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난도 7세
1. 개요
스페인 부르봉 왕조의 왕.
2. 즉위와 폐위
스페인 왕 카를로스 4세와 왕비 마리아 루이사 드 파르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국왕 부부에게 신임받던 귀족 마누엘 데 고도이의 미움을 산 페르난도는 후계자임에도 어린 시절에 부모의 애정을 잘 받지 못했고 이로인해 원망을 품었다.
아버지 카를로스 4세가 민중봉기로 퇴위를 한 후 페르난도가 즉위했다. 이때 나폴레옹은 스페인을 먹어치울 궁리를 하고 있었고 때마침 터진 반란과 페르난도의 즉위는 좋은 구실이 되었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페르난도를 초청한 뒤 그를 협박해 왕위에서 물러나게 한 뒤 자신의 형인 조제프를 왕위에 올리고 페르난도를 발렌시아 성에 감금한다. 조제프는 스페인의 국왕으로서 호세 1세로 불리게 된다. 사실, 원래 호아킨이 스페인의 국왕으로 취임하려 했으나 스페인 국민들의 반발이 너무 심해서 나폴리의 국왕이었던 조제프를 스페인으로 옮겨 즉위시키고 호아킨은 나폴리의 국왕으로 즉위시켰다.
3. 복위 그리고 절대왕정의 추구
나폴레옹에 대한 반발로 스페인에서는 민중봉기(이베리아 반도 전쟁)가 끊임없이 일어났으며 그 중에 개혁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들은 카디스에 모여 의회를 구성하고(카디스 의회) 헌법을 제정한다. 이 헌법을 카디스 헌법이라 부르는데 주요 골자로는 자유주의 사상에 입각한 입헌군주제를 지향한다는 것이었다. 호세 1세가 1813년에 폐위된 후에 복위한 페르난도 7세는 카디스 헌법을 거부했다.
카디스 헌법은 페르난도 7세가 보기엔 불법이었다. 전제군주제에서의 왕은 입법, 사법, 행정의 3권을 모두 쥐고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 전제군주제를 입헌군주제로 바꾸려면 전제군주제의 왕의 허락을 얻어야 한다. 아니면 혁명으로 왕을 몰아내야 한다. 그런데 카디스 헌법은 그 왕이 없는 틈에 자기네들끼리 왕의 이름으로 법은 만든 것이다.
그는 절대왕정체제로 복귀하려고 하였지만 1820년 자유주의자였던 리에고 대위에 굴복하여 카디스 헌법을 승인하였다. 그러나 페르난도 7세는 신성동맹을 이용해 외국세력을 끌여들여 자유주의자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였고 결국 자유주의자들은 사형당하거나 망명을 떠나게 되었다. 리에고도 사형당했는데 평민들에게 집행하는 교수형에 처해졌다.
4. 식민지 독립과 후계 문제
스페인이 혼란스러웠던 이때 아메리카의 식민지들은 독립전쟁을 일으켜 스페인의 지배에 벗어나는 데 성공했고 이로써 스페인은 쿠바와 필리핀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식민지들을 모두 잃었다. 시몬 볼리바르 항목과 멕시코/역사 참고.
그리고 당시 페르난도 7세에게 있던 또다른 문제는 후계자가 없다는 거였다. 그는 4번째 결혼에서 드디어 자식을 갖게 되었다. 스페인은 보르본 왕조 이후로 살리카법을 따르고 있었기에 딸이 태어나면 차기 국왕은 동생 카를로스 대공[1] 이 되어야 하는데, 어떻게든 자신의 자식에게 왕위를 잇게 하고 싶었던 그는 앞으로 태어날 아이가 딸일 것을 대비해 1830년 3월 18일, 살리카 법을 폐지했다.
페르난도 7세의 장녀 이사벨 공주가 태어난 뒤 카를로스 대공은 포르투갈로 추방되었다. 왕은 카를로스를 지지하는 봉건주의 세력에 맞서기 위해 자유주의자들을 대거 포섭해 이사벨 공주의 지지세력을 만든 후 1833년 9월에 사망한다. 페르난도 7세가 죽자 포르투갈에서 돌아온 카를로스 대공은 이사벨의 후계자 권리를 인정치 않고 스스로를 카를로스 5세라 칭했다. 이에 자유주의자들은 이사벨 공주를 이사벨 2세로 옹립하였으며 결국 제 1차 카를로스 전쟁이 벌어진다.
5. 가족
5.1. 아내들
- 마리아 안토니아 : 1784년 12월 14일 ~ 1806년 5월 21일
- 마리아 이사벨 : 1797년 5월 19일 ~ 1818년 12월 26일
- 마리아 요제파 : 1803년 12월 6일 ~ 1829년 5월 18일
- 마리아 크리스티나 : 1806년 4월 27일 ~ 1878년 8월 22일
5.2. 자녀들
마리아 루이사 : 1817년 8월 21일 ~ 1818년 1월 9일
마리아 루이사 : 1818년 12월 26일 ~ 같은 날 사망
이사벨 : 1830년 10월 10일 ~ 1904년 4월 9일
루이사 페르난다 : 1832년 1월 30일 ~ 1897년 2월 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