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헨시오 바티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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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풀헨시오 바티스타 이 살디바르
(Fulgencio Batista y Zaldívar)
생몰년
1901년 1월 16일 ~ 1973년 8월 6일
출생지
미군정 쿠바 바네스
사망지
스페인국 마르베야
정당
쿠바 진보행동당
종교
가톨릭
배우자
엘리자 고디네즈 고메즈
마르타 페르난데스 미란다 데 바티스타
1. 소개
2. 생애
2.1. 대통령 1기
2.2. 대통령 2기
2.3. 쿠바 혁명과 몰락
3. 관련 문서


1. 소개


쿠바의 군인 출신 대통령으로, 그는 1940년~1944년1952년~1959년까지 11년간 대통령을 역임했다. 최초의 비 백인 대통령으로 몰라토이기도 하다.

2. 생애


1901년 쿠바 바네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빈농으로 쿠바 독립전쟁에 참여했으나, 1902년 독립직후 미서전쟁에 승리한 미군의 진주로 다시 쿠바는 미국의 사실상의 식민지가 되었다. 나중에 그는 미국계 퀘이커교도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 사이 그는 항만, 철도에서 일을 하며 돈을 모았고 1921년 하바나를 여행했다. 그 뒤 군대에 자원 입대했다. 그는 군대에서 일을 하면서 중사로 승진할 수 있었고, 군인 노동조합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때까지야 평범한 깡촌 출신 부사관이었는데...

2.1. 대통령 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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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인생역전한 바티스타
1933년 9월 이름하여 '중사들의 반란'을 일으켜 헤라르도 마차도 이 모랄레스의 독재 정권을 붕괴시켰다. 그리고 이후에 수립된 임시정부 카를로스 마누엘 데 세르페데스의 임시 정부 역시 이 쿠데타로 무너졌다. 알고보면 카다피나세르급 인생역전. 게다가 대통령에 오른 후 처음 4년은 교육 확대와 경제 발전을 성공시켰고, 고작 집권 4년만에 임기를 마치고 물러나서[1] 플로리다에서 여생을 사는가...했는데..

2.2. 대통령 2기


8년후 선거에 다시 출마했으나 낙선하고, 공공산업 파탄과 부패로 도탄에 빠진 쿠바를 구하기 위해서란 명분으로 다시 쿠데타를 일으켰다. 하지만 이 때부터는 다시 흑화하기 시작한다. 자신이 세웠던 1940년 혁명을 다시 깨부수고 비밀경찰을 운용하며 1천에서 2만 명 가까이를 희생시켰다.
개발정책으로 쿠바의 GDP는 한때 이탈리아 수준까지 상승했고, 소득도 미국의 1/6까지 증가했으며, 평균 임금은 남유럽과 비슷한 수준으로 개선되었다.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번째로 컬러TV 본방송을 시작했을 정도였다. 이미 컬러방송을 시작한 미국에서도 컬러TV는 대중적이지 않았고, 다른 국가에서는 흑백TV조차도 사치품이었던 시절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어마무시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쿠바에서도 사정은 별로 다르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러나 10~20%의 실업과 1/3 이상의 국민을 차지하는 빈민층 등 심각한 빈부격차는 개선되지 않았고, 문맹률은 40%대를 기록했을 정도이다.

2.3. 쿠바 혁명과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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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3월, 내전 상황을 점검하는 바티스타.
그는 1956년에 발생한 쿠바 혁명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그는 마피아 등지와 어울려서 을 챙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줄 몰랐다. 1958년까지 미국으로부터의 지원이 들어왔지만 바티스타 정권의 무능함을 알아 챈 '''미국이 중단했다.''' 그는 혁명군이 고작 도시 하나를 점령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겁을 먹었다.
1958년 12월 30일 사실상 그의 치세는 끝났고, 그는 미국으로부터의 망명을 요청했지만 '''미국 측이 거절했다.''' 그는 할 수 없이 자신의 전 재산을 챙기고 같은 독재자인 라파엘 트루히요 치하의 도미니카 공화국에 망명했다.
축출된 바티스타는 포르투갈마데이라로 망명했으며, 이후 포르투갈 리스본 근처 에스트릴로 거처를 옮겼다. 1973년에 스페인 마르베야에서 사망했다.

3. 관련 문서



[1] 사실 이건 그가 후계자로 삼은 자이아스가 대통령에 낙선하고 구루가 대통령이 되었기 때문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