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젠잉
1. 개요
중화인민공화국의 군인, 정치가. 중화인민공화국의 개국 10대 원수였으며 문화대혁명의 광풍 속에서도 생존하여 1980년대까지 활약, 개혁개방 노선을 지지했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1897년 광동성 매현 안양보의 소상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의위였으며 1919년 운남 강무학교를 졸업하고 쑨원의 호법운동에 호응하여 참여했다. 1921년 비상대총통에 선출된 쑨원을 수행하여 광서성을 방문했다가 해군 육전대 대대장에 임명되었으며 1924년 국공합작이 이루어진 이후 황포군관학교 교수부 부주임을 지냈다. 1924년 5월에 광동군 2사단 참모장에 임명, 1925년 천중밍 토벌에 참여했다. 1926년 7월, 국민당의 1차 북벌이 거행되자 국민혁명군 제1군 총예비대 지휘부 참모장에 임명되었다가 신편 2사단 사단장 대리에 임명되었다.
1927년 4.12 상하이 쿠데타가 일어나자 장제스에 대항하는 무장 폭동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우한 국민정부에 합류, 장파쿠이가 지휘하는 국민혁명군 4군 참모장에 임명되었다. 그해 7월 중국 공산당에 가입, 국공결렬이 일어나자 난창 폭동에 참여했다. 난창 폭동이 실패한 이후 장타이레이, 예팅의 지시에 따라 장황사변을 틈타 12월 11일, 광저우에서 광저우 폭동을 일으켰으나 이 역시 참혹하게 실패했다. 1929년 모스크바로 이주, 동방노동자 공산주의대학 특별반에서 수학하고 1930년에 중국으로 귀국했다.
2.2. 대장정
1931년 마오쩌둥의 강서 소비에트에 합류, 혁명군사위원회 위원 겸 총참모부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홍 제1방면군 참모장을 거쳐 1934년 10월에 대장정에 참여, 혁명군사위원회 제1종대 사령관, 중앙종대 부사령관 겸 혁명군사위원회 제1국장 등을 역임했다. 1935년 7월 홍군 전적위원회 총지휘부 참모장에 임명되었으며 9월에 장궈타오가 섬서성으로 북상하자는 마오쩌둥의 주장을 무시하고 사천성으로 남하하려 할때 장궈타오의 남하를 마오쩌둥에게 보고하였다. 마오쩌둥은 예젠잉의 보고 덕분에 홍군 제1방면군 주력을 북상시키는데 성공했고 예젠잉이 혁명에 큰 공을 세웠다고 크게 칭찬했다.
2.3. 중일전쟁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한 이후 제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지자 8월 7일에 개최된 중국국민당 전당대회의 항일전쟁 결의식에 주더, 저우언라이 등과 함께 참여했다. 8월 19일 홍군이 팔로군으로 개편됨에 따라 팔로군 참모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국민정부의 항일에 적극 협조, 1938년 11월 28일의 난웨 군사회의에서 장제스가 유격전을 강조함에 따라 국민정부의 요청으로 충칭에 파견되어 군사위원회 교육 부주임, 부교육장 등을 역임했다. 국민혁명군 유격대를 훈련시키는 임무를 맡기도 했다. 1938년 창사 공방전에서 지역 관리들의 실수로 벌어진 창사 대화재에 휘말려 하마터면 죽을 뻔하기도 했고 1940년 2월에 옌안으로 철수했으며 1941년 2월 혁명군사위원회 참모장에 임명되었다. 1940년 3월 17일, 코민테른의 수석대표 게오르기 디미트로프가 마오쩌둥에 요청한 중국 공산당 인사기록은 이 시기의 예젠잉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1944년 데이비드 베럿 대령을 중심으로 한 미국의 딕시 사절단이 옌안을 방문하자 황하, 천자캉, 조지 하템 등의 1팀에 배속되어 옌안이 편안한 곳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임무를 맡았다. 1945년 6월에 개최된 제7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위원에 당선, 8월에 혁명군사위원회 위원 겸 부총참모장에 임명되었다.
