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질된 유교적 전통

 

1. 개요
1.1. 변질된 유교적 전통도 유교이다
1.2. 변질된 유교적 전통은 유교가 아니다
2. 과거(조선 시대)
2.1.1. 신방례
2.1.2. 면신례
3.1. 반론
4.1. 남자는 음식을 하지 않는다
4.2. 육아는 여자들의 전유물이다
4.3. 남자는 상에서, 여자는 바닥에서 밥을 먹는 것
4.4. 남편은 아내에게 반말, 아내는 남편에게 존댓말
4.5. 여성은 재산상속을 받지 못한다
7. 오락에 대해 금기시
8. 성(性)의 금기시
9. 결론
10. 관련 문서
11. 둘러보기


1. 개요


본래 공자의 가르침으로 일컬어지는 유학에서 변질된 양상으로, 현대 한국에서 유학 및 유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유발하는 가장 핵심적인 원인에 해당한다.
조선이 성리학을 사회질서관념체계의 기본으로 삼은뒤 사림파가 그 이론을 심화시켜 정리했다. 그 후, 임진왜란병자호란을 겪으며 국가가 쑥대밭이 되었다가 재건하였는데 이러한 시기에 성리학이 교조주의, 원리주의로 가게 되며 사회가 경직되고 엄격해졌다. 이슬람 세력이 몽골의 침입 이후, 황금기가 끝나고 원리주의 세력이 커진 것과 비슷한 양상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조선말 세도 정치, 외세 침탈, 일제강점기, 6.25 전쟁독재 을 거치면서 왜곡된 유교가 근현대 이후로도 쭉 전승된 탓에 현재의 유교 인식이 부정적으로 굳어지는데 일조한다.

유학의 내용과 유교의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은 이 변질된 유교전통을 들어 유학과 유교의 가치가 없다고 주장한다. 이는 변질된 기독교변질된 이슬람교를 이유로 해당 종교들이 가진 긍정적 영향과 가치를 싸잡아 비난하는 것과 같다.
오늘날 가장 원류이자 시초의 양상으로 꼽히는 유학의 모습은 단연 공자 및 맹자의 학설들로, 지배층의 논리에 완전 편입되기 전의 모습이다. 하지만, 공자가 주창한 대로 유학의 본래 모습은 주나라의 사회풍습이며, 유학이 만들어졌던 당시부터 이미 상당부분 기존 지배층이 허용하던 사회상이다.
다만 한나라 시절 유교가 국교로 받들어지며 권력의 입맛에 맞게 변질되기 시작한 것 또한 사실이다. 대표적으로 한무제 시절 동중서가 천인감응사상[1]을 주창하여 유교적인 논리를 지배층의 권력 기반을 공고히 만드는 데 사용한다.
다만 이는 유교만의 특징이라기 보다는 정치 권력과 결합한 사상이나 종교가 다들 가지고있는 문제다. 로마 제국만 하더라도 예수 추종자들의 사상을 부정하고 탄압하다가 훗날 오히려 자신들의 지배 이념으로 삼아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하였고, 중세에는 왕권신수설을 통해 한층 더 권력기반을 강화하는데 사용하였다.[2]
이렇게 유교가 원래의 가르침이 적힌 원전교본을 두고 시대흐름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면서 '변질된 모습도 유교의 한 부분으로 인정할 것이냐'를 두고 각기 다른 입장이 존재하는데, 이 차이는 조선말기 정치상황에 의한 왕권의 붕괴와 신분제 변동 등 사회급변에 따른 풍습의 변화에서 나타난 ''''변질된 유교적 전통''''을 유교의 일부로 보느냐, 그렇게 보지 않느냐로 가름한다.[3]
조선시대, 민간의 생활사와 풍속에 관련된것들이 20~21세기에 들어 잘못 전해진 것들은 조선/오해 항목 참고

1.1. 변질된 유교적 전통도 유교이다


종교가 권력과의 야합으로 원래와 다른 모습으로 변질되는 것은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대부분의 종교들[4]이 보이는 보편적인 현상이며, 그러한 변질에도 불구하고 당대 사람들이 '''그 변질된 양상을 해당 종교의 것으로 인지하였다'''면 이미 '단순 변질'이라며 분리하기는 불가능한 해당 종교의 모습으로 보아야한다.
종교는 사회현상이자 문화의 일부분으로서 공동체 내부에서 지속적인 구성 과정상에 있다. 특히 종교사회학적인 관점에서 종교는 경전으로 지칭되는 특정한 문헌 기록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해당하는 문헌 기록과 관련한 해석, 교리 등을 공유하고 재생산하는 공동체의 활동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즉, _경전을 전승한 공동체가 그 경전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과정과 결과 전반이 종교의 범주 안에 포괄될 수 있다_. 이 때문에 변질된 전통이라고 해서 유교가 아닌 것은 아니다. 각 시기에 이루어진 '변질'은 각 시기에 이루어진 '''유교의 구성과 재구성'''이라는 데에서 그 커다란 궤를 벗어나지 않는다. 경전이나 그 주석에 기술된 과거의 '유교'도 유교지만, 해당 종교 전승을 구성하는 공동체가 '유교'라고 생각하는 것 또한 유교다. 종교의 변질은 단지 종교의 구성과정이 야기한 현시점의 결과가 현재 사회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기술하는 표현일 수 있다.
이슬람, 기독교, 불교와 같은 거대 기성 종교들 역시 그들의 변질된 특성으로 인해 비판받고 있는데, 유독 유교만 콕 찝어서 '그것은 원래 유교의 모습이 아니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1.2. 변질된 유교적 전통은 유교가 아니다


한국은 일제시대부터 해당 종교 전승을 구성하는 공동체가 아니다. 그 시기부터 현대 한국에 이르기까지 사회 구성원 대부분은 사서삼경은 고사하고 논어 한 글자도 읽어본 적이 없다. 그러므로 현대 한국은 유교 공동체라 볼 수 없으며, 이러한 공동체가 유교라고 생각하는 '변질된 유교 양상'은 결코 유교가 될 수 없다.
한국이라는 공동체의 대부분이 이슬람교라고 생각하는 사회현상에 대해서 이슬람교의 전문가들이 입을 모아 그것을 이슬람교의 모습이 아니라고 한다면 누가 옳은 것인지는 자명하다. 그러므로 변질된 유교적 전통에 대해 _'''유교의 영향이 남아 있다'''_고 하면 옳은 진술이지만, '''_변질된 유교적 전통도 유교의 모습이다_'''라고 한다면 그것은 틀린 진술이다. 당장 '유교'는 서구적으로 정의된 종교로 보기 어렵기 때문에 서구적 시각으로 구성된 종교사회학으로 정의하기는 힘든 범주이며, 유교의 변화나 확산은 각 학자들의 논쟁이나 저작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유교가 그 지속력을 완전히 잃어버린 순간에, 유교에 크게 영향을 받은 어떤 사회가 다른 여러 문화나 역사적 사건과 만나서 변화한 모습을 가지고 유교라고 하기는 어렵다. 2000년을 훌쩍 넘는 유교의 역사 속에서 그러한 일은 없었는데 종교사회학이라는 범주 하나로서 그와 같은 현상 역시 유교라고 단언하는 것은 무리수다.
변질된 유교적 전통을 논하고자 한다면 최소한 현대 한국 악폐습의 유래를 명확히 밝히는 식으로 범위를 좁혀야 한다. 유교 국가가 아닌 현대 한국에서 '''유교의 잔재로 여겨지는 악폐습'''들이 _사실은 전통 유교의 가르침이나 실천 양상과 크게 다름_을 올바로 지적할 수 있어야 한다.
아래 서술되는 한국의 대부분의 모습이 변질된 유교적 전통이라고 하면서 막상 유교가 자리잡았던 조선시대에는 그러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면 그것을 유교적 전통이라고 할 수 없다.

