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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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클리블랜드 연고의 오케스트라.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더불어 미국에서 최고의 기량을 가진 오케스트라로 평가받고 있다. 가장 전성기 시절인 1990년 무렵에는 세계 5위권으로 평가되기도 하였으며, 현재 많이 인용되는 2008년 그라모폰지 평가에서는 세계 7위, 미국 2위의 오케스트라로 랭크되었다.
실력에 비해 인지도가 떨어지는 대표적인 사례
클리블랜드 태생의 피아니스트이자 공연 기획자인 애델라 프렌티스 휴즈가 1918년 창단했다. 초대 음악 감독으로는 우크라이나에서 망명해온 니콜라이 소콜로프가 취임했고, 활동 초기부터 적극적인 지방 순회 공연과 라디오 출연, 음반 녹음 등을 차근차근 진행하며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
1933년에 소콜로프가 사임한 뒤 폴란드 출신 지휘자인 아르투르 로진스키가 후임으로 초빙되었고, 로진스키는 1943년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으로 옮겨갈 때까지 약 11년 동안 재임하면서 강도높은 리허설과 레퍼토리의 확장을 통해 악단의 활동 영역을 넓혀놓았다. 후임으로는 에리히 라인스도르프가 들어왔지만, 불과 한 시즌 뒤 미군 군악대로 징집되는 바람에 이후 약 2년 동안 음악 감독 공석 상태로 활동해야 했다.
1946년에 헝가리 출신 지휘자인 조지 셀이 제4대 음악감독으로 취임했다. 당시만해도 미국의 여러 지방악단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던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는 조지 셀이 맡으면서 미국 최정상급 오케스트라로 도약하게 된다. 당시 악단 측은 셀을 영입하기 위해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했는데 셀은 악단 운영에 관해 거의 전권을 위임받았다. 유럽에 비해 오케스트라 단원 노조가 상당히 강한 미국이었지만 셀은 단원들을 손쉽게 자르고 새로 뽑을 수 있었다. 셀은 음악감독에 취임하자마자 기존 단원의 절반 이상을 물갈이했고 이후에도 실력있는 단원을 뽑기위해 계속 물갈이를 했다. 셀은 자신이 새로 뽑은 단원일지라도 성에 안차거나 좀 더 뛰어난 지원자가 나타나면 즉각 잘라버렸다. 셀의 부임 후 악단의 기량은 일취월장했다. 미국내 순회공연에서 셀과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의 기량을 직접 확인한 대도시의 비평가들은 놀라움을 표하면서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가 미국 최고의 오케스트라임을 인정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셀은 1970년에 골수암으로 타계할 때까지 20년 이상 장기 재임하면서 악단의 대폭적인 체질 개선을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실력이 없다고 평가받거나, 집요하고 엄격한 리허설에 못이긴 단원들은 계속 방출되었다. 하지만 주위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셀은 자신의 의지를 끝까지 관철시켰고, 여러 차례의 해외 연주 여행과 전속사 컬럼비아에 남긴 수많은 녹음 등을 통해 악단의 리즈시절을 이끌어냈다. 특히 조지 셀을 높이 평가했던 카라얀에 의해서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 정기적으로 초청받아 연주했다. 베를린 필과 빈 필 이외의 오케스트라는 지휘하지 않던 카라얀이 1967년에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를 직접 객원지휘하기도 했다.
셀의 갑작스러운 죽음 후에는 여러 지휘자가 거론되었고 카라얀도 언급되었다[1] . 그러나 카라얀의 영입은 실패했고 프랑스의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피에르 불레즈가 음악 고문 직함으로 두 시즌 정도 악단을 이끌었다. 1972년에 로린 마젤이 음악 감독에 취임했다. 이 시기는 마젤로서도 전성기에 해당하는 시기였다. 마젤은 셀이 다져놓은 합주력과 유럽풍의 음향을 기반으로 감성적이고 풍부한 음악을 끌어내는데 집중했다. 10년간 머물렀던 마젤은 1980년 빈 국립가극장의 음악 감독으로 임명된 후 1982년 사임했다.