2.4. 국공내전과 건국 초기
중일전쟁 종결 이후 충칭에서 열린 정치협상회의에 참여했고 국공내전이 재개되자 1947년 4월 후쭝난의 공세에 맞서 중앙후방위원회 서기에 임명, 양상쿤을 비롯한 젊은 지도자들을 섬서성 서북쪽으로 피신시켰다. 이후 푸쭤이가 항복하고 베이핑이 공산당의 손에 들어오자 베이핑시 군사관제위원회 주임 겸 베이핑 시장에 임명되었고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이 선포된 이후 광동성 인민정부 주석 겸 광저우 시장, 광동군구 사령관 겸 정치위원, 화남군구 사령관 등을 역임했다.
1955년 원수 계급을 부여받았으며 1959년 9월 중앙군사위원회 상무위원, 1966년 1월에 군사위원회 부주석, 5월에 중앙 서기처 서기 겸 군사위원회 비서장에 임명되었고 8월에 열린 중국공산당 8기 11중전회에서 정치국 위원에 임명되었다. 이때 예젠잉의 나이가 이미 일흔으로 개국원수 치고는 늦은 나이에 오른 자리였다.
2.5. 2월 역류
1966년 8월 "우리는 수백만의 군대가 있으니 어떤 우귀사신도 두렵지 않다"고 발언한 바가 있는데 마오쩌둥은 8월 4일 정치국 상무위원회 확대회의를 소집, 우귀사신은 다름아닌 류사오치라고 지목하면서 본격적으로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었다. 이어 베이징 8월 폭풍 사건을 시작으로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중국을 휩쓸기 시작하고 1966년 12월 펑더화이, 허룽 등 개국원수들까지 홍위병들에게 조리돌림당하는 것을 보고 쉬샹첸 등과 함께 격분하여 반발했다. 예젠잉은 쉬샹첸과 함께 여러 장군들을 모아 조반파의 공격으로부터 군령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고 자신의 세력 기반인 군부를 보호하고 싶었던 린뱌오도 예젠잉의 주장에 동조했다. 이들은 군령을 세울 것을 주장하는 제안서를 마오쩌둥에게 제출하여 군대가 '반동분자와 반동조직'에 '단호한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요청했다. 마오쩌둥은 이를 승낙했고 군부는 조반파를 상대로 한 사냥에 들어갔다. 1967년 2월 23일 청해성 학살사건을 비롯해서 인민해방군은 중국 곳곳에서 조반파 홍위병들을 학살했고 예젠잉은 곳곳에서 벌어지는 홍위병 사냥을 크게 지지했다.
예젠잉은 1967년 1월 경서빈관 대소동에서 장칭과 대판 싸웠으며 1967년 2월, 마오쩌둥이 중앙문화혁명소조에 대해 불만을 터트리며 장칭과 천보다 등을 맹공격하자 예젠잉은 중앙지도부 회의에 출석, 2월 11일에 마오쩌둥에게 크게 질책을 받은 천보다를 공격했다.
이어 쉬샹첸, 천이 등의 원수들이 예젠잉을 지지하면서 가세했고 예젠잉은 캉성에게도 화살을 돌려 "당의 영도가 없이 혁명을 할수 있단 말인가? 군대가 필요하지 않단 말이야?"라고 공격을 퍼부었다. 여기에 당의 원로인 탄전린이 가세하여 장춘차오를 공격하면서 4인방은 궁지에 몰렸지만 마오쩌둥이 갑자기 입장을 바꾸어 장칭과 천보다 등을 지지하면서 원수들은 큰 타격을 받았고 이를 2월 역류라고 한다. 이에 예젠잉은 즉각 리푸춘, 리셴녠과 함께 탄전린, 천이, 쉬샹첸을 공격하면서 입장을 바꾸었다."당신은 정부와 당과 공장과 농촌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그럼에도 아직 만족할 줄 모른다. 군대까지 엉망으로 만들 작정인가! 당신들은 도대체 어쩌려고 이러는거야!"
