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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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호'''
헨리 2세
(Henry II of England)
'''부친'''
앙주 백작 조프루아 플랜태저넷
'''모친'''
마틸다 황후
'''생몰년'''
1133년 3월 5일 ~ 1189년 7월 6일(56세)
'''재위기간'''
1154년 12월 19일 ~ 1189년 7월 6일
'''대관식'''
1154년 12월 19일
1. 개요
2. 왕위에 오르다
3. 업적
4. 안습한 말년
5. 자식들
6. 평가
7. 여담
8.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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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세 프랑스어: Henri II (헨리 2세)
프랑스어: Henri II (앙리 2세)
영어: Henry II (헨리 2세)
라틴어: Henricus II (헨리쿠스 2세)
잉글랜드 왕국의 왕으로, 플랜태저넷 왕조의 창시자. 노르망디 공작, 앙주 백작, 아키텐 공작.
아버지는 앙주 백작 조프루아 5세(Geoffroy V d'Anjou)였으며, 어머니는 헨리 1세의 유일한 적녀인 마틸다였다.[1] 헨리 1세의 외조카였던 스티븐 왕이 죽자 1154년에 그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의 왕위에 올랐다.
그는 왕위에 앉아 있는 동안,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와의 혼인을 통해 오늘날 프랑스 지역의 부유한 아키텐 지방을 물려받아 잉글랜드의 영토를 크게 넓혔으며, 정력적으로 국사를 보살펴 여러모로 플랜태저넷 왕조의 기틀을 다지는 등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그의 아들들로서 뒤를 이어 왕이 되었던 리처드 1세존 왕 등도 아버지만 한 업적을 이루지는 못하였다.[2]
그러나 젊은 시절부터 가정에 신경을 잘 쓰지 않았기 때문에 아내인 엘레오노르 및 그 사이에서 얻은 아들인 헨리, 리처드 1세, 조프리 등과는 사이가 무척 나쁜 편이었다. 그 때문에 말년에는 권력투쟁으로 얼룩진 가정사를 겪다가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야말로 콩가루 집안의 대명사라고 할 만한 인물(…).

2. 왕위에 오르다


마틸다는 잉글랜드 왕위를 놓고 사촌인 스티븐 왕무정부시대라는 오랜 내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스티븐 왕은 자신의 상속자가 될 장자 외스타슈[3]를 잃자 다 포기하고 마틸다와 화해, 마틸다의 아들 헨리 2세를 자신의 후계자로 인정한다.
그 후 스티븐 왕이 실의로 일찍 죽자, 즉위한 헨리 2세는 어머니와 외당숙이 벌인 내전 탓으로 개판이 된 잉글랜드를 다시 안정화시키고 혼란기 동안 잉글랜드를 넘보던 스코틀랜드와 웨일스의 군주들을 데꿀멍 시킨다.

