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무라 키요시

 


이름
타무라 키요시
([ruby(田村
潔司, ruby=たむら きよし)])
국적
일본 [image]
생년월일
1969년 12월 17일 (54세)
종합격투기 전적
48전 32승 13패 3무

5KO, 13SUB, 8판정, 6기타

4KO, 3SUB, 4판정, 2기타
체격
180cm / 90kg
주요 타이틀
Rings 메가 배틀 토너먼트 1997 우승
Rings 초대 무제한급 챔피언
Rings 3대 무제한급 챔피언
기타
Rings 메가 배틀 토너먼트 1996 준우승
Rings 킹 오브 킹스 토너먼트 1999 3위

180cm에 83kg으로 희귀한 일본인 중량급이었다.[1][2] UWF에서 활동한 프로레슬러 출신으로, 진중한 무사 같은 분위기 덕에 상당한 스타였다. 타무라의 UWF~Rings 시절을 다룬 다큐[3]

고등학교까지 스모를 수련했으며, 신생UWF가 탄생한 88년 UWF 일반인 연습생으로 20살 나이에 합격하여 프로레슬링에 입문한다.[4] 신생UWF를 거쳐 UWFi 당시 메인 선수로 다카다 노부히코와 더불어 UWFi의 흥행 메이커였으나, 다카다가 UWFi 선수 생활 중 얻은 인기를 이용해 정치권에 출마했다가 낙선하였으며, 이는 UWF 재정에 큰 타격을 입게 된다. 결국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 다카다의 원칙이었던 신일본 프로레슬링과 손을 잡지 않겠다는 원칙을 깨며 'UWF vs 신일본'이라는 이벤트를 개최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타무라가 참전을 거부하면서 다카다와의 갈등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커진다. 그러자 다카다 노부히코는 타무라를 UWFi에서 제명시켜버린다. 이렇게 UWFi에서 고립되어 있는 상태였던 타무라한테 K-1 측에서 UFC 준우승자 출신인 패트릭 스미스와의 경기를 제안했고, 타무라가 힐훅으로 경기를 승리하게 된다.[5] 이 경기의 반향은 꽤 컸는데, '프로레슬링은 실전에 강하다!'는 주장이 다시 한 번 힘을 싣은데다가 프로레슬러가 데뷔전으로 UFC 준우승자 출신 선수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는 자체로 타무라는 전국구 스타가 되었다.[6] 결국 UWFi는 다시 타무라를 단체 이벤트에 부를 수밖에 없게 됐고, 타무라는 96년 5월 사쿠라바 카즈시[7]와 경기를 승리한 후 UWF 정체성의 상징인 붉은색 다리 보호대를 관중석을 던지는 것을 마지막으로 마에다 아키라가 이끄는 Rings로 이적하게 된다.

<vs 패트릭 스미스 전. 타무라의 데뷔전이자 타무라의 진로를 바꾼 경기>
Rings에서 초대 무제한급 챔피언[8], Mega Battle 토너먼트 [9] 3대 우승자를 지내는등 간판스타로 활약했으며, 헨조 그레이시를 꺾기도 했다. 그러나 Rings의 선수보호 룰 때문에 마이너 단체로 전락하였으며, 그 사이 PRIDE에서 사쿠라바 카즈시가 그레이시 헌터로 대활약하게 되어 타무라의 인기 또한 밀리게 된다. 타무라가 마에다 아키라와의 불화설이 나오며, 머지 않아 Rings를 퇴단하고, 이 때 반달레이 실바 레이드 대상이 사쿠라바와 같은 UWFi 출신 선수들을 찾는 중에 타무라가 PRIDE로 이적하게 된다. 그리고 약 1년만에 복귀전으로 PRIDE 데뷔전을 반달레이 실바와 미들급 타이틀전으로 치르게 된다.[10][11]
그러나 결국 체급차를 이기지 못하고 2라운드 KO패 당하고 만다.[12][13]
사쿠라바 카즈시, 밥 샙, 반더레이 실바 등 다양한 선수와 싸운 베테랑이다. 그 이전 Rings에서는 볼크 한, 올렉 탁타로프, 안토니오 호드리고 노게이라, 프랭크 샴락, 헤나토 소브랄과 경기했다. 대부분 전성기를 Rings에서 보낸 만큼 만만찮은 상대들과 싸웠다.[14]
다카다 노부히코와의 대결에서 워크 제의를 받은것이 아닌가하는 의혹이 남아있다.[15] 또한 요시다 히데히코와의 경기 워크 의혹이 있다.[16]
추성훈 로션 파문 사건 때 강도 높은 비판을 가했고, 원매치로 추성훈이 타무라를 다음 상대로 콜했으나 신혼여행을 이유로 거절하였다. 실제 드림 시절 그랑프리 2회전에서 대진이 성사될 뻔 했으나, 1회전에서 김태영한테 패배하면서 주최 측을 물먹였다. (...)[17] 이 경기에서 타무라의 노쇠화가 눈에 띌 정도였으며, 결국 사쿠라바 카즈시와의 경기를 끝으로 공식 MMA에서 더 이상 경기를 치르고 있지 않고 있다.
외곬수와 다름 없는 마이웨이와 일반인 연습생으로 입문 후 UWF 및 MMA에서 보여준 격투 재능으로 '고고한 천재'라는 별명으로 유명하다. 이 별명의 탄생은 UWF에서 나왔지만, 본격적으로 유명해지게된 건 패트릭 스미스 전 이후 언론에 대서특필되면서부터이다. 저 경기가 잡힌 과정과 경기 결과가 앞서 언급한 모든 상황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붉은 무사'는 그의 UWF 정체성을 상징하는 별명으로 서브 별명이다.
상당한 포커페이스로 표정의 변화가 거의 없는 것이 특징

