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가타 아리토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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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제3대 총리. 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가오루와 더불어 '조슈(長州) 3존'으로 불리는 인물이자 '''일본 군벌의 조상''', '''일본 육군의 아버지.'''
타카스기 신사쿠의 기병대(奇兵隊) 창설에 참여하며 두각을 나타낸다. 유신 후, 사이고 쥬도와 함께 유럽 유학을 떠나 각국의 군사 제도를 시찰한다. 육군대보(陸軍大輔)로서 사이고 다카모리의 협력을 얻어 징병제의 도입과 육군성과 해군성의 설치 등 군제 개혁에 종사한다.
일본 의회제도 체제 아래 최초의 총리.[1] 서양의 군사제도를 받아들이는데 힘을 쏟았으며, 1894년 청일전쟁 때 조선에 주둔하는 제1사령관, 1898년 원수가 되었다. 1903∼1909년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번갈아 추밀원 의장직을 맡았고,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공작 작위를 받았다.
2. 생애
조선 강점에 직접적으로 관여한 바는 없으나 그와 관련된 모든 일의 뒤에는 야마가타가 있었으며,[2] 후일 일본 군부와 정계 양측에 걸쳐 자신의 파벌[3][4] 을 거대하게 구축하여 메이지와 다이쇼 연간의 일본 정치판을 막후에서 장악하여 뒤흔들었다. 일본 근대사를 지배한 자 로써 정말 한민족들과 중국 등 동남아시아와 오세아니아 국가들 에게는 정말 '''모든 일의 원흉의 원흉'''인 자이다. 그래서인지 야스히코 요시카즈를 비롯한 일부 일본 진보주의자들이나 한국인들 일부에서는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보다 이 자를 죽였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한국인 입장에선 비교도 안되게 더 유명할 수 밖에 없지만, 이토는 19세기 후반 특유의 근대 제국주의적 의미에선 자유주의적 성향도 꽤 있었고, 유연했다. 반면 야마가타는 대외정책 뿐만 아니라 당장 근현대 일본인들 본인들도 체감할수 있었던 사회적 군국주의의 초석을 닦은 인물이기 때문에 좌익, 자유주의 성향 일본인들 입장에선 더욱 악랄해 보이는게 자연스러운 일이다.[5]
근대 일본의 근대화 계획을 수립하며 주권선과 이익선 개념을 창안했다. 주권선은 일본의 주권이 행사되는 선으로 일본 본토와 오가사와라 제도, 오키나와이고 이익선은 주권선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영향력을 행사해야 하는 선으로 한반도와 대만, 사할린 등이었다. 조선과 대만을 병합한 이후에는 조선과 대만이 주권선으로 편입되고 이익선은 만주와 필리핀으로 확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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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대신 취임 후.[6]
일본의 국내 정치에 있어서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는데, 사실상 일본을 군국주의로 몰고 간 중심 인물로 볼 수 있다. '''천황의 충량한 신민들아, 나라에 절대적으로 충성하여라'''라고 요약할 수 있는 군인칙유(1882년)와 교육칙어(1890년)는 형식상 메이지 덴노의 이름으로 선포하였으나 그 배후에는 야마가타의 영향력을 부인할 수 없다. 특히 교육칙어는 야마가타 자신이 이끌던 1차 내각에서 칙령으로 반포된 것으로, 당시 자유주의 정치운동을 봉쇄하려는 반동적인 목적에 따라 탄생한 것이었다. 메이지 덴노의 이름으로 발표된 조칙이지만, 천황 절대주의를 신봉하던 야마가타가 정당제를 비롯한 서양식 입헌정치를 일본에 적용하는 것을 결사반대하던 인물이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사실상 야마가타의 작품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2차 야마가타 내각 때인 1900년에는 치안경찰법이 제정되었다. 이는 청일전쟁 이후 조성된 호황기에 따른 노동쟁의의 증가세와 반정부적 기조를 억제하는 것이었다. 이는 이후 치안유지법이란 형태로 진화해 일본 내 사회주의 세력을 작살내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다.[7]
이와 동시에 군부대신 무관제 또한 칙령에 따라 제정되었는데, 이는 내각을 구성하는 2명의 군부대신, 즉 육군과 해군대신 임명에 있어 민간인 대신 현역 육/해군 대/중장만으로 한정하도록 한 것이다. 이는 군사행정의 특수성에 따라 민간참여가 당연히 배제되어야 한다는 점과 군부대신의 권한에 일반 업무와 함께 군령사항이 포함되는 것이라는 야마가타의 의중이 반영된 것인데, 이로 인해 일본 내각은 군부의 이익에 따라 끌려다니는 꼴을 면하지 못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새로 조직된 내각이 마음에 안 들면 군부는 군부대신 후보를 내지 않았다. 당연히 빈 자리가 남아있는 내각은 정상적으로 출범하지 못하게 되고, 결국 군부의 요구사항이 충족된 후에야 군부대신이 임명되어 내각이 업무를 볼 수 있게 되었다.[8] 그리고 이 패턴이 패전 전까지 거의 무한 반복된다(…). 결국 전시에는 아예 군인이 총리를 겸직하는 상태가 패전 직전까지 이어졌다.
