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사유 조약
그 조약은 확실히 공개적이었다. 여러 서명국에서 비준 논의에 들어가기 전에 조약 내용을 일반에 낱낱이 공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조약 내용 자체는 결코 ‘공개적으로’ 수립되지 않았다. 역사상 그 어떤 협상도 그처럼 철저한 비밀에 싸인 신비의 과정이 아니었다. 윌슨, 로이드 조지, 클레망소가 밀실에서 마주앉아 있는 동안 완전무장한 미군은 각국의 전문가, 외교관, 심지어 대통령 외의 미국 대표단까지도 그 자리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철통 같은 경계를 펼치고 있었다.
- 해럴드 니컬슨[1]
화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징벌적이었고, 독일의 회복을 막기에는 지나치게 관대했다.(Too punitive for conciliation, too lenient to keep Germany from recovering)
- 헨리 키신저
1882년 한미조약을 체결할 때에 누가 휴지로 쓸 생각이나 하였겠냐마는 왜놈이 휴지로 썼고, 1856년 파리조약 할 때에 누가 휴지로 쓸 꿈이나 꾸었으리오마는 러시아가 휴지로 썼은즉, 소위 평화조약은 일변 휴지로 쓰며 일변 만드는 것이요, 억만세 무궁토록 두어두고 쓰는 것은 아니로다.
-1919년 7월 8일, 한인신문 신한민보에 익명으로 투고된 사설 세계평화에 대하야, 조약을 휴지로 쓰려,[2]
1. 개요
'''베르사유 조약 / Treaty of Versailles'''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파리 강화 회의에서 승전국들, 특히 프랑스 제3공화국이 패전국 '''독일 제국에서 이어진 바이마르 공화국을 재기 불능으로 만들기 위해 무자비하게 뜯어내려 한 조약'''이자 동시에 '''평화를 위해 만들었으나 실상은 또 다른 전쟁을 일으킨 조약'''이기도 하다.
그 골자는 엄청난 양의 보상금과 바이마르 공화국의 무장해제(최소한도로 필요한 군사력만 보유 가능)를 골자로 하는 것으로, 1차 대전 동안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은 영국과 프랑스 제3공화국 등이 주축이 되어 이뤄졌다.
1919년 6월 28일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체결되었다. 이로 인해 변화된 세계질서를 '베르사유 체제'라고 한다. 그러나 이 가혹하면서 동시에 유약한 조약은 결국 '''제2차 세계 대전이라는 새로운 광풍(狂風)을 불러오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3]
2. 발단
1918년 9월 독일 군부가 사실상 패전을 내각에 알리고 11월 11일 휴전이 성립되었다. 협상국은 독일의 휴전 요청을 사실상 항복으로 간주하고 독일 제국군을 뒤쫓아 독일 국경을 돌파해 라인강 지역까지 추격하고 영국 해군은 휴전 후 협상조건을 관철시키기 위해 독일 항구에 기뢰를 매설했다. 1919년 초부터 본격적인 협상인 줄 알았는데 훼이크고 사실상 항복 후 요구조건을 명령하고 관철시킨 것.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는 반발했지만 이미 반항할 여건이 안 된다는 판단 하에 수용한다.[4] 승리한 협상국은 바이마르 공화국을 '씨가 마를 때까지' 쥐어짜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 원래 베르사유 조약의 배상금은 전장이 되었던 벨기에와 프랑스의 주민들에 대한 피해 배상이었다. 그러나 프랑스가 '협상국 군대의 군사적 손실에 대해서도 배상할 것.'이라고 나서면서 '''300억 마르크가 2000억 마르크 대로 치솟게 되었다.''' 한편 우드로 윌슨은 자신의 이상인 국제연맹을 현실화할 가능성을 이 베르사유 조약에서 엿보았고, 결국 조약의 첫 조항은 국제연맹에 대한 것이 되었다. 하지만 국제연맹 문서에서 보듯 현실은 시궁창.
3. 내용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
- 전쟁에 대한 모든 책임은 바이마르 공화국을 비롯한 동맹국에 있으며 황제와 군부 핵심 인사를 포함한 전범 800명을 인도할 것.[5]
- 알자스-로렌 지방을 프랑스에 양도할 것, 모든 식민지를 포기할 것.
- 벨기에에 오이펜-말메디, 폴란드에 포젠, 서프로이센을 양도할 것, 덴마크 접경 슐레스비히 북부, 폴란드 접경 상슐레지엔 및 동프로이센 남부는 즉시 주민 투표로. 프-독 접경지대 자르 분지 지역의 탄광권을 15년 동안 프랑스에 넘기고 국제 연맹의 보호령으로 만들고 15년 후 국민투표로 귀속을 결정할 것, 독일계 주민이 많은 단치히는 국제연맹 자유도시로 정할 것.(단치히 자유시)[6]
- 라인강 이서(以西) 지역 전부와 라인강 동쪽 60킬로미터 지역을 비무장지대로 하고 병력 배치를 금지[7]
- 20년 안에 1,320억 마르크를 '금 으로'갚을 것[8][9]
- 육군의 규모를 10만 명으로 제한하며 징병은 금지한다.
- 바이마르 공화국은 대포 5,000 문과 비행기 25,000대를 양도한다.
- 전차, 전투기(를 포함한 항공 전력 전부) 등 최신 무기의 보유를 일체 금지한다.
