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ngs
1. 소개
일본의 종합격투기 단체.
1991년 마에다 아키라가 창설해 실전 프로레슬링을 지향하며 초기 종합격투기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1977년 신일본 프로레슬링에 입단한 마에다 아키라는 1987년 마에다 안면축격사건을 일으킨 후 1988년 신일본에서 해고당한다. 마에다는 곧바로 제2차 UWF를 기획하지만 이것도 2년 후 해산, 이후 1991년 다시 창설한 것이 Rings였다.
마에다는 해외의 격투가들을 일본으로 불러와 일본의 프로레슬러들과 대결시키는 구도를 생각해 냈고, 해외에서의 프로모션에 신경쓴 결과 네덜란드, 브라질, 러시아 등 많은 국가에서 다양한 격투가들이 참가했다. 이는 이시이 카즈요시의 입식격투단체인 K-1의 출범을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으며,[1] 미국에서 UFC가 인기를 끌자 시너지 효과를 내며 이종격투기, 종합격투기 붐을 일으키게 되었다.
초창기의 Rings는 종합격투기라기보다는 "일정한 룰을 가지고 실전적으로 경기하는 프로레슬링"에 더 가까웠다. 주먹으로 안면을 가격할 수 없으며[2] 그라운드에서의 타격은 일체 배제, 심지어는 로프 브레이크까지 적용할 정도였다.
이 룰의 특수성 때문에 관절기에 걸린 상태에서 역으로 관절기를 시도하는 등 서브미션 기술을 거는데 적극적이었다. 특히, 로프 프레이크 제도 덕분에 플라잉 암바, 플라잉 니바 같은 리스크 있는 기술을 쓰는데 무척 적극적이었다. 실제로 타무라 키요시가 1996 메가 배틀 토너먼트 4강전에서 야마모토 요시히사를 상대로 플라잉 암바로 역전승을 거두며, 결승에 진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반대로 그라운드에 아무 동작없이 고착 상태가 지속될 경우 브레이크 선언을 하는 등 포지셔닝 이스케이프 동작을 거의 하지 않기 때문에, 그라운드 고착 상태에서 대응은 매우 약하다.[3] 실제로 KOK 룰로 개정 후 기존 링스 룰에 익숙한 선수들이 고전을 면치 못 했던건 이 룰의 특수성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4]
9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종합격투기 쪽으로 정체성이 넘어가면서 규제가 하나 둘 풀렸고, KOK 토너먼트가 개최되면서, 일명 KOK 룰로 룰이 개정되며, 2000년대에 들어서는 현대 MMA와 유사한 형태의 룰이 되었다.[5] 다만 NHB를 베이스로 하는 UFC의 룰과 비교하면 잦은 브레이크, 안면 파운딩의 금지 등 다소 생소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다만 KOK룰 적용 후 무엇보다 재미가 없어진데다가 기존 Rings룰을 그리워하는 팬들이 있었고, PRIDE의 성장으로 선수들이 이적하기 시작하자 선수 수급의 문제가 발생한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무제한급 토너먼트인 앱솔루트 클라스 토너먼트를 개최하고, Rings의 룰이 반영된 룰이 하나 추가된다.[7][8]
에밀리아넨코 효도르 vs 크리스 해스만의 앱솔루트 클라스 토너먼트 결승 경기를 보면 바로 이해가 가능하다. 결승전
1998년 부상을 입은 마에다가 1999년 알렉산드르 카렐린에게 완패한 후 은퇴를 선언하자 Rings의 인기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마에다 아키라는 경영에 더 집중하는데, 각 체급 타이틀 신설 및 무차별급 토너먼트를 지양하고 각 체급별 토너먼트 개최, 유망주 선수들을 수급하여 토너먼트를 개최(라이징 스타 토너먼트)하는 등 나름대로 노력을 한다. 하지만 개정된 룰 자체가 현대 MMA에 동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대중성이 없을 정도로 재미가 없었고, 이는 흥행 부진, 재정난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1997년 타카다 노부히코와 DSE에 의해 PRIDE가 설립되면서 Rings는 점점 선수들을 빼앗기기 시작하여, 선수 수급이 어려워졌고, 케이블방송사인 WOWOW와 중계권 연장 계약이 결렬[9] 되면서 재정난을 극복하지 못 한채 결국 2002년 2월 마에다가 일방적으로 해산을 선언하며 종말을 맞는다.[10]
여담으로 UWF, 신일본, 전일본 프로레슬링 등 선수와 대표를 겸직하는 단체가 재정난에 빠지면, 단체의 대표들이 착복을 하는 등 금전 갈취면에서 자유롭지 못 했는데, Rings만큼은 해체 선언이 되기 전까지 금전적인 면에서 매우 청렴하다고 알려져 있다. 마에다의 올곧은 성격이 좋은 쪽으로 발휘된 케이스. 의외로 이 사실이 알려지자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신뢰가 높았다.[11] 이 일화 덕분에 알렉산드르 카렐린과 경기 섭외를 요청했을 때, 흔쾌히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 이전부터 올림픽에서 명성이 높았을 때 여러 프로레슬링 단체에서 거액의 대전료로 회유했으나 번번히 거절했는데, 애초 카렐린의 가치관은 돈이 아니라 신뢰였다. 따라서 주변 사람들이 말하는 마에다 아키라에 대한 평판을 보고 경기 참전을 결정한 것. 실제로 카렐린 측에서 대전료는 보통 수준으로 받았다. 하지만 경기는 카렐린 리프트 등이 나오는 등 볼거리가 많은 만큼 당연히 워크다. 관련 링크
해체 이후 마에다 아키라는 ZST라는 상호명으로 링스 룰과 같은 아마추어 선수들이 출전하는 이벤트를 개최하며, 격투기 저변을 지원하는 프로모터로 역량을 발휘한다. 이 ZST 룰에 두각을 나타내서, 마에다가 K-1 히어로즈 슈퍼파이저로 취임할 때, 프로 데뷔한 선수가 바로 토코로 히데오. 여담이지만 토코로 히데오는 기존 링스 룰에 체득한 경기 스타일로 '경량급의 볼크한'이라고 불리우게 되어, 5할 승률 성적 대비 인기가 많은 선수가 된다.