2. 과거(조선 시대)


간혹 유교는 현대에 들어와 변질되었고, 조선시대에는 괜찮았다는 주장도 있지만, 사실 조선시대부터 이미 유교는 다방면하게 변질돼서 수많은 병폐들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아래의 "성차별"문단을 봐도 알겠지만, 20세기의 혼란들을 거치면서 더욱 보수적이고 왜곡되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긴 하다. 허나 모든 변질을 현대의 유산이라 여기는 것 또한 잘못된 사실이다.

2.1. 똥군기


일제 강점기의 뒤틀린 잔재라는 똥군기는 오해와 달리 일제 강점기가 아니라 이미 조선시기부터 만연한 문제거리였다. 특히 조선시대 유교 선비들과 관리들은 고위직, 하위직을 막론하고 적극적인 똥군기, 악습 폐해를 유지하고 강요해온 주체들이다.
얼마나 심각했는지 심지어 조선 임금도 이러한 병폐를 알고 있었고 이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지 논의하기도 했다.

2.1.1. 신방례




2.1.2. 면신례



유교 선비들이니깐 그래도 점잖았겠지 라는 환상을 단번에 깨준다. 이 면신례를 치르다 면신례로 불려온 기생이 매를 맞아 죽는가 하면, 조선시대에 금지된 를 잡아다 쇠고기를 포식하며[5], 사치스러운 유밀과까지 곁들어서 먹는 인간 말종 보여준다.
심지어 처음엔 봐주던 왕[6]조차도 면신례의 악폐습이 너무 도를 넘자 이에 대해 우려를 표하자 관리들이 되려 관습이라고 우기며 반발한다.
이것을 치루지 않으면 자신들의 동료로 인정하질 않았는데 이것을 당한 피해자들도 이후엔 자신들이 가해자가 되어서 새로 들어온 신입들에게 이를 다시 행했다.
승문원에서 신고식을 치르다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한 정윤화(鄭允和)라는 신래가 죽자 사헌주사 문제를 제기한다. 다들 쉬쉬하던 사건이고 양반 관료들의 사건인지라 사헌부로서도 나서긴 그랬지만 관료가 사망한 사건인지라 마냥 덮어둘 사안도 아니었다.
결국 칼을 빼든 사헌부의 고발에 의해 관련자들에 대한 처벌이 결정되었다. 승문원 박사(정7품) 강폭(姜幅)·신자교(申子橋), 정자(정9품) 신의경(辛義卿)은 태(笞) 50대를 맞고 파직당하고, 저작(정8품) 윤필상(尹弼商), 부정자(종9품) 권제(權悌)는 공신의 아들이란 이유로 단지 파직하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2.2. 선민사상


‘삼강행실(三綱行實)을 반포한 후에 충신·효자·열녀의 무리가 나옴을 볼 수 없는 것은, 사람이 행하고 행하지 않는 것이 사람의 자질(資質) 여하(如何)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 꼭 언문으로 번역한 후에야 사람이 모두 본받을 것입니까.’

정창손

유교의 원래 취지와 목적은 인본주의가 충만한, 사람이 배우기를 즐겨하고, 자신을 성찰하면 누구나 군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였다. 이처럼 유교는 오해와 달리 끝임없이 배울 것을 중요시 여겼다. 노론의 영수라고 하여 일부 유교까에게 자주 타겟이 되곤 하는 송시열조차도 자신의 딸에게 한글을 써가면서 훈육하였다.
하지만 조선시대 지배층을 중심으로 변질되어 유교의 본래 취지와 목적에서 변질, 선민사상을 가지거나, 백성들의 교화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을 가지는 삐뚤어진 엘리트주의가 싹튼다.
다만 이러한 어리석은 신하들의 유교의 본질을 망각한 형편없는 반응들에 기가 막혀한 군주가 "삼강행실(三綱行實)을 번역하여 민간에 반포하면 어리석은 남녀가 모두 쉽게 깨달아서 충신·효자·열녀가 반드시 무리로 나올 것이라고 일갈하기도 했다.

3. 연령차별


이 또한 유교가 상당히 비판받는 요소 중 하나로 특히나 유교를 정치에 적극적으로 도입한 한중일[7] 삼국에서는 이러한 이야기가 많이 보인다.
게다가 실제로 한중일은 집단주의 및 상명하복의 논리가 강한 편이라, 유교의 영향을 받은 나라들이 이러한 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의혹이 짙긴 하다. 그나마 중국은 모두가 평등해야한다는 공산주의 이념 하에 연령차별 문화를 적극적으로 청산했고, 일본은 제2차세계대전 패전 이후 상당부분 청산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유교의 본디 가르침이 아니다. 맹자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 만장이 물어 말하였다. "감히 교우하는 방법에 대하여 여쭈어 보겠습니다" 맹자가 대답하였다. "'''나이를 끼어 넣지 말고,''' 귀함을 끼어 넣지 말고, 형제를 끼어 넣지 말고 '''사귀어라.''' '''사귀는 것이란, 그 사람의 덕(德)을 벗으로 하는 것이니, 그 사이에 끼어 있는 것이 있어서는 아니된다.''' [8]」 유교에서 절대적 위치를 점하고 있는 맹자가 나이와 상관없이 사귀어라고 말했는데, 아무리 장유유서라고해도 나이 한두살에 따라 서열을 매기고 상명하복하는 것은 본디 유교의 문화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이황기대승의 사단칠정 논쟁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데 여기에서 보면 당시 이황은 58세의 대사성이며 기대승은 갓 과거에 급제한 32살의 새내기였음에도 서로를 존중하는 가운데 치열한 철학적 논쟁을 전개했다고 되어 있다. 즉, 나이 하나만 갖고 무작정 하대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성과 한음은 5살 차이였다. 또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친구를 사귈 때에도 나이를 크게 안 따져서, 아버지가 아들을 일찍 낳아 나이차가 20살 아래면 아버지의 친구가 아들과도 친구가 되는 사례도 종종 있었다. 8살 차이까지는 아예 동급으로 쳤다.
흔히 삼강오륜(三綱五倫) 중 오륜(五倫)에 속하는 장유유서(長幼有序)의 예를 들어서 유교는 근본적으로 연소자를 깔보는 사상으로 오해하곤 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장유유서를 말하기에 앞서서 가장 먼저 선행돼야 하는 것이 어른다운 행동이다. 이를 정명(正名)이라 한다.[9] 유교의 근간이 되는 사상으로 맹자는 이를 계승하여 역성 혁명을 주창하게 된다.
즉, 장유유서를 거들먹거리며 연소자를 깔보는 순간 어른답지 못한 행동을 한 놈이니 유교적인 논리에서도 까일 만한 대상이다. 유교 경전들은 끊임없는 자기반성과 자기수양을 강조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다른 사람으로부터 자발적인 존중을 이끌어내는 것이 진정한 권위의 형태라고 가르친다. 올바른 권위란 한 사람을 자발적으로 존중하고자 하는 다른 사람에 의하여 주어지는 것이지,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이용하는 것이 아니다. 조선은 신분제 사회였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신분제 사회에서는 나이보다 상대방의 신분, 격을 더 중요시 했다.
그리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은 유교에서 옳지 않은 행위였다 조선에서도 왕조차 신하들이 명분을 앞세워 대항을 하면 왕조차 거기에 감안해서 움직여야 했으며 [10] 공자도 윗사람이 잘못된 행동을 하면 공손하고 예의를 바르게 하되 잘못에 대한 간언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유교에서 진정한 충신은 목숨을 무릅쓰고 왕에게 간언하는 것이라고 교육한다.
현대의 연소자와 하급자를 깔보는 문화는 하루만 일찍 들어와도 선임으로 군림하려고 했던 구 일본군의 악습이 일제 사회와 그 식민지였던 조선 사회에 급속도로 퍼진 것이라고 하는 견해가 있다. 그렇다고 해도 해방 전후 일본은 징병제가 폐지되고 문민 정부가 세워져 군국주의의 잔재가 빠르게 사라진 반면, 한국은 80년대 후반까지 군사독재가 이어졌으며 현재도 계속해서 징병제를 실시하고 있어 사라지지 않고 상명하복의 군대문화로 남아있다.
메이지 시대 일본은 유교적 가족국가 체제를 도입하면서 유교 가치관을 강조한 적이 있었다.[11]
나이만 봐도 그렇다. 실제로는 일제강점기의 악습과 기수제 문화와 주민등록 체계가 기묘한 콜라보를 이루며 고작 1살, 심한 경우에는 하루이틀 차이로도 계급화 되었는데, 이를 유교 문화의 잔재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장유유서'같은 것을 운운하며 유교 문화라는 식으로 퍼진 영향도 있다. 실제로는 나이 상관없이 친우로 사귀었지만, 조혼 풍습과 맞물리며 부모님 친구=내 친구인 경우가 생기다보니 조선시대에 위아래 8살까지 벗으로 사귄다는 '상팔하팔(上八下八)'로 정립되었다고 한다. # # #
물론 여기서 벗으로 지냈다는 건 서로 간에 말을 놓았다(해체를 썼다)는 의미는 아니다. 조선시대에는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성인에게는 절대 해체를 쓰지 않았다. 노비가 상대라면 또 모를까.
기본적으로 왕도 신하에게 자신을 낮추는 표현인 '과인'이나 '경들은 어떻게 생각하시오'같이 하오체를 썼다.[12] 지금 생각하면 이상하지만 가까운 형제간에도 하오체를 사용했다. 아버지는 장성한 자식에게 공대를 했으며, 스승은 관직에 나간 제자에게 공대를 했다고 한다. 체면 때문이라도 상호존중의 문화를 지켰던 것이다.

