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라 페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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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ra Petacci, 1912. 2. 28~1945.4.28
클라라 페타치는 20세기 초 이탈리아의 독재자인 베니토 무솔리니의 정부였다.
아돌프 히틀러에게 에바 브라운이 있었다면 베니토 무솔리니에게는 클라라 페타치가 있었다. 우연이랄 수 있지만 클라라 페타치는 에바 브라운과 동갑인 데다가 같은 나이, 거의 비슷한 시기(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앞둔 1945년 4월 말)에 사망했다. 둘 다 1912년 2월생, 1945년 4월에 사망했다.
로마 태생으로 당시의 교황 비오 11세의 주치의 프란치스코 페타치의 1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오빠와 여동생이 있고 여동생은 배우 미리암 디 산 세르볼로(1923~1991)이다. 여동생은 언니와는 달리 정치에 관여하지 않은 덕분에 천수를 모두 누렸다. 여동생이 배우를 할 정도인 데다가 그 여자 밝히기로 유명한 무솔리니의 마음을 사로잡을 정도에 실제 사진상으로도 매우 빼어난 미인이었다.
1934년 리카르도 페데리치와 결혼한 평범한 가정주부였으나 1942년 이혼하고 그 이후 만난 게 다름아닌 무솔리니였다. 무솔리니는 클라레타보다 28살이나 연상이고, 게다가 유부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클라레타와 연인이었고 아내는 내팽개쳐서 사실상 무솔리니의 정부라기보다는 애첩에 훨씬 가까웠다. 실제로도 무솔리니는 엄연히 아내가 있음에도 공식석상에는 클라라 페타치를 데리고 나오는 등 진짜 아내는 내팽개쳐버리고 클라라 페타치를 아내처럼 대우했다.
무솔리니의 몰락이 임박해지자 무솔리니를 따라 국외 탈출을 꾀했다. 그러나 도망가던 그들은 변장을 알아챈 이탈리아 좌익 게릴라(빨치산/이탈리아어로는 파르티지아노)들에게 체포되었다. 이때 베니토 무솔리니 일행은 독일군으로 위장했지만, 공교롭게도 빨치산 그룹 중에 예전에 해군 수병 시절 베니토 무솔리니한테 수훈한 사람이 있어서 들통났다는 이야기가 있다. 혹은 빨치산이 베니토 무솔리니의 정부 클라라 페타치를 알아보고 베니토 무솔리니라는 사실을 확인했다거나, 베니토 무솔리니가 신던 값비싼 장화 때문에 위장이 들통났다는 다른 이야기도 있다.
베니토 무솔리니가 1945년 4월 28일 게릴라에게 사로잡히자 클라라 페타치도 다른 측근들과 함께 잡혀서 즉시 총살당해 죽었다. 총살 집행하기 전에 골치 아픈 일이 생겼는데 집행용으로 쓸 총들이 대부분 이탈리아에서 제조된 총기들이라서 총알이 나오지 않거나, 계속된 작동불량, 너무 약한 화력 때문에 총알들을 맞고도 거의 대부분 잘 죽지를 않아서(...), 다들 엄청나게 고통스러워 했고, 비명소리가 끊이질 않았다고 한다. 그나마 성능 좋은 베레타 M1934 자동권총 2정과 베레타 M1938 기관단총 1정으로 겨우겨우 총살집행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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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에서 3번째가 클라라 페티치의 시체다. 혼자만 치마를 입고 있기 때문에 구분하기 쉽다.
총살당한 후 클라라 페타치의 시체는 애인이었던 베니토 무솔리니와 그의 측근들의 시체 3구 (니콜라 봄파치, 알레한드로 파볼리니, 아실레 스타라체)와 함께 밀라노로 인도된 뒤 썩어서 문드러질 때까지 피아잘레 로레토 광장에 있는 어떤 주유소 기둥에 거꾸로 매달려서 아주 예쁘게 장식됐다. 그들의 시체에는 원한을 품던 시민의 침과 욕설 세례가 이어졌으며, 심지어 어떤 시민들은 몽둥이로 아주 신나게 두들겨 패거나 권총으로 쏘기도 했다. 원래 클라라 페타치의 치마는 뒤집혀서 하반신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는데 그 참상을 보다 못한 어느 노파가 치마를 여며서 가랑이 사이로 끼워넣어 줬다[1] 이 때문에 이탈리아에선 '클라라의 치마를 여며주다'는 말이 '자신의 소신을 위해 과감하게 행동하다'라는 관용어로 있다.
한편 이 소식을 들은 아돌프 히틀러도 큰 충격에 빠졌다. 베니토 무솔리니가 총살당하고 이틀 후에 히틀러는 자살할 때 내 시체를 불태워 달라는 유서를 남겼는데 자신도 베니토 무솔리니처럼 죽어서 시체가 저런 꼴이 당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Clara Petacci, 1912. 2. 28~1945.4.28
1. 개요
클라라 페타치는 20세기 초 이탈리아의 독재자인 베니토 무솔리니의 정부였다.
