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프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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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필리프 존엄왕(Philippe Auguste)
'''생몰년도'''
1165년 8월 21일 ~ 1223년 7월 14일 (57세)
'''재위기간'''
1180년 9월 18일 ~ 1223년 7월 14일
'''출생지'''
프랑스 왕국 고네스
'''사망지'''
프랑스 왕국 망트
1. 개요
2. 생애
3. 헨리 2세와의 대립
3.1. 제프리 2세
4. 리처드 1세와의 대립
4.1. 3차 십자군 결성
4.2. 메시나에서
4.3. 아크레에서
4.4. 전쟁 준비
4.5. 전쟁의 시작
4.6. 4년 만의 재회
4.7. 그 후
5. 존 왕과의 대립
6. 내정
7. 평가
8. 그 외
9. 대중문화에서


1. 개요


프랑스 왕국의 국왕.[1] 카페 왕조 7대 왕으로 루이 7세와 아델 드 샹파뉴 사이에서 여성 형제뿐인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별칭인 존엄왕[2]에서 짐작할 수 있듯, 플랜태저넷 왕조의 앙주 제국에게 눌려 국가 자체가 희미해져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고도 할 수 있었던 프랑스를 음모와 술수, 전쟁 등 온갖 방법을 통해 중앙집권화시키고 강대국으로 올려놓은 명군이다. 야금야금 왕권을 확대해나갔던 중세 프랑스와 카페 왕조의 상황을 가장 잘 나타내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2. 생애


필리프 2세가 태어나기 전 카페 왕가는 정통성 결핍과 관련된 세간의 비난에 시달렸고, 카페 왕가가 카롤루스 왕조의 왕위를 찬탈했기 때문에 신의 저주를 받아서 루이 7세에서 단절된다는 소문이 돌았다. 루이 7세는 카롤루스 왕가의 후계인 블루아 백작 티보 4세의 딸 아델 드 샹파뉴와 3번째로 결혼하였고 이 사이에서 필리프가 태어났다.
'''그의 탄생이 알려지자 파리 전체가 불바다에 휩쓸린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파리 신민들은 온 성당의 종을 울리고 거리로 뛰어나와 횃불을 키고 잉글랜드인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며 '''이 아이가 플랜태저넷 왕가의 망치가 될 것'''이라고 소리쳤다.
1179년 11월 1일, 14세에 공동왕으로 즉위했으며, 1180년 부왕이 죽자 단독왕으로 즉위했다. 즉위 직후 헌장을 발행하여 친정을 펼치기 시작하고 정략과 무력을 동원하여 북프랑스 내전을 진압했다.
별칭 존엄왕은 당대 생드니 수도자 기록의 "'''필리프 아우구스투스''', 프랑스의 영화로운 왕의 치세를 알아야 한다."를 시작으로 유래되었다.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내전을 헤쳐나간 업적을 비롯해 여러 측면에서 비교하여 당대 사가들이 그렇게 불렀을 것이란 추측이 있다.
필리프 2세는 필요 이상의 말이 없었고 말씨가 고상하며, 성격이나 종교에 대한 열정이 상당히 냉정하고 시니컬했다고 전해진다. 외모에 대해 당대 샹파뉴의 트루베르가 필리프 2세의 인격을 혹독히 비난하면서도 '그를 본 누구나 그가 아는 게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를 본 누구나 그가 아름답고 우아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여인에게서도 저렇게 아름다운 남자는 태어난 적이 없었다'고 묘사했으며, 폴릭세네헬레네의 맞수라 불린 절세 미녀 덴마크 공주 잉에보어보다 더한 찬사를 들을 정도였다고 한다.[3]
또한 '키가 크고 검을 휘두르기에 팔이 튼튼하고 힘이 세다.', '모든 이가 감탄하여 바라볼 정도로 용모가 너무 대단히 출중하고, 키가 위엄있게 크다', '아름답고 피부가 발그스름하고, 몸의 균형이 좋고 행동거지가 우아하며, 얼굴이 빼어나고 표정이 쾌활하다.', '얼굴이 기쁨으로 눈부시고 심지어 아주 쾌활해 보였다.' 등의 기록이 있다.[4]

3. 헨리 2세와의 대립


노르망디 공작, 앙주와 멘 백작 앙리 플랜태저넷이 필리프 2세의 부친 루이 7세의 첫 왕비였으나 이혼하였던 아키텐과 가스코뉴 여공작, 푸아티에 여백작인 엘레오노르 드 아키텐과 결혼 후 잉글랜드 왕 헨리 2세로 즉위하여 강대한 남프랑스의 넓은 영지를 잉글랜드 산하로 끌어들이고 브르타뉴까지 차지, 프랑스 문화권 영토의 거의 절반 가까이를 확보한 상황이었다. 반면, 카페 왕가 직할지는 일 드 프랑스와 부르쥬에 그쳤다.
헨리 2세와 엘레오노르의 자식들인 차남 청년왕 헨리, 삼남 사자심왕 리처드 1세, 사남 브르타뉴 공작 제프리 2세, 삼녀 조안, 막내 무지왕 존 왕 등은 필리프 2세와 혈연적으로 아무런 관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엘레오노르 때문에 법적 모계상으로 형제 관계에 가까운 위치에 있었다. 게다가 카페 왕가와 플랜태저넷 왕가는 사돈 관계였다. 루이 7세와 그의 2번째 왕비 콩스탕스 드 카스티야 사이에서 태어난 마르가리트와 아델은 각각 1159년 청년왕 헨리와 결혼, 1169년 리처드와 약혼하였다. 필리프 2세는 헨리 2세의 아들들과 가까이 지내고 헨리 2세와 그의 아들들의 내분을 교묘히 이용했다.
1176년, 청년왕 헨리가 이름뿐인 잉글랜드 공동왕 자리, 부친의 감시와 억압에 분노하여 동생 리처드의 아키텐 봉신들과 결탁, 음모를 획책했다. 그러나 헨리 2세가 파견한 부대법관이 상황을 눈치채 보고하여 완전히 탄로나고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는 "이후 그는 3년간 마상창시합과 후원에만 몰두했다. 왕족의 위엄은 내려놓고 기사처럼 행동하고, 마상창술의 훈련에 집중하여 여러 경기에서 우승을 거머쥐고 국제적 명성을 떨쳤다."라고 증언했다. 아라곤 왕 알폰소 2세와 리처드의 봉신들을 비롯한 수많은 동맹국이 청년왕 헨리에게 온갖 감언이설로 끊임없이 공모를 부추겼으나, 청년왕 헨리는 모두 물리쳤다. 1180년, '''필리프 2세는 그런 청년왕 헨리를 가까이 했다.'''
1181년, 플랑드르와 썽쎄흐가 급습하여 파리 코앞까지 치고 들어온 순간,[5] '''헨리 2세의 아들들이 필리프 2세를 구하고 보호해 위기를 모면했다.''' 헨리 2세가 나서서 필리프 2세의 편을 들고, 청년왕 헨리, 리처드, 제프리 2세는 필리프 2세와 플랑드르의 전쟁에서 필리프에게 가세해 군을 지휘했다.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1세 드 알자스가 필리프 2세에게 회담을 제의하고 필리프 2세는 청년왕 헨리를 대동했다.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는 플랑드르 백작이 프랑스 왕 옆에 있는 청년왕 헨리를 두려워하여 섣불리 행동하지 못했다고 기술했다.
1182년 초, 리처드의 아키텐 봉신들이 청년왕 헨리에게 공모를 요청, '''청년왕 헨리가 즉각 대규모 군사를 일으켰다. 여기에 제프리 2세가 용병을 이끌고 합류, 필리프 2세가 용병을 지원했다.''' 삼형제가 무자비한 전투를 벌이고 헨리 2세가 급히 달려와 아들들을 중재하려 했으나 아무도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기랄두스 캄브렌시스는 헨리 왕이 아들들이 연합하여 자신에게 대적하지 않는 이상 당분간 방조를 택했다고 기술했다.
1182년 가을, 루앙에서 청년왕 헨리가 영지를 직접 통치하는 동생들과 달리 다스릴 영지가 없고 이름뿐인 잉글랜드 공동왕 자리를 부친에게 강하게 항의하고, 자율권을 주장했으나 합의를 보지 못했다.
분개한 청년왕 헨리는 '''그 길로 당장 파리로 가서 필리프에게 조언을 구하고''', 루앙으로 돌아가자마자 선언했다.

"부왕께서 명령하신 비굴한 위치에 있느니, 차라리 추방을 당하거나 십자군 원정을 가리다. 나의 요구 조건들이 무시된다면 이대로 자살을 하겠소!"

헨리 2세는 대경실색하여 아들에게 막대한 하사금과 아흐정떵 성 거처, 그리고 아들의 부하들의 1년치 급여를 내렸다. 그러나 청년왕 헨리에게 주어진 권한은 여전히 제한적이었다.
1182년 크리스마스, 캉에서 대규모 연회를 연 헨리 2세가 청년왕 헨리를 달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리처드와 제프리에게 형을 상위 주군을 모시는 충성 서약을 요구했다. 제프리는 응했으나, 리처드는 거절했다. 리처드는 이 문제에 관해 나의 주군은 프랑스 왕 필리프뿐이고, 영지는 모후에게서 받은 것이니 부친이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확언했다. 그리고 형에게 "내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직접 와서 싸워서 가져가라."라고 도발했다. 이에 헨리 2세가 크리스마스 연회를 파하고 아들들을 르망으로 데려가 화해케 했으나 청년왕 헨리는 리처드가 성물 앞에서 충성 서약을 하라는 조건을 걸고, 리처드는 분노하여 형을 위협하고 르망을 떠났다.
1183년, 청년왕 헨리가 제프리 2세와 연합하여 리처드의 영지 아키텐을 침공했다. '''필리프는 청년왕 헨리와 제프리에게 용병을 지원'''하고 헨리 2세는 군사를 이끌고 리모주에 당도, 이에 청년왕 헨리가 부친에게 다시 반란을 일으켰으나 6월 11일, 청년왕 헨리가 28세의 나이로 이질로 숨져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3.1. 제프리 2세


필리프 2세는 헨리 2세에게 청년왕 헨리가 상속인 없이 죽었으므로 그의 아내인 누나 마르가리트의 지참금 지조흐와 노르망 벡쌍의 영유를 내놓고 그의 유산 노르망디와 앙주를 과부산으로 요구했다. 그리고 리처드와 누나 아델의 결혼을 요구했으나 헨리 2세는 이 문제를 질질 끌었다.
1175년, 기랄두스 캄브렌시스는 헨리 2세의 정부 로자문드 클리포드가 수녀원에 들어간 후 그가 공공연하고 태연하게 15세였던 아델과 염문을 뿌리고 다니고 결혼까지 염두에 두었다고 기술했다.[6] 학자들은 정치적으로 헨리 2세가 지조흐와 벡쌍의 지참금을 가진 프랑스 공주와의 결혼을 자신의 상속인으로서 입지를 다지고 필리프 2세와 동맹을 강화할 기회로 보았기 때문에 리처드를 견제하려는 의도로 결혼을 미루었다고 분석했다.
1183년 가을, 리처드가 아델과 결혼하겠다 선언하고 교회의 지지를 얻었다. 그리고 '''필리프와의 동맹을 두고 리처드와 제프리가 경쟁을 벌였다.''' 필리프는 두 형제 중 특히 친하였던 제프리와 동맹을 맺고[7] 리처드가 제의한 결혼 문제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1183년 12월 6일, 지조흐에서 헨리 2세와 필리프 2세가 회담을 열었다. 필리프가 노르망디와 앙주를 과부산으로 요구하자 헨리 2세는 이를 반박했다. 필리프와 마르가리트는 그녀의 지참금인 지조흐와 노르망 벡쌍을 아델의 지참금으로 넘기는 대신 마르가리트가 헨리 2세로부터 생애 매년 거액의 배상금을 받을 것을 동의했다.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는 이때 헨리 2세가 필리프 2세에게 바다 건너 그의 모든 땅에 대해 전부터 결코 바라지 않았던 충성 서약을 했다 기술했다.[8] 헨리 2세는 아델이 즉각 리처드와 결혼하지 않으면 존과 결혼할 것이라 알렸다.
그 후 헨리 2세가 리처드의 영지 아키텐을 존에게 양도하라 거듭 명령, 리처드가 불복하자 1184년 여름, 존이 아키텐을 공격하도록 허가했다. 제프리가 존에게 가세하여 푸아티에를 기습하고 리처드는 보복으로 제프리의 영지 브르타뉴를 점거했다.
한편 필리프 2세는 샹파뉴, 블루아와 동맹을 다지고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1세와 왕비 이사벨의 부친인 에노 백작 보두앵을 이간질해 그들이 이전투구하도록 만들어 북프랑스를 공략했다. 또한 동프랑스의 부르고뉴 공작 위그 3세의 도발을 무력으로 견제했다.
1184년 11월, 헨리 2세가 아들들에게 전쟁을 멈추라 명하고, 잉글랜드로 소환하여 모후 엘레오노르 드 아키텐과 10년 만에 재회케 했다. 그곳에서 헨리 2세는 엘레오노르에게 아키텐을 존에게 양도할 것을 제안했으나, 엘레오노르는 이를 거절했다. 그리고 리처드와 제프리가 신경전을 벌이고, 에버라드는 '''이를 본 헨리 2세가 충성심을 가장하는 제프리를 의지해 리처드의 견제책으로 삼아''' 노르망디에 접근할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보았다.
1185년 초,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는 리처드가 제프리를 극심하게 적대했다고 기술했다.
또한 B. B 브로턴의 연구에 따른 1185년 초, 리처드의 가까운 친우이자 리무쟁의 유명한 트루바두르가 작곡한 노래가 성행했다.

참으로 타락한 사람들! 공성전을 하고, 몇 주 몇 달간 성대한 선물을 퍼부어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고, 용병과 트루바두르에게 돈을 쓰던 남자들은 어디에 있단 말이오? 어디서 그 유일한 남자를 볼 수 있소? 내가 용기 내서 말해 보리오?

프랑스 왕이 아름답고 고귀한 땅 지조흐[9]

를 리처드 공께 준다면, 그는 너무 많이 고마워 할 것이네. 그러나 프랑스 왕이 내 마음 같다면, 리처드 공이 그를 만나지 않고도 그를 슬프게 하려는 충동이 치솟지 않을 것이네. 그리고 그는 그러지 않을 것이라, 자신을 억누른다오.

리처드 공께 어서 전해주게나! 내 눈에 '''리처드 공은 사자요, 필리프 왕은 어린 양으로 보인다오.'''

리처드는 우두머리 수컷이요, 필리프는 계집애 같다 정도가 되고 필리프의 반응은 알려진 바 없다.
'''리처드와 제프리의 불화가 삽시간에 극으로 치달았고''' 리처드가 제프리와 싸우겠다고 대규모 군사를 일으켰다.[10] 1185년 4월, 엘레오노르 드 아키텐을 대동한 헨리 2세가 아들들의 싸움에 다시 강하게 개입했다. 전쟁을 일으키지 않도록 리처드에게 남프랑스 영지 순회를 떠나라고 명했다.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는 리처드가 많은 이들의 충고에 따라 사악한 무기를 모두 내려놓았다고 기술했다.
리처드는 부모와 셋이서 남프랑스 영지 순회를 떠났다.[11]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가 표현한 바, 리처드는 온순한 아들처럼 부친의 곁에서 머물렀다.
반면 제프리에게 헨리 2세는 앙주와 푸아티에 사이에 위치한 낭트를 주었다. 제프리는 낭트에서 권위를 확립한 즉각 그길로 당장 파리로 가서 필리프와 함께 지냈다.

브르타뉴 공작이 프랑스 왕에게 대단히 지극정성이었다. 그리고 부친인 잉글랜드 왕의 심기를 어지럽히기 위해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호버든의 연대기》

제프리 공작이 프랑스 왕과 그의 가신들의 호의를 얻어냈다. ... 또한, 그는 프랑스 왕과 우정이 너무나 강했다. ... 그가 언변이 가장 뛰어난 데에다 최고로 상냥한 남자이기 때문이었다.

《오페라》

이 무렵, 아라곤 왕 알폰소 2세와 나바라 왕 산초 6세가 분쟁을 벌이고 알폰소 2세가 리처드의 도움을 요청, 가스코뉴에서 둘이 회담을 열었다. 얼마 후, 산초 6세가 딸 베렝겔라 나파로아코아에게 몬레알의 일부 영지를 주었다. 몇몇 학자들은 이를 근거로 1185년부터 리처드가 신붓감으로 베렝겔라를 점찍고 '''비밀리에 약혼 절차를 밟았다''' 주장했다.[12]
1185년 7월, 솜므에서 필리프 2세와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1세 드 알자스의 군세가 대치했다. 그러나 전투 직전,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1세가 회담을 제의하고[13] 필리프 2세는 그로부터 '''아미앵, 몽디디에흐, 후아, 슈아지 오 바끄, 뚜호뜨를 얻고, 베르망두아와 발루아를 상속분으로 차지'''하는 협정을 체결했다.
그 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프랑스 왕이 피리를 손에 들고 풀밭에 앉아서 깊은 명상에 잠겼다. 그가 눈물을 흘리자, 궁정에 있는 사람들은 입을 다물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들 중 한 남자가 다른 이들에게 말했다.

"왕의 생각을 말할 수 있다면 그자에게 기꺼이 나의 최고의 말을 주겠다."

한 탐욕스러운 이가 벌떡 일어나 왕에게 다가갔다.[14]

그리고 그의 생각을 터놓는다면 마치 그가 선물하는 것 마냥, 그러한 조건으로 약속된 말을 그에게 주겠다는 것을 애원하고 간청했다. 그 결과 그를 모르고 있지 않은 왕이 마음의 비밀을 그에게 터놓았다.

"한 가지 생각이 나오."

그가 말했다.

"하느님께서 샤를마뉴 시대의 영광을 프랑스가 되찾을 수 있는 은총을 내게 주실 것인지, 아니면 나의 후계자 중 한 사람에게 주실 것인지 알기 위함이었네."

《교황 인노첸시오 3세와 그의 시대의 역사》

1185년 말, 부르고뉴 공작 위그 3세가 반항적인 봉신들을 응징하는 중 이로 인한 교구의 피해가 막심해지자, 필리프 2세는 이를 명분으로 부르고뉴 내전에 개입, 위그 3세의 반항적인 봉신들에게 용병을 지원했다. 12월, 썽쓰에서 필리프 2세가 위그 3세를 소환하고 그가 이에 불복하자 이듬해 1월, 필리프 2세는 이를 명분으로 출군하여 부르고뉴를 기습, 위그 3세에게 벌금으로 3만 리브르를 요구했다.
1186년 3월, 헨리 2세가 아키텐의 주요 성채에 신하들을 파견하여 아키텐을 통제하려 시도하고, 리처드에게는 툴루즈 백작 레몽 5세를 제압하라고 명령했다.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는 리처드가 몹시 분개했으나 부친에게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았다고 기술했다.
같은 달, 필리프 2세는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드 알자스와 연합하여 부르고뉴를 침공, 주요 도시까지 치고 들어가 샤띠용을 점거했다. 부르고뉴 공작 위그 3세는 오흐비에또로 달려가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의 아들이자 이탈리아 왕으로 막 즉위한 하인리히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프리드리히가 아들의 개입을 금했다. 4월, 프리드리히의 중재 하에 필리프 2세는 위그 3세와 화해하고 그로부터 거액의 배상금을 뜯어냈다.
조흐덩 말을 빌리자면, 북프랑스와 동프랑스를 어느 정도 안정화한 필리프 2세의 목표는 본격적으로 플랜태저넷 왕가로 향했다.
1186년 5월, 필리프와 제프리는 '''헨리 2세와 리처드를 대적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18세기 역사가들의 추측에 따르면, 분노를 억누르고 있던 리처드의 노고를 완전히 망쳐놓고 부친과의 반목을 악화시키기 위해, 제프리가 필리프에게 리처드와 아델의 결혼 재촉을 귀띔하고, 이 의도를 안 필리프가 흔쾌히 받아들여 헨리 2세에게 공개적으로 압력을 넣었다. 제프리는 부친과 형에게 맞설 낭트 국경의 영주들과 동맹을 맺고, 뉴버그의 윌리엄은 제프리가 앙주를 탐냈다고 기술했다.
에버라드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시기 리처드는 제프리와 필리프의 농간에 발목이 잡힌 채, 모후를 앞장세워 자신과 공동으로 아키텐 통치권을 행사하려는 부친을 묵인해야 했다.
R. 크레스포의 연구에 따르면, 이즈음 리무쟁의 트루바두르가 리처드와 제프리의 불화를 다루어 하단의 노래를 작곡했다.

나의 주군 백작이여, 나는 의심할 여지 없이 그대를 비난하고 있다네. 숙녀가 그대가 다가가 말을 걸어 주기를 원했을 때, 그대는 감히 그렇게 하지 않았다네.[15]

카탈로니아 식으로 내가 그대의 편에 서서, 그대가 그녀를 헛되이 기다리게 한 것이 부끄럽다오.

좋은 연인은 연서를 받으면 지체해서는 아니 되오. 숙녀의 관심과 필요를 모르기 때문에 그는 어서 떠날 준비를 하고 길을 나서야 한다네. 아마 그녀는 그가 나서길 바랄 것이오. 그러니 그는 지체하지 않는 것이 좋구려.

그대가 그녀에게 한 농담과 장난이 돌아오는 것을 알았을 때 기다려서는 아니 되오. 노르망디를 받을지라도 말이오! 그대가 진심으로 베하와 도르도뉴 사이의 지역으로 가고자 한다면, 그대는 두려움을 극복할 수 없을 것이나 이것을 생각하면 아니 되오.

...

'''제프리 공이 사라지지 않으면 푸아티에와 가스코뉴를 차지할 것이네.''' 그러나 제프리 공은 숙녀들에게 구애하는 법을 모른다오.[16]

[17]

여름 내내 필리프와 제프리는 파리의 시테 섬 궁정에서 함께 지냈다. 기랄두스 캄브렌시스는 제프리가 필리프의 궁정을 굉장히 자주 길게 방문하고, 제프리가 프랑스 세네샬이란 말이 돌았다고 기술했다.[18] 호버든은 제프리가 필리프에게 넘어가 그에게 충성 서약을 했다, 캔터베리의 저베이스는 제프리가 필리프를 따르고 자신의 영지들을 그에게 복종시켰다고 기술했다.
심지어 제프리는 브르타뉴에서 새로 발행한 동전 뒷면 중심에 카페 왕가와 프랑스 왕인 필리프 2세를 상징하는 백합을 을 새기기도 했다.[19]
그러나 1186년 8월 19일, 제프리는 파리에서 27세의 나이로 의문사했다. 호버든은 제프리가 병에 걸렸으며, 마상창시합에서 낙마 사고로 죽었다고 기술했다. 캔터베리의 저베이스와 기랄두스 캄브렌시스는 마상창시합 언급이 없고, 제프리가 병으로 죽었다고 기술했다.
프랑스 연대기 작가 또한 마상창시합 언급이 없고, 제프리가 도시에서 필리프가 돌아오길 기다리던 중 병에 걸렸다고 기술했다.[20] 이 뒤는 다음과 같다.

잉글랜드 왕 헨리의 아들이자 저명한 브르타뉴 공작 제프리가 병석에 누웠다. 그를 상냥하게 지극히 사랑한 프랑스 왕은 파리의 모든 의사를 불러모아 공작을 살리기 위해 모든 수단을 총동원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고 8월 19일, 각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공작은 죽음을 맞이했다. 프랑스 왕이 성모 마리아 대성당(노트르담 대성당)에 도착할 때까지 그의 육신에 파리 신민들과 기사들이 존중과 경의를 바쳤다. 그리고 그의 장례식에서 수사와 성직자들이 가장 엄청난 헌신을 다하여 장례를 치렀다.

다음날, 프랑스 왕은 블루아 백작 티보와 파리로 와서 석관에 있는 그의 육신에 방부 처리를 하도록 했다. 그리고 주교와 성직자들이 있는 가운데, 파리 주교와 성모 마리아 대성당의 가장 높은 제단 앞에 공작을 묻었다. 장례식이 끝나고 프랑스 왕은 블루아 백작 티보, 누이인 샹파뉴 백작 부인 마리와 그녀의 아들 앙리, 그리고 잉글랜드 젊은 왕의 미망인 누이 마르가리트와 함께 자신의 궁정으로 돌아갔다. 그가 애도한 위대한 왕자가 죽은 운명으로, 몹시 비통해했다.

그들이 우정어린 위로를 하는 동안, 친절하고 자비로운 눈으로 바라보던 부왕 루이처럼 왕자의 마지막 순간들은 그의 마음에 항상 다시 나타나고 항상 그의 마음을 차지했다. 프랑스 왕은 심지어 부왕의 영혼을 위해, 그리고 그가 사랑하는 브르타뉴 공작의 영혼을 위해 성모 마리아 대성당에 성직자 넷을 두었다.

《프랑스의 역사에 관한 수록본》

기랄두스 캄브렌시스는 제프리의 장례식에서 필리프의 반응을 기술했다.

프랑스 왕은 그의 죽음으로 몹시 깊은 슬픔과 절망에 시달렸다. 그를 향한 사랑과 존중을 증명하기 위해 축복받은 처녀에게 바쳐진 파리 대성당의 높은 제단 앞에 공작을 묻으라 명령했다. 장례식이 끝날 무렵에 그가 열려진 무덤 속에 안치된 공작의 관을 향해 뛰어들고자 발버둥치는 것을 주위에서 겨우 말렸을 정도였다. 하지만 부친의 슬픔은 그 이상이었다. 젊은 왕의 죽음을 다시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오페라》

호버든은 헨리 2세가 제프리의 변고를 들은 즉각 존부터 불렀으며, 3주도 채 지나지 않아 스코틀랜드 왕 윌리엄 1세 사자왕과 그의 왕비를 우드스톡에서 흥겹게 맞이했다고 기술했다.[21]
필리프 2세는 헨리 2세에게 자신이 상위 군주이므로 3살인 제프리 2세의 딸 엘레오노르 드 브르타뉴의 후견인임을 주장하여 양육권을 청구하고, 툴루즈에서 툴루즈 백작 레몽 5세을 제압하는 리처드를 철수시킬 것을 요구했다.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는 노르망디 국경 지대의 긴장감이 고조되었다고 기술했다.

3.2. 리처드


그 해 겨울, 필리프 2세는 리처드와 동맹을 맺었다.
그 무렵, 유년기부터 프랑스 궁정에서 필리프와 함께 자랐던 절친 르노 드 다마르탱이 필리프에게 등을 돌리고 헨리 2세에게 붙었다.[22]
1187년 초, 다음과 같은 일이 벌어졌다.

프랑스 왕의 기사 리샤흐 드 발이 지조흐와 뜨히 사이에 있는 발에서 그의 구역의 성을 요새화했다. 지조흐의 꽁쓰따블인 앙리 드 베흐가 이를 불쾌히 여기고 가능한 한 그 일을 방해하는 것을 소망하여 그의 부하들과 그곳으로 갔다. 리샤흐 드 발의 군사들이 나가서 그를 만나고 교전이 벌어졌다. 이 때 리샤흐의 아들이 살해당하고, 그의 많은 군사들이 부상을 입었다. 그 후, 앙리 드 베흐와 그의 부하들이 달아났다. 그러나 앙리 드 베흐는 지조흐로 감히 돌아가지 않고, 푸아투 백작 '''리처드에게 갔다.'''

《호버든의 연대기》

1187년 3월 29일, 낭트에서 제프리 2세의 미망인 콩스탕스 드 브르타뉴가 그의 아들 아르튀르를 낳았다. 4월, 필리프는 헨리 2세에게 아르튀르 양육권도 청구했다. 누나 마르가리트를 헝가리 왕 벨라 3세와 결혼시키고 헨리 2세에게 그녀의 지참금이었던 지조흐와 노르망 벡쌍의 영유를 내놓고 누나 아델을 돌려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헨리 2세가 이 문제를 질질 끌고 양육권 청구를 거절하여 '''상황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필리프 2세는 리처드를 끌어들이기로 했다.'''
5월 말, 필리프 2세는 군사를 이끌고 헨리 2세의 영토인 이쑤덩을 점거했다. 헨리 2세와 리처드가 대군을 이끌고 샤토루에 당도, 필리프에게 통첩했다.

'우리가 상속받은 이 땅을 떠나고 그대의 왕국으로 철군하라. 그렇지 않으면 이 전쟁에서 우리의 가치를 알게 될 것이다. 그대에게 주어진 것은 전투 혹은 철군뿐이다.'

중무장한 전군이 전투 대형을 갖추고 대치하여 공격 명령을 기다리는 상황, 리처드가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1세 드 알자스를 대동하여 필리프 2세의 막사를 방문했다.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는 이 때 필리프 1세가 필리프 2세의 편에 서서 리처드에게 충고했다 증언했다.

"후일을 생각하시오. '''왜 프랑스 왕이 그대를 상냥하게 대하고 그대가 기대하는 바에 대해 확신을 주고 있겠는가?''' 어리다고 그를 얕봐서는 아니되오. 그는 어리긴 하나 정신이 원숙하고 통찰력과 결단력이 뛰어나며 옳고 그름에 밝고 자신이 베푼 것은 잊지 않는 위인이오. 내가 바로 산증인이오. 프랑스 왕 때문에 귀중한 많은 것을 잃었고 지금도 후회하고 있소이다. 여기서 그를 지지한다면 필시 그대에게 이익이 될 것이오."

《프랑스의 역사에 관한 수록본》

프랑스 연대기 작가는 이사이 벌어진 하단의 사건을, 많은 이들이 불경스러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하느님의 경고로 믿었다고 기술했다.[23]

푸아티에 백작 리처드의 부하들이 샤토루의 교회 앞에 모여서 주사위 놀이를 했다. 그들 중 사악한 이가 도박에서 돈을 잃자 사탄에 사로잡혀 성모 마리아와 하느님께 신성모독을 퍼부었다. 주여. 오, 비참하도다! 이 새로운 이스카리옷 유다가 돌을 들더니 모두가 보고있는 가운데,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의 상을 향해 돌을 던졌다. 그녀의 팔이 부수어지고 아기 예수가 땅으로 떨어졌다. 그 자리에 있던 수많은 목격자로부터 들은 바에 따르면, 즉시 그 상처에서 붉은 피가 솟구치고 땅을 적셨다고 했다. 잉글랜드 왕이 가장 어린 아들인 존을 그곳으로 보내서 이 사태를 수습하라 명령했다.

1187년 6월 13일, 샤토루에서 필리프 2세와 헨리 2세가 회담을 열었다. 허슬러의 말을 빌리자면, 이 사건은 전쟁의 시작이 아니라 아키텐 공작 리처드와의 동맹을 두고 헨리 2세와 필리프 2세의 외교 게임이었다. 리처드가 필리프 2세의 편에 서자[24] 필리프는 헨리 2세를 압박하여 '''이쑤덩과 프레티발을 차지''', 2년 간의 휴전으로 협정을 체결했다.
회담이 끝나자 필리프와 리처드는 파리로 가서 함께 지냈다.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는 둘을 다윗요나단에 빗대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 때, 필리프는 21세, 리처드는 거의 30세였다.

잉글랜드 왕의 아들이자 아키텐 공작 리처드가 프랑스 왕 필리프와 함께 머물렀다. 프랑스 왕이 너무 깊이 그를 존중하여 매일 같은 식탁에서 같은 접시로 음식을 먹었고 밤에는 침대가 그들을 구분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그를 자신의 영혼으로 사랑했다. 그들의 열정적인 사랑 때문에 잉글랜드 왕이 깜짝 놀라고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놀라워했다.[원문]

후일을 대비하기 위해 그가 이 갑작스러운 사랑이 어떤 불길한 음모의 전조인가 알아낼 때까지 잉글랜드로 돌아갈 계획을 미루었다.