3.1. 반론


분명 유교에서는 불합리한 명령에 대해서는 신하와 자식이 다툴줄 알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 자체는 사실이다. 더 나아가 군주가 군주답지 못하다면 쫓아내도 된다는, 얼핏 보기에 진취적인 가르침이 있는 듯 하다. 그러나 이 가르침에는 '''군주를 쫓아내더라도 군주제는 자체는 끝장낼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다시 말해서, 이 왕을 저 왕으로 갈아치우는 것은 가능할지라도,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로 대표되는 신분제 자체는 긍정하는 것이 유교의 입장인 것이다. 따지고 들어가면, 유교의 근본은 고대 주나라의 종법질서, 신분제에 닿아 있기에 현대의 보편적 인권, 평등 사상과는 결코 양립할 수 없다.

4. 성차별


여자와 소인은 대하기가 어렵다. 가까이하면 공손치 않고, 멀리하면 원망한다.(子曰 唯女子與小人 爲難養也 近之則不遜 遠之則怨)>-논어, 양화 제25장-

일반적인 견해로는 조선 전기, 임진왜란 전까지는 여성들의 지위가 고려시대처럼 좋았고 왜란 후에 신분제의 동요가 있은 후에 가부장제가 심해짐에 따라 여성의 재혼이 억압받았고 시집살이가 심해졌다고 주장한다. 허나 왜 이런 현상들이 나타났는 지는 정확히 알 수 없고, 그것이 유교 때문이라고 하는 것도 어폐가 있다. 그건 마치 19세기까지 없었던 세뱃돈을 거하게 챙겨주는 문화가 왜 생겼는지 정확히 규명하기만큼이나 어렵다. 또한 유교의 영향이 적던 민간에서 이혼과 재혼의 경우 조선이 멸망하는 때까지 성행했었다.
다만 당시 시대 상황을 볼 때 19세기 구한말, 갑오개혁과 더불어 많은 양민들이 갖은 방법으로 양반이 되려 하였고, 20세기엔 양반의 비율이 절반을 넘어 백성의 대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문제는 유학의 가르침 같은 걸 일반 백성들이 받을리가 없었고 "행위의 의미와 주체, 법률상의 위치, 양반의 삶" 등, 상세한 내막을 알고 양반이 된 사람은 적었을 것이다. 그래도 명색이 양반이라 돈으로 산 신분을 유지하고자 관련 내용들을 무의미하게 따라했을 것이고, 남성들은 더욱더 자신의 권위를 세우는 방식으로 형식과 절차, 명분만을 강조해 여성들을 아랫사람으로 보는 인식을 심화시켰으리라 생각된다. 현대의 내리갈굼 문화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그냥 자기보다 아래에 있을 법한 사람을 괴롭히는 거니까.
이 이야기도 당시 사회가 이러한 풍토로 변했다는 것이지, 결코 '''유교나 성리학에서 교리 자체에 성차별이 있었다는 것은 아니다.''' 공자가 한 말중에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비는 아비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는 명분론이 있지만 그것은 서로 간의 역할이 나눠져 있어 그것을 따라야 한다는 의미이지, 남성이 여성보다 우위에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또 당시 유학자들은 호락논쟁이라고 사람과 사물의 본성이 같냐 다르냐로 논쟁을 벌였는데 그중에 낙론학자 이간은 사람과 사물이 근본적으로 같으니 양반과 상민도 근원적으로 보면 다를 게 없다는 식의 주장을 하기도 한다. 계급 사회가 당연시 되던 당시 사회에 계급에 가장 위에 있던 양반 성리학자가 이런 말을 하는 걸 보면 성리학 그 자체가 차별을 조장해 남녀의 지위를 나눈다고 볼 수는 없다. 다만 당시 사회의 지배층이던 양반 남성들이 자신의 지위를 세우고자 성리학을 이용했다고 볼 수는 있다.
실제로 조선 후기에는 여성 성리학자들도 등장했다.[13] 강정일당도 그 중 하나였는데, 비록 남자처럼 활발한 사회 활동을 하지 못했으나, 남편 윤광연은 아내를 학문적 스승으로 받들고 존경했고, 아내가 죽은 후 전 재산을 털어 문집을 간행했다. 링크 물론 당시에는 이를 비웃는 자들도 있었지만, 단순히 부부로서의 정을 떠나서 아내를 성리학자로서 존중한 것이다.
그리고 더 생각해 볼 것은 가부장제로 대표되는 성차별은 유교와 관계 없이 역사가 시작된 청동기 시대부터 전 세계적으로 존재했다는 것이다. 미국도 여성 참정권이 실행되던 게 1920년도였다. 중국은 여자아이의 발 사이즈를 강제로 줄이는 전족을 착용했던 전통이 있고, 무슬림히잡은 말할 것도 없다. 심지어 아직까지 일부다처제를 시행하는 나라도 있다. '''중요한 건 여성 인권이 높아진 것은 산업화와 시민권 확대로 여성의 사회활동이 늘어난 덕분이지, 결코 유교나 성리학이 사라져서 여성 인권이 좋아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여성의 인권이 낮은 국가는 여성의 사회활동이 상대적으로 적다. 즉 여성의 사회활동이 활발해져감에 따라 그에 걸맞는 권리를 주장한 것이며, 다 놔두고 생각해보면 자신이 사회에 기여하는 것에 비해 타당한 권리를 누리지 못한다고 생각한다면 당연히 열 받을 일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자신이 사회에 얼마나 기여하고 있는지, 자신이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는지 인식을 못하는 이들일 것이다.
사실 서인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성리학을 내세워서 여성의 지위가 하락한 시기조차 그래도 여성에 대한 인식이 개판은 아니었다. 송시열은 여성들을 위한 서적을 남기기도 했으며 노론 어유봉은 남성보다 나은 여성도 있을수 있다고 주장했으며 정조는 영조 앞에서 여성도 능력 되면 참정의 자격이 있다고 말했는데 정조의 사부는 노론의 김종수[14] 그러니까 여성에 대한 지위가 하락한건 사실이지만 여성은 배우면 안된다느니 등의 말도 안되는 소리까지 나올 정도는 아니었다는 것.
그리고 저 위에서 나온 예시조차 논어란 책 자체가 공자 자신이 저술한 것이 아닌 공자의 제자 중 하나였던 증자의 제자가 중심이 되어 각자 적어두었던 문서들을 편집해서 만든 공동저술이었고 진의 천하통일 후 진시황이 대대적으로 법가를 제외한 나머지 제자백가들을 탄압한 후유증으로 전한 때 사람들의 전승 및 몰래 숨겨두었다가 다시 찾은 문서들을 바탕으로 복원했던 역사 때문에 현존하는 논어는 전체적으로 앞뒤 문맥이 매끄럽지 못하며 비문이 꽤 있다. 즉, 위의 문장이 실제 성리학자들의 제대로 된 견해로서 받아들여졌다기보다는 기워붙여지는 과정에서 나무위키 마냥 섞여들어갔다고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비난과 논란을 회피한다면 도대체 변질되지 않은 진짜 유교를 어디서 찾는지 참으로 난감한 일이다. 논어에서 나은 부분만을, 그마저도 그나마 인본주의적인 면을 최대한 부각시켜 해석하며 이를 전체인 양 호도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좋은 자세가 아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유교도 시대적으로 한계가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그것을 응호하거나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또한 그 특수성을 인지하며 잘못된 사실들을 걸러내야 하고, 막연하게 현대의 윤리를 잣대로 가치 판단하는 것을 지양해야 하며, 동시에 그것을 다시 생기지 않게 바로 잡아야 한다는 점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분명 유교도 공자도 한계점과 비판점이 있으며 변질된 유교적 전통을 고치기 위해서는 유교의 근본을 파헤쳐 바로 세워 변질된 유교적 전통의 논리를 바로 잡기 위해 이 문단을 쓰고 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4.1. 남자는 음식을 하지 않는다


