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르트 탄처
[image]
'''쿠르트 탄처 (Kurt Tanzer : 1920. 11. 1~1960. 6. 25)'''
독일 제국 시대에 관리였던 그의 아버지는 1918년에 제국이 멸망하자 가족들을 이끌고 러시아로 건너가 모스크바에서 살게 된다. 그의 처가 아들 쿠르트 탄처를 낳은 것은 제국이 바이마르 공화국으로 재편성된지 2년도 더 지난 1920년 11월 1일이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쿠르트 소년은 어린 시절 대부분을 러시아에서 보냈으며 그 식구가 다시 고국으로 돌아온 것은 나치가 집권하며 제3제국을 부르짖기 시작한 1930년대 중후반이었다.
쿠르트 탄처는 입대에 관한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지만, 대략 1940년 봄이나 여름쯤에 루프트바페 신병 훈련소에 입소한 것으로 보인다. 훈련소를 나와 제51전투항공단(JG 51) 보충 비행대(Ergänzungsgruppe/JG 51)에서 대기하던 비행병 탄처는 1942년 3월 18일에 실질적인 자대라고 할 수 있는 "묄더스 비행단" JG51 제12비행중대에 배속되었다.
상병 계급장을 달고 있던 그는 일찌기 입대하기 전까지만 해도 체계적인 조종 교육 같은 것을 받은 일이 없었지만, 동료들에 비해 확실히 조종에 소질이 있었던 모양이다. 1943년 5월 5일까지 자신은 상처 하나 입지 않고 소련 공군기를 35대나 떨구는 전공을 세운 그는 비행병이라고 무시할 수 없는 솜씨를 보였다. 다음날 5월 6일에는 부대가 주둔하고 있던 비행장에 일류신 IL-2 슈톨모빅 대편대가 예고도 없이 날아들었고, 마침 활주로에서 대기하고 있던 쿠르트 탄처는 재빨리 제일 가까운 곳에 주기되어 있던 Fw 190에 올라타 스크램블 발진을 감행했다. 비행장 활주로에 소련 공군기들이 기총 소사를 퍼붓고 폭탄과 로켓탄이 곳곳에 떨어지는 와중에 위험천만한 이륙에 성공한 그는 2대의 슈톨모빅을 격추시켰다. 교전 도중에 그는 처음으로 적기의 사격에 맞고 부상을 입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공습 편대와 맞서 싸우며 2대를 더 격파한 다음 적기들이 모두 물러간 후에야 활주로에 착륙해 응급실로 실려갔다.
이때 그가 탄 Fw190(W.Nr. 7161)은 격전 끝에 후방 기관총에 의한 탄흔이 여기저기 남고 심지어 기관포탄까지 얻어맞아 심각하게 부서져 있었지만, 쿠르트 탄처는 이 용맹무쌍한 행동으로 여러 동료 전우들의 목숨을 구해냈다. 오른손에 총상을 입고 여기저기 파편에 의한 상처도 난 그는 출혈이 매우 심해서 곧바로 후송 조치되었다.
[image]
손의 부상을 치료한 그가 다시 전선에 나타난 것은 그 해가 저물어 가던 11월 4일이었다. 12월 5일에 39번째 격추에 성공한 이후 중사였던 쿠르트 탄처는 상사가 되면서 기사철십자 훈장을 받게 되었다. 1944년 6월, 탄처 상사는 항공단 사령관인 카를-고트프리트 노르트만 대령을 보좌하는 제6전투비행병 감독(Jagdfliegerführer 6)에서 근무하는 상급부대 보직이 주어졌다. 이전의 공습 요격 사건으로 인해 일개 비행병이었던 그를 유심히 봐두었던 항공단장은 쿠르트 탄처를 신뢰하며 아끼는 부하로 늘 곁에 두게 된 것이다. 이 시절에 쿠르트 탄처는 6월 말까지 자신의 격추수를 100대로 끌어올렸는데, 이것은 독일 공군에서 81번째 쾌거였다.
9월 1일부로 고트프리트 대령이 동부 프러시안 전투항공병 감독(Jagdfliegerführer Ostpreußen)으로 가게 되자 그 역시 상관을 따라 잠시 후방으로 돌려져 지상 근무를 했다. 전황이 점점 막바지로 치닫던 1945년 2월 10일, 다시 일선으로 돌려진 그는 JG51 제13비행중대로 옮겨져 신형 전투기인 Fw 190D-9을 타게 된다. 쿠르트 탄처는 3월 12일부로 비행중대장에 취임했지만 이미 유명무실해진 공군에서 더 이상의 격추 전과를 거둘 수는 없었다.
2차 대전을 통해 723회의 출격을 한 그는 공인 격추로는 128대로 알려졌지만, 비공식 격추까지 더하면 143기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의 전과 중에서 17기는 서부 전선에서 미영 공군기를 상대로 거둔 것이며, 그중에는 4대의 4발 중폭격기도 포함되어 있다.
패전 후 민간인이 된 쿠르트 탄처는 화학 공장에서 재건 작업을 돕는 일을 하다가 서독 공군이 부활할 때 다시 입대했다.
1960년 6월 25일, 쿠르트 탄처 소령은 록히드 T-33 훈련기를 몰고 지중해 방면에서 일상적인 페리 비행 훈련을 하던 도중 발레아레스 제도 근처에서 악천후를 만나 추락해 순직하고 말았다.
