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드 왕조
1. 개요
آل سعود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조.
2. 역사
1744년 종교학자 압둘 와하브와 토후 무함마드 이븐 사우드가 동맹전선을 결성하고 디리야[1] 에 국가를 건설한 것이 왕조로서의 사우드 가문의 시작이다. 오스만 제국은 별 관심을 두지 않았고, 실제로 약 40년 동안 사우드의 영토는 디리야 근처의 아주 조그만 땅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사우드는 그동안 칼을 갈며 병사들을 양성했고, 1780년대부터는 빠른 속도로 아라비아 반도를 정복하여 1805년에는 이슬람의 최대 성지인 메카와 메디나까지 정복한다.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오스만 제국은 이집트 속주의 군대를 보내 1811년 와하브파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1818년 사우드 군은 패배하여 저항 역량이 뿌리채 뽑히면서 독립국가를 세우겠다는 꿈은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만다.
그러나 사우드 가문은 독립국가를 세우겠다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1824년 투르키 이븐 압둘라가 다시 독립국가를 선포하고 아라비아 재정복을 시도하였다. 19세기로 접어들면서 오스만 제국은 맛이 가기 시작했고, 이 틈을 타 웬만한 넓이의 영토를 거느릴 수 있었다. 하지만 사우드 가문의 역사 깊은 라이벌 가문인 라시드 가문과의 전쟁에서 패하여 1891년 망한다. 아라비아의 판도는 오스만의 지원을 받은 라시드 가문의 하일 토후국에 넘어갔다. 사우드 가문은 오스만령 이라크와 쿠웨이트로 도망가 후일을 도모할 수밖에 없었다.
1902년 사우드 가문의 압둘 아지즈가 하일 토후국으로부터 리야드 지방을 탈환해 세 번째 독립국가를 건설한다. 압둘 아지즈는 1913년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알 하사 지역과 카티프를 빼앗아 영역을 확대했고, 한참 티격태격하던 하일 토후국이 제1차 세계 대전에 패전한[2] 틈을 타서 공격하여 1921년에 완전히 병합한다. 그 이후 자신감에 부푼 압둘 아이즈는 술탄을 자칭하며 국명을 리야드 토후국에서 네지드 술탄국으로 바꿨다.
한편 하심 가문의 후세인은 제1차 세계대전 중 영국에게서 맥마흔 선언으로 아랍의 독립 약속을 받아 1916년에 오스만 제국에 대항해 봉기를 일으켰다. 전쟁이 끝난 후 영국은 후세인의 차남 압둘라를 요르단의 왕으로, 삼남 파이살을 이라크의 왕으로 각각 임명했으며, 후세인 본인은 메카와 메디나를 거점으로 한 헤자즈 왕국의 왕이 되었다. 그러나 후세인은 아랍 통일 왕국을 세워주겠다던 영국의 처음 약속이 지켜지지 않자 1924년 스스로를 모든 무슬림의 칼리프로 선언했다. 이는 많은 반발을 불러왔고, 같은 해 결국 사우드 가문의 압둘 아지즈가 후세인을 공격했다. 후세인은 키프로스를 거쳐 차남이 다스리던 요르단으로 도망갔고, 헤자즈의 왕위는 그의 장남 알리가 계승했으나 1년 만에 압둘 아지즈에게 정복당하고 이라크로 추방되었다. 압둘 아지즈는 네지드-헤자즈 이중 왕국을 다스리다가 1932년에 두 나라를 통합해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을 선포하고 초대 왕이 되었다.
3. 권력구조
사우드 왕조는 왕위를 부자 상속이 아니라 형제 상속제로 물려 준다. 2대에서 7대 국왕까지 모두 1대 국왕인 이븐 사우드 국왕의 아들들이다. 따라서 왕위 계승자도 왕세자가 아닌 왕세제(하지만 영어로는 양쪽 다 같은 Crown Prince)이다. 그러나 아래에 기술한 것처럼 다음 국왕부터는 이븐 사우드의 손자 세대로 세대 개편이 될 예정이다.