3.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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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2세가 프랑스 내에서 소유했던 영토
그는 결혼과 군사, 두 가지를 통해 잉글랜드 영토 확장에 기여했다. 19세에 결혼을 하게 되는데 아내는 10살 연상 프랑스왕 루이 7세의 전처,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그녀가 프랑스 왕비였던 시절, 남편과 쌓인 불화와[4] 프랑스와 고향 아키텐의 정치적 갈등 등으로 결혼이 파탄에 이르렀다. 시대가 시대라 이혼이 아니라 교황에게 로비해서 혼인무효(?) 판결을 받았는데 웃긴 건 엘레오노르와 프랑스 루이 7세는 10촌[5]이라 근친상간이라며 혼인이 무효 처리가 되었는데 몇 달 후 결혼한 헨리 2세와 엘레오노르는 더 가까운 8촌이었다(...).[6]
이미 결혼 전부터 정부가 있었고 결혼 후에도 늙은(?) 처에 만족하지 못하고 대놓고 바람을 피워서[7] 왕비와 사이는 좋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녀와의 사이에서 8명의 자식을 두었고, 아들이 다섯이 있었는데 그중 왕이 된 청년왕 헨리, 리처드 1세, 존 왕이 유명하다.
아키텐의 엘레오노르는 프랑스 왕보다 영지가 넓다는 아키텐 공작의 상속녀였는데, 헨리 2세와 재혼하면서 푸아티에, 아키텐 지방이 영국으로 넘어왔다. 여기에 기존에 가지고 있던 노르망디, 앙주, 잉글랜드 지방까지 합치니 영국+프랑스 서쪽 절반에 달하는 거대한 영토의 군주가 되었다.[8] 그리고 엘레오노르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은 유럽 왕가에서 혼인관계를 맺어 시칠리아, 독일, 카스티야의 영지를 획득하게 된다. 그리고 스코틀랜드의 말콤 1세를 조져서 충성서약을 받아내고 노섬벌랜드 등의 영토를 되찾았다.
그리고 내정을 안정시키기 위해 유능한 재판관 토머스 베켓(Thomas Becket)을 등용해 행정과 사법 제도를 정비해 봉건 군주국에서 관료군주국으로 잉글랜드를 탈바꿈시키게 한다. 그러나 충신이었던 토머스 베켓은 헨리 2세가 주선해 캔터베리의 대주교가 되자 그와 대립한다. 이 시기는 잉글랜드 왕국 내 교회의 영향력을 두고 왕권과 교황권이 격렬하게 대립하던 시기였는데, 내 편 해달라고 기껏 임명한 놈이 뒤통수를 거하게 때려버린 셈이니... 결국 헨리 2세는 '''"저 말썽쟁이 성직자를 내게서 없애줄 이는 없단 말인가?"'''라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발언[9]을 했고, 즉시 부하 넷이 잉글랜드로 건너가 토마스 베켓을 쳐죽여 복수했다. 하지만 교황청에서 토마스 베켓을 성인으로 만들어버리는 바람에 큰 낭패를 보고 만다.[10][11][12]