마젤 사임 후에는 약 2년 동안 다시 음악 감독이 공석인 채로 운영되었고, 이 기간 동안에는 1940년대 단기 재임했던 만년의 라인스도르프가 자주 객원으로 출연기도 했다. 이 기간 객원 지휘자로서 단원들에게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던 크리스토프 폰 도흐나니가 1984년 음악 감독으로 취임했다. 도흐나니는 2002년까지 18년간 장기 재임하면서 셀 시절 시작된 군더더기 없고 깔끔한 음향을 더욱 투명하고 정교하게 다듬어 악단의 기량을 한층 더 높이 끌어올렸다. 도흐나니 재임 시기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는 베를린 필, 빈 필 다음 가는 세계 4~5위 수준의 오케스트라 평가되기도 했다. 도흐나니는 소속 음반사인 DECCA를 통해 많은 녹음을 남겼다.
2002년에는 도흐나니의 뒤를 이어 프란츠 벨저-뫼스트가 음악 감독에 취임하여 현재까지 장기 재임하고 있다. 벨저-뫼스트는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를 맡기 전 런던 필에서는 냉철함을 유지하면서도 어느 정도 젊은 혈기를 분출하며 좋은 평가를 받은 바 있는데,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를 맡고 나서는 악단 고유의 정교한 음색을 다듬고 유지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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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고문의 경우 기울임체로 표기했다.
미국 오케스트라들 중 본좌급에 드는 악단으로 손꼽히며, 세계적으로 봐도 매우 높은 수준을 자랑하고 있다. 대체로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더불어 미국에서 가장 뛰어난 기량을 가진 오케스트라로 꼽혀왔다. 조지 셀 이후 음악 감독들이 대부분 20년 내외로 장기 재임하며 악단과 오랜 관계를 유지하며 조련해 왔기 때문에, 좀처럼 슬럼프에 빠지는 모습을 보여주지도 않고 있다. 벨저-뫼스트도 17년째 재임하고 있다. 클리블랜드 시민들도 악단에 거는 기대와 애정이 대단한 편이라, 앞으로도 별 탈 없이 굴러갈 것으로 보인다.
셀 이래로 정확하고 깔끔한 음향을 추구해 왔다. 셀의 경우 가끔 다른 오케스트라를 객원 지휘할 때는 열정이 폭발하는 연주를 들여주곤 하는데,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에서는 상대적으로 냉철한 연주를 들려준다. 셀 시절의 엄청난 갈굼으로 인한 프레셔가 단원들에게 내면화된 듯 하다. 셀 이후에 마젤을 거쳐 도흐나니 시절 그 투명한 사운드가 거의 정점에 이르렀고 이는 벨저-뫼스트 시대에도 지속되고 있다. 다만 이런 깨끗한 앙상블 추구가 지나친 나머지 음악에서 열기나 생기를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에 음반도 많고 좋은 평가를 받은 경우도 많음에도 불구하고 특출난 명반은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셀의 경우도 다른 오케스트라에서 객원으로 연주한 음반들이 대표 명연으로 거론되는 경우가 많다.[3]
녹음도 소콜로프 재임기부터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데, 소콜로프의 경우 라흐마니노프의 교향곡 제2번을 세계 최초로 녹음한 것을 비롯한 진귀한 음반들을 남겼다. 후임인 로진스키와 셀도 컬럼비아(CBS, 현 소니)에서 녹음을 했다. 특히 셀 시절 리즈 시절을 맞은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는 CBS에서 방대한 녹음을 남겼다. 당시 미국의 대표적인 음반사였던 CBS는 뉴욕 필의 번스타인,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유진 오먼디와 함께, 셀의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를 레이블의 간판으로 삼았다. 셀의 경우 사비를 들여 마이크 등의 녹음 장비를 구입할 정도로 음반 제작에 열의를 보였다.
마젤은 데카와 텔락에, 도흐나니는 데카에서 주로 녹음했고, 벨저 뫼스트는 EMI와 도이체 그라모폰을 거치면서 지속적으로 음반을 제작하고 있다. 2000년대 들어서는 DVD를 비롯한 영상 매체나 인터넷 다운로드 음원의 제작도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
비시즌기인 여름에는 클리블랜드 인근의 쿠야호가 펄스에 있는 대형 야외 공연장인 블로섬 뮤직 센터에서 열리는 여름 음악제에 상주 악단으로 출연하고 있다. 2005년까지는 주로 음악제의 음악 감독이 지휘했지만, 이후 악단 음악 감독인 벨저-뫼스트가 시즌기와 마찬가지로 지휘대에 서고 있다.