참조
'남자가 음식 하면(혹은 부엌에 출입하면) 성기가 떨어진다' 로 대표되는 레퍼토리로, 현대에 제사 음식을 여자가 하는 것과 어느정도 연관되기도 한다.
그러나 조선시대 궁중음식을 만드는 사람은 모두 남자인 대령숙수였으며, 궁녀들은 음식을 하지 않았다. 그 외에도 남자들도 요리를 만드는데 적극적이라 의안대군의 아들 이교는 워낙 음식을 잘 만들기로 유명해서 중국 사신이 올 때마다 오로지 대접할 음식을 만들기 위해 상경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홍길동전의 작가인 허균, 율곡 이이, 정약용, 서거정, 박지원, 박제가 등 이름난 사대부들도 스스럼없이 음식을 만들고 즐겼다는 것이 기록에 남아있다. 심지어 '''국왕'''인 영조가 직접 '''탕평채'''라는 음식을 만들어 신하들 앞에서 선보이고 후세에도 전해지게 하였다. 연암 박지원은 직접 밥을 짓고 반찬을 해서 제자들에게 먹였으며, 환갑이 넘어서도 장을 담그고 반찬을 만들어 자식들에게 전했다. 율곡 이이는 직접 온갖 나물을 캐서 음식을 만들기도 했으며, 정약용은 직접 장을 담그고 음식을 했다. 조선 후기에 베이징에 갔다가 카스테라[15]를 맛본 학자들이 직접 만들어봤지만 모두 실패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16] 박제가는 대식가이면서 자신이 직접 음식을 만드는 것을 즐기기도 했는데, 친한 사이였던 정약용에게 자신의 개고기 조리법을 알려주기도 했고 그걸 다시 정약용이 형 정약전에게 알려주는 편지가 남아있다.
이러한 요리라는 행위는 일부 유별난 양반들의 행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무렇지 않은 것이었기에 사대부인 이들이 직접 음식을 즐겼다는 것이다.[17] 흔히 유교적 제사에 사용되는 모든 음식은 제사를 행하는 선비들에 의하여 제작되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제사도 가풍에 따라 천차만별의 행태를 보아는데 지금도 일부 종가집에서는 전통에 따라 남자식구들이 음식을 마련하고 오히려 여자들은 참여하지 않는 곳도 있다.
참고로 음식점이던 주막에서도 여성이 아닌 남성이 요리를 하기도 했는데, 일반적으론 회계였지만 일부는 직접 요리를 하며 대접하기도 했었고, 일반가정에서도 주로 집안일하는 마누라가 챙겨주겠지만, 요리를 즐기는 남자들이 더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인식이 존재하는 것은 사극 등의 대중매체에서 흔히 궁녀들이 음식을 만드는 것으로 묘사되기 때문인데, 대한 제국 말기 왕실이 몰락하면서 궁중 요리를 담당했던 대령숙수들이 모두 떠났고[18], 어쩔 수 없이 궁녀들이 왕족들의 식사를 만들던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애초에 소주방이 왕족의 식사를 담당함에도 불구하고 하급 보직이었던 것은 음식은 숙수가 만들고 궁녀들은 잡일이나 상을 차리고 나르는 정도의 업무만 하였기 때문이다. 만일 궁녀들이 음식을 했다면 소주방은 궁녀들 사이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상위 부서였을 것이다.[19] 참고 기사 현실적으로도 그냥 한 가정에 불과하다면 모를까 궁궐에서는 여자만으로는 식사준비를 하는건 한계가 있는데 기본적으로 여자는 남자보다 근력이나 체력이 딸린다. 반대로 궁궐에는 사는 사람이 많다. 왕을 포함해서 왕비, 세자, 세자빈, (있다면) 대왕대비,아직 결혼 안해서 출가 안한 왕족, 후궁 등등등 왕 식구에 궁녀에 내시까지 있다. 이 많은 사람들의 식사를 오로지 여자들로만 충당하는건 지나치게 비효율적이다. 음식 만드는건 그렇다고 쳐도 '''이걸 나르는 게 큰 문제다.''' 상에는 이거저거 올라갈텐데[20] 그걸 여러 궁녀들이 달라붙어 옮기는건 비효율적이다. 최악의 경우 '''상을 쏟아서''' 다시 요리해야 할 경우일테고 현실적인 문제를 봐도 일반 가정집 수준이면 모를까 궁궐쯤 되면 여자들로만 주방을 꾸리는건 한계가 있다.

