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레니즘 제국

 

'''알렉산드로스 제국'''
'''Αλέξανδρος Αυτοκρατορία'''

[image]
'''휘장'''[1]
[image]
'''강역'''[2]
'''존속 기간'''
기원전 323년 ~ 기원전 146년
'''수도'''
바빌론
'''언어'''
고대 그리스어, 고대 이집트어
'''국교'''
다신교
'''바실레우스'''
알렉산드로스 대왕
'''정부 형태'''
과두정
'''통화'''
드라크마(Τετράδραχμο)
'''성립 이전'''
아케메네스 왕조
마케도니아 왕조
'''성립 이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파랑)
셀레우코스 왕조(노랑)
리시마코스 왕조(주황)
카산드로스/안티고노스 왕조(초록)[3]
에페이로스(분홍)
언어별 명칭
한국어
헬레니즘 문명
라틴어
Hellenismus Cultura
그리스어
Ελληνιστική περίοδος
영어
Hellenistic period
히브리어
התקופה ההֶלֶנִיסְטִית
아랍어
العصر الهيلينستي
1. 개요
2. 역사
2.1. 확장
2.2. 분열
2.3. 멸망
3. 통치
4. 관련 문서
5. 역사보기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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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렉산드로스 대왕마케도니아그리스, 소아시아, 이집트, 아케메네스 왕조, 그리고 지금의 파키스탄 변경까지를[4] 병합하여 건설한 제국 및 그 땅을 물려받은 디아도코이들이 지배한 영역의 총칭. 약 '''2000년 후에''' 등장하는 프랑스 제1제국과 같이 대왕이 혼자서 만들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닌 제국이기에 그 이름을 따서 알렉산드로스 제국, 알렉산더 제국이라고도 불리며 동시에 '''그리스의 진정한 최전성기''' 라고 불리는 시대이다.

