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멘스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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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3대 그레고리오 8세

'''제174대 클레멘스 3세'''

제175대 첼레스티노 3세
  • 생몰년: 1130년 ~ 1191년 3월 27일
  • 재위기간: 1187년 12월 19일 ~ 1191년 3월 27일
로마 태생으로 본명은 폴 스콜라리(Paul Scolari) 였다. 알렉산데르 3세 재임 시절에 수석 사제로 서품되었고, 1180년에는 주교급 추기경이 되었다. 그레고리오 8세가 선종한 뒤 1187년 12월 19일 클레멘스 3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수십년 간 문제가 되온 로마 시민들과의 행정관 선출 및 총독 임명 문제의 갈등을 조정하고자 했다. 그 결과 로마 시민들이 행정관을 직접 선출하되 교황이 총독을 임명 할 수 있는 권한은 유지하는 것으로 합의를 이루었다. 이에 따라 교황은 로마에 정주할 수 있게 되었고[1] 적극적으로 3차 십자군을 추진하기 시작한다.
우선 잉글랜드 왕 헨리 2세와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의 싸움을 중지시키고, 독일 황제에게 프리드리히 1세와의 관계를 개선하여 십자군 운동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에 따라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일시적으로 전쟁을 멈췄고, 독일 황제에게 십자군 참여 약속을 받아내기에 이른다. 하지만 얼마안가 프랑스와 잉글랜드 간의 전쟁은 재발했고, 헨리 2세의 자식들은 발란을 일으켜 내전까지 벌어지게 된다. 그나마 십자군 참여를 약속했던 프리드리히 1세도 도강하다가 익사하는 사고가 발생하여 3차 십자군 운동은 지지부진해지게 된다. 클레멘스 3세는 프리드리히 1세를 이어 즉위한 하인리히 6세를 독일 황제로 인정하였으나 그를 견제하기 위해 탄크레드를 시칠리아의 왕으로 즉위하는 데에도 동의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해 클레멘스 3세는 자신이 적극적으로 추진한 3차 십자군의 출정 및 하인리히 6세의 대관을 보지 못하고 1191년 3월 27일 선종하고 만다.

[1] 한편 너무 적은 숫자의 추기경단을 보충하기 위해 두 차례에 걸쳐 추기경을 대거 서임하여 20여명이던 추기경단을 30명으로 늘리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