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웨이트(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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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웨이트 타워 일대의 스카이라인
1. 개요
아랍어 مدينة الكويت
쿠웨이트의 수도이자 주요 무역항. 쿠웨이트 만의 남쪽에 세워진 도시로, 인구는 240만 명이다. 바티칸 시국이나 모나코, 멕시코, 과테말라, 파나마, 싱가포르 등과 함께 수도 이름이 곧 나라 이름인 몇 안 되는 도시들 중 하나이다. 대한민국에는 쿠웨이트시티 직항이 없어서 환승해야 한다.
2. 역사
현재의 도시는 1672년 바니 칼리드 연맹[2] 의 북쪽 변방을 방어하는 성채로 지어졌다. 그러던 1716년 네지드 출신의 바니 우투브가 바니 칼리드의 북쪽 방어를 맡는다며 허락을 받아 정착하였고, 그 중에서 알 사바흐 가문이 점차 권력을 장악하고 쿠웨이트 셰이크 국을 세웠다.[3] 쿠웨이트는 인도-이라크 간의 중개 무역과 선박 제조업, 진주 채취 등의 산업을 바탕으로 성장하였다. 쿠웨이트산 선박은 인도양에서 유명했고, 그 선원들도 수준 높기로 유명했다. 무역에 있어서는 기존 중심인 바스라가 흔들릴 때에 쿠웨이트가 그 대체재로 각광받았다. 한번은 오스만 제국과 이란의 잔드 왕조 간의 전쟁 시에 바스라가 이란군에게 점령되자 그 상인들이 쿠웨이트로 망명하였다. 그들로 인해 쿠웨이트의 무역은 전문화될 수 있었고, 1792년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오스만 제국의 높은 세금을 피해 바스라의 공장을 쿠웨이트로 옮겼다. 이러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쿠웨이트는 1760년에 이미 도시를 성벽으로 둘러 그 부를 탐내는 외세에 맞섰다.'걸프의 마르세유' [1]
쿠웨이트 성벽의 옛 모습. 1956년 도시 재개발로 사라진 후에는 성문만 서너개 남아있다
쿠웨이트에 대한 외세의 침공은 18세기 말부터 빈번해졌다. 1783년 알 락카 전투에서 쿠웨이트 해군은 쿠웨이트 시를 침공한 후제스탄의 바누 카압을 얕은 물로 유인해 격파하였다. 1793년에는 사우드 왕조 (디리야 토후국)가 공격해 왔으나 격퇴되었다. 2년 후 바니 칼리드를 멸망시키며 동부 아라비아의 패권을 장악한 사우드 가문은 재차 쿠웨이트를 공격했으나 동인도회사의 영국인들이 쿠웨이트 측에 화력 지원을 해준 덕에 패퇴하였다. 19세기 초에 1차 사우디 국가가 오스만령 이집트 총독 메흐메트 알리에게 멸망한 후 쿠웨이트는 장기간의 평화를 누리게 된다. 영국과의 관계도 우호적으로 유지되어 1825년 동인도회사는 재차 바스라의 공장을 쿠웨이트로 이전하였고, 1899년에는 영국과 보호 조약을 체결하였다. 한편 오스만 제국을 도와 2차 사우디 국가를 멸한 쿠웨이트는 이후 1900년에 역으로 사우드 왕가가 네지드를 수복하는 것을 도와준다. 그러나 1920년 사우드 군대가 쿠웨이트를 공격해오자 주민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2개월만에 도시에 외성을 쌓는 저력을 발휘하여 살아남을 수 있었다.[4]
20세기 초의 시련을 겪은 후 석유 시대의 도래와 함께 쿠웨이트는 엄청난 발전을 이루게 된다. 1950년부터 쿠웨이트는 공공 건설 사업이 시작되었고, 1955년에는 도시를 두른 성벽이 철거되었다. 1990년 걸프전 당시 이라크 군에게 점령되어 큰 피해를 입었으나 이후 빠르게 복구되어 현재에 이른다.
3. 여담
외국인들에게 쿠웨이트시티는 카타르의 도하라던가 UAE의 두바이 등과 더불어 투자하기에 딱 좋은 대표적인 중동의 허브 도시지만, 아직 이들에 비하면 나름 부실한 게 많고 인지도도 많이 떨어지는 편이다. 하지만 산유국인 쿠웨이트답게 지금 무지막지 지어대고 있으며 앞으로는 두바이나 도하 등을 상당히 위협할 것으로 보인다.
두바이 못지않게 마천루들이 많은데, '''1,001m'''짜리 부르즈 무바라크 알카비르를 계획 중이다. 그러나 이런 마천루 숲과 달리 조금만 도심을 벗어나면 도로에 구멍이 심심치 않게 보이는 등 부실한 모습들이 보이기도 한다. 보행자 도로가 거의 없는 것은 덤
바이트 알 오스만 박물관, 타레크 라자브 박물관, 국립박물관과 사두 하우스, 옛 성문들 등의 역사 유적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