사쿠라바 카즈시와는 레슬러 시절 부터 사연이 많았다. 해당 VTR에 그 역사가 소개되고 있다. 두 선수 모두 일본 격투기의 상당한 스타였기 때문에 이 대결은 연말 대회 'Dyanamite!!08'의 메인이벤트를 장식했다.[18]
2007년 결혼을 했는데, 배우자는 띠동갑 연하로 탤런트 사쿠라이 유미코다. 격투기 관련 방송 출연을 했었는데, 이 때 만남을 갖은 것으로 보인다. 김태영과의 경기를 앞두고 진행한 인터뷰에서 아내의 내조가 도움이 된다는 얘기를 하기도 했다.
[image] '''레슬링 옵저버 선정 최고의 테크니션'''
딘 말렌코
(1997)


'''타무라 키요시
(1998)
'''

오타니 신지로
(1999)


[1] UWF 선수로 활동했을 당시 91kg(200파운드)였는데, Rings 이적 후 85~90kg 체중으로 경기를 치른다. 실제 본인의 Best 체중은 87kg 정도로 프라이드 미들급(-93kg) 초반 경기 뛸 당시 Best 체중으로 경기를 뛰었다.[2] 추성훈도 실력까지 겸비한 일본인 중량급이라는 흔치않은 특징 때문에 K-1에서 사쿠라바 카즈시를 이을 일본 중량급 영웅으로 만들어 K-1의 인기를 맡기려 했다.[3] 방영시점은 97년 메가 베틀 토너먼트 우승까지 다룬 일대기. 96년 준우승을 거뒀지만, 이듬해 볼크 한을 리벤지하며(토너먼트가 아닌 일반 경기), 토너먼트에서 볼크한을 잡고 올라온 미하일 일류힌을 상대로 우승을 거둔다.[4] 당시 200대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했다.[5] 타무라는 이 때를 회상하며 이 경기에서 졌으면, 은퇴를 했을 것이라고 밝혔다. 당시 타무라가 프로레슬러로서 입지가 얼마나 불투명했던 상태였는지 알 수 있는 부분.[6] 경기를 치르기 정확히 1년 전 안조 요지가 힉슨 그레이시의 도장 깨기를 했다가 대참패를 당했었는데,타무라가 이 경기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프로레슬링의 자존심을 살렸다는 평가와 함께 '프로레슬링 vs 브라질리언 주짓수'라는 프레임이 생겼다. 이게 결국 PRIDE 탄생으로 이어졌다.[7] 이 때, 사쿠라바는 언더카드 선수였다. 각본있는 경기였지만, 타무라한테 하체관절기를 걸고 분전을 한 끝에 패배[8] 3대 Mega Battle 토너먼트 결승전과 통합으로 개최되었고, 이 경기 승리로 무제한급 타이틀과 토너먼트 우승 타이틀을 획득한다.[9] 이후 이 대회는 참가자가 더 큰 토너먼트가 되어 King of Kings(일명 KOK)라는 명칭으로 개최된다. 기존 16강에서 KOK는 32강으로 확대하였으며, 각각 Block A, B로 나눠서 치르게 된다.[10] UWFi 이후 사쿠라바도, 타무라도 각 단체에서 흥행을 이끌지만, 앞서 말했듯이 Rings의 룰이 재미가 없었고, WOWOW라는 케이블 위성 방송으로 방영되는턱에 굉장히 대중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에 반해 PRIDE는 시작부터 아사히 TV를 거쳐 후지 TV를 통한 방영으로 대중성이 확보되어 있었으며, 사쿠라바 카즈시의 대활약덕에 인지도가 그야말로 대역전되버린다. 타무라가 헨조 그레이시를 이긴 그 해, 사쿠라바는 호이스 그레이시를 이기면서 완벽하게 묻혀버렸다. 이후 사쿠라바 또한 헨조를 이기면서 더더욱 묻혔다. (...) 그럼에도 인지도와 달리 마이웨이 스타일과 진중한 모습덕에 '고고한 천재' 라는 별명이 굳히게 된다. UWFi 이후 사쿠라바와 타무라의 서로 다른 행보로 사쿠라바와의 라이벌이라는 인식이 붙고, UWF 출신에 '실력+흥행성'에 모두 부합되기 때문에 '미들급 타이틀전'이라는 파격적인 대우로 이적 후 복귀 경기가 성사된 것이다.