입헌정우회라는 정당 비슷한 것을 만든 것 외에는 평생 파벌을 만들지 않은 것을 자랑으로 여겼던 이토 히로부미와는 달리, '조슈벌'로 불리는 파벌의 영수로서 활동했다.[9] 당장에야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추천한 인물들이 데라우치 마사타케, 가츠라 타로같이 그럭저럭 능력은 되는 인물들이라 넘어갔고, 하세가와 요시미치 우가키 카즈시게까지도 봐줄만은 했다. 하지만 다나카 기이치 시절까지만 해도 총리, 육상 등을 재직하면서 절대적인 권력을 누리던 조슈벌은 다나카의 후계자로 꼽히던 우가키가 우가키 군축으로 군부의 미움을 사 총리가 되는데 실패하면서 권력에서 밀려나기 시작했고 야마가타가 배척했던 비조슈벌 출신의 소장파 장교들이 새로운 메인스트림으로 성장하면서 이들의 배척을 받아 물러나게 된다. 그리고 이 비조슈벌 소장파의 대표적인 인물이 다름아닌 '''도조 히데키'''. 하지만 조슈벌을 몰아낸 도조도 조슈벌만 아니면 다 괜찮다, 혹은 조슈벌에 입은 원한을 갚기 위해 조슈 출신은 덮어놓고 반대한다는 야마가타의 족벌 인사를 뺨치는 코드 인사를 하다가 무타구치 렌야 따윌 심복이랍시고 신임하는 삽질을 연속하게 되고[10] 결국 일본 제국은 멸망한다....
평소 공금횡령을 하는데 1인자였다. 한마디로 내 돈은 내 돈이고 국가의 돈도 내 돈. 그래서 65만엔(현재 가치로 100억엔) 상당의 육군성 공금을 횡령해서 야마시로야 와스케(山城屋和助, 1836~1872)라는 같은 조슈 출신이자 기병대 부하였던 어용 상인에게 투자하라고 대출했다가, 상인이 싹 날려먹으니 책임지라고 협박해서 이 상인이 공금횡령을 사죄하며 자살하는 촌극이 벌어졌다. 이 사건이 바로 야마가타를 첫번째로 옷 벗게 만든 야마시로야 사건(山城屋事件)[11] 으로, 메이지 유신 이후 최초의 정치비리 사건이었다.
야마가타가 정치계에서 완전히 물러나게 된 것은 뜻밖에도 '''히로히토 황태자의 신붓감 문제''' 때문이었다. 야마가타가 지지한 화족 규수 이치죠 도키코(一条朝子)[12] 가 아니라, 반대파인 사츠마 파가 지지하는 방계 황족 구니노미야 나가코 여왕이 황태자비로 간택되었다. 나가코 여왕은 사쓰마 번 제12대 번주 시마즈 타다요시(島津忠義)의 외손녀[13] 이기에, 사쓰마 파에서 나가코를 황태자비로 밀었던 것이다.
그러자 야마가타는 1920년에 나가코 여왕의 외가인 시마즈 가문에 색맹이 있었다는 기사가 나온 것을 근거로, 나가코 여왕의 아버지 구니노미야 구니요시 왕[14] 에게 "황실을 위해 약혼을 취소하라!" 요구했다. 이 사건이 알려지자 그런 기사가 나온 것부터가 야마가타의 책략으로 본 일본 국민들은 나가코 여왕을 동정, 야마가타를 규탄하는 대규모 시위까지 했다고 한다.[15] 결국 야마가타는 이 소동이 일단락되자 공직에서 사퇴, 은둔에 들어갔다[16]
참고로 야마가타는 이보다 몇년 전에 있었던, 영친왕의 신붓감 후보 선정 건에도 관여했다. 이방자 여사의 회고록에 따르면, 이 때문에 이방자의 아버지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梨本宮守正) 왕이 "야마가타를 혼내주겠다!!" 하며 분노했다고 한다.