2. 역사



2.1. 확장


알렉산드로스가 이렇게 단기간에 엄청난 대확장을 이룩한 것은 물론 자신의 역량도 있지만, 당시 적대국이던 페르시아가 그 어느 때보다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이었으며 이에 제국을 구성하던 지역들이 독립을 열망하던 상황이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5] 이집트의 경우는 거의 무혈입성으로 차지했으며 그 넓은 페르시아의 땅도 다리우스 3세와의 단 몇 차례 전투만으로 적 주력을 이김으로써 자잘한 저항 없이 편입시킬 수 있었다.
근데 이렇게 따지면 몽골제국의 확장도 마침 금나라와 이슬람 세계가 쇠퇴하고 있었고 고려도 무신정권으로 막장화 돼서 대확장이 가능했던 측면이 있으니 굳이 따져봐야 무의미한 소리다. 그리고 무혈입성으로 이집트를 정복했다는 것도 역사적 사실과 다른 서술이다.그리스군은 이집트 입성을 위해 그라니쿠스 전투,이수스 전투,티레 공성전을 연달아 치뤘으며 그외 자잘한 전투들도 매우 많았다. 단 몇번의 대회전으로 페르시아를 정복했다는 것도 실제 역사와 전혀 다른 소리다. 페르시아를 차지한 뒤 알렉산드로스는 오히려 더 큰 고전에 직면하게 된다. 제국의 무덤이라 불리는 아프가니스탄에 도사리던 페르시아군 잔당 저항은 현지의 거친 유목민계 기병들이 많아 주력 이상으로 버거운 상대였으며, 켄타우로스의 모델이 됐을 정도로 인마일체의 기마술을 가진 중앙아시아 스키타이족도 상대해야 했다. 워낙 이수스와 가우가멜라가 유명해서 다른 전투들이 주목받지 못하는 거지 알렉산드로스는 에게 해를 건너 아나톨리아에 상륙한 뒤로부터 저 멀리 중앙아시아에 닿을 때까지 엄청 많은 전투들을 치루면서 페르시아를 정복했다.
인도에 대해서는 세간엔 인도를 정복했다고 잘못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현재의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그것도 변두리 정도만을 찔렀을 뿐이다. 심지어 인도 변경의 '''왕중 하나'''인 포루스 왕과의 전투에서 알렉산드로스군은 대다수가 전의를 잃을 정도의 지독한 고전을 했으며[6], 그로부터 얼마 후 어떻게 10년이나 원정에 끌고 다닐수 있냐고 따지는 병사들의 파업에 부딪혀 천하의 알렉산드로스조차 고집을 꺾고 철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수정 전에는 포루스가 변경 소군주라 기입되어 있었는데 포루스를 소군주로 치부하기엔 무리가 있다. 찬드라굽타[7]도 포루스와 조공이나 복속아닌 대등한 동맹관계를 맺은 것을 보면 포루스의 세력은 북인도의 강력한 군주들도 쉽게 복속시키지 못할 정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알렉산더의 영향력이 미친 지역은 변경까지는 아니고 오히려 인도문명의 시작점이자 핵심지대인 인더스강 유역이다.
알렉산드로스의 제국 건설은 오히려 키루스 2세가 행했던 페르시아 제국 건설에 비해 면적은 넓으나 위대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페르시아를 건설했던 키루스 2세는 메디아, 리디아, 신 바빌로니아, 박트리아 등등 주변이 적국으로 둘러싸인 상황에서 어떤 나라 할 것 없이 치열한 저항과 부딪쳐나가며 제국을 확장시켰고, 알렉산드로스처럼 적군 최종보스 몇몇을 쓰러뜨려 복속시키는 것만으로 제국령을 확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알렉산드로스 본인조차도 키루스 2세의 무덤 앞에 나아가 그의 용맹에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
위에서 이미 언급했지만 역사상 대확장을 이뤄낸 정복자나 제국은 가만히 살펴보면 대부분 다른 강력한 세력의 쇠퇴와 맞물린 덕을 크든 적든 봤기 때문에 알렉산드로스가 날로 먹은 것마냥 강조하는건 어폐가 크다. 페르시아의 확장도 이집트, 바빌로니아, 리디아 등의 오랜 경쟁을 틈타 이루어낸 것이며 이슬람 제국도 사산과 동로마의 오랜 전쟁의 덕을 봤다. 원래 알렉산드로스가 오랫동안 서구의 동방에 대한 정복과 우위의 상징으로 쓰이다보니 이에 반감을 가진 자들에 의해 날로 먹었다는 식의 서술이 인터넷에서 자주 보이곤 하는데, 가우가멜라 이수스 히다스페스 이 3개 전투가 워낙 유명해서 하도 많이 언급되다보니 '아 꼴랑 회전 몇판으로 먹었구나' 하고 '''오해'''가 일어난 것이지 실제로는 저 대회전들 말고도 공성전에 산악전에 유목민과의 전투까지 다 치루면서 이루어진 정복이다.[8] 결론은 꼴랑 회전 몇판이 아니라 '''수십판'''을 치뤘으며 설령 몇판이라 해도 이수스와 가우가멜라 둘다 3배 이상의 적과 싸웠는데그걸 이기는건 쉬운 일이란 말인가?