4.2. 육아는 여자들의 전유물이다


조선시대 사대부였던 이문건의 양아록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여자들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조선시대 풍속화를 보면 선비나 남자들이 아기를 업거나 자식을 데리고 장을 보는 등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남자도 육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특이한 점은 조선시대에는 부모들이 아니라 조부모들이 육아를 주로 맡았는데 부모가 양육을 맡으면 자식에게 과한 기대치를 내걸며 부담과 갈등을 가져올거라 우려했고, 이미 자식들을 키운 경험이 있는 데다 오랜 세월을 살아오며 쌓인 지혜를 손자들에게 전수하고 가르치는 것이다.
지금에서야 전업주부라는 육아와 가사를 같이 하는 직업이 생겨났지, 당시에는 그런 개념이 없었다. 노동력이 중요한 농경사회에서 밭일은 지금도 그렇듯이 남녀가 같이 나가서 하고 혼자 남겨진 아이들은 형제자매중 맏이가 키우든지 마을 공동육아를 하든지 했다.
게다가 유교적으로 봐도 이는 불가능한데 사대부 남성은 아내가 죽으면 '''3년'''은 재혼을 할 수 없었다. 물론 예외사항이 없는건 아니었지만[21] 어쨌든 3년간 재혼을 할 수 없단데서 보듯 자식을 키우는데 전적으로 노비들에게만 맡기는 것도 대지주가 아니고서야 곤란할 테고, 그렇다고 노쇠한 부모님에게만 맡기자니 이 역시 유교적으로 도리가 아니다.[22] 특수한 경우라고 볼지도 모르나, 지금의 인식마냥 마냥 육아를 남성이 하는 걸 터부시했다면 앞뒤가 여러모로 맞지 않는 것이다. 결국 국가가 가난해짐에 따라 사회 의식이 전반적으로 변질되어가던 구한말에조차도 사대부 남성들이 육아를 하는 건 터부시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4.3. 남자는 상에서, 여자는 바닥에서 밥을 먹는 것


지금은 농촌이나 산간 벽지에 가야 볼 수 있는 모습이지만,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집안의 웃어른인 남자들만 독상을 받고 나머지 식구들은 바닥에서 먹거나 남자들은 상에서, 여자들은 바닥에서 먹었다.
전통적으로는 양반이라면 밥을 먹을 때든 회의를 할 때든 연회를 열 때든 일단 상이 놓여야 하는 자리라면 거의 예외없이 독상을 받았다. 반대로 평민들은 겸상이 흔한 일이었다. 이 항목 자체가 수탈과 연이은 전쟁으로 집안 식기구가 모두 없어지고 사정이 어려운 시기에 생겼는지라, 실질적으론 얼마 되지 않은 문화다.
즉 저러한 광경은 신분제가 사라져 너나 할 것 없이 양반을 자칭하게 되어서 독상은 받아야겠고, 전쟁으로 황폐하고 가난하던 시절에 주로 궂은 일을 한다고 인식되던 사람을 우선시하는 의식이 결합해서 생겨난 문화다.

4.4. 남편은 아내에게 반말, 아내는 남편에게 존댓말


이게 본래의 유교적 전통이라 착각되기 쉽지만, 조선시대 서간문들을 보면 전혀 근거가 없다.

자내 항상 내게 이르되 ‘둘이 머리가 세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 하시더니, 어찌하여 나는 두고 자내 먼저 가시는가? 나와 자식은 누구에게 기대어 어찌 살라 하고, 다 버리고 먼저 가시는가? 자내는 나에게 마음을 어떻게 가졌고, 나는 자내에게 마음을 어떻게 가졌던가? 함께 누우면 내 언제나 자내에게 이르되 ‘이보소! 남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 어찌 그런 일을 생각하지 않고 나를 버리고 먼저 가시는가? 자내 여의고는 아무래도 나는 살 힘이 없네. 빨리 자내한테 가고자 하니 나를 데려 가소. 자내를 향한 마음을 이승에서 잊을 길이 없네. 아무래도 서러운 뜻이 그지 없네. 내 마음 어디에 두고 자식 데리고 자내를 그리워하며 살려고 하겠는가. 이 편지 보시고 내 꿈에 와서 자세히 이르소. 내 꿈에 이 편지 보신 말 자세히 듣고자 하여 이리 써서 넣네. 자세히 보시고 내게 이르소. 자내 내 뱃속의 자식 낳으면 보고 말할 것이 있다 하고서 그리 가시니, 뱃속의 자식 낳으면 누굴 아버지라 하라 하시는고. 아무리 한들 내 마음 같을까. 이런 슬픈 일이 하늘 아래에 또 있을까. 자내는 한갓 그곳에 가 계실 뿐이지만, 아무리 한들 내 마음 같이 서러울까. 하고 싶은 말이 끝이 없어 다 못쓰고 대강만 적네. 이 편지 자세히 보시고, 내 꿈에 와 자세히 보이고, 자세히 이르소. 나는 꿈에 자내를 보려 믿고 있다네. 몰래 와서 보여 주소서. 하고 싶은 말이 끝이 없어 이만 적나이다.

1586년에 한 아낙이 죽은 남편 이응태에게 쓴 편지 출처

이 서간문을 보면 아내가 남편에게 '자내(=자네)'라고 부르고[23], 마치 친구에게 말하듯 하오체로 말하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부부들은 서로를 하오체로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아무리 성리학이 교조화 된 조선 후기라도 연상 아내가 연하 남편에게 존칭하고 남편은 아내에게 하대를 하는 일은 당시에도 막장집안 취급 받았다. 부부간의 상호존중은 당시 양반 집안이라면 당연히 이루어지던 것이었다. 조선 후기보다 더 사회가 막장이던 일제 시대에도 부부가 서로를 자네라 부르며 존칭을 썼다. 거기다 부부간의 존칭문제는 지도층이 권력으로 어찌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현대의 고부갈등 문제는 일제시대의 권위적인 수직문화와 6.25전쟁 이후 신분질서가 완전히 무너지면서 너도나도 양반집안을 자처하면서 만들어낸 비뚤어진 문화에 가깝다.
시동생항목을 보면 '''유교가 문제가 아니라 유교를 권력 강화에 악용한 가부장적인 사람들과 그걸 억지로 심화한 비뚤어진 유교적 적폐 탓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악습은 현재까지도 가끔 영향을 미치는데, 해외영화를 번역할 때 남자와 여자 모두 서로에게 반말을 사용함에도, 국내로 들여올때 여자만 존댓말로 바뀌는 것이 그 예시이다.

4.5. 여성은 재산상속을 받지 못한다


<시사저널>유교의 최대 피해자는 여성
제사와 함께 현대에 가장 큰 문제가 되고 있는 부분인데, 인터넷 등을 뒤져보면 장녀인데도 상속을 전혀 받지 못하거나 남동생의 횡포에 시달리고 있다고 호소하는 것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다. 심지어 아들, 딸 사이에 재산을 불공평하게 물려주는 집안에서 태어난 장녀들을 일컫는 '유교걸' 이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지기도 했으며, 이효리의 U-Go-Girl을 패러디한 유교걸이라는 노래가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풍습은 유교가 지나치게 경직화, 교조화된 조선 후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20세기에 신분제 폐지로 민간에도 성리학이 심화되기 전까진 주로 양반층에서 이루어졌다.[24] 유교를 국교로 삼지는 않았지만 중요한 통치 이념으로 받아들였던 고려 시대나 유교를 국교로 지정했던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찾아볼 수 없었다. 족보의 경우에도 조선 전기에 편찬된 것은 아들과 딸 구분 없이 태어난 순서대로 기재되었으며, 딸의 자녀들까지 수록되었다.

