 점에서 여왕의 실책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이사벨 2세는 부왕의 급사로 3세에 즉위하였기에 친정을 할 수가 없었다. 내전 중에는 모후인 마리아 크리스티나와 그녀의 조언자들이 섭정하였고, 카를로스파를 굴복시키고 마리아 크리스티나가 물러난 이후에는 자유주의자들이 그녀를 대신해 통치하였다.[9] 모로코 동부 라스-케브다나 앞바다에 위치한 섬으로, 현재는 생태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지역이다.[10] 어째 나폴레옹 3세가 멕시코에 괜히 개입했다가 욕만먹고 철수한것과 비슷한 모양새다...[11] 모로코에서 압둘 알 카림이 이끌었던 반 스페인 봉기. 알 카림은 스페인 교사 출신으로 유창한 스페인어 실력과 능수능란한 산악전을 선보이며, 훗날 체 게바라와 호치민, 마오쩌둥에 영향을 주었다 한다. [12] 프란시스코 세라노이다 공이라는 설이 유력하지만 이것도 하나의 설일 뿐이다.[13] 물론 유전자 검사를 하면 당연히 해결될 문제지만, 지금의 스페인 보르본 왕가가 알폰소 12세의 직계후손이니 당연히 불가능할 것이다.[14] 룩셈부르크의 부르봉파름 대공가 말고 그 가문의 본가를 의미.[15] 심지어 과거 스페인을 지배한 적이 있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수장인 오토 폰 합스부르크 대공까지 거론되었고 실제로 제안까지 했으나 오토 대공 측에서 독재자인 프랑코와 엮이기 싫어 거절했다고.[16] 내전 전후로 해서 나온 카를리스타 단체들의 선전물들을 보면 '성 베드로의 가장 충실한 아들인 스페인을 어지럽히는 유대 볼셰비키 자본주의자들을 척결하여...'라는 식의 주장을 많이 볼 수 있다. 어떻게 유대인이 자본가이면서도 볼셰비키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그때는 그런 논리가 먹혔다.[17] 유럽사(+유럽 문화권의 영향을 받은 서구사)에서 흔히 '혁명의 세기'라고 불리는 19세기 중순~20세기 중엽, 그 중에서도 전반부인 19세기 중후반~20세기 초반의 정치구도는 '양자갈등에 가까운 현대의 보혁갈등'에 비해 훨씬 복잡한 세력구도로 짜인 다자간 갈등에 가까웠다. 예를 들어 이 시기까지만 해도 기독교(주로 가톨릭)+왕당파+전통주의 세력이 정치적으로 상당한 입지를 가지고 보수파의 위치에 있었고, 자본주의자들은 이들 보수 왕당파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혁신적인 위치에 있으면서 사회주의/공산주의 세력에 비하면 보수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볼셰비키 자본가>같은 신기한 개념이 나올 수 있던 것 역시, 자본가든 공산주의자든 가톨릭 왕당파 보수주의자의 관점에서 보면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전통적 공동체를 해체하려 한다는 점에서는 '''똑같은 놈'''들이었기 때문. 또한, 이 때문에 자본주의 세력을 양쪽에서 협공중이던 극좌 사회주의 세력과 극우 왕당파 세력의 합작도 종종 발생했다. 특히 공상적 사회주의 계열 세력의 경우 '소규모 공동체'를 지향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는 전통주의자들이 지키려고 하는 전통적 공동체와도 어느정도 유사점이 있었던 것. 칼 마르크스 같은 인물도 생전에 공상적 사회주의 정파와 왕당파/전통주의 정파의 연합을 여러 번 비판했을 정도이다.[18] 사실 카를리스타도 1936년 이후로 남계 혈통이 단절되었다.[19] 루이 14세의 손자이자, 왕세자 루이의 아들, 에스파냐-보르본 왕조 개창[20] 장남 루이스 1세의 죽음으로 복위[21] 나폴레옹에 대한 연합군의 승리로 인해 호세 1세를 몰아내고 복위함. (보르본 왕가의 1차 복위)[22] 살리카법 개정으로 인해 여자임에도 왕위에 오름[23] 이사벨 2세의 장남으로, 왕정 복위 쿠데타로 즉위(보르본 왕가의 2차 복위)[24] 알폰소 12세의 유복자, 마누엘 아사냐를 주축으로 한 공화정 운동으로 인해 퇴위하고 이탈리아 로마로 망명.[25] 추존왕. 알폰소 13세의 아들이자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아버지[26] 알폰소 13세의 손자. 프랑코 사후 국왕으로 즉위함(보르본 왕가의 3차 복위)[27] 부왕 후안 카를로스 1세의 퇴위로 즉위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