합창단과의 협연도 활발한데, 악단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단체만 해도 클리블랜드 관현악단 합창단(Cleveland Orchestra Chorus), 클리블랜드 관현악단 청소년 합창단(Cleveland Orchestra Youth Chorus), 클리블랜드 관현악단 어린이 합창단(Cleveland Orchestra Children's Chorus) 세 군데에 달한다. 이외에도 청소년 관현악단인 클리블랜드 관현악단 유스 오케스트라(Cleveland Orchestra Youth Orchestra)의 교육이나 합동 공연 등에도 깊이 관여하고 있다.
상주 공연장은 초기에 그레이스 아머리나 메이스닉 오디토리엄 등지를 빌려 사용했지만, 1931년에 시민들과 대부호 존 롱 세브란스[4] 의 기부금을 받아 신축한 세브란스 홀로 옮겨가 2010년 현재도 계속 상주하고 있다. 아르데코 스타일로 건축된 건물인데, 다만 음향 상태에는 다소 문제가 있었는지 주로 셀과 도흐나니 재임기에 대규모 리모델링을 거쳐 지금은 많이 나아졌다고들 한다.
1. 개요
미국 클리블랜드 연고의 오케스트라.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더불어 미국에서 최고의 기량을 가진 오케스트라로 평가받고 있다. 가장 전성기 시절인 1990년 무렵에는 세계 5위권으로 평가되기도 하였으며, 현재 많이 인용되는 2008년 그라모폰지 평가에서는 세계 7위, 미국 2위의 오케스트라로 랭크되었다.
실력에 비해 인지도가 떨어지는 대표적인 사례
2. 연혁
클리블랜드 태생의 피아니스트이자 공연 기획자인 애델라 프렌티스 휴즈가 1918년 창단했다. 초대 음악 감독으로는 우크라이나에서 망명해온 니콜라이 소콜로프가 취임했고, 활동 초기부터 적극적인 지방 순회 공연과 라디오 출연, 음반 녹음 등을 차근차근 진행하며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
1933년에 소콜로프가 사임한 뒤 폴란드 출신 지휘자인 아르투르 로진스키가 후임으로 초빙되었고, 로진스키는 1943년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으로 옮겨갈 때까지 약 11년 동안 재임하면서 강도높은 리허설과 레퍼토리의 확장을 통해 악단의 활동 영역을 넓혀놓았다. 후임으로는 에리히 라인스도르프가 들어왔지만, 불과 한 시즌 뒤 미군 군악대로 징집되는 바람에 이후 약 2년 동안 음악 감독 공석 상태로 활동해야 했다.
1946년에 헝가리 출신 지휘자인 조지 셀이 제4대 음악감독으로 취임했다. 당시만해도 미국의 여러 지방악단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던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는 조지 셀이 맡으면서 미국 최정상급 오케스트라로 도약하게 된다. 당시 악단 측은 셀을 영입하기 위해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했는데 셀은 악단 운영에 관해 거의 전권을 위임받았다. 유럽에 비해 오케스트라 단원 노조가 상당히 강한 미국이었지만 셀은 단원들을 손쉽게 자르고 새로 뽑을 수 있었다. 셀은 음악감독에 취임하자마자 기존 단원의 절반 이상을 물갈이했고 이후에도 실력있는 단원을 뽑기위해 계속 물갈이를 했다. 셀은 자신이 새로 뽑은 단원일지라도 성에 안차거나 좀 더 뛰어난 지원자가 나타나면 즉각 잘라버렸다. 셀의 부임 후 악단의 기량은 일취월장했다. 미국내 순회공연에서 셀과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의 기량을 직접 확인한 대도시의 비평가들은 놀라움을 표하면서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가 미국 최고의 오케스트라임을 인정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셀은 1970년에 골수암으로 타계할 때까지 20년 이상 장기 재임하면서 악단의 대폭적인 체질 개선을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실력이 없다고 평가받거나, 집요하고 엄격한 리허설에 못이긴 단원들은 계속 방출되었다. 하지만 주위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셀은 자신의 의지를 끝까지 관철시켰고, 여러 차례의 해외 연주 여행과 전속사 컬럼비아에 남긴 수많은 녹음 등을 통해 악단의 리즈시절을 이끌어냈다. 특히 조지 셀을 높이 평가했던 카라얀에 의해서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 정기적으로 초청받아 연주했다. 베를린 필과 빈 필 이외의 오케스트라는 지휘하지 않던 카라얀이 1967년에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를 직접 객원지휘하기도 했다.