- 해군의 병력은 1만 5천, 군함은 경순양함 6척, 구축함 12척, 노후 배수량 1만 톤 이하의 전함 6척으로 제한한다. 잠수함도 금지.
- 사관학교 폐지 참모본부도 폐지[10]
-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독일어권 국가들과 다시는 연합하지 말 것.[11]
- 패전국에서 독립한 국가에서 패전국으로 수출하는 물건에 대해서, 패전국은 그 물건의 수입을 거부할 수 없으며, 무관세로 수입해야 한다. 반대로 패전국이 독립한 국가로 물건을 수출할 때에는 독립국은 패전국산 물건에 대해서 수입 관세를 부과할 수 있다.
- 이 조항에 반발한 바이마르 공화국이 1925년 독일-폴란드 무역 전쟁을 일으킨다.
다른 패전국 사이에서도
이 줄지어 체결되었다.
모두 비슷하게 영토 할양과 제국 해체, 군비 제한 등의 내용이다.
1,320억 마르크는 전쟁으로 재정이 피폐해진 바이마르 공화국으로써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금액으로, 영국 재무성을 대표하여 참가한 존 메이너드 케인스를 비롯 협상에 참여했던 경제학자들이 산출한 바이마르 공화국의 지불 가능액 20억 달러(= 약 100억 마르크)의 13배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이렇게 무리한 금액을 요구한 이유는 앞서 언급한 바이마르 공화국의 재기 불능을 위한 것이 가장 컸지만 전쟁으로 인한 부채 상환과도 관련이 있다. 전쟁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진 부채, 특히 미국으로부터 진 부채를 상환하기 위해 바이마르 공화국을 쥐어짜려 한 것이다. 한 마디로 바이마르 공화국을 영원히 구제금융 국가, 부채국가로 만들겠다는 속셈인데, 이렇게 지나치게 가혹한 조약을 강요한 것은 복수심에 불탄 군부가 아니라 냉철해야 할 '''정치인들'''이었다. 케인즈는 어차피 바이마르 공화국에 못 받고 영국 프랑스는 바이마르 공화국에 받아봤자 미국에 도로 전쟁 때 얻은 빚을 상환해야 하기 때문에 증오와 정치적 혼란만을 일으킬 바에 아예 배상금을 탕감하자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화가 나서 혼자 귀국해버리고 그 길로 재무부에 사표를 제출하고 『평화의 경제적 귀결』이라는 소책자를 써서 베르사유 조약과 협상국 정치인들을 깠다.[12]
군대의 경우에는 확실하게 통제해야 하므로 세세한 항목까지 설정했다. 그래서 바이마르 공화국은 허락된 10만의 군대를 부사관과 장교 위주로 해서 정예화하고, 전차나 전투기 등의 금지된 무기는 소련과 밀약 하에 소련 영토에서 공동 개발하거나 농업용 트랙터 등으로 위장시켜 개발을 진행했으며, 대공포 등 일부 병기는 조약의 맹점을 이용하여 1차 대전 종전 직전인 1918년에 개발했다고 주장해서 생산 및 개량을 허가받기도 했다.
하지만 협상국의 제한은 어느 정도는 성과를 거두었다. 2차 대전 개전 당시 독일군은 현역 병력은 많으나 예비 병력의 경우 그 숫자도 적고 기초 훈련도 안돼서 노역자 이외에는 써먹을 수 없는데, 이는 군대의 장기간 소규모화에 따른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었다. 군수 공업도 상당기간 묶여 있어서 화포나 전차의 수준도 연합국에 비해 낮았다. 해군의 경우에도 공산 정권이 들어선 소련과 과도한 배상 및 군비 제한을 요구하는 프랑스에 질린 영국 총리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는 드레드노트급 전함이긴 하지만 당시에는 이미 2선으로 물러난 나사우급 전함과 헬골란트급 전함 8척 보유 정도로 끝낼 것을 생각했다. 허나 스캐퍼플로 독일 대양함대 자침 사건으로 화가 난 영국이 드레드노트급 전함의 보유를 금할하고 해군 규모 역시 대폭 축소하면서 독일 해군은 대형함의 건조가 10년간 끊어졌고 이후 해군을 재건할 때 설계한 군함마다 대부분 1차대전 시의 물건에 약간의 개수를 한 형태일 정도로 막대한 지장을 불러왔다. 결국 독일 해군은 건조가 빠르고 비대칭 전력인 잠수함 위주로 해군을 재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나치가 집권해 다시 한 번 전쟁을 벌일 수 있었던 근간이 '''베르사유 조약으로 분노한 독일 국민들''' 때문인 것을 생각하면 프랑스 침공 같은 삽질이 없었더라도 다시 한 번 1차대전급 대전쟁을 만들었을, 결과적으로 그것보다 훨씬 더 큰 피를 불러온 '''엉터리 조약'''이었다.
