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아론
1. 개요
일본의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가 1885년 3월 16일자 일본 신문 <시사신보(時事新報)>[2] 에 〈탈아론(脫亞論)〉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기고하면서 일본의 나아갈 길을 제시한 것을 이르는 말. "한국, 중국 등 아시아 국가들은 나쁜 친구이므로 일본은 이웃의 나쁜 아시아 나라들과 관계를 끊어야 한다."는 내용이다.
또한 일본 제국의 국가적인 사상이었다고 와전되어 많이 알려졌지만, 전혀 사실이 아니다. 애초에 메이지 유신의 명분은 왕(천황, 사실상 일본 그 자체)을 드높이고, 외세(오랑캐, 서구)를 배격한다는 존황양이(尊皇攘夷)[3] 였다. 이를 위해 일본의 정신(혹은 고유한 것)을 바탕으로 서양의 기술을 활용한다는 화혼양재(和魂洋才)를 기본 골자로 하여 근대화를 진행하려 한 것이다. 메이지 유신으로 시작된 일본의 근대 사상은 오히려 일본식 중화사상에 가까웠다. 사실 일본 제국의 국가적인 사상이라고 한다면, 아시아주의와 대동아공영권 이 두가지다. 두 가지 모두 일본식 중화사상에 가깝다. 또한 탈아론은 1885년 이후부터 패전 때까지 일본에 크게 알려진 적이 없었고, 다른 문헌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패전 이후인 1950년대 이후부터라고 한다.[4]
2. 상세
탈아입구와 혼동되는 경우가 많지만, 엄연히 다른 사람이 주장한 다른 용어다. 탈아입구라는 용어를 처음 쓴 사람은 스즈키 켄타로(鈴木券太郎)라는 언론인으로 알려져 있다.[5]
후쿠자와는 원래 조선, 청나라와의 연대에 적극적인 인물이었다. 후쿠자와는 갑신정변 3년 전인 1881년에 김옥균과 만났는데, 김옥균에게 인간적인 매력을 느낀 후쿠자와는 그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하고 '한성순보'에는 고문까지 파견해 준다. 또한 조선인을 교육시키는 데는 한글이 효과적이라고 파악하여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주장인 국한문 혼용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사재를 털어서 한글 활자 주자비용도 지원했다.
그러나 갑신정변이 아시아 국가인 청나라의 개입으로 허무하게 실패하고 소수의 망명자를 제외한 주동자들이 멸족을 당하자 후쿠자와는 완전히 변해버렸다. 갑신정변 실패 후의 참변을 "인간 사바세계의 지옥이 조선의 한성부에 출현했다"고 비난한 후쿠자와는 1885년 2월 '시사신보'에 '탈아론'이란 제목의 사설을 기고했다. 나아가 그는 "조선의 멸망이야말로 조선 국민을 위한 것이다"라는 말도 했다. 또한 사설을 기고할 당시 일본은 조선과 청나라와 단절 수준으로 외교 관계가 최악이었다. 원래 아시아주의 지지자이기도 했던 후쿠자와 유키치가 탈아론이라는 논설을 기고한 것에는 이런 배경 때문이라는 의견이 있다.[6]
단, 탈아론이 후쿠자와 유키치가 쓴 것이 정말 맞느냐에 대해서 일본에서 논란이 있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서명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문체에서 후쿠자와 유치키 본인의 것이 아니라는 의견도 있다.[7]
3. 탈아론 전문
3.1. 탈아론 논설 중 조선과 청나라를 언급한 부분 요약
"서구화의 바람이 동양을 향해 불어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모든 국가는 서구사회와 더불어 이 운동에 동참하여 문명의 열매를 맛보는 것 이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문명은 홍역과 같지만, 여러 이로운 점을 가져다 준다는 점에서 홍역보다는 이롭다. 그러므로 국가는 문명에 거역할 수 없으며 이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문명화 과정에서 보수적인 정부는 걸림돌일 뿐이며 이를 뒤집어야만 일본에서 문명화를 이룰 수 있다. 옛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얻는 과정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아시아를 벗어나는 것'(脫亞)이다. 비록 일본이 이미 정신적으로는 아시아를 벗어났지만, 이웃의 두 나라(조선과 청나라)는 개혁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이 나라들의 유교적 가르침은 모두 위선적이고 뻔뻔할 뿐이다. 청나라와 조선의 개혁이 실패한다면, 이들은 곧 세계열강에 나라를 빼앗길 것이다. 서구인들은 언제나 일본, 청나라, 조선을 같은 문화를 가진 비슷한 나라들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일본에 걸림돌이 될 뿐이다. 나쁜 친구를 사귀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마찬가지로 나쁜 인상을 주기 때문에, 일본은 이웃의 나쁜 아시아 나라들과 관계를 끊어야 한다.#
- 『시사신보』1885(메이지 18)년 3월 16일
4. 탈아론과 흥아론[8]
서구의 지식과 기술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던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거둔 승리로 자신감을 얻었고, 1차 세계 대전에서 승전국이 되어 명실상부 아시아의 패권국이자 세계 열강이 된다. 그러나 여전히 아시아는 서구 세력의 영향력이 강했고, 떠오르는 강대국 일본 제국에게 여러모로 많은 걸림돌이 되었다. 이런 와중에 19세기부터 존재했던 흥아론이 매우 각광받기 시작했고, 아시아가 힘을 합쳐 서구 세력을 몰아내고 잘 살자는 대동아 공영권의 사상적 토대가 된다. 당연히 그 속내는 아시아 전체를 서구 열강으로부터 빼앗아 일본의 식민지로 삼자는 것이었다.
