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리히 6세

 


[image]
'''Heinrich VI'''
'''가문'''
호엔슈타우펜 가문
'''생몰년도'''
1165년 ~ 1197년 9월 28일 (33세)
'''출생지'''
네덜란드 네이메헨
'''사망지'''
시칠리아 메시나
'''재위'''
'''기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1191년 4월 15일 ~ 1197년 9월 28일
'''독일 국왕'''
1169년 8월 15일 – 1197년 9월 28일
'''이탈리아 왕국 국왕'''
1186년 1월 21일 – 1197년 9월 28일
'''시칠리아 왕국 공동 국왕'''
1194년 12월 25일 – 1197년 9월 28일
'''선대 황제'''
부친 프리드리히 1세
'''후대 황제'''
동생 필립#s-1.1.1
독일어: Heinrich VI. (하인리히 6세)
이탈리아어: Enrico VI (엔리코 6세)
라틴어: Henricus VI (헨리쿠스 6세)
1. 즉위 이전
2. 재위 초기의 어려움
3. 뜻밖의 대박
4. 호엔슈타우펜 제국의 꿈
5. 뜻밖의 죽음, 그리고 그 이후의 호엔슈타우펜
6. 미디어 믹스


1. 즉위 이전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장남. [1] 모후는 부르고뉴 백작의 외동딸로 백작령을 상속한 부르고뉴 여백작 베아트리스다. 1169년 아버지에 의해 5세의 나이로 황태자 지위인 독일왕[2]에 올랐다.
1184년 시칠리아왕 굴리엘모 2세[3]의 고모였던 10살 연상 콘스탄체[4]와 혼인한다. 당시 이탈리아의 세력 구도는 황제파와 교황파가 수차례 대립하는 북부, 교황의 세력이 더 큰 중부, 노르만계 시칠리아 왕족이 지배하는 남부 이탈리아로 이루어져 있었다. 교황파의 강력한 반발로 이탈리아 평정의 뜻을 쉽사리 이루지 못했던 프리드리히 1세가 남부의 시칠리아 왕국과 손을 잡아 남북으로 교황을 압박하려 한 것이다. 이 결혼의 또다른 의의는 호엔슈타우펜 가문이 시칠리아 왕위에 대한 잠재적 상속권을 얻은 것이다. 굴리엘모 2세는 후손이 없었고 그대로 사망할 경우 콘스탄체가 유일한 적법 후계자였기 때문이었다.
한편 1184년에는 황당한 사건이 터졌다. 일명 '에르푸르트 똥물 사건'. 정식 명칭은 'The Erfurt Latrine Disaster'. 사건의 내용은 이렇다. 마인츠 대주교와 튀링겐의 방백인 루이 3세의 불화가 심해지자, 하인리히는 이를 조정하기 위해 제국의 귀족들을 에르푸르트에 소집했다. 7월 25일, 귀족들이 에르푸르트의 성 베드로 교회에 모여서 회의를 막 여는 순간, 나무 바닥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졌다. 귀족들은 1층을 뚫고 지하실의 화장실까지 떨어졌고, 약 60여명의 귀족들이 똥물에 빠져서 익사했다. 하인리히와 몇몇 귀족들은 석재로 된 바닥이 있는 방에 있어서 무사했다.
1189년 부황이 3차 십자군 원정을 위해 서아시아로 출정하자 제국의 통치를 맡았다. 아버지의 영원한 정적 하인리히 사자공이 부친의 부재를 틈타 반란을 일으켰으나 제압했다. 젊은 황태자는 이후 갑작스러운 상황에 직면한다. 11월에 시칠리아왕 굴리엘모 2세가 결국 후계자를 낳지 못하고 사망했고, 이듬 해인 1190년에 부황 프리드리히 1세가 원정길 도중에 병사했다. [5] 이 때 그의 나이 불과 25세,젊은 나이에 제위와 시칠리아 왕위를 모두 계승하게 된 것이다.