4. 안습한 말년


헨리 2세는 자신의 생각대로 왕국을 분할하고자 했었다. 2남 청년왕 헨리[13]에게 잉글랜드와 노르망디를, 3남 리처드에겐 아키텐을, 4남인 조프리에겐 브르타뉴를 물려줄 생각이었다. 아일랜드 정복 전까지 존은 상속분이 없었고 이게 후일 '결지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왕은 청년왕 헨리를 잉글랜드의 왕위에 앉히고 공동으로 순회를 도는 등의 행보를 보이며 후계를 탄탄히 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헨리 2세는 결코 아들에게 실권을 주지 않았고 이 때문에 청년왕 헨리는 자신의 기사들에게 제대로 봉급조차 주지 못했다. 이런 이유로 권력에 대한 욕구가 점차 부자간의 갈등을 빚어내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언제나 잉글랜드를 꺾고 싶었던 루이 7세는 청년왕 헨리를 꾀어서 아버지에 대한 반란을 일으키려고 유도했다. 사실 이 꼬드김보다는 어머니인 엘레오노르의 부추김이 더 컸다. 당시 엘레오노르는 남편인 헨리 2세와의 좋지 못한 결혼생활과 정치적 갈등으로 헨리 2세에게 상당한 악감정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엘레오노르는 청년왕 헨리 뿐만 아니라 리처드와 조프리에게 권력 분배에 대한 것으로 반란을 일으키라고 부추겼다. 그런 상황에서 루이 7세까지 껴들자 3명의 불충한 아들들은 프랑스의 궁정으로 갔고 곧 아버지를 향한 반란을 개시했다.
하지만, 헨리 2세는 이에 분개하면서도 노련하게 대응했다. 노르망디로 3갈래로 몰려오는 군대를 모두 격파하고는 오히려 세 아들들 모두를 곤경에 처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헨리 2세는 여기서 멈추고 아들들을 사면하는 조건으로 항복을 제안했고 결국 3명의 아들들은 항복했다. 또한 루이 7세는 쓴맛만 다실 수밖에 없었다. 엘레오노르는 이 반란 중에 헨리 2세에게 붙잡혀서 감금 당했는데 헨리 2세가 사망하고서야 풀려나게 된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물론 그때 어렸다는 점도 있긴 하지만, 어쨌건 존 만이 이 대반란에 합류하지 않았는데, 이런 점에서였을까? 헨리 2세는 마지막까지 존을 편애했다. 물론 결말은...
대반란 이후, 청년왕 헨리는 여전히 권력 분배가 되지 않는 상황에 불만을 품었고, 다시금 반란을 준비했다. 하지만 곧 병(이질)으로 사망의 문턱에 이르자, 그제서야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아버지에게 사면을 구했다. 헨리 2세도 아들의 마지막 부탁은 들어준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청년왕 헨리는 아버지의 그늘 속에서 병사한다.
리처드 또한 이 대반란으로 상당히 찍힌 것으로 보인다.
어쨌건, 그렇게 화해하고 난 뒤에 아들들끼리 신나게 쌈박질을 해댔다. 서로 부유한 아키텐 땅을 둘러싸고, 둘째 왕자(청년왕 헨리)와 넷째 왕자(조프리)가 각각 리처드 1세(셋째 왕자)와 신나게 싸워대다가, 위에서 언급했듯이 청년왕 헨리는 병으로 급사해버리고, 조프리는 프랑스의 궁정에서 마상시합 도중에 사망한다. 그에겐 그저 아주 어린 아들(아서)만 있을 뿐이었다. 이렇게 되자 리처드 1세가 잉글랜드의 가장 유력한 후계자가 된다. 몇 년 후 헨리 2세가 아키텐 땅을 둘러싸고 리처드와 '''또''' 다투게 되는데, 리처드는 "아키텐은 어머니가 물려주는 건데 아버지가 왜 간섭이냐"라며 불만을 표했다고 한다.
이번 싸움에는 헨리 2세 쪽이 수세에 몰렸다. 결국에는 어찌어찌 화해했지만 문제는 계속 남아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제3차 십자군 원정이 선포되자 필리프 2세와 헨리 2세는 대립을 멈추고, 십자군 참전을 준비하려 했으나 의견 차이로 휴전은 결렬된다. 어쨌건 양국은 대립과 함께 참전 준비를 하는데...
헨리 2세는 기력이 쇠한 것인진 몰라도 열정적으로 십자군 참전을 외치던 리처드 1세가 보기에는 너무나도 지지부진한 준비였고, 이에 아버지를 버리고 필리프 2세와 동맹을 맺었다. 아마 예전부터 쌓인 것들이 터진 것일 가능성이 높다. 프랑스와 리처드 1세에게 쫓기며 패배가 기정사실이 되어가던 즈음, 그에게 마지막이자 가장 큰 충격이 찾아오니, '''자신이 가장 사랑하고 아꼈던 막내아들 마저''' 부하 기사들과 함께 리처드의 편에 섰다. 이로 인하여 크게 상심한 헨리 2세는 결국 홧병으로 시농에서 사망했다. 그가 이 사건으로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죽기 직전에 주변 사람들이 신에게 기도할 것을 권하자 "어째서 내게 고통만을 안겨준 신을 위해 기도해야 한단 말인가?"라며 버럭 화를 내기까지 했다고 한다.
죽어가는 헨리 2세의 곁을 끝까지 지킨 사람은 서자였던 제프리(4째 적자 제프리가 아니다.)와 충성스런 심복 윌리엄 마셜뿐이었다.[14] 전설에 의하면, 리처드 1세가 아버지의 시신을 보기 위해 방안에 들어서자 갑자기 시신의 코에서 피가 흘러나왔다고 한다. 이는 그만큼 헨리 2세가 리처드를 저주하며 죽어갔다는 뜻이기도 하다.