《호버든의 연대기》

C. 재거는 '사랑이 정치적 유대감을 뜻할 때도 쓰이는 표현'이며, 헨리 2세의 반응은 분노한 아버지가 아니라 배반당한 자의 것이고, 그의 유일한 관심사는 가족의 명예가 아니라 위험에 처한 군사적 행동이라 분석했다. 그리고 헨리 2세의 유일한 대응이 계획의 변화이며, 그가 발견한 건 동성애가 아니라 불길한 음모임을 강조했다. 길링엄은 '당시 침대를 나누는 행위는 정치적 동맹의 표명'이고 둘의 행위는 정치적 이해를 위한 동맹의 과시라고 분석하여, 리처드의 성적 성향에 관한 근거가 될 수 없다고 보았다. 최근에는 '열정적인' 원문이 그 당시 성이 수반된 사랑이 지나침을 비판하는 의미로 쓰였다고 분석하여 둘이 단순한 우정은 아닐 것이란 의견이 있다.
헨리 2세가 파리에서 지내는 리처드에게 노르망디로 소환하는 서신을 여러 번 보냈으나, 리처드는 이에 응하지 않고 충복 기욤 드 롱샴이 사절단을 상대케 했다. 기랄두스 캄브렌시스는 이 시기 프랑스 왕이 리처드 공작의 심장에 부친을 향한 불신의 씨앗을 심었다고 기술했다.
참고로 기욤 드 롱샴은 동성애자로 결론이 났고, 기랄두스 캄브렌시스는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그는 체구가 왜소하고 생김새가 추하며 원숭이를 닮았다. 여자를 지독하게 혐오하고 시도 때도 없이 여리고 아름다운 소년들만 게걸스럽게 탐닉했다. ... 그는 궁정을 동성애 소굴로 만들고 이성애를 우스꽝스럽게 만들었다. 심지어 동성 간 성행위가 충격적일수록 기뻐했다.

《오페라》

또한 리처드는 동시대 최고의 군사적 천재성과 용기, 그리고 성정과 관련해 '''"또 다른 율리우스 카이사르"'''라고 평을 받았다.[25] 대부분의 학자들은 군사적 측면에서 긍정적인 평가로 보았고, 케임브리지 교수 엘 빌도 이를 인정했다. 그러나 리처드의 성적 성향 연구에서 당대의 교본을 리처드에 대한 사가의 평가와 트루바두르의 노래와 비교 분석, 리처드가 동성애 성향이 있다는 가정 하에 성적 위치 측면에서 카이사르 평판은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상스러운 기록에서 나왔음을 지적했다.[26]

아우구스투스의 수치스러운 소문은 그의 숙부 카이사르의 육욕에 복종하여 후계자 자리를 꿰찼다는 것이었다. 이는 카이사르가 직접 아우구스투스에게 깊이 빠져들었다고 마지못해 시인했다는 소문에서 나왔다. ... 몇몇 이들은 아우구스투스의 아름다운 외모를 보고 조롱했다.

《현자의 발자취와 궁정인의 경거망동》

1187년 7월, 전 서유럽을 충격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소식이 전해졌다. 하틴 전투 패배로 인해 예루살렘이 함락되었다는 것이었다.
1187년 9월 5일, 필리프 2세의 첫 왕비 이사벨 드 에노가 왕세자 루이를 낳았다. 프랑스 연대기 작가는 프랑스 왕이 대단히 기뻐하고, 파리 신민들이 밤새도록 축하했다고 기술했다.
그 해,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많은 이들 앞에서 리처드 공작이 프랑스 왕에게 말했다.

"그대의 사랑을 받을 수만 있다면 나는 기꺼이 맨발로 성지까지 걸어갈 것이오."

이것을 들은 백작이 말했다.

"어떤 차림이든 걸어서 성지까지 가는 건 시간이 아까울 것이오. 하지만 그대가 프랑스 왕을 간절히 원하는 건 그 무엇도 방해할 수 없구려. 훌륭한 갑옷을 입고 말에 탄 그대만큼이나 말이오."

《프랑스의 역사에 관한 수록본 17권》

또한, 프랑스 궁정에서 필리프 2세가 리처드와 그의 조카 오토를 모욕한 일화가 있다.[27]

아키텐 공작이 프랑스 왕에게 물었다.

"그대는 우리의 사랑하는 조카 오토를 어떻게 생각하오?"

"웬만큼 좋소."

프랑스 왕이 무성의하게 답하여 공작에게 몹시 모욕적으로 들렸기 때문에, 재빨리 그가 말했다.

"아! 하지만 언젠간 오토는 로마의 황제가 될 것이오."

그러자 왕이 비웃었다. 그리고 버럭 외쳤다.

"만약 그가 언제든 황제가 된다면, 내 그에게 파리를 주겠다!"

그 때 공작이 조카에게 말했다.

"일어나라, 오토. 왕께서 주시는 매우 대단한 선물에 예를 표하거라."

1187년 가을, 기랄두스 캄브렌시스는 하단과 같이 기술했다.

리처드 공작이 '''부왕에게 돌아가''' 모든 일에서 복종했다. 그리고 부자간에 불화를 심으려 애쓰는 이들의 사악한 조언을 따랐던 것을 참회했다. 그래서 그들은 앙제로 모이고 그곳에서 아들은 부왕의 온순한 신하가 되었다.

이 무렵, 필리프 2세는 헨리 2세에게 지속적으로 요구해 온 제프리 2세 자식들 양육권 청구를 포기했다.[28]
1187년 11월, 리처드는 보베 주교를 비롯한 프랑스 귀족들과 앞장서서 십자가를 짊어졌다. 아들의 결정을 전해들은 헨리 2세는 정무를 돌보지 못할 정도로 슬픔에 빠져 5일간 칩거했다. 이를 알게 된 리처드는 부친에게 자신을 상속인으로 지명해 줄 것을 청했으나, 그는 답을 미루었다.
1187년 12월, 필리프 2세와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가 회담을 열었다. 둘은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1세를 견제하는 입장 일치를 확인하고, 필리프는 그에게서 플랜태저넷령을 침공할 시 군사적으로 협력하겠다는 확약을 받아냈다. 그리고 왕비 이사벨의 부친 에노 백작 보두앵과 교섭하여 동맹을 다졌다.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는 '''노르망디 국경 지대의 긴장감이 급격히 고조되었다''' 증언했다. 그 후 필리프는 헨리 2세에게 누나 마르가리트의 지참금이었던 지조흐를 내놓고, 리처드와 누나 아델의 결혼을 요구했다.
1188년 1월 21일, 필리프 2세와 헨리 2세는 티레 대주교의 연설에 깊은 감동을 받고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며 평화의 입맞춤을 나누고 3차 십자군에 참여할 것을 맹세했다. 두 왕은 살라딘세를 걷기 시작했으나, 필리프 2세는 원성에 부딪히자 즉각 그만두었다.
1188년 봄, 리처드의 아키텐과 푸아티에 봉신들이 툴루즈 백작 레몽 5세와 결탁하여 대반란을 일으켰다. 리처드는 그들을 압도적으로 격파하여 수많은 귀족들과 병사들을 포로로 잡아 눈을 뽑고 가죽을 벗겼다. 그들의 친족들이 파리로 와서 필리프 2세에게 탄원하자, 필리프는 리처드에게 포로들을 석방할 것을 권했다.
하지만 리처드는 툴루즈 영지까지 밀고 들어와 께흐씨를 점유하고 궁지에 몰린 툴루즈 백작 레몽 5세는 상위 군주 필리프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필리프는 헨리 2세에게 리처드의 공격 중단을 명령할 것을 요구했으나, 헨리 2세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

'나의 아들 리처드는 나의 바람과 충고로 그러한 일을 한 것이 아니오. 그대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그는 그러한 일을 한 것이오. 더블린 대주교가 이리 전하였소.'

필리프 2세는 서신을 읽고 격분하여 협정을 깨고 군사를 이끌고 샤토루를 급습했다. 그리고 헨리 2세의 영지인 베리를 점유했다.
헨리 2세가 필리프 2세의 돌발 공격에 대한 이유부터 묻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와 툴루즈 백작에게 준 피해에 대해 리처드 백작에게 복수한 줄 알게."[29]

《호버든의 연대기》

헨리 2세가 주교들을 사절단으로 보내어 필리프 2세의 분노를 가라앉히려 했으나, 그는 분개하며 요지부동이었다. 필리프가 뚜헨느 부근까지 침공하자, 7월 10일에 헨리 2세가 군사를 이끌고 잉글랜드에서 노르망디로 상륙, 존이 합류했다. 상황을 알게 된 리처드가 필리프와 싸우겠다며 당장 대규모 군사를 이끌고 베리로 달려갔다. 하지만 그는 병력을 남겨두고 이미 파리로 철수한 후였다.
참고로, 그 해 리무쟁의 트루바두르가 하단의 노래를 작곡했다.

리처드 백작은 토끼로 사자를 사냥한다네. 그래서 평원과 숲 속에 남아 있는 사자가 없다오. 그래서 그는 솔개로 거대한 독수리를 잡고, 참매를 풀어 놓고 해리어 사냥개를 달리게 한다네.

필리프 왕은 매로 참새와 조그만 새를 사냥한다네. 그의 신하들은 그가 조금씩 언덕을 내려가고 있다는 진실을 감히 말하지 못한다오. 올해 리처드 백작은 앙굴렘을 차지하고, 그곳과 필리프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낚아챈 툴루즈에서 강해지고 있다네.

하지만 필리프가 분노하지 않으니, 필리프가 그의 누이, 그리고 그녀를 저버리는 지나치게 자만하는, 그녀의 약혼자를 떠올리도록 해보세. 리처드가 그녀를 취하는 것을 신경쓰지 않기 때문이오. ㅡ내 눈에 이 죄는 혐오스럽구려!ㅡ '''그는 계속해서 위증하는 중이라네. 나바라 왕이 딸에게 그를 남편으로 주었기 때문'''이오.[30]

아스브리지 말을 빌리자면, 헨리 2세는 한 발 물러서서 먼저 전쟁이 아니라 외교적 수단을 택했다. 루앙 대주교 월터와 윌리엄 마셜을 사절단으로 보내 필리프 2세에게 베리 배상을 요구했으나, 그는 '''베리를 차지하고 노르망 벡쌍 전역를 탈환하겠다''' 선언했다. 블루아 백작 티보 5세,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1세가 필리프 2세에게 합류했다.
1188년 8월 31일, 리처드가 부친에게 가세하기로 확약했다. 9월, 그들은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이것은 대대적인 전쟁이었다. ... 땅이 초토화되고, 수치스럽게 황폐해졌다. ... 그들은 파괴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치닫고, 망트까지 시골 지역을 불태웠다. 나이 많은 왕은 남쪽으로 더 멀리 내려가 모든 것을 불태우고, 가는 곳마다 귀중하고 좋은 전리품을 차지하고, 어떤 행동도 자제하지 않았다.

... 플랑드르 백작이 이렇게 충고했다. "그대들의 적을 멸하고 땅을 철저히 파괴하라. 모든 것을 불태워 그들에게 아무것도 남기지 마라. 아침 식사를 하는 곳인 나무와 초원도 마찬가지다."

《윌리엄 마셜의 역사》

1188년 10월 6일, 두 왕은 샤티용에서 회담을 열었으나 최종적으로 결렬되었다.

그곳에서 동의되어야 할 평화 조약은 다음과 같았다. 프랑스 왕은 잉글랜드 왕으로부터 점거한 영토를 무엇이든 반환하고, 리처드 백작은 툴루즈 백작으로부터 무력으로 점거한 영토를 무엇이든 반환해야 했다. 그 자신의 표리부동함으로 자극받은 프랑스 왕이, 잉글랜드 왕에게 빠씨의 요새를 약속의 증표로 줄 것을 요구했다. 잉글랜드 왕이 이를 거절했기 때문에 그들이 불쾌해진 채 갈라졌다. 그리고 프랑스 왕이 그 장소를 떠나며 빨뤼의 요새를 차지했다.

그러더니, 프랑스 왕이 고용한 브라반트 용병대에게 부르쥬까지 행군하면 그곳에서 넉넉한 보수를 지급할 것을 약속했다. 하지만 부르쥬에 도착했을 때, 그는 그들로부터 말, 무기, 그리고 모든 돈을 빼앗고 옷까지 벗겨서 알몸으로 내쫒았다.

그런데 '''리처드 백작이 프랑스 왕에게 제의했다.'''[31]

"부디 나의 궁정으로 와 주시오. 툴루즈 백작과의 문제에 대해 그대의 판결을 달게 받겠소."

《호버든의 연대기》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는 리처드의 제의가 헨리 2세를 노발대발하게 했다고 기술했다.
필리프 2세는 이 틈을 타서 온갖 감언이설로 리처드를 구워삶고 부자 사이를 이간질했다. 그리고 헨리 2세가 삼남 리처드를 제치고 막내 존을 계승자로 지명할 것이란 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했다.
1188년 11월 18일, 봉물랭에서 필리프 2세는 리처드를 대동하여 헨리 2세와 회담을 열고 리처드와 아델의 결혼, 리처드를 헨리 2세의 계승자로 지명할 것을 요구했다.[32] 헨리 2세가 뜸을 들이자 그 자리에서 '''리처드는 무릎을 꿇고 대륙의 모든 플랜태저넷령에 대하여 필리프에게 충성 서약을 했다.'''
전세가 기울어지자 헨리 2세의 봉신들은 그에게 등을 돌리고 필리프와 리처드에게 붙었다. 필리프는 리처드를 대동하고 돌아다니며 둘의 동맹을 두려워하는 영주들의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1188년 12월, 두 왕은 다음해 4월 16일까지 휴전에 합의했다. 이 기간 헨리 2세는 사절단을 보내서 리처드와의 화해를 계속해서 시도하고 교황의 대사와 주교들이 온갖 외교 수단을 동원하여 그들의 분쟁을 해결하려 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189년 6월, 필리프 2세와 리처드는 전쟁을 일으키고 르망에서 쉬농까지 헨리 2세를 몰아냈다. 7월 5일, 셋은 콜롱비에르에서 회담을 열었다. 필리프는 3차 십자군 원정을 마친 즉시 리처드와 아델의 결혼[33], 가장 굴욕적인 조건들을 헨리 2세에게 강요하고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그리고 앙주와 벡쌍의 일부를 차지하고 마지막으로 헨리 2세의 요청으로 앙주 제국의 배반자 명단을 보냈다. '''맨 위에는 헨리 2세가 가장 아끼는 아들 존이 있었다.'''
이는 헨리 2세가 급사하는 원인이 되었고 1189년 7월 6일, 그는 적자들을 저주하며 "패배한 왕, 수치, 수치로다"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4. 리처드 1세와의 대립



4.1. 3차 십자군 결성


1189년 7월 22일, 필리프 2세와 리처드는 쇼몽 부근에서 회담을 열었다.

프랑스 왕이 노르망디 공작 리처드에게 '''지조흐와 다른 많은 영토들을 줄 것을 요구'''했다. 보는 사람들이 진저리가 날 정도였다. 하지만 공작은 그렇게 한다면 영원한 불명예와 손실임을 알았다. 대신 그의 부왕이 지불해야 할 거액의 배상금에 사천 마르크를 얹어주었다.

《호버든의 연대기》

9월 3일, 리처드가 잉글랜드 왕 리처드 1세로 즉위했다. 그는 헨리 2세를 배반하여 자신의 편을 든 이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11월, 필리프는 리처드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

'그대의 우정은 우리가 성지를 돕고자 하는 소망으로 불타고 있으며 하느님을 섬기는 가장 열렬한 맹세를 한 것을 알게 될 것이오.'

리처드 1세가 12월 12일에 노르망디로 건너오고, 두 왕이 12월 30일, 이듬해 1월 13일 두 차례 우정의 맹세를 하고, 4월 1일 베즐레에서 3차 십자군을 위해 회동하기로 했다.

그 때 리처드 왕이 프랑스 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젊은 남자이자 새로 왕위에 오른 왕임을 그대에게 반드시 말해야 하오. 그대도 알다시피 나는 그대와 함께 같은 길로 타지에 가기로 약속했소. 만약 이 일이 그대의 기쁨이라면 내가 귀환할 때까지 결혼을 미룰 것을 간절히 청하오. 나는 귀환한 후 사십 일 내에 그대의 누이와 결혼하겠다는 맹세에 묶여 있을 것이오."

... 프랑스 왕은 그 간청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여 결혼 연기를 허가했다.

《십자군 역사에 관한 수록본》

이 시기 프랑스 연대기 작가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그가 잉글랜드 왕위에 오른 후에도 필리프 왕을 향한 사랑이 확고부동하였다. 그리고 그를 주군으로 깊이 존중하였다.

《프랑스의 역사에 관한 수록본》

힐턴의 표현을 빌리자면, 리처드 1세는 양다리 게임을 이어갔다.
1190년 2월, 리처드 1세는 나바라 왕국 국경 근처까지 영지를 순회했다. 길링엄의 추측에 의하면, 이 시기 리처드는 나바라 왕 산초 6세의 딸 베렝겔라와의 결혼을 준비, 지참금은 가스코뉴, 나바라 왕국, 카스티야 왕국과의 외교로 합의하고[34] 베렝겔라가 3차 십자군 원정에 동행하도록 산초 6세를 설득했다. 리처드가 출정을 한 다음 엘레오노르 드 아키텐이 나바라를 방문해 그가 있는 곳으로 베렝겔라를 데려 오기로 하고 '''이 모든 일은 필리프 2세가 알지 못하도록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E.A.R 브라운은 엘레오노르가 헨리 2세와 불륜을 저지른 아델을 싫어하여 베렝겔라를 밀어붙이고 모후를 극진히 사랑한 리처드가 이 결혼을 수긍했다고 본 반면,[35][36] 길링엄과 힐턴은 상술된 행적을 바탕으로 결혼을 주도한 건 리처드로 추측했다.
1190년 3월 15일, 필리프 2세의 왕비 이사벨 드 에노가 쌍둥이를 출산하여 20세의 나이로 난산으로 죽었다. 3월 16일, 리처드가 노넝꾸흐에서 드회까지 8마일이 넘는 거리를 이동하여 필리프를 만나고, 디스의 랄프는 이 만남의 목적을 기술하지 않았다.[37] 두 왕에게 비보가 전해지자마자 필리프는 리처드와 헤어져 파리로 달려갔으나, 이사벨의 장례식은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파리 주교의 주재 하에 이미 끝난 후였다. 필리프는 이사벨과 그의 조상들의 영혼을 위해 노트르담 대성당에 성직자 둘을 두었다. 쌍둥이 아들들인 호베흐와 필리프도 곧 죽자 필리프 2세는 그들을 제프리 2세 옆에 묻었다. 그 후, 제프리 2세의 친우였던 샹파뉴의 트루베르에게 연금을 지불했다.[38]
리처드 1세는 군자금을 마련하며 "구매자만 찾을 수 있다면 런던도 팔아 치울 것이다."라고 농담했다. 잉글랜드 연대기의 표현을 따른 바, 그는 돈이 짐이 되는 이들의 짐을 아주 강제로 벗겨주었다.
필리프 2세는 원정을 위한 세금을 여전히 한 푼도 걷지 않았다. 역사가들의 표현을 따른 바, 그는 다른 계산을 하고 있었다.
리처드 1세는 휴 드 퓌제, 기욤 드 롱샴을 잉글랜드 섭정으로 명하고 엘레오노르 드 아키텐을 임시로 푸아티에 백작과 아키텐 공작에 서임했다. 이 잉글랜드 섭정에 전혀 참여하지 못하도록 했으며, 존과 이복 형 요크 주교 제프리에게 자신의 허가 없이 3년간 잉글랜드 땅을 밟을 수 없다는 맹세를 요구했다. 또한, 수도를 런던과 푸아티에가 아니라 루앙으로 지명하고, 이는 리처드가 잉글랜드가 아니라 '''노르망디를 권력의 중심으로 간주'''하는 의도를 보여주었다.[39]

우리는 모든 어떤 경우에서도 서로의 삶과 명예를 보호할 것이나이다. 어느 이도 위험의 시간에 상대방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나이다. 프랑스 왕 필리프는 소유한 도시 파리를 보호하는 중에도 잉글랜드 왕 리처드의 권리를 소중히 하고 보호할 것이나이다. 잉글랜드 왕 리처드는 소유한 도시 루앙을 보호하는 중에도 프랑스 왕 필리프에게 동일한 일을 할 것이나이다.

필리프 2세는 파리 방어를 목적으로 한 대규모의 성벽 축조를 명하고 모후 아델 드 샹파뉴와 외숙부이자 오른팔인 랭스 대주교 기욤 드 샹파뉴를 섭정으로 임명했다. 부재 중에 왕국을 다스릴 대법령을 공포하여 이것으로 섭정의 권력을 제한하기 위해 신뢰할 수 있는 사람으로 구성된 감시단을 세웠으며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법령에 추가했다. 법령의 각 행은 필리프가 '''먼 거리에서도 프랑스를 관리하겠다'''는 의도를 보여주었다.
6월 24일, 필리프는 생 드니 대성당에서 성직자들의 축복을 받았다. 필리프는 그들에게 2척의 비단과 순금 십자가로 장식된 커다란 깃발 2개를 선물했다.
같은 날, 리처드는 뚜르에 방문하여 순례자의 자루와 지팡이를 받았다. 리처드가 지팡이를 받아 땅을 짚는 순간 지팡이가 부러지는 일이 발생했다.
1190년 7월 2일, 두 왕은 베즐레에서 회동했다. 프랑스 깃발은 황금색 백합들이 그려진 파란색이고, 잉글랜드 깃발은 2마리 금색 사자가 마주보고 서 있는 붉은색이었다.[40] 그들은 서로를 보호할 것을 맹세하고, 프랑스 병력은 2천이고 잉글랜드 병력은 8천이었으나 '''십자군 원정으로 얻은 수익은 50대 50으로 나누기로 조약을 맺었다.'''
7월 4일, 두 왕이 출정했다. 이들을 구경하려고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어서 강의 다리들이 무너졌다.[41]

장미가 향기로 가득하고 바야흐로 때가 왔다네. 두 왕은 어마어마한 위용을 자랑하는 군대의 앞머리에 나란히 섰다네. 두 왕은 서로를 너무나 깊이 존중하여 군대는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조화 속에서 앞으로 달려 나갔다네. 온 천지가 진동했다네! 이 젊은이들이 어디서 왔던가. 그들의 분홍빛 뺨을 보아라!

《앙브루아즈의 노래》

두 왕은 육로 대신에 해로를 선택하여 필리프는 제노바로 향하고 리처드는 마르세이유로 가기로 했다. 그들은 리옹까지 동행하고 갈라지기 직전 리처드의 요구로, 50대 이상인 세탁부를 제외한 모든 여자의 3차 십자군 참여 금지를 약속했다.

프랑스 왕과 그의 군사들이 제노바로 출발했을 때, 잉글랜드 왕이 프랑스 왕과 (리옹까지)단거리를 동행했다. 그를 향한 우정과 존중 때문이었다. 두 왕이 베즐레에서 서약했던 대로, 시칠리아의 메시나에 먼저 도착한 이가 상대방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리처드 왕의 편력기》

필리프는 해군이 없어서 함대를 따로 구해야 했기 때문에 그 이탈리아 상인들을 상대로 수완을 발휘하여 함대와 식량을 확보했다. 하지만 건강이 악화되어 곧바로 출발하지 못했다.[42] 리처드는 잉글랜드 해군의 도착이 늦어지자 직접 함대와 식량을 확보하고 제노바로 가서 필리프를 방문해 앓고 있던 그를 위로했다. 필리프는 리처드에게 갤리선 5척을 요구하고 리처드가 3척을 제안하는 것으로 대신하자 화를 내고 리처드가 주겠다는 모든 것을 거절하고 먼저 출발했다.[43]
이 사건은 역사상 가장 유명한 불화의 시작이었다.

4.2. 메시나에서


배경은 시칠리아 새 왕 탕크레드가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6세와 시칠리아 왕위를 놓고 싸움이 붙었던 때였다. 시칠리아 전 왕 굴리엘모 2세의 왕비는 리처드 1세의 여동생 조안이었고 탕크레드는 조안을 유폐하고 상속분을 돌려주지 않고 있었다.
1190년 9월 16일, 필리프 2세가 시칠리아의 메시나에 당도했다.

프랑스 왕이 메시나에 도착하자, 모든 시칠리아인들이 기뻐하며 프랑스 왕과 그의 군대를 반겼다. 탕크레드 왕의 궁정에서 프랑스 왕이 명예로운 환영을 받았다. 탕크레드 왕은 그에게 음식을 비롯해 심지어 엄청난 돈을 주기까지 했다. 그리고 프랑스 왕세자 루이와 자신의 딸 중 하나를 결혼시킬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필리프 왕은 하인리히 황제와의 우정을 생각하여, 이를 거절했다.[44]

《프랑스의 역사에 관한 수록본》

9월 23일, 리처드 1세가 메시나에 당도했다.

다가오는 군대가 위용이 대단하고, 갑옷의 찬란함이 위대하고,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온 도시가 와들와들 떨며 대경 실색하였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구름처럼 몰려든 군중들이 잉글랜드 왕의 위세를 보고 들었고, 잉글랜드 왕의 힘은 프랑스 왕의 힘을 능가했다. 프랑스 왕이 메시나 성벽 안에 군사들을 주둔시키고 도심의 궁정에서 머물었기 때문에, 잉글랜드 왕은 도시 밖에 막사를 세웠다. 프랑스 왕은 자신의 형제인 잉글랜드 왕을 맞이하고, 포옹과 입맞춤은 그들이 얼마나 기뻐하는지를 충분히 표현할 수 없었다.

《스티븐, 헨리 2세 그리고 리처드 1세의 연대기 3권》

리처드 왕이 시칠리아 섬 근처에 있을 때, 굴리에모 왕의 부인이었던 그의 누이 조안을 찾아가 프랑스 왕이 그곳에 도착했는지 묻기로 결정했다. 육지로 가까워진 즉각, 그가 프랑스 왕이 나타났는지부터 찾았다. 그곳은 시칠리아 왕국의 중심지이자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사치스러운 궁전들 중 하나가 있는 곳이었다. ... 프랑스 왕은 바로 그 궁전에서 머물고 있었고, 시칠리아 왕이 그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그 궁전을 비우게 한 덕분이었다. 리처드 왕은 프랑스 왕이 팔레르모에서 숙박하고 있다는 소식을 알았을 때, 기뻐하여 그곳으로 상륙할 것을 명령했다. 그 덕분에 리처드 왕은 프랑스 왕과 함께 겨울을 날 수 있었다. 그들이 곧 기사, 말, 그리고 필수품을 끌어올렸다. 프랑스 왕은 리처드 왕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여 그를 만나러 왔다. 두 왕 모두가 서로 만나게 되어 기쁨으로 넘쳤다. 일찍이 그들이 충실한 친우가 되어 서로 좋은 신의를 지킬 것을 함께 맹세했던 것처럼, 두 왕 사이에 엄청난 사랑이 있었다.

《십자군 역사에 관한 수록본》

프랑스 왕과 그의 신하들, 그리고 메시나의 모든 주요 인사들이 해안가에 서서, 잉글랜드 왕과 그의 위상을 보고 듣고 감탄했다. 리처드 왕이 하선하자마자 프랑스 왕과 대면했다. 회담이 끝나자 '''프랑스 왕은 당장 예루살렘 땅으로 출항'''했다. 하지만 그가 항구를 떠나자 갑자기 바다가 악천후로 바뀌었다. 그는 크게 실망하고 마지못해 메시나로 돌아왔다.

《호버든의 연대기》

최근들어 역사가들은 상단의 호버든의 기록과 당대 사가 디스의 랄프의 "이 회담 후, 프랑스 왕이 승선하고 악천후 때문에 돌아왔다." 기록을 근거로 들어, 필리프 2세의 진짜 속내는 '''리처드가 달갑잖았다''' 추측한다. 과거에는 이 기록들을 주목하지 않고 상단의 첫 번째, 두 번째 기록과 하단의 호버든의 기록을 다루어, 메시나 정박 초에는 두 왕의 사이가 원만했다 고수했다.
리처드 1세는 메시나 교회의 수도자들을 쫓아내 병사들을 주둔시키고, 탕크레드에게는 사절단을 보내 여동생 조안의 상속분을 요구했다.
9월 24일, 리처드가 필리프의 숙소를 방문하고 25일에 필리프가 그의 숙소를 방문했다. 그들의 만남에 대해 호버든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두 왕의 사랑의 애착이 너무나 강하여 그것이 깨질 수 없고 서로를 결코 배반할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C. 재거는 두 왕의 정치적 동맹에 대한 지속적인 신의를 경외하는 어조라고 해석했다. 어떤 연대기에서도 이 만남의 목적에 대한 기술이 없으나 몇몇 역사가들은 원정 진행과 관련하여 표면적으로 상호 합의가 있었을 것이라 추측했다.
동시대 윈체스터 수도자는 목격자는 아니었으나 이 시기의 일을 전해 듣고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군인들이 서로 박수를 치고 대화를 나누며 기운을 회복했다. 수천 명의 남자들이 단 하나의 마음과 단 하나의 영혼을 소유한 것처럼 보였고 그들은 엄청난 기쁨으로 축일을 보냈다. 그리고 왕들은 기운이 빠졌으나 물리지 못한 채 헤어지고 각자 거처로 돌아갔다.

《스티븐, 헨리 2세, 리처드 1세의 연대기 3권》

윈체스터 수도자는 고대 로마의 시를 인용하여 두 왕의 상태를 서술했는데, 문제는 '기운이 빠졌으나 물리지 못한 채'라는 구절이 그 시에서 연인의 성관계 후를 묘사할 때 쓰였다는 것이다. 학자들은 윈체스터 수도자가 정말로 두 왕이 성적 관계임을 암시하려는 목적으로 인용했는지에 대해 의혹을 제기했다. 리처드 1세가 이성애자임을 고수하는 길링엄은 이를 다루지 않았고, 두 왕이 정치적 관계일 뿐이라고 보는 플로리는 이 기록만큼은 반신반의하는 첨언을 했다. J. 로버트는 두 왕이 성적 관계란 의미 하에 흥미로운 점은 두 왕을 묘사하는 방식이라고 지적했다.[45]
이 무렵, 엘레오노르 드 아키텐이 베렝겔라를 데려오기 위해 나바라 수도 팜플로나에 당도했다. 알럼의 말을 빌리자면, 이 모든 일은 필리프 2세가 알지 못하도록 철저히 비밀에 부치기로 했으나 나바라 왕 산초 6세는 대대적인 연회를 열어 서유럽 최고의 부자 신랑 리처드 1세를 사위로 두게 된 기쁨을 보였다.
1190년 9월 28일, 리처드 1세가 유폐에서 풀려나 메시나로 온 여동생 조안과 만났다.

리처드 왕이 그의 누이인 시칠리아 왕비 조안을 만나러 가고, 그녀는 형제의 도착으로 매우 기뻐했다. ... 그곳에 도착한 순간부터 정직하지 않고 탐욕스러운 리처드 왕이 그의 누이에게 과부산을 팔아 치우고 순례길을 동행하자 청하는 것을 결코 멈추지 않았다. 그는 잉글랜드로 귀국한 즉시 그녀로부터 받은 모든 것을 상환할 것이며 충분히 영향력 있고 부유한 남편과 재혼시키겠다고 약속했다.

《십자군 역사에 관한 수록본》

29일, 리처드 1세가 필리프 2세를 동행하여 조안과 만났다.

그녀가 구호소로 오자 '''두 왕의 사이가 급격히 좋아지고''' 프랑스 왕이 이 만남을 행복해 하며 얼굴이 기쁨으로 달아올랐다. 프랑스 왕의 신하들이 '''그가 조안과 결혼할 것인지 궁금해 했다.'''

《호버든의 연대기》

메시나에 둘이 결혼할 것이란 소문이 퍼졌으나 리처드는 30일, 조안을 멀리 떨어진 라 바냐라 수도원으로 보냈다.[46]
한편 대규모의 외국 군대의 존재는 메시나인들의 불안과 반발심을 일으켰다.

잉글랜드 왕은 막사 밖에 교수대를 세우고 그곳에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도둑과 강도를 처형했다.[47]

외국인과 그리스인들은 이것이 법과 형벌과 같다고 생각했다. 프랑스 왕은 그의 군사들이 범죄를 저지르든 혹은 범죄를 당하든, 전혀 신경쓰지 않고 평화를 유지했다.[48] 그런 까닭에 그리스인들이 "잉글랜드 왕은 '''사자'''요, 프랑스 왕은 '''어린 양'''이다."라고 불렀다.

