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하

 




도하 (카타르)

1. 개요
2. 역사
2.1. 근대 카타르의 형성
2.2. 진주와 석유
3. 상세
4. 교통
5. 그 외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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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ha
الدوحة [1]
카타르의 수도.
1825년 도시가 만들어졌는데, 도시의 이름인 도하(Doha)는 아랍어로 큰 나무를 의미한다고 한다. 영국의 식민 지배 당시 이 지역의 중심지로 기능하다가 1971년 카타르가 독립한 후 정식 수도가 되었다. 항구 중심부에 있던 알 비다와 합쳐져 현재의 도시가 되었으며, 이후 시가지 확장과 함께 남쪽 10km의 알 와크라와도 시가지 연담화가 이루어지는 중이다.

2. 역사


도하는 17세기 말부터 존재한 항구 도시 알 비다의 근교에 알 부아이닌 부족의 족장 부후르 빈 주브룬에 의해 1825년 건설되었다. 3년 후, 부후르의 후계자인 무함마드 빈 카미스가 당시 카타르 북부를 지배하던 바레인의 알 칼리파 셰이크에게 감금되었다, 이에 알 부아이닌 부족은 반란을 일으켰으나 바레인 군에 패하고 축출되었다. 이로써 무정부 상태에 놓인 알 비다와 도하 일대는 해적들이 피신처로 삼는 등 무법 천지가 되었다. 그후 알 비다는 수와디 부족의 족장 술레이만 빈 나시르의 소유가 되었고, 그는 영국의 요구대로 도시에 피신해 온 굴레타와 자심 빈 자비르 등 해적들을 인계하였다. 그럼에도 영국은 술레이만을 공모자라고 모함하며 해적으로 인한 피해 보상금 납부를 명하였다. 술레이만이 불복하자 1842년 2월 영국 함대가 알 비다를 폭격, 기어이 배상금을 받아내었다.
그러던 1843년 5월, 알 빈 알리 부족의 족장 이사 빈 타리프가 도하로 이주하였고 기존 수와디 부족을 축출하였다. 그는 기존에 알 칼리파 가문에 충성했으나 그 계승 문제에서 분쟁을 겪었고, 1847년 푸와이리트에서 바레인 군대와 싸우다 죽었다. 푸와이리트를 지배하던 알 싸니 가문은 그 직후 무함마드 빈 싸니의 지도 하에 도하로 이주하였다. 알 싸니 가문은 상황에 따라 지역 강국들인 바레인의 알 칼리파 혹은 네지드의 사우드 가문에 번갈아가며 복속하였다. 그러던 1867년 바레인-아부다비의 2700여 연합군이 도하와 알 와크라를 공격하였다.[2] 영국측 기록에 의하면 그해 말엽 도하와 와크라의 가옥들이 허물어지고 주민들이 반출되어 도시가 일시적으로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다만 이듬해 알 싸니 측의 반격으로 바레인 함대가 괴멸되자, 영국의 중재로 휴전이 체결되었다. 알 싸니 가문의 카타르는 바레인에 복속한 상태로 자치를 얻을 수 있었다.