5. 자식들


자식들이 하나같이 웬수들이다(...). 하지만 이건 헨리 자신이 자초한 면도 크다. 워낙 바쁘게 돌아다닌 데다 잉글랜드에 자주 오지를 않았기 때문에, 자식들 대부분은 성장기에 아버지 얼굴 한번 보기가 힘들었다. 보다못한 캔터베리 대주교가 "아무리 비정한 부모라도 폐하보다는 나을 겁니다"라면서 자식들 좀 자주 보라고 권할 정도였다. 이러니 장성한 아들들이 아버지에게 별 애정이 없고, 어머니와 친했던 것은 당연한 노릇이다.
프랑스의 왕 루이 7세나 필리프 2세가 정치적인 이유로 부자들 사이를 갈라놓으려 했다는 말도 있지만 어쨌든 막내인 존 왕 빼고는 사이가 안 좋았다고 한다.[15] 다만 막내 존 왕은 아버지를 배신했을 뿐만 아니라 헨리 1세부터 부지런히 모은 프랑스 쪽의 영토를 날린 일등 공신. 리처드 1세의 공격을 받은 헨리 2세의 주변에 남은 아들은 오로지 서자 제프리 뿐이었다고 한다. 헨리 2세는 제프리에게 '그놈들은 후레자식들이고 너만이 내 진정한 자식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고 한다.

6. 평가


통치는 잘하긴 했다. 그의 치세 아래 잉글랜드는 부유했고, 나라안의 국민들도 안심하고 살 수 있었으며, 다른 종교를 믿는다고 크게 탄압하거나 대대적인 숙청 같은 것들은 없었다. 그러나 그가 파멸하게 된 이유는 가족관계에 신경 쓰지 않고 다른 여자들과 바람이 나서 엘레오노르와 자식들과의 관계가 멀어졌고, 다른 아들들은 생각하지 않고 거의 무조건적으로 존 왕만 사랑했다는 것에 있다. 그것 때문에 아내 엘레오노르와 다른 아들들, 특히 리처드 1세하고 가장 척을 졌다. 끝내는 아들들끼리 내전을 벌이게 만들고, 이로 인해 그동안의 많은 업적들에도 불구하고 헨리 2세를 좋게만 평가하기는 힘들게 되었다. 그러고서도 자신은 끝까지 잘못이 없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정말로 좋은 아버지와는 거리가 있던 아버지였고, 그 때문에 파멸했다. 한마디로 '''집안 관리를 못해서 파멸해 버린 왕'''이라고 하겠다.