셀의 갑작스러운 죽음 후에는 여러 지휘자가 거론되었고 카라얀도 언급되었다[1] . 그러나 카라얀의 영입은 실패했고 프랑스의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피에르 불레즈가 음악 고문 직함으로 두 시즌 정도 악단을 이끌었다. 1972년에 로린 마젤이 음악 감독에 취임했다. 이 시기는 마젤로서도 전성기에 해당하는 시기였다. 마젤은 셀이 다져놓은 합주력과 유럽풍의 음향을 기반으로 감성적이고 풍부한 음악을 끌어내는데 집중했다. 10년간 머물렀던 마젤은 1980년 빈 국립가극장의 음악 감독으로 임명된 후 1982년 사임했다.
마젤 사임 후에는 약 2년 동안 다시 음악 감독이 공석인 채로 운영되었고, 이 기간 동안에는 1940년대 단기 재임했던 만년의 라인스도르프가 자주 객원으로 출연기도 했다. 이 기간 객원 지휘자로서 단원들에게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던 크리스토프 폰 도흐나니가 1984년 음악 감독으로 취임했다. 도흐나니는 2002년까지 18년간 장기 재임하면서 셀 시절 시작된 군더더기 없고 깔끔한 음향을 더욱 투명하고 정교하게 다듬어 악단의 기량을 한층 더 높이 끌어올렸다. 도흐나니 재임 시기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는 베를린 필, 빈 필 다음 가는 세계 4~5위 수준의 오케스트라 평가되기도 했다. 도흐나니는 소속 음반사인 DECCA를 통해 많은 녹음을 남겼다.
2002년에는 도흐나니의 뒤를 이어 프란츠 벨저-뫼스트가 음악 감독에 취임하여 현재까지 장기 재임하고 있다. 벨저-뫼스트는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를 맡기 전 런던 필에서는 냉철함을 유지하면서도 어느 정도 젊은 혈기를 분출하며 좋은 평가를 받은 바 있는데,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를 맡고 나서는 악단 고유의 정교한 음색을 다듬고 유지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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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역대 음악 감독
음악 고문의 경우 기울임체로 표기했다.
- 니콜라이 소콜로프 (Nikolai Sokoloff, 재임 기간 1918-1933)
- 아르투르 로진스키 (Artur Rodziński, 재임 기간 1933-1943)
- 에리히 라인스도르프 (Erich Leinsdorf, 재임 기간 1943-1944)
- 조지 셀 (George Szell, 재임 기간 1946-1970)
- 피에르 불레즈 (Pierre Boulez, 재임 기간 1970-1972. 음악 고문)
- 로린 마젤 (Lorin Maazel, 재임 기간 1972-1982)
- 크리스토프 폰 도흐나니[2] (Christoph von Dohnányi, 재임 기간 1984-2002. 퇴임 후 계관 음악 감독 칭호 수여)
- 프란츠 벨저-뫼스트 (Franz Welser-Möst, 재임 기간 2002–)
4. 특징
미국 오케스트라들 중 본좌급에 드는 악단으로 손꼽히며, 세계적으로 봐도 매우 높은 수준을 자랑하고 있다. 대체로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더불어 미국에서 가장 뛰어난 기량을 가진 오케스트라로 꼽혀왔다. 조지 셀 이후 음악 감독들이 대부분 20년 내외로 장기 재임하며 악단과 오랜 관계를 유지하며 조련해 왔기 때문에, 좀처럼 슬럼프에 빠지는 모습을 보여주지도 않고 있다. 벨저-뫼스트도 17년째 재임하고 있다. 클리블랜드 시민들도 악단에 거는 기대와 애정이 대단한 편이라, 앞으로도 별 탈 없이 굴러갈 것으로 보인다.