4. 각국의 반응
만평 # : 우는 아이를 바이마르 공화국으로 보고 가혹한 베르사유 조약에 대한 비판이라는 해석과, 제목인 "peace and future cannon fodder"(평화와 미래의 총알받이)라는 점에 주목하여 장래 새로운 전쟁을 불러일으킬 어정쩡한 베르사유 조약을 비판한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자세히 보면 벽에 기댄 채 우는 아이 위에 '1940 CLASS'라 쓰여 있는데, 실제로도 이 시점에서 어린 아이였던 이들 대다수가 훗날 독일 국방군에 징집되거나 SS에 가입하여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참고로 저기 서 있는 세 명은 각각 영국 대표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David Lloyd George), 당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그리고 프랑스 대표 조르주 클레망소(George Clemenceau)이다. 이 3명은 베르사유 조약 체결 시에 가장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한 세 명으로, 영미권 역사 교과서 등 문서에는 "The Big Three"라는 칭호로 불린다. 이 "The Big Three"라는 칭호는 제2차 세계 대전 때 비슷하게 재연되는데, 2차대전의 전황이 연합국의 승리로 기울었을 때 각각 얄타 회담, 포츠담 회담에서 만난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 이오시프 스탈린,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또는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그 주인공이다.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얄타 회담 때 두 명과 만났으나 포츠담 회담 전에 사망하였고, 그 자리를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가져갔다. 그리고 윈스턴 처칠은 중간에 정권이 바뀌어 얄타 회담 때 본국으로 돌아가야 했고, 그 자리는 클레멘트 애틀리가 매꿨다.
당시 맨 앞에 서 있는 조르주 클레망소는 본국에서도 "The Tiger", 즉 호랑이라는 애칭으로도 불릴 정도로 독일에 대한 복수심이 강했던 정치인이었다. 당시 프랑스 대통령은 클레망소에게 독일을 프로이센 왕국 이전으로, 즉 독일이라는 나라를 1800년대처럼 여러 조그만 왕국으로 쪼개 연합하지 못하게 하도록 지시하려 했으나, 여러 측근들의 설득 끝에 그 요구는 철회했다. 하지만 클레망소 자신도 꽤나 강경한 요구를 들고 나왔는데, 그 중 결국 비무장지대가 된 라인 주위 80-100km 영역에 새로운 국가를 만들어 프랑스와 독일의 직접적인 국경을 없애려는 요구, 단치히를 폴란드에 귀속시키려는 요구 등은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성도 없었고 독일을 전략적으로 써먹고 싶었던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에 의해 제지 되었다. 프랑스는 국민적 감정에 좌우되어 자국 정치인들에게 강경한 요구를 한것인데, 애초에 복수심으로 협상을 하면 안 된다.정치가는 정치를 하면 감정으로 하면 안된다는 기본적인 상식은 물론 이를 강제하려면 민족감정과 적개심으로 가득찬 적대지역에 군대를 장기간 파견하며 통치해야하는데 연합국의 승전국이라도 현실적으로 가능한 조치는 아니었다. 훗날 배상금을 둘러싼 루르 점령에서도 실패할수 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그 뒤로는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가 서 있는데, 당시 영국 여론이 아무리 험악했다고 해도 국토와 국민들이 입은 피해가 프랑스에 비해서 절대적으로 적은 이상 데이비드는 클레망소처럼 아주 강경한 조약은 들고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영국 수뇌부는 독일을 어느 정도 복구시켜 영국 경제 회복에 이바지해 주기를 바랬다는 설도 있다. 일단 전쟁 전에 독일은 영국의 2번째로 중요한 무역국이었고, 그런 국가가 망하면 안 그래도 전쟁으로 여러 문제가 발생한 영국 경제에 도움을 주긴커녕 전쟁 전보다도 못할 정도로 되돌아갈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었다.[13] 또한, 데이비드는 한창 불안해지고 있던 소비에트 러시아와 근접한 독일을 경제적으로 살려 공산주의의 팽창을 막을 배리어로 쓴다는 계획도 생각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 모두가 알다시피 영국은 프랑스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프랑스가 독일로부터 엄청난 보상을 받을 터인데 영국 입장에서는 프랑스가 강력해지는 것도 딱히 바랄 일 없다는 것은 데이비드가 프랑스의 것보다 덜 강경한 조약을 들고 나온 또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다.
멀대 같이(...) 키가 큰 사람은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인데, 윌슨주의로 유명한 미국식 이상주의자로, 전제군주제와 가톨릭 독재가 전쟁을 야기한다고 생각하여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비롯한 중부 유럽의 제국을 해체하고 수십개의 단일 민족 공화국으로 유럽을 분할하면 민주주의 국가들 간의 공조로 더 이상 전쟁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였기 때문에 동맹국에 항복 조건으로 전제군주제 해체를 요구한 바 있다. 하지만 정치체제 변혁을 제외한 부분에서 독일을 심하게 대하면 나중에 다른 분쟁의 도화선이 될 수 있다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생각을 하고 14개조 평화 원칙을 공표한다. 하지만 그 중 항해의 자유와 민족자결주의, 국가간 비밀 조약 폐기 등의 이상주의적인 조항은 당시 해양 강국으로 이름을 떨치던 영국의 심기를 건드려 결국 통과되지 못했다. 우드로 윌슨은 그나마 독일을 살살 대하자고 하던 사람이었고, 국제연맹도 사실상 그의 14개조 평화 원칙 중 통과된 얼마 안 되는 조항 중의 하나다. 하지만 결국 미국 상원이 미국의 국제연맹 가입을 저지하고 고립주의 노선으로 갈아타는 바람에 결국 미국은 국제연맹 아이디어를 내고도 참가하지 못하게 되었다(...). 국제연맹은 1929년까진 이런저런 분쟁들을 꽤나 잘 해결했는데, 1929년 대공황 이후 여러 국가가 민족주의와 제국주의, 팽창주의 노선을 타면서 사실상 1930년대 중반에는 본디 목적을 상실했다. 역사에 만약이란 없지만, 만약 미국이 국제연맹에 참가했었다면 제2차 세계 대전에 관한 역사가 많이 바뀌었을 지도 모른다. 사실 미국의 부재가 국제연맹이 반쪽 짜리로 남아있던 큰 이유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웃긴 사실이 하나 있는데, 제1차 세계 대전 중 독일이 확실히 수세에 몰렸을 때쯤(종전 몇 개월 전) 우드로 윌슨은 독일에게 14개조 평화 원칙에 따른 평화 협정을 제시했으나 독일은 거절했다. 그런데 정작 베르사유 조약 체결 때 많은 독일인들은 복수심에 눈이 반쯤 돌아간 프랑스와 화가 잔뜩 난 영국을 보고 데꿀멍한 직후 우드로 윌슨의 14개조 평화 원칙에 따른 평화 협정을 기대했다. 하지만 베르사유 조약은 꽤나 강경했고, 사실상 영국과 프랑스가 조약의 대부분을 작성했다. 아무래도 미국은 피해도 적게 입은 데다 본토에 공격은 전혀 받지 않았으니.
