콰이다푸
1. 개요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인. 문화대혁명 초기 칭화대학교에 재학하면서 홍위병의 영수로 등극해 베이징 8월 폭풍 사건을 주도하는 등 혁명의 광기를 증폭시키는 데 일조한 인물이다. 한때 마오쩌둥의 깊은 신임을 받고 홍위병 최고의 지도자로 평가받았으나 1968년 경에 실각하여 노동 교화를 받아야 했고 1978년에 긴급 체포되어 반혁명 선전, 선동죄와 살인죄, 무고죄로 징역 17년, 정치 참여권 박탈 4년을 선고받았다.
2. 생애
2.1. 초기 경력
콰이다푸는 1945년 9월 13일 장쑤성 빈하이현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는 신사군의 병사였고 부모는 1940년대 공산당원이었다. 1953년 막 8살이 된 콰이다푸는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총명했고 열심히 공부해서 미래에 공산당 전사가 되라는 아버지의 말씀에 따라 매우 열심히 공부해 초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고 중학교에서도 학내 수석을 독차지했다. 1960년, 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고등 중학교에 계속 다니기로 하고 빈하이현 팔탄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콰이다푸는 공부를 열심히 해 우수한 학업성적을 거두면서도 마냥 책을 읽기만 하지 않았다. 그는 중학교 재학 때부터 학교에서 조직한 각종 행사에 적극 참여했고 많은 친구들을 사귀었으며 그들의 리더 노릇을 했다. 또한 그는 공산당원이었던 부모의 영향으로 정치 활동에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자신이 미래에 부모의 뒤를 이어 공산당을 이끌 프롤레타리아 전사가 될 운명을 타고났다고 확신했다. 그는 고등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공산주의 청년단에 가입했으며, 청년선봉대원들의 대표이자 공산당 예비군의 일원이 되어 학생운동을 이끌었다.
1963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콰이다푸는 칭화대 입학시험을 치뤄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고 그해 9월 칭화대 공과대 화학과에 입학했다. 이후 그는 칭화대 학생위원회에 배속되어 정치활동을 전개했다.
2.2. 문화대혁명의 5대 영수
1966년 5월 말, 칭화부중의 몇몇 학생들이 "홍위병"이라고 서명한 소자보를 내걸었다. 그리고 6월 2일 칭화부중 교정에 "홍위병"이라는 서명이 기록된 대자보 <무산계급 혁명 조반정신 만세>가 내걸렸고 100여 명의 학생들이 서명했다. 이후 각지의 대학생들이 스스로를 홍위병이라고 자칭하고 대자보를 내걸으면서 문화대혁명이 본격적으로 개시되었다. 이때 콰이다푸는 몇몇 대학의 대자보를 읽고 곧 칭화대학 공작대에게 공개토론을 요구했다.
그러자 국가 주석 류사오치의 부인 왕광메이(王光美)는 콰이다푸를 비난했다."공작대의 손에 든 권력이 과연 우리를 대변하는가? 그들을 타도하고 홍위병이 학교 위원회 권력을 쟁취해야 한다."
며칠 뒤, 콰이다푸는 반혁명 분자라는 비난을 받고 칭화대 교정에 운집한 학생들 앞에서 수십명의 추종자들과 함께 조리돌림을 당하고 기숙사에 감금되어 18일간 수감되었다. 이때 공작대는 류사오치의 지시에 따라 학교와 공장을 엄하게 단속해 수도인 베이징에서만 1만 명의 넘는 학생들에게 "우경분자"라는 꼬리표를 붙였고 상하이 제17방적 공장에서는 왕훙원과 수백명의 노동자들에게 반당분자라는 비난을 퍼붓고 핍박했다. 이로 인해 류사오치는 중국에서 가장 미움받는 지도자로 전락했고 휘하의 공작대는 많은 이들을 희생시켜 학생과 대중의 미움을 받았다."우경 학생인 콰이다푸가 권력을 잡으려 한다."
이 과정을 지켜본 마오쩌둥은 류사오치 정권에 대한 학생과 대중의 분노가 수위를 넘었다고 판단하고 오랫동안 계획해온 류사오치 제거 작전을 개시하기로 결심했다. 7월 21일, 중앙문혁소조에 소속된 왕리와 관펑이 칭화대에 수감중인 콰이다푸를 찾아갔다. 이는 앞서 콰이다푸를 우경 세력이라고 비난했던 왕광메이를 무시하는 처사였다. 콰이다푸는 이후 석방되었고 공작대는 7월 24일 대중을 두려워하고 학생들을 탄압한다는 마오쩌둥의 비난을 듣고 해산되었다.