2. 재위 초기의 어려움


역대 황제 중 명군으로 손꼽히는 부친 프리드리히 1세가 황권을 강화하고 가문의 세력을 확대하여 기반을 잘 다져놓았기 때문에 하인리히는 문제 없이 예정대로 황제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시칠리아에선 상황이 뜻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굴리엘모 2세의 사촌형 레체 백작 탄크레디가 왕국 내 반독일 분위기를 타고 왕위에 오른 것이다. 본래 탄크레디는 서자 계통이었기 때문에 계승권이 없었다. 당연히 하인리히는 격분했으나 가문의 정적 하인리히 사자공이 망명지 잉글랜드에서 귀국한 것에 대처해야 했기에 당장 시칠리아로 갈 수가 없었다.
이듬해인 1191년에야 이탈리아로 움직인 하인리히 6세는 4월, 로마에서 교황 첼레스티노 3세에 의해 정식으로 황제 대관식[6]을 치렀다.
계속해서 남하하여 남부 이탈리아의 거점 나폴리를 공격했다. 그러나 전염병이 유행하여 큰 타격을 입었고 불굴의 의지를 가진 하인리히 사자공이 또 반란을 일으켜 독일로 철수해야만 했다. 한편 남편과 달리 남부 이탈리아 살레르노에 잔류했던 콘스탄체는 살레르노인들에게 배신당해 탄크레드에게 포로로 붙잡혔다. 교황 첼레스티노 3세의 중재로 콘스탄체가 석방되었지만, 뼈아프게도 탄크레드의 불법적 왕위 계승이 적법한것으로 인정되어 버렸다. 결국 시칠리아 원정은 실패로 끝났고, 오히려 제국 내 반 호엔슈타우펜파들의 힘도 커져버린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어버렸다.

3. 뜻밖의 대박


그런데, 정말 뜻밖의 대박 사건이 불리했던 상황을 일거에 반전시킨다. '''잉글랜드의 사자왕 리처드 1세를 포로로 얻은 것.''' 봉신인 바벤베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5세가 십자군 원정 중 자신을 모욕했던 리처드 1세가 육로로 귀국하는 틈을 타 체포한 것이다. 친호엔슈타우펜 성향이었던 레오폴트 5세는 황제에게 리처드 1세를 양도했다. [7][8] 거대한 몸값을 뜯어낼 기회에다 반호엔슈타우펜 세력을 위축시킬 절호의 패였다. 잉글랜드 왕가는 호엔슈타우펜의 가장 큰 정적인 하인리히 사자공의 벨프 가문과 혼인 관계로 반호엔슈타우펜파의 후원자[9]였기 때문이다. 석방을 대가로 어마어마한 몸값을 뜯어내는데 성공하고 지불을 관철시켰으며 그 돈으로 시칠리아 정벌군을 양성했다. 시칠리아 원정 비용이 그야말로 하늘에서 툭 하고 떨어지는, 하인리히에겐 정말 난데없는 대박이 터졌다.[10]
전세를 뒤집은 하인리히 6세는 1194년 1월 북부 이탈리아인들과 협정을 맺어 황제군의 북부 이탈리아 안전 통과를 확보했고, 4월에는 사자공과 협상을 타결해 지긋지긋한 사자공과의 항쟁을 종결했다.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다. 시칠리아에 대한 하인리히의 복수가 시작되었다. 그 와중에 탄크레드는 고작 9살의 후계자 굴리엘모 3세만을 남기고 사망했다. 하늘은 계속해서 하인리히의 편을 들어주는 듯 했고, 하인리히는 유유히 남하하기 시작했다.

4. 호엔슈타우펜 제국의 꿈


같은해 7월, 전격적으로 국경을 넘은 하인리히군은 매우 쉽게 시칠리아 왕국을 점령했다. 탕크레드의 죽음으로 반독일파는 구심점을 잃었고 후계자는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였다. 대세를 읽은 많은 도시들이 하인리히 6세에게 별다른 저항 없이 항복해갔다. 3년 전 그를 좌절시켰던 나폴리마저도 항복했고, 시칠리아 제2의 도시 메시나도 그가 남부 이탈리아를 제압하고 시칠리아에 상륙하자 항복했다.
원정 4개월만인 11월, 시칠리아의 수도 팔레르모가 무혈 개성된다. 무혈 개성의 조건은 굴리엘모 3세가 왕위를 포기하는 대신 레체 백작령을 줄 것이었다. 그러나 하인리히는 냉철한 인물로 굴리엘모 3세를 비롯한 잠재적 반란 세력을 남겨두려 하지 않았다. 하인리히는 12월 25일 시칠리아 왕으로 즉위한 후 수백명의 시칠리아 귀족들을 처형했고, 굴리엘모 3세는 거세하고 맹인으로 만들어버린 후 유폐시켰으며, 탄크레드는 부관참시되었다.
독일과 네덜란드 내 가문 영토, 새로이 확보한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 전역, 그리고 북부 이탈리아 일부 영토까지 소유하게 된 하인리히 6세는 이 시점에서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가 되었다.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를 가문의 직영지[11]로 만드는데 성공함으로써 호엔슈타우펜 왕조 최전성기를 이룩했다. 하인리히 6세의 다음 과제는 갓 태어난 아들 프리드리히의 차기 제위 계승권 확립이였다, 지금의 기세를 틈타 황제 자리도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세습 지위로 확립한다면 신성 로마 제국은 영원한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것이 될 수 있었다.
이를 위해 독일로 돌아가 선거권을 가진 제후들을 모아 회의를 열고 공작에 들어간다.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제위 세습을 허가하는 대신 제후들의 세습권도 확립하는 조건의 딜을 했고 제후들 다수의 찬성을 받아내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교회에 주어진 선거권을 대표하는 쾰른 대주교 아돌프는 맹렬히 이에 반대했고[12] 이에 동조하는 제후들이 점점 늘어나며 하인리히의 시도는 결국 수포로 돌아간다. 기존 선거 관습대로 프리드리히가 황태자 자리인 독일왕에 선출되는 것에 만족하고 다음 과제인 십자군 사업에 눈을 돌려야했다.

