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리
1. 개요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인. 1950년대 말 <홍기> 잡지의 초대 편집위원으로 발탁되어 중국 공산당의 우수성을 선전했고 1963년 중국 공산당 대외연락부 부부장을 맡았다. 1966년 6월 중앙문혁소조의 일원이 되어 류사오치, 펑더화이 등 마오쩌둥 주석의 분노를 산 이들을 '반당분자', '장제스의 스파이'로 몰아 호된 탄압을 가했고, 홍위병을 선동해 문화대혁명의 광기를 증폭시키는 데 일조했다.
또한 군부에 부르주아의 싹이 있다고 몰아세워 홍위병이 인민해방군 기지를 습격해 약탈을 자행하도록 부추겼으며 조반파 홍위병들을 선동해 보수파 홍위병들을 공격하게 해 중국 전역이 사실상 내전 양상에 빠지게 만들었다. 급기야 외국인에 대한 중국인들의 오래된 반감을 부추기다가 주중 영국 대표부 점령 사건을 초래했고, 결국 1968년 1월 베이징 친청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2. 생애
2.1. 초기 경력
1922년 8월 11일 장쑤성 화이안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왕광빈(王光宾)이다. 1935년 10월 중국 사회주의 청년단에 가입했고 1938년 말 중국 공산당 위원회에 의해 동북군 제668연대에 파견되어 우군공작(友軍工作: 현지 농민, 노동자, 지식인, 일반 대중을 공산군에 끌어들이는 공작)에 참여했다. 1939년 3월, 왕리는 구무(谷牧)의 소개로 중국 공산당에 가입했다. 그후 산동분국의 <대중일보(大眾日報)>로 전출되어 기자로 일했다.
1943년 산동분국 당간지 <투쟁생활(鬥爭生活)> 주임을 맡았으며 소설 <명천(晴天)>을 집필했다. 이때 그는 가명으로 '왕리(王力)'를 썼고, 이후 평생 본명 대신 이 이름을 사용했다. 국공내전 시기 산동분국 발해구의 토지개혁단장 겸 당위 서기, 토지 개간부 훈련 주임, 중공 산동국 발해구 당위 선전부 부부장, 발해구 당위원회 위원을 역임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후, 중국광화 동북국 선전부 비서장 겸 선전처장이 되었다.
1953년, 중공 중앙의 명령에 따라 베트남 공산당의 선전문교 고문팀장을 맡았다. 그러다가 1955년 10월 국내로 소환되어 중국 공산당 국제활동지도위원회 부비서장을 역임했다. 1958년 <홍기> 잡지가 창간되었을 때 편집위원으로 임명되었고, 후에 부총편집장을 역임했다. 그리고 1963년엔 중국 공산당 대외연락부 부부장을 맡았다.
중소결렬 시기, 왕리는 소련의 '수정주의'를 비난하는 <구평소공(九評蘇共)>의 9편 중 8편을 집필해 마오쩌둥의 호평을 받았다. 또한 1964년부터 중국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회에 참석했으며 당의 주요 문서 편집을 도맡았다. 1966년 4월, 마오쩌둥의 지시에 따라 <중국중앙통지>의 초고를 작성했다. 이후 이 초고는 여러 차례 수정을 거쳐 문화대혁명의 강령이 되는 <5.16 통지>로서 중국 전역에 발표되었다.
2.2. 문화대혁명의 일원
1966년, 마오쩌둥은 문화대혁명을 개시하기로 결심하고 중앙문화혁명소조를 설치해 정치국 상무위원 산하에 속하게 했다. 왕리는 중앙문혁소조의 일원이 되었고 캉성의 측근으로 발탁되어 반당분자로 낙인찍힌 이들의 숙청에 적극 참여했고 홍위병을 인민일보, 홍기 등 언론매체를 통해 홍위병들을 선동하여 중국 전역을 혼란에 빠뜨리는데 일조했다.
1967년 7월, 우한에서 보수파 홍위병들과 우한 군구사령관 천짜이다오가 연합해 조반파 홍위병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왕리는 마오쩌둥, 저우언라이와 함께 우한으로 가서 마오쩌둥이 주관한 비밀 회의에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마오쩌둥은 셰푸즈, 왕리, 위리진에게 다음과 같이 훈계했다.
그러면서 천짜이다오에게는 가볍게 자아비판한다면 별다른 처벌을 내리지 않겠다는 의사를 내비쳤고, 천짜이다오도 이에 응해 자아비판했다. 그러나 왕리는 7월 19일 오전 부상당한 조반파 홍위병들을 위문하면서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당신들은 더 많은 공작을 해야 한다. 군구를 옹호하도록 조직해야 한다. 타도해서는 안된다. 성명을 내기 전에 쌍방 모두 회의를 열어 발표해 단결하도록 해야 한다. 모두 노동자다. 이쪽 파가 우고 저쪽 파가 좌냐? 우리 이 초대소도 두 파로 갈라져 있다. 앞으로는 모두 힘을 합쳐야 한다."
