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시스코 고야
프란시스코 고야'''El sueño de la razón produce monstruos'''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눈을 뜬다.'''
Francisco José de Goya y Lucientes
1746년 3월 30일 ~ 1828년 4월 16일
스페인의 화가. 마드리드, 1808년 5월 3일, 거인, 사투르누스 등의 작품이 유명하다. 인간의 광기와 어두운 면이 드러난 그림을 많이 그렸다. 젊은 시절엔 로코코 양식의 영향을 받아 화사한 귀족적 화풍을 가진 궁정 화가였지만, 병으로 후천적 청각장애를 얻으면서부터 외부인과의 접촉을 거의 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집인 '귀머거리 집'에 틀어박혀 거의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 당시에 그린 그림은 캔버스 위에 그린 것이 아니라 집에 있던 하얀 벽위에 그렸는데 검은색 바탕, 기괴할정도로 일그러진 사람들의 형상과 얼굴, 우울한 주제의식 때문에 '검은 그림'이라고 불린다. 또한 병 재발의 불안감과 더불어 당시의 유럽 전역에서 일어나는 침략과 전쟁에서 인간의 광기를 지켜보며 인간에게 극도의 혐오감을 가지게 된다. 결국 비관주의가 그의 화풍을 바꾼 것이다. 그 후 꾸준히 사회비판적 작품들을 내게 되었는데 주로 평범한 사람들의 무지한 모습과 그것을 이용하는 높으신 분들의 암적인 모습을 그렸다.
대중들에게는 마드리드, 1808년 5월 3일이라는 작품이 가장 유명하다. 이 그림은 '1808년 5월 2일, 마드리드' 그림과 한 쌍으로 제작되었는데 그 그림은 이집트의 맘루크 용병대를 앞세운 나폴레옹 군대가 마드리드 시내로 쳐들어와서 시민들을 학살하자 시민들이 그에 용감하게 맞서 싸우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어지는 마드리드, 1808년 5월 3일 그림은 앞서 있었던 전투 이후 저항했던 마드리드 시민들과, 나폴레옹이 자신의 동생을 왕위에 앉히자 멀쩡한 왕자인 아스투리아스 왕자(후일 페르난도 7세)를 놔두고 무슨 짓거리냐며 시위를 일으킨 시민들을 향해 폭력 진압을 하는 프랑스군을 그려낸 그림으로 당시 진압으로 수천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고야의 의도는 '인간을 향한 인간의 폭력의 고발'. 진압당하는 시민들의 표정만 보이고 진압군의 표정을 보여주지 않는 것 또한 의도한 것이라고 한다. 감정 없이 잔혹한 짓을 일삼는 진압군을 묘사하려는 의도였다.
다만 이 그림들을 근거로 고야를 프랑스에 항거하는 애국주의자로만 보기엔 좀 복잡하다. 당시 스페인의 상황은 이렇게 일차원적으로 평가할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당시 스페인은 나폴레옹이 스페인 국왕으로 임명한 그의 형 조제프에게 충성하는 부류, 기존의 스페인 국왕이었다가 프랑스에게 끌려간 페르난도 7세를 지지하고 프랑스에 저항하는 왕당파 부류가 있었다. 그리고 조제프에게 충성하는 부류 중에는 단순히 프랑스에게 빌붙는 기회주의자뿐만 아니라 스페인의 낙후성을 비판하며 프랑스의 계몽주의에 영향을 받고 프랑스가 스페인의 계몽을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한 친프랑스 성향의 이상주의자인 아프란쎄사도(Afrancesado 친프랑스주의자)들도 상당히 있었다. 이 중 고야는 마지막의 아프란쎄사도에 가까웠다. 하지만 프랑스 또한 스페인의 압제자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이들의 활동은 공상에 가까웠다.[1] 당연히 이들 또한 다른 기회주의자들과 똑같이 '매국노'로 매도당했고 나폴레옹이 몰락한 이후에는 프랑스로 망명해야 했다. 고야 또한 이 처벌을 피하기 위해서 프랑스가 스페인에서 축출된 이후인 1814년에 위의 그림을 그리는 활동을 하였지만 결국 친프랑스파로 찍혀서 1824년에 프랑스로 망명했다.
그 외에 유명한 작품으로 '옷을 입은 마야'와 '옷을 벗은 마야'가 있다. 사실 이 작품은 뒷 이야기 때문에 더 유명해진 사례이다. 이 그림의 모델이 누구인가의 논쟁은 그 당시부터 지금까지 썩지 않는 떡밥이다. 당시 부유한 남자를 꼬시는 것으로 유명했던 알바 공작부인이 고야의 작업실에 화장을 받으러[2] 출입하게 되면서 내연의 관계로 발전하여 그림의 모델로 삼았다는 설과 알바의 공작부인을 연모했던 고야가 "얼굴은 공작부인의 얼굴을, 몸은 윤락녀의 몸을 그려 합친 것이다"라는 설이 있다. 여하튼 당시 누드화를 배척하는 교황청의 소환으로 재판정에도 회부되었으나 워낙 고야가 유명한 화가였고 이 그림은 그 당시 실권을 쥐고 있었던 고도이 총리의 의뢰를 받아서 만들어진 후 총리가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처벌은 면하고 원래 있던 누드화에 옷을 덧칠하는 조건으로 마무리되었다. '옷을 벗은 마야' 그림을 보존하고 싶었던 고야는 꼼수를 써서 '옷을 입은 마야'를 그리게 된다. 옷 벗은 마야 그림을 옷 입은 마야 그림으로 가려 놓았다가 도르레를 이용해 옷 입은 마야를 옮기며 옷 벗은 마야를 드러내며 놀았다고. 아무튼 처벌이 면해진 후에도 옷 벗은 마야는 창고에 짱박혀 있다가 현대인 1900년에 와서야 간신히 다시 세상의 빛을 보았다. 영화 타이타닉에서 잭에게 초상화를 그려 달라며 로즈가 누드로 취한 포즈 또한 마야의 모습과 비슷하다. 국내에서 이 그림을 '마야'라고 부르는 것은 그 근거를 찾을 수 없다. 원래 제목은 La maja vestida와 La maja desnuda로, 여기서 maja는 '마하'라고 발음해야 한다. maja는 모델의 이름이 아니고 '스타일있게 옷을 잘 입는 여성'을 뜻한다. 한국어로는 '옷을 입은 아가씨'정도로 번역했으면 좋았을 뻔 했다.