상위 세 명에 대한 정보 출처는 영국 옥스퍼드 Oxford University Press 에서 편찬한 GCSE 역사 "20th Century History for Cambridge IGCSE"[14] 와 헨리 키신저가 집필한 <세계질서>에 있다.
사실 전후 회담에 참석한 국가 정상은 저 위의 세 명 외에 한 명이 더 있는데 바로 이탈리아의 비토리오 올란도 총리이다. 위의 그림에서는 백발에 콧수염을 기르고 맨 뒤에 서있다. 원래는 The Big Three가 아니라 The Big Four라고 하는 쪽이 옳으며 1차대전에 대해서는 그렇게 서술한 쪽이 더 많다. 이쪽은 독일에는 별 관심이 없고 1915년에 삼국 동맹에서 편을 바꾸면서 영국과 맺은 런던 밀약에 따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소유한 미수복 이탈리아 지역(쥐트티롤, 달마티아 등)을 요구하러 왔다. 그러나 이탈리아가 1차대전에 기여한 바가 적기도 했고 영국과 프랑스가 유고슬라비아에 힘을 실어주기로 결정하고 무엇보다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조약의 당사자도 아니었을 뿐더러 그의 이상주의적 원칙에 입각해 비밀 조약과 같은 것을 극도로 혐오했기에 이탈리아의 주장은 완전히 묵살되며 이스트리아 반도와 쥐트티롤은 챙겼지만 결국 달마티아는 유고슬라비아가 들고 갔다. 이에 올란도 총리는 회의장을 뛰쳐나가는 것으로 분노를 표현했지만 바뀌는 건 없었고 귀국 후 고국에서 엄청난 비난을 받으며 실각했다. 승리에도 불구하고 받아야 할 영토를 빼앗겼다고 생각한 이탈리아 국민들은 분노했고 이는 이후 베니토 무솔리니가 권력을 잡는 원동력이 되었다.
4.1. 너무 가혹하다
당시 영국 대표단의 일원이자 재무성의 일원이었던 케인스가 ''''(연합국 지도자들의) 역겨운 언행을 참을 수 없다''''면서 사표를 던졌다. 그리고 직후 펴낸 소책자 '평화의 경제적 귀결'에서 케인스는 전쟁배상금 개념 자체를 비난했다. 나중에는 '''"이제 남은 것은 전쟁뿐"'''이라는 말까지 했다. '''그리고 케인스는 옳았다.'''
동료 승전국인 미국에서도 이건 너무하다는 의견이 나올 정도였다. 당시 영국군 총사령관 더글러스 헤이그도 '''"바이마르 공화국에게 불필요한 굴욕을 주어 그들이 복수할 마음을 품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프랑스와 벨기에는 바이마르 공화국과 현물배상액 가치 평가에 이견을 보이자 채무 불이행으로 간주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라인강을 넘어 바이마르 공화국 경제 심장부 루르 지역을 침략했다. 군대를 동원하여 생산수단 볼모정책이라고 불리는 일련의 조치를 시행하는데, 철도와 광산을 점령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액수의 상환액이 채워질 때까지 무상으로 양도할 것을 강요했지만 독일 노동자들은 동맹파업으로 맞섰고 바이마르 정부에서도 못 본 체 했다. 이 과정에서 철도를 파괴하고 프랑스-벨기에군에 사보타주한 죄목으로 독일 민간인을 군사 재판으로 처형하자 미국, 영국은 물론 프랑스 국내에서도 비판 여론이 쏟아졌다. 채무불이행을 근거로 군대를 동원하여 타국을 침략하고, 점령지에서 평시에 민간인을 군사 재판으로 총살하는 것은 승전국이 좋아하는 국제법이나 정의는 밥말아먹은 행위였다.[15] 결국 프랑스-벨기에군은 국제 여론의 질타를 견디지 못하고 본전도 못 찾은 채 철수하고 만다. 이를 계기로 독일 민중 사이에선 베르사유 조약과 승전국에 대한 적개심이 돌이킬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고 결과적으로 나치와 같은 극단주의 세력의 발호에 영향을 주게 된다.