차라리 키루스 2세와 공정한 비교를 위해서는 키루스 2세가 건설한 페르시아 제국은 수백 년을 갔으며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했으나. 헬레니즘 제국은 알렉산드로스 3세가 죽는 그 즉시 분열이 예정되어 있었다는 것이 차리리 적당하다. 알렉산드로스는 요절했고 자식도 없었다는 것이 크긴 하겠으나 통치 능력 이상의 너무 넓은 땅을 정복했고 통치를 도울 관료집단도 부족했으며, 중앙집권체제 구축 또한 실패했다. 무엇보다 알렉산드로스 본인이 내치에 전혀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모든 정복이 날림화되었다. 알렉산드로스 생전에야 자신의 군사적 재능과 카리스마로 어찌어찌 유지할 수 있었을지 몰라도 알렉산드로스의 뒤를 이은 왕이 알렉산드로스와 비견될 정도의 군사적, 정치적 재능이 있지 않고서야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분열하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요약하면 알렉산드로스에게는 페르시아의 키루스 2세나 아버지 필리포스 2세처럼 정치적 재능이 없었고, 관심도 없었다고 할 수 있겠다. 필리포스 2세는 정치적 능력이 출중했고, 능력 이상의 목표 달성에 집착하지도 않았다. 필리포스 2세가 정치적 능력이 부족했다면,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코린토스 동맹에 강제 가입시키지 않고 직접 통치했을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그것이 마케도니아 왕국의 능력 밖이었기 때문이다. 지배와 파괴는 엄연히 다른 영역이다. 육가한고조에게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을 수는 있지만, 말 위에서 어찌 천하를 다스리겠습니까?’ 라고 말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위 문단에도 반론을 하자면, 다음과 같다. 알렉산드로스 3세가 정복지들을 직할통치하고, 필리포스 2세그리스의 여러 폴리스들을 간접통치한 것은 정치적으로 유능하거나 무능해서 그런 게 아니다. 당시의 그리스는 수많은 도시국가로 나뉘어있어서 직할통치하기엔 상당히 곤란했다. 자치권을 뺏는 순간, 도시들이 정복자를 자신들의 압제자로 보아서 맹렬히 저항하기 때문에도 있고, 불과 얼마 전까지 서로 소 닭보듯 관심도 없어하던 이들과 쉽게 하나의 체제 하에서 화합을 이룰 수 있을 리도 만무하다.[9] 하지만, 알렉산드로스 3세가 정복한 곳들은 대부분이 이미 단일한 국가로 묶인 지 오래된 곳들이었다. 그래서 이곳들은 직접 멸망시켜서 직할통치하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어떤 식으로든 정복지의 백성들과 정복군주가 항상 함께함을 보여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10] 그리고 위에서 알렉산드로스 3세가 정치적으로 무능하다고 했는데, 그건 그가 너무 젊은 나이에 죽어서 그가 이렇다할 행정적인 업적을 남기지 못한 것을 오해한 탓이 크다. 이론의 여지는 있지만, 정복에 참여한 그리스인 장군들을 현지의 왕족이나 귀족과 결혼시켜서 각 민족들과의 화합을 도모하거나[11], 그리스 문화권에 속한 펠라에서 메소포타미아바빌론으로 천도하고 정복지 곳곳에 알렉산드리아라는 이름의 계획도시를 건설하는 등[12], 정복지 주민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편입시키려고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단지 너무 일찍 죽어서 그 성과를 보지 못한 게 문제일 뿐이다.[13] 그래서 주류 역사학계도 그가 오래 살았다면 제국이 더 오래 존속했으리라고 보고 있다.
결국 페르시아를 건설한 키루스 2세와 달리 알렉산드로스의 군사력에 의한 통합은 일시적이었기에[14], 알렉산드로스 대왕 개인이 사망한 이후 그 가족과 후계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부하인 장군들은 곧바로 땅따먹기에 돌입하였고 제국은 헬레니즘 문화 즉, 마케도니아의 카산드로스 왕조를 멸망시킨 안티고노스 왕조, 트라키아의 리시마코스 왕조, 시리아-이란셀레우코스 왕조, 이집트프톨레마이오스 왕조로 분열되었다. 그 뒤로는 더욱 잘게 분열하거나 왕조가 교체되거나 했으며, 크게 프톨레마이오스와 셀레우코스의 양강 구도가 정착되었다.
헬레니즘 제국은 알렉산드로스 3세가 죽고 분열되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사망 당시 장성한 자식도 없었고 너무 넓은 땅을 정복했을 뿐더러 통치를 도울 관료집단도 부족했으며, 체제 구축 또한 실패했다. 정복에 참여한 그리스인 장군들을 현지의 왕족이나 귀족과 결혼시켜서 각 민족들과의 화합을 도모하거나[15], 그리스 문화권에 속한 펠라에서 메소포타미아바빌론으로 천도하고 정복지 곳곳에 알렉산드리아라는 이름의 계획도시를 건설하는 등[16], 정복지 주민들을 편입시키려고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가 생전에 남겨놓은 유산들이 있었기에 디아도코이들이 수백년간 유지된 것이다. 그 자신은 생전에 결과물을 보지 못했지만 그가 시작하거나 진척시킨 신도시,사업 등은 디아도코이들이 계승하였고 이를통해 중동과 중앙아시아 각지의 그리스계 왕조들이 헬레니즘을 꽃피웠다.
정리하자면 비록 통일 제국 자체는 알렉산드로스 본인 1대로 끝났지만 그의 유산인 디아도코이 시대는 '''수백년''' 간 이어지며 헬레니즘을 꽃피우며 저 멀리 동쪽 끝 한반도의 신라라는 나라에까지 영향을 주게 된다. 바로 '''석굴암'''