5. 사농공상


유교적인 관점에서는 상인과 기술자를 유학자-관료나 농민보다 천하게[25] 여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기저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존재한다.
우선 사농공상(士農工商)에서 사(士)는 국가 행정을 유지하는 기반이 되는 관료공권력을 실행할 수 있는 군대를 말한다. 이들이 없으면 국가 형태를 유지할 수 없으니 최우선적으로 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음으로 농민식량을 생산하는 주체이다. 먹을 것이 넘쳐나는 지금의 대한민국도 식량 안보와 관련해서 골머리를 앓는데, 화학 비료도 없고 모내기도 없고 콤바인도 없었던 과거라면 어땠겠는가? 반면에 공과 상은 사와 농이 안정된 뒤에야 원활하게 기능하는 계층이다. 그러다 보니 유교적인 관점에서 자연스레 공과 상의 우선 순위가 낮아진 것이다.
국부론에서는 국가 부의 원천을 노동으로 잡았는데 이는 프랑스의 유명 경제학자 프랑수아 케네의 국가 부의 원천은 농업이라는 중농주의사상에서 얻은 아이디어로 농업과 공업에 사용되는 모든 행위 즉 노동이 국가의 부를 측정하는 계기가 될 정도로 경제학상으로 볼 때 사농공상은 그 경제학상으로 짜여진 초창기 신분제로 보는 것이 맞다.
이 때, 유교 문화에서 상인을 최하위 계층으로 놓는 것은 "본인이 직접 생산 활동은 하지 않으면서, 남이 만들어놓은 물건을 그저 옮기기만 하면서 돈을 받는다"는 상업 자체의 성격을 '''가치의 도둑질''' 비슷한 것으로 보면서 천시한 것을 이유로 들 수 있다.[26] 그랬기 때문에 일단 뭔가를 자기 손으로 만들기는 하는 (수)공업이 상업보다 더 위에 놓인 것이다.
이것과 비교하면 재화의 생산 못지 않게 재화의 분배도 훨씬 더 중요하다고 가르치는 현대 경제학의 관점이 훨씬 더 합당하게 보이며 사리에도 들어맞아 보이며 유교의 비판점으로도 보이지만, 사실 현대 경제학과 현대 문명의 발달을 막연하게 동치로 놓은 후 유교 이론을 엄밀하게 판별하지 못해 생긴 오류다. 현대 경제학이 재화의 분배를 훨씬 더 중요하다고 가르치건 어쩌건 현대 기업은 물론, 상인은 현대와 고대를 막론하고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예컨대 창렬, 혜자 같은 2010년대 초반의 인터넷 유행어나, 질소과자로 대표될 수 있는 수출품이 오히려 더 싼데 똑같은 제품의 국내 가격은 더 비싼 소비자 기만이 그렇다. 상인은 그 속성상 본질적으로 절대 분배를 중요시하지 않으며, 최대 이윤을 중시한다. 현대로 들어와서는 최대 효율이나 유연성과 같은 가치로 조금 말이 바뀌었을 뿐이지 본질적으로 이 말들도 최대 이윤을 가리키고 있다. 그리고 옛날을 보면 재화의 생산을 늘리는것을 주장한것은 타당성이 있다. 질소 비료가 개발되기 전까지 기근이란 인류에게 있어서 최악의 적이면서도 늘상 마주치는 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을 굶어죽게 하지라도 않기 위해서는 식량 생산의 증가는 사람들에게 큰 관심이었을 것이다. 특히 농경사회의 특성상 식량이 는다는 것은 곧 나라의 곳간도 가득 찬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농경국가에서 재화의 분배보다 재화의 생산을 염두에 둔건 어찌보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 재화의 분배도 재화가 있고서야 나올 수 있는 얘기인데 재화가 부족한 상황이니 재화를 늘리는것에 집중하는건 이상한건 아니다.
상인의 이와 같은 사회 전체를 바라보지 않고 자기 자신 혹은 내부 집단의 최대 이윤을 중요시하는 특징은 유교 뿐 아니라 서양에서도 널리 경계되었다. 그리스 정치철학을 거쳐 기독교 문화의 중세에 이르기까지 서양 역시 상업을 통제하려 열심이었다. 상업의 꽃이라 할 수 있는 금융 분야는 서양에서도 유대인이나 담당하는, 일종의 천역이었으며[27] 유대인도 행정력이 필요로 할 때마다 돈, 기술을 위해 쥐어짜이거나 심하면 추방당하거나 죽으며 고초를 겪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나치즘에서의 유대인혐오가 단순히 소수집단 수준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닌, 전국가적 흐름일 수 있었던 것 또한 중세유럽까지는 천한 일, 지옥에 떨어질 일이라며 유대인에게 금융업을 강제시켜놓고 근대로 발전하며 금융의 가치가 대두되자 피어난 시기와 질투를 나치에서 선동을 통해 적극적으로 '악마적인 것'이라 낙인찍고 혐오를 조장했기 때문이다. 즉, '''산업발전 이전까지 동서양을 막론하고 상업은 천대받는 직종이었다.''' 유학만 상업을 천시했던 게 아니다.
서양에서 상공업이 꽃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특수한 역사적 배경, 봉건 영주와 국가와 자유민과 자유도시가 서로 통합되고 발전되어 가는 과정에서 발생한 미묘한 알력, 더불어 구교와 신교 간의 알력이 역사적으로 진행되어가며 얻어진 결과에 가깝다. 토지의 생산력이 안정된 이후 상공업에 통제와 제재의 욕구를 드러낸 것은 서양도 동일하나[28] 상공업 세력은 네덜란드벨기에 등지로 피신할 수 있었고, 또 이들 국가는 좁은 국토로 인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국력의 한계를 극복하고 자유와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번영이 필요했으며, 상공업의 자유로운 발전은 국토가 좁고 해안을 넓게 끼고 있어 도시와 무역 위주로 행정력을 집중해 극대의 효율을 발휘할 수 있었던 이들 국가에 잘 들어맞았다. 또 여기에 신대륙으로부터 넘어오는 막대한 재화가 제동장치를 무력화시켰으며 신교의 발흥과 인문철학의 발달이 도덕적 정당성을 가져다 주었다. 결국 서양의 상공업 세력은 이렇게 벌어들인 시간을 이용해 막대한 번영을 유럽 세계 전체에 과시할 수 있었고 그러자 서양 각국은 풍성한 열매로 맺힌 이 달콤한 번영을 굳이 거부할 이유도 없었으며, 오히려 이 달콤함을 거부했다간 끊임없이 거듭되는 쟁패에서 뒤처질 위험성이 있었다. 인문철학 역시 이 번영을 등에 업고 비합리적인 도덕적 낙인을 끈질기게 제거해 갔으며, 날로 번창하는 식민지 사업과 끊임없는 각국의 쟁패는 서양 각국의 정력이 내부 통제에만 몰두하기보다 외부로도 충분히 투사되고, 효율에 집중하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재화의 분배는 본래가 국가, 행정력의 직무이며 서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이 상인의 역할로 넘어가게 된 것은 서양에서도 애덤 스미스로 대표될 수 있는 고전경제학의 대두, 그리고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희대의 슬로건이 상인과 유산계급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공자왈 맹자왈처럼 가가호호[29][30] 울려퍼진 덕분이다. 현대 경제학에서 재화의 분배가 재화의 생산을 넘어선 것은, 현대는 오히려 생산력이 지나치면 지나치지 모자라지는 않는다는 평을 받는 시대이다.
이 사농공상의 공상 천대문화 때문에 동양에서 산업혁명과 자본주의 태동이 불가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그렇다면 상업을 제일직업으로 삼고, 아예 중개무역으로 존재하던 중동에서는[31] 어째서 산업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나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또한, 이것을 정말 진지하게 대표적인 하나의 반례로 받아들이고 왜 중동에서는 산업혁명이 발생하지 않았는지, 유럽에서 발생했는지에 대해 논변하는 시도가 있을 수 있으나 큰 의미가 없다. 왜냐면 첫째로 규모적인 면에서, 유럽의 거대함이 특수한 요인이기 때문에 발생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견강부회이기 때문이다. 산업혁명은 영국 개중에서도 잉글랜드에서 발생했지 유럽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다.[32] 또한, 중동뿐 아니라 터키, 인도, 중국 등 규모적인 면에서 산업혁명이 발생할 수 있는 경제적 역량, 기술수준은 충족되는 곳이 많았다. 심지어 유럽의 다른 곳, 다른 시점이 아니라 왜 그 시기 잉글랜드에서 산업혁명이 발생했는지에 대해 어느 학설도 정설로 인정받는 것은 없다. 산업혁명처럼 많이 연구된 역사적 사건도 드문데, 이 산업혁명에 대한 정설은 도대체 왜 산업혁명이 다른 데가 아니라 잉글랜드에서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다. 양명학을 받아들인 중국이나 일본도 서구의 개입 없이 산업혁명은 일어나지 않았으니[33] 결국 헛발질이나 다름없는 주장이다.[34]
