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훙원
왕훙원은 늘씬한 키에 아주 잘생긴 얼굴로 유식해 보였다. 그러나 외모와는 달리, 그는 영리한 편이 못되었다. 간신히 중학교를 졸업했으며, 정치적으로 공헌한 바도 없는 사람이었다.
리즈수이(마오쩌둥의 주치의)
1. 소개
중국의 정치가, 악명높은 4인방의 일원이다. 상하이의 일개 노동자 출신에서 중국 공산당 부주석까지 올랐으나 마오쩌둥 사망 이후로 실각했다.
2. 생애
일본 제국이 세운 괴뢰 국가 만주국의 지린성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초등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했고 자라서는 부유한 집의 돼지치기를 하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군에 지원해 6.25 전쟁에 참전했다. 제대한 후에는 상해의 목화 공장에서 보위부 간부직을 맡아 일했다.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자 시류에 잘 적응해 상해에서 조반파(造反派)를 결성했고 [1] 자신은 상해 조반파의 총책이 되었다. 이로써 마오쩌둥의 눈에 들어 1972년 9월 베이징으로 올라왔으며 1973년 8월 24일 밤 중국공산당 제10차 전국대표대회에서 당 제10기 중앙위원, 당 중앙위원회 부주석, 정치국 상임위원이 되었다.
마오쩌둥은 한때 그를 후계자로 삼으려고 여러 책임을 맡겼지만 하루 아침에 벼락출세한 왕훙원은 주변 사람들의 질시와 견제를 받았다. 다른 사인방 일원인 장춘차오와 야오원위안은 언변과 집필능력이나 평론 실력은 뛰어났고 캉성도 공작정치나 선전능력이 뛰어났지만 왕훙원은 특기를 보여준게 없었다. 거기다 왕훙원은 중앙 정계에서 권력에 탐닉하고 여러 실무에서 무능을 보이는 등 비판받을 빌미를 계속해서 제공했다, 결국 마오쩌둥은 왕훙원 대신 화궈펑을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하게 된다.
1976년 10월 6일, 마오쩌둥 사후 왕훙원 본인을 포함한 4인방은 선수를 친 화궈펑에게 체포되었다. 1977년 7월 중앙위원회 제10기 3차 전원회의에서 모든 직책에서 제명된 후 1981년 1월 중화인민공화국 최고인민법원 특별법원은 왕훙원에게 무기징역형을 선고하는 한편 그의 정치적 권리를 영구 박탈하였다. 그 후 그는 계속 감옥에서 복역하다가 1992년 8월 3일 간암으로 병사하였다.
3. 여담
정치적인 면에선 무능과 탐욕으로 점철되었지만 그와 별개로 가정적인 면에서는 좋은 남편이었다고 한다. 그의 아내인 추이진디(崔根娣)는 남편이 이혼을 요구하자 오히려 부인은 “좋아요. 제가 그 사람의 길을 막을 수는 없어요. 그 사람은 자기 벼슬을 하고, 저는 서민이 되면 됩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2] 왕훙원은 체포된 후 모든 직위를 잃고 감옥에 가게 되었지만 부인은 이혼을 하지 않고 오히려 해마다 딸을 데리고 왕훙원을 면회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