7. 여담


  • 34년 재위 중에 그가 잉글랜드에 체류한 건 14년 정도라고 한다. 어찌 보자면 아들 리처드 1세와 비슷한 기록. 마틸다가 헨리 1세의 임종 당시 잉글랜드 국내에 없었던 탓에 잉글랜드 최초의 여왕 자리를 강탈당한 것처럼, 잉글랜드의 왕이 가지고 있는 프랑스 영지는 프랑스 왕의 신하라는 미묘한 위치[16] 때문에 프랑스에 있던 시간이 길어 실질적으로는 프랑스 쪽에 더 가까웠던 듯하다[17].
  •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아서 왕 전설을 정립한 사람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영국 왕으로서의 정체성도 만만치 않게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8.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 대지의 기둥에도 나오는데, 여기서는 그의 어머니 마틸다가 모드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헨리가 태어난 후, 모드는 헨리를 데리고 스티븐을 피해 프랑스로 도피한다. 잠깐 모드가 우세를 점해 잉글랜드로 돌아오기도 했지만 다시 프랑스로 도망갔다가 장성하여 역공을 걸어 스티븐의 아들인 유스타스를 죽여버리고 왕위에 앉는다.
  •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에서는 한마 유지로로 패러디되어 권왕님이 되어버린 아들과 대립한다.(...) 그의 2남인 헨리, 4남 조프리, 5남 존 등은 각기, 토키, 켄시로, 쟈기로 패러디되었다. 엄창난 포스를 풍기며 아들과 막상막하의 대결을 펼쳤으나, 실제 역사대로 점차 수세에 몰리다가 누구보다도 믿었던 막내아들에게 배신당한 충격으로 쓰러져 세상을 떠난다.
  • 19세기 미국 소설가로 로빈 후드 민담을 정리한 '하워드 파일'의 ''로빈 후드의 유쾌한 모험'에서 잉글랜드의 왕으로 등장한다. 궁술 대회를 열어 자신이 총애하는 기사들에게 상금을 주려 했으나 엘레오노르 왕비가 데려온 로빈 후드 일행이 상금을 싹쓸이하자 로빈 후드를 죽이려 한다. 그러나 왕비의 간곡한 설득에 마음을 돌리고 로빈을 살려 준다.
[1] 그녀는 결혼을 2번했는데, 첫 번째 남편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5세였으므로 모드 황후라고 부르기도 한다. 헨리 1세의 아들, 즉 왕세자가 사망한 탓에 딸인 마틸다가 후계자가 되고 여자인 그녀의 안전을 생각한 헨리 1세는 노르망디 남쪽의 앙주 지방의 유력자 앙주 백작을 데릴사위로 들인다.[2] 리처드 1세는 "사자심왕"이라는 별명이 말해주듯이 당대에 적수가 없었던 전쟁의 달인이었으나 일평생 동안 전장을 떠돌아다닌 탓에 잉글랜드의 내정을 막장으로 만들었다. 존 왕 또한 나름대로 재평가받는 구석이 있기는 하지만,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아키텐의 땅을 프랑스의 왕이었던 필리프 2세의 농간에 휘말린 탓에 몽땅 잃어버리는 등의 실책을 저질렀다.[3] 스티븐이 블로뉴의 여백작 마틸다와 결혼하여 낳은 3남 3녀 중 장남. 너무 갑작스럽게 사망하여 당대 사람들은 그가 신의 분노로 죽었다고 여겼다고 한다. 외스타슈 사망 당시 스티븐에게는 윌리엄이라는 아들이 남아 있었지만 그는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고 대신 어머니의 뒤를 이어 블로뉴의 백작이 된다.[4] 둘 사이에 아들이 없었던 이유도 컸다.[5] 중세 교회법상 동양식으론 친외가 12촌이면 혼인 무효다. 무효 결혼이지만 둘 사이에 낳은 딸 둘은 적자라 인정하는 정치적 배려도 있었다.[6] 유럽 왕실 사이에서 근친혼은 흔했다. 교황청에서는 '기독교 군주 사이의 결합'이라는 대의를 인정하여 면책했기 때문에 결혼 자체는 별 문제 없었는데, 대부분 혼인무효(이혼) 사유를 들어서 이혼 해달라면 또 들어주는 명분이기도 했다.[7] 서자도 많았다.[8] 브르타뉴 제외[9] 높으신 분이 넌지시 하는 말이나 완곡어법도 부하들은 명령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으로 자주 인용된다. 2017년, 전 FBI 국장 제임스 코미가 자신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수사 중단 압력을 받았다며 이 구절을 인용해 또 화제가 됐다. 원문: "Will no one rid me of this meddlesome(turbulent) priest?" 이걸 뜻하기 위해 부활한 말이 손타쿠[10] 여담이지만 이 사건의 무대가 되었던 캔터베리 대성당은 제프리 초서가 쓴 "캔터베리 이야기The Canterbury Tales"에서 주인공 일행의 목적지가 된다.[11] 다른 여담으로 베켓이 '''죽은 지 361년 후'''인 1531년, 당시 영국 국왕인 헨리 8세는 토마스 베켓을 반역죄로 기소하고 30일 안에 법원에 출두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당연히 베켓은 법원에 출두하지 않았다(...). 법원은 궐석 재판에서 베켓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캔터베리 대성당에 있던 베켓의 무덤을 부수고 유해를 불태운 후 순례객들이 두고 간 보물들을 몰수했다.[12] 또다른 여담으로 퇴마록에서 박신부가 사용하는 베케트의 십자가의 베케트가 바로 이 토머스 베켓이다.[13] 장남은 요절했기에 실질적으론 첫째였다.[14] 유일하게 믿었던 존에게 배신당한 충격으로 절망에 빠져있던 헨리는 끝까지 자신의 곁을 지켰던 제프리를 보고는 "너야말로 나의 진정한 아들이구나!"라며 감격했다고 한다.[15] 아들 리처드 1세의 약혼녀를 중간에서 가로챘다는 의혹도 있다. 이 설을 따르면 본인도 잘못이 크다고 할 수 있다.[16] 잉글랜드 왕위는 프랑스 왕의 신하에 해당되지 않는다.[17] 이건 윌리엄 1세가 영국의 왕이 되면서 시작된 거다. 그러나 친숙했든 어쨌든 저런 입장 때문에 정치적으로는 계속 충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