그리고 당시 유학자들의 시각에서 조선의 경제사정은 대외무역을 하기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한반도 자체가 농사짓기 썩 기름진 땅이 아닌데다 세종 시절 확보한 호구와 농지가 계유정난 이후 세조의 공신들에 대한 수조권 남발, 연산군의 폭정과 같은 여러 악재가 쌓여오다 임란과 호란을 거치면서 붕괴되어 버린 상황이었다. 이후에 대동법과 같은 개혁도 나오기는 하나 전통적 시각에서 볼 때 조선의 경제체제는 다른 나라들과 교역하기에는 기반이 많이 부족해 보이는 것 또한 감안해야 했다. 북학파와 같은 이들이 나와 중국과의 교역이라도 늘리자고 주장하기는 했으나 결과적으로 대세가 되지는 못했다. 이러한 유학자들의 시각은 최익현의 강화도 조약 반대 상소에서 "우리는 땅도 작고 귀한 자원도 없는데, 저들과 교역하면 우리에게 필요한 식량과 같은 생필품은 다 빠져나가고 신기한 기물 같이 실생활에서는 쓸모 없는 것만 들어오게 될 것이다."라는 주장에서 드러나며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다. 고려 때는 그나마 중개 무역이 번성했지만, 고려 말에 원나라가 무너지면서 많이 쓰이던 원나라 화폐가 유명무실해지는 바람에 고려 경제가 엄청나게 흔들렸고, 당연히 이 꼴을 지켜본 신진사대부 세력들은 국제 무역에 회의적일 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상술된 조선의 사정을 바라보는 것과는 다른 시각으로, 조선의 사정이 좋았지만 단지 사상적 한계로 인해 산업혁명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건 그야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소리다. 잉글랜드는 당시 유럽의 2진급 국가이자 조선보다 훨씬 보수적 가치관을 지닌 국가였다. 교육이라는 것이 구렸던 나머지 최고의 인재들은 스코틀랜드 대학에 유학을 갔고 뭐만 했다 하면 종교 관련 문제로 박터지게 싸웠으며, 당시 잉글랜드 종교재판에 비하면 조선의 성리학은 자유롭다고 할 수 있을 지경이다. 반면 프랑스는 당시 유럽 인구의 1/5를 차지할 정도고 예나 지금이나 공업자원과 농업자원이 풍부하고 남북으로 바다를 끼고 있다. 그리고 과학교육과 기술교육에 대한 투자도 잉글랜드와 비교하면 성실하게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잉글랜드가 특별히 상업을 밀어준 것도 아니며, 이미 땅을 차지하고 있어서 지대를 받아먹던 지주, 향신 계층은 상업, 공업 세력들을 엿먹이려고 반대 법령을 제정하곤 했다. 그렇다면 서민들의 지지를 받은 것도 아니다. 서민의 지지가 있었다면 못살겠다고 기계를 부수는 러다이트 운동이라는 게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상술된 신식 인문철학이 제대로 열매를 맺는 곳은 벨기에, 네덜란드와 같은 작은 규모의 해안을 낀 상공업과 교역 중심의 나라였고, 규모 있는 국가는 중농주의가 대부분 우세를 차지했다. 당시 부는 당연히 토지=농업에서 나왔다. 잉글랜드조차도 중농주의의 기세는 만만찮았다. 상술된 신식 인문철학이 대두되었다고 해서 구식 인문철학이 순식간에 죽어버리는 일은 없다. 어디까지나 구식 인문철학이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대세였고, 단지 신식 인문철학은 완전 고립무원이던 옛날과는 달리 비빌 만한 기둥이 하나 있었다 정도일 뿐으로 조선에서의 실학 양명학의 위치와 크게 다른 것도 없다. 단지 우연적 요소로 상공업이 발달하게 되니까 사상도 같이 발전하고, 사람들 인식도 따라서 바뀌었을 뿐이다.
잉글랜드가 산업혁명으로 잘나가게 된 건 별 거 없고 우연적 요소다. 영국은 모직업이 이미 발달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인도에서 들어오는 완성품 면직물에 대해 모직업자들이 법령으로 깽판을 놓았다. 그래서 완성품이 아니라 인도에서 싼 값에 면이 들어왔고, 이 값은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잡아다 치렀고, 잉글랜드 국내에서 이렇게 노예와 교환된 면으로 면 완성품을 만드는 시장이 어느 정도 생성되었다. 그리고 이제 이렇게 생성된 면제품이 국내에서 팔리는 것만으로 산업이나 상업의 발달을 이루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니, 아프리카나 아메리카의 노예 플랜테이션 농장에 면제품을 수출하고 이제는 인도가 아니라 노예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면을 받아먹는 무역이 완성되었던 것이 그 시작이다.
그런데 조선은 이 조건들 중 단 하나도 달성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어디 대만이나 필리핀, 보르네오 같은 곳에다 대고 노예무역 + 면이 아니라 그게 뭐든 간에 헐값에 원료를 들여와서 가공한 후 제법 값을 쳐서 팔 수 있으면서도 필수품급의 수요를 가져서 대량생산이 필요하면서도 최초 기계화에 필요한 난이도가 어렵지 않아야 하는 제품도 없고, 그러면서도 인건비보다 기계를 만드는 가격이 더 싼 환경이 아니었으며, 그리고 원료공급도 제품수출도 아프리카 아메리카 경영처럼 광대한 토지에 계속 노예를 돌리면서 끝도 없이 늘어날 수 있는 환경도 아니었다.[35]
게다가 잉글랜드의 식민지는 지속적으로 탄탄했으며 독립한 미국과도 그럭저럭 화해했는데 반해 라틴 아메리카 지역은 포르투갈, 스페인과 싸운 이후 영국과 교역을 하게 되면서 독점적으로 이득을 챙기게 되었다(이건 사상과 딱히 상관없다). 그리고 이렇게 늘어나는 상공업 수요를 인클로저 운동으로 서민 농민 계층들을 바싹 밀어버려서 공업지대에 합류시킨 것도 모자라 아일랜드 대기근이 터져서 몇십만 명이나 되는 아일랜드 사람들이 영국으로 밀려든 것도 큰 원인을 차지한다. 이런 우연적 요소들에 사상을 결부시키는 것 자체가 억지 주장이다.[36] 이런 동아시아 정치를 떠나서 상공업이 발달하는 데 필요한 원료도, 오직 조선만이 그것을 독점적으로 갖다가 팔 시장도 없다. 연간 몇백퍼센트에 달하는 성공률을 담보할 만큼 이윤이 높은 산업은 도대체 어떻게 마련할 것이며,[37] 그런 산업이 있다고 치더라도 노동력 수급 문제가 남는다. 잉글랜드처럼 대충 캐면 석탄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아예 농민들의 생활 기반을 부숴버려서 수많은 농민들을 빈곤상태로 만들어 고향에서 내쫓고 도시 빈민, 상공업자로 바꿔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농민반란 등의 사회적 혼란도 각오해야 한다. 가뜩이나 맹자의 역성혁명론이 대세인 동양 사회에선 위험부담이 더 컸고 조선은 역성혁명으로 세워진 나라다.
그리고 세계적으로 봤을 때도 조선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들도 고대부터 이미 농사를 권장을 하려고 애를 썼다. 개간을 장려하거나 농번기에 잡역을 금지시키거나 농업기술을 발달시키고 간척지를 만들고 농업기술을 발달 시키는 등 굉장히 애를 썼는데도 투입하는 양과 다르게 생산량은 현저히 떨어졌고 심지어 흉년이 들어서 대기근이 생기면 봉기, 혁명 심하면 내전, 최악이면 그 나라 자체가 붕괴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21세기에도 기근이 세계정세를 쥐락펴락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하는데, 아랍의 봄이 일어난 배경에는 독재, 종교적 억압 등이 있지만, 방아쇠를 당긴 것은 러시아의 흉작으로 인한 곡물 수출 동결로 곡물가격의 상승, 그로 인한 빈곤과 식량난이었다.[38] 인류의 역사는 기근과의 전쟁이라고 하는 말이 괜히 나온게 아니다. 이러니 전근대 시대에 농업을 상공업보다 중시한 것이다.
거기에 21세기에 상공업과 더불어 수많은 직업이 나오는 이유는 다양한 계층을 먹어 살리고 남은 식량과 농업의 기술 발달에 힘을 얻어 옛날에 비해 노동력이 크게 절감되었기 때문이다. 당장 예를 봐도 조선뿐만 아니라 다른나라들도 전체 인구 중에서 가장 높은 비율로 차지한 계층이 농민이었다는 것을 상기 할 필요가 있다. 농사에는 노동력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가장 높게 비율을 차지할 수 밖에 없고, 위에서 말한바와 같이 그렇게 일손을 많이 투입했는데도 생산량이 적었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 농민 일부가 상인으로 전업할 경우, 자연스럽게 농업에 투입되는 노동력이 줄어들고 결과적으로 식량이 줄어들게 된다 당연히 국가 입장에는 가만히 볼 수 없고 상업을 통제할 수밖에 없다. 거기에 상업이 발달하려면 물자를 충당시키고 유통시켜야 하지만, 농사 짓기도 바쁜데 쉬운 일이 아니다. 실제 조선 전기만 해도 먹고 살만큼 생산해서 자급자족으로 생활 하다가 후기에 이양법이 발달하면서 잉여생산물이 생겨서 상업이 발전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즉 '''농업이 발전해야 상공업이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유럽과 다른나라들이 우리나라보다 상업이 발전했던 이유는 기후가 달랐거나 자원이 풍부했거나 다른 곳에서 물자를 충당했기 때문이다. 유럽 같은 경우 식민지를 정복한 후 플렌테이션으로 수많은 곡물들을 자국으로 수입했고 중국같은 경우 땅이 넓어서 자원이 풍부해서 물자를 빠르게 충당하는게 가능했고 일본 같은 경우 우리나라와 다르게 해양성 기후로 농사를 짓는데 더 적합한 기후였고, 실제로 전국시대가 끝난 후 에도 시대에 조선의 인구를 따라잡는 등 크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즉 사농공상을 무턱대고 비난할게 아니라 그 시대에 배경을 파악하며 어떻게 변화에 왔는지 보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6. 제사