8월 4일, 천보다 등이 칭화대를 찾아가 왕광메이를 비롯한 공작대의 '자산계급 반동노선' 집행을 비판하는 대회에 참가하고 콰이다푸에게 칭화대 홍위병 조직을 맡겼다. 그후 콰이다푸는 "홍위병 혁명 조반 총사령부"(일명 수도 홍위사 3전사)의 사령관으로 칭하며 정강산 병단의 리더로 등극했다. 그는 홍위병들을 이끌고 8월 한달 동안 천여 명에 달하는 교사 및 정치인들을 우파로 몰아 살해하는 데 일조했다.
1966년 12월 18일, 중앙문혁소조 부소장 장춘차오는 중난하이 서문에서 콰이다푸를 만나 그의 보고를 들은 뒤 그가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을 타도하는 임무를 수행하게 했다. 콰이다푸는 칭화대로 돌아온 후 장춘차오의 지시를 전하고12월 25일 칭화대에서 5천 명을 이끌고 천안문 광장으로 이동하며 "류사오치 타도", "덩샤오핑 타도"를 외쳤다. 그는 천안문 광장에 도착한 뒤 "류-덩으로 대표되는 자산계급을 철저히 다토"하자고 주장했으며 여러 번화가에서 전단을 나눠주고 대자보를 붙였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12.25 대행동"으로 일컬어진다.
1967년 1월 6일 저녁, 왕광메이는 콰이다푸로부터 자신의 딸 류핑핑이 자동차 사고로 부상당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콰이다푸는 류핑핑이 인민병원에 있는데 수술을 위해서는 부모의 서명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에 류사오치와 왕광메이는 인민병원으로 차를 몰고 가서 딸을 찾았지만 얼마 안가서 콰이다푸가 거짓말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사이, 류사오치와 왕광메이의 아들과 다른 딸이 인질로 잡혀버렸고, 결국 왕광메이는 두 자식을 풀어주는 조건으로 칭화대에 자진해서 들어가 조리돌림당했다. 다음날, 저우언라이가 개입해 그녀를 풀어주라고 지시했고 왕광메이는 간신히 귀가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해 콰이다푸는 득의양양한 어조로 외쳤다.
1967년 1월, 그는 중앙문혁소조의 지시에 따라 상하이 1월 폭풍 사건에 동참해 상하이 시정위원회를 뒤엎고 장춘차오가 상하이에서 권력을 장악하는 데 일조했다. 또한 그는 1월 19일에 경서빈관에서 개최된 군사위원회 확대회의에 참석하려 했다가 쫓겨났다. 이에 그와 밀접한 사이었던 장칭이 항의했다."혁명을 위해서라면 헛소문을 퍼트리는 건 영광스러운 일이다!"
그러자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겸 외교부장 천이가 자신이 했다고 나섰다. 장칭이 왜 들어오도록 허락하지 않았느냐"고 힐난하자, 천이가 반문했다."콰이다푸를 회장에 넣지 말라고 명령한 사람이 누굽니까?"
이에 천보다가 나섰다."장칭 동지, 나도 당신에게 묻고 싶소. 콰이다푸는 도대체 어떤 자격으로 군사위원회 회의에 참석하려는 거요?"
그러자 예젠잉이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회의를 보여주고 홍위병에게 문혁 경험을 쌓게 하려고 장칭동지가 초대했소. 우리는 그를 환영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렇듯 한낱 해프닝으로 그치는 듯했던 이 일은 홍위병들이 장성들을 연이어 습격해 구타를 가하는 상황이 벌어지면서 다시 거론되었다. 2월 11일 중난하이에서 소집된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쉬샹첸이 책상을 두드리며 일어나 다음과 같이 외쳤다."오늘 군사위원회 확대회의에서는 군구사령, 해군사령, 공군사령은 있지만 학생사령 같은 것은 없소."
[image]"부모를 타도하기 위해서 아이들에게까지 린치를 가하고 있소. 그리고 가족 전원이 박해를 받는다. 무엇 때문인가? 군대는 무산계급독재의 기둥일세. 그런데 당신들은 군대를 혼란에 빠뜨리려 하니 기둥을 뽑아 버리겠다는 것인가? 우리같은 이들은 안되고 콰이다푸 같은 이들이 군대를 지휘하도록 하자는거요?"