2월 역류 이후 예젠잉과 쉬샹첸은 홍위병들을 가혹하게 진압한 것에 대해 자아비판을 해야 했고 홍위병에 대한 강경진압을 지휘했던 군의 여러 장성들이 숙청당했다. 하지만 이후로도 정치국 정치국원,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등의 요직을 유지했고 1967년 1월의 경서빈관 대소동[4] 등에서 장칭과 싸우는 등 4인방과 대립각을 세웠다.
1969년 4월 1일부터 24일까지 열린 중국공산당 9차 전국대표대회는 예젠잉을 2월 역류에서 4인방을 공격했음에도 중앙위원회에 잔존시켰다. 이는 질서 유지를 위해서는 군부의 지지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중국-소련 국경분쟁이 발생하던 와중에 린뱌오를 경계하기 시작한 마오쩌둥은 예젠잉에게 쉬샹첸, 녜룽전, 천이와 함께 린뱌오의 인민 전쟁 모델을 대체할 외교 정책을 모색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예젠잉 등은 미국과 화해하여 소련을 견제하자고 제안했고 때마침 출범한 리처드 닉슨 행정부에서도 중국과의 거국적인 화해를 모색함에 따라 데탕트 시대가 열렸다. 예젠잉은 키신저 맞이를 위한 공작소조장이 되어 키신저 방문을 준비, 1971년 7월, 황화와 함께 중국을 방문한 헨리 키신저를 영접하였고 1971년 9.13 사건으로 린뱌오가 사망하고 실각하자 군사위원회 업무를 주재하게 되었으며 군부의 린뱌오 세력을 제거하는 비림정풍 운동을 전개했다.
2.6. 비림비공운동
1973년 제10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저우언라이, 왕훙원, 캉성, 리더성과 함께 당중앙 부주석으로 선출되었으며 장칭에 맞서기 위해 온건파 저우언라이를 열렬히 지지했다. 그해 11월 국무장관에 임명된 헨리 키신저가 다시 중국을 방문하자 저우언라이와 함께 그를 영접했다. 하지만 장칭이 예젠잉와 저우언라이가 미국의 핵폭탄을 두려워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마오쩌둥은 저우언라이와 예젠잉이 우경일탈의 죄를 범했다고 비난했다. 1974년 1월에 야오원위안도 가세하여 예젠잉이 미국에 굴복하는 우경적 오류를 범하여 주권을 상실하고 나라를 욕되게 한 회담을 벌이고 투항주의적 자세를 보였다고 맹비난했고 <풍경호 사건> 등을 일으키는 등 국무원을 매국노로 매도하였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예젠잉을 내치진 않아 왕훙원이 예젠잉을 비판하자 그를 질책하며 장칭과의 만남을 줄이고 저우언라이, 예젠잉과 많이 만나고 얘기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1974년에 비림비공운동이 벌어지자 이에 맞서 저우언라이를 옹호했으며 1975년 덩샤오핑이 일시 복귀했을 때 정돈사업을 펼치며 군 현대화를 추진했으나 마오쩌둥이 다시 덩샤오핑을 숙청하면서 정돈사업은 중단되었다.
1975년에 린뱌오 사망 이후 공석이던 국방장관에 임명, 저우언라이가 위독해진 상황에서도 계속 업무를 수행하자 예젠잉은 의료팀을 구성해서 저우언라이를 수행하게 했고 저우언라이의 생명을 연장시키기 위한 여러 조치를 취했으나 효과가 없었고 저우언라이는 1976년 끝내 숨졌다. 이때 예젠잉은 12월부터 매일 저우언라이를 문병했다. 얼마 안가 마오쩌둥이 사망하자 누구보다도 강경하게 4인방 체포를 화궈펑에게 건의, 4인방을 신속히 체포하여 이들 세력을 모조리 숙청했다. 이후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을 지내며 군부를 장악했다.