... 그 땅의 위대한 모든 남자보다 더 강한 리처드 왕이 당도한 후, 그리스인들은 알프스 산맥 남쪽 사람들을 더욱 증오했다. 그들은 프랑스 왕과만 평화를 유지하고 잉글랜드 왕과 그의 군사들은 꼬리달린 놈이라고 불렀다.

《스티븐, 헨리 2세, 리처드 1세의 연대기 3권》

탕크레드도 조안에게 상속분을 돌려주지 않은 상황, 대규모의 외국 군대와 메시나인들의 갈등이 고조화되고 이 때문에 10월 4일, 필리프 2세와 리처드 1세가 탕크레드의 사절단, 그리고 메시나의 귀족들과 회담을 열었다. 그 때 메시나인들이 리처드의 동료들 거처를 공격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두 왕이 평화와 안보를 다루기 위해 시칠리아의 법관, 그리고 주요 시민들과 회담을 열었다. 보아라. 그리스인들이 이미 리처드 왕의 부하들을 살해하고 있다는 외침이 터졌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이 이는 사실이 아니라 단언했기 때문에, 왕은 이를 신경쓰지 않았다.

두 번째 전령이 와서 그리스인들이 순례자들을 공격하고 있다 알렸다. 같은 상황에 처한 그리스인들이 그 또한 사실이 아니라고 리처드 왕을 설득하며, 거짓으로 왕을 속여 넘길 것을 생각했다.

세 번째 전령이 황급히 난입하여 그러한 평화는 칼이 그들의 목을 내리칠 때를 찬성하지 않을 것이라 외쳤다. 그 때, 리처드 왕이 다툼을 중단하고 평화를 만들기 위해 회담장을 떠나 지체없이 말에 올라탔다. 조흐덩 뤼빵과 마르가리트라는 몹시 간사하고 기만적인 그리스인 두 명이 그곳에서 도시 군중을 선동하여 순례자들을 향한 악감정을 일으킨 후였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을 거짓말로 숨기고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고 우겼다. 잉글랜드 왕이 그곳에 도착했을 때, 싸우는 이들은 이미 말다툼을 넘어서 주먹과 몽둥이로 싸우고 있었다. 분노로 격양된 그리스인들이, 싸우는 이들을 떼어놓으려는 왕의 노력에 복종하기는 커녕 그에게 오만불손하고 신성 모독적인 욕짓거리를 퍼부었다. 이로 인해 분노한 '''리처드 왕은 군사를 일으키고 공성전을 시작했다.'''

한편 프랑스인들은 그들의 주군 프랑스 왕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확실히 알지 못해 그를 찾아 바삐 뛰어다녔다. 이 때 그는 재빨리 자신이 머무는 '''궁전으로 피신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리처드 왕의 편력기》

잉글랜드 왕은 이 난동에 흥분하여 가장 맹렬한 사자처럼 분노하고, 고결한 영혼에 걸맞는 방식으로 화를 터뜨렸다. 그의 분노는 가장 가까운 친우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의 유명한 군 지휘관들이 각자 계급에 따라 왕좌에 둘러 앉았다. 만약 누군가 감히 용기를 내어 눈을 들고 왕의 얼굴을 볼 수 있다면, 이 지배자의 안색에서 말없이 숙고하는 바를 읽는 것이 쉬울 것이다. 길고 깊은 침묵이 흐르고 왕이 연설을 했다.

... 잉글랜드 왕의 용맹한 전군이 그에게 충성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들은 산과 놋쇠로 만들어진 벽을 뚫을 준비가 되었다. 왕의 눈썹을 움직이게 하라. 그가 지휘하면 시칠리아 전역이 그의 것이 되리라. 그가 원하면 헤라클레스의 기둥이 피로 물들이리라. 수많은 군사들의 함성이 멈추고 왕의 진지함으로 인해 만귀잠잠해졌다. 그리고 그가 말했다.

"내가 들은 것은 나를 기쁘게 한다. 수모를 씻고자 하는 그대들의 준비태세는 나의 기운을 북돋는다. 지연은 준비된 이들에게 항상 해롭다. 더 이상의 지체는 없다. 먼저 메시나를 정복한다. 계집애 같은 그리스인들은 몸값을 지불하거나 팔릴 것이다. 마음껏 약탈하라. '''완전한 평화는 오직 나의 주군 프랑스 왕이 머무는 도시만이 누릴 수 있다.'''"

... 갑자기 프랑스 왕이 재빨리 자신의 모든 신하들을 거느리고 '''거처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그가 자신의 허리에 찬 칼을 발견하자, 이에 대해 짤막하게 말했다.

"나는 모두의 증인이 되겠네. 그대가 저 괘씸한 그리스인들을 응징하고자 한다면 결과가 어떻든 그대는 결백하오."

그리고 그가 떠났다. 그의 신하들이 뒤를 따라 도시로 들어갔다. 잉글랜드 왕은 군사들을 이끌고 나아갔다.

《스티븐, 헨리 2세, 리처드 1세의 연대기 3권》

리처드 왕은 프랑스 왕과 함께 있었다. 리처드 왕이 말에 올라타 이 난동을 끝내기 위해 그곳으로 갔다. 그러나 그가 가는 중, 도시 군중들이 그의 뒤를 따라 욕을 퍼붓고 매도하자 왕은 서둘러 무장하여 바다와 육지 사방에서 그들을 공격했다. 이 세상 어디에도 그런 전사는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도다.

소동이 어마어마하고, 소음과 혼란이 하늘을 놀라게 하고 땅을 뒤흔들었다. 프랑스인들이 리처드 왕의 숙소로 와서 프랑스 왕을 찾았고, 그는 그들과 숙박하고 있는 왕궁으로 돌아갔다. 그 때, 프랑스 왕은 도시에 남아줄 것을 간청하는 '''그리스인들로부터 선물과 약속을 받아냈다.''' ... 그리스인들이 프랑스 왕을 믿었기 때문에 프랑스인들은 여유롭게 휴식을 취하며 도시에 있었으나, 우리 군대는 이를 신경쓰지 않았다.

도시 성문이 닫히고 그리스인들이 무장하여 방어하기 위해 도시의 성벽 위로 올라갔으나, 그들은 내려와야했다. 그리고 위그 르 브항의 거처로 의기양양하게 몰려가 습격한 이들이 리처드 왕이 그곳에 도착했을 때 모두 싸우고 있었다. 나는 그가 처음부터 부하 스무 명을 이끌었다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스인들이 리처드 왕을 보자마자 위협을 중단하더니 몸을 돌려 도주하고, 왕이 그들을 추격했다. 양 떼가 늑대를 피해 도망치는 것처럼 보였도다. 왕은 그들을 앞으로 내몰고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을 칼로 베어 살해했다.'''

《앙브루아즈의 노래》

회담에서 평화 조약 내용이 오가고 결론이 나려할 때, 메시나 도시 군중들이 의심스럽게 벌 떼같이 모여서 산을 올라 잉글랜드 왕을 기습할 준비를 하고, 다른 무리는 위그 르 브항의 거처를 공격했다. 가라앉지 않은 함성이 잉글랜드 왕의 귀에 다다르자 그는 프랑스 왕과 다른 저명한 귀족들과 함께 당장 회담장을 떠나고 전군 무장을 명령했다.

'''잉글랜드 왕이 몇몇 부하들을 이끌고 아무도 그가 해내리라 생각치 못했던 가파른 고지 정상에 악착같이 도달했다. 그러자 도시 군중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도주하여 도시로 다시 들어가고, 왕이 칼끝을 겨누고 그들을 추격했다.''' 이 때 잉글랜드 왕의 기사들과 군사들은 도시 성문과 성벽에서 용감하게 도시 군중들을 공격했다. 도시 성문으로 진입하려던 순간, 다른 구역에서 군사들이 내몰리고 투석기에서 날아오는 돌을 맞았다. 여기서 잉글랜드 왕의 기사 다섯 명과 병사 스무 명이 포로로 잡혔다.

반면 프랑스 왕은 순례의 맹세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어떤 도움도 주지 않고 구경만 했다.''' 프랑스 왕에 관해 말하자면, 그와 그의 군사들은 도시로 들어가서 완벽하게 안전한 곳에 있었다. 그러나 잉글랜드 왕의 군사들은 엄청난 노력으로 힘을 발휘하여 도시 성문을 부수고, 사방으로 벽을 오르고, 도시로 진입하여 '''마침내 메시나를 정복했다.''' 그리고 즉각 잉글랜드 왕의 깃발을 성벽에 꽂았다.

《호버든의 연대기》

잉글랜드 왕은 병력 손실이 거의 없이 도시에 승자로 입성했다. 승리의 영광의 기쁨이 그의 복수심을 절제하고 분노를 누그러뜨렸다. 평온한 상태에 든 왕은 성급한 언동을 자제하고 위협을 중단했다. 그 후 '''프랑스 왕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잉글랜드 왕은 프랑스 왕과 그의 군사들 앞에서 기꺼이 물러나고 도시 밖으로 행군했다.

《스티븐, 헨리 2세, 리처드 1세의 연대기 2권》

필리프 2세는 메시나 성벽에 올려진 잉글랜드 깃발을 발견하자 '''그걸 빼고 프랑스 깃발로 바꾸라고 요구'''했다.[49] 프랑스 왕이 메시나인들에게 평화를 보장할 것이란 믿음을 모독했다는 것이 공식적인 이유였다.
리처드 1세의 대응과 그 이유에 대한 호버든, 앙브루아즈, 편력기 저자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잉글랜드 왕은 '''이를 허락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깃발을 내리고 시칠리아 왕 탕크레드에게 요구한 모든 것이 준수될 때까지 '''다른 기사단의 깃발을 올렸다.'''

《호버든의 연대기》

경들이여. 성벽에 깃발을 올리기에 어떤 깃발이 더 타당하다고 판단하는지 묻나이다! ... 리처드 왕은 이 문제로 '''프랑스 왕과 다투고 싶지 않았다'''네. 그렇지만 증오와 바보같음으로 가득한 말을 했다네. 하지만 어떤 이는 그 모든 바보같음을 기록해서는 아니 되거나, 책에 담아서는 아니 된다네. 그러하다만 ... 요새와 그 꼭대기에 '''두 왕의 깃발이 꽂혔다'''네.

《앙브루아즈의 노래》

많은 중재자들을 통해 마침내 리처드 왕의 분노가 가라앉고 말다툼이 멈추었다. 적의 공격 앞에서는 천하무적으로 보였던 그가 '''친우에게는 맥을 못 추어''' 결국 어렵사리 그 요구를 승낙했다. ... 탕크레드 왕의 대응을 알게 될 때까지 '''두 왕의 깃발이 성벽에 꽂혔다.'''

《리처드 왕의 편력기》

필리프 2세의 요구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리처드 왕이 메시나 도시를 함락했을 때 차지한 전리품에 대해 프랑스 왕이 이러니저러니 말하기 시작하고, 베즐레 서약을 들먹이며 '''자신의 몫을 내놓으라고 했다.''' 리처드 왕이 이것에 동의하지 않으려 하자, 프랑스 왕이 잘난 체하며 그에게 욕을 퍼부었다. 프랑스 왕은 계속해서 자신은 다 알고 있다는 듯한 빗댐과 거만한 비웃음으로 리처드 왕을 극도로 분노케 하려 했다. 심지어 리처드 왕이 우정을 저버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슬픔보다 분노로 더 휩싸인 리처드 왕은 이 기만적인 남자와 절교하기로 결심하여 자신의 모든 함대를 소환하고 짐을 옮기도록 지시했다. 자신의 힘으로만 순례를 하는 것이 합리적이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옛말에 이런 말이 있다. "나쁜 친우와 함께 있느니 차라리 혼자 있는 편이 더 낫다."

프랑스 왕이 리처드 왕의 결정을 전해들은 즉시, 중재자들을 통해 리처드 왕과 가까스로 '''화해했다.''' 두 왕은 앞으로 차지할 모든 것을 반으로 나누기로 했다.

리처드 1세는 메시나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오는 곳에 요새를 짓고 "그리스인 킬러"라고 이름을 붙였다.[50] 앙브루아즈는 세 왕의 평화 협정이 체결되기 전 이미 요새를 완공했다 기술하고, 호버든은 평화 협정 지연 중 완공했다 기술했다.

그리스인들이 리처드 왕의 군대에게 가능한 한 모든 종류의 식량 판매를 금지했으므로, 함대가 가져온 식량에 의존할 수 없었다면 군대가 곤경에 처했을 터였다. 그리스인들이 리처드 왕의 군대를 몹시 증오하고, 전력을 다해 해치려 들었다. 밤에 수비대들이 그 도시를 경계하고, 반대편에서 순례자들이 그들의 공격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하며 경계했다.

한편, 리처드 왕과 프랑스 왕이 '''또 서로 다투었다.''' 이것은 좋지도 명예롭지도 않았다. 영향력 있는 귀족들이 두 왕 사이에 합의와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들은 왕궁과 요새(그리스인 킬러)를 계속해서 오갔으나 끝이 없었고 결국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

《앙브루아즈의 노래》

두 왕이 상대에게 비난을 퍼붓고 상대가 약속을 위반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서로에게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프랑스 왕은 하등한 존재의 판단에 동조한다면 권위를 손상시키는 것으로 여겼다.

《리처드 왕의 편력기》

잉글랜드 왕은 프랑스 왕은 오만하며 그 자신은 걸핏하면 화를 잘 내는 것을 알았다.

《십자군 역사에 관한 수록본》

메시나 귀족들이 필리프 2세가 평화 협정의 당사자가 되어 줄 것을 청하고 1190년 10월 6일, 필리프 2세, 리처드 1세, 탕크레드가 평화 협정을 발표했다. 주요 내용은 두 왕이 탕크레드를 시칠리아 왕으로 인정, '''제프리 2세의 아들 아르튀르를 리처드의 후계자'''로 정하고 탕크레드의 딸과 약혼시키는 것이었다.[51] 탕크레드가 메시나를 돌려받는 조건으로 리처드에게 조안의 상속분 금 2만 온스와 딸의 지참금 금 2만 온스를 지불했다.
필리프는 리처드에게 베즐레 서약을 근거로 '''탕크레드로부터 받은 돈의 반을 요구'''했다. 리처드는 조안의 몫도 챙겨줘야 한다며 그에게 '''3분의 1을 주었다.''' 프랑스 연대기 작가는 왕이 평화를 위해 이에 만족했다고 기술한 반면,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는 만족하지 않았다고 기술했다.
참고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수많은 무슬림이 탕크레드 왕에게 복종하는 것을 거부하고 가족들과 산으로 망명했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을 공격했다. 그러나 탕크레드 왕이 잉글랜드 왕과 조약을 체결했단 소식을 들었을 때, 당장 돌아왔다.

《호버든의 연대기》

10월 8일, 필리프 2세와 리처드 1세는 베즐레에서의 서약에 이어 두 번째로 서약했다.

프랑스 왕과 잉글랜드 왕이 백작과 남작들, 그리고 성직자와 군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 순례 동안 상대방과 양측 군사들에게 신의를 지킬 것을 성물에 대고 맹세했다. 또한 백작과 남작들도 같은 서약을 굳게 맹세했다. 그리고 무장한 모든 순례자의 선의와 충고에 따라 두 왕은 도중에 죽을 수 있는 순례자들이, 모두 그들의 바람대로 각자 개인 장비와 말들을 처리할 수 있다 선언했다. 그리하여 그들의 재산 반에 대해 항상 아무것도 집에 보내지 않았다.

성당의 수도자들은 성당의 유물과 모든 서적을 신중하게 처리해야 했다. 나머지 반은 루앙 대주교 월터, 성전 기사단과 구호 기사단의 단장, 부르고뉴 공작 위그, 드회 드 멜로, 호베흐 드 사블랑, 엉드헤 드 쇼비니, 그리고 질베흐 드 갸스낄에게 전해져야 했다. 이것들은 성지 탈환을 돕는 목적으로 쓰일 예정이었다.

그리고 두 왕은 이 서약을 신의있고 굳건하게 지킬 것을, 바다 양 쪽이 훤히 보이는 곳에서 개인적으로 맹세했다.

같은 날, 두 왕은 식량, 도박, 군사적 행동에 대해 규칙을 수립했다. 메시나의 인구 밀집 때문에 식량값이 치솟자, 필리프 2세는 청년왕 헨리의 아내였던 누나 마르가리트의 두 번째 남편인 헝가리 왕 벨라 3세에게 식량 지원을 요청했다.

덕망 있는 루앙 대주교 월터의 충고로, 그 영광스러운 힘이 교회의 저주를 각오하고 도시 군중들로부터 약탈했던 모든 금과 은, 그리고 모든 종류의 돈의 반환이 선포되었다. 그리하여 리처드 왕이 도시 군중들에게 '''모든 전리품을 반환'''하고, 적어도 겉으로는 평화가 만들어졌다. 그 도시 군중들이 평화롭게 대단히 기뻐하고, 순례자들이 안심하여 평온하게 대단히 기뻐했다. 그 도시가 위해를 받지 않도록 보장받았다. 그리고 평화를 교란하는 자들을 대항하여 법령이 제정되었다. 그 도시 군중들과 순례자들이 범죄와 다툼 없이 나왔다 들어갔다 했다. 모든 것이 평화로운 조화를 향해 복구되었다.

《리처드 왕의 편력기》

그러나 편력기 저자는 필리프 2세와 리처드 1세의 우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후술했다.

두 왕의 우정이 다시금 꽃피고, 정의로운 중재를 통해 선의가 회복되었다. 그러나 프랑스 왕이 리처드 왕에게 '''겉으로 애정 표현을 위장'''함에도 불구하고, 경쟁 의식이 그의 심장에 남겨져 있었다. 리처드 왕의 위대한 업적을 시기하여, 그가 얼굴은 눈부시지만 부정한 가슴 안에 간사한 여우을 숨겼다.

여전히 두 왕이 메시나에서 체류한 이유를, 학자들은 악천후 때문이라 보았다.

12월, 프랑스 왕 필리프와 잉글랜드 왕 리처드가 시칠리아의 메시나에서 머무는 동안, 메시나에서 어마어마한 천둥 소리가 울리고, 끔찍하고 수많은 섬광이 번쩍였다. 벼락이 잉글랜드 왕의 갤리선 중 하나로 떨어져 침몰시키고, 메시나 성벽을 내리쳐 거대한 부분을 완전히 파괴했다. 잉글랜드 왕의 보물이 있는 그리스인의 수도원을 호위하고 있던 기사들과 무장한 군사들이 폭풍이 분노하는 동안 수도원의 첨탑에서 불덩어리가 타오르는 게 아니라 빛을 뿜었고, 폭풍이 잦아들자 불덩어리가 사라진 것을 목격했다고 확언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조심스럽게 물었을 때, 하느님을 섬기는 그리스인들이 폭풍이 일어날 때마다 이런 현상이 항상 벌어진다고 일제히 답변했다.

《호버든의 연대기》

하단은 1190년 크리스마스의 기록이다.

나는 본 것만을 말하고 있다네. 크리스마스에 리처드 왕이 모두가 연회에 참여해야 한다고 외쳤다오. 그리고 그는 프랑스 왕을 데려왔다네. 이때 그는 엄청난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오! 나는 홀에서 식사했다오. 하지만 그곳에서 단정치 못한 옷차림, 나무로 된 컵과 스푼을 보지 못했다네. ... 나는 리처드 왕이 누군가에게 그렇게 많은 선물을 주는 것을 이제껏 보지 못했다오. 그가 프랑스 왕에게 막대한 금은보화를 선물했기 때문이라네.

《앙브루아즈의 노래》

크리스마스를 기념하여 리처드 왕이 프랑스 왕을 저녁식사에 정중하게 초대했다. 그리고 이 위대한 날을 프랑스 왕과 함께 기쁨과 환희로 보내기 위해서 거리의 포고꾼이 모든 영혼을 부르게 했다. 프랑스 왕이 그의 간청에 응하여 많은 수행단을 이끌고 왔다.

무엇을 더 말해야 하는가! 리처드 왕의 연회에 불참할 사람이 누가 있으랴! 그들은 리처드 왕이 세운 요새(그리스인 킬러)에서 명예롭게 대접받고 그들의 계급에 따라 테이블에 앉았다. 그 누가 수많은 종류의 음식과 음료, 그리고 귀하게 차려입은 하인들을 일일히 나열할 수 있으랴. 리처드 왕의 숭고한 인격을 헤아려 이 연회가 얼마나 성대하고 화려하고 훌륭한지 상상해 보아라. 모든 것이 사치스럽고 경이로웠다. 음식과 음료가 담긴 그릇과 컵들은 금과 은으로만 제조되었다. 그것들은 놀랄 만큼 복잡한 양각이 새겨지고 인간과 짐승의 형태로 세밀하게 조각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행복한 얼굴들이 초대받은 자들을 기쁘게 해주었다. 무엇을 더 말해야 하는가! 모든 사람들이 다양하고 많은 음식과 음료, 그리고 하인들의 발랄한 재치를 매우 즐거워 했다.

연회가 끝날 무렵 리처드 왕이 대단히 귀중한 보물들을 펼쳐놓았다. 그는 프랑스 왕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프랑스 왕이 그것들 중 최고의 것을 직접 선택하도록 친밀한 방식으로 강제했다.

《리처드 왕의 편력기》

그러나 1191년, 평화는 짧았다.

2월 2일, 여느 때와 같이 두 왕이 저녁 식사 후 함께 메시나를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구경하고 도시 중간에서 프랑스 왕이 잉글랜드 왕과 헤어지고 그의 숙소로 돌아갔다.

... 군사들이 속이 비고 단단한 나무 줄기를 무기로 사용하여 모의 전투를 하기 시작했다. '''참으로 우연히 잉글랜드 왕이 기욤 드 바흐와 일대일 결투를 하게 되었다.'''[52]

그는 프랑스 왕의 매우 용맹한 기사 중 하나였다.[53]

그들은 나무 줄기가 산산조각이 날 때까지 결투를 벌였다. 그러다 그것이 부수어지면서 잉글랜드 왕의 모자가 망가졌다. 왕이 격분하여 기욤에게 엄청난 적개심을 드러냈다. 기욤과 그의 말이 놀라서 휘청일 정도였다. 왕이 기욤을 땅으로 던지려 하려다 안장이 틀어졌다. 그는 굉장한 속도로 말에서 내리고 더 강한 전투마로 바꿔 탔다. 그는 기욤에게 흉포하게 돌진하고 그를 땅으로 던지려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떨어지려는 순간 그가 재빨리 말의 목을 붙잡고 매달렸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 때 레지스터 백작의 아들이 자신의 주군을 돕기 위해 기욤 드 바흐를 치려 했다. 그러자 왕이 말했다.

"이건 나와 저 놈과의 결투다."

잉글랜드 왕과 기욤은 긴 시간이 지나도록 있는 힘을 다하여 승부를 다투었다. 말싸움도 오고갔다. 그리고 왕이 말했다.

"다신 내 눈 앞에 보이지 않도록 조심해라. 지금 이 순간부터 네놈은 내 평생의 적이다."

... 다음날, 프랑스 왕이 잉글랜드 왕을 방문했다. 그는 겸허히 애원하며 잉글랜드 왕이 기욤 드 바흐에게 자비와 평화를 베풀 것을 청했다. 하지만 잉글랜드 왕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고 거절했다. 프랑스 왕은 더 이상 기욤 드 바흐와 교제할 수 없었고 이로 인해 기욤은 메시나 도시를 떠나야 했다.[54]

왜냐하면 '''잉글랜드 왕이 그것을 강력히 원하고 금지'''했기 때문이었다.

《호버든의 연대기》

하지만 필리프 2세가 리처드 1세의 분노를 진정시켜서 기욤 드 바흐를 십자군에서는 내치는 일은 막았다.[55]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는 이 사건 직후 잉글랜드 왕이 프랑스 왕에게 갤리선을 나눠 주었다고 기술했다.
한편, 엘레오노르 드 아키텐과 베렝겔라가 필리프 2세가 통과했던 알프스를 거쳐 피사에서 리처드 1세의 명을 기다렸다. 리처드는 함대를 보낼 테니 나폴리로 오라고 서신을 보냈다.
그 후 리처드가 여태까지 숨겨온 결혼 문제를 말했다.

아아! 부정한 선동자의 모든 간계가 사람을 유혹할 때, 사람의 마음이 어찌 이리도 쉽게 바뀌는가! 얼마나 많은 다양한 변화가 내게 보이는가! 이것은 사람들이 상호간 사랑으로 맺어져 있을 때, ... 헤어지게 하는 방법으로, 정복할 수 없는 그들을 복종시키기 위해 항상 사랑과 전쟁을 하며 증오를 일으키고, 친구간의 불화의 씨앗을 뿌리고, 상냥히 단결된 이들을 간계로 반목케 한다. ... 이곳에 같은 애착과 정신과 신념을 품은 두 왕이 있도다. 그들은 서로 굉장히 친밀하고 서로를 깊이 사랑하였다.

하지만 두 왕의 엄청난 다정함은 오래갈 수 없었다. 잉글랜드 왕 리처드가 적절한 기회를 엿보다가 심장 깊숙이 숨긴 것을 털어놓았다. 그는 프랑스 왕 필리프에게 이렇게 말했다.

"위대한 왕이시여. 그대에게 프랑스가 복종하고 나는 그대의 왕국의 기사요, 나의 맹세는 그대의 군대로 날 결속하오. 나의 주군인 그대에게 내가 종속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오. 그대의 이름은 살라딘의 간담을 서늘케 하고 이집트와 팔레스타인을 두려움에 떨게 하오. 그대에게 간곡히 청하오. 그대를 분노케 하려는 것이 아님을 말하려 하오. '''나는 그대에게 그대의 누이를 돌려줄 것이오.''' 그대에게 간절히 비오. 이제서야 나를 인도한 비밀스러운 동기를 묻지 말아주오. 나는 그대의 누이와 결코 육신의 일을 하지 않았소이다. 그러나 베렝겔라, 나바라 왕의 딸인 베렝겔라와 일찍이 침대를 나누었고 우리는 신성한 결혼 서약을 확인하였소. 하지만 단지 육신의 결합이었을 뿐이오. 나는 육신의 일과 법도에 메여있기 때문이지, 결코 이러고자 하는 의도가 아니었단 걸 알아주오. 하지만, 오! 존경하고 사랑하는 왕이시여. 그대의 누이가 더 깊은 관계를 맺을 백작과 남작들이 있소."[56]

프랑스 왕이 깜짝 놀라 할 말을 잃고 침묵했다. '''엄청난 분노를 숨긴 채''' 곧 그는 답했다.

"그대가 나의 누이를 돌려 보내면 마찬가지로 누이의 지참금을 돌려 주어야 하오. 그 땅은 그녀의 지참금이니 마땅히 회수되어야 할 몫이오. 나는 그대를 탓하지 않소. 그리고 그대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으리다. 우리는 대업을 목도하고 있소. 그러니 이 문제를 다툼 없이 해결하세. 그대는 주저 없이 십자가를 짊어졌고 우리는 타지에서 순례의 맹세를 하였소. 나는 그대에게 평화를 주었으니 그대는 십자가를 짊어진 의무를 다 하는 데 힘쓰시오."

《프랑스의 역사에 관한 수록본》

1191년 2월 말, 엘레오노르 드 아키텐이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1세 드 알자스의 호위를 받아 베렝겔라를 리처드의 새 신부로 데려왔다. 필리프 2세는 탕크레드에게 '''엘레오노르와 베렝겔라를 결코 메시나에 들이지 말라''' 경고하고, 부르고뉴 공작 위그 3세를 시켜서 그에게 서신 한 통을 전달했다. 탕크레드는 필리프의 경고를 따라 그들에게 브린디시에 상륙하라 했다.

탕크레드 왕의 사절단이 브린디시에서 잉글랜드 왕의 모후와 나바라 왕의 딸을 명예롭게 맞이하고 모든 존중과 배려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플랑드르 백작은 나폴리로 와서 잉글랜드 왕의 갤리선에 승선하고 메시나로 왔다. 그리고 많은 문제에서 잉글랜드 왕의 충고와 의도를 따랐다. 그러자 프랑스 왕이 플랑드르 백작에게 잉글랜드 왕을 떠나 그에게 돌아오도록 설득하여 따르게 했다.

《호버든의 연대기》

과정은 이랬다. 필리프 2세가 리처드 1세에게 탕크레드와 회담을 열 장소로 카타니아를 권하고 리처드는 그곳에서 탕크레드와 회담을 열었다. 3월 5일, 탕크레드는 리처드에게 서신을 탄로했다.

'잉글랜드 왕은 배신자요, 평화를 유지할 마음이 없다. 그대가 잉글랜드 왕과 전쟁을 벌이고 야전을 일으키겠다면 나와 나의 신하들이 가세하여 잉글랜드 군을 격파하겠다.'

리처드 1세의 반응은 다음과 같다.

"내가 배신자라니, 당치도 않소. 내가 살아있는 한 평화 협정은 지켜질 것이오. 하지만 나의 주군이자 순례의 맹세를 한 프랑스 왕이 그대에게 이 서신을 보냈다는 것은 쉽게 믿기지 않소이다."

탕크레드 왕이 답했다.

"그대에게 이 서신의 사본을 주겠소이다. 부르고뉴 공작이 프랑스 왕의 서신을 전해준 것을 부인한다면 나는 사절단을 보내서 이것을 증명하리다."

리처드 1세는 당장 메시나로 돌아갔다. 이 때 필리프 2세는 태베르니에서 탕크레드와 밤중 내내 있었다. 그는 3월 6일에 메시나로 돌아가서 리처드를 대면했다.

잉글랜드 왕의 안색은 어떤 선의와 평화도 없고 오직 험악함과 분노만이 있었으며, 그는 그의 기분처럼 사납게 날뛰었다. 하지만 프랑스 왕이 있는 자리를 떠나려 했다. 프랑스 왕은 잉글랜드 왕이 왜 저러는가 물었고, 플랑드르 백작이 시칠리아 왕이 잉글랜드 왕에게 그에 대해 말했던 한 마디 한 마디 모두 알렸다. 그리고 그 증거로 그 서신을 보여주었다.

프랑스 왕이 서신을 읽고 우선 평온한 안색을 유지했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고 도로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는 곧 냉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말했다.

"이제 잉글랜드 왕이 나를 음해하려한 진실을 알았다. 이 서신은 거짓이고 위조되었다. 그는 사악한 혐의를 지어냈고 결혼을 맹세한 아델을 저버릴 것이다. 하지만 명심하라. 내 누이를 배반하고 다른 여인과 결혼한다면 '''그와 그의 아내는 내 평생의 적이다.'''"

듣자마자 잉글랜드 왕이 답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델과 결혼할 수 없다! 내 부친이 그녀와 사통하고 아들까지 얻었다!'''"

그러더니 그가 그 사실을 모든 방식으로 입증할 준비가 된 많은 증인들을 세웠다. 그들이 증언하고 플랑드르 백작과 다른 충실한 신하들이 프랑스 왕에게 조언하자, 그가 잠자코 내버려 둠으로써 슬그머니 동의했다. 그것은 두 왕 사이의 모든 분쟁이 이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해 종지부를 찍을 수 있다는 것과 그가 잉글랜드 왕을 누이와의 결혼과 관련된 약속, 맹세, 그리고 모든 성약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었다.

리처드 1세의 이 같이 '''공개적인 주장'''은 필리프 2세의 누나 아델의 명예를 짓밟고 결혼으로 이용할 가치를 훼손시키는 것이었으며[57] '''필리프 2세와 카페 왕가를 향한 결코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이와 유사하게 1148년 필리프 2세의 부친 루이 7세와 리처드 1세의 모후 엘레오노르가 부부였던 시절, 둘이 참여한 2차 십자군 원정 중 안티오키아 공작 레몽 드 푸아티에와 엘레오노르가 단순한 숙질 관계가 아니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돌았고 이 역시 루이와 카페 왕가를 향한 엄청난 모욕이었다.[58] 당시 교황청에서 머물었던 솔즈베리의 요한은 이렇게 기술했다.