2급 철십자 훈장 / 1급 철십자 훈장
공군 명예컵 (1943년 2월 15일)
독일 황금십자장 (1943년 6월 24일)
기사 철십자 훈장 (1943년 12월 5일)
'''쿠르트 탄처 (Kurt Tanzer : 1920. 11. 1~1960. 6. 25)'''
1. 러시아에서 자란 독일 소년
독일 제국 시대에 관리였던 그의 아버지는 1918년에 제국이 멸망하자 가족들을 이끌고 러시아로 건너가 모스크바에서 살게 된다. 그의 처가 아들 쿠르트 탄처를 낳은 것은 제국이 바이마르 공화국으로 재편성된지 2년도 더 지난 1920년 11월 1일이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쿠르트 소년은 어린 시절 대부분을 러시아에서 보냈으며 그 식구가 다시 고국으로 돌아온 것은 나치가 집권하며 제3제국을 부르짖기 시작한 1930년대 중후반이었다.
2. 공군 입대
쿠르트 탄처는 입대에 관한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지만, 대략 1940년 봄이나 여름쯤에 루프트바페 신병 훈련소에 입소한 것으로 보인다. 훈련소를 나와 제51전투항공단(JG 51) 보충 비행대(Ergänzungsgruppe/JG 51)에서 대기하던 비행병 탄처는 1942년 3월 18일에 실질적인 자대라고 할 수 있는 "묄더스 비행단" JG51 제12비행중대에 배속되었다.
3. 공습을 무릅쓴 반격
상병 계급장을 달고 있던 그는 일찌기 입대하기 전까지만 해도 체계적인 조종 교육 같은 것을 받은 일이 없었지만, 동료들에 비해 확실히 조종에 소질이 있었던 모양이다. 1943년 5월 5일까지 자신은 상처 하나 입지 않고 소련 공군기를 35대나 떨구는 전공을 세운 그는 비행병이라고 무시할 수 없는 솜씨를 보였다. 다음날 5월 6일에는 부대가 주둔하고 있던 비행장에 일류신 IL-2 슈톨모빅 대편대가 예고도 없이 날아들었고, 마침 활주로에서 대기하고 있던 쿠르트 탄처는 재빨리 제일 가까운 곳에 주기되어 있던 Fw 190에 올라타 스크램블 발진을 감행했다. 비행장 활주로에 소련 공군기들이 기총 소사를 퍼붓고 폭탄과 로켓탄이 곳곳에 떨어지는 와중에 위험천만한 이륙에 성공한 그는 2대의 슈톨모빅을 격추시켰다. 교전 도중에 그는 처음으로 적기의 사격에 맞고 부상을 입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공습 편대와 맞서 싸우며 2대를 더 격파한 다음 적기들이 모두 물러간 후에야 활주로에 착륙해 응급실로 실려갔다.
이때 그가 탄 Fw190(W.Nr. 7161)은 격전 끝에 후방 기관총에 의한 탄흔이 여기저기 남고 심지어 기관포탄까지 얻어맞아 심각하게 부서져 있었지만, 쿠르트 탄처는 이 용맹무쌍한 행동으로 여러 동료 전우들의 목숨을 구해냈다. 오른손에 총상을 입고 여기저기 파편에 의한 상처도 난 그는 출혈이 매우 심해서 곧바로 후송 조치되었다.
[image]
4. 100대 격추
손의 부상을 치료한 그가 다시 전선에 나타난 것은 그 해가 저물어 가던 11월 4일이었다. 12월 5일에 39번째 격추에 성공한 이후 중사였던 쿠르트 탄처는 상사가 되면서 기사철십자 훈장을 받게 되었다. 1944년 6월, 탄처 상사는 항공단 사령관인 카를-고트프리트 노르트만 대령을 보좌하는 제6전투비행병 감독(Jagdfliegerführer 6)에서 근무하는 상급부대 보직이 주어졌다. 이전의 공습 요격 사건으로 인해 일개 비행병이었던 그를 유심히 봐두었던 항공단장은 쿠르트 탄처를 신뢰하며 아끼는 부하로 늘 곁에 두게 된 것이다. 이 시절에 쿠르트 탄처는 6월 말까지 자신의 격추수를 100대로 끌어올렸는데, 이것은 독일 공군에서 81번째 쾌거였다.
9월 1일부로 고트프리트 대령이 동부 프러시안 전투항공병 감독(Jagdfliegerführer Ostpreußen)으로 가게 되자 그 역시 상관을 따라 잠시 후방으로 돌려져 지상 근무를 했다. 전황이 점점 막바지로 치닫던 1945년 2월 10일, 다시 일선으로 돌려진 그는 JG51 제13비행중대로 옮겨져 신형 전투기인 Fw 190D-9을 타게 된다. 쿠르트 탄처는 3월 12일부로 비행중대장에 취임했지만 이미 유명무실해진 공군에서 더 이상의 격추 전과를 거둘 수는 없었다.
5. 다시 공군으로
2차 대전을 통해 723회의 출격을 한 그는 공인 격추로는 128대로 알려졌지만, 비공식 격추까지 더하면 143기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의 전과 중에서 17기는 서부 전선에서 미영 공군기를 상대로 거둔 것이며, 그중에는 4대의 4발 중폭격기도 포함되어 있다.
패전 후 민간인이 된 쿠르트 탄처는 화학 공장에서 재건 작업을 돕는 일을 하다가 서독 공군이 부활할 때 다시 입대했다.
1960년 6월 25일, 쿠르트 탄처 소령은 록히드 T-33 훈련기를 몰고 지중해 방면에서 일상적인 페리 비행 훈련을 하던 도중 발레아레스 제도 근처에서 악천후를 만나 추락해 순직하고 말았다.
6. 서훈
2급 철십자 훈장 / 1급 철십자 훈장
공군 명예컵 (1943년 2월 15일)
독일 황금십자장 (1943년 6월 24일)
기사 철십자 훈장 (1943년 12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