현재 국왕은 1935년생인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이다. 즉위 전에는 왕세제 겸 국방장관이였다. 아울러 초대 국왕 이븐 사우드의 '''35번째 아들'''인 1945년생 무크린 빈 압둘 아지즈가 왕세제였으나 2015년 4월 29일 살만 국왕의 칙령으로 무함마드 빈 나예프 내무장관이 새 왕세'''자'''가 되었다. 나예프 왕세자는 살만 국왕의 동복형제 나예프 빈 압둘 아지즈의 아들로, 사우디아라비아 건국 후 최초로 왕위 계승에서 세대교체가 이뤄지는 셈이다. 이븐 사우드의 아들 세대는 다들 나이가 너무 들어 버렸기 때문에 세대교체 자체는 이미 점쳐졌던 부분이지만, 나예프 왕세자가 국왕이 된 후의 왕위 계승이 부자 상속이 될지 다시 형제 상속이 될지는 아직 미지수이다. 게다가 이 세대교체에도 긍정적인 측면만 있는 게 아니라서, 초대 이븐 사우드의 왕비들 중 제8비 '수다이리' 왕비의 소생들로 구성된 '수다이리 파벌'이 다시 사우디의 정권을 장악한다는 부정적인 측면도 있다.#, # 살만 현 국왕, 파드 5대 국왕, 나예프 현 왕세자의 부친 나예프 왕자는 수다이리 왕비의 소생이며, 전 압둘라 국왕과 해임된 무크린 왕자는 수다이리 왕비의 소생이 아니었다. 문제는 아래 항목에 나온 왕실의 부정부패 대다수가 이 수다이리 파벌과 연관이 있어서. 결국 2017년 6월 21일, 살만 국왕이 조카 나예프를 왕세자 자리에서 쫓아내고 친아들 무함마드 빈 살만을 왕세자로 삼는 칙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왕위 계승에 있어서 세대교체는 물론이거니와 '''부자 상속'''까지 확정짓게 되었다. # 사우디 왕실 역대 권력다툼 이야기 사우디 왕실 역대 권력다툼 이야기2 11월부터 왕가 내부에선 '사우디판 이방원' 빈살만에게 위협이 되는 왕족들이 대거 숙청당하는 '왕자의 난'이 진행되고 있다. 급기야 체포한 왕자 너무 많아… 호텔 하나로 모자라 옆 호텔도 '교도소'로 쓰이고 있다. 2018년 4일에는 11명의 왕자들이 전기·수도요금 지원 중단 결정을 취소해 달라며 리야드에 있는 카스르 알후크 궁전에 모여 집단으로 농성을 벌이다 체포됐다.
전 압둘라 국왕은 1924년생으로, 엘리자베스 2세보다 나이가 많았다. 자녀는 14남 20녀 (34명)을 두고 있다. 2015년 1월 23일 사망. 묘소는 사망 당일에 마련되었는데, 진짜 그냥 문자 그대로 돌무덤이다.
4. 부정부패
왕실이 부패한 것은 모두가 아는 비밀. 왕실이 국가의 모든 것을 통제하는 나라답게 '''부패의 스케일도 상상을 초월할 지경'''이다.
리야드 상공회의소 변호사회 회장 마제드 가룹 (Majed Garoub)이라는 사람이 2007년 2월 23일에 했던 발언인데, 당시 압둘라 국왕이 반부패운동을 진행하고 있는 가운데 나온 말이니 반부패운동 전에는 어땠을지 짐작이 간다.'''사우디 행정 부패는 세입의 8,000억 달러(약 900조원)의 손실을 가져왔다.'''
Saudi administrative corruption has resulted in $800 billion in lost revenue for the country.
그 외에도 전 국왕 파드 빈 압둘 아지즈는 1985년 왕자의 낭비벽이 심하다는 말이 많자 이렇게 말했다.
간단한 계산을 해보자면, 이것은 사우디의 유명한 비리 건인 알-야마마 거래이다. 현재도 유로파이터의 판매를 통해 지속되고 있다. 매일 60만 배럴의 석유를 받는 거래에 그 대금의 최대 45퍼센트의 커미션(즉 뇌물)을 받는다고 예상되는 사업이다. 1배럴을 50~110달러[4] 로 잡고, 커미션을 20~45퍼센트로 잡으면, 커미션은 매일 600만~2970만 달러가 되고 1달러를 1100원으로 보면 66~327억 원. 매일 이 사업만 가지고 최대 327억, 매년 약 '''10조 원'''의 뇌물이 그냥 들어온다. 게다가 사우디정부가 재정긴축에도 왕족들은 여전히 호화로운 사치를 벌이고 있어서 국민들의 불만이 커지고 있다.#"(당시 15살이었던)어린 아주지가 돈을 너무 많이 쓴다고들 하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알라께서는 우리에게 부를 가져다 주셨고, 우리는 기꺼이 그 부를 우리 아들과 나눌 것이다. 나는 쓰고 싶은 데 쓸 수 있도록 그 아이의 개인통장에 방금 3억 달러[3]
를 입금해 준 참이다."
