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틴 페렌바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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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네임'''
'''Constantin Fehrenbach''' (콘스탄틴 페렌바흐[1])
'''출신 정당'''
가톨릭 중앙당
'''생몰년'''
1852년 1월 11일 ~ 1926년 3월 26일
'''재임기간'''
1920년 6월 25일 ~ 1921년 5월 10일
1. 개요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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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앙당을 이끈 주요 정치인으로 바이마르 공화국의 총리와 국회 의장을 역임했다.

2. 생애


1852년 바덴 지역에서 출생하여 법학신학을 전공한 이후 형사 전문 변호사로 활동한다. 이후 중앙당에 입당하여 바덴 주의회(Landtag) 의원으로 선출됐으며, 탁월했던 연설능력을 바탕으로 1903년에는 제국의회에 진출하는데 성공한다. 1차대전 말엽에 연합국과의 협상을 촉구하기도 했던 페렌바흐는 독일 제국의 붕괴 이후 정치적으로 무척 혼란한 상황 속에서도 조용하면서도 탁월한 협상 능력을 보여주면서 주요 정치인 중 하나[2]로 빠르게 부상한다.
1920년 6월, 베르사유 조약의 가혹한 조건을 무기력하게 추인하면서 대중들의 분노를 산 사민당헤르만 뮐러 내각이 붕괴된 이후 중앙당은 중도 우파 계열인 독일인민당과의 연정을 구성하였고, 페렌바흐가 총리로 취임하게 된다.[3] 총리로서 페렌바흐는 연합국과의 협상을 통해 배상금 감축을 시도하는 한편, 당시 독일 내에서 급증하던 실업자들에 대한 사회복지 정책을 실시하면서 전후의 혼란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렇지만 여전히 원내에서 제1당으로 남아있던 사민당이 페렌바흐의 국정 운영에 발목을 잡은 데다가, 1921년이 되면 연정 파트너 독일 인민당 마저도 베르사유 조약에 따른 전쟁 배상금 지불 이행 문제를 놓고 중앙당과 사이가 멀어지게 된다. 여기에 연합국은 프랑스의 강경한 반발로 인해 전쟁 배상금을 감축시켜주는데 여전히 미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연합국과의 협상에 실패한 페렌바흐 내각은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1,320억 금 마르크를 최종 지불액으로 확정지어줄 것을 의회에 요청했지만, 1921년 5월 제국의회는 압도적인 표차이로 이를 부결시켰고 결국 5월 4일에 페렌바흐는 사퇴하고 만다.
사퇴 이후에도 페렌바흐는 중앙당의 주요 간부 중 한 명으로 남아있는 한편[4], 헌법재판소의 판사로 재직하면서 당시 사회에서 만연히 퍼지던 반유대주의를 억누르는 활동에도 활발히 참가하다가 1926년 고향 바덴프라이부르크에서 사망한다.

[1] Konstantin이라고 쓰기도 한다.[2] 독일 제국 의회의 마지막 의장이자, 신생 바이마르 공화국 제헌의회의 의장으로 재임한다.[3] 여담으로 페렌바흐 내각은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최초로 사민당이 연정에서 제외된 내각이다.[4] 자신의 뒤를 이은 후임 총리 요제프 비르트 정부의 후원자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