4.2. 충분치 않다
프랑스의 경우 연합군 총사령관 페르디낭 포슈 장군은 조약 내용이 '''너무 관대하다면서''' "세상에 이런 평화가 어디 있는가.이것은 단지 20년간의 휴전 협정일 뿐이다라고 분노를 터트렸다. 포슈가 미래를 내다본 훌륭한 전략적 안목의 실례다.[16]
포슈는 프랑스가 알자스-로렌을 돌려받았으나 실상 1차 대전 이전의 빈약한 상태와 달라진 게 없다는 점을 통찰했고, 바이마르 공화국의 라인란트를 프랑스가 점유하지 않는 이상 프랑스와 바이마르 공화국이 1:1로 싸울 수 없다는 점과 라인란트 대신 협상국에서 내세운 영국과 미국과의 동맹이 허상에 불구하다는 점과 더불어 베르사유 조약의 독일군에 대한 제약이 허접한 수준임도 통찰했다. 즉, 20년 전부터 나치 독일의 재무장과 프랑스 침공의 결과를 어느 정도 들여다봤다는 소리. 한동안 국내에서는 포슈의 '20년 휴전' 발언을 "협상국 내부에서조차 베르사유 조약이 바이마르 공화국에게 너무 가혹했다는 비판이 많았다"는 사례로 인용되었는데, 실제 포슈의 의도를 완전히 잘못 해석한 셈. 덤으로 호랑이가 별명이었던 조르주 클레망소 총리는 그 본인이 베르사유 강화 회의의 의장으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약 내용이 '관대하게 망가지는 것을 손 놓고 보고만 있었다'는 이유로 실각하는 등 프랑스는 독일의 전쟁 수행력을 결단내는 데에 실패했다는 사실에 낙담하고 있었다.
사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전쟁 수행 능력을 결딴내려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17] 과 오스만 제국[18] 이 당한 것처럼 나라를 몇 개로 나눠버리는 게 가장 좋기는 한데[19]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는 이른바 '라인 강 이서(以西) 공화국' 등의 건국을 추진하였으나, 정부 수반에 대한 독일 민족주의자들의 테러 등으로 실패한다. 바이에른은 뮌헨에서 공산 봉기가 있었지만... 애초에 프랑스의 주장은 프랑스 인구는 3900만밖에 안 되고 독일은 6000만이 넘으니 1000만은 떼서 독립시켜 놓고 완충지대 역할을 하자는 것.
그러나 바이마르 공화국은 분단되지 않았고, 비록 패전 후 막대한 배상금과 영토 할양이라는 굴욕을 맞이하였으나 여전히 광대한 영토와 인구, 그리고 제국 때 양성한 과학, 기술, 인재들이 존재하였기 때문에 언제든지 부흥할 수 있는 여력이 있었다. 실제로 식민지 착취와 강매로 이루어지는 경제 구조를 가져 국력 향상에 한계가 있는 연합국에 비해,[20] 바이마르 공화국은 비스마르크 시절부터 내수와 기술 발전 위주의 경제 구조를 유지하면서 20년 뒤 다시 한 번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국력을 가지게 된다. 또한 이와는 별도로, (대전의 청산으로는 애매했지만) '독일 입장에서는' 지나칠 정도로 가혹한 협상국의 조건은 외세에 대한 강한 반발심과 증오를 가져와 독일 국민들이 히틀러를 지지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5. 사후 수습 - 배상금 경감
결국 미국이 나서서 대규모 재건 계획을 시행하면서 바이마르 공화국을 달랬고, 후에 캘빈 쿨리지 정권에 이르러서는 '도스 안(Dawes Plan)'이라는 것을 내놓아 독일의 배상금을 경감시켜주기도 하였다. 협상국이 자비를 베푼 것.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하자면 1921년 4월 27일 런던에서 배상금을 66억 파운드(= 320억 달러 = '''1320억 마르크''')[21] 로 확정하고, 1924년 도스 안과 1929년 '영 안(Young Plan)'을 통해 조정되었다.[22]
그 내용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경제 상황을 고려하여 8억 마르크의 차관을 빌려주고 순차적으로 첫해 10억 마르크에서 시작해 매해 20억~25억 마르크(= 4.73억 달러) 전후한 금액을 59년간 갚도록 책정했다.(이렇게 하면 1210억 마르크가 된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실제적으로는 매해 10억 마르크대를 납부했고 이를 제안한 찰스 도스(Charles Dawes)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한다. 그리고 이즈음 바이마르 공화국이 국제연맹에 복귀한다. 이렇게 베르사유 체제는 점점 안정되는 것처럼 보였는데...
6. 조약의 파기
그러나 이후 벌어진 세계 대공황으로 인해 바이마르 공화국은 경제의 파탄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 혼란의 와중에 배후중상설을 신봉하게 된 독일 국민의 불만을 등에 업고 나치당과 아돌프 히틀러가 부상하게 되었으며, 집권층의 오판에 따른 적절한 연정(+ 나치당의 힘을 총동원한 각지에서의 강경한 시위와 선거 유세)을 통해 기어이 집권에 성공했다. 1933년 집권한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은 무효이니 독일은 보상금을 낼 필요가 없으며 재무장을 하겠다는 주장으로 독일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었다.