농담 아니고 이렇게 부정축재할 돈의 절반만이라도 국고로 온전히 환수시켜 국가예산에 제대로 반영해 썼더라면 사우디아라비아 세계 경제순위는 몇 계단 뛰어올랐을지도 모른다.
사우디아라비아 외교관의 10대 아들이 절도범죄를 저지르고도 면책특권으로 석방됐다.#
이건 사실 약과다.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 더 많다. 사우디아라비아인들의 지지도가 높기 때문에 피해자들이 협박을 받고 쉬쉬하는 분위기도 있다고 한다. 이건 동영상이 찍혀 외국에도 비난이 많은 것이라 사우디 왕이 조치를 취한다 했으나 과연 #
5. 국왕
사우디아라비아 국왕 문서 참고.
6. 왕족들
일단 왕가와 먼 친척이기만 해도[5] 왕자, 공주로 불리기 때문에 영어권, 특히 미국, 영국 대학에 가면 사우디 왕자, 공주가 널려 있다. 물론 모두 부자다.[6] 보통 중고등학교 때부터 유학을 시키는 듯. 현 사우디 국왕도 미국에서 초등학교, 중고등학교와 대학을 나왔고, 아랍어는 아예 과외교사를 따로 두고 공부했다. 그러다보니 말이 사우디인이지 심리/문화적으로는 오히려 미국인이나 유럽인에 가깝다는 말이 있다. 더 말할것 없이 자국민들에겐 중세보다 못한 꽉막힌 종교적 근본주의적 질서를 강요하면서 막상 상류층 자녀들은 전부 유럽, 미국에서 자라나게 해 조금만 캐보면 저런 현대적 향락에 찌들어사는 모습 또한 점점 알려져가고 있다...
공식적으로 'Prince' 칭호[7] 를 가지고 있는 사람만 7,000명(...)이 넘는다.(...) 이들은 사우디 정부에서 생활비를 지원받고, 해외여행이라도 하고 싶으면 비즈니스 클래스 항공권을 무료 제공받는다. 국가 자체가 사우드 가문의 소유물이라 가능한 일.(...)
참고로 곽백수가 그리던 트라우마에서 돈 많은 남정네 남편을 찾던 여자에게 사우디 아라비아 같은 나라 왕의 6번째 아내로 결혼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건 웃자고 하는 일이지만, 아랍 이슬람에서 알면 꽤 화낼 일일 듯하다. 알다시피 4명까지만 일부다처제가 허용되는 이슬람이니까...그렇긴 해도 사우디 국왕들은 이탈리아 유명 기자 오리아나 팔라치가 비아냥거렸듯이 아내를 10명에서 20명 이상 넘게 두었다고 한다. 물론 4명 넘으면 이전 아내와 이혼하고 위자료는 두둑히 준다.
참고로 팔라치는 당시 요르단 국왕 후세인 1세를 방문하고 사우디아라비아 왕도 방문했는데 두 사람이 너무나도 노골적으로 비교된다며 글로 사우디 왕과 왕실을 꼴통이고 막 돼먹었다고 실컷 비난했다.