1967년 4월 10일 칭화대에서 조리돌림 당하고 있는 왕광메이
그러나 장성들의 반격은 마오쩌둥에 의해 무위로 돌아갔고, 마오쩌둥은 이 사건을 2월 역류라고 규정짓고 군대가 홍위병을 진압하는 것을 금지했다. 이에 콰이다푸는 3월에 2월 역류를 비난하는 군중 대회를 개최했고 4월 10일에 장칭과 저우언라이로부터 세부적인 지시를 받고 칭화대학에서 30만 명의 군중을 모아놓고 왕광메이를 조리돌렸다. 그는 왕광메이를 "중국의 흐루쇼프같은 남자의 남새나는 아내"라고 지칭했으며 다수의 홍위병 여학생들이 그녀에게 강제로 하이힐을 신기고 옷깃이 목까지 올라오면서 치마 한쪽이 길게 트여 있는 드레스를 입혔다.또한 탁구공으로 목걸이를 만들어 목에 걸어줬다. 그녀는 몸을 벌벌 떨면서 무대 위에서 이리저리 떠밀려 다녔고 자신의 신발에 걸려 넘어지길 되풀이하고 머리는 산발이 되었다.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그녀를 잘 보기 위해 서로의 어깨를 짚고 올라섰다.
1967년 4월 20일 베이징시 혁명위원회가 발족했다. 콰이다푸는 베이징시 혁명위원회 상무위원이자 홍위병대표대회 핵심소조 부소장으로 임명되었다. 그후 6월 상순 베이징 조반파가 구성한 류사오치 화선 지휘부에서 콰이다푸의 그의 정강산 병단은 화산 지휘부의 주력으로서 중난하이를 포위하고 구호를 외치고 대자보를 붙이고 확성기로 떠들며 류사오치 타도를 부르짖었다. 7월 27일, 콰이다푸는 우한에서 벌어진 7.20 사건 이후 왕리의 지시에 따라 "쉬샹첸 타도"라는 대자보를 내걸고 7월 29일에 부하들을 이끌고 쉬샹첸의 집을 박살냈다.
7월 30일, 콰이다푸는 정강산 병단 본부에서 토론회를 열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제2, 4방면군 간부들에게 "류-덩 반당세력" 타도를 더욱 거세게 하라고 독려했고 각 지역 홍위병들에게 현재 정세를 분석한 자료를 나눠주며 반당분자 타도와 군대 내 부르주아 세력 타도를 구호로 내걸었다. 이후 그는 10월 17일 정강산 신문에서 "무산계급 대탈권 만세"를 발표하며 앞으로도 탈권 현상을 부추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1968년 5월, 콰이다푸는 칭화대 정강산 문공무위총지휘부를 조직하여 칭화대의 무투 운동을 지휘했다. 그는 5월 30일 새벽 자신의 뜻에 반대하는 군중조직을 공격하여 18명을 살해하고 1100여 명을 부상시켰다. 부상자 중 30여명은 평생 장애를 갖게 되었으며 직접적인 경제적 손실은 인민폐 1000만 위안을 넘어섰다. 그는 이밖에도 베이징대, 베이징 사범대 등과 대규모 무투 투쟁을 벌여 수많은 학생 및 시민들을 공격했다.
이에 마오쩌둥은 자신이 허용한 범위를 벗어나 혼란을 야기시키는 홍위병들을 진압하기로 결심했다. 7월 24일, 그는 모든 홍위병들에게 무기를 내려놓을 것을 요구했고 각 대학에 노동자들로 구성된 대규모 마오쩌둥 사상 선전대를 파견했다. 7월 27일, 최소 60개의 공장에서 차출된 약 3만 명에 달하는 노동자들이 마오쩌둥의 지시가 담긴 명령서를 흔들며 "무기가 아닌 말로 싸우자"고 외치며 칭화대로 향했다. 그러자 칭화대 홍위병들은 기관총, 소총, 심지어 임시변통으로 만든 탱크로 무장해 맹렬하게 저항했다. 이로 인해 5명의 노동자가 사망하고 부상자는 700여 명에 달했다. 콰이다푸는 "검은 손이 자신의 혁명을 좌절시키고자 노동자들을 보냈다."고 선언하며 끝까지 저항할 것을 표명했다.