'아들을 먹어치우는 사투르누스[* 이 그림은 고야 자신이 설명한 적도, 제목을 단 것도 없는 고야 말기의 블랙 페인팅 중 하나다. 말년에 완전한 귀머거리가 되어 스스로 사회와 단절하고 격리되어 살던 고야 자신의 어두운 내면 세계를 드러내는 작품 부류로, 마드리드 교외의 자신의 집 벽에 그린 그림들이다. 이 작품은 부엌에 걸려 있었다고... ]'도 꽤 인지도 있는 작품이다. 자신의 지배권을 빼앗길 것이라는 예언을 두려워한 사투르누스가 공황에 빠진 채로 아들들을 먹어치우는 장면을 그린 상상화로, 집에 그려놓은 벽화를 캔버스에 옮겨 전시 중이다. 지금 봐도 꽤나 거북한 그림.
농경의 신 사투르누스는 크로노스를 로마 신화에서 라틴어로 부르는 이름인데, 사실 그림에서의 모습과 달리 로마에서 사투르누스는 제우스에게 쫓겨난 후 도시를 세우고 그 시대를 '황금의 시대' 로 이끌었던 덕 있는 군주로 여겨졌다. 고야가 사투르누스를 이렇게 흉측하게 그린 이유에는 나폴레옹군이 스페인에 쳐들어온 당시 상황에 있다. 전쟁에서 고문이나 총살 같은 끔찍한 장면을 목격했으며, 이를 그림으로 나타내기 위해 사투르누스를 소재로 이용한 것이다.[3]
동기가 된 또 다른 그림 '거인'이라는 작품에 대하여 2000년대에 지속적으로 위작 논란이 있었다. 고야의 작품이 아니라 고야의 아들 Javier Goya가 그린 것이라는 주장이 일었으나, 2009년에 스페인 대학들과 다수의 전문가들이 고야의 작품이 맞다고 인정함으로써 오롯이 고야의 작품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근거는 그의 부인이 죽으며 남긴 재산 목록에 이 작품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과 당시 나폴레옹의 스페인 침략으로 고통받는 민중을 다룬 고야의 애국적 문헌과 해당 작품의 발상이 일치한다는 점. 위작임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대로 고야의 아들이 그렸다면 이 작품은 하늘에서 툭 떨어진 셈이 되었을 것이다.
1770년 마드리드를 떠나 이탈리아 로마를 여행하고 왔는데, 이때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 돔 꼭대기까지 장비 없이 맨몸으로 올라갔다는 일화가 있다.
고야의 작품들은 대부분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마드리드 5월 3일', 옷을 입은/벗은 마하, 사투르누스 모두 프라도에 있다.
국내에서 정발된 매독(데버러 헤이든 지음)이란 책자에선 고야가 매독에 걸렸음에도 드물게 82살 장수를 누린 인물로 나오고 있다.
테넷에서는 고야의 위작이 사건의 키 아이템으로 등장한다.
[1] 당시의 스페인의 정치적 성향은 서유럽에서도 가장 봉건적/중세적 면모가 두드려져 낙후된 편이었다. 산업자본가등 부르주아 계층의 형성도 두드러지지 않아 사회의 대부분이 아직 지주귀족의 지배 아래 있었고, 근세 말~근대 초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으로 반동적/구체제적인 경향을 맹렬하게 드러내게 된 가톨릭 교회의 영향력 역시 강력했던 것. 따라서 당대 스페인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이런 폐쇄적이고 억압적, 구시대적인 사회 분위기에 엄청난 불만과 분노를 품고 있었으며 이런 이들 중 상당수는 <근대 계몽주의의 절정> 중 하나였던 프랑스 혁명을 강력한 대안이자 모범으로 받아들이고 친 프랑스주의자로 등장했던 것이다. 하지만 정작 스페인에 진주한 프랑스군은 계몽주의적/진보적 사회 발전의 모범과 대안을 보여주기는 커녕 무자비한 압제자이자 학살자로 등장했고, 따라서 아프란쎄사도들의 희망과 대안은 현실과 유리된 몽상으로 전락하고 만 것. 이러한 좌절은 결국 이후 성장한 스페인의 급진주의 세력이 왕과 귀족, 교회(가톨릭)에 대한 거부감과 동시에 외국의 영향력(외국의 급진주의 세력)에 대해서도 거부감을 보이면서 독일-프랑스에서 주류이던 사회주의 노선 대신 아나키즘 노선이 주류화되는 19세기 말~20세기 초의 상황에 이르게 된다.[2] 당시 물감은 굉장히 비싼 물품이었기 때문에 화장 또한 최고급 계층에서 했다.[3] 그리스 신화에서도 크로노스는 자식을 저렇게 갈기갈기 찢어먹기보다는 한입에 삼켜버리며, 그 덕에 삼켜진 올림푸스 신들은 제우스와 레아가 자식을 토해내게 할 때 잘 자란 채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