한국의 한 여성 스튜어디스가 해외 유학 중 겪은 일인데, 사우디 왕족이 동창인데 개인 비서도 여럿 두고 고급차량을 타고 아주 돈지랄을 했는데 여친들이 여럿이었다고 한다. 호강해서인지 힘든 일 안하는 것을 자랑하는데 학교 문을 열어주는 일까지 비서가 알아서 해주더란다. 그래놓고 우리집안은 왕가에서 서열이 낮다고 왕족회의가면 무시당해 한이 맺힌다고 하는데 한 급우가 '그러는 너희 집안 재산은 어느 정도냐?'라는 질문에 '''고작 5,000억원 수준'''이라고 말해서 다들 경악하며 멍때렸다나(...).[8]
다른 경험담도 있는데 이번에는 일본에서 유학하던 이가 겪은 일이라고 한다. 역시 사우디 왕족이지만 생김새가 아무리 봐도 슬라브인 같은 외모도 보였는데 어머니가 우크라이나 여성이었다. 이 친구는 위에 서술할 정도로 돈지랄을 하지 않고 검소하게(?) 지내기에 사람들은 그냥 사우디아라비아 유학생인가 했는데 술자리에서(물론 본인은 술을 안해서 다른 걸로 마시고) 집안 이야기를 하더란다. 자신도 왕가에서 서열이 낮다고 말하는데다 평소 검소하게 지내서 최하 등급인가 했더니만 세월지나 보니 나중에 일본 신문에 이 왕족이 나오는데 집안 개인 재산이 3조(...)가 넘었다. 하긴 어머니 이야기를 하는데 어머니네 고향마을에서 난리가 났다고 한다. 그 마을에선 우리 마을 역사상 최대 부잣집으로 시집간다고 온갖 축하를 받고 아버지가 보란듯이 고급 차량에 고급 혼수품을 수두룩하게 가져와 처가에 대하여 마을 사람들이 온갖 부러움을 보였다는 이야기를 할 때부터 알아야 했다고 투덜거리는 글을 쓴 이도 있다.[9]
하사 빈트 아메드 알 수다이리가 13살 때 38살이었던 사우디 아라비아의 초대 국왕인 이븐 사우드와 결혼하여 여덟번째 부인이 되었으나 이혼하고 이븐 사우드의 이복형제와 재혼한다. 왕의 이복동생과의 사이에 아들도 한 명 낳았던 수다이리였으나 남에게 주고 나니 자신의 떡이였던 남의 떡이 더 커보였던지 국왕이 자신의 이복동생과 이혼시키고 다시 자신의 열번째 부인으로 맞아들인다.[10]
7. 관련 문서
[1] 아라비아 정중앙에 있는 마을이다.[2] 하일 토후국은 1차 대전 당시 '''동맹국'''으로 참전하였다.[3] 당시 환율로만 해도 2400억 원인데, 이 때가 1985년이다. 달러화 가치 변화를 고려해서 현(2013년) 시세로 환산하면 최소 7배 이상이다.[4] 실제 두바이유는 2013년 11월~12월 사이 배럴당 100~110 달러에 거래되고 있으나, 이 거래 이후 전 기간 동안 이 유가가 유지된 것도 아니니 이렇게 서술해 두었다.[5] 아랍 유목민들은 혈연집단의 소속감이 강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어쨌건 사우디아라비아가 생기기 전부터 사우드가문의 근성있는 호족집단으로 활동했기에 반대로 사우디아라비아가 생기고 왕이 생겨도 다 같은 가족으로 인정해준다.[6] 유튜브에서 "Rich Arab"을 검색하면 한 사우디 왕자가 술집 접대부랑 댄서에게 돈을 '''뿌리고 끼얹는''' 영상을 볼 수 있는데, 옆과 뒤에 비서들이 들고 있는 지폐의 양이 어마어마하다. 저 왕자들의 가족과 가까운 친척들의 재산을 합하면 '''조''' 단위로 찍힌다. 더 놀라운것은 해당 영상 속 왕자들의 왕위 계승 순위는 '''굉장히 낮은 하급 왕족들'''인데 돈지랄이 이정도인 것이다. 그러니 국왕이랑 고위 왕족들의 돈지랄은 상상을 초월한다.[7] 한국에선 단순히 왕자라고 부르지만 좀 더 넓게는 왕족남자를 지칭하기도 한다.[8] 그래서 이 책자에 나온 그 유학간 나라인 미국에서도 남학생들이 다들 이 왕족과 친해지려 아부를 많이 했다고. 여학생들도 마찬가지라 여친도 수없이 바꿔가며 지냈다고 한다. 글쓴 여성도 너무 재수없어서 난 거들떠도 안봤지만 때론 저런 부자라면 저렇게 여자애들이 꼬리 칠 만 하겠다고 한숨도 나왔다고 한다.[9] 일본에서 지내는 외국인(한국인도 있음) 및 일본인을 개별적으로 하나씩 인터뷰하며 쓴 책자로 여러 시리즈로 나온 책자였다. 인도라든지 여러 나라에서도 똑같이 거기서 지내는 외국인 및 현지인을 인터뷰하며 사진과 같이 국적과 여러 이야기를 담았다.[10] 왕과 2번 결혼한 미모의 왕비와 아들 7형제 http://mnews.joins.com/article/21921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