아돌프 히틀러에게 에바 브라운이 있었다면 베니토 무솔리니에게는 클라라 페타치가 있었다. 우연이랄 수 있지만 클라라 페타치는 에바 브라운과 동갑인 데다가 같은 나이, 거의 비슷한 시기(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앞둔 1945년 4월 말)에 사망했다. 둘 다 1912년 2월생, 1945년 4월에 사망했다.
2. 생애
로마 태생으로 당시의 교황 비오 11세의 주치의 프란치스코 페타치의 1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오빠와 여동생이 있고 여동생은 배우 미리암 디 산 세르볼로(1923~1991)이다. 여동생은 언니와는 달리 정치에 관여하지 않은 덕분에 천수를 모두 누렸다. 여동생이 배우를 할 정도인 데다가 그 여자 밝히기로 유명한 무솔리니의 마음을 사로잡을 정도에 실제 사진상으로도 매우 빼어난 미인이었다.
1934년 리카르도 페데리치와 결혼한 평범한 가정주부였으나 1942년 이혼하고 그 이후 만난 게 다름아닌 무솔리니였다. 무솔리니는 클라레타보다 28살이나 연상이고, 게다가 유부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클라레타와 연인이었고 아내는 내팽개쳐서 사실상 무솔리니의 정부라기보다는 애첩에 훨씬 가까웠다. 실제로도 무솔리니는 엄연히 아내가 있음에도 공식석상에는 클라라 페타치를 데리고 나오는 등 진짜 아내는 내팽개쳐버리고 클라라 페타치를 아내처럼 대우했다.
3. 최후
무솔리니의 몰락이 임박해지자 무솔리니를 따라 국외 탈출을 꾀했다. 그러나 도망가던 그들은 변장을 알아챈 이탈리아 좌익 게릴라(빨치산/이탈리아어로는 파르티지아노)들에게 체포되었다. 이때 베니토 무솔리니 일행은 독일군으로 위장했지만, 공교롭게도 빨치산 그룹 중에 예전에 해군 수병 시절 베니토 무솔리니한테 수훈한 사람이 있어서 들통났다는 이야기가 있다. 혹은 빨치산이 베니토 무솔리니의 정부 클라라 페타치를 알아보고 베니토 무솔리니라는 사실을 확인했다거나, 베니토 무솔리니가 신던 값비싼 장화 때문에 위장이 들통났다는 다른 이야기도 있다.
베니토 무솔리니가 1945년 4월 28일 게릴라에게 사로잡히자 클라라 페타치도 다른 측근들과 함께 잡혀서 즉시 총살당해 죽었다. 총살 집행하기 전에 골치 아픈 일이 생겼는데 집행용으로 쓸 총들이 대부분 이탈리아에서 제조된 총기들이라서 총알이 나오지 않거나, 계속된 작동불량, 너무 약한 화력 때문에 총알들을 맞고도 거의 대부분 잘 죽지를 않아서(...), 다들 엄청나게 고통스러워 했고, 비명소리가 끊이질 않았다고 한다. 그나마 성능 좋은 베레타 M1934 자동권총 2정과 베레타 M1938 기관단총 1정으로 겨우겨우 총살집행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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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에서 3번째가 클라라 페티치의 시체다. 혼자만 치마를 입고 있기 때문에 구분하기 쉽다.
총살당한 후 클라라 페타치의 시체는 애인이었던 베니토 무솔리니와 그의 측근들의 시체 3구 (니콜라 봄파치, 알레한드로 파볼리니, 아실레 스타라체)와 함께 밀라노로 인도된 뒤 썩어서 문드러질 때까지 피아잘레 로레토 광장에 있는 어떤 주유소 기둥에 거꾸로 매달려서 아주 예쁘게 장식됐다. 그들의 시체에는 원한을 품던 시민의 침과 욕설 세례가 이어졌으며, 심지어 어떤 시민들은 몽둥이로 아주 신나게 두들겨 패거나 권총으로 쏘기도 했다. 원래 클라라 페타치의 치마는 뒤집혀서 하반신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는데 그 참상을 보다 못한 어느 노파가 치마를 여며서 가랑이 사이로 끼워넣어 줬다[1] 이 때문에 이탈리아에선 '클라라의 치마를 여며주다'는 말이 '자신의 소신을 위해 과감하게 행동하다'라는 관용어로 있다.
한편 이 소식을 들은 아돌프 히틀러도 큰 충격에 빠졌다. 베니토 무솔리니가 총살당하고 이틀 후에 히틀러는 자살할 때 내 시체를 불태워 달라는 유서를 남겼는데 자신도 베니토 무솔리니처럼 죽어서 시체가 저런 꼴이 당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1] 당시 분노한 시민들이 클라라의 생식기에다가 이물질을 넣거나 막대기로 마구 쑤셨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