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 공화국(1902~1959)

 




'''쿠바 공화국'''
'''República de Cu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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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국장'''
'''Viva Cuba Libre
자유 쿠바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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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 ~ 1906'''
'''1909 ~ 1959'''

'''독립 이전'''
'''공산화 이후'''
'''쿠바 미국군 정부'''
'''쿠바 제2공화국'''
'''위치'''
쿠바
'''국가'''
바야모 행진곡
'''수도'''
아바나
'''정치체제'''
대통령제 공화국(1902~1940)
이원집정부제 공화국(1940~1959)
군사독재(1952~1959)
'''국가원수'''
대통령
'''언어'''
스페인어
'''통화'''
쿠바 페소
1. 개요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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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쿠바에 존재했으나 쿠바 혁명으로 무너진 옛 국가. 쿠바 제1공화국이라고 한다. 현 쿠바에서는 이 시기가 미국이 식민통치한 시기라며 신식민 공화국(República Neocolonial)이라고 부르고, 쿠바 반공주의자들이나 망명한 쿠바인에게는 자유쿠바(Cuba Libre)라고 불린다. 이 시기의 쿠바 공화국 국장와 국기[1]를 현재까지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2. 역사


1898년에 일어난 미국-스페인 전쟁 이후 미국쿠바군정을 실시하고 3년뒤인 1902년 쿠바를 독립시켰다. 초대 대통령으로는 쿠바의 독립운동가이자 친미주의자인 토마스 에스트라다 팔마(Tomás Estrada Palma)가 선출되었다. 그러나 독립한 쿠바의 헌법에는 미국이 재정·외교문제를 감독할 권리를 주고 플랫 수정안(Platt Amendment)을 승인해[2] 완전한 독립국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미국은 쿠바를 설탕 공급 기지 및 경제적 요충지로 삼았다. 1906년 팔마는 재선에 성공하지만 부정선거 의혹에 휩싸이고 이에 따라 반란이 일어나고 정부군이 패배를 거듭하고 있었다, 팔마는 미국에 도움을 요청했고, 미국은 이를 빌미로 쿠바를 재점령한다. 1909년 쿠바는 다시 독립하지만, 미국의 영향력은 그대로였다.
1917년에는 독일 제국무제한 잠수함 작전에서 피해를 입었으며 이에 따라 미국이 독일에 선전포고한 다음날인 1917년 4월 7일, 독일 제국에 선전포고하였다. 이후 쿠바는 승전국이 되었지만 쿠바에게 돌아온 것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바의 경제는 사탕수수를 중심으로 한 농산물 산업과 관광 산업으로 경제가 꾸준히 발전하고 있었다. 그런데 대공황이 터지자 미국의 영향이 컸던 쿠바의 경제도 나락으로 떨어졌다. 1933년에는 군사쿠데타가 일어났으며, 라몬 그라우 산 마르틴(Ramón Grau San Martín)의 급진적 정부가 들어섰다. 이들은 플랫 수정안을 무효라 선언하고 미국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려 하였다.[3] 그런데 이 정부도 100일만에 풀헨시오 바티스타를 주축으로한 쿠데타로 무너졌으며 카를로스 멘디에타 이 몬테푸르(Carlos Mendieta y Montefur)의 임시 정부도 바티스타에 의해 무너졌다.
그 이후 대통령인 마누엘 마르케스 스털링(Manuel Márquez Sterling)도 무려 '''6시간'''만에 실각했고 그 뒤 집권한 카를로스 멘디에타, 호세 아그리 피노 바넷, 미겔 마리아노 고메즈는 하나같이 임기가 2년을 넘기지 못하고 실각하였으며, 페데리코 라레도 브루의 3년동안의 집권을 거쳐 1940년 풀헨시오 바티스타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바티스타는 교육 기관 확대, 경제 발전으로 쿠바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제2차 세계 대전에는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하였다. 그리하여 1944년에는 라몬 그라우(Ramón Grau)가, 1948년에는 카를로스 프리오 소카라스(Carlos Prío Socarrás)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며, 이 기간동안 쿠바의 경제는 크게 발전하여 도시의 중산층이 부유해졌으나 빈부격차가 심해졌다.
소카라스의 임기 말에 바티스타가 선거를 통해 재집권을 시도하나, 뜻 대로 되지 않자 쿠데타를 일으켜 다시 집권한다... 바티스타의 재집권 이후 경제지표는 발전되었으나[4], 빈부격차는 더 심화되고 실업률이 40%까지 오르며 비밀경찰을 이용한 감시 및 부정부패 등으로 국민들은 바티스타에 등을 돌렸다. 1954년 바티스타는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 다시 선거를 한다고 하였고, 바티스타가 선출된다. 그러나 이 선거는 부정선거 의혹이 많았다. 중산층들도 미국과 쿠바를 비교하며 실업문제로 바티스타를 지지하지 않았다. 반면 특이하게도 노동조합은 끝까지 바티스타를 지지하였는데, 이는 바티스타가 해고와 공장의 기계화를 금지하는 등 노동자들을 우대해준 탓이 크다.
부패한 바티스타 정권은 점차 무능해졌으며, 쿠바 혁명이 일어나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바티스타의 무능함을 파악한 미국이 쿠바 정부군 지원을 중단하는 등 점차 버거워져 갔고, 농촌의 지지를 받으며 기세가 등등했던 혁명군에 정부군이 점차 밀렸다. 결국 바티스타가 1959년 1월 1일,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망명하였다. 안셀모 알리에그로 밀라(Anselmo Alliegro y Milá)와 카를로스 마누엘 피에드라(Carlos Manuel Piedra)가 하루씩 정권을 잡았다가 피델 카스트로에 의해 실각하고 쿠바의 자본주의 체제는 무너진다.

[1] 다만 국기의 파란 줄이 조금 진해졌다.[2] 미국이 쿠바 국내의 문제에 대해 미국이 개입할 수 있도록 한다, 미국에게 관타나모 만을 영구 양도한다. 등의 내용이였다.[3] 실제로 플랫 수정안은 미국의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회유책으로 1930년대에 무효가 된다.[4] 이때 쿠바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였으며, 일부 유럽 국가들보다도 더 나은 수준이였다. 실업률이 40%이고 문맹률이 20%대라는 상황을 감안할때 이 당시 부유층은 미국 부자만큼 잘살았고, 혜택받은 중산층들도 왠만한 미국 중산층급으로 잘살았지만 인구의 다수는 후진국 수준으로 먹고살았다는 의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