레몽의 왕비를 향한 관심과 그들의 끊임없는 대화는 루이 왕의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는 왕이 떠날 채비를 하는 중에도 불구하고 왕비가 남기를 원했을 때 크게 굳혀졌고, 레몽은 왕이 허락하는 한 왕비를 잡아두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왕이 급히 왕비를 무리하게 떼어 놓으려 하자, 그녀가 그들의 친척 관계를 언급하며 오촌 내 친척이기 때문에 남녀로 함께 지내는 것은 적법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들이 동방으로 원정을 가기 전부터 프랑스에서는 그런 취지의 말이 들렸고, 라옹 주교가 촌수를 계산해 보았으나 그 계산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확실치 않았다. 이것을 듣고 왕은 심히 동요했다. 이성을 잃을 지경으로 왕비를 사랑했으나, 그는 그의 고문과 프랑스 귀족들이 허락한다면 이혼하기로 동의했다. 왕의 고문 중 하나인 티에리 갈랑이 더 이상 안티오키아에서 꾸물대는 것 때문에 왕비를 괴롭히지 말라고 왕을 설득했다. 그래야만 친척이라는 허울 아래 벌어진 죄가 감춰질 수 있을 것이라 했다. 또한 다른 모든 재앙과 더불어 '''왕이 왕비에게 버림받았다거나 왕비를 빼앗겼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프랑크 왕족의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치욕'''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개인적으로 왕비가 미워서였든 혹은 널리 퍼진 소문을 실제로 믿었기 때문이었든, 그렇게 말했다.

... (2차 십자군 종군 후)여전히 루이 왕은 이성을 잃을 지경으로 왕비를 사랑했고 왕의 넘치는 애정은 소년의 그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교황청에서의 회상》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1세와 귀족들이 두 왕을 중재한 결과, 필리프 2세는 리처드가 원하는 여성과의 결혼을 허가하는 조약을 받아들여야 했다.[59] 아델의 지참금 지조흐와 벡쌍은 리처드가 베렝겔라로부터 남성 후계자를 얻으면 그 지역을 후계자에게 넘기고 얻지 못하면 필리프 2세가 돌려받기로 협약을 체결했다. 또한 리처드는 꺄오흐와 께흐씨에서 필리프의 영지인 대수도원장 관할 두 구역을 제외한 영유권을 얻고, 필리프는 리처드로부터 이쑤덩, 그하쎄, 오베르뉴 영유권 그리고 파혼 배상금 일만 마르크를 받아내기로 했다. 아델은 두 왕 모두가 귀국한 후 한 달 이내에 유폐에서 풀려나기로 했다.
리처드는 지금 당장 베렝겔라와 결혼하겠다고 선언했다. 이 시대 결혼은 가문 간의 동맹이자 평화 협정이었고 정치적으로는 '''리처드 1세가 필리프 2세에게 결별을 선언하고 나바라 왕국 손을 잡은 것'''이었다.
그런데 누가 봐도 지조흐와 벡쌍이 리처드의 차지가 되는 건 시간문제였는데 정작 리처드와 베렝겔라 사이에 자식이 없었다.[60]
1191년 3월 초, 하단의 기록에 따르면 두 왕의 반목만 악화될 뿐이었다.

며칠 후 프랑스 왕이 잉글랜드 왕을 방문하여 '''3월 중순이 되면 출항 준비를 하라고 알렸다.''' 하지만 잉글랜드 왕은 '''8월 전까지 떠날 수 없다'''고 답했다. 그러자 프랑스 왕이 자신의 신하들처럼 잉글랜드 왕을 소환하여 그가 했던 맹세에 따라 함께 바다를 건너자고 명령했다. 그리고 나바라 공주와의 결혼은 아크레에서 하고, 만약 출항을 거절한다면 아델과 결혼하라고 했다. 잉글랜드 왕은 모두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 때 프랑스 왕이 그 맹세를 보았던 증인들을 불러냈다. 그들을 대신하여 조프루아 드 랑코뉴와 샤토덩 자작이 프랑스 왕이 소망하는 언제나 그 맹세를 기꺼이 따르겠다고 말했다.[61]

이를 본 잉글랜드 왕이 극도로 분노했다. 그는 조프루아 드 랑코뉴와 샤토덩 자작에게 그들이 상속받은 모든 것을 빼앗겠다고 위협했다. 이 순간부터 두 왕의 깊은 불화와 시기가 싹트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역사에 관한 수록본》

참고로, 당대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가 기술한 베렝겔라가 3차 십자군에 동행한 이유는 리처드 1세의 적자 생산과 그의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지독한 죄의 처방이었다.

전쟁 준비 중에 그가 기쁨을 생각하여 아내를 데리고 참전하는 것은 지극히 나태한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상황은 유용함뿐만 아니라 신중함에서도 젊은 왕을 일시적으로 억제했다. 왜냐하면 심지어 이 중대한 시점에도 그의 왕위를 이을 아들이 없었고, 그를 사악한 행위로 이끄는 기쁨을 추구하는 성향 탓이었다. 또한 그는 현명하게도 이 지독한 죄에 적격인 처방(결혼)을 따랐기 때문이었다.

《스티븐, 헨리 2세, 리처드 1세의 연대기 2권》

반면, 앙브루아즈와 편력기의 저자는 리처드 1세가 3차 십자군 원정 기간 베렝겔라와 시간을 거의 보내지 않았음을 우호적으로 기록했다. 몇몇 역사가들은 이에 대해 당시 교회가 삼손데릴라의 일화로부터 읽어낸, 십자군 원정을 비롯한 '종교적 의무를 수행하는 동안의 성관계는 전사를 약하고 무력하게 만든다'는 널리 퍼진 교훈에서 기인했다고 해석했다.
또한 정확한 날짜는 알려진 바 없으나 역사가들의 추측에 따른 1190년 크리스마스 직전 혹은 이듬해 1191년 봄에 다음의 사건이 있다.

레지날드 드 모약의 교회에서 메시나의 모든 주교들과 고위 성직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잉글랜드 왕이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공개적으로 죄를 고백했다. 그는 알몸으로 자신을 세 번 채찍질하고 자연을 거스른 죄와 과거의 사악함을 인정하고 다시는 금지된 성행위에 빠지지 않겠다고 참회했다.

《호버든의 연대기》

길링엄은 리처드가 이성애자임을 고수, 메시나 여자들과 방탕한 성관계를 맺었을 것이라 보았다. 보스웰은 1265년 카스티야 왕국 법전의 "소도미란 남성 간 성행위를 통칭하는 자연을 거스른 죄를 뜻한다."를 제시, 리처드의 동성애 성향에 관해 의혹을 제기했다.[62] 플로리는 '자연을 거스른 죄'를 동성애로 규정, 리처드가 메시나 남자들과 동성애를 했을 것이라 주장했으나 플로리의 연구가 선뜻 동의하기 힘든 논증 방식을 거쳤다는 지적이 있다. 현재까지의 연구에 비추어 이 사건을 리처드 1세의 성적 성향의 근거로 삼기에는 논란이 있다.
확실한 점은 당대 선례로 왕의 이 같이 공개적이고 채찍질하는 고해가 이루어진 적이 있다는 것이다. 바로 20년 전 '''헨리 2세의 캔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베케트 살해 혐의''' 때문이었다.[63]
1191년 3월 30일, 필리프 2세는 아크레를 향해 출항했다. 리처드 1세는 그를 배웅한 후 즉각 엘레오노르와 베렝겔라를 메시나로 오도록 했으나 사순시기라서 결혼식을 미뤘다. 그는 4월 10일에 출항했다.

4.3. 아크레에서


[image]
아크레에 도착한 필리프 아우구스투스
아크레 공성전의 전반적 설명은 링크 참고
성지의 상황은 복잡했다. 기 드 뤼지냥과 후작 코라도 델 몬페라토가 예루살렘 왕위를 두고 내분하고 있었다. 기는 하틴 전투에서 대패해 예루살렘 왕국을 사지로 몰아넣었단 비난을 들었고, 권력 기반이었던 그의 부인 예루살렘 왕국의 시빌라가 전염병으로 죽어서 위신이 꺾인 상황이었다.
코라도는 모든 악조건을 극복하여 티레를 성공적으로 방어한 공적이 있고, 시빌라의 여동생이자 다음 왕위 계승자인 이사벨과 1190년 11월에 결혼식을 거행한 후였다.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드 5세를 비롯한 대부분의 십자군은 그가 예루살렘 왕국을 이끌 희망이라 보았다.
필리프 2세는 지중해를 건너서 티레로 향했다.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1세, 부르고뉴 공작 위그 3세, 클레르몽 백작 라울 1세, 블루아 백작 티보 5세가 필리프 2세를 따라 코라도를 지지하자 기는 리처드 1세에게 도움을 구하기로 했다.
1191년 4월 20일, 필리프 2세가 아크레에 당도했다.

아크레에서 오랫동안 공성전을 벌이던 모든 군사들이 프랑스 왕을 엄청난 기쁨으로 맞이했다. 사방팔방에서 프랑스 왕을 향한 찬사와 칭송이 울려퍼졌다. 그는 하느님의 천사가 지상으로 내려온 것처럼 보였다.

《프랑스의 역사에 관한 기억들 총서》

프랑스 왕이 아크레 도시로 상륙하고, 이 신성한 땅과 거룩한 날을 축하했다. 뛰어난 능력을 지닌 자크 드 아벤이 프랑스 왕보다 먼저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그곳에 가서 용감하게 공성전을 하고 있었다. 프랑스 왕이 그를 믿자 자크 드 아벤이 프랑스 왕에게 상냥한 방식으로 가장 귀중한 도움을 적시에 주었다.

배에서 내린 이들이 마른 모래를 밟는 감각을 즐기고, 모래 위에서 껑충껑충 뛰고 몸을 뒹굴었다. 길고 고된 항해가 끝나자 기뻐하며, 그들은 열정적으로 해안을 차지하고 건강을 주는 순수한 공기를 마셨다.

《프랑스의 역사에 관한 수록본》

아크레에 있는 귀족들은 오랫동안 프랑스 왕의 도착을 기대하고 고대하고 있었다. 도착한 즉각 그는 고결하고 참으로 아름다운 환대를 받았다. 수많은 이들이 그의 도착으로 크게 용기를 얻고 무척 기뻐했다. 그는 식량과 많은 다른 보급품을 실은 거대한 함대를 이끌고, 프랑스 왕관에 걸맞게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부르고뉴 공작 위그를 포함하여 많은 남작들과 기사들을 데리고 왔다.

《십자군 역사에 관한 수록본》

그 해, 프랑크 원군이 바다를 건너 아크레에서 공성전을 하는 프랑크인들에게 왔다. 가장 먼저 도착한 이는, 강대한 왕국의 주인은 아니지만 그들의 왕 중 가장 고귀한 프랑스 왕 필리프였다. 그가 도착한 날은 1191년 4월 9일이나, '''그들(3차 십자군)이 염원한 수많은 배들을 이끌지 않았다.''' 거대하고 인상적인 대형 선박을, 그가 여섯 척 가져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크레에서 그들의 마음이 고무되고 무슬림에게 공격을 계속했다.

《알리 이븐 알 아시르의 연대기》

바다가 다시 항해할 수 있게 되고 날씨가 맑아지자, 양 쪽 모두 싸움터로 돌아갈 때가 도래하였도다. 가장 먼저 도착한 무슬림은 술탄의 아들 알 아크 자히르의 아미르 중 하나이자 알레포 영주인 알람 앗 딘 술레이만 이븐 쟌다르였다. 나이가 지긋하고 위엄있는 이 남자는 많은 전투의 베테랑이자 현명한 고문이며, 수년간 함께 전쟁터를 누빈 술탄으로부터 존중받고 존경받았다. 그가 온 후, 바엘베크 지배자 마드 앗 딘 이븐 이즈 앗 딘 파루크샤와 다른 무슬림 분견대가 사방팔방에서 당도했다.

적군에 대해 말하자면, 그들이 우리의 전초 기지에 접근하여 프랑스 왕의 도착이 임박함을 위협적으로 알렸다. 프랑스 왕은 그들 중 '''위대한 지배자이자 용기와 위엄이 다른 모든 왕보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모든 기독교 세력이 최고의 지휘관인 이 결정권자'''에게 복종했다. 왕이 당도하여 그들에게 필요한 대형 선박 여섯 척과 보급품, 말들을 가져왔다. 이 사건은 1191년 4월 20일에 일어났다.

... 그리고 플랑드르 백작이 당도했다. 그는 대단히 저명한 귀족이자 라믈라 해 동안 하마와 하림 공성전을 한 전적이 있는, 그들 중 주목해야 할 남자다.

《살라딘의 진귀하고 위대한 역사》

십자군이 환영 파티를 열어주려 했지만 필리프는 이를 거부하고 지휘권을 이어받아 전시 상황을 면밀히 파악하는데 주력했다. 그는 공성무기 조립에 몰두하며 아크레 성벽의 약한 틈을 찾기 위해 밤마다 직접 성벽 외곽을 정찰했다.[64]
한편 지중해를 건너고 있던 리처드 1세는 폭풍우를 만나 3차 십자군에 동행한 약혼자 베렝겔라와 여동생 조안이 탄 배들과 뿔뿔이 흩어지고 갤리선 20척의 행방을 잃었다. 그들의 소식을 찾아야 하고 '''건강도 나빠지기까지 해''' 로도스에서 10일간 정박했다.[65]

5월 1일, 날씨가 맑아지자 잉글랜드 왕이 눈을 들어 항상 움직이고 있는 바다 저 멀리 거대한 배 한 척이 접근하는 것을 발견했다. 그 배의 정체는 소식통 역할을 하는 배들 중 하나였다. 잉글랜드 왕은 급히 전령을 보내 아크레 상황에 대한 정보를 요청하고 그것을 애타게 기다렸다.

선원들은 프랑스 왕이 무사히 아크레에 도착했으며, 분주히 공성전 무기를 조립하며 잉글랜드 왕을 기다리고 있다 전했다.[66]

프랑스 왕이 아크레 항구에 상륙한 날은 부활절 이후 토요일이고, 대단한 각오로 아크레를 점령하기 위해 주의와 노고를 아끼지 않고 있었다. 그는 아크레 성벽을 마주보도록 투석기와 공성전 무기를 세웠다. 도시 주변의 도랑이 흙으로 매워지고, 공성전 무기가 투입되고, 끊임없이 투석기를 쏘자 벽이 부분적으로 허물어졌다. 그러나 투르크인들이 반격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공성전 무기를 불태우는 데 성공했다.

지나가는 그 배 선원들로부터 이 모든 것을 들었을 때 잉글랜드 왕이 비관에서 완전히 벗어나고 원기를 되찾았다. 그리고는 다른 긴급한 문제(베렝겔라와 조안의 행방)에 관심을 돌렸다.

《리처드 왕의 편력기》

베렝겔라와 조안이 탄 배는 키프로스 섬 근처 해안가에서 정체 중이었고, 이 섬의 지배자 이사키오스 콤니노스가 그들을 포로로 잡을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곧 리처드 1세가 키프로스의 리마솔 해안에 상륙, 베렝겔라와 조안을 구출했다. 뒤이어 기 드 뤼지냥이 키프로스에 도착하여 리처드에게 가세했다. 리처드는 기로부터 그간의 일을 전해듣고,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는 왕이 기를 동정했다고 기술했다.
1191년 5월 12일, 리처드 1세는 키프로스에서 베렝겔라와 결혼식을 올리고, 3일 간 성대한 연회를 치렀다.

리모주에서 리처드 왕과 나바라 왕의 딸 베렝겔라의 결혼식이 열렸다. 가장 신중하고 예모 있는 그녀는 왕비로 추대되었다. 왕은 이 행복한 날을 영광스러워하고, 모두에게 기쁨으로 대하고, 유머러스하고 친절하게 보였다. 결혼은 왕실 예법대로 장엄하게 축하받았다. 어느 날, 걱정스럽게 찾았던 모든 갤리선이 항구에 도착했다. 리처드 왕은 그것들을 황제(이사키오스 콤니노스)에게서 차지한 갤리선 다섯 척에 더했다.

한편 필리프 2세는 교황 첼레스티노 3세에게 리처드의 지연을 알리는 서한을 보내고, 키프로스로 사절단을 보냈다.

보베 주교와 저명한 귀족 드회 드 멜로가 프랑스 왕 사절단 자격으로 파마구스타로 와서 리처드 왕에게 지체 없이 바다를 건널 것을 강력히 권고했다. 그가 도착하기 전까진 프랑스 왕이 아크레 공격을 하지 않을 것이라 장담했다. 그리고 그들은 책망의 말을 덧붙였다. 그가 중대한 의무를 무시하고 헛된 일에 힘을 쓰고 있으며, 수천에 달하는 사라센을 제쳐두고 무엄하게도 선량한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고 있다고 했다. '''왕은 여기 기술하기에 결코 적합하지 않은 성난 말로 답했다.''' 그들은 모든 논거로 왕을 설득하려고 시도했으나 소용없었다. ... 프랑스 왕의 사절단을 무시하고 리처드 왕은 니코시아로 진군했다.

기가 이사키오스의 딸을 생포하자 이사키오스가 딸을 걱정하여 즉시 리처드에게 항복하고, 리처드가 키프로스를 완전히 정복하느라 지체 기간이 길어졌다.[67]
아크레의 십자군 진지에서 지독한 전염병이 돌고, 루이 7세의 시대를 풍미한 권력자들과 필리프 2세의 가신들도 줄초상을 치렀다.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1세 드 알자스도 병으로 쓰러지고 6월 1일, 그는 생을 마감하기 직전 필리프 2세를 찾았다.

플랑드르 백작이 병으로 사경을 헤매면서도 프랑스 왕을 부르며 간절하게 보고 싶어했다. 그러자 프랑스 왕이 백작이 병으로 누워있는 곳을 방문하고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백작은 왕에게 경고했다.

"그대는 호위를 삼엄히 해야 하오. 이 군에는 그대의 죽음을 바라는 이들이 있소이다."

나는 그들이 누구인지 말할 수 없다. 그러나 프랑스 왕은 그 또한 전염병으로 쓰러질 때까지 그들을 심장에 새기고 몹시 걱정하고 분노했다.

《십자군 역사에 관한 수록본》

저자는 필리프 드 알자스가 언급한 자가 '''리처드 1세'''일 것이라 암시했다.[68]
랭스의 트루베르는 하단과 같이 기술했다.

리처드 왕이 프랑스 왕의 봉신들에게 접근하고 흉모를 획책했다. ... 죽음을 직감한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가 프랑스 왕을 찾았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아름다운 분. 내 목에 밧줄을 묶고 매달아 아크레의 모든 길바닥에서 끌려 다니게 하시오. 나는 그런 대우를 받아야 마땅하오."

이것을 듣고 왕은 백작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백작이 말했다.

"하느님께 맹세코, 나는 망령된 말을 하는 게 아니라오. 내 말을 들어 주오, 아름다운 이여, 나는 그대의 죽음을 맹세했소."

1191년 6월 6일, 리처드 1세의 함대가 티레에 도착했다. 필리프 2세와 코라도가 '''도시 입성을 거부'''하여 리처드는 티레의 성벽 밖에서 야영해야 했다.
6월 7일, 리처드는 아크레 항해길에 오르고 신원불명의 갤리선 2척을 마주했다. 그들은 프랑스 왕의 배라고 주장했으나 이를 의심한 리처드가 그들의 신원을 확인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러자 갤리선 선원들이 공격을 시작하고 격전 끝에 리처드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 해전이 바로 '아크레 해전'이다. 호버든의 연대기는 이 배가 프랑스 왕의 배라고 주장했지만 편력기와 알리 이븐 알 아시르의 연대기는 이를 명백하게 부인한다.
6월 8일, 리처드 1세가 함대를 이끌고 아크레에 당도했다.

축복받은 사도 바르나바스의 축제 전 토요일, 오순절 주간에 리처드 왕이 수행단과 아크레로 상륙했다. 격앙된 기독교인들의 응원으로 천지가 흔들렸다. 리처드 왕이 아크레 항구에 도착했을 때 프랑스 왕과 모든 지휘관들, 모든 귀족들 그리고 위대한 군사들이 기뻐하며 그를 환영했다. 잉글랜드 왕의 도착을 열렬히 기다렸기 때문이었다. 배에 탄 그의 모든 군사들이 축하를 외치고 나팔을 불었다. 반면, 투르크인들은 왕의 수많은 갤리선으로 말미암아 떠나고 돌아오는 모든 것이 끝장날 것을 인지했기 때문에 두려워하고 낙담하였다.

두 왕이 함께 항구에서 내려오고 가장 정중한 태도로 서로를 존중했다. 그리고 리처드 왕은 미리 마련된 막사로 물러가 즉각 공성전 준비를 시작했다. 시간 낭비 없이 책략과 기계로 도시를 함락하는 것이 그가 가장 열망하는 관심사이기 때문이었다. 어떤 펜도 왕의 도착에 대해 백성들의 기쁨을 충분히 표현할 수 없다. 말 또한 이를 묘사할 수 없다. ... 어두운 밤을 밝히기 위해 밀랍 횃불과 새빨간 불꽃이 풍부하게 반짝였다. 그날 밤은 밝은 낮으로 인해 휘몰아 치는 것처럼 보이고, 투르크인들은 계곡 전체가 불타고 있다 생각했다.

《리처드 왕의 편력기》

프랑스 왕과 아크레 앞에 있는 모든 이들이 리처드 왕이 온 것을 아주 기뻐했다. 그는 그곳에 있는 귀족들로부터 큰 열의과 대단한 존중을 받았다. 리처드 왕의 아내가 해안가로 올 때, 프랑스 왕은 그녀를 아주 예모 있게 맞이했다. 그는 그녀를 자신의 팔로 안아들고 그의 갤리선에 태운 후 육지로 데려다 주었다.[69]

그는 리처드 왕이 저지른 행동으로 말미암은 분노의 기색을 드러내지 않도록 조심했다. 리처드 왕이 나바라 왕의 딸 베렝겔라와 결혼하기 위해 그의 누이를 저버렸기 때문이었다.

《십자군의 역사에 관한 수록본》

그날 십자군은 리처드를 위한 환영 파티를 밤새도록 열었다.
6월 9일, 필리프 2세는 공성전 무기를 전선에 투입했다. 프랑스 연대기 작가는 두 왕 사이에 잉글랜드 왕의 협공을 청하는 중재 시도가 있었으나 잉글랜드 왕이 이를 거절했다고 기술했다.
이 무렵 샹파뉴 백작 앙리 2세가 필리프 2세에게 보급품을 요청,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가져온 군자금이 모두 바닥난 샹파뉴 백작 앙리가 프랑스 왕에게 왔다. 그는 보금품을 요청하고 그것이 이루어진다면 샹파뉴에 대하여 충성 서약을 할 준비가 될 것이라 했다. 프랑스 왕이 도리어 돈을 요구하자, 이에 백작이 답했다.

"이제껏 내 모든 걸 걸고 임했고 지금은 어려운 처지에 처했소. 나는 그대를 위해 싸우길 갈망했건만 그대는 이런 날 거부하는구려. 날 위하지 않겠다면 다른 이에게 가리다. 받는 것보다 줄 줄 아는 위인에게 말이오."

샹파뉴 백작 앙리에게 막대한 식량과 거액의 돈을 준 이는 잉글랜드 왕이었다.

《스티븐, 헨리 2세, 리처드 1세의 연대기 3권》

6월 11일, 필리프 2세가 리처드에게 다시 협공을 제안했으나 리처드는 '''아크레에 오자마자 전염병에 걸렸고''' 해전을 하기에 풍랑이 유리하지 않다는 이유로 공격을 거부했다. 필리프는 더 이상의 공격 지연은 없어야 한다 판단하고 리처드의 조력 없이 아크레 공격을 시작했다.
그러자 리처드는 필리프 2세가 병사들에게 봉급으로 적정량인 금화 3개를 지급하는 걸 알고 '''당장 금화 4개로 봉급을 올렸다.''' 필리프의 병사들이 봉급이 낮다 항의하고 '''리처드가 그들을 가로채 고용'''하여 필리프의 군세에 제동을 걸었다. 병사들이 리처드를 "모든 남자 중의 남자로다." 칭송하고, 필리프는 리처드가 불충을 저지르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 때문에 전선에 투입된 프랑스 공성전 무기가 무방비 상태에 놓이고 투르크인은 그리스의 불로 공성전 무기를 불태웠다. 이를 본 필리프는 대노하여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퍼부었다.[70]
그 직후 '''필리프 2세도 전염병으로 쓰러졌다.''' 이즈음 살라흐 앗 딘이 두 왕과의 회담을 거절하자 리처드 1세는 살라딘과 선물을 주고받으며 서로에 대해 탐색전을 했다. 그 기간이 늘어지자 필리프는 리처드가 살라흐 앗 딘의 동생 알 아딜과 모종의 거래를 하고 있을 것이라 의심했다.
리무쟁의 트루바두르는 하단과 같이 작곡했다.

코라도 경, 나는 그대를 돕지 못하는 두 왕을 알고 있소. 그들이 누구인지 들어보게나. 필리프 왕은 리처드 왕을 의심하고, 리처드 왕도 도로 그를 의심한다오. 차라리 두 왕 모두가 살라딘에게 잡히는 것이 낫겠구려!

두 왕은 병으로 고생하면서도 십자군의 사기를 북돋았다. 필리프 2세는 투석기를 쏘고 리처드 1세는 침대를 전선으로 옮겨서 누운 채 쇠뇌를 쏘았다.
필리프는 리처드보다 먼저 병에서 회복하여 공성전 무기를 재조립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병으로 쓰러졌다. 프랑스 연대기 작가는 왕이 위독하여 독이 의심스럽단 말이 돌았다고 기술했다. 이때 리처드는 회복기에 있었고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프랑스 왕이 병으로 쓰러져 누워있는 동안 잉글랜드 왕이 병문안을 했다. 그는 도착한 즉각 프랑스 왕의 상태에 관해 여러 번 물었다. 프랑스 왕은 여전히 심하게 앓고 있음에도, 하느님의 보살핌에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잉글랜드 왕이 물었다.

"그리고 그대의 아들 루이에 관해서는 자신을 어떻게 위로할 것이오?"

그 때 프랑스 왕이 물었다.

"나의 아들 루이에게 무슨 일이 생겼길래 위로가 필요해야 하오?"

"내가 온 건 바로 이 때문이오."

잉글랜드 왕이 말했다.

"그대를 위로하기 위해서요. '''그가 죽었으니까!'''"

그러자 프랑스 왕이 말했다.

"반드시 꼭 마음을 더더욱 강하게 먹어야겠구려. 내가 이 땅에서 죽으면 프랑스 땅은 상속인이 없을 테니 말이오."

... 잉글랜드 왕은 하고 싶은 대로 했으나 별로 기뻐하지 않았다. 그가 떠난 후, 프랑스 왕이 부르고뉴 공작과 기욤 드 바흐 그리고 측근들을 불렀다. 루이의 죽음의 진위를 알고 있다면 자신에게 알려야 한다고 충성 서약을 요구했으나 아무도 그의 상태를 몰랐다. 이 때 부르고뉴 공작이 답했다.

"그대가 아크레로 온 뒤 바다 너머로 그런 소식을 전해 줄 배는 아직 오지 않았소이다. 잉글랜드 왕이 악의를 품고 흉악하게 그대의 아들에 대해 그런 말을 한 걸 보면 그대를 몹시 슬프게 해서 병을 낫지 못하게 하려나 보오."

《십자군 역사에 관한 수록본》

실제로 이 시기 5살인 왕세자 루이가 이질 증상을 보이며 위독했다는 프랑스 연대기 작가의 기록이 있다. 이 사건을 두고 아크레의 프랑스 진지에서 '잉글랜드 왕이 흉악하고 사악한 마음을 품고 프랑스 왕을 해치려 한다'는 말이 파다하게 퍼졌다.
두 왕이 병에서 회복하자마자 내분이 이어졌다.

프랑스 왕 필리프가 잉글랜드 왕 리처드에게 이렇게 제기했다.

"'''이사키오스의 보물과 키프로스 반을 내게 넘기시오.''' 순례의 맹세에 따라 우리의 모든 수익을 응당 나누어야 하오."

잉글랜드 왕이 대답했다.

"이사키오스는 누이와 부인을 위협하였소. 또한 그가 군사를 약탈했기에 마땅한 복수를 한 것이오. 조약을 언급한 건 그대이니, '''그대가 플랑드르 백작과 다른 전사들의 상속분을 나눌 권리를 내게 준 것'''이오. 그러니 먼저 그대가 그것들을 넘기시오!"

《프랑스의 역사에 관한 수록본》

악마의 농간으로 잉글랜드 왕과 프랑스 왕 사이에 불화의 씨앗이 자라났다. 프랑스 왕이 얻은 모든 것을 똑같이 나누기로 한 엄숙한 조약에 따른 권리로 키프로스 반과 그곳에서 얻은 전리품 반을 그의 것인 양 요구했다.

이에 잉글랜드 왕이 그 조약에 대해 '''공동의 노력으로 얻은 것만을 프랑스 왕이 차지할 수 있다'''고 응수했다. 키프로스를 얻은 건 자신의 노력이었고, 그는 조금도 보탠 것이 없다고 했다. 또한 이 원정의 유일한 목적은 사라센을 공격하고 하느님의 도움으로 최선을 다해 그들과 싸우는 것이며, 이 목적으로 분배 조약이 성립된 것임을 분명히 했다. 게다가 그는 의도적으로 기독교 섬에 간 것이 아니라, 극악무도하고 파렴치한 행위를 복수하기 위해 돌발적으로 옆길로 틀었다고 했다.

이와 같이 두 대실력자가 다투었다. 그리고 잉글랜드 왕은 그가 차지한 전리품을 프랑스 왕과 나누는 것을 완강히 거절했다. 반면 프랑스 왕은 잉글랜드 왕이 조약을 위반하고 어겼다고 비난했다.

《잉글랜드 국정의 역사》

결국 성전 기사단과 구호 기사단, 다른 귀족들까지 나서서 두 왕을 중재하고, 십자군 원정으로 나누는 것은 성지의 영토로 한하기로 합의했다.

기 왕이 코라도 후작이 불법적이고 부당하게 예루살렘 왕의 권리와 이익을 박탈했다고 항의했다. ... 또한 기 왕의 형제인 조프루아 드 뤼지냥이 코라도 후작을 기 왕과 기독교 왕국의 군대에 반한 충성 서약, 위증죄, 반역죄로 고소했다. 그리고 훌륭한 고소가 되리라 맹세했다. 후작이 그의 재판을 수긍하는 것을 거부하고 군중을 헤치고 나아가 궁정을 떠났다. 사람들이 그를 불러 세우고 말했다. "자네는 재판에 불응한 반역자일세!" 그러나 아무도 그를 직접 붙잡지 못했다. 후일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나서 '''그가 티레로 간 후''' 즉각 프랑스 왕과 잉글랜드 왕이 불화를 일으켰다. 프랑스 왕은 힘 닿는 데까지 코라도 후작을 지지하고, 잉글랜드 왕은 기 왕을 지지했다. 그 결과 프랑스 왕과 잉글랜드 왕이 '''빈번하게 말싸움을 벌이고 다투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프랑스 왕이 코라도 후작을 곁에 있게 하고 군의 수장과 주요 고문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영혼의 구원과 하느님을 저버린 많은 짓을 저질렀다. 코라도 후작 때문이었다. 게다가 프랑스 왕은 살라딘에게서 선물을 받기까지 했다.

《호버든의 연대기》

프랑스 왕이 코라도 후작이 예루살렘 전왕 기에 대항하여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도왔다. ... 프랑스 왕은 '''기독교 왕국의 파괴자보다 기독교 왕국의 잔해가 더 낫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잉글랜드 왕은 그의 말에 동의하지 않고 기의 편을 들었다. 기가 잉글랜드 왕을 주군으로 모시는 아키텐인이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잉글랜드 왕은 기가 기독교 신념을 잃거나 배신한 적이 없다고 했다. 기는 적에게 항전하며 이를 포기하지 않았고 그 자신의 잘못 혹은 방치와 나태함이 아니라, '''그것(하틴 전투)은 다른 이들이 수치스럽게 배신했기 때문'''이라고 확언했다. 그러므로 기의 책임이 아닐 뿐더러 그의 왕국처럼 배신당하고 파멸되었다고 했다.

또한 '''가장 극악무도한 건 믿는 이의 배신'''이라고 했다. 기가 믿는 이가 그를 적의 손에 넘겼지만 하느님의 은총으로 해방되었다고 덧붙였다. 잉글랜드 왕은 기의 책임을 명명백백히 밝히던지, 그렇지 않으면 그가 잃어서는 안될 존엄이 이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 코라도 후작이 티레에서 그의 지지자들을 대동하여 돌아왔다.