그러자 마오쩌둥은 진노했다. 1968년 7월 28일 새벽, 마오쩌둥은 홍위병 5대 영수들을 중난하이로 소집했다. 이 5대 영수는 콰이다푸를 비롯해 베이징대 여강사 녜위안즈(聶元梓), 베이징 사범대학 탄호우란(譚厚蘭), 베이징 항공학원 한아이징(韓愛晶), 베이징 지질학원 왕다빈(王大賓)이었다. 마오쩌둥은 장칭과 린뱌오, 저우언라이, 예췬, 캉성, 셰푸즈, 그밖의 중앙 문화혁명소조 위원들을 대동한 채 인민대회당에 나타났다. 이때 콰이다푸는 노동자들과 전투를 벌였다가 도피했기 때문에 회의에 제때 도착하지 못했다. 마오쩌둥은 칭화대학교에 파견된선전대 뒤에 검은 손이 존재한다는 콰이다푸의 주장을 비웃으며 분위기를 조성했다.
마오쩌둥은 7월 3일에 자신이 내린 명령을 무시한 홍위병 영수들에게 다음과 같이 일갈했다."내가 그 검은 손이다! 콰이다푸는 나를 체포하러 왔어야 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
이후 콰이다푸는 모든 직위에서 물러났고 정강산 병단은 해산되었다. 콰이다푸는 1968년 12월 닝샤 알루미늄 공장에 배치되어 기술자로 일했다. 1970년 11월, 그는 칭화대학에 보내서 사상 심사를 받았다. 1973년 심사가 끝난 뒤 베이징 석유화학 총공장에 배치되어 노동 감독원으로 일했다."광시성에 내려진 지시는 광시성에만 적용되고 산시성에 내려진 지시는 산시성에만 적용될 뿐 여기 베이징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정 그렇다면 나는 지금 이순간 전국에 지시를 내리는 바이다. 아직까지도 계속해서 저항하거나 인민해방군을 공격하거나 수송체계를 교란하거나 사람을 죽이거나, 타인의 재산에 불을 지르는 자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이 순간부터 범죄자다. 만일 개혁 요구를 외면하고 거부하는 소수의세력이 존재한다면, 그들은 무법자일 것이다. 국민당원일 것이다. 우리를 꼼짝못하게 포위하려는 자들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끝까지 버티고자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몰살시켜야 할 것이다."
2.3. 문화대혁명 이후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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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대혁명이 끝난 후, 재판에 회부되어 진술하는 콰이다푸
1978년 4월 19일, 콰이다푸는 베이징시 공안국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후 1983년 3월 10일, 베이징시 중급인민법원은 콰이다푸에게 반혁명 선전, 선동죄와 살인죄 무고죄 혐의에 대해 유죄를 선고하고 징역 17년, 정치 참여권 박탈 4년을 선고했다. 콰이다푸는 베이징 천청 교도소에 수감되었다가 칭하이 공화현 탕거무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1987년 10월 31일 전격 사면된 그는 알루미늄 공장으로 돌아와 노동에 종사했다.
1988년 8월, 콰이다푸는 베이징대학 78학번인 뤄샤오보와 난징에서 결혼했고 딸 하나를 낳았다. 1992년, 콰이다푸는 산둥성 펑라이시 덴저우 진흥실업 본사에 입사해 엔지니어로서 활동했다. 이후 그는 평범한 엔지니어로서 현재까지 종사하고 있다. 2008년, 그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문화대혁명 시기에 했던 행위에 대해 후회하지 않으며 자신은 여전히 마오주의자이며 시진핑이 마오쩌둥의 뜻을 따르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3. 참고 문헌
- 문화대혁명: 중국 인민의 역사, 프랑크 디쾨터, 열린책들
- 마오쩌둥 평전, 알렉산더 판초프, 민음사
- 문화대혁명, 야부키 스스무, 영남대학교 출판부
- 문화대혁명 또 다른 기억, 천이난, 그린비
- 중문 위키피디아 콰이다푸 문서
- 홍위병 5대 영수 콰이다푸
- 콰이다푸의 인터뷰
- 마오, 문혁 3년 만에 홍위병 '5대 영수'와 직접 면담
- 마오 "때가 됐다"...홍위병들 '용도페기' 선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