5. 뜻밖의 죽음, 그리고 그 이후의 호엔슈타우펜


이 무렵, 시칠리아에서 반하인리히파의 반란이 일어났고 독일에서 돌아온 하인리히는 반란을 진압한다. 주모자를 못 달린 왕관을 쓰게 한 후 못을 박는 형에 처하는 등 가혹하게 처벌하였으나 이듬해에 또 다른 반란이 일어났다. 그런데 이 때, 반란 진압을 준비하던 하인리히는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말라리아에 걸려 요절하고 말았다
향년 33세, 호엔슈타우펜 제국을 이룩한 젊은 황제는 뜻밖에 죽음을 맞았다. 지금까지는 마치 하늘이 그를 돕는 듯 운이 따랐으나 최후에는 너무나도 젊은 나이에 갑작스럽게 허망한 죽음을 맞이했다. 행운엔 반드시 불운이 따라붙는 법이라고 할까.
탄크레드의 후계자가 그랬었듯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는 불과 4세였고 세습 제국을 눈 앞에 두었던 호엔슈타우펜 제국은 서서히 붕괴되었다. 세습제가 확립된 시칠리아 왕위는 프리드리히에게 상속되었지만 선거제 국가였던 신성로마제국에서 4살의 어린 아이가 황제로 인정 받을 수는 없었다. 하인리히의 동생 슈바벤 공작 필립이 대신 가문의 수장이 되어 황제로 즉위했지만, 하인리히 사후 혼란을 틈타 사자공의 아들 오토가 반호엔슈타우펜 세력을 결집해 그 역시 황제 오토 4세로 즉위해 제국은 내전에 돌입한다.
오토 4세의 배후에는 호엔슈타우펜과 더욱 더 원한 관계가 된 오토 4세의 외가 잉글랜드 왕국과 강력한 제국을 두려워했던 교황청이 있었기 때문에 내전은 장기화되었다. 필립쪽이 난국을 타개해가기 시작해 승기는 호엔슈타우펜쪽으로 이어졌으나 승리를 목전에 앞둔 시점에서 필립이 암살당하고 만다. 제위는 결국 오토 4세에게 넘어갔으며 두 명의 수장이 연이어 사망한 호엔슈타우펜 세력은 시칠리아만을 남기고 거의 붕괴되었다.
하지만 1212년, 성인으로 성장한 프리드리히 2세가 다시 세력을 결집하여 오토 4세 타도를 외쳤다. 교황의 후원으로 즉위한 오토 4세가 교황과 대립하면서 프리드리히에게 기회가 온 것이다. 교황의 지지를 받은 그는 반 오토 4세파를 결집하여 대립 황제[13]가 되고 오토 4세의 혈맹인 잉글랜드를 치기 위해 잉글랜드의 숙적 프랑스와 손을 잡는다. 오토 4세와 영국의 존 왕은 플랑드르, 브라반트 일대의 제후들과 연합군을 결성하여 프랑스로 진격하였으나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에게 부빈 전투에서 2배에 달하는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대패를 당했으며, 목숨만 살아 개쪽을 당한 채로 신성 로마로 돌아온 오토 4세를 끌어내리는 것에 성공한 프리드리히 2세는 정식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한 번 금이 간 호엔슈타우펜 제국은 다시 부활하지 못했다. 그들이 조장한 제국의 혼란을 틈타 최고조로 강력해진 교황권과 수 없이 싸웠으나 이길 수 없었고 프리드리히 2세의 사후 후계자들은 아예 패배하면서 가문의 새 본거지였던 시칠리아가 정복당해 가문은 멸문했다. 독일에서는 호엔슈타우펜 가문이 멸문당한 후 정식 황제가 없는[14] 대공위 시대가 약 20년간 지속됐고 이제 강력했던 제국의 모습은 이제 더 이상 찾아 볼 수 없었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하인리히 6세가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호엔슈타우펜가의 신성로마제국을 완성했다면, 허울뿐인 제국으로 남았던 신성 로마 제국의 모습은 조금은, 어쩌면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지만 하늘은 그에게 그 길을 허락하지 않았다.