《잉글랜드 국정의 역사》

잉글랜드 연대기의 표현을 따른 바, 리처드 1세는 코라도를 살라딘만큼이나 적대했다.

기욤 드 바흐를 두고 프랑스 왕과 리처드 왕이 한동안 개인적으로 격렬한 말다툼을 벌였다. ... 프랑스 왕이 잉글랜드 왕을 무성의하게 대하면, 그를 내내 졸졸 따라다니며 비난을 퍼부었다. 잉글랜드 왕은 프랑스 왕에게 저지른 사악한 행동들로 질책받았다.

《십자군 역사에 관한 수록본》

랭스의 트루베르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71]

기욤 드 바흐 공이 말을 타고 길목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리처드 왕도 그곳에서 말을 타고 지나가고 있었다. 그들이 마주치자, 리처드 왕이 들고 있던 긴 창으로 매섭게 공격했다. 그를 안장에서 떨어뜨리기 위함이었다. 기욤 공은 위대한 기사였기 때문에 말에 박차를 가해 재빨리 달리게 하여, 리처드 왕을 붙들고 짐승같은 힘으로 안장에서 떨어뜨렸다. 리처드 왕이 몹시 고통스럽게 땅으로 떨어진 것 때문에 분노로 심장이 터질 지경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오랫동안 어떤 움직임도 없이 있었다. 기욤 공이 당장 그곳을 떠나 필리프 왕의 숙소로 가서 리처드 왕의 상태를 말했다. 필리프 왕이 리처드 왕이 올 것을 걱정하여 불안에 시달렸다.

... 리처드 왕이 그 상태에서 벗어나자마자 필리프 왕의 숙소로 쳐들어갔다. ... 그러나 그는 필리프 왕의 깜짝 놀란 모습을 보지 못했다. ... 앙리 백작과 많은 다른 남작들이 도착하여 그들을 중재했다.

1191년 7월 초, 3차 십자군이 아크레 성벽을 공략하는 와중에도 두 왕의 내분이 이어졌다.

잉글랜드 왕의 군사들이 아크레 성벽의 주춧돌을 빼냈다. 그곳에 있는 이교도들을 무시한 채 벽 밑에 장작을 깔고 불을 지피자 벽의 큰 부분이 무너졌다. 반면 프랑스 왕의 군사들과 성전 기사단은 저주받을 탑 옆 벽에 커다란 균열을 냈다. 프랑스 왕의 군사들이 도시에 입성하고자 전력을 다해 그 틈으로 달려갔지만 이교도들이 그들을 제압하여 후퇴케하고 그 길이 가파르고 좁아서 프랑스 왕의 많은 병사들이 살해당했다.

그러나 이 때 잉글랜드 왕과 그의 군사들은 기독교와 살라딘의 군세 사이를 가로지르는 참호 경계를 삼엄히 했다. 일전에 두 왕의 군사들 중 한 쪽이 도시를 공격할 경우 다른 쪽이 살라딘의 군대가 후방을 칠 것을 대비하여 참호를 수비하기로 합의했기 때문이었다. 이 합의는 두 왕 사이에서도 이루어졌고, 이유인 즉슨 두 왕과 그들의 군사들이 연합한 모든 일에서 '''그들이 각자 행동한 것보다 덜 성공적이기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프랑스 왕과 그의 신하들이 잉글랜드 왕과 그의 신하들을 경멸하여 바라보고, 후자도 똑같이 했기 때문이었다.

《호버든의 연대기》

아크레 공성전을 하는 동안 리처드 왕이 카살 임베르트를 향한 도시 옆에서 야영한 반면, 프랑스 왕은 반대쪽에서 야영했다. 프랑스 왕은 그가 있는 곳에서 군사들이 그 도시 성벽을 향해 가차없이 공격을 퍼붓게 하고, 리처드 왕 또한 성벽을 맹렬히 공격하여 투석기로 인해 부수어지도록 했다.

사라센들은 그들이 심하게 공격받는 것을 보고 살라딘이 그들을 구원할 수 없으리라 여겼다. 그들은 서로 자문을 나누어 더 이상 그 도시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으므로 기독교인들에게 넘길 것을 결심했다. 프랑스 왕의 공성 무기가 도시 성벽을 몹시 허물어뜨려 접전이 가능하고, 리처드 왕의 명성과 업적이 사라센들을 아주 겁먹게 하여 그들을 절망케 했다. 아크레 도시의 사라센 지휘관들이 살라딘으로부터 어떤 도움이나 원조를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완전히 포기했다. 왜냐하면 기독교인들이 이 도시를 완전히 포위하고 맹공을 퍼부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이 '''프랑스 왕에게 서신을 보내 공격을 중단할 것과 안전 통행권, 그리고 회담을 간청'''했다.

그는 조언을 구하고 그들의 안전 통행권을 동의했다. 사라센 사절단이 회담을 위해 왕의 막사로 오고 그들의 아내, 자녀, 재산과 함께 무슬림 땅으로 안전하게 갈 것을 허가받는 조건으로 '''도시를 그에게 넘길 것'''을 제의했다. 왕은 동의하지 않았다. 그 도시와 그곳에 있는 모든 것을 그의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그의 자비에 항복한다면 목숨은 보전토록 하겠다고 했다. 그들이 프랑스 왕과 회담하는 중 리처드 왕은 이를 통보받지 않았기에 프랑스 왕에게 '''앙갚음하기 위해 도시를 향한 공격을 강화'''했다. 회담장에 있는 사라센들이 이를 목격하자, 격노하여 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왕이시여. 우리는 그대의 보호 하에 이곳으로 왔나이다. 돌아갈 때까지 우리는 그대의 보호가 우리와 도시 안의 이들에게도 보장될 것이라 착각했나이다. 이제 우리는 잉글랜드 왕이 도시 안에 있는 이들에게 심각한 해를 끼치고 있는 것을 보나이다. 그대는 저 공격을 금지할 권한이 없다는 걸 알았으니 우리를 떠나게 해줄 것을 청하나이다."

프랑스 왕이 그들에게 준 안전 통행권에도 불구하고 리처드 왕이 도시를 공격하고 있다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극도로 분노했다. 그는 사라센 사절단을 돌려보내 도시까지 호송케 하고, 분노로 말미암아 그의 부하들에게 무장하여 '''잉글랜드 왕을 공격할 것을 명령'''하기까지 했다. 그가 무장하는 도중 현명한 이들이 개입하여 그를 진정시켰다.

사라센들이 도시로 돌아가 리처드 왕으로부터 전력을 다해 방어하고 이 때문에 그는 이날 어떤 명예도 얻지 못하고 그의 많은 병사만 잃었다. 그 후, 프랑스 왕과 리처드 왕은 '''서로 화해'''한 다음 그 도시를 중단 없이 맹렬히 공격할 것을 명령했다.

《십자군 역사에 관한 수록본》

리처드 1세가 아크레 성벽에 먼저 꽂히는 깃발 주인이 모든 전리품을 차지하자는 내기를 제안하자 필리프 2세와 지휘관들은 이에 응했다. 7월 3일, 필리프가 마샬로 임명한 알베릭 드 클레몽이 성벽을 오르던 중에 전사했다. 4일, 리처드가 그를 죽인 투르크 병사를 석궁으로 쏘아 죽여 대신 보복했다. 1191년 7월 12일, 두 왕이 아크레를 함락했다. 성벽에는 잉글랜드 깃발이 먼저 꽂히고 코라도가 간발의 차로 프랑스 깃발을 꽂았다. 리처드는 아크레의 전리품을 독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드 5세도 잠깐이나마 성벽에 깃발을 올렸는데 두 왕은 이를 오만한 행위로 보았다. 이에 레오폴드 5세의 깃발이 내려지고 리처드의 부하들은 그의 깃발을 훼손하여 모욕을 주었다. 격분한 그는 병력을 수습하여 그날 밤 귀국길에 올랐고 보복할 기회를 노렸다.
7월 13일 아침, '''리처드 1세는 필리프 2세에게만 아크레의 모든 전리품 반을 나누어 주었다.''' 그러자 2년 가까이 아크레에서 참전했던 귀족들이 분노하여 이 같은 분배에 대해 강하게 항의했다. 두 왕은 원하는 바를 들어주겠다고 답변했으나 차일피일 미루었다.
7월 20일, 리처드는 필리프가 성지를 떠나지 못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성녀 마르가리타 동정녀 축일을 기념하여 열린 연회에서 잉글랜드 왕 리처드가 프랑스 왕 필리프에게 제의했다.

"그대와 나는 예루살렘 탈환을 위해 '''3년 간 이 땅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함께 있겠다'''고 맹세를 해야하오."

그러자 프랑스 왕이 답변했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어떤 맹세도 하지 않겠소."

《호버든의 연대기》

21일, 리처드 1세는 왕비 베렝겔라와 조안, 그리고 키프로스의 처녀와 아크레 도시로 입성했다. 필리프 2세는 성전 기사단 막사에서 지냈다. 22일, 그는 신하들을 리처드에게 보내어 프랑스로 돌아가겠다는 뜻을 전달했다. 공식적인 이유는 병이었다.
이 시기를 다룬 호버든, 당대 세인트올번스 수사, 디스의 랄프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프랑스 왕의 말을 전한 이들에게 잉글랜드 왕이 말했다.

"나의 주군이 여기까지 온 임무를 완수하지 않고 떠난다면 수치와 불명예일 따름이다. 하지만 몸이 아프고 건강이 나쁘다고 이 땅에서 죽는 게 두렵다면 그의 신하들이 충고한 대로 하라 내버려 두게."

... 모든 군사들이 구름같이 몰려와 대성통곡을 하며 프랑스 왕을 뜯어 말렸다. 이 때 프랑스 왕이 신하들을 보내어 잉글랜드 왕에게 '''키프로스 섬 반을 또 요구했다.''' 그러나 헛수고였다. 이 일은 두 왕 사이에 극심한 불화를 일으켰으나 현명한 이들의 중재로 화해했다.

《호버든의 연대기》

아크레 도시를 함락한 후 ... 몬페라토 후작에 관한 문제로 두 왕 사이에 '''비밀스러운 다툼'''이 벌어졌다.[72]

... 프랑스 왕이 돈 부족을 구실로 삼아 더 이상 여기서 머물 수 없다고 했다. 리처드 왕이 이것을 듣고 프랑스 왕에게 자신이 가진 모든 금과 은뿐만 아니라 식량, 말, 무장, 선박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롤스 시리즈 7권》

이를테면, 그 도시를 함락한 후 프랑스 왕이 귀국하겠다 선언했다. 잉글랜드 왕이 이것을 듣고, 얼마가 들든 상관없이 프랑스 왕이 머물기만 한다면 금과 은, 식량, 군사, 말 혹은 함대를 그와 반으로 나눌 것을 새로이 확고하게 약속했다. 그러나 이는 귀국하고자 하는 프랑스 왕의 마음을 돌릴 수 없었다.

《역사의 상들》

필리프 2세는 십자군의 모든 비난과 설득을 무시하고 본격적으로 프랑스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7월 26일, 필리프 2세의 충고로 코라도 델 몬페라토가 리처드의 발 밑에 엎드리고 용서를 구했다.
27일, 두 왕은 예루살렘 왕위 계승 문제로 격렬한 언쟁을 벌였다. 그들은 코라도와 기의 주장을 각각 듣고 타협안을 내놓았다. 기의 예루살렘 왕위를 인정하는 조건으로 기가 죽으면 코라도나 코라도의 상속인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로 한 것이다. 또한 티레, 시돈, 베이루트 지역은 코라도가 차지하기로 했다.
그 후 필리프는 병을 이유로 리처드에게 자신을 베즐레 서약에서 풀어달라고 요청했다. 우디끄의 말을 빌리자면, 리처드는 무슨 이유에선지 갤리선 중 가장 훌륭한 것으로 두 척을 필리프에게 주었다.
필리프 2세는 부르고뉴 공작 위그 3세에게 전리품 반절과 그의 군 지휘권을 넘기고, 코라도에게는 아크레 땅 반절과 모든 수비대 포로들을 양도했다. 안티오키아 공작 보에몽 3세의 아들 레몽에게는 기사 100명과 병력 500명을 넘겼다. 느베흐 백작 피에흐 드 꾸흑뜨네가 필리프 2세를 따라서 귀로길에 올랐다.[73] 리처드 1세는 대륙의 플랜태저넷령을 평화로운 상태로 유지하겠다는 맹세를 요구하고 필리프는 이에 순순히 응했다. 역사가들은 '''필리프에게는 더 이상 리처드와의 옛 우정이 남아 있지 않았고''' 리처드는 필리프의 맹세를 완전히 믿지 않았으므로 용병대 대장을 귀환시켰다 보았다.
1191년 7월 30일, 필리프 2세와 코라도가 아크레를 떠났다. 코라도는 그를 티레로 데려가 송별회를 열어주었다.

수치스럽도다! 너무도 충격적이도다! 아직도 여기서 할 일이 많은데 떠나버리다니! ... 무얼 더 말할 수 있으랴? 프랑스 왕은 병 탓이라 주장하고 순례의 의무로부터 해방되었다. 그가 순례의 맹세를 했을 때만 해도 그는 특별히 순결하고 무탈해 보였기 때문에 그의 주장을 믿을만한 어떤 증거도 없었다. 그러나 '''프랑스 왕의 명예는 완전히 더럽혀지지 않았다. 아크레 공성전에서 그가 대단한 노력과 돈을 아끼지 않았고, 바로 그의 권위가 그 위대한 임무의 완성을 더 빠르고 수월하게 해내며 수많은 이들을 원조하고 지원했기 때문이다.'''[74]

... 프랑스 왕의 봉신들이 하느님께 온갖 고초와 불행을 주군에게 내려주십사고 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왕은 지체 없이 아크레를 떠났다.

《리처드 왕의 편력기》

필리프 왕이 아크레를 떠난 후 앙리 백작이 직접 고기잡이배을 타더니 그를 뒤쫒았다. 왕이 아주 멀리 가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그는 그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말했다.

"아름다운 왕이시여, 아름다운 필리프! 날 이 타지에 두고 그대는 영영 떠나겠단 것이오?"

그러자 왕이 답했다.

"그렇다네. 성인께 맹세코, 이 사악한 배신자! 영원히 샹파뉴로 돌아오지 말게."

《랭스 트루베르의 노래》

8월 3일, 필리프가 프랑스 귀환길에 올랐다. 리처드는 그가 떠나자마자 코라도를 위협하여 포로들을 빼앗고 8월 20일에 학살했다. 9월 7일, 성지에 남은 기욤 드 바흐는 아르수프 전투에서 용맹한 활약으로 리처드 1세와 쌍방 화해했다.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들은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1세가 죽자 프랑스 왕이 그가 남긴 광대한 영지를 차지하기 위해 귀환을 결정했다 주장하고, 프랑스 왕이 잉글랜드 왕에게 부담감을 짊어지게 했다 비난했다. 프랑스 연대기 작가들은 고문들이 먼저 병으로 고생하는 왕에게 귀환을 건의하자 그가 이를 수용했다 기술하고, 플랑드르 영지 문제는 언급이 없다. 신성로마 연대기 작가는 잉글랜드 왕의 오만이 극에 달했기 때문이라 기술했다.
학자들은 필리프 2세가 필리프 1세 드 알자스가 급사할 것을 우려했던 점을 미루어 '''플랑드르 영지 승계 문제 해결'''을 위해 귀국을 서둘렀을 것이라 추측했다. 또한 필리프는 '''왕국을 장기간 비우는 행위가 초래할 위험'''을 인지하고 있었고 리처드가 전한 '''아들 루이의 소식으로 인한 상속인 문제'''를 걱정했을 것이라 지적했다. 필리프와 루이가 죽는다면 왕국의 큰 혼란으로 직결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프랑스에 필요한 '''앙주 제국의 영지를 차지할 야심'''을 실현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라 보았다.
과거에는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 뉴버그의 윌리엄의 기록을 고수하여 필리프 2세가 리처드 1세를 질투했다는 설이 퍼져 있었지만 최근에는 '''필리프가 불안감을 갖고 리처드를 향한 불신이 깊었다'''는 분석으로 기울어지고 있다. 프랑스 연대기 작가는 "팔레스타인을 떠나기 전 그리고 뱃길에서 프랑스 왕이 몹시 울부짖었다."라고 증언하고 잉글랜드 왕을 향한 불신 때문이라 주장했다.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들은 "프랑스 왕이 교황을 방문해 잉글랜드 왕이 사악한 짓들을 저질렀기 때문에 자신이 성지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고 호소했다. 그리고 잉글랜드 왕이 배신자라 주장했다", "프랑스 왕이 교황을 방문해 잉글랜드 왕과 한 맹세들을 철회해줄 것을 청하고 이는 자신이 강제로 예속된 것이라 말했다고들 한다"라고 기술했다.[75]
리처드 1세와 살라딘이 아르수프에서 대격돌을 펼칠 무렵, 필리프 2세는 지중해에서 거대한 폭풍우를 맞닥뜨렸다.

신하들이 바다에서 길을 잃었다며 공포로 초토화 되자 프랑스 왕이 침착하게 물었다.

"지금이 몇 시인가?"

부하가 자정이라고 대답하자 그렇다면 길을 잃은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두려워 하지 말아라. 바로 이 순간 프랑스 신부들이 깨어나 우릴 위해 하느님께 기도하고 있다. 더 이상 위기를 두려워하지 말아라."

그러더니 얼마 후 바다가 고요해졌다. 그 후 프랑스 왕은 적법한 절차를 밟고 브린디시로 상륙했다.

《십자군 역사에 관한 수록본》

그 후, 필리프 2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6세를 방문하여 리처드가 그의 영토를 통과한다면 극심히 적대할 것을 설득하여 따르게 했다.
리처드는 카이사레아, 아르수프 전투 후에도 공식 서신들에서 필리프에 대해 혹독한 비난을 퍼부었고 이후에도 그의 귀국을 의식하는 모습을 보였다.

잉글랜드 왕이자 노르망디와 아키텐 공작, 그리고 앙주 백작 리처드가 안부를 전하오. 아크레를 점령한 후 나의 주군은 우리를 떠났소. 그는 천하고 비열하기 짝이 없게 순례의 목적을 저버리고 하느님의 의지에 반하여 자신의 맹세를 배반하였소. 그는 자신과 왕국에 대해 영원한 수치를 범한 것이오. 우리는 야파로 가는 중이오. ... 깊은 신실함과 진실한 신념을 품은 자크 드 아벤은 가장 용맹하고 헌신적인 기사였소.[76]

... '''기필코 성지를 탈환할 때까지 우리는 결코 귀환하지 않겠소.''' 야파에서 우리를 굽어보시오.

1191년 12월, 필리프 2세는 아크레 공성전 승리를 축하 받으며 프랑스로 금의환향했다. 그는 퐁텐블로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는 이날 프랑스 왕이 '''잉글랜드 왕의 영지를 침공하겠단 야심을 드러냈다'''고 기술했다. 필리프는 "리처드가 나를 독살하려 했으며, 살라딘과 손잡고 십자군을 배신할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했다.
이후 그는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1세 드 알자스가 남긴 베르망두아와 발루아를 차지했다. 1192년 1월 20일, 그는 1191년 3월 메시나에서의 협약서를 잉글랜드 왕이 지조흐와 벡쌍을 프랑스 왕에게 넘기겠다는 내용으로 위조하여 노르망디로 가져갔다. 노르망디 세네샬은 이를 의심하여 영유권을 넘기지 않았다.
그러나 이 문서는 침공을 위한 법적 명분이었고 수년에 걸쳐 이루어질 대륙의 앙주 제국 멸망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4.4. 전쟁 준비


1192년 1월, 필리프 2세는 루앙에 유폐된 누나 아델을 풀어줄 것을 엘레오노르 드 아키텐에게 재차 요구했으나 리처드 1세의 승인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즉시 그는 리처드에게 대항할 동맹자들을 모았다.''' , 첫 왕비 이사벨의 부친이자 플랑드르와 에노 백작 보두앵, 툴루즈 백작 레몽 5세, 앙굴렘 백작 임마흐, 불로뉴 백작 르노 드 다마르탱[77] 등이 가세하고 지조흐와 벡쌍의 영주들에게도 압박을 가하여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길링엄의 말을 빌리자면 중립적이던 영주들도 어느 마차던 뛰어들지 않으면 깔려 죽을 판국이었다.
또한 필리프 2세는 '''리처드 1세의 남프랑스 봉신들의 충성심을 뒤흔들었다.''' 아키텐에서는 조프루아 드 랑송을 중심으로 공공연한 반역의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가스코뉴에서는 툴루즈의 지원으로 반란이 터지고 이곳의 세네샬이 리처드의 왕비 베렝겔라의 오빠이자 훗날의 나바라 왕 산초 7세의 도움을 받아 진압했다.
한편 리처드 1세는 코라도 델 몬페라토가 예루살렘 왕위를 이어받는 것을 동의하고 기 드 뤼지냥에게 키프로스를 영지로 주었다.
1192년 4월 28일, 코라도가 예루살렘 왕으로 즉위 직전 '해시시를 피우는 남자들'을 이끌던 '산의 노인'으로부터 암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용의자는 리처드 1세, 살라흐 앗 딘, 코라도의 부인 이사벨 1세의 전 남편으로 좁혀졌으나 산의 노인이 자신의 명예를 걸고 암살 배후는 리처드가 아니라고 밝혔다. 5월 5일, 리처드는 자신과 필리프의 조카인 앙리 드 샹파뉴를 이사벨 1세와 결혼시켜 예루살렘 왕으로 즉위시켰다.
그러나 프랑스 군은 리처드가 코라도 암살의 배후란 소문을 퍼뜨리고 보베 주교는 필리프에게 "'''잉글랜드 왕이 그대를 살해하기 위해 암살단을 파리로 보냈소.'''"라고 허위 급서를 보냈다.[78] 프랑스 연대기 작가는 서신을 읽은 즉각, 왕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중무장한 호위들을 두었다 증언했다.
하단은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의 기록이다.

프랑스 왕이 파리에서 머물고 있었으나 성지에 있는 잉글랜드 왕을 근거 없이 두려워했다. 잉글랜드 왕을 음해하기 위해 일부러 저렇게 행동하는 게 아닐까 의심될 정도였다. ... 지금까지 전해진 바에 따르면 프랑스 왕에게 예전처럼 매우 친밀히 다가간 몇몇 이들이 위험에 빠졌다고 한다.[79]

많은 사람들이 왕의 이 희한한 행동을 의아해 하자 그는 그들을 납득시키고 잉글랜드 왕을 향한 적대감을 선동하기 위해 파리에서 전 대신들을 소집했다.

여기서 그는 잉글랜드 왕에게 불리한 많은 사실을 주장하고 무엇보다도 잉글랜드 왕이 잔인한 암살자들을 고용해 극악무도하게 코라도 델 몬페라토를 살해했다고 확언했다. 그리고 신뢰할 만한 자들이 신변을 삼엄히 호위할 것을 강력히 충고한 서신을 보여주고, 잉글랜드 왕이 자신을 죽이려 음모를 꾸몄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그리고 말했다.

"그런 이유로 평상시보다 많은 염려에 관해 의문을 제기하지 말아라. 하지만 그대들이 여전히 이를 부적절하고 불필요하다 여긴다면 그것을 제거하겠다 결정하라."

또한 이 명백한 배신자로부터 받은 상처를 당장 복수하는 것이 자신의 간절한 소망이라고 덧붙였다. ... 신중한 몇몇 이들이 그의 맹렬한 충동이 '''잉글랜드 왕의 영토를 침공'''하는 것을 잠시나마 저지했다. 그리고 그의 행동에 대해 지나치게 세심하게 경계하고 있다고 말했다.

《잉글랜드 국정의 역사》

1192년 5월 30일, 리처드 1세는 예루살렘 코앞에서 필리프와 존이 공모를 꾸미고 있으니 당장 잉글랜드로 귀환하라는 전갈을 받았다.

이것을 들은 왕은 한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다. 골몰히 생각한 끝에 그는 상속받은 땅과 왕국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귀국하겠다고 말했다.

... (예루살렘을 앞에 두고 기대감으로 들떠서 파티를 벌이는 십자군 막사에서)자정까지 수많은 불빛이 타오르고, 여러 종류의 노래를 부르는 음유시인들이 시끄럽게 돌아다녔다. 오직 왕의 마음만이 깊은 근심에 잠겨 있었다. 그는 화난 기분으로 잠자리를 찾았다.

《리처드 왕의 편력기》

결국 다음날, 리처드 1세는 성지에서 더 머물기로 결정했다. 7월 27일, 리처드 1세의 80명의 군사와 3필의 말이 살라딘의 약 6만 병력을 몰아낸 야파 전투가 벌어졌다.
8월 25일, 부르고뉴 공작 위그 3세가 아크레에서 병사, 9월 2일, 리처드 1세가 살라딘과 라믈라 평화 협정을 체결하고 10월 9일, 아크레를 떠났다. 리처드는 크리스마스에 맞춰 귀국할 것이란 서신을 잉글랜드로 보냈으나 함대가 지중해에서 폭풍우를 만나 불시착을 거듭하였다. 그러다 갑자기 소식이 끊겼다.
12월 28일,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6세가 필리프 2세에게 서신을 보냈다.

'그대가 들으면 기쁘기 그지 없을 소식을 전하오. 우리 제국의 적이자 그대 왕국의 방해꾼, 잉글랜드 왕 리처드가 사랑해 마지않는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드에게 잡혀있소.'

교황이 분노하여 레오폴드 5세를 파문하고 프랑스 왕이 잉글랜드 왕의 영지를 침범하면 성무 금지령을 내리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필리프는 우선 리처드의 투옥 기간을 늘리기 위해 신성로마제국에 로비를 했다.
1193년 1월, '''필리프 2세는 존에게 잉글랜드 왕위를 찬탈하라고 충동질했다.''' 존이 아키텐의 영지 일부와 쎄느강 동쪽 부근의 땅 대부분, 지조흐와 벡쌍을 내놓고 아델과 결혼한다면 그 대가로 대륙의 플랜태저넷령 전체를 넘기겠다고 제안했다. 존은 모든 조건을 수락하고 대륙의 플랜태저넷령에 대해 충성 서약을 했다.
존은 잉글랜드로 건너와 형에 대한 온갖 험악한 소문을 사실처럼 떠들고, 심지어 형이 이미 죽었으니 제프리 2세의 아들인 아르튀르가 아니라 자신이 잉글랜드 왕위를 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윌리엄 마셜과 필리프의 궁정에 심어둔 첩자 덕에 리처드의 소식을 알게된 엘레오노르 드 아키텐이 존의 계획을 결사적으로 막았고 런던의 섭정위원회는 존을 지지하지 않았다.
'''잉글랜드 왕위 찬탈이 실패했단 소식을 들은 필리프 2세는 당장 출군하여 지조흐 요새를 첫 목표로 삼았다.''' 4월 12일, 성주는 순순히 성문을 열고 필리프에게 투항, 역사가들은 사전 모의가 있었던 것으로 보았다. 이 기세를 몰아 노르망디를 관통하여 순식간에 해안지대인 디에프와 르 뜨헤뽀흐에 다다랐다.
필리프 2세와 에노,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의 군세는 노르망디 중심지, 아델이 유폐된 루앙을 포위했다. 루앙 세네샬 레지스터 백작이 도시 방어선을 공들여 구축해 공격이 순탄치 않자, 필리프는 항복을 권유했다. 레지스터 백작은 그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방문할 수 있고 혼자 성 안으로 들어오면 아델을 보내주겠다고 조롱했다.
이를 본 필리프 2세는 격분하여 공성전 무기를 불태우고 포도주 부대를 쎄느 강에 던지고 '''"반드시 루앙을 정복하겠다."'''라고 외쳤다. 즉각 전략을 변경, 일거에 노르망디의 전략적 가치를 자랑하는 요새들을 점령하여 루앙을 언제라도 공격할 수 있는 거리를 확보하는 한편, 뚜헨느와 베리 사이 영지를 차지했다.
신성로마제국 법정은 리처드 1세를 기소하여 죄목으로 시칠리아를 점거하려 한 무력 행위, 키프로스 정복, 코라도 암살 배후를 내걸었다. 리처드는 '''"나는 하느님 바로 아래 계급에서 태어났다."'''라고 외치고 하인리히 6세에게 경의를 거부했다. 당당한 태도로 스스로를 열렬히 변호하여 청중을 감동케 하고, 거액의 보석금을 지불해야 석방될 수 있다고 판결을 받았다.
참고로, 리처드 1세가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드 5세의 뒤른슈타인 성에 수감된 시기를 다룬 트루베르 블롱델드 넬르의 유명한 전설이 있다.[80] 문학 사학자 포스뻬 따비는 흥미로운 점은 실제 인물로서의 블롱델이 필리프 2세에 대해 노래하는 대목이라고 지목했다. 하단은 그 중 일례이다.

사랑의 꿈에서 나의 심장은 위태롭다네.

하느님께서 제게 기쁨을 주지 아니하시면

주저 없이 저는 죽을 것이나이다.

다른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하기 때문이나이다.

이리도 갈망하는 것은 사랑이오.

보답을 바라는 것은 참된 사랑이 아니건만

이 괴로움을 견딜 수 없다오.

아름다움, 날 위한 보답이 될 수 있소.

한 해의 모든 고통은 나를 진정케 하고

대단한 힘으로 나를 말하고 침묵하게 할 것이네.

...

오랜 세월 내 심장은 증오하고 기도할 것이네.

고통이 나를 괴롭게 하지 않았다고 보오?

아닐세! 때때로! 엄청난 광기가 치미오.

다른 어떤 기쁨도 원하지 않는다네.

이것(l.e. 기쁨)이 그토록 많이 사랑스러운 만큼, 이것은 프랑스 왕이오.

그는 세계에서 가장 용감한 남자라네.

숙녀가 아닌 처녀, 하지만 몹시 나를 피하는구려!

달콤한 내 여인에게 노래하고 응한다오.

이것을 떠올리는 건 밤을 위로한다네.

하느님! 저는 죽는 날을 볼 것이나이다.

친구! 신의를 다해 사랑하오!

사랑은 이처럼 나를 위로하고 부축한다네.

나는 그녀의 친절과 순결을 알고 있다네.

나를 두고 가지 말게, 나는 죽을지도 모르오.

하지만 나의 사랑은 몹시 불균형하오.

그를 더욱 용감하게 하기 때문이라오.

블롱델은 죽고 인도된다네.

《여름의 입구에서》

신성로마제국 연대기 작가들과 프랑스 연대기 작가들은 하인리히 6세와 필리프 2세의 접촉에 대해 침묵한 반면,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하인리히 황제가 프랑스 왕과 동맹을 맺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81]

이는 그가 개입한 주교 살해로 말미암아 유발된 반란군을 그렇게나 더욱 잘 제압했을 정도였다.

《호버든의 연대기》

1193년 7월 9일, 망트에서 필리프와 리처드의 사절단이 회담을 열었다. 리처드는 그들을 통해 노르망디 침공을 중단하면 지금까지 얻은 영지를 계속 유지하는 동시에 추가로 다른 영지도 넘길 수 있단 조건을 제시했다. 또한 리처드가 이 영지를 되찾으려면 2만 마르크를 지불하고 조공을 바치겠단 조항이 더해졌다.[82] 필리프는 정복한 영지들을 잘 통합하여 그의 세력으로 흡수했다.
8월 15일, 필리프 2세는 덴마크 왕 발데마르 1세 딸 잉에보어와 결혼식을 올리고 지참금으로 일만 마르크를 받았다.[83] 역사가들은 필리프가 이 결혼으로 리처드를 대항하기 위한 덴마크 함대의 군사적 협업을 도모하려 했고 왕세자 루이가 병치레를 겪었기 때문에 상속인이 더 필요했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결혼식 첫날밤을 치른 이튿날, 왕비 대관식에서 다음과 같은 사건이 벌어졌다.

대관식 절차를 치르는 동안 악마의 농간에 빠진 프랑스 왕은 덴마크의 잉에보어에게 깊은 혐오감을 품었다. 그는 그녀의 눈앞에서 창백하게 질려서 온 몸을 격렬하게 떨었다. 그는 정신적으로 극도의 충격을 받은 것처럼 보였고 그 장소를 떠나고 싶어하는 모든 징후를 보여주었다.