2.7. 개혁개방 시기
마오쩌둥 사망 직후에는 지도체제의 빠른 안정화를 위해 새로운 지도자로 떠오른 화궈펑을 들어 '비상한 시기의 비상한 인물', '마오쩌둥 주석의 거대한 안목에 의해 발탁된 영웅'이라고 칭송하며 화궈펑 우상화 작업과 양개범시론을 지지했고 이 덕분에 1976년 10월 4일, 4인방 숙청 이후 개최된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당중앙 주석으로 추천되었으나 예젠잉은 이를 사양하며 화궈펑에게 최고 지도자 자리를 양보했다. 1977년 7월 개최된 공산당 10기 3중전회에서 예젠잉은 "영도는 안정화되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 당 사업에서 매우 중요하다. 화 주석을 선전하고, 화 주석의 영수 지위를 옹호하는 것은, 혁명이 우리에게 부여한 책임이다."라고 발언하며 화궈펑 체제를 옹호했으며 덩샤오핑, 천윈을 복직시켜 화궈펑을 돕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5] 이후 일관되게 당내 민주주의, 집단지도체제를 주장하며 덩샤오핑-화궈펑의 공동 영도를 주장했으나 실패하였고 화궈펑은 덩샤오핑에 밀려 실각, 1978년 12월 공산당 11기 3중전회에서 화궈펑 개인숭배가 금지되었다.
덩샤오핑 집권 이후 1977년부터 펑더화이의 전문화된 군대라는 주장을 수용, 군 현대화 작업에 착수했다. 우선 '느슨하고, 산만하고, 오만하고, 나태한' 자들을 파면하고 늙은 원로들을 위한 퇴직제도를 마련하는 한편 군사 훈련과 연습을 강화하여 전투력 상승을 도모했고 대학에서 공부한 능력 있는 젊은이들을 대거 채용하여 장교로 삼았다. 1977년 12월, 중앙군사위원회는 <군대 편제 체제에 대한 조정 방안>을 통과시켰고 1978년 3월 29일 인민해방군 총정치부 좌담회는 간부 50만명을 퇴직시킬 것을 발표했다. 이로 인하여 1975년 시점에서 600만이 넘었던 중국군은 1979년 520만으로 감축되었고 1988년 320만까지 감축되었으나 덩샤오핑이 베트남 공격을 결정하면서 현대화 작업은 중단되었다.
1978년 중월전쟁이 발발하자 공개적으로 반대하진 않았으나 중국이 전쟁을 해야 할 정도로 위협을 받은 적도 없고 인민해방군이 전투준비를 갖추지 않았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 반대했다.
이후 정치국 상무위원을 맡으면서 군과 당의 원로로 존재감을 과시했다. 1979년 4월 5일부터 1979년 4월 28일까지 공산당 정치국이 개최한 중앙공작회의에서 시중쉰[6] , 양상쿤 등 광동성의 개혁파 지도자들을 지원하여 홍콩, 마카오의 선례를 받아들여 중국의 경제성장을 이끌어내야 한다는 주장을 지지했다. 이로 인하여 선전시 경제특구가 설치되었고 서커우 공업지대 육성 및 외국 투자자들의 투자 유치 등 전향적인 개혁개방 정책이 이루어졌다. 이에 마오쩌둥의 비서 출신인 후챠오무 등 보수파들이 사회주의 제도가 아니라고 반발했으나 덩샤오핑은 개혁개방 정책을 강행했고 곧 눈부신 성과를 올리게 되었다.
2.8. 말년
1985년 4중전회에서 64명의 중앙위원과 후보위원들이 사퇴했는데 이들은 모두 고령의 연로들이었다. 정치국 상무위원을 맡고 있던 예젠잉도 녜룽전, 쉬샹첸과 함께 은퇴하였고 당은 그의 후임을 새로 뽑지 않아 6명으로 구성되어 있던 정치국 상무위원회는 5명으로 축소되었다. 예젠잉은 고향에서 편한 여생을 보냈으며 후야오방을 지지했다. 하지만 덩샤오핑의 개혁노선에 일부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1986년 10월 22일 사망했다. 다만 이로 인해 예젠잉의 정치적 보호를 받던 후야오방은 1987년 1월 10일부터 15일까지 열린 당내생활회에서 보이보의 공격을 받았고 자아비판을 해야 했다. 일부 학자들은 예젠잉이 살아있었다면 후야오방이 이런 일을 당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중국의 민주화도 좀 더 가능성이 있었으리라 보기도 한다.