결국 1935년 독일 재군비 선언과 함께 베르사유 조약을 공식으로 파기하고 영국이 이를 공인함으로서 완전히 사문화되었다. 영국의 외교적 삽질로 기록되는 영국-독일 해군조약[23][24] 과 폴란드를 주적으로 가정한 육군 기동훈련에도 영국 대사와 무관들이 참관했으며 이는 동맹국인 프랑스를 경악시켰다. 몇 달 전에 프랑스가 일방적으로 영국과 상의 없이 징병제 군 복무기간을 늘렸고, 그 핑계로 나치 독일이 징병제를 재개한 탓도 있다.
한편, 히틀러의 의견에 영국과 프랑스는 그 동안 베르사유 조약이 독일을 크게 자극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배상금을 깎아주는 "당근" 유화책으로 진정시키려 했지만[25] 여기서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의 폐기를 선언한다. 특히 영국, 미국에서는 경제 파탄으로 바이마르 공화국이 공산화될 것을 심각하게 우려했다. 공산화는 면하긴 했는데... 이미 늦었다. 독일은 폭주를 시작하고 있었고 이 때는 이런 유화책을 실시할 시기는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복수심에 눈이 멀어 벌인 행동으로 인한''', 그리고 키신저가 말한 것처럼 '''관대해야 할 때는 가혹하고, 강경해야 할 때는 물러 터진''' 장장 20년에 걸친 외교 실패로 마침내 1939년에 다시 전쟁이 발발한다. '''바로 제2차 세계 대전의 시작이다.'''[26][27]
프랑스 침공으로 프랑스가 점령되면서 베르사유 조약의 원본은 독일 국방군이 접수했고, 그 후 행방은 묘연하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제국이 프랑스에게 항복 문서를 작성했던 열차도 이때 나치 독일로 끌려가서 전쟁 말미에 박살나 버렸다. 박물관에 승전 기념으로 전시되어 있던 그 열차를 항복 조약을 서명한 그 장소로 끌고 가 똑같이 프랑스의 항복 조약을 받아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
결국 어떻게 보면 2차 대전 발발을 위한 조건은 1차 대전의 종결과 함께 형성되기 시작된 셈이 되었다. 만약 온건파 말대로 배상금 없이 자비를 베풀었다면 나치당 같은 급진주의 세력이 정권을 잡는 일은 없었을 거고, 강경파 말대로 독일의 전쟁 수행 능력을 뭉개놓았다면 나치가 정권을 잡더라도 전쟁을 일으키지는 못 했을 테지만, 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 이도저도 아닌 어중간한 태도를 튀한 탓에 독일 민중의 반발심은 있는 대로 이끌어내면서도 전쟁 수행 능력은 남겨놓은 최악의 결과가 된 것이다.
7. 남은 잔재들
하지만 독일은 2차 대전에서 또 다시 패배했다. 승리한 연합국은 향후 세계 질서를 감안해서 베르사유 조약처럼 아주 가혹한 규정은 두지 않으나 독일을 재기 불능에 빠뜨릴 종전 조약을 맺기로 하고, 이 조약에 베르사유 조약에서 규정된 사항 중 일부를 약간 적용했다. 그러나 냉전이 시작된 관계로 금전 문제를 뺀 나머지 조항에 대해서는 서로 서독과 동독을 대규모 침공에 대한 방패막이 겸 우군으로 육성하기 위해 사실상 폐기했으며, 단지 배상금 항목만 상징적으로 남게 되었고, 또한 전후에 미국이 나서서 마셜 계획으로 유럽[28] 의 경제 재건에 막대한 원조를 해줬기 때문에 승전국들은 배상금 문제에 거의 관심을 갖지 않게 된다.
문제가 된 배상금의 경우, 2010년 10월 3일 독일 정부는 1차 대전의 전쟁 배상금을 모두 상환 완료하였다고 발표하였다. 상환수단은 유로였다고 한다. 참조기사 92년 만이었다. 사실 배상이 이렇게 오래 걸린 이유는 50년대에 "일부는 통일 이후에 부담한다"라고 수정했기 때문이라고 한다.[29] 그리고 또 사실 이미 잊혀진지 오래인 문제라 굳이 갚지 않아도 되는 배상금이였다. 프랑스, 영국, 미국 그 어떤 나라도 현재의 독일은 독일연방공화국이지 독일 제국이 아니라고 이미 생각했기에 독촉하지도 않았다. 다만 현재의 독일은 나치 독일과의 관계를 부인하는 입장인데 나치가 일방적으로 파기한걸 그대로 남겨두기는 좀 찝찝한 일이기는 했다. 현재 독일은 공식적으로 나치 시절은 부정하지만 독일 제국에 대해서는 그 정도는 아니기도 하고.
8. 기타
이 문서는 환율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는데, 당시 일반적으로 순금 1kg은 2790 골트마르크 = 136.588 파운드 스털링 = 664.7 미국 달러[30] 로 1달러는 4.197 마르크, 1파운드는 20.426 마르크이자 4.867 달러가 된다. 인용
암모니아 제법으로 노벨상을 수상한 프리츠 하버는 국가의 부채를 해소하기 위해 바다에서 금을 뽑는 아이디어를 실행해봤으나 1928년까지 뻘짓만 하다가 바닷물에 포함된 금의 양이 극히 적어 채산성이 전혀 안 나와서 돈만 날리고 그만두었다.
9. 만평
10. 관련 문서
- 틸지트 조약 - 19세기판 베르사유 조약. 게다가 당사국도 독일과 프랑스로 동일하다. 조약으로 뜯기는 나라가 독일이고(그 당시 프로이센) 삥뜯는 나라가 프랑스.