《인노첸시의 업적》

필리프 2세는 대관식이 끝나자마자 덴마크 사절단에게 잉에보어를 돌려보낼 것을 요구했다.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잉에보어는 수녀원으로 보내졌다. 그는 잉에보어와 첫 왕비 이사벨의 가계도를 위조하고 주교들을 설득해 근친혼을 주장하여 일방적으로 혼인을 무효화했다.
결혼식 첫날밤 사건은 미제로 남아있으나, 많은 역사가들은 정치적 문제와 분리하여 필리프 2세의 반응은 성적인 문제로 확언했다.[84] [85] 또한 그가 팔레스타인을 떠난 후 온갖 타각적 불안 증세를 보인 기록들을 근거하여 그곳에서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인해 빈발하는 손떨림 증상, 잦은 병치레, 그리고 남은 평생 신경증에 시달렸으며 첫날밤 사건은 이의 연장선이라고 분석했다. J W. 볼드윈은 필리프 2세가 최소 1190년 리처드 1세, 1193년 아미앵에서 잉에보어와 성관계를 했으며 잉에보어와의 관계를 거론하여 필리프 2세가 '''극심한 성적 학대를 당했다''' 추측했다. 이 이상 언급된 건 없다.
하단은 필리프 2세의 귀국 후를 다룬 기록이다.

그는 용모가 아름답고, 피부가 발그스름하고, ... , 얼굴이 빼어나고 표정이 쾌활하다. 말이 거의 없고, 옷차림이 소탈하고, 잘 먹고 마시는 경향이 있고, 방탕하다. 그러나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

《프랑스의 역사에 관한 수록본》

리처드 1세는 신성로마제국 하게나우로 이송되어 포로로 잡혀 있었고 밝은 모습을 보였다.[86] 신세를 한탄하지만 않고 신성로마제국 인사와 고위 성직자들과 인맥을 다졌다. 하지만 보석금을 모으는 시간은 길고, 그는 루이 7세와 모후 엘레오노르의 딸이자 이부 누나 마리 드 샹파뉴에게 작사한 시를 보내어 심정을 표현했다.

어떤 죄수도 진심을 말하지 않는다오.

슬픔에 젖어 있기 때문이라네.

하지만 그는 위로를 얻기 위해 노래한다오.

나는 많은 친구가 있소만 그들의 선물은 적다네.

그들에게 불명예가 있으리.

두 번의 겨울이 지나도록 나는 죄수로 남아 있다네.

그들은 내가 잉글랜드, 노르망디, 푸아티에, 그리고 가스코뉴의

부하들과 봉신들을 저버리지 않는 걸 알고 있다오.

보석금 때문에 나는 죄수로 남아 있다네.

질책하는 것이 아니라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죄수로 남아 있다네.

...

나의 심장이 몹시 슬프고 아픈 것은

더 이상 놀라운 일이 아니라네.

나의 주군이 내 영지를 가혹함에 빠뜨렸다오.

그가 두 손을 모으고

하느님 앞에서 우리가 함께한 맹세를 떠올린다면

나는 여기서 죄수로 남아 있지 않을 것이네.

...

누이여, 그대의 영지는 보살핌을 받고 보호받고 있다오.

나는 그에게 도움을 호소하오.

그러나 그 때문에 나는 죄수로 남아 있다네.

《어떤 죄수도 진심을 말하지 않는다오Youtube

필리프 2세는 보베 주교를 신성로마제국으로 파견하여 리처드 1세의 석방을 반대하고 포로 생활을 가혹하게 만들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존과 합세하여 재빨리 6만 마르크를 긁어모으고 하인리히 6세에게 더 큰 금액을 지불할 테니 리처드 1세를 넘기든가 아니면 9월 29일까지 수감을 늘려줄 것을 제의했다. 엘레오노르 드 아키텐이 직접 하인리히 6세에게 10만 마르크를 전달했으나 이 때문에 리처드 1세는 석방일인 이듬해 1194년 1월 17일이 되어도 풀려나지 못했다. 필리프는 하인리히 6세에게 전할 서신을 썼다.

'그대는 잉글랜드 왕이 모두에게 위협적인 존재임을 정녕 모르는 것인가? 그의 생명을 대가로 그가 가진 것의 반을 차지할 기회를 이대로 놓칠 것인가?'

그 사이 하인리히 6세는 리처드 1세에게 자신을 잉글랜드에 대한 상위 주군으로 인정할 것과 루앙 대주교 월터를 볼모로 요구했다.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는 잉글랜드만으로 양보하는 것으로 조건을 낮추느라 애를 쓴 엘레오노르 드 아키텐의 설득에 따라 잉글랜드 왕이 조건을 수락했다고 기술했다.[87]

2월 2일 ... 하인리히 황제가 잉글랜드 왕에게 프랑스 왕과 존 백작이 보냈던 서신들을 전했다. 그것을 읽고 잉글랜드 왕이 몹시 심하게 동요하고, 혼란스러워하고, 절망했다.

《호버든의 연대기》

1194년 2월 4일, '''리처드 1세가 풀려났다.'''
필리프 2세는 급히 존에게 서신을 보냈다.

''''자신의 몸을 돌보도록 하시오. 사탄이 풀려났소.''''


4.5. 전쟁의 시작


은 서신을 읽고 당장 파리로 도주했다. 필리프 2세는 그에게서 노르망디와 뚜헨느의 영지 일부를 더 뜯어내고 노르망디 공략에 박차를 가하여 전략적 요충지인 뇌브흑, 에브회, 보드회이를 점령했다. 마침내 루앙에서 10마일이 떨어진 뽕드라흑슈로에 이르었고 협력의 대가로 존에게 에브회를 주었다.
1194년 3월 13일, 리처드 1세는 잉글랜드로 귀국하여 존의 지지자들을 숙청하고 4월 17일, 두 번째 대관식을 치렀다. 리처드는 군자금을 모으고 프랑스 출정을 선포했다. 5월 12일, 리처드가 300척의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노르망디에 상륙, 훗날의 나바라 왕 산초 7세가 석궁병 부대를 이끌고 합세했다.
'''존이 바로 필리프 2세를 배반하고''' 형의 발치에 엎드려 눈물로 용서를 빌었다. 엘레오노르 드 아키텐도 리처드를 달래고 그는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는 사악한 동료들의 꼬임에 넘어간 어린아이일 뿐이다. 너의 조언자는 응당 대가를 치를 것이다."라고 말하고 동생을 공개적으로 용서했다.[88] 그 후 존이 에브회로 달려가 프랑스 수비대를 죽이고 에브회를 형에게 바쳤다.
이에 필리프 2세가 격분하여 보복으로 에브회를 탈환하고 무자비하게 약탈했다. 리처드 1세의 병력이 접근하고 있단 정보를 입수한 즉각, 그는 병력을 차출해 남겨두고 루앙 남쪽 베흐뇌이로 진군했다. 프랑스 연대기 작가는 다음날, 군사들이 왕이 떠나자 철수했다고만 기술했다.
5월 28일, 베흐뇌이 공성전 승리를 코 앞에 두고 노르망디가 필리프의 수중에 떨어지기 일보 직전, 리처드 1세가 분견대를 차출하여 포위망을 기습, 본대를 이끌고 가 필리프 군의 보급로를 끊자 이에 전세가 역전되었다.
5월 30일, 리처드가 에브회에 당도, 수비대는 투항했다. 6월 5일, 빠씨에서 필리프 2세는 자신을 조롱했던 루앙 세네샬 레지스터 백작을 생포했다.
리처드 1세가 노르망디 요새들을 하나씩 탈환, 필리프 2세는 리처드의 아키텐 봉신들을 선동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이 때문에 리처드가 남프랑스로 진군하는 중 6월 27일, 나바라 왕 산초 6세가 서거하여 그의 아들 산초가 왕으로 즉위하기 위해 귀국길에 올랐다. 리처드가 푸아티에로 넘어가려면 필리프가 점거한 로슈를 거쳐야 하고, 리처드는 공성전을 벌이고 로슈를 탈환했다.
필리프 2세는 이 틈을 타서 북프랑스 공략 대신 군세를 재정비하여 동맹군 지원으로 전략을 변경, 남프랑스로 진군했다. 리처드 1세는 정보를 입수하고 벙돔므 평야에 진을 쳤다. 필리프 2세는 프레티발 부근에 진을 치고 리처드 1세에게 서신을 보냈다.

''''내일 그대를 적대하는 무리를 이끌고 방문할 줄 알게.''''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는 왕이 서신을 읽고 기뻐하며 답신했다 기술했다.

''''기꺼이 기다리겠소. 만약 안 오면 내일 아침에 내가 직접 방문하리다.''''

필리프 2세는 그날 밤 막사를 걷고 퇴각했다.
1194년 7월 3일, 리처드 1세가 윌리엄 마셜에게 후발대를 맡기고 직접 필리프 2세를 추격했다.

아침 일찍, 잉글랜드 왕이 무장을 명령하고 교전을 준비했다. '''그는 맹렬하게 추격하여 프레티발 숲에서 프랑스 왕의 후위를 따라잡았다.''' 프랑스 왕의 많은 군사가 죽고 포로로 잡혔다. 그곳에서 잉글랜드 왕이 프랑스 왕의 막대한 보물을 탈취하고 '''심지어 프랑스 왕의 인장과 그와 백작 존을 지지한 배반자 명단까지 손에 넣었다.'''

'''프랑스 왕은 황급히 그 길을 벗어나서 교회로 숨어 들어가 간절히 기도를 올렸다.''' 잉글랜드 왕은 이 사실을 모른 채 프랑스 군사들을 닥치는 대로 살해했다. 그는 위협적인 숨소리를 내며 프랑스 왕을 찾았고 사생결단을 내거나 아니면 생포할 것처럼 보였다.

한 플랑드르인이 프랑스 왕이 멀리 떠난 것을 보았다고 거짓말을 했다. '''이 말에 속은 잉글랜드 왕이 가장 날쌘 말로 바꿔 타고 노르망디 국경 지대까지 추격했다.''' 그가 탄 말이 쓰러지기도 하여 돌아올 때 용병대장 메르카디에의 말을 타야 했다.

《호버든의 연대기》

이 전투가 바로 '프레티발 전투'이다. 프랑스 연대기 작가는 이 전투로 귀한 보물을 잃어버렸다고만 기술했다.[89]
리처드 1세는 남프랑스로 진군하여 조프루아 드 랑송과 앙굴렘 백작 임마흐의 반란을 단번에 격파하고 기사 3백 명과 병사 4만 명을 생포했다. 필리프 2세는 북프랑스로 진군하여 리처드의 봉신들의 군세를 와해시키고 존과 아룬델 백작의 수하물을 탈취하여 프레티발의 굴욕을 되갚았다.
7월 23일, 교황이 파견한 사절단의 중재로 띠예흐에서 두 왕의 대리인이 다음해 1195년 11월 1일까지 휴전하기로 합의했다.
그럼에도 분이 풀리지 않았던 필리프 2세는 리처드 1세에게 각국의 기사 5명을 결투시켜서 결론을 짓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리처드가 두 왕이 참여해야한다는 조건을 걸자 포기했다.

4.6. 4년 만의 재회


1195년 초, 하단은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의 기록이다.[90]

잉글랜드 왕이 시농에서 머무는 동안, 15명의 암살자가 왕궁으로 왔다. 그러나 그들이 잉글랜드 왕을 살해하기 위해 접근을 시도했을 때, 그들 중 몇몇이 붙잡히고 수감되었다. 그들은 프랑스 왕의 명령을 받았다고 자백했다. 그러나 잉글랜드 왕은 그들의 동료들이 마저 체포되는 것과 같은 그러한 때까지 이 일이 프랑스 왕의 음모임을 모르는 것처럼 굴고, 판단을 표시하는 것을 미루었다.

《호버든의 연대기》

1195년 3월, 교황 첼레스티노 3세가 필리프 2세와 잉에보어의 혼인 무효화를 무효화하고 필리프는 이 결정을 무시했다. 덴마크 사절단이 이 문제로 교황과 회신하느라 부르고뉴를 통과하자 필리프는 즉각 부르고뉴 공작 외드 3세에게 접근했다. 외드 3세는 사절단이 부르고뉴를 지날 때 그들을 감옥에 처넣고 서신을 압수했다.
그런데 이후 부르고뉴 공작 외드 3세도 부인 포르투갈 공주 테레사와 혼인 무효화를 했다. 18세기 학자들은 정치적 문제와 별도로, 개인적 사유로 자식이 없던 것도 있거니와 필리프 2세를 향한 남편의 맹목적 호의가 아내를 격분케 하여 결혼이 파탄이 났다고 추측했다.
1195년 4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한 은자가 잉글랜드 왕을 찾아가 그에게 경고했다.

"소돔의 멸망을 기억하여 불법적인 성관계를 그만두시오. 그렇지 않으면 그에 마땅한 하느님의 벌을 받을 것이오!"

그러나 잉글랜드 왕은 은자의 말을 무시했다. 얼마 후 그가 목숨이 위급할 지경으로 병이 악화되자 은자의 경고를 기억했다. ... 잉글랜드 왕은 주교들 앞에서 죄를 고백하고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는 죄를 뉘우치고 오랫동안 찾지 않았던 자신의 아내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금지된 성관계를 포기하고 아내와 어울렸다. 그들의 육신은 하나로 결합하고 하느님께서 왕의 몸과 영혼에 건강을 내리셨다.

《호버든의 연대기》

C. 재거는 소돔을 규정하지 않았으나, 이 기록과 대조하여 1187년 6월 호버든이 목격한 샤토루에서의 필리프 2세와 리처드 1세의 관계는 소돔이 아니라고 결론지었다. 플로리는 소돔을 동성애로 규정, 리처드가 동성애를 했다고 주장했으나 그 논거를 대기 위해 무리하게 사료를 끌어와 자의적 규정을 했다는 지적이 있다. 최근에는 존 M. 쉡이 소돔을 '임신을 유발하지 않는 모든 종류의 성행위'로 주장한다. 현재까지의 연구에 비추어 소돔 사건을 성적 성향의 근거로 포함하기에는 논란이 있다.
확실한 점은 소돔을 저질렀다는 경고를 들은 잉글랜드 왕 중 유일한 선례가 윌리엄 루푸스였다는 것이다.[91]
이후 리처드 1세는 콘월과 데번에서 나오는 수익을 베렝겔라에게 주었다.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는 부부가 함께 르망 근처를 방문하고 그곳의 영지를 사들여 집을 짓기 시작했다고 기술했다.[92]
1195년 여름,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가 잉글랜드 왕 리처드에게 상호간 사랑의 증표로 대단한 가치를 지닌 거대한 금관을 보냈다. 그리고 그가 한 충성 서약에 대해 '''프랑스 왕의 영토를 침공'''할 것을 요청했다. 황제는 그가 프랑스 왕으로부터 입은 피해를 복수하고자 한다면 직접 충분한 도움을 줄 것이라 했다. 그러나 잉글랜드 왕은 이 전언에 어떤 숨겨진 배반이 있을 것을 염려하고, 그 도움이 무엇인지 묻기 위해 엘리 주교이자 고문인 기욤 드 롱샴을 황제에게 사절단으로 파견했다. 왜냐하면 '''잉글랜드 왕이 황제가 프랑스 왕을 복종시키길 무엇보다도 원했다는 것을 잘 간파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는 황제와 프랑스 왕 사이에 '''동맹이 형성'''되면 그 모든 것은 자신의 손해가 될 것이라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사절단이 프랑스 영토를 지날 때 필리프 2세가 그들을 억류하려 했으나 실패, 필리프는 이것으로 리처드가 띠예흐 협정을 위반했다고 선언하고 노르망디를 기습했다. 필리프가 주요 전략적 요충지인 보드회이를 침공, 공성전을 벌여 요새들을 파괴하자 리처드가 군사를 이끌고 그곳에 당도했다.
1195년 7월, 리처드가 회담을 위해 필리프를 방문했다. 아크레에서 헤어진 후 4년만의 대면이었다.
적이라도 이때는 전투를 중지하는 것이 당대 관례였으나 필리프 2세는 '''요새 벽 밑에 땅굴을 파게 했다.'''

두 왕이 요새 바로 옆에서 회담하던 중 요새의 '''커다란 벽면이 엄청난 굉음을 내며 무너졌다.''' 이를 본 잉글랜드 왕이 극도로 분노하여 당장 회담장을 떠났다.

그 틈에 프랑스 왕과 그의 군사들이 재빨리 퇴각했다. 잉글랜드 왕이 군사들을 이끌고 프랑스 왕을 추격했다. 프랑스 왕과 그의 군사들이 쎄느 강을 건널 때 다리가 부서져 거의 익사할 뻔했다. 그들은 힘겹게 육지에 다다르고, 강둑에 막사를 세웠다.

잉글랜드 왕은 그 요새로 돌아가 프랑스 왕이 남기고 간 많은 것들을 차지했다. 그리고는 바다 양 쪽에 위치한 자신의 모든 영토에서 대규모 군사를 일으켜 프랑스 왕의 영토로 침입했다. 저항하는 수많은 이들을 학살하고, 풋곡식을 거두고, 포도나무와 잘 익은 열매가 열린 나무들을 뿌리채 뽑았다. 그리고 도시들을 불태웠다.

《프랑스의 역사에 관한 수록본》

1195년 7월 18일, 카스티야 왕 알폰소 8세가 야쿱 알 만수르에게 패배한 전투인 알라르코스의 재앙이 전 기독교 세계에 전해졌다.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와 프랑스 연대기 작가는 이 때문에, 잉글랜드 왕과 프랑스 왕이 휴전했다고 기술했다.
1195년 8월, 두 왕이 회담을 열었다. 이때 리처드는 필리프에게 누나 아델을 돌려주었다. 제프리 2세의 딸 엘레오노르 드 브르타뉴와 필리프의 왕세자 루이의 결혼 협상이 오가고 리처드는 질녀의 지참금으로 지조흐, 부드몽, 노르망 벡쌍, 베흐농, 이브히, 빠씨 등의 영지와 2만 마르크를 주겠다고 했다. 필리프는 오말르, 오슈, 아흑슈와 노르망디 요새 몇 채를 반환하기로 하고 최종 합의는 11월 1일에 의결하기로 미루어졌다.
8월 20일, 필리프 2세는 누나를 뽕띠유 백작 기욤 3세와 결혼시키고 지참금으로 아흑끄와 우를 주었다.[93]
이즈음 산의 노인의 서신이 필리프 2세에게 전해졌다.

우리는 잉글랜드의 영화로운 왕 리처드가 몬페라토 후작을 살해했다고 수많은 이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잘못된 의심에 가려진 그의 명성을 씻기 위해 여태까지 우리가 감췄던 이 사건의 진실을 선언한다. 우리의 행동들로 무고한 이가 고통받지 않기를 원한다. ... 몬페라토 후작이 우리를 불쾌하게 하고 충고가 그를 바꾸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의 손으로 정당하게 그를 죽였다. ... 또한, 우리는 잉글랜드 왕이 우리를 사주하여 프랑스 왕 주변에 매복을 심었다는 공개적으로 알려진 말을 들었다. 이는 의심할 여지없이 거짓이자 가장 근거 없이 날조된 의심이다. 신께서 그의 결백을 알고 계시며, 우리는 그런 대우를 받아서는 안 될 이를 향한 음해를 좌시하지 않는다. 작별을 고한다.

하단은 당대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들의 기록이다.

프랑스 왕이 산의 노인의 서신 낭독을 들은 즉각 '''잉글랜드 왕의 무죄를 선언했다.''' 그리고 그가 사랑하는 친우인 후작 암살 사건에서 잉글랜드 왕을 오판했기 때문에 조만간 어려움 없이 그와 동맹을 맺을 수 있다 말했다.

이 무렵 프랑스 왕은 잉글랜드 왕의 누이이자, 시칠리아 왕의 배우자였던 조안을 비롯해 몇몇 독일 처녀에게 청혼했다. 그러나 그녀들이 덴마크 소녀(잉에보어)의 최근 사건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거절했다. 나는 프랑스 왕이 덴마크의 가장 고귀한 소녀를 얼마나 수없이 거부했는지 들었고, 그 예들은 나를 깜짝 놀라게 한다. 프랑스 왕은 한 백작의 딸 외에 독일의 고귀한 몇몇 쳐녀와의 결혼을 진정으로 바라고 고대했으나 연이어 퇴짜맞았다. .... 덴마크 왕 크누트가 누이의 불명예를 심장에 새겼다.

... 휴전 중, 때때로 잉글랜드 왕의 심장이 쉽게 누그러져 프랑스 왕과의 화해가 짐작되었다.

... 잉글랜드 왕과 프랑스 왕 사이의 평화가 하인리히 황제를 불쾌하게 했다.

그런데 11월 1일, 다음과 같은 일이 벌어졌다.

두 왕이 약속한 시간은 아침 아홉 시였다. 그러나 아침 여섯 시에 약속한 장소에서 잉글랜드 왕이 프랑스 왕을 만날 것을 서둘렀다. 랭스 대주교가 나와서 그를 맞이했다.

"왕이시여. 안으로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지금은 프랑스 왕이 대신들과 자문을 나누는 중입니다. 그러니 이렇게까지 재촉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 잉글랜드 왕은 랭스 대주교의 말을 믿고 성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아홉 시간이 지나도록 프랑스 왕이 오기를 계속해서 기다렸다. 잉글랜드 왕은 더이상 그곳에서 기다리지 않고 다시 약속한 장소로 갔다. 그리고 프랑스 왕에게 가까이 다가가 말하려 했다.

바로 이 때 보베 주교가 프랑스 왕 바로 앞에서 잉글랜드 왕을 가로막고 말했다.

"나의 주군은 당신을 위증과 불성실로 고발한다. 당신은 아침 아홉 시에 오기로 했으나 오후 세 시가 넘어서 왔소. 나의 주군은 당신을 거절한다."


두 왕이 각자의 영지로 돌아가고 전쟁이 재개됐다.

4.7. 그 후


두 왕이 전쟁과 휴전을 반복한 끝에 5년간 휴전 협정을 체결했다.
자세한 내용은 리처드 1세 항목 참조.
필리프 2세의 주요 동맹국이자 대륙의 세력 균형자에 가까운 역할을 한 플랑드르, 툴루즈를 연이어 이탈시키고 신성로마제국 황위 계승에도 관여한 리처드 1세의 정치적 행보는 세간에 알려진 것과 반대로 우수한 정치적 식견과 기민한 외교술을 방증한다. 여기에는 헨리 2세가 일생을 바쳐 일구어낸 개혁과 축적한 국력이 원동력이 되었고, 리처드가 잉글랜드를 비운 사이 섭정으로 임명한 휴버트 월터의 내정 능력을 십분 발휘하게 했다. 또한, 잉글랜드보다 몇 배의 병력을 동원했던 살라흐 앗 딘도 경악한 리처드 1세의 개인 용력과 별도로 야전 사령관으로서의 역량은 당대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수준이었고, 필리프 2세가 권모술수를 동원하여 리처드를 죽음에 이르게 한 상황 조성을 하기까지 전면전을 피한 이유는 전력으로도 그리고 국력으로도 열세임을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상단의 사례로 1197년 리처드 1세가 대륙의 세력 균형자 역할을 한 플랑드르 백국을 필리프 2세의 동맹으로부터 이탈을 유도한 방책 즉, 교역 봉쇄와 같은 외교경제압력을 가동하고 거액의 보상금과 같이 유인조치를 구사하는 데 전념할 수 있었던 주요 원동력은 국력에 근간한다. 이를 최대한 살릴 수 있던 것이 군사적 능력을 포괄한 리처드 1세의 개인 협상력일 것이다. 다만, 1198년 필리프 2세가 지조흐에서 리처드 1세로부터 기습받아 참패하고 궁지로 몰렸던 때, 거대 동맹 연합을 건설한 리처드 1세가 부르고뉴 공작 외드 3세에게 제프리 2세 딸 엘레오노르와의 결혼뿐만 아니라 거절 못 할 당근을 제시하여 동맹을 꾀한 전적이 있으나, 필리프 2세가 외드 3세에게 개인 교섭 능력을 발휘하여 실패로 돌아간 결과가 존재했다.

5. 존 왕과의 대립


1199년 4월 6일, 리처드 1세가 리모주 자작의 농성을 제압하던 중 석궁에 맞은 상처가 악화되어 죽자 이 잉글랜드 왕으로 즉위하였다.
이렇듯 플랜태저넷 가문을 우환에 빠뜨려 약화시킨 필리프 2세는 존의 실정을 명분으로 삼아 봉건법 위반에 따른 존의 대륙령의 몰수를 선언했으며[94] 노르망디로 상륙한 존의 군대를 격파하고, 이후 앙주, 멘, 푸아투, 투렌 등 대부분의 노르망디와 아키텐 영토를 점령하여 왕령지로 삼았다.
이후 복수의 칼을 갈던 존은 당시 필리프 2세의 계략에 의해 자신의 영역을 왕실 직할지로 빼앗기게 된 페르디낭 드 부르고뉴[95]가 필리프에게 큰 불만을 품게 된 것을 알고 그와 연계하여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오토 4세를 끌어들이고 이 외에도 판 플란데런 가[96], 레히나르 가[97] 등의 여러 영주 세력들을 끌어들여 대규모 연합군을 구성, 약 3만에 달하는 전력으로 프랑스를 침공하였다.
이 때 프랑스 남부 지방을 순회 중이어서 자신의 본거지이자 수도인 파리를 비우고 있던 필리프는 존이나 오토 4세의 예상과는 달리 재빠르게 남부 친국왕파 영주 세력들을 규합하여 1만 5천여명에 달하는 병력을 구성하고 굉장한 속도로 북쪽으로 진군, 느려터진 진군 속도로 파리 북부를 제압하고 발랑시엔 인근에나 와있던 오토 4세의 연합군을 부빈 평야에서 맞닥뜨림으로써 결전을 강제하였다.[98]
이 부빈 평야에서 필리프 2세의 총 지휘 하에 유드 드 부르고뉴, 로베르 드 드뢰 등의 영주들이 가세한 7천여명의 프랑스 군이 오토 4세의 총 지휘 하에 윌리엄 롱제스피[99], 페르디낭 드 부르고뉴, 용기공 앙리 레히나르, 르노 드 다마르탱 등이 참전한 신성 로마, 잉글랜드, 플랑드르 연합군 9천명을 상대로 압승을 거두었으며 연합군은 다마르탱이 인솔하던 장창병들이 마지막 발악에 가까운 용전을 선보인 것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완벽한 졸전을 선보이고 프랑스 군에게 압도당하며 대패했다. 이 전투를 부빈 전투라고 하며 이 전투에서 패한 연합군 측은 오토 4세를 비롯한 신성 로마 제국 수뇌부만이 도주에 성공하고 연합군의 나머지 핵심 수뇌 인원들의 상당수가 전사하거나 필리프에게 사로잡혀[100] 감옥살이를 하거나 형장의 이슬이 되었다.[101]
이 전투 이후, 프랑스와 카페 왕조의 위용은 전 유럽에 드날리게 되었으며 필리프 2세가 원했던 왕권 강화 계획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후 필리프에게 거의 모든 프랑스 내의 영지를 빼앗기게되고 잉글랜드 본토 외에 남은게 없게 된 존이 계속 잉글랜드 국내에서 찌질거리다 잉글랜드 귀족들이 도저히 참지 못해 들고 일어나 존 왕을 협박해서 얻어낸 것이 마그나카르타, 대헌장이다.

6. 내정


그의 치세 대부분이 플랜태저넷 왕가와 싸워 땅을 뜯은 것으로 점철된 것처럼 보이겠지만 국가 내정 운영 면에 있어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명군이었다. 오히려 국토의 확장보다도 필리프 2세를 높이 평가하는 더 큰 요소는 바로 그의 유능한 행정 운영과 선진적인 정책 시행이었다. 이는 옆 나라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와는 상당히 대조되는 요소이다.
필리프 2세는 치세 동안, 자치 도시(코뮌)를 조성하였고[102] 영주 세력들을 견제할 수 있는 관료 집단[103] 및 직속 슈발리에[104]들을 육성하였다. 이들 관료들은 자치 도시의 부유한 시민들로 구성된 바이이(대관), 기사 계급으로 구성된 세네샬(지사)이라 하는데, 왕령지의 수입을 관할하며 지방 유력자들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역할을 맡았다.[105] 그리고 일종의 재지 영주층인 '프레보'[106]들을 억제하고 직할지의 관료 위주 행정 체계 구축을 이룩함으로써 초기 봉건제의 문제점을 최소화하며 중앙 집권을 강화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정책은 왕령지의 대대적인 확대와 더불어 왕실에 직접적인 세수 수입 증대를 불러일으켰으며 이러한 부의 증진은 필리프 2세가 시도한 여러 건설 사업, 정책 시행 등에 차질없는 재정적 바탕이 될 수 있었다.[107] 또한 도시의 발전과 관료 집단의 직할지 통제, 프레보 세력의 약화라는 효과들과 맞물려 국가의 전반적인 경제적, 정치적 발전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그 자신의 본거지였던 파리를 수도로서 크게 확장시켰으며 대학을 대대적으로 지원 및 보호하는 등[108] 파리의 도시 미관에도 신경을 써 카페 왕조의 권위를 대내외적으로 더욱 크게 신장시켰다.

7. 평가


'''"약삭빠르고 예리하고 교활하고 수완이 뛰어나며 사람을 조종하는 데 능수능란한 통치자."'''

존스 홉킨스 대학(The Johns Hopkins University) 교수 J W. Baldwin(1929~2015)

말 그대로 제대로 된 정치가. 오늘날 프랑스의 토대를 세웠다고 말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이다.[109] 용맹함과 낭만적인 성격 덕분에 여러 서사시의 주인공이 되었지만 정치나 국가 내정은 개판 5분 전으로 처리한 리처드 1세와는 달리 정치적 술수와 계략을 동원하여 프랑스 왕실 직할지를 넓혀 왕권을 강화 시키고 프랑스에서의 잉글랜드의 영향력을 크게 축소 시켰다. 전쟁에서도 비록 그리 많은 전투를 하지는 않았지만 부빈 전투와 같은 굵직한 결정적 전투에서 으레 승리를 거두며 거의 패하지 않는 명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국가 내정 분야에 있어서는 위에서 볼 수 있듯이 여러 선진적인 정책을 실시하고 이를 뒷받침할 재정을 확보하는 것에도 성공하였기에 이는 이후의 1세기 간 카페 왕조가 경제적, 정치적 전성기를 맞이하는 기반이 되었으며[110] 옆 나라 독일이 14, 15세기가 될 때까지 계속 깡촌으로 있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 이 무렵 신성 로마 제국은 땅만 넓었지 인구상으로는 프랑스의 3분의 1도 안되는 빛 좋은 개살구와 같은 국가였다. 필리프 2세 이전까지의 프랑스와 달리 꽤 강력한 황권 덕분에 대외적인 위상을 갖출 수 있었던 것뿐. 지금의 독일 인구를 생각하면 놀라울 따름이다. 참고로 현대 독일의 위엄쩌는 인구는 14세기 이후 급속도로 발전한 독일 지역의 상공업 덕분이다. 13세기 이후 17세기까지 독일의 인구는 무려 3배 이상 증가하는 반면 프랑스의 인구는 불과 20% 정도 증가하는데 그친다.[111]
개인적인 정략과 계략, 권모술수의 정교함도 뛰어났다. 헨리 2세와 그의 아들들인 리처드, 존의 사이를 이간질하여 자신은 손 하나 까딱 안하고 까다로운 적수인 헨리 2세를 제거한 것을 비롯, 남프랑스의 대영주 가문인 툴루즈 가문을 이용하여 플랜테저넷과 카페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강대한 아키텐 가문을 견제하였고, 그러면서도 이러한 아키텐 가문의 인사들을 선동하여 헨리 2세가 죽고 리처드 1세가 3차 십자군에 종군하자마자 잉글랜드령 남프랑스를 혼돈스러운 상황으로 몰아갔으며, 상대적으로 약한 일대의 프레보들을 제거하며 다량의 토지를 왕령지[112]로 입수함에 따라 그 자신의 군사력을 증진, 이를 바탕으로 주변의 영주 세력들의 영지를 강압적으로 전봉 시키거나 반발할 경우 무력으로 짓밟아 제거하면서 자신의 직할지를 지속적으로 늘려나갔으며[113] 리모주 자작이 리처드에게 대항하여 끝내 리처드의 죽음을 초래한 리모주 샬루-샤브롤 공성전의 배후에 필리프가 있었다는 설이 제기될 정도였다.
전쟁에 있어서도 결정적인 상황에서는 대부분 승리했다. 리처드를 포함한 동 시대의 명장들에 비해서 필리프는 전술적으로 특출나다고 하기는 어려우나, 기본적으로 상대하는 적수에 맞춘 대국적인 견지와 전략적 재능이 뛰어났다.[114] 강대한 플랜테저넷 왕조를 무너뜨림에 있어서도 다짜고짜 전쟁을 벌이는 것이 아닌, 혈통과 클레임 명분을 이용하여 지방 영주들을 자신의 편으로 포섭하거나 최소한 플랜테저넷 왕조에 반항하게 만들며 자신이 유리해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지속적으로 조성하였으며 리처드 1세가 끝내 살라딘과의 승부를 내지 못하고 프랑스로 복귀했을 때에는 리처드 1세의 실력을 정확하게 판단하여 그와의 전면전을 최대한 회피하면서 끝내 차도살인의 형식으로 리처드 1세의 죽음을 유도하였으며 리처드가 사망하자마자 곧바로 플랜테저넷 가문에 대한 전략을 전면적인 공세로 순식간에 전환하면서 이제 막 즉위한 존 왕의 군대를 철저하게 박살내고 잉글랜드의 프랑스 대륙령 영토를 거의 모조리 순식간에 집어삼켰음은 필리프 2세 본인의 전략적 식견의 뛰어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시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유리한 위치에서 결전을 강제했다고는 하나 애당초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는 것 자체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이순신 등에게서도 자주 보이는 분명한 명장의 자질이다.[115] 게다가 샤또 가야르 전투에서는 7개월 간 공성 준비를 하여 단 1달만에 난공불략인 그 샤또 가야르를 함락하였고 수적으로 거의 두 배 가까이 열세에 있었던 부빈 전투에서조차도 신성로마제국과 잉글랜드 연합군을 격파하며 필리프는 전술적으로도 뛰어나면 뛰어났지 결코 모자란 사람은 아님을 증명했다.
이후 리처드 1세의 정치, 외교적 능력이 일반의 오해와 달리 뛰어났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이런 리처드 1세를 상대하고 결국 죽게 만드는데 일조한 필리프 2세의 정략적 능력이 매우 대단했음이 드러난다. 지금까지 인식되어온, 싸움만 잘하지 외교, 정치에서 무능한 이를 편하게 상대해온 것이 결코 아니였던 것이다.