2008년 'Rings : The Outsider'라는 상표로 부활.
아이러니하게도 유럽에서는 본토 대회가 해산된 후에도 명맥이 이어지고 있었다고 한다.
2. 역대 타이틀
2.1. 토너먼트 타이틀
2.1.1. 메가 배틀 토너먼트
2.1.2. 킹 오브 킹스 토너먼트
2.1.3. 체급별 토너먼트
2.1.4. 기타 토너먼트
2.2. 체급별 타이틀
2.2.1. 무차별급
- 4대 챔피언 길버트 아이블은 PRIDE로 이적하며 타이틀 반납.
2.2.2. 미들급
[1] 다만 이시이 관장에 의하면 자신이 먼저 생각해낸 아이디어를 마에다가 도용했다고 한다.[2] 장타는 가능하다.[3] UWF 출신이었던 사쿠라바 카즈시가 PRIDE에서 그레이시 가문을 비롯한 그래플러들에게 강함을 보였던건 기존 그래플러들이 관절기에 대응할때 이스케이프를 시도한 후 반격을 노리는데, 사쿠라바는 그런거 없이 바로 역서브미션을 노렸기 때문에 기존과 다른 대응에 그래플러들이 고전했던 것이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사쿠라바의 이 방식은 전혀 통하지 않게 된다.[4] 실제로 KOK 룰이 도입된 후 데뷔했던 안토니오 호드리고 노게이라, 댄 핸더슨, 히카르도 아로나 같은 포지셔닝 그래플링에 강점이 있던 선수들이 KOK 토너먼트에서 호성적을 거두었다. 기존 룰에 활동했던 선수 중 유일하게 선전했던 선수가 볼크 한인데, 나이가 불혹이 넘었음에도 본래 헤비급이었고, 경험 및 체중을 이용한 태클 방어가 용이해서 선전할 수 있었다. KOK 토너먼트 당시 노게이라를 상대로 유일하게 판정까지 가기도 했다.[5] 따로 언급한 이유가 있다. KOK 초창기일때는 선수 상호합의하에 기존 링스 룰로 경기를 치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링스 지부 출신 선수들이 토너먼트에 만날 경우 기존 링스 룰로 상호합의하에 경기를 치르기도 했다. 그러나 KOK 토너먼트 2000부터 이벤트전이 아닌 경기들은 KOK 룰로만 경기를 하는 것으로 변경된다. 기존 링스 지부 네트워크로 선수를 수급하긴 했지만, 링스 네트워크는 더이상 선수를 육성시키는게 아닌 대회를 치르기 위해 섭외하는 프로모터 개념이 된 것. 이는 MMA 업계에서 링스의 영향력이 더 이상 강하지 못 함을 의미했다. 실제로 선수들은 토너먼트 우승 상금을 목적으로 링스 지부와 출전 문의를 하기도 했으니...[6] PRIDE의 스탑 돈 무브와 유사하나 서브미션 그립 중 발생 시 그립까지 재현한다.[7] 이 토너먼트가 Rings의 마지막 공식 토너먼트였으며, 결승전이 끝나고 난 뒤 마에다 아키라가 잠정 해체를 선언한다.[8] 후술하겠지만 마에다 아키라는 체급을 각각 나누며 대회를 개최하고 있었다. 그러나 선수 수급의 문제가 생겨버리면서 무제한급 토너먼트를 개최하게 된 것이다.[9] 본래 2002년까지 방영되는 계약으로 연장 협상을 했던 것. 그러나 링스의 인기가 시들었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계약 결렬이라는 통보를 받게 된다.[10] 이 당시에 마에다 아키라가 밝힌 바에 따르면 링스의 재정 상황이 쫄딱 망했다는 의구심에 아니라고 반박했다. 오히려 두터운 매니아층이 있었고, 본인 경영 수완을 발휘해서 실속은 거두고 있었다고 한다. 인기가 점차 떨어지자 대회 적자를 최소화하기 위해 관중석이 적은 규모의 장소에서 개최하는 등 나름 노력도 했다. PRIDE와 대비되는 부분. 다만 케이블 중계권의 지원이 없으면 더 이상 유지하기 어려운 상태였다고...공교롭게 이 때 링스 지부가 나름대로 노력을 했지만, 선수 수급이 원활하지 않았고, 정상적으로 대회 개최하는게 어려운 수준까지 와서 언젠가 해체하려고 결심한 상태였다고 한다. 그래서 마지막이라고 개최했던게 앱솔루트 클라스 토너먼트로 무제한급 토너먼트를 다시 개최했던 것. 다만 잠정 해체일 뿐 단발성으로 이벤트는 지속한다고 밝혔고, 볼크 한 은퇴경기 이벤트를 개최하는 등 지금까지 단발성으로 대회는 개최되고 있는 중이다.[11] 이 덕에 당시 대전료 떼먹기나 대전료 미지급하는 격투기 단체가 많았는데, Rings만큼은 업계에서 돈 가지고 장난치지 않는 단체로 많이 알려져서 해외 선수들이 자발적으로 Rings에 참가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