2.1. 근대 카타르의 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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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년 오스만 당국에 의해 세워진 알 쿠트 성채[3]. 1927년 중건되었다
1871년 알 하사를 점려한 오스만 제국은 그해 12월 1백의 분견대를 파견해 도하의 무살람 요새를 장악하였다. 사우디의 공격에서 보호받고 싶었던 무함마드 빈 싸니의 아들 자심은 이를 수용하였다. 당시 오스만 지휘관이던 소령 오메르 베이가 1872년 1월 작성한 보고에 의하면 알 비다는 행정 치소로써 1천 가옥에 4천여명이 거주하였다. 한편 산하 부족들의 반발에도 오스만 측에 충성을 유지하던 자심은 오스만 조가 군사적인 도움도 주지 않으면서 내정 간섭에 나서는 것에 반발하고 1892년 8월 납세를 거부하였다. 이에 바스라에서 2백의 오스만 군이 총독 메흐메드 하피즈 파샤의 지휘 하에 남하, 1893년 2월 카타르에 당도하였다. 사형 혹은 투옥을 염려한 자심은 북쪽의 앗 다얀으로 도주했다가 다시 도하 외곽의 알 와즈바 요새로 피신하였다. 메흐메드는 하피즈 파샤는 협상을 시도했으나 자심이 와병을 핑계로 동생을 보내자 그 사절단을 체포하고 요새를 공격하였다.
이어진 전투에서 오스만 군은 3천에 달하는 카타르 군의 포화에 타격을 입고 셰바카 성채로 피신하였다. 쿠웨이트에서 오기로 한 원군도 카타르 측이 그 전령을 사로잡은 결과 합류하지 못하였고, 절망한 오스만 군은 함선이 정박해 있는 알 비다로 향하였다. 분풀이로 그곳의 주민들에게 총을 난사한 오스만 군[4]은 우선 알 비다 요새에 주둔하였다. 얼마 후 자심의 카타르 군대가 요새를 포위, 식수를 차단하였다. 물자 부족에 시달리던 오스만 군은 포로 석방 대가로 안전한 후퇴를 보장받은 후 카타르를 떠났다.[5] 또다른 반란을 염려한 오스만 조정은 자심에게 전적인 사면을 내리고 메흐메트 하피즈 파샤를 해임하였다. 비록 1915년까지 명목상 오스만 제국의 속령으로 남았지만, 알 와즈바와 알 비다 전투의 결과 카타르는 알 싸니 가문 하에 통합된 사실상의 독립된 근대 국가를 이룰 수 있었다. 오스만 측에 의하면 당시 (둘다 '카타르'로 불린)[6] 알 비다와 도하의 인구는 합쳐서 6천에 이르렀다 한다.

2.2. 진주와 석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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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와 80년대의 도하 풍경
도하는 비록 수심이 얕아 큰 선박을 수용할 수는 없었지만 지형적으로 만 형태였기에 자연 항구였다. 20세기 초엽 도하는 진주 채취와 그 무역에 힘입어 인구가 1만 2천까지 증가하였다. 한 영국인 요원은 만약 진주 생산량이 감소한다면 카타르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 기록하였다. 1907년 도하는 350척의 진주 채굴선과 6300명의 선원을 지니고 있었다. 같은해 진주 가격은 1877년의 그것에 비해 2배 이상 올라 있었으나 그해 말엽 진주 가격이 폭락하였다. 카타르의 진주는 반값으로 팔려야 했고, 그 충격의 여파를 일부나마 상쇄하기 위해 도하에는 카타르 최초의 세관이 세워졌다. 당시 도하에 대해 영국인 로리머는 그 거리가 좁고 또 어지러우며, 가옥[7]들이 작으며, 나무는 야자수조차도 없어 유일한 정원은 350명의 튀르크 수비대가 배치딘 요새 근처에만 하나 있는 볼품없는 도시로 묘사하였다. 그러던 1913년 4월, 영국의 요구대로 오스만 조는 카타르에서의 철수에 합의하였다.[8]
1915년 8월 오스만 군의 철수 이후 카타르는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고, 도하는 그 정식 수도로 선포되었다. 당시 군주는 자심의 아들인 압둘라 알 싸니였다. 기존에 쌍둥이 도시이던 알 비다는 도하의 행정구역 중 하나로 편성되었다. 한편 1920년대 이후 양식 진주의 도래와 대공황이 겹치며 진주값은 폭락하였다. 이로써 인구 감소를 겪는 등 도하는 50년대 전까지 험난한 시기를 보내게 되었다. 그나마 1939년 근해에서 석유 채굴이 시작된 것이 희망의 전조였다. 1949년 알리 빈 압둘라의 즉위와 함께 석유는 카타르 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였다. 이에 힘입어 1952년 첫 정규 남자 학교가 세워졌고 3년 후에는 여학교도 세워졌다. 1971년 카타르의 독립 후 깊은 수심의 항구가 완성되어 국제적인 교역항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50년대에 1만 4천이던 인구는 해외 이민과 함꼐 8만 3천까지 늘어났다. 73년에는 카타르 대학교가 세워졌고 75년에는 옛 왕궁이 국립박물관으로 개조되었다. 이후 지속된 교외 지역 개발과 함께 도시가 팽창, 인구는 1997년 43만 4천명에서 2015년 95만 6천까지 늘어나 현재에 이른다.