이에 조반파 홍위병들은 왕리에게 완장을 건네주고 방송차를 끌고 가서 거리를 행진하여 왕리의 연설을 녹음한 테이프를 틀어서 여론을 선전하고 보수파 홍위병들을 비난했다. 이에 분노한 보수파 홍위병들은 7월 20일 새벽 왕리가 투숙하고 있는 동호빈관을 습격해 왕리를 끌어내 백만웅사의 사령부로 끌고 간 후 다리가 부러질 때까지 폭행했다. 이후 특수부대가 우한에 투입되어 보수파 홍위병들을 진압했고, 왕리는 함께 폭행당했던 세푸즈와 함께 베이징으로 가서 천안문 집회에서 영웅대접을 받았다."여러분은 억압을 받고 있다. 타격을 받은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런 현상을 바꿔야 한다. (중략) 군구가 내건 좌파 지지의 큰 방향이 틀렸다. 노동자 총사령부에 대한 억울한 조처를 바로잡아야한다. 조반파는 혁명좌파이며 백만웅사[1]
는 보수조직이다."
2.3. 몰락
1967년 8월 7일, 왕리는 발목에 붕대를 감은 채로 국빈관에 가서 저우언라이 총리의 "외교 대권은 중앙에 속하며 누구도 빼앗을 수 없다."는 지시를 비난하며 외교부를 점령하자고 호소했다. 이 호소에 응한 홍위병들은 외교부장 천이(陳毅)를 군중 대회에 끌어내 온갖 모욕과 구타를 가했고 8월 22일에 주중 영국대표부를 습격해 방화와 약탈을 자행했으며 영국 대사대리 도널드 홉슨을 포함한 영국인 외교관들을 무자비하게 폭행했다.
이 사건으로 중국의 위신이 땅에 떨어지자, 저우언라이는 격노해 마오쩌둥에게 왕리가 그간 해온 연설문을 보내며 왕리 때문에 중국의 명예가 실추되었다고 주장했다. 마오쩌둥은 저우언라이의 보고를 들은 뒤 인민해방군 참모총장 대리 양청우를 불러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양청우는 8월 25일 정오 베이징으로 가서 저우언라이에게 마오쩌둥의 명령을 전달했다. 이에 저우언라이는 다음날 심야에 댜오위타이에서 천보다, 캉성, 장칭 등을 불러모아 비밀 회의를 소집하고 왕리와 관펑을 체포하라는 마오쩌둥의 지시를 낭독했다. 이에 왕리는 관펑과 함께 긴급 체포되어 베이징 서산의 한 별장으로 이송되어 연금되었다. 얼마 후인 1968년 1월 26일, 왕리는 공산당 중앙의 결정에 따라 베이징 친청 교도소에 수감되었고 당적이 박탈되었다."왕리, 관펑, 치번위는 문화대혁명을 파괴했다. 좋은 사람이 아니다. 자네는 총리 한 사람에게 총리가 책임을 지고 그들을 체포하라고 보고하라. 다만 치번위는 잠시 놔두고 자아비판을 시키도록 하라."
2.4. 말년
왕리는 친청 교도소에 수감된 후 14년간 구금되었지만 정식으로 기소되진 않았다. 문화대혁명이 종식된 후 공산당에서는 린뱌오-장칭 반혁명그룹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한 목적으로 재판을 열었고, 왕리는 증인으로서 재판에 소환되었다. 그후 1982년에 석방되긴 했지만 이듬해 중국 공산당으로부터 영원히 당적을 돌려받을 수 없다는 처분을 받았다.
중국 공산당은 마오쩌둥 시대나 마오쩌둥 사후에도 왕리가 저지른 범죄를 명시하지 않았다. 이는 중국 공산당 연구가들에게 상당히 어려운 난제를 안겨줬다. 왕리가 문화대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건 사실이지만 정식으로 재판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역사가들은 그가 문화대혁명 시기에 정확히 어떤 역할을 맡았으며 그의 권한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파악하는 데 애를 먹었다. 다만 공산당은 왕리가 문화대혁명의 광기를 증폭시키는 데 일조했다는 입장을 지금까지 고수하고 있다.
왕리는 석방된 후 베이징에서 조용히 살았다. 그는 102차례에 걸쳐 당 지도부에 용서를 구하고 당적을 복구해줄 것을 호소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그는 문화대혁명에서 자신의 참여에 대한 상세한 회고록을 썼는데, 이는 문화대혁명 시대 연구의 주요 출처로 각광받고 있다. 그는 이 회고록에서 마오쩌둥을 개인적으로 비난하지 않고 "비록 혁명은 실패했지만 잘못된 게 아니다."라며 자신이 여전히 헌신적인 마오이즘 신봉자라는 것을 내비쳤다.
1996년 5월, 왕리는 췌장암 진단을 받고 베이징 병원에 입원했다가 1996년 10월 21일에 사망했다. 향년 75세.
3. 저작
- <왕리반사록(王力反思錄)>, 홍콩 북성출판사, 2001년.
4. 참고 문헌
- 중문 위키피디아 왕리 문서
- 영문 위키피디아 왕리 문서
- 바이두백과 왕리 문서
- 인민일보 사설로 ‘문화대혁명’ 공포…대륙은 혼돈속으로
- 정권 농단 ‘문혁 4인방’ 중 한 명 왕홍원의 등장
[1] 보수파 홍위병들이 조직한 단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