8. 그 외


  • 헨리 2세의 적자들과 절친하였고, 이들 중 리처드 1세와는 동성 연인 관계였다는 의혹이 있다. 1180년 초, 리처드가 알려지지 않은 여인에게서 태어난 서자의 이름을 필리프로 짓고 정황상 의미심장하다는 역사가들의 의견이 있지만[116] 리처드는 청년왕 헨리와 제프리 2세가 살아 있을 때 필리프의 동맹 순위에서 매번 뒷전이었다. 필리프 2세는 자식이 최소 6명이며 시칠리아에서 리처드 여동생 조안에게 관심을 보이거나 '여인으로부터 기쁨을 찾았다'는 당대의 기록이 있고, 1196년에 중혼한 세 번째 왕비 아녜스와 필리프 2세의 사랑은 당시 서유럽의 추문이었으나 그만큼 깊었다고 한다. 과거 리처드 1세의 카테고리 '그 외'의 이전 항목에 "자기 애인을 추기경으로 임명했던 프랑스의 필리프 2세"란 서술이 있었지만, 그 시절 프랑스 왕에게 성직 서임권이 없었다.
  • 필리프 2세는 왕세자 시절 헨리 2세리처드와 악연이 있었다. 루이 7세와 헨리 2세의 합의로 리처드가 프랑스 궁정으로 보내져 왕세자인 필리프와 자라기로 예정되었으나, 헨리 2세는 이를 따르지 않았다.[117]
>두 왕이 잉글랜드 왕의 아들 리처드를 프랑스 왕에게 인도할 것을 동의했다. ... 그리하여 그들이 목적지로 떠났다. 잉글랜드 왕이 길을 가는 중, 프랑스 왕의 축복받은 아들 필리프가 그에게 보내졌다. 그를 데려온 이들이 말하길, 왕이 그를 애절하게 바라보고 상냥하게 다루고 황급히 돌려보냈다고 한다. 구경꾼들이 대단히 놀란 가운데 왕이 서둘러 가버리는 순간, 하느님이 소년을 지시하시어 잉글랜드 왕에게 프랑스 왕과 땅, 그리고 자신(i.e. 필리프)을 사랑하라 권고했다. 왜냐하면 이 방법으로 그(i.e. 필리프)가 하느님과 인간의 사랑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왕이 그와 동행하여 리처드를 인도하길 기다렸을 때, 프랑스 왕과 대신들은 이 모든 문제에서 기만당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후 필리프가 헨리 2세를 다시 만났을 때,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두 왕이 회담을 열고 그곳에 있던 프랑스 왕세자가 가만히 그들을 바라보았다. 잉글랜드 왕이 부왕을 속이고 선의를 이용하는 것을 보았을 때, 그가 격렬하게 몹시 슬퍼하고 분노했다. 그리고 잉글랜드 왕 면전에서 이렇게 말했다.
>
>"이보시오. 내 맹세컨대, 언젠간 반드시 당신이 뺏어간 모든 것을 우리가 되찾을 것이오!"
  • 필리프 2세는 브르타뉴 공작 제프리 2세의 아들인 아르튀르는 꽤 아꼈던 반면, 제프리와 리처드 1세의 조카이자 리처드를 아주 빼닮은 오토 4세는 싫어했다고 한다. 오토는 필리프 2세를 극도로 적대하여 이로 말미암은 불면증을 앓았다고 하며 심지어 그에 관한 말이 나오기라도 하면 공공연히 분노로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고 한다. 신성로마제국 연대기 작가는 그런 오토 4세가 필리프 2세의 도발에 넘어간 일화를 기록했다.
>오토 황제가 그의 숙부 리처드 왕이 준 대량의 금과 수많은 말들을 가지고 독일 왕으로 즉위하기 위해 길을 떠나던 도중, (리처드와 상의 없이)프랑스 왕에게 안전 통행권을 허락받고 그를 방문했다. 그가 오토를 맞이하고 단둘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갑자기 그가 이렇게 말했다.
>
>"그대가 로마 황제로 선출될 것이라 들었네."
>
>오토가 대답했다.
>
>"그대가 들은 건 틀림없는 사실이오. 이 일은 하느님의 손에 달려있을 것이오."
>
>이에 왕이 말했다.
>
>"그 대단한 영광을 그대가 누릴 것이라 믿어선 안 되지. 그대의 지지자가 색슨인뿐이면 어찌할 텐가? 내가 원하는 말을 준다면 그대가 황제가 되었을 때 내 그대에게 파리를 주리다."
>
>오토가 리처드 왕으로부터 받은 말들 중에는 특별히 아름다운 말 한 필이 있었고, 바로 그것을 프랑스 왕에게 주었다. 이 이야기를 반복해서 오토 황제를 모욕하는 것은 내 의도가 아니다.
  • 즉위 초 필리프 2세는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1세 드 알자스[118]를 가까이 하여 외숙 샹파뉴 가문의 독주를 견제했다. 1180년 4월 필리프 1세는 질녀이자 에노 백작 보두앵의 딸 이사벨을 필리프 2세의 배필로 주선하여 둘이 상속인을 생산하는 조건 하에 유증 형태로 아르투아를 지참금으로 주었다.[119] 그러나 필리프 2세가 1180년 6월에 헨리 2세와 동맹을 맺은 즉시 필리프 1세를 내치자 필리프 1세는 샹파뉴, 블루아, 부르고뉴와 연합하여 전쟁을 일으키고 신성로마제국까지 끌어들이려 시도했으나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는 필리프 2세를 지지했다. 그의 첫 결혼 목적은 영토 확장, 재혼은 필리프 2세를 향한 복수 발판 마련이었으나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필리프 1세는 적자가 없었고[120] 이는 필리프 2세가 플랑드르 영지 상속 문제에 관여할 빌미가 되었다.
  • 1184년, 필리프는 첫 왕비 이사벨 드 에노[121]의 정치적 가치를 저울질하여 일방적으로 이혼하겠다 선언하고 샹파뉴 가문은 모두 그의 편을 들었다. 이사벨은 법정 출두 직전 허름한 옷을 입고 맨발로 파리의 군중들에게 호소하여 길에서 필리프와 고관들과 대치하여 길을 막아세웠다.[122] 하지만 필리프는 여전히 이사벨에게 무관심했고 에노 연대기 작가는 "그 이유를 알고 있던 왕비가 눈물을 흘리며 부친인 에노 백작 보두앵에게 남편을 도울 것을 간청하고 그가 딸의 뜻을 따르기로 하자 프랑스 왕이 바로 태도를 바꾸어 왕비를 사랑으로 대했다."라고 기록했다.
  • 역사가 메즈헤는 1185년[123] 프랑스 연대기 작가의 "프랑스 왕이 트루베르에게 주는 것은 하느님을 배반하는 것이라 말하고 더 이상 자신의 궁정에서 그들을 접대하지 않겠다 선언했다. 그리고 평생 빈자들에게 그의 옷을 나누어 주겠다고 맹세했다."기록을 근거로 트루바두르로서 명성을 날린 리처드 1세의 남프랑스 궁정과 정반대로 필리프 2세의 북프랑스 궁정은 따분했다 묘사하고, 대부분의 학자들도 그가 음악에 큰 열정이 없었다고 확언했다. 이와 달리, 빠스끼에는 그런 필리프 2세가 직접 노래를 청하고 기쁘게 해 줄 정도로 각별히 대했다 알려진, 플랑드르 출신 트루베르를 언급했다. 당시 북프랑스 유명인사로 천재, 쾌락주의자, 세상을 제 발 아래로 여겼던 이 트루베르는 필리프 2세의 궁정에서 머물며 그의 후원을 받았으나 1185년, 시토 수도회에 입회하고[124] 고행과 신실함의 모범이 되었다고 한다. 하단은 수사가 된 그가 트루베르였던 과거를 다룬 서신이다.
>그(i.e. 나)는 노동을 위한 남자가 아니라 세계를 뛰놀며 날아다니는 새에 걸맞는 남자로 태어나, 혹은 감언으로 혹은 가혹함으로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고자 한 어떤 이 도처에서 어슬렁거리며 노렸기 때문이오. 이보게. 수도원에서는 모든 세계가 수도원일 뿐만 아니라 감옥일세. 하지만 그 자체로 빛처럼 빛난다오. ... 온 세상의 즐거움을 누려도 영혼을 잃는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 당대 연대기 작가들의 기록과 왕실 재무 기록표에 의하면, 필리프 2세는 일평생 비싼 옷에 관심이 전혀 없고 옷차림이 소탈했으며 가난한 이들에게 자신의 옷을 나누어 주었다고 전해진다. 참고로 한편, 잉글랜드 대법원장 래널프 드 글랜빌이 헨리 2세에게 하단의 서신을 보내기도 했다.
>아름다움을 향한 왕자님의 관심이 진정으로 충격적이나이다. ... 만약 필리프 왕의 옷을 손아귀에 넣을 수만 있다면, 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그럴 것이나이다.[125]
  • 기랄두스 캄브렌시스는 《군주에 대한 지침서》[126]에서 필리프 2세의 출생 직후 한 저명한 성직자가 남긴 그의 훗날에 대한 예언 중 외양에 대해 '모든 이가 감탄하여 바라볼 정도로 너무 대단한 출중함과 위엄있게 큰 키[tantus excellentia, proceræ staturæ majestatem, cunctis admirantibus]'로 기술하고, 이 예언이 《군주에 대한 지침서》를 집필할 무렵 당시의 틀림없는 사실로 증명됨을 인정했다.
  • 왕세자 시절, 소녀와 수간을 하는 사자를 선물받았을 때 당대인들에게 수간의 죄의식을 일깨우기 위해 도살했다고 한다.
>나는 파리에서 어떤 남자가 프랑스 왕세자 필리프에게 사자 한 마리를 선물하는 것을 보았다. 이 사자는 한 소녀에게 홀딱 반하여 그녀에게 교미하는 버릇이 있었다. 행여 사자가 우리를 탈출하고 극도로 격분하여 아무도 감히 접근할 수 없을 지경이라면, 그 소녀가 불려오고 즉시 사자의 적의를 누그러뜨리고 분노를 진정시켰다. 소녀에게 매혹되어 마음이 풀린 사자는 그녀가 기쁘게 하는 곳으로 그녀를 따라가고, 즉각 격렬한 분노를 사랑으로 바꿨다.
>
>이 짐승은 수치스럽게 죽을만 했다. ... 왕세자가 도살을 명령했다.
  • 루이 7세와 아델 드 샹파뉴 사이에서 태어난, 필리프 2세의 친여동생 아녜스는 9세에 동로마 제국 황제 알렉시오스 2세와 결혼하고 1183년, 12세에 서유럽 혐오자이자 60대인 안드로니코스 1세에게 약탈혼 당했다.[127] 이 사건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서유럽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되고, 당대 서유럽 연대기 작가들은 이를 4차 십자군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명분으로 정당화했다. 동로마 궁정의 막강한 실권자 테어도어 바라나스가 아녜스를 정부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고 둘은 1204?년에 결혼했다.
  • J W. 볼드윈은 《Chronicon Turonense》가 아니라 《Chronicon Turonensis》의 bald pate란 기록으로 3차 십자군에서 겪은 병의 증상 중 하나인 탈모 후유증으로 말미암아 언젠가는 영구적으로 bald가 되었으리라 주장했다.[128] 그러나 bald pate가 포함된 문장이 《Recueil Des Historiens Des Gaules Et De La France vol.XVIII》에서 1223년의 문장과 함께 편집됐는지 여부는 알려지지 않았고,[129] 샤를 쁘띠 듀탈리와 브래드버리는 bald pate가 묘사된 시점을 3차 십자군을 종군한 직후로 지목하여 인용한 바 있다. 랭스 트루베르가 "프랑스 왕이 발과 손, 그리고 모든 피부와 손톱이 벗겨졌으나, 한 해가 지나서 그의 건강이 돌아오고, 흠 잡을 데 없고, 다시 건강해 보였다네[mais les ongles li cheirent des piez et des mains, et pela touz et fu tot l’an malades, et puis revint a sa santé et fu touz haitiez et liez et joyous]."라고 기술했으며, 필리프 2세와 똑같은 증상을 겪고 여기에 재발과 온 몸이 붉은 종기로 뒤덮이기까지 했던 리처드 1세는 3차 십자군을 종군하고 귀국할 때 "오스트리아를 지나면서 머리카락과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르고 순례자로 위장했다."란 증언이 있다.
  • 현대에 들어 필리프가 한 쪽 눈이 안 보여서 가리고 다녔다는 출처 불명의 설이 튀어나왔다. 중세 군사 연구가 브래드버리는 이를 언급한 건 모두 1차 사료 자체가 없다고 못박고, 14세기 이탈리아 문학가 조반니 보카치오의 소설에서 필리프 2세 Le Borgne(The one-eyed)가 몬페라토 후작의 부인에게 반해 후작이 자리를 비울 때마다 추근댔다는 내용이 고작임을 명시했다. 이와 관련해 존스 홉킨스 대학 교수 J W. 볼드윈은 이 소설가가 집필할 때 오른쪽 애꾸눈인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를 연상했으리라 추측하고, 19세기 번역가 존 페인은 Le Borgne가 이탈리어로 '한 쪽 눈이 없는', '사려깊지 못한' 뜻을 지닌 다의어임을 분명히 했다.