2.2. 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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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사망한 이후 그 가족과 후계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부하인 장군들은 곧바로 영토를 차지하였고 제국은 마케도니아의 카산드로스 왕조를 멸망시킨 안티고노스 왕조, 트라키아리시마코스 왕조, 시리아-이란셀레우코스 왕조, 이집트프톨레마이오스 왕조로 분열되었다. 그 뒤로는 더욱 잘게 분열하거나 왕조가 교체되었으며, 크게 프톨레마이오스와 셀레우코스의 대립 구도가 정착되었다.
유럽(마케도니아)의 안티고노스 왕조, 아시아(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 아프리카(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모두 로마에 병합된다. 디아도코이 시대는 수백년간 지속되어 알렉산드로스 제국은 금방 분열되고 직계왕통도 끊어졌지만, 그의 후계 국가들인 그리스계 정복왕조들은 계속 이어졌다.

2.3. 멸망


이후 헬레니즘 왕국의 지배층의 군사력을 유지시켜주던 그리스-마케도니아의 이주 인구가 급격히 줄어들게 되었다. 헬레니즘 왕국은 그리스 민족이 지배층을 차지하였는데, 지배관료가 될 그리스 지식인도, 군사력을 담당할 그리스 용병도 줄어들면서 헬레니즘 왕국들은 위기에 봉착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등은 토착민을 기용하거나 켈트족 등 다른 용병을 써서 해결하려 했지만 그리스 인의 배타적인 우위권을 놓고 정치적 마찰을 불러오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지중해 동부의 그리스 식민지들은 로마에게 정복당하고, 페르시아 지역에 있던 식민지들은 파르티아에 병합당하여 기원전까지 그리스-마케도니아계 국가들은 모두 사라지게 되었다. 한 때 제국을 건설했던 그리스 인은 로마 제국파르티아의 지배 아래 들어가게 되는데, 동방으로 이주했던 그리스인은 서서히 정체성을 상실하고 동화되어 사라진다.
가장 동방에 위치한, 인도로 이주한 박트리아인도-그리스 왕국의 그리스 인들 역시 오랜 기간 동안 왕조를 유지하면서 영향력을 발휘했지만, 불교로 개종하고 소수의 그리스인이 인도 토착민 사회에 동화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서서히 소멸하게 된다.

3. 통치


헬레니즘 제국의 통치는 기본적으로 마케도니아 '그리스인 왕조'에 의해서 이루어졌다[17]. 오늘날 북마케도니아와는 혈연적, 언어적으로 아무 상관이 없다.[18] 그리스인은 헬레니즘 시대에 제국 각지로 이주하였다. 그들이 고향에서 살던 폴리스와 마찬가지로 군데군데 그리스 인의 식민지 도시를 건설하였다. 그리스 인 식민 도시는 신전, 운동장 등 전형적인 그리스식 문화 시설이 들어섰다.
이 그리스계 식민 도시들을 중심으로 헬레니즘 제국의 통치가 이루어졌으며, 제국의 인재풀은 주로 그리스인이었다. 그리스인은 역시 그리스인들이 왕조를 이어가는 헬레니즘 제국의 왕의 신하이자 그들의 조언자, 지지자로서 통치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왕의 측근으로서 왕의 통치를 보좌하는 이들은 "왕의 친구"라 불렸다.
또 헬레니즘 제국의 왕들은 그리스 인 이외의 민족에게는 그들의 전통과 문화를 존중하여 통치하였다. 이런 이중적인 구조의 대표적인 사례는 이집트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이다. 이들은 알렉산드리아그리스인들의 대표자이기도 했지만, 이집트에서는 이집트 전통의 파라오로서 이집트인을 다스렸다.