군벌과 군국주의의 화신의 보여지는 이면에는 냉정한 판단력과 국제정세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보유한 인물이기도 하였다. 일본이란 나라가 가지고 있던 국력의 한계를 파악하고 미국, 영국과 대립하여서는 안된다는걸 잘 알던 야마가타는 고마다 겐타로,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비롯한 육군의 후배들이 남만주를 넘어 만주전체를 경영하겠다는 의도를 드러내자[17] 라이벌인 이토 히로부미와 합세하여 이를 제지하기도 하였다.
3. 대중매체에서
- 바람의 검심에 등장. 비중있는 역할로 역사상 이미지와는 달리 꽤나 사람좋게 나온다. 켄신에게 관직을 권하면서 켄신을 칼잡이라고 경멸하는 자들은 자신이 권력으로 내리누른다라고 말하다가 켄신에게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저런 놈들이 설친다고 한소리 듣거나[18] , 사이토 하지메의 발언을 빌어 “오쿠보 도시미치 사후 1급 유신지사는 다 없어지고 역량 떨어지는 2, 3류 떨거지만 남았다”고 간접적으로 까이는 등 마냥 좋게나오지는 않는다. 이때의 성우는 미즈타니 세이지(스튜디오 갤럽 시절) → 카네코 하리이(스튜디오 딘 시절)/온영삼.
- 실사영화판에서는 켄신이 자신의 요청을 거절하자 비웃음과 함께 "전부 유신을 이루기 위해서였다!"라며 화를 내는 등 원작과 다르게 속물에 가깝게 등장한다. 근데 사실 실제 역사대로 보자면 이게 맞는 고증이다. 배우는 용과 같이 5의 세리자와 카즈히코의 페이스 모델 겸 성우인 오쿠다 에이지.
- NHK 대하드라마에서는 1967년작 <세 자매>부터 2018년작 <세고돈>까지 총 8작품에 등장했으나 의외로 등장이 그리 많지 않은 편인데, 특히 세고돈에서는 야마시로야 사건으로 실각하는 모습[19] 과 , 세이난 전쟁에서 사이고에게 최후의 통첩을 날리는 모습이 나온다. 해당 배역은 에모리 토오루와 니시다 토시유키[20] , 나가오카 타스쿠, 무라카미 싱고[21] 등이 거쳐갔다.
[1] 첫 중의원 선거가 1890년 시행되었다.[2] 1896년(고종 33) 6월 9일 러시아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서 외상 로바노프(Lobanov)와 일본의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특사가 한국과 관련하여 로마노프-야마가타 비밀조약을 체결하였다.[3] 만주사변과 태평양 전쟁 시기 전쟁을 막장으로 끌고가던 일본 육군 파벌의 뿌리이자 군국주의의 세력 그 자체[4] 유신3걸로 불리던 기도 다카요시는 얼마뒤 사망했고, 사이고 다카모리는 정부 내에서의 정책적인 분쟁으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토벌되었으며, 남은 오쿠보 도시미치도 얼마 못 가서 사망하였다. 이후 이토 히로부미는 오쿠보의 후계자 위치에, 야마가타는 사이고로 대표되던 사쓰마 파벌이 약화된 시기에 조슈파벌의 대표로서 일본 육군의 수장 위치에 자리잡았다. 2명이 권력을 장악하고 난 뒤에 서구식 체제를 따라서 총리직제를 도입하였으니 이들의 권력장악 기간은 상상을 초월했다.[5] 야마가타가 하얼빈에 갔다면 죽이겠지만, 이미 육군 원수라는 군 최고원로 위치에 있었던 탓인지 이때 일본에만 있었다. 그 때 당시 이토는 문관계의 우두머리로서 러일전쟁의 휴전사항에 대한 최종 마무리 차원에서 갔다. 설사 만약에 이 자를 알고 있던 누군가가 사전에 죽였다면 모르겠지만 말이다.[6] 태극 모양의 훈장이 보이는데 대한제국에서 1908년에 수여한 대훈위금척대수장으로 보인다. 이토 히로부미도 이 훈장을 받은 바 있다.[7] 치안유지법은 현재 대한민국 국가보안법의 할아버지 격 정도 된다.