6.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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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코에이 게임 징기스칸 4에서 시나리오 1(1189년)에 프리드리히 1세의 아들로 등장한다. 정치 64, 전투 71[16], 지모 62로 명군의 능력치를 가진 아버지 프리드리히 1세나 지모 100 스펙을 보유한 아들 프리드리히 2세에 비해서는 낮다. 그나마 동생 필립보다는 나은데, 필립은 이름조차 그냥 '슈바벤공'이며 능력치도 더 낮다. 왕비인 콘스탄스는 기욤 2세의 왕비로[17] 있어서 하인리히 6세로 콘스탄스를 왕비로 맞으려면 프리드리히 1세로 양위한 뒤에 팔레르모를 점령하면 된다.

[1] 실제로는 차남이나 장남 프리드리히가 유아기에 사망했다.[2] 실질적 독일의 통치자가 아닌 명예적 칭호이다. 선거제 국가인 신성로마제국에서 강한 황권을 가진 황제들이 생전 후계 확립을 위해 어린 자신의 아들을 선거를 통해 제후들의 동의를 얻어 미리 즉위시킨다. 동양 관점에서 보면 황태자 지위라 할 수 있다.[3] 프랑스식 이름은 기욤 2세로 당시 시칠리아는 노르만계인 오트빌 왕가가 지배했다.[4] 프랑스식 이름은 콘스탄스다.[5] 고령의 나이에 물이 찬 강을 건너다 사망했다. 자나깨나 방심하지 말고 건강을 조심하자.[6] 비록 제후들의 선거를 통과할지라도 교황에게 대관식을 치루지 못하면 엄밀히 말해 정식 황제는 아니다. '독일왕'이라 불리며 실질적으로는 황제나 다름없고 또한 그렇게 인정받으나 일부에서는 정식 황제로 취급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대공위 시대를 종식시켰으나 이탈리아에는 관심이 없어 대관식을 치르지 않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첫 황제 루돌프 1세.[7] 3차 십자군 원정에서 레오폴트는 프리드리히 1세가 병사한 후 독일군 사령관을 맡았다. 아크레 공략 후 승전국(예루살렘 왕국, 잉글랜드, 프랑스)의 깃발이 내걸리자 독일군의 몫으로 그의 깃발도 내걸었는데, 리처드 1세가 '''왕도 아닌게 어디서 감히.'''의 마인드로 깃발을 찢어버려 레오폴트에게 씻을 수 없는 모욕을 주었다.[8] 프라이드가 매우 높아 적을 많이 만들었던 리처드 1세는 귀국 도중 폭풍우를 만나 육로로 귀국할 수 밖에 없었고, 다시는 만나지 않을 것 같던 레오폴트의 영지 근처를 지나다가 대가를 치렀다. 인생 몰라요. [9] 사자공의 아들 오토 4세는 후일 잉글랜드의 도움을 받아 황제가 되었으며 외삼촌인 존왕과 함께 하인리히 6세의 아들 프리드리히 2세, 그리고 그의 동맹자 프랑스왕 필리프 2세와 싸웠다. 호엔슈타우펜 가문-프랑스 vs 벨프 가문-잉글랜드의 구도로 볼 수 있다.[10] 리처드 1세는 거의 굴욕에 가까운 조건으로 풀려났다. 황제의 봉신이 될 것, 은화 15만 마르크를 배상할 것, 시칠리아 원정에 협조할 것. 당연히 잉글랜드 재정은 파탄났고 어머니 엘레오노르 등이 이리 뛰고 저리 뛰어 간신히 지불했다.[11]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맹점은 제국의 영토가 본인의 영토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봉건제의 다른 국가들도 마찬가지지만 제국은 황제가 선거로 뽑히기 때문에 사실상 제후들의 연합체라 할 수 있기에 황제와 제후간의 구속력이 약해 더욱 그러하다.[12] 당연한 것으로 교황파가 남북으로 황제의 세력에 포위된 현 상황에서 제위마저 세습된다면 그야말로 교황파는 끝장난다.[13] 2명의 황제가 있는 내전 상황에서의 황제[14] 각자 지지 세력을 모아 즉위한 대립 황제가 난립했고 실권은 물론이고 권위도 인정받지 못했다. 대표적으로 카스티야왕 알폰소 10세와 잉글랜드 왕 헨리 3세의 동생 리처드가 이 시기 대립 황제였으나 둘 다 실권은 없었고 지금도 황제로 여겨지지도 않는다.[15] 일러스트는 하인리히 6세의 고유의 얼굴이 아니다. 서유럽 문화권 독일지역의 가상 장수의 일러스트 중 하나이다.[16] PS 버전에서 79로 상승.[17] 기욤 2세(굴리에모 2세)의 원래 왕비는 잉글랜드 왕 헨리 2세의 딸인 조앤(조안나)이지만 게임에선 조앤이 안 나오며, 콘스탄스는 기욤 2세의 조카지만 기욤 2세는 자녀가 없어서 후사가 끊기지 않으려면 콘스탄스에게서 아들을 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