4. 관련 문서



5. 역사보기 틀





[1] 베르기나의 태양 문장으로, 마케도니아 왕국 시대부터 주요한 상징으로 쓰였다.[2] 사진의 구석탱이에 이탈리아 반도에 하늘색으로 색칠된 국가가 바로 훗날 '''헬레니즘을 몰락시키고 유럽 전체를 지배하는 제국으로 성장하는''' '''로마 공화국이며 북아프리카쪽의 보라색이 그때 당시 한창 세력을 과시하며 북아프리카이베리아 반도와 더불어서 지중해의 상당한 부분을 석권하고 있던 고대 카르타고이다.'''[3] 카산드로스 왕조 후에 창건[4] 참고로 알렉산드로스 제국은 정복 이후 내치 및 수성의 시기가 없었고 단지 점령만 했을 뿐이다. 알렉산드로스 제국을 제외한 모든 영토상 대제국들은 정복기간이 끝난후 수성 및 내치를 통해 영토의 안정을 꾀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정복 직후 알렉산드로스 3세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면서 그의 제국은 그런 내치의 시대를 갖질 못했으며 이는 알렉산드로스 3세 휘하의 장군들이 서로 제국을 갈라먹는 원인이 된다. 또한 역사부도 같은 책에 나와있는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지도를 보면 아케메네스 제국의 지도와 달리 군데군데 통치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 많은데 이 역시 알렉산드로스 사후 제국이 온전하게 내치의 시대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현상이다. 그러나 단일제국 자체는 분열 되었어도 분열된 후손인 디아도코이들이 길게는 300년이나 존속하며 그리스계 정복왕조의 역사를 이어나간다.[5] 그러나 이는 따지고 보면 페르시아 제국도 마찬가지다. 아니 몽골 제국, 대영 제국, 로마 제국, 청나라,이슬람 제국, 심지어 현대의 미국까지 강력했던 대제국들은 모두 다 마찬가지다. 즉, 의미없는 소리다.[6] 히다스페스 전투에서 마케도니아군의 손실은 1000명가량, 포루스군은 12000명에서 20000명까지 손실을 입을 정도로 교환비 자체는 압도적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높은 교환비로 이기기 위한 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사실 인도의 정글에서 스콜과 독충, 엄청난 더위와 습기에 시달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지옥이었다.[7] 인도 최초의 통일 왕조인 마우리아 왕조의 시조. 사실상 통일은 그의 손자인 아소카 왕 때의 일이나, 찬드라굽타가 통일의 기반을 거의 이루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소카 왕은 그저 조부의 강성한 기반을 잘 이용한 것뿐이다. 아소카와 시황제가 그저 조부의 기반을 잘 이용하기만 했다는 평가는 두 대왕을 너무나도 깎아내리는 평가이다. 이 논지가 성립한다면 알렉산드로스역시 필리포스의 기반을 잘 이용했을 따름이 된다.[8] 키루스 2세가 아프가니스탄 원정 도중에 전사했다는 기록도 있으며, 알렉산드로스 역시 이 지역에서 엄청난 고전을 치러야 했다.[9] 후대에 프랑스신성 로마 제국, 스페인 등의 여러 쟁쟁한 강대국들이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을 침공했지만, 끝내 직할통치는 하지도 않았던 이유를 생각해보자. 당대에 쓰여진 니콜로 마키아벨리군주론에서도 도시를 몽땅 불사르는 것 말고는 직할통치는 불가능하다고 나온 바 있다.[10] 그리고 그리스폴리스들은 알렉산드로스 3세의 치세에도 자치권을 그대로 인정받았다. 직할통치가 어려운 곳은 간접적인 통치를 해서 자연스럽게 마케도니아 왕국에 융화되도록 했다. 일례로 대대로 전제 군주들이 통치하던 한 폴리스의 경우, 알렉산드로스 본인이 그 도시의 여왕의 양자로 들어가서 합법적으로 계승권을 인정받는 식으로 평화롭게 합병했다.[11] 심지어 알렉산드로스 3세 본인도 이 과정에서 박트리아 귀족의 딸을 왕후로 맞았다.[12] 가장 유명한 곳은 이집트알렉산드리아.[13] 애초에 그의 스승으로 유명한 사람 중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있었다. 당연히 이 정도로 상당한 수준의 정치 교육을 받은 사람이 제대로 된 통치를 할 줄 모를 리 없다.[14] 위에서 언급했듯이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너무 일찍 죽은 게 원인이었다.[15] 심지어 알렉산드로스 3세 본인도 이 과정에서 박트리아 귀족의 딸을 왕후로 맞았다.[16] 가장 유명한 곳은 이집트알렉산드리아.[17] 고고학을 통해 고증한 바에 의하면 고대 마케도니아인은 원래부터 그리스인과는 같은 민족이었건, 사촌뻘 되는 민족이었건 매우 가까운 족속이었다고 한다. 현대 마케도니아인들이 알렉산더 대왕을 자국인이라고 주장하는 걸 그리스인들은 헛소리로 취급하며 싫어한다.[18] 현재의 마케도니아 공화국에 슬라브인들이 들어온것은 헬레니즘 제국이 멸망하고도 1000여 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 그래서 한때 그리스와 북마케도니아 사이에 마케도니아 왕국을 두고 신경전이 거셌고, 1991년에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에서 독립한 마케도니아 공화국이 세워질 때 그리스에서는 크게 반발했다.(그리스-마케도니아 분쟁) 2019년에 이 분쟁은 마케도니아 공화국이 북마케도니아라는 칭호를 쓰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으나 일부 그리스인들은 "'북'마케도니아도 안된다"면서 반발하고, '북'마케도니아서도 "왜 우리가 그리스한테 양보하냐"면서 불만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