-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 독일 제국과 신생 소비에트 러시아 간의 종전 협정. 하지만 베르사유 조약이 맺어지면서 사실상 폐기됐다. 그리고 이 조약은 베르사유 조약이 양심적으로 보일 정도로 더 가혹한 조약이다.
- 부쿠레슈티 조약 - 동맹국과 루마니아 왕국 간의 항복 협정. 북도브루자의 남부 지역을 불가리아에 할양하고 2008년까지 독일에 유전을 빌려주며, 카르파티아 산맥의 교통로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관할로 두도록 하고 동맹국이 루마니아의 철도, 통신, 우편을 통제하며 동맹국이 루마니아에 주둔하고 그 주둔 비용을 루마니아가 떠맡으며 잉여 농산물을 동맹국이 요구하는 가격에 동맹국이 요구하는 양만큼 조공으로 바치고, 거부권, 인사권을 행사할 수 있는 독일인 고문을 루마니아 정부에 두도록 하는 등 가혹한 조항을 단 항복 협정이었다.[31] 물론 1차대전이 협상국의 승리로 끝나며 폐기되었다.
- 21개조 요구 - 일본의 산동성 조차와 관련된 내용. 5.4 운동의 원인이 되었다.
- 강용석의 고소한 19 - 137회 방영분 지적 허세 경제편에서 베르사유 조약을 설명할 때 나무위키의 베르사유 조약 내용을 캡처해서 그대로 방송에 내보냈다(...).[32]
- 생제르맹 조약 - 오스트리아와 맺은 조약. 이 조약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해체된다.
- 트리아농 조약 - 헝가리와 맺은 조약. 상당한 영토 상실은 덤.
- 뇌이 조약 - 불가리아와 맺은 조약
- 로카르노 조약
- 세브르 조약 - 오스만 제국과 맺은 조약. 이 조약으로 오스만 제국은 아나톨리아 지역 일부만을 건사할 뻔 했지만 터키 독립전쟁 이후 파기되고 로잔 조약으로 개정.
- 마셜 계획 - 위의 사례들의 안티테제적 외교정책. 베르사유 조약의 실패를 똑똑히 지켜본 연합군 진영은 훗날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독일의 전범 청산과는 별개로 자국의 동맹국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독일과 이탈리아는 물론 유럽 전반에 걸쳐 대규모 경기 부양과 원조를 제공한다.
- 코메콘 - 이쪽은 소련이 마셜 계획에 대항하여 진행한 동독,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등의 공산진영에 대한 대규모 원조에 해당한다.
[1] 영국 대표단의 일원으로 베르사유 조약 협상 과정에 참여했었고, 이후 현대 외교 이론의 고전이 된 '외교론'을 저술하였다.[2] 미국에서 독립운동활동을 한 김순권 선생(1886~1941)이 썼다는 설이 유력하다.[3] 덧붙여서 이 조약 때문에 2차 대전의 결정적인 원인으로 악명이 높은 뮌헨 협정도 탄생하게 되었다.[4]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도 불복종하려 했지만 파울 폰 힌덴부르크와 빌헬름 그뢰너 장군이 에베르트 대통령에게 '동부 국경은 방어하고 폴란드는 쫓아낼 수 있지만 서부 전선에서 압도적인 열세'라고 하며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통보했다.[5] 카이저 빌헬름 2세는 중립국이었던 네덜란드로 망명했는데 네덜란드에서 인도를 거부했다. 나머지 인사들의 처벌도 흐지부지 되었다. 독일인이나 독일에 우호적인 관점에 있는 사람들은 이것이 2차 대전처럼 빼도 박도 못하게 자기네들만 시작한 전쟁도 아닌데도 진 놈이 죄라는 투라고 분통을 터뜨리는 조항이기도 하다.[6] 단치히 주민 80%는 독일계라 차마 폴란드에 넘기지 못하고 국제연맹 자유도시라는 명목으로 폴란드 제2공화국과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고등 판무관을 파견하는 것으로 했지만 그래도 철도와 우편은 폴란드 쪽에 맡겼고 또 원래 폴란드 분할 전엔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영토였기 때문에 사실상 폴란드 식민지 취급이 되었다.[7] 독일 경제의 핵심 공업지대인 라인강 동쪽 지류 루르지방이 포함된다.[8] 전시에 각국의 화폐 가치가 평가 절하되었다. 패전국 독일의 화폐 가치 저하는 안 봐도 비디오였고 (승전국은 1914년 기준 30~50% 절하 패전국은 70%까지 가치가 떨어졌다.) 애초에 1919년 당시 금 기준으로 못박아놨다.[9] 현물 배상도 가능해서 주로 석탄으로 배상했다. 철도용 침목, 전신주, 가축으로도 배상.[10] 사관학교는 교관이 직접 생도를 방문하여 교육하는 방법으로, 참모본부는 한스 폰 젝트 장군이 다른 행정부서로 쪼개서 위장전입시키는 방법으로 존속했다.[11] 하지만 이 조약은 1938년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반강제적으로 합병하면서 깨지고, 1939년대에 뮌헨 조약으로 최대한 전쟁을 피하려 했던 영국과 프랑스에 의해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란트(Sudetenland) 지역도 독일에 합병되면서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12] 실제로도 어차피 바이마르 공화국의 배상금은 미국의 투자로 가능했다. 