9. 대중문화에서


일반적으로 라이벌 격으로 묘사되는 리처드 1세에 비하자면 거의 항상 악역 배역. 낭만적이고 기사의 의무, 기사도 등에 가치를 무겁게 두며 행동한 리처드에 비해 현실적이고 이해타산적이며 종교에 열정적이지도 않은 권모술수의 숙련가라는 점에 있어서 좀 비열한 이미지가 강했던 모양새다. [130]
필리프 2세를 묘사한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는 제임스 골드만의 희곡인 《겨울의 사자(The Lion in Winter)》이다.[131] 작중에서 헨리 2세는 자신의 후계자 및 프랑스 왕실과의 정략결혼 문제를 정리하기 위해서 자신의 아내와 아들들을 불러 크리스마스 연회를 거행하는데, 필리프 2세 또한 여기에 참여한다.
처음에는 나이가 어리고 경험도 적어서 노회하고 카리스마있는 헨리 2세와의 파워 게임에서 휘둘리는 애송이에 불과했던 것으로 보였으나, 중후반부에 이르러 반전이 일어난다. 사실 필리프 2세는 리처드 1세와 조프리, 그리고 존 등을 비롯한 헨리 2세의 아들들과 함께 음모를 꾸미면서 헨리 2세의 뒷통수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헨리 2세는 필리프 2세에 의하여 자식들에게 농락당했다는 사실을 폭로당하고는 좌절하고 만다.[스포일러]
이 희곡은 이후로 영화로도 제작되었는데, 1968년작과 2003년작이 좋은 평가를 받았다. 두 영화에서 각기 티모시 달튼조나단 리스 마이어스가 필리프 2세를 연기하였는데, 모두 왕년의 꽃미남으로 유명한 배우들이다보니 비쥬얼이 매우 화려한 편이다. 티모스 달튼이 연기한 필리프의 경우에는 이제야 막 어른이 되어가며 정치의 생리를 깨달은 냉혹한 지략가로서의 이미지가 강조되는 편이며, 조나단 리스 마이어스가 연기한 필리프 2세는 보다 여리여리하면서도 격정적이고 팜 파탈(…)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만화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에서도 3차 십자군을 다룬 5권에서 리처드 1세와 함께 나란히 등장한다. 김태권이 리처드 1세와 필리프 2세가 한때 동성연인이었다는 가설을 참조했는지 두 사람의 관계가 간간히 암시되기도 한다.[132]
리들리 스콧의 영화 《로빈 후드》에서도 권모술수에 능란하며 교활하고 음험한 인물로 묘사된다. 리처드 1세가 전사하고 그의 아우인 존이 왕위에 오르자, 기다렸다는듯이 존의 주변에 심어두었던 고프리를 이용하여[133] 존과 잉글랜드 북부 영주들을 분열시키고는 브리튼섬에 상륙하여 잉글랜드를 통째로 먹어버리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이 작전은 거의 성공 직전까지 갔으나, 프랑스군이 상륙하기 직전에 주인공인 로빈 후드의 중재로 존이 북쪽 영주들과 화약을 맺고 마그나 카르타가 성립하게 되면서 완전히 실패로 돌아간다. 결국 해변에 상륙한 병사들이 갑작스레 밀어닥친 잉글랜드의 대군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도륙당하는 것을 보고는 씁쓸한 표정을 짓다가 어쩔 수 없이 퇴각 명령을 내리게 된다.[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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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기스칸 4 일러스트'''
코에이에서 출시된 게임 《징기스칸 4》에서는 다른 능력치는 좀 안습이지만 전투력 하나는 최강인 리처드 1세, 전투력도 물론 수위권이지만 정치 · 지략 부분에서 압도적인 필리프 2세라는 라이벌 구도를 구성해놓았다. 이를테면 유럽판 우에스기 겐신, 다케다 신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포지션을 구성한 것.[135] 동 게임 내의 희대의 만능 먼치킨 등장 캐릭터들인 칭기즈 칸, 티무르, 살라딘조차도 모든 능력치가 죄다 90대를 넘어가지는 못하는 반면 필리프 2세의 능력치는 지략/전투/정치 순으로 '''94'''/'''90'''/'''98'''이다. 거기다 원래대로라면 예루살렘에 있어야 할콘래드, 브리엔느같은 A~B+급 부하들이 있고 가끔 옆 동네의 로빈 후드가 등용 될 때도 있다. 하지만 아들 루이 8세, 손자 루이 9세는 실제 역사 상의 행적에 비해 능력치는 영 좋지 않다. 이렇게 모든 능력이 다 높은 괴수 능력을 코에이산 타 게임과 비견하자면 삼국지 시리즈조조신장의 야망 시리즈도쿠가와 이에야스 정도밖에 없다. 우에스기 겐신이나 다케다 신겐은 능력치 총합이 높지만 정치는 낮은 편이라서 모든 능력이 다 높은 건 아니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모든 능력치가 '''최소 89 이상(만렙이 120)'''이라는 후덜덜함을 자랑한다.
미디블2: 토탈 워 - 킹덤즈 크루세이더 캠페인에서도 등장. 3차 십자군 이벤트 후 안티오키아 공국 소속으로 등장한다. 원 역사와는 다르게 전사하거나 늙어 죽을때까지 머물러 주니 감사하고 열심히 굴리자. 여담으로 리처드 1세는 예루살렘 왕국 소속이니 역사대로 적(...)이 될 수 있다.
크루세이더 킹즈 2에서 제3차 십자군 전쟁과 라틴 제국 시나리오의 주요 인물로 등장. 영재, 야망, 용기, 공정 등 좋은 트레잇을 주렁주렁 소유하고 있어서 능력치가 전반적으로 높다.
[1] 그 전에는 서프랑크의 카롤링거 왕조부터 카페 왕조 초기까지도 프랑크의 왕(Rex Francorum)이라는 표현을 썼으나, 1190년 필리프 2세는 이를 Roi de France라는 프랑스어 표현으로 고쳤다.[2] 오귀스트. 라틴어로 하면 그 유명한 아우구스투스.[3] 필리프 2세가 2번째 왕비인 잉에보어와의 혼인을 일방적으로 무효화할 때 (무효화를 당한 이유로 몸이 비늘로 뒤덮이고 악취가 났기 때문이란 소문이 돌았던)잉에보어를 본 이들의 "왕비가 저토록 절색이고 매혹적인데 왕이 왕비에게 성적으로 다가가지 않는 게 불가능할 것이다."라는 주장이 제기된 가운데 더한 찬사를 들었단 일화가 있다고 한다. 잉에보어와의 혼인 무효화는 '전쟁 준비' 항목 참고. '혼인 무효'에 대해서는 혼인성사 참고.[4] 프랑스,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들이 그를 직접 보았을 때 생전 기록. J W. 볼드윈은 필리프 2세의 외견에 대해 리고르와 기욤 드 브르통이 묘사를 하지 않았다고 저술했으나 기욤은 '뺨에 보송보송 솜털만 겨우 나 있는', '키가 크다'고 명시한 등 R H. 부티가 이를 인용한 바 있다.[5] '그 외' 항목 참고[6] 이 시기 루이 7세교황청까지 개입시켜 "즉각 리처드와 아델이 결혼을 올리지 않으면 헨리 2세의 모든 영지에 성무 금지령을 내려 달라"며 헨리 2세에게 압박을 가했다. 몇몇 저술가들은 이 기록으로 루이가 헨리 2세와 아델의 소문을 들은 바가 있으리라 추측했으나, 뒷받침할 증거로 프랑스 기록을 인용하지 않았다.[7] 브르타뉴 공작 제프리 2세(생몰년: 1158-1186). 필리프 2세보다 7살 연상이자 당대 평판에 의하면 아주 다정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기랄두스 캄브렌시스는 그가 앙주 가문에서 가장 지적이며 "위선의 천재. 그의 혀는 꿀보다 끈적하고, 기름보다 부드러우며 그 능력은 두 왕국을 혼란에 빠뜨릴 정도이다"라고 평하고,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는 그를 "부정과 파멸의 아들"이라 칭했다. 누군가 앙주 가문의 특징을 물으면 그는 "우리 가족은 형제가 형제를, 아들이 아비를 대적하고, 서로 해코지하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하도록 태어난 게 우리라오."라고 이죽거렸다고 한다. 그리고 강탈이나 약탈에서 인정사정을 보지 않았고, 거리낌 없이 교회를 유린했으며, 전쟁터에서는 무자비하고, 정치적으로는 간교하고, 양심의 가책 따위는 아예 몰랐다고 한다.[8] 학자들은 잉글랜드와 노르망디를 상속받았어야 할 청년왕 헨리 사후에 헨리 2세가 상속 문제에 관한 모든 결정권이 자신에게 있음을 아들들에게 공고히 하려는 목적이 있었고, 필리프 2세는 이것으로 헨리 2세의 아들들의 불만이 자라날 것을 예견했다 해석했다.[9] 필리프 2세의 누나 아델의 지참금[10] 에버라드는 그 이유로, 이 시기 리처드가 자신보다 헨리 2세의 지지를 받는 제프리를 견제했기 때문이라고 추측했다.[11] 학자들은 헨리 2세가 상속 문제를 확고히 할 목적 또한 있다고 보았다.[12] 앙브루아즈는 리처드가 푸아티에 백작 시절부터 베렝겔라를 열렬히 사모하고 깊이 마음에 품었다 주장했고, 1177년 리처드가 나바라 왕국 수도 팜플로나에서 열린 마상창시합에 참여한 전적을 들어 역사가들은 최소 과거에 리처드와 베렝겔라가 안면이 있었다 해석했다. 산초 6세 부부는 엘레오노르 드 아키텐에게 우호적이었고, 엘레오노르가 유폐에서 풀려나도록 헨리 2세에게 청을 보내기도 했다.[13] 필리프 1세가 전투를 하지 않고 갑자기 회담을 제의한 이유는 알려진 바 없다. 당시 헨리 2세와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가 알려지지 않은 이유로 필리프 2세를 과도하게 지지한 상황이었고, 몇몇 역사가들은 이 점이 가장 강력하게 작용했으리라 추측했다. 또한,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1세의 그 당시 주요 측근 중 하나였던 자크 드 아벤이 이 때 그를 배반하고 에노 백작 보두앵과 동맹을 맺었다. 이에 몇몇 역사가들은 필리프 2세가 자크 드 아벤과 비밀리에 우정을 나누었거나 혹은 매수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참고로 자크 드 아벤(1152-1191)은 생전 기사 중의 기사이자 기사도의 꽃이란 칭송을 받았으며, 리처드가 최고의 남자라고 인정할 정도였다고 한다.[14] [15] 리처드와 블롱캐포 영주의 부인 베아트릭스 사이에 궁정연애 조짐이 있었다. 베아트릭스는 아름답고, 예모 있고, 교양 있는 귀부인이었으며 리처드를 오랫동안 사모했다고 한다.[16] 제프리 2세의 궁정 연애담은 알려진 바 없으나, 당대 평에 의하면 그는 궁정 연애에 대해 언제라도 사랑을 저버릴 생각을 하는 위인이며, 성적 행위를 사랑이 형성된 후에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성적 행위가 사랑 형성에 대해 영향을 발휘함을 주장했다고 한다.[17] 리처드는 궁정 연애담이 전해진다. 1190년 6월 리처드가 노르망디 봉신의 아내에게 "나는 사랑이오. 우리의 사랑을 갈라놓을 이에게 나를 주지 마오. 그러면 그(i.e. 나)는 즉시 죽음을 맞이할 것이오."라고 그의 인장에 리본을 달아 연서를 보냈다.[18] 알람은 필리프 2세가 리처드가 아니라 제프리 2세를 헨리 2세의 상속인으로 대우했으리라 추측했다.[19] 이 브르타뉴 동전의 상세는 링크 참고. 제프리 2세가 낭트에서 권위를 확립한 직후인 1185년 경에 발행된 것으로 추정.[20] 프랑스 연대기 작가는 제프리가 필리프를 기다리던 곳에서 필리프가 없었단 것을 강조하면서도 그 이유들은 침묵했고, 이에 대해 몇몇 학자들은 제프리와의 어떤 사건 혹은 음모에서 필리프의 개입을 감추고자 한 의도로 해석했다. 또한, 호버든의 마상창시합 언급에 대해 제프리가 낙마 사고로 죽었단 소식을 전한 사절단을 필리프 2세가 보냈다면, 마상창시합 낙마 사고는 필리프가 발표한 제프리의 공식적 사인이며 이는 그가 제프리와 관련된 어떤 중대한 사실을 헨리 2세와 세간으로부터 숨기려는 의도가 있었으리라 추측했다. 몇몇 학자들은 낭트 국경 요새화와 제프리가 파리에서 발행한 공작 헌장의 증인 명단에 제프리와 필리프의 주요 군사 사령관이 기재되었단 점을 들어, 그들이 헨리 2세와 리처드를 대항할 군사 행동을 도모하고 있었으리라 추측했다. 이 외에, 제프리가 병이 들었으나 호전된 후 마상창시합에 참가하여 사고를 당했을 것이란 추측도 있다.[21] 학자들은 부친인 헨리 2세보다 필리프 2세가 제프리의 죽음을 더 애도했을 것이라 보았다. 참고로, 1176년 8월 헨리 2세가 직접 제프리를 기사로 서임한 장소가 우드스톡이었다.[22] 이유는 알려진 바 없으나 약 3년 후, 르노가 부친 다마르탱 백작 알베릭 3세의 충고를 따랐다고 하여 필리프의 용서를 받았다.[23] 플로리는 이 일로 말미암아 각 군영 지휘관들이 군사 작전에 참여하기를 꺼렸으리라 추측했다.[24] 학자들은 당시 리처드가 아키텐을 두고 부친과 반목하고 있었으며, 노르망디 및 앙주에 대해 부친의 공식 상속인으로 지명되지 않은 상황 때문이라 보았다.[원문] Ricardus dux Aquitaniae, filus regis Angliae, morum fecit cum Philipo rege Franciae, quem ipse in tantum honoravit per longum tempus quod singulis diebus in una mensa ad unum cantinum manducabant, et in noctibus non seperabat eos lectus. Et diliexit eum rex Franciae quasi animam suam; et in tantum se mutuo diligebant, quod propter vehmentem delictionem quae inter illos erat, dominus rex Angliae nimio stupore arreptus admirabatur quid hoc esset.[25] 기욤 드 롱샴 또한 카이사르라고 평을 들었다. 뉴버그의 윌리엄은 1190년부터 잉글랜드 섭정으로 임명된 그에 대해 "신도들은 그를 왕보다 더 높이 보고, 성직자들은 교황보다, 이들 모두가 그를 견디기 힘든 군주로 보았다. 그리고 다른 이들은 그가 카이사르보다 더 카이사르하다고 믿었다."라고 기술했다. 학자들은 그 시기 잉글랜드에서 기욤 드 롱샴의 저조한 인기와 정치적 행보로 말미암아 이같은 말을 들었으리라 추측했다.[26] 이 연구는 리처드가 동성애 혹은 양성애 성향이란 가정 하에, 리처드가 지배적, 능동적, 남성적 위치에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27] 브라운슈바이크의 오토는 리처드의 누나 마틸다와 작센, 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사자공의 차남으로, 당대 평에 의하면 외모와 행동거지, 그리고 전사로서의 면모가 외숙부인 리처드를 아주 빼닮았으며 음악 취향마저도 같았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리처드와 달리 몹시 인색하여 비엔나의 민네쟁어가 그를 '덩칫값을 못하는 인색함'이라 비난할 정도였다고 한다.[28] 이 갑작스러운 포기에 대해 이유는 알려진 바 없다.[29] 필리프 2세가 주장한 피해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 없다. 몇몇 학자들은 필리프가 툴루즈 영지를 자신의 복속으로 간주하여 리처드의 툴루즈 공격을 샤토루 휴전 협정의 최초 위반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라 추측했다.[30] 몇몇 학자들은 이 대목으로 리처드와 베렝겔라 나파로아코아의 결혼 협상이 1188년에는 비밀에 부쳐지지 않았을 것이라 추측했다.[31] 리처드의 갑작스러운 제안의 이유는 알려진 바 없다. 리처드가 툴루즈를 침공했을 때 이익을 봤다는 점을 들어서 이와 관련된 일이기 때문이었으리란 추측이 있다만, 주류는 아니다.[32] 첫 조건이 리처드와 아델의 결혼이였고 길링엄은 필리프 2세가 줄곧 둘의 결혼 문제를 우려했을 것이라 추측했다.[33] 힐턴은 이 조건이 리처드가 이미 새 신부로 베렝겔라 나파로아코아를 점찍은 방증이며, 리처드가 둘의 결혼 문제를 전부터 우려한 것으로 보이는 필리프 2세를 열심히 설득한 결과라 추측했다.[34] 원정으로 왕국을 비울 때 40년 간 분쟁해 온 툴루즈를 견제하기 위한 전략적 목적이 있었다.[35] 이와 관련하여 13세기에 쓰인 카스티야 왕국의 "엘레오노르 드 아키텐이 아들의 신부로 아델 드 프랑스를 못마땅해하여 이 혼담을 무효로 돌릴 방법을 고민하고 직접 아들의 신부를 물색했다. 그 결과 나바라 왕 산초의 맏딸 베렝겔라를 맞아들이기로 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 주장은 캔터베리의 저베이스의 "캔터베리 주교 볼드윈을 통해 전해 들은 바, 1185년에 엘레오노르가 유폐에서 풀려났다"라는 기록을 근거로 엘레오노르가 1185년부터 리처드의 신부를 물색했다고 말한다. 뉴버그의 윌리엄은 "엘레오노르가 아들의 신붓감을 고르기 위해 많은 준비를 했다." 디스의 랄프는 "왕위에 오른 직후 리처드가 모후의 이름에 명예가 되는 일이면 무엇이든 하고자 했다."라고 기술했다. 역사가들은 엘레오노르가 아델을 싫어한 건 확실하다고 동의했다.[36] 역사가들은 루이 7세의 왕비였던 시절 '''엘레오노르도 예비 시아버지와 불륜을 저질렀다'''고 결론지었다. 상대는 2번째 남편 헨리 2세의 부친 앙주 백작 조프루아였다. 월터 맵은 "왕비가 루이 왕의 침대를 조프루아와 나누었다는 소문이 비밀리에 돌았다." 기랄두스 캄브렌시스는 "링컨 주교를 통해 전해 들은 바, 조프루아가 아들 헨리에게 이것을 털어놓았다."라고 기술했다. 이 사건은 루이 7세가 알지 못하도록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37] 길링엄은 십자군 출정 지연 논의가 있었을 것이라 추측했다.[38] 필리프 2세는 1185년에 더 이상 트루베르를 후원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바 있다. '그 외' 항목 참조.[39] 리처드 1세는 1172년에 서임된 푸아티에 백작으로 불리는 것을 선호할 정도로 푸아티에와 남프랑스에 애착이 깊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몇몇 19세기 역사가들은 루앙이 필리프 2세의 왕실 직할지와 가까우며 필리프 2세가 가장 잘 아는 지역이었단 점을, 리처드 1세가 이 시기 필리프 2세가 관련된 조약에서 루앙을 수도로 삼은 이유로 추측했다.[40] 당시 인장의 방패 표현 때문에 사자가 1마리 혹은 2마리라는 추측이 있다. 리처드 왕 편력기 저자는 1191년 5월 리처드 1세가 키프로스를 점령할 때 "왕의 안장이 붉은색이 흩뿌려진 금색 장식으로 번쩍이고, 후부에는 2마리 금색 사자가 서로 마주보고 입을 벌리고 서 있었다."라고 기술했다. 리처드는 말년에 3마리 금색 사자로 문양을 바꾸었다.[41]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는 프랑스 왕의 군대가 먼저 다리를 건넌 후 잉글랜드 왕의 군대가 건너려 할 때 다리가 부수어지고, 그것들을 수리하도록 돈을 쓴 건 잉글랜드 왕이었다고 기술했다.[42]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는 배멀미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몇몇 역사가들은 필리프 2세가 제노바까지 육로를 이용했단 점을 지적하여, 파리 부근에서만 지내왔던 그가 알프스를 넘고 처음으로 장기간의 여정을 경험했기 때문이라 추측했다.[43] 필리프 2세가 이후 갤리선을 따로 고용했다는 당대 연대기 작가들의 기록은 없다. 참고로 필리프 2세는 급이 다른 애주가였다고 한다.[44]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도 필리프 2세가 하인리히 6세와 외교적 갈등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서 거절했다고 기술했다.[45] 로버트는 윈체스터 수도자가 리처드의 남성성을 필리프와 대조하여 과장되게 서술하고 무엇보다도 그에게 '사자' 호칭을 선별적으로 사용했다는 것을 강조했다. 또한 당대 사가들이 동성애를 묘사할 때 쓴 '여성스러움, 연약함' 수식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고 덧붙였다. 이 연구는 리처드가 성적 위치에서 지배적, 능동적, 남성적 위치에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참고로 리처드, 필리프와 동시대인인 윈체스터 수도자는 연대기에서 위 기록을 포함해 그 시를 총 4번 인용하였고 '여성스러움, 연약함' 류의 동성애 서술을 할 줄 알았다. 홀랜드의 연구에 따르면 명백한 동성애 어조로 '뺨이 매끄럽고 아름다운', '부드러운' 등 단어를 사용하여 성적으로 피지배적, 수동적 위치인 남성들의 외모를 유형화했다고 한다.[46] 이유는 알려진 바 없다. 역사가들은 리처드 1세가 조안의 안전뿐만 아니라 필리프 2세와 조안의 조합이 맞갖잖았을 것이라 추측했다. 앨리오는 이와 관련하여 리처드가 조안을 다른 곳에서 정치적으로 이용할 속셈이 있었으리라 저술했다. 참고로, 필리프 2세와 조안(1165-1199)은 나이가 같다.[47] 몇몇 역사가들은 리처드 1세가 헤이해지는 군대의 기강을 세우고, 인구 밀집으로 말미암아 굉장히 혼잡한 메시나 치안을 단속하기 위함이라 추측했다.[48] 몇몇 역사가들은 필리프 2세가 군사들과 현지인들의 충돌을 최소화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고, 리처드 1세와 잉글랜드 군을 향한 메시나인들의 반발을 등에 업고 그를 견제하려는 목적도 있으리라 추측했다.[49] 점령한 지역의 성벽에 깃발을 올리는 것은 지배권의 상징이었다. 앨리오는 리처드가 조안을 구실로 시칠리아를 정복하려 했는데 앙주 제국이 잘 되는 광경을 손놓고 구경할 리 없던 필리프의 방해 공작때문에 포기했을 것이라 추측했다.[50] 이에 대해 길링엄은 리처드 1세가 자신의 입장을 강화하기 위함으로 해석했다.[51] 학자들은 리처드 1세가 자신에게 유리한 조약을 탕크레드와 체결한 후에도 메시나 주민들을 경계했을 것이라 추측했다.[52] 1188년 8월, 기욤 드 바흐와 부하들이 리처드 1세의 포로로 잡혔을 때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도주한 악연이 있었다. 역사가들은 그렇다 할지라도 이 사건은 리처드의 지나친 승부욕으로 인해 일어났다고 추측했다.[53] 기욤 2세 드 바흐(생몰년: 1160-1234)는 필리프 2세의 충복이자 절친이었으며 생전 기사도의 꽃으로 칭송받았다. 별칭은 프랑스의 아킬레우스. 그의 숙부 이브하 드 바흐는 성전 기사단의 단장이었다. 필리프는 서신에서 절친들을 '좋은 친우'로 칭했으나 기욤 드 바흐는 '변함없는, 사랑하는 친우'로 칭했을 정도로 서로 사이가 깊었다고 전해진다.[54] 필리프는 메시나 도시 안에 있는 궁정에서 머물고 있었다.[55] 이 사건 직후 리처드 1세와 기욤 드 바흐가 개인적으로 화해했다는 기록은 없으나, '아크레에서' 항목 참고.[56] 리처드 1세의 일방적인 설명이며 교차 검증을 할 수 있는 나바라 왕국의 기록이 밝혀진 바 없다.[57] 몇몇 학자들은 이 불미스러운 일을 교차 검증할 다른 기록이 없다는 점을 들어, 리처드 1세의 주장의 타당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반면 리처드 1세에게 우호적인 경향이 있는 몇몇 저술가들은 헨리 2세와 아델의 관계에 대해 필리프 2세가 일체 모르고 있지는 않았으리라 추측했다. 참고로, 캐논법은 아버지와 성관계를 맺은 여성과의 결혼을 금했다.[58] 당대 연대기 작가들과 기랄두스 캄브렌시스 등의 신빙성 있는 문헌들은 이 사건에 대해 엘레오노르에게 비난조의 기술을 했고 역사가들은 엘레오노르가 루이와의 결혼이 신물이 나고 이혼을 염두에 둔 것은 확실하다고 보았다. 또한 엘레오노르는 에데사와 동로마 제국을 치자는 레몽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루이에게 이혼을 하겠다고 협박하였고 이로 인해 루이는 놀라고, 대노하고, 큰 상처를 입었단 기록이 있다.[59] 길링엄은 이 기록으로 필리프 2세가 열세인 상황이라 추측했다.[60] 상속인을 생산하는 것은 왕의 중대한 의무 중 하나였다. 리처드가 그녀에게 상속인을 볼 의지가 없었단 연구가 있고 그의 슬하에 1180년 초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 서자 필리프가 있기 때문에 베렝겔라가 불임일 것이란 의견도 있기는 하다.[61] 최근에는 이 대목으로 필리프 2세가 길링엄의 분석처럼 완전히 열세는 아니었으리란 이견이 있다.[62] [63] 또한 잉글랜드 왕 중 '자연을 거스른 죄'의 유일한 선례는 정복왕 윌리엄의 아들들인 윌리엄 루푸스, 헨리 1세였다. 정복왕 윌리엄의 차남인 단명한 리처드를 제외한 적자 모두, 즉 장남 노르망디 공작 로버트 커더스, 삼남 윌리엄 루푸스, 막내 헨리 1세가 생전 자연을 거스른 죄에 중독되었다는 성직자들의 비난을 받았다.[64] 사실 이게 대단한것이 군주가 직접 정찰하면 적군의 표적이 되어 저격수한테 저격당하기 쉬워서 위험한 일인데 직접 한것이다. 실제로 리처드 1세가 직접 정찰하다가 적군의 저격을 당해 사망했다.[65] 학자들은 원인을 알 수 없긴 하나 리처드가 아크레에 도착하자마자 전염병에 옮을 정도로 건강 상태가 악화되었다고 보았다.[66] 역사가들은 이 기록을 비록 정치적 차이가 있으나 성지 탈환 목적 앞에서 '''필리프 2세가 협력을 우선시했다'''고 해석했다.[67] 이사키오스의 어린 딸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대신 키프로스의 처녀로 불렸고 당시 13~14세로 추정된다. 이때를 마지막으로 부녀가 얼싸안고 눈물로 생이별을 하고, 딸은 리처드 1세의 볼모가 되어 키프로스를 떠나 끌려갔다고 한다. 키프로스 처녀를 편력기 저자는 "어린 소녀" 앙브루아즈는 "매우 아름답고 나이가 어리다."라고 기술했다. 역사가 앨리슨 위어는 "몇몇 연대기 작가들이 리처드가 이 아이와 단둘이 오랜 시간을 보냈으며, 그녀에 대한 관심이 도저히 명예롭다고 말할 수 없음을 비관적으로 암시했다."라고 저술했다. [68] 길링엄을 비롯한 대부분의 학자들은 두 왕의 불화가 심했다는 선까지 다루었다. 필리프 드 알자스는 1191년 3월 30일에 필리프 2세와 메시나에서 출항하고, 이후 리처드를 만난 적이 없다.[69] 학자들은 필리프 2세가 십자군 앞에서 두 왕의 갈등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베렝겔라를 맞이했다고 해석했다.[70] 필리프 2세는 욕을 굉장히 싫어하여 욕설 금지령을 내린 적이 있다고 한다. 이를 뒷받침하는 한 일화로, 한 청년이 기사에게 욕을 하고 기사가 이를 무력으로 보복하여 재판이 열리자 필리프 2세가 개입하여 기사를 풀어주고 청년을 처벌했다고 한다. 리처드 1세도 욕설 금지령을 내리긴 했으나, 기랄두스 캄브렌시스는 플랜태저넷 왕가와 달리 "프랑스 왕은 말씨가 고상하다."라고 증언했다. 몇몇 학자들은 이와 유사한 일화들을 근거로 루이 9세 시절 도덕적으로 엄격한 궁정에 대해 조부인 필리프 2세 시절 궁정이 어느 정도 본보기가 되었다 보았다. 참고로, 리처드 1세는 욕을 했다는 기록이 많으며 욕설 금지령과 더불어 살인을 저지르면 시체와 묶어서 산 채로 매장하겠단 규율을 세우기도 했다.[71] 랭스 트루베르의 작품을 편찬한 역사가는 원문을 제시하기에 앞서, 랭스 트루베르가 리처드 1세와 기욤 드 바흐가 아크레 거리들에서 싸움을 벌였단 사건의 유일한 화자가 아닌 것까지만 언급했다. [72] 세인트올번스 수사는 이 비밀스러운 다툼으로 인해 프랑스 왕이 귀환을 결정했으리라 주장했다.[73] 피에흐 드 꾸흑뜨네는 루이 6세의 손자로 필리프 2세의 사촌이자 절친, 충복이었다. 후에 라틴 제국 황제로 등극했다.[74] 브래드버리는 이 대목을, 길링엄을 주축으로 한 영국 역사가들이 아크레 공성전에서 필리프 2세의 활약을 평가절하했다는 주장의 근거로 채택한다.[75] 교황의 반응은 "호의와 자비를 담아 프랑스 왕을 달래면서도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라고 한다. 참고로, 당시 십자군을 이런 식으로 종군하면 교황과의 마찰은 당연한 수순이었지만 필리프 2세는 파문은 커녕, 리처드에 대해 일방적 주장까지 늘어놓았다. 뇌물이 오고간 정황은 없다고 한다.[76] 자크 드 아벤은 아르수프 전투에서 2차 공격 중 치명상을 입고 "오, 리처드! 반드시 이 복수를 갚아 주시오."라고 유언을 남겼다. 아르수프 전투는 당대 유명한 기사들이 전사했을 정도로 치열한 전투였다고 한다.[77] 1191년, 르노 드 다마르탱이 불로뉴 여백작 이다를 납치하여 결혼을 올렸고 필리프 2세는 헌장을 발행하여 이 결혼과 르노를 불로뉴 백작으로 인정했다. 조흐덩은 이것으로 필리프가 르노의 충성심을 유지하고 군사적 지원을 받으려 했다고 추측했다.[78]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들은 이 사건 후로도 보베 주교가 두 왕의 관계를 서슴없이 이간질했다고 비난했다. 보베 주교(생몰년: 1158-1217)는 필리프 2세의 사촌이자 절친이고 충복이었다. 그는 캐논법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칼 대신 전곤을 무기로 사용하고 3차 십자군 원정을 비롯한 여러 전투에 참여했으며 부빈 전투에서 헨리 2세의 서자인 윌리엄 롱제스피와 결투해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또한 필리프 2세의 절친에서 적으로 돌변한 리처드 1세, 불로뉴 백작 르노 드 다마르탱과는 사적으로 관계가 최악이었고, 몇몇 역사가들은 그들과 보베 주교와의 사적인 충돌이 필리프 2세를 향한 그들의 증오가 깊어지는 데에 일조했다고 추측했다.[79] 프랑스 연대기 작가는 "왕이 온갖 두려움의 먹잇감이 되고, 영혼이 병들었다"라고 증언했다.[80] 사방으로 리처드 1세를 찾아다니던 블롱델이 그곳을 지날 때 노래를 부르고, 리처드가 다음 구절을 노래해 자신이 있는 위치를 알리고 구출되었다는 허구의 내용이다. 다만, 블롱델은 실제 인물이며 그의 작품도 존재한다.[81]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는 하인리히 6세의 '''진짜 목적은 필리프 2세를 복종시키고 동맹을 맺는 것'''이며 이를 리처드가 잘 간파하고 있었다 후술했다.[82] 보석금이 모일 동안 무리를 해서라도 필리프의 공세를 저지해야 했기 때문이란 추측이 있다.[83] 잉에보어(생몰년: 1175-1237)는 키가 크고 금발이며, 덴마크 귀족 사이에서 덴마크 최고의 미모의 소유자라는 명성이 자자했다고 한다. 잉에보어에 대해 당대 사가들은 "얼굴이 아름답고, 영혼은 더욱 아름답다.", "귀중한 진주", "경이적인 아름다움의 소유자",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여인", "미덕의 표상", "라헬보다 우아하며 트로이의 폴릭세네와 그리스의 헬레네의 맞수"라고 칭송했다. B. P. 맥과이어는 연대기 작가들이 일국의 공주에 대해 이 정도까지 우호적으로 기술하는 건 흔치 않았다고 말한다.[84] 반면 thomas k. heebøll-holm 교수는 굳이 첫날밤과 대관식을 지낸 후에 이혼을 선언한 이유로 필리프가 막대한 지참금을 포기하기 싫었으며, 이혼 소송이 진행되는 중 이 거금을 (주로 리처드에게 대항하는 목적으로) 마음대로 전용할 수 있으리라고 계산했기 때문이라고 추측했다. 또한 필리프는 이 때 교황이 이혼에 관대했던 전례와 교황청과의 긴밀한 관계를 들어 낙관하고 있었다.[85] 새로이 교황이 된 인노첸시오 3세는 그동안 허술하게 적용되던 교회법을 정비하고 시성절차를 까다롭게 하는 등 강한 개혁의지를 가진 인물이었다.이러한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 존과 필리프 모두에게 성무금지령을 내린 바 있다.[86] 존의 반란 소식을 듣고 '내 아우는 손톱만큼의 저항이라도 있는 곳이라면 절대 정복하려 들지 않을 놈'이라 말했다 한다. 사냥을 즐기고 감시인들과 레슬링 시합을 하고 저속한 농담을 주고받기도 하고 함께 술을 마시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한다.[87] 1197년 9월, 하인리히 6세는 임종 직전 잉글랜드를 해방시키란 유언을 남겼다.[88] 존은 필리프보다 1살 어리다.[89] 필리프는 패배를 돌이켜 국정 문서를 루브르 궁에 보관하고 이는 중앙 집권제의 기반이 되었다. 역사가들은 리처드 1세의 군이 상대적으로 짐이 가벼운 반면, 필리프 2세의 군은 전투를 하지 않을 때 그가 틈틈이 정무를 보느라 수하물이 많아서 행차나 다름없는 상황이었고 이 때문에 진군 속도가 느리며 자칫하면 큰 손실로 이어질 위험이 컸다고 보았다.[90] 교차 검증을 할 수 있는 다른 기록이 밝혀진 바 없다.[91] 최근 들어 길링엄은 소돔이 '임신을 유발하지 않는 모든 종류의 성행위'란 연구를 들어, 윌리엄 루푸스가 생전 소돔의 경고를 들은 것은 그의 성적 성향 근거가 될 수 없다고 보았다.[92] 알럼은 부부가 화해하고 죄를 뉘우친 리처드 1세가 아내에게 전념하며 평화롭게 살기로 했으리라 해석했다.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들은 베렝겔라를 "미모와 언변으로 명성이 자자한 여인", "미모보다 현명함으로 명성이 더 높다", "나바라의 아름다운 여인", "검정색 머리와 검정색 눈을 한 사랑스럽고 훌륭한 음악가", "교양있고 온화하고 모든 면에서 리처드 왕과 어울리는 배우자"라고 칭송했다. 역사가들은 베렝겔라가 남프랑스 문화에 익숙하고 음악에 조예가 깊다는 점에서 부부가 공통점이 많았다고 보았다.[93] 18세기 역사가들은 필리프 2세가 이들의 결혼에서 자식이 없다면, 전략적 요충지인 뽕띠유를 차지할 의도가 있었으리라 추측했다. 기욤은 프랑스와 앙주 제국의 대립에서 필리프 2세를 항시 지원하여 핵심 동맹국으로 활약하고, 부빈 전투에서는 프랑스 군의 왼쪽 날개를 지휘했다. 참고로, 기욤 드 뽕띠유는 36세인 아델보다 19살 연하였으며 아델이 헨리 2세의 정부였다는 추문은 필리프가 그런 아델과 혼인한 기욤에게 호의를 베푼 이유일 것이라고 한다.[94] 정치를 제대로 하지 못했으므로 플랜태저넷 가문의 대륙령, 즉 프랑스 내의 영지를 몰수하겠다는 그런 논리[95] 플랑드르의 영주였다.[96] 당시 불로뉴를 통치하던 백작 가문[97] 당시 브라반트를 통치하던 공작 가문[98] 아마도 존이나 오토 4세는 필리프가 북부를 포기하고 남부의 친국왕파 영주들과 연계하여 장기전으로 몰고 가거나 병력을 규합하더라도 산지나 요새에 틀어박혀 공성을 유도했으리라 예상했던 듯한데 오토가 필리프의 군세를 맞닥뜨리고 예상치 못함으로 인해 당황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실제로 이후 오토는 결전을 원하는 필리프를 상대로 수 차례 휴전 협정을 맺고자 시도했다. 결국 실패했지만.[99] 부빈 전투에서 존 왕의 대리로 잉글랜드 군을 지휘했다.[100] 연합군 측 기사 169명이 전사하고 131명이 포로가 되었다.[101] 다만 그렇다고 부빈 전투가 졸전은 아니었던것이 양측의 군주들이 모두 죽을 위기를 한번씩 만났던 상당히 치열한 전투였다. 필리프 2세는 신성 로마 제국 보병들이 본진까지 밀고 들어왔기에 맞서 싸우다가 창에 찔리며 말에서 떨어지기까지 했다가 왕의 위기를 보고 몰려온 프랑스 기사들의 도움으로 살아남았고, 오토 4세도 프랑스 기사들에게 공격당하여 말고삐를 붙잡히고 말이 칼을 맞아 낙마했다가 황제를 호위하는 근위병들과 기사들의 희생에 더해 다른 귀족이 얼른 자기 말을 내줘서야 그 말을 타고 빠져나갈수 있었다.[102] 이 코뮌에서 징발할 수 있게 된 직속 보병 전력은 이후 부빈 전투를 비롯한 여러 전투에서 요긴하게 쓰였다.[103] 후술할 대학 지원을 통해 많은 인재들을 끌어모을 수 있었다.[104] 당시 프랑스의 일종의 궁중 수석 기사들로 근대적 상비군의 개념이 많이 미비했던 중세 시기의 프랑스에서 실질적인 국왕 상비군 장교 전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직속 슈발리에들은 부빈 전투에서도 중앙에서 필리프 2세를 보좌하며 많은 활약을 펼쳤다.[105] 루이 9세 시기에는 바이이와 세네샬이 지방에서 세력을 지나치게 강화하는 것을 막고자 감찰관을 파견했다.[106] 일전의 설명에서 '행정 재판관'이라고 표기되어있으나 이는 근세, 근대에 쓰이던, 행정관, 재판관, 장교 등의 의미를 함유한 프레보라는 명칭에 대한 한국 사람들의 이해력 부족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필리프 2세가 살아가던 중세 프랑스에서의 프레보는 근세나 근대 시기에 쓰이던 위의 의미가 아닌 토착 재지 영주층, 즉 호족 정도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집단이다. 공작이나 백작과 같은 정식 작위를 받고 지방에서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는 대영주들과는 달리 뚜렷한 작위는 없으나 자신과 자신의 집안이 특권적 권한을 가지고 있는, 일대의 자그마한 지역을 암묵적으로 다스리던 토호 세력들이 바로 중세 프랑스의 프레보들이며 필리프 2세는 이러한 프레보들을 무력으로 제거하거나 회유책으로 그들을 궁정으로 불러들여 그들의 토착 권한을 제거하는 방식을 사용, 그 세력을 축소시킨 것이다.[107] 역사적으로 여러 토목 사업과 혁신적 정책을 재정적 밑바탕도 없이 시행하다가 국정 말아먹은 나라가 한 둘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하자.[108] 이 대학에 대한 지원도 결국 카페 왕조에 유익한 쪽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 법학이 발전하게 되면서 프랑스 왕들은 영주들의 단순한 암묵적 대표가 아니라 국가의 최고 통솔자라는 성문화된 위치에 올라설 수 있었으며 동시에 과거 로마 시대의 최고 원수의 의미를 지닌 임페라토르의 직함도 겸할 수 있었다.[109] 교황 인노첸시오 3세와 동맹한 대가로, 명목상으로나마 전 서유럽을 지배하던 신성로마제국에서 프랑스가 처음으로 독립 왕국으로 인정받았다.[110] 이때 프랑스의 경제 성장률은 르네상스 시기에도, 부르봉 왕조의 전성기에도 상승했고 산업혁명 전까지 계속되었다.[111] 그후 30년 전쟁 때문에 독일 인구가 줄었지만, 19세기에 다시 독일 인구가 프랑스를 추월했다.[112] 영어로 Royal Domain. 중세~근세 유럽 지도들의 비고란에 많이 나오는 표현이다.[113] 플랑드르 지역의 영주였던 페르디낭 드 부르고뉴가 이에 반발하여 부뱅 전투의 단초를 제공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114] 오히려 군주로서 (큰 단위의 전략 능력에 대비되는 의미의) 일신의 무용이나 작은 단위의 전술 능력이 너무 높으면, 거기에 도취되어 본인이 무(武)만 신경쓰면 되는 일개 사령관이나 장수가 아닌, 문무를 모두 통할하는 '''군주'''라는 점을 잊어버리는 사례가 (항우와 리처드처럼)역사적으로 꽤 보였다.[115] 손자는 명장의 유형을 2개로 정리했는데, 첫 번째는 불리한 상황 속에서 이기는 장수고, 2번째는 애초에 이길 판을 만들고서 싸우는 장수라고 명했다. 이 중에서 손자는 애초에 이길 판을 만들고서 싸우는 장수를 더 높게 평가했다.[116] 당시 필리프 2세는 14세이고 리처드는 그보다 8살 연상이었다.[117] 참고로, 리처드는 아키텐에서 장성하여 모친 엘레오노르 드 아키텐과 아주 각별한 사랑을 쌓게 되고, 남프랑스 지배자로서의 입지를 다졌다고 한다. 필리프 2세는 헨리 2세의 적자들과 정반대로, 모친 아델보다 부친 루이와 아주 각별한 사랑을 쌓았다고 한다.[118] 랭스에서 열린 필리프 2세의 대관식 때 왕들이 입맞추는 왕실의 보검을 드는 역을 맡았다.[119] 1200년 이후 필리프 2세가 플랜태저넷령을 침공할 때 주요 전략적 요충지 역할을 한 가치 외에 당시 아르투아는 비옥한 도시인 쌩토메흐, 에흐, 아하스, 보켄, 비에이 에스당, 바뽐므 등을 포함하여 수많은 백작령, 자작령에 대한 상위 주군 권한을 행사케 하는 영지였다. 필리프 1세의 과거 정치 외교적 행보와 그 시점 각국과의 외교 관계에 비추어, 정치적 관계를 따져도 필리프 1세가 필리프 2세에게 너무 많은 것을 퍼줬던지라 필리프 1세의 의도와 내면적 이유에 대해 현재까지도 갑론을박이 이어진다.[120] 웬도버는 플랑드르 백작 필리프 1세가 어떤 아들도 없다고 기술한 반면, 《콘스탄티노플 정복에 대해》 저자 조프루아는 그의 서자 티에리가 4차 십자군에 참전했다고 기술했다.[121] 대부분의 연대기 작가들은 이사벨의 정통성과 외모를 칭송했으나, 한 잉글랜드 연대기 작가는 이사벨이 카롤루스 왕가의 후계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남편이 과분한 짝이라고 평했다.[122] 에노 연대기 작가는 이 때 필리프가 "내 왕국에 그대가 남편으로 삼고 싶은 봉신이 있다면 말하시오. 내가 어떤 대가를 치르든 그대가 그 자를 얻을 것이오."라고 말하자, 이사벨은 "하느님은 그대가 잠들던 침대에 다른 유한한 인간이 잠드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라고 답하고 흐느껴 울었다고 기술했다.[123] 윌킨스와 메즈헤는 1181년, 엘루드는 1182년으로 상술했으나, 뻬흐씨는 원문을 제시하여 1185년으로 정정했다.[124] 이유는 알려진 바 없다. 몇몇 저술가들은 그가 죽음을 떠올릴 정도로 큰 사건을 겪었거나 병을 앓지 않았을까 추측했다.[125] 존 왕은 일평생 값비싼 옷과 자질구레한 방물, 보석 수집에 열광했으며 상당한 미적 감각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한편, 리처드 1세는 화려하고 장식이 많은 옷차림으로 부를 과시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126] 《Contenant la seconde livraison des monumens des regnes de Philippe-Auguste et de Louis VIII ... jusqu'en MCCXXVI: Tome Dix-Huitieme》[127] 안드로니코스 1세와 아녜스의 결혼은 막장의 가도를 달리던 동로마 제국조차 발칵 뒤집어지게 했다. 니케타스 코니아테스는 안드로니코스 1세가 수도에 있는 마리 드 안티오키아의 초상들을 그 자신과 어린 신부가 같이 그려진 것으로 바꿨다고 증언했으며 "늙은이 악취를 풍겨대는 그가 그의 조카의 아직 열한 살도 못 채운 분홍빛 뺨의 미숙한 신부와 불법적으로 동침하는 것을 창피해 하지 않았다. 그 쭈그렁한 구혼자가 설익은 처녀를 꼭 껴안았다. 그 노망 난 노인이 처녀를 꽉 움켜잡았다. 그 주름지고 기력이 달린 노인이 장밋빛 손가락을 하고 이른 아침 사랑의 이슬을 뚝뚝 떨어뜨리는 소녀에게 집착했다."라고 비난하고, 테살로니키 대주교는 "모든 이들은 그녀가 안드로니코스와 이 결혼을 몹시 혐오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녀는 안드로니코스의 광포함을 끔찍해하고, 알렉시오스의 조심스러운 사랑을 그리워했다. 꿈을 꾸며 그를 찾고 이름을 울부짖기도 했다."라고 기술했다. 1185년, 안드로니코스 1세가 애첩과 폭동을 피해서 도주할 때 정신없는 와중에 아녜스를 끝까지 놔주지 않았다.[128] 기욤 드 브르통과 웬도버는 "1222년 9월 22일부터 필리프 2세가 모두가 놀랄 정도로 아프기 시작하더니 급속도로 악화되었다"고 증언했다.[129] 원래 편집을 거친 서적.[130] 이런 이미지는 필리프가 살았던 중세 당시부터 유래한 것으로 《윌리엄 마셜의 생애》저자는 “프랑스 왕은 간교하고 교활하기가 여우보다 더하다”고 적었다.[131] 한국에서는 "겨울의 라이온" 혹은 "겨울의 라이언" 등의 제목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스포일러] 또한 재미있게도 필리프 2세가 과거에 리처드 1세와 동성연인이었음이 암시되는 묘사가 있으며, 결국 필리프 2세는 이 복잡한 관계를 이용하여 영국 왕실에 화끈하게 복수한다. 이는 리처드 1세와 필리프 2세가 서로 동성연인이었다는 소문을 바탕으로 작가가 창작한 설정으로 보인다.[132] 다만 직접적인 묘사는 없다.[133] 고프리는 가상인물로, 프랑스 출신으로서 존의 절친이자 심복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필리프의 사주에 따라 북쪽 영주들로부터 강제로 세금을 뜯어내 왕실과 귀족들의 분열을 부추기도록 하는 등 매국노적인 만행을 저지른다.[134] 사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왕들은 대체로 취급이 좋지 않다. 리처드 1세는 전쟁터에서는 무적 그 자체인 영웅호걸이기는 하지만 명분도 실속도 없는 전쟁을 일삼아 백성들의 등골을 빼먹는 전쟁광으로 묘사되고, 존 또한 잉글랜드의 재정이 엉망이 된 것을 모두 형의 탓으로 돌리면서도 정작 필리프 2세의 계략에 휘둘려 형과 별 다를바 없이 무거운 세금으로 사람들을 괴롭히는 찌질이로 묘사된다. 이에 비하면 마지막에 처참히 털리기는 하지만 그나마 교활하고 영악한 면모만 강조된 필리프 2세는 오히려 취급이 나쁘지만은 않은 편이다.[135] 모르는 사람에게 설명하자면 같은 코에이 사의 게임인 노부나가의 야망에서 등장하는 군웅 다케다 신겐은 시리즈 중 천상기, 창조를 제외하고 나머지 전 시리즈 능력치 '''1위'''이다. 그리고 징기스칸 4의 필리프 2세 역시 '''종합 능력치가 1위'''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최소 능력치 1위'''로 최소 능력치인 무력이 89이다. 필리프 4세 역시 최소 능력치인 전투가 90으로 역시 '''최소 능력치도 1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