[8] 사실상 육군과 해군 고위장성들이 정권에 대한 거부권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를 무기로 군부는 민간 정치인들을 압도하면서 군비확장과 대외적 군사행동(전쟁) 등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무제한적으로 관철시켰다.[9] 이토는 앞에서 나온 것처럼 오쿠보 사망 이후 문관파의 수장이였다. 모든 문관들의 수장을 자처하는 자가 무슨 파벌을 만들겠는가. 이에 비하여 메이지 유신의 두 무력집단이던 조슈 파벌과 사쓰마 파벌이 일본군으로 편성되었기에 야마가타는 조슈 파벌의 수장이여야 했다. 그럼에도 사이고와 사쓰마 파벌의 일부가 서남전쟁에서 제거되면서 무장파를 대표하였다.[10] 조슈벌 출신 군인들이 상당히 현실적이었던것과 대조된다.[11] 이 무렵,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근위도독으로 근위병을 총괄하는 위치였으나, 근위병 내부의 사츠마계 군인은 조슈의 야마가타를 불복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거기에 야마시로야 사건을 계기로 육군성 회계감독 타네다 마사아키가 비밀리에 조사를 시작해 상당한 육군성 공금이 대출되어 있었던 것이 발각되고, 키리노 도시아키 등 사츠마계 육군의 강한 추궁이 있었다.[12] 화족 이치죠 사네테루(一条實輝) 공작의 3녀. 황태자비에서 탈락한 후, 방계 황족 후시미노미야 히로요시(伏見宮薄儀) 왕에게 시집갔다.[13] 나가코 여왕의 어머니 치카코(俔子) 왕비는, 시마즈 타다요시와 측실 야마자키 스마코(山崎壽滿子)의 8녀이다.[14] 독립운동가 조명하 열사의 의거로 죽었다.[15] 그나마 하급 사무라이 출신이고 군인 출신이어서 다행이었지, 민간인 출신이었으면 하라 타카시처럼 암살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하라 타카시는 이 사건에서 야마가타를 도와주었다가 '''하찮은 민간인이 천황가의 혼인에 개입했다는 이유로''' 결국 암살당했다.[16] 사실, 궁중모중대사건의 진행과정은 본문의 기술보다 훨씬 복잡하다. 나가코 여왕의 색맹의혹을 최초로 제기한 것은 야마가타가 아니라 사이온지 긴모치였다. 야마가타는 사이온지가 개인 면담에서 나가코 여왕의 색맹 가능성을 제기하자 비로소 반대에 나섰다. 그 이전에 야마가타는, 도키코의 어머니 호소카와 에츠코(細川悅子)가 조슈번 모리 가문 출신이었는데도 황태자비 선정에 영향력을 발휘하지 않았다고. 심지어 시마즈 가문과 구니노미야 구니요시 왕 자신조차, 의혹 초기 단계에서는 '황실의 번영을 위해서 약혼을 취소해야 하는 것이 맞지 않느냐.'는 의견이었다고 한다. 사태가 커진 것은, 야마가타라면 무조건 싫어했던 사다코 황후가, 야마가타가 뒤늦게 색맹 가능성을 제기하자 이것을 황실에 대한 무례로 간주하고 정면으로 반발하면서부터였다.[17] 그리고 고다마, 데라우치등의 조슈벌 후배들 조차 중국을 식민지화하는건 허황된 일이라고 여겼다.[18] 마침 직전의 소동이 바로 이런 생각을 가진 경찰관들을 때려눕히는 것이었다[19] 실제로 키리노 도시아키 등 사쓰마 출신들이 강하게 추궁했다는 기록이 반영되어 키리노가 칼빼들고 집무실에 쳐들어간다[20] 니시다 토시유키는 후쿠시마현(구 아이즈번) 출신인데,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고향 야마구치현(구 조슈번)과는 지역관계가 현재까지도 매우 험악하다.[21] <세고돈>에서 야마가타 아리토모 역을 맡았으며, 그 외에 사나다마루에서 나오에 카네츠구 역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