[11] 이 때 실바 레이드로 희생된 선수들 중 일부는 UWF 또는 UWF에서 파생된 격투기 단체 ACE 선수들이 대상이었다. UWF 출신으로는 카네하라 히로미츠, 판크라스 출신인 곤도 유키가 대표적인 예.[12] 타무라는 사쿠라바와 비슷하게 평소 체중이 87kg 가량 된다. 평소 체중으로 나온데 반해 실바는 감량한 93kg로 나왔으니....이 때 격투기는 무차별급구도에서 각 체급별 타이틀로 가는 흐름인 걸 간과하면 안 된다.[13] 한편으로는 PRIDE 측에서 UWF 출신이라는 이유로 흥행카드로만 쓰고 버리려는 의도도 있었다. 말 그대로 타무라가 UWFi에서도 외곬수 스타일이기도 했고, 이후 실바 레이드로 복귀전을 치른 이후 밥 샙과의 경기를 치르고, 다카다의 은퇴 떡밥 카드로 소모된 이후 유도계에서 격투기로 전향한 요시다 히데히코의 상대로 출전하기도 했다. 말 그대로 흥행성 보장되는 자버 취급을 받은 것. 그리고 선수 본인이 마이웨이가 심했고, 이런 대우를 받고 존심이 상할대로 상하여 왠만한 경기 제안은 일단 거절하게 된다. 그 때 거절했던 경기 중 하나가 사쿠라바 카즈시와의 대결.(2003 남제에서 추진하려다 실패, 단, 2004년에는 추진될 뻔했으나 사쿠라바의 부상으로 무산) [14] 다만 Rings는 해체 직전 각 체급별 타이틀이 생겼을 정도로 쭉 무차별급 경기들만 잡았다. 이것 때문에 타무라의 기량 대비 전적에서 손해를 보기도 했다. 사족을 덧붙이자면 KOK 경기에서 히카르도 아로나에밀리아넨코 효도르와의 경기를 하기도 했는데, 지금 격투기 흐름에서는 성사되기 힘든 경기였던 셈. [15] 다카다가 난데없이 앞으로 전진하다가 타무라의 훅을 맞고 쓰러지며 경기가 종료되는데, 그 때 다카다의 당황한 눈 때문에 많은 이들이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본래 워크 경기인데, 타무라가 UWF부터 쌓인 감정 때문에 대놓고 경기를 망쳤다는 얘기도 있다.[16] 타무라가 경기 후 공개 기자회견에서 "사람들은 내가 이기는 걸 원치 않는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유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출신인 요시다가 이기는게 대중의 주목뿐만 아니라 더 흥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 경기에서 로우킥으로 요시다가 고전했지만, 타무라가 뜬금없이 무리한 그라운드 공방을 유도하며, 유도식 테이크다운 이후 도복 깃초크로 요시다가 승리한다.[17] 김태영은 최홍만의 타격 스승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데, 앤디 훅과 함께 정도회관에서 수련한 가라데 선수이며, K-1에서도 활동한바 있다. 다시 말해 반쪽짜리 파이터였던 것. 그러나 김태영의 태클 방어 및 그라운드 대응에 타무라가 그라운드에서 아무것도 못 했고, 타격에서는 본인 주특기인 로우킥을 역으로 맞는 등 그야말로 완패했다.[18] 사실 PRIDE가 건재했다면, 이 경기는 펼쳐지지 않았을 것이다. PRIDE 도산 사태 이후 격투기 자체 흥행은 이미 수직하락 중이었고, K-1 측에서 흥행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잡은 경기라는 말이 많다. 경기를 치렀을 당시 나이 40세였음을 감안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