셀 이래로 정확하고 깔끔한 음향을 추구해 왔다. 셀의 경우 가끔 다른 오케스트라를 객원 지휘할 때는 열정이 폭발하는 연주를 들여주곤 하는데,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에서는 상대적으로 냉철한 연주를 들려준다. 셀 시절의 엄청난 갈굼으로 인한 프레셔가 단원들에게 내면화된 듯 하다. 셀 이후에 마젤을 거쳐 도흐나니 시절 그 투명한 사운드가 거의 정점에 이르렀고 이는 벨저-뫼스트 시대에도 지속되고 있다. 다만 이런 깨끗한 앙상블 추구가 지나친 나머지 음악에서 열기나 생기를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에 음반도 많고 좋은 평가를 받은 경우도 많음에도 불구하고 특출난 명반은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셀의 경우도 다른 오케스트라에서 객원으로 연주한 음반들이 대표 명연으로 거론되는 경우가 많다.[3]
녹음도 소콜로프 재임기부터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데, 소콜로프의 경우 라흐마니노프의 교향곡 제2번을 세계 최초로 녹음한 것을 비롯한 진귀한 음반들을 남겼다. 후임인 로진스키와 셀도 컬럼비아(CBS, 현 소니)에서 녹음을 했다. 특히 셀 시절 리즈 시절을 맞은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는 CBS에서 방대한 녹음을 남겼다. 당시 미국의 대표적인 음반사였던 CBS는 뉴욕 필의 번스타인,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유진 오먼디와 함께, 셀의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를 레이블의 간판으로 삼았다. 셀의 경우 사비를 들여 마이크 등의 녹음 장비를 구입할 정도로 음반 제작에 열의를 보였다.
마젤은 데카와 텔락에, 도흐나니는 데카에서 주로 녹음했고, 벨저 뫼스트는 EMI와 도이체 그라모폰을 거치면서 지속적으로 음반을 제작하고 있다. 2000년대 들어서는 DVD를 비롯한 영상 매체나 인터넷 다운로드 음원의 제작도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
비시즌기인 여름에는 클리블랜드 인근의 쿠야호가 펄스에 있는 대형 야외 공연장인 블로섬 뮤직 센터에서 열리는 여름 음악제에 상주 악단으로 출연하고 있다. 2005년까지는 주로 음악제의 음악 감독이 지휘했지만, 이후 악단 음악 감독인 벨저-뫼스트가 시즌기와 마찬가지로 지휘대에 서고 있다.
합창단과의 협연도 활발한데, 악단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단체만 해도 클리블랜드 관현악단 합창단(Cleveland Orchestra Chorus), 클리블랜드 관현악단 청소년 합창단(Cleveland Orchestra Youth Chorus), 클리블랜드 관현악단 어린이 합창단(Cleveland Orchestra Children's Chorus) 세 군데에 달한다. 이외에도 청소년 관현악단인 클리블랜드 관현악단 유스 오케스트라(Cleveland Orchestra Youth Orchestra)의 교육이나 합동 공연 등에도 깊이 관여하고 있다.
상주 공연장은 초기에 그레이스 아머리나 메이스닉 오디토리엄 등지를 빌려 사용했지만, 1931년에 시민들과 대부호 존 롱 세브란스[4] 의 기부금을 받아 신축한 세브란스 홀로 옮겨가 2010년 현재도 계속 상주하고 있다. 아르데코 스타일로 건축된 건물인데, 다만 음향 상태에는 다소 문제가 있었는지 주로 셀과 도흐나니 재임기에 대규모 리모델링을 거쳐 지금은 많이 나아졌다고들 한다.
[1] 시기적인 타이밍이 좀 더 잘 맞았다면 카라얀의 취임이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었다. 60년대 이후 베를린 필과 빈 필 말고는 지휘하는 일이 없던 카라얀은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의 기량을 높이 평가하여 67년에 객원지휘를 하기도 했다. 또한 조지 셀이 사망하기 직전인 69년에는 시카고 심포니가 카라얀의 영입을 타진한 바 있었다. 리처드 오스본에 의하면 카라얀은 의외로 시카고의 제안에 대해 진지하게 고려했다고 한다. 69년 DG와의 장기계약이 만료되어 재계약을 앞두고 있었던 카라얀이 새로운 계약을 위해 제2의 악단의 상임지휘자가 되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했다는 설이 있다. 실제로 카라얀은 69년에 파리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으로 취임하여 2년간 재임했다. 카라얀이 두 개의 미국 정상급 오케스트라의 제안을 거절하고 신생 파리 오케스트라의 제의를 받아들인 것은 본인의 주 활동무대인 베를린과 빈에서 위치가 가까웠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2] 작곡가 에르뇌 도흐나니의 손자이다.[3] 가령 베토벤 교향곡 같은 경우 뉴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의 연주가 가장 높게 평가받는다.[4]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에 기부했던 바로 그 가문이다. 이러한 인연으로 2010년 내한 연주회를 연세대학교 의료원이 공동주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