화려한 여성편력을 보여주는데, 결혼을 5~6번이나 했다. 혁명기간 중에 여성동지와 이혼과 결혼을 반복했다. 공식적으로 알려진 자녀는 3남 3녀가 있다. 첫째부인인 펑화로부터 낳은 맏아들인 예셴핑(1924-2019)은 광저우 시장 및 광둥성 성장을 역임했다. 둘째 부인인 쩡셴즈는 증국번의 동생 증국전의 증손녀였는데, 그로부터 낳은 예젠잉의 둘재 아들인 예셴닝(1938-2016)은 기술장교로 군에 들어가 소장으로 예편했다. 마지막으로 결혼한 정식 부인 리강으로부터 낳은 예셴롄(1952~)은 파일럿으로 근무하다가 현재 사업가로 일하고 있다. 리강과 1955년 이혼한 후에 서너명의 여성과 동거했다는 설이 있지만, 이 여성들이나 그밖의 자녀에 대한 정보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렇게 화려한 여성편력 때문에 중국에서는 "바람둥이 장군(花帅)"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3. 주요경력
4. 여담
-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대표적인 장칭의 반대자였지만, 옌안 시기에는 사이가 나쁘지 않아 장칭과 춤을 추기도 했는데 예젠잉은 큰 덩치에도 불구하고 춤을 꽤 잘 추었다고 한다.
- 예젠잉은 베트남의 지도자 호찌민과 1930년대에 만나 절친한 사이었다. 1960년 중국을 방문한 호찌민이 예젠잉을 '예라오(葉老)'라고 부르며 그를 베트남에 오게 해달라고 마오쩌둥에게 청한 일이 있었는데, 놀란 마오쩌둥은 베트남의 주석인 호찌민이 중국의 일개 장군인 예젠잉에게 너무 존칭을 쓰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지적한 일도 있었다. 이에 호찌민은 "아닙니다. 예라오는 나의 옛날 영도입니다. 언제라도 나는 그를 존경해 예라오라고 부를 겁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5.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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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후난성 전투란 제목으로 개봉한 건군대업에서는 중국 배우 소애(小爱)가 분했다.
호이4에서 중국 공산당의 참모진 중 한명으로 등장한다. 군수 전문가로 사단 소모율을 8% 감소시킨다.
6. 참고문헌
- 마오쩌둥 평전, 알렉산드르 판초프, 스티븐 레빈, 민음사.
-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 1,2,3권, 조영남, 민음사.
- 덩샤오핑 평전, 에즈라 보걸, 민음사.
- 저우언라이 평전, 바르바라 바르누앙, 위창건, 베리타스북스.
- 장칭 평전, 로스 테릴, 교양인.
- 모택동비록 상하권, 산케이신문사특별취재반, 문학사상사.
- 중국지 상,중,하, 현이섭, 인물과사상사.
- 중국현대정치사, 로더릭 맥파커, 푸른길.
- 해방의 비극, 프랑크 디쾨터, 열린책들.
- 마오의 대기근, 프랑크 디쾨터, 열린책들.
- 문화대혁명, 프랑크 디쾨터, 열린책들.
- 중일전쟁, 권성욱, 미지북스.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1] 葉은 성씨로 쓰일 때 섭으로 읽는다. 다만 이 사항은 한국은 물론 중국에서도 잘 지켜지지 않는다.[2] 성씨로 쓰일 때 xie(한국 발음으로 치면 '섭')로 써야 하지만 상술했다시피 잘 지켜지지 않았고, 이것이 고착화되었다.[3] 現 광둥성 매이셴구.[4] 장칭이 군사위원회 회의에 조반파 홍위병들을 들이려다가 예젠잉, 천이 등에게 저지당하자 이들과 대판 싸운 사건이다. 장칭은 군의 주요 간부들을 마구 반혁명분자로 몰아 비난했으나 예젠잉은 그 간부들의 신원을 책임지고 보증하겠다고 장칭에게 맞섰다.[5] 이에 대해 에즈라 보걸은 예젠잉은 덩샤오핑이 범접할 수 없는 독재자의 위치에 오를까 염려하여 그를 견제하기 위해 화궈펑을 지원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6] 시진핑의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