그런데 1929년 대공황으로 이렇게 준 미국발 단기 자금이 빠져나가자 바이마르 공화국이 나가리되고 나치가 득세한다. 모두 케인즈의 예측대로였다. [13] 영국의 저명한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베르사유 조약의 징벌적 손해 배상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보여준 것도 이러한 이유이다.[14] ISBN 978-0-19-913636-0[15] 게다가 당시 독일은 사실상 무장해제된 상태여서 국제 여론은 프랑스와 벨기에에 더 나쁘게 돌아갔다.[16] 제2차 세계 대전은 그로부터 정확히 20년 64일 후에 발발했다.[17]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독일인이 24% 헝가리인이 20% 체코인이 13% 폴란드인이 10% 우크라이나인이 8% 등.[18] 오스만 제국 : 터키인(쿠르드 포함)는 45% 아랍인이 35% 아르메니아계 기독교인이 17% 나머지 유대인 등.[19] 실제로 당시의 독일 제국은 소르브인과 같은 소수민족이 있긴 했으나, 원주민인 독일계 주민들에 비하면 한 줌도 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독일은 옛날부터 단일민족국가라는 자부심 때문에 민족주의가 유독 강한 지역이었고, 1938년의 안슐루스 때도 둘 다 같은 독일계 민족이 주축이 된 국가라는 이유로 독일과 오스트리아 양국에서 여론이 양국간 합병을 적극 지지했다. 그래서 협상국도 독일-오스트리아 합병을 막는 것 말고는 독일 자체를 쪼갤 수는 없었다.[20] 특히 영국과 프랑스는 근대화 직후와 20세기의 국력 차이가 거의 없다고 봐도 될 정도로 본토 성장이 정체된 상황이었다. 2차대전 직전 영국의 GDP는 2600억달러. 프랑스는 1800억달러에 불과한 반면, 독일은 프랑스의 2배. 영국의 1.3배인 3500억달러에 달하는 GDP를 보유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영국과 프랑스는 초기 근대화와 식민지 확보를 통해 뽑아낸 국력으로 계속 우려먹는다고 봐도 될 정도. 반면 독일은 당장의 식민지 확보보다는 본토의 국력 강화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내다본 오토 폰 비스마르크에 의해 지속적으로 국력을 성장시켜왔고, 그나마 있는 식민지를 협상국이 몽땅 빼앗은 결과 오히려 식민지에 들어갈 비용을 모조리 본국 경제 재건에 투자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피를 봤음에도 20년 만에 다시 세계대전을 수행할 만한 능력을 회복하는 데 성공할 정도로 독일의 국력이 성장할 수 있는 밑거름이었다.[21] 이 금액은 1921년 초의 전쟁 배상(10억 마르크 + 수출액의 1/4인 3억 마르크 = 13억 마르크)으로 빚어진 인플레이션에 의해 달러 - 마르크화 환율이 급등하던 시절의 것이다. 환율은 전쟁 전 1달러당 4마르크 대, 전쟁 중 9마르크이던 게 전후 47마르크를 거쳐 1921년 연말에는 1달러당 330 마르크로 올라버렸고, 기어이 1922년 말에는 초인플레이션으로 달러당 8천 마르크가 되었다. 그래서 골트마르크로 환산하면 2690억 마르크가 되고, 대략 10만 톤의 순금과 맞먹게 된다.[22] 총액으론 도스 안보다 13% 탕감되고 59년 할부로 바뀌었다. 하지만 독일에서는 "59년 동안 빚 갚으면서 노예질 하라고?"라는 반응으로 안 그래도 인기 없던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는 나노 단위로 까였다. 히틀러도 이걸 두고두고 이용해먹었다.[23] 1935년 영국과 독일의 해군 비율을 100:35 로 승인한 것을 외교적 승리로 정신승리했지만 개전 전까지 35는커녕 20도 못 채웠다. 히틀러의 뻥에 놀아난 것.[24] 이로 인해 무솔리니는 영국이 스트레사 동맹을 파기했다고 여기고 히틀러와 연합한다.[25] 미국 상원에서 통과되지는 않았지만 로잔 회의에서는 200억 마르크(48억 달러)까지 깎아주려고 했다.[26] 프랑스는 자신들이 한 행동에 독일의 보복이 두려워 마지노 선을 구축하지만, 정작 독일군이 중립국인 벨기에를 거쳐서 넘어오는 바람에...[27] 사실 프랑스는 벨기에 방면에도 마지노 선을 그으려 했지만 벨기에에서 난리를 치는 바람에 하지 못했다. 그래서 대신 벨기에에 요새를 지어주기로 했는데 그 요새를 지은 회사가 독일 회사였다(...).[28] 소련의 영향력에 있던 동유럽 국가들과 친나치 성향의 스페인국을 제외하고 왠만한 유럽 국가들에 전부 원조를 해줬다.[29] 정확히 말하면 이미 낼 건 다 채권으로 냈고, 일부 채권의 만료 시점을 통일 이후로 잡은 것이다.[30] 정확히는 1파운드는 순금 113 그레인 (1그레인은 0.06479g이다), 1달러는 순도 90% 금으로 25.8 그레인이었다.[31] 다만 전쟁 배상금은 요구하지 않았다. 대신 루마니아를 정치적, 경제적으로 철저히 독일을 비롯한 동맹국에 예속시키고, 말 그대로 루마니아를 완전히 쥐어짜는 내용의 조약이었다.[32] [im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