쿼런틴(소설)
1. 개요
Quarantine. 1992년에 출판된 오스트레일리아 SF 작가 그렉 이건의 하드SF 소설로 국내에서는 행복한책읽기에서 정발되었다. 옮긴이는 김상훈. 양자역학을 메인 테마로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제목은 '격리'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하드한 사변론적 SF로 유명한 그렉 이건이지만, 국내에 번역된 장편은 쿼런틴이 유일하다. 단편은 몇 개 있지만... 전반적으로 굉장히 골치아픈 류의 소설을 쓰기 때문인 걸로 보인다. 사실 쿼런틴은 그렉 이건이 쓴 소설 중에서는 이해하기 쉽다. 머리 아프고 싶으면 Permutation City 같은 책도 있다.
2. 줄거리
2030년대의 어느 날, 원인을 알 수 없는 현상으로 인해 태양계 전체를 정체불명의 사건의 지평선 같은 장막[1] 이 둘러싸는 바람에 태양계가 외부 우주와 격리되는 사태가 발생한다. 밤하늘에서 태양계 외부의 별들이 모두 사라져버리는 사태가 발생하자 전 세계는 혼란에 빠지지만[2] 그 이상의 재앙은 발생하지 않은 채 30년의 세월이 흐르게 된다.
2060년대, 평범한 사립탐정이었던 주인공은 평생을 뇌성마비로 살던 환자가 보안시설로 중무장된 수용시설을 불가사의하게 탈출한 사건을 조사하던 끝에 태양계를 에워싸는 격리막이 생기게 된 원인을 알게 된다. 인류에게는 어떠한 원인인지는 모르겠지만 진화 과정에서 중첩된 여러 파동함수를 한 가지로 수축시키는 능력이 있었으며, 그로 인해 인류의 '''눈길이 닿은''' 별들이 한 가지로 고정되어 버리는 바람에 외계인들이 "이러다 다 죽겠다 이놈들아!"라는 생각에 더 이상 인류가 자신들을 관측하지 못하게 막아놓은 것이었다.
앞서의 그 환자를 연구하여 인류에게 중첩되지 않고 모든 가능성을 인정하게 하는 프로그램이 바이러스 형태로 개발되나, 온갖 가능성들이 중첩된 끝에 하필이면 그 바이러스가 아웃브레이크를 일으키는 사태가 현실로 되어 버린다. 어찌저찌해서 주인공이 머물고 있던 도시 정도에 그 변화는 국한되지만, 서술되는 풍경을 보자면 초현실의 극치[3] .....
3. 배경
작중의 사회에서는 뇌의 뉴런에 심을 수 있는 프로그램들이 레트로 바이러스의 형태로 널리 판매되고 있는데 작중에서 프로그램 이름은 볼드체로 표현되며 '''뒤에 가격이 함께 표시된다.'''. 또한 소설 내에서 이러한 프로그램들은 모드(mod)라 불리운다.
한편, 이 소설의 주요 무대는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홍콩의 정치에 간섭하는 것에 저항하던 홍콩인들이 중국 정부의 탄압을 피해 오스트레일리아 북부에 망명을 와서 세운 '뉴 홍콩'이라는 도시인데, 이 도시의 건설에 '''한국'''이 큰 경제적 지원을 했다고 한다. 한국이 뉴 홍콩을 지원한 이유는 '''경제발전 덕에 생긴 잉여자산을 해소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92년에야 홍콩 반환 조차도 5년 뒤의 미래였으니 하나의 시나리오에 불과했지만, 20년 뒤 우산혁명과 홍콩민주항쟁, 그리고 한국의 경제적 성장으로 나름 설득력 있는 스토리가 되어버렸다.
4. 평가
뛰어난 하드 SF 소설을 꼽을 때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도전의식을 불태우게도 하고 머리 아프게도 하지만 의의가 깊고 한 번 읽어볼 가치가 충분한 작품이다. 다만 양자역학에 대해서 아는 게 없을 경우에는 '와, 내가 이런 걸 다 읽고 있어' 하는 자기긍정까지 얻을 수 있다. 그래도 어렵기는 어려운지 네이버에 있는 이 책의 리뷰들에는 꼭 양자역학에 관한 설명이 들어가 있다.
다만 이 책만 읽고 양자역학에 대해서 뭔가 알았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오히려 잘못된 인상을 받기도 딱 좋은데, 이 책은 묘사 자체는 하드하지만 양자역학에서의 관측의 의미에 대한 혼란을 줄 수도 있고[4] , 최근 유행하는 양자신비주의적인 관점과도 맞닿는 면이 있어서 주의해서 읽을 필요가 있다. 물론 로저 펜로즈같은 유명인사부터 디팩 초프라 같은 유사과학자에 이르기까지 뇌가 양자역학적으로 작용한다는 주장은 꽤 오래된 것이며, 심지어 초프라의 경우엔 인간의 마음에 따라 DNA 등이 양자역학적 결정성을 가진다고까지 주장하지만, 주류적 입장은 전혀 아니올시다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인간의 눈에 의한 관찰이 어떤 양자역학적 계의 상호작용을 통제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그야말로 황당무계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뇌와 양자역학을 연관시키려는 시도에 대한 반박은 이 링크의 내용을 참고
결정론, 다세계 이론 등 양자역학의 속성에 대한 수많은 형이상학적 해석들 사이에서 사변론적, 휴머니즘적 주제를 끌어오는 작가의 구성력은 훌륭하지만 해당 물리학 이론에 대해서는 아주 간략한 입문서 이상의 기대를 하지는 않는 것이 좋다. 실상 이 작품은 관련 물리학 이론을 접했을 때 생각해볼 수 있는 인과율, 결정론 등의 형이상학과 인간은 기계적인가 아닌가에 대한 이야기 등, 여러 인문학적 질문들을 재구성하는 쪽에 더 주의를 기울이고 있기도 하다. 물론 이는 대부분의 사변론적 SF 소설에도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1] 버블이라고 한다.[2] 재미있게도 소설의 주인공인 사립탐정은 어린 나이에 별들이 사라지는 상황을 목격했지만, 그의 부모가 철저한 무신론자여서 주인공에게 무신론을 철저히 주입시킨 덕에 혼란에 빠진 나머지 이성을 잃고 사이비 종교 같은 데 빠지지는 않았다고 한다.[3] 사람들의 얼굴이 마구 뒤바뀌고 벽들이 살로 변하고 피의 비가 내리는등 온갖 현실이 뒤엉킨 난장판이다.[4] 최근의 실험에서는, 관측 및 관찰자를 배제한 상태에서도 결풀림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확인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더더욱 한물 간 관점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