흥아론은 세부적인 부분은 조금씩 다르지만 일본 외에 조선이나 청나라에서도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았다. 후쿠자와 유키치도 처음에는 동아시아 삼국이 근대화를 이루어서 단합하여 외세를 막아내자고 주장하다가, 조선의 갑신정변이 실패하면서 방향을 바꾸었다고 한다. 그는 조선과 청나라가 근대화를 이루려면 일본처럼 구체제를 쓰러뜨려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두 나라 모두 근대화를 위한 개혁 정책들이 보수파의 저항으로 실패하여, 후쿠자와는 아시아 근대화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접었다.[9]
흥아론이 아시아의 연대를 외친 것이라면, 탈아론은 어차피 안될 놈들 버리고 혼자 열강이 되자는 주장이었다. 어느 쪽이든 일관된 체계를 가진 사상이라기보다 서구 열강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타자화한 결과물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기에 서구 열강에 대한 경계와 적대감을 공유하던 두 생각은 후에 대립 관계에서 상호 관계로 나아가게 된다.[10]
5. 인터넷에서 떠도는 일본 관련 루머
6. 관련 문서
[1] 흥아론은 아시아주의 혹은 범아시아주의라고도 한다.[2] 이 신문의 후신이 다름아닌 산케이 신문이다.[3] 존왕양이(尊王攘夷)라고도 한다.[4] 히라야마 요우 (2004). Fukuzawa Yukichi no shinjitsu (福沢諭吉の真実). Bungei Shunju. pp. 193–239.[5] 마루야마 마사오『福沢諭吉の哲学 他六篇』松沢弘陽編 岩波書店〈岩波文庫 青N104-1〉2001년 6월[6] 니시카와 슌사쿠「解説」時事小言・通俗外交論』慶應義塾大学出版会〈福澤諭吉著作集 第8巻> 395-425p 2003. 9.[7] 이다신야,『歴史とテクスト 西鶴から諭吉まで』光芒社, 2001년 12월[8] 흥아론은 아시아주의 혹은 범아시아주의라고도 한다.[9] 특히 1884년 12월 갑신정변은 후쿠자와 유키치 개인적으로도 조선의 독자적인 근대화에 기대를 걸고 자금을 원조했으나 청나라 군대의 개입으로 좌절하고, 당시까지만 해도 일본의 군사력은 청나라에 훨씬 못 미쳤으므로 청나라의 간섭을 벗어난 조선의 독자적 근대화 희망을 버렸던 것이 탈아론 작성의 직접적인 계기였다. 자세한 내용은 西洋思想の日本的展開-福澤諭吉からジョン・ロールズまで』慶應義塾大学出版会、2002年、福澤諭吉の西洋理解と「脱亜論」 참조.[10] 이안 브루마(Ian Buruma)와 같은 연구가들의 경우, 탈아론과 흥아론이 대립 관계에서 상호 관계로 전환한 것은 늦게 잡아도 야마가타 아리토모 집권기에는 벌어진 일로 보고 있다. Buruma, Ian. <Inventing Japan: 1853-1964>. London: Weidenfeld & Nicolson, 2004 2014년 국내 출간명 <근대 일본>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