3.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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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르의 주 수입원인 석유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도시이며, 사실상 카타르의 모든 것을 총괄하는 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카타르가 인구 257만(2017년 기준)명의 소국이지만 도하의 인구는 약 40만 명 가량이며, 광역 인구권을 합치면 135만명이나 되는 인구가 도하 근처에 거주한다. 애당초 카타르 자체가 그리 크지 않은 나라이기 때문에 그런 점도 있지만.
기후는 중동답게 전형적인 사막기후를 띄고 있다. 가장 더운 7월의 평균기온은 35.3℃로, 낮 기온은 평균 41.9℃에 달한다. 역대 최고 기온 기록은 50.4℃. 강수량은 거의 없지만 바다의 영향인지 연평균 습도는 59%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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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학적 위치를 활용해서 장기적으로 석유 이후의 경제에서 서남아시아 권역의 교역과 물류의 중심지로 발돋움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그에 따라 2012년을 목표로 기존의 도하 국제공항을 대체하는 도하 하마드 국제공항을 2014년 4월 30일에 개항했다. 항만도 새롭게 만드는 등, 도하를 서남아시아의 물류 중심지로 만드는 작업이 한창이다. 물론 석유 거래의 중심지라는 것도 여전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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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하 동북쪽에 세워진 인공섬 카타르의 진주 (알 룰와 카타르). 베네치아를 구현하려 노력하였다.

4. 교통



5. 그 외


스포츠에도 많은 신경을 써서 2006 도하 아시안 게임, 2030 도하 아시안 게임의 개최지다. 그리고 2022년 FIFA 월드컵 개최지가 카타르로 결정되면서, 도하에서 결승전이 치러질 예정이다.
2019세계육상선수권대회가 도하에서 치뤄졌다. 개최하지 못한 메이저 스포츠대회는 올림픽밖에 남지않았다.
올림픽을 개최할 정도로 다수의 스포츠대회유치경력이 있고 아시안게임과 , 육상선수권, 월드컵을 개최하면서 경기장, 인프라도 거의 갖춰져 중동에서 올림픽을 개최한다면 할만한 도시는 사실상 도하밖에 없다. 중동에서 처음 개최할만한 유일한 도시후보이기도하고 실제로 계획까지 했던적도있으나 결선투표까지는 간적이 없다.
원예박람회인 2021 도하 엑스포가 개최될 예정이다.
대한민국 스포츠 팬들에게 있어 가 교차되는 장소며 도하의 기적도하 참사 참고.
도하 근처에는 카타르의 유일한 워터파크인 아쿠아파크 카타르가 있다. 이드 기간에는 엔터테이너 할인이 안 되니 할인을 받고 싶다면 이드 기간을 피해서 방문하는 것이 좋다.
2018년 세계 최초로 5G new radio 네트워크 서비스를 개시한 도시이다. 카타르 통신사 우레드가 슈퍼넷이라는 이름으로 인공섬 펄 카타르를 포함해 하마드 국제공항에 이르는 지역에서 해당 서비스를 출시했다.
2019년 5월 8일 지하철이 개통되었다. 월드컵 대비용. 일단 레드라인의 1단계 13개역이며, 2단계는 신도시 연계를 위한 향후 개통예정구간이다. 열차에 좌석등급이 3단계로 나뉘어져 있다고 한다. 향후 환승역이 될 역도 이 1단계에 포함된다. 향후 환승역이 될 역은 므셰이레브(3개 환승)와 알 비다(골드라인 제외한 두 개 노선).

[1] 아드다우하[2] 바레인은 자꾸 충성을 번복하는 것에 질려서, 아부다비는 오만인 망명자들을 알 와크라가 받아주는 것이 불만이었다[3] 쿠트가 아랍어로 성채이다. 쿠웨이트의 어원이기도 하다[4] 육군의 화기는 물론 함포까지 동원[5] 다만 사장자 수는 카타르가 4백, 오스만은 수십명에 불과하긴 했다. 물론 카타르 측 사상자에는 상당수의 민간인이 포함된 것은 사실이다[6] 알 비다는 서부, 도하는 동부 카타르[7] 진흘과 돌, 산호 등으로 지어짐[8] 이는 1차 대전 중이던 1915년 8월에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