조선시대의 제사는 지금처럼 과한 허례허식이 아니라 음식을 가정 형편에 맞게 올렸으며, 평소 먹던 반찬을 그대로 올려도 문제되지 않았다. 또한 우환이 있으면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이건 상식적으로도 형편이 안 좋은데 상다리 부러지게 제사상 차리거나 우환 있는데 무리해서 제사 지내는 꼴을 조상님들이 보고 싶어 하실까? '''제사의 의의 자체가 후손으로서 조상께 예를 다하는 것이기에 그 후손들이 직접 음식을 하고 제사상을 차렸다.''' 그 집안 후손이 아닌 며느리들은 원래 시가의 제사에 참여하지 않았다. 임진왜란 전까지는 딸도 제사에 참여했다. 시집간 누나가 자신의 집에서 제사상 차리고 남동생이 누나의 집으로 방문하여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사실 조선시대 사대부 집안의 '''제사상을 차리는 건 노비들이 했지 애꿎은 며느리를 부려먹지 않았다.''' 심지어 여자가 자기 친정에 가서 제사를 지내거나, 딸이 제사를 지내고 다른 형제들이 그 집을 찾는 사례도 있었다. 조선 후기에 족보 매매로 이름뿐인 양반이 급증하고, 일제강점기한국전쟁으로 신분제가 뒤엎어지며 너도나도 양반을 표방하려 했다. 그러나 정작 대부분은 진짜 양반이 아닌지라 제사에 대한 왜곡된 생각과 무지로 이렇게 변질된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어제 먹은 반찬을 올리든, 피자를 올리든, 찢어지게 가난해서 밥과 간장만 올리든 아무 상관 없다. 우환이 있으면 안 지내도 된다. 애초에 제사상을 차릴 때 홍동백서니 조율이시니 하는 말들도 다 현대에 '''창작된''' 가짜 전통이다.[39][40] [41] 종가들을 보면 집안마다,[42] 혹은 지역마다 제사 지내는 방식이나 올리는 음식이 다르다.[43]
또한 해방 이후의 제사는 허례허식의 측면도 있겠지만, 동시에 일종의 잔치 같은 측면도 존재했다. 이 시대에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증언하는 것은, 고기를 입에 댈 수 있었던 것은 추석, 설날, 제사, 가장의 생일 딱 이 정도였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타문화권에서 평범하게 하는 축제나 잔치의 성격을 마찬가지로 종교성을 띠고 있는 제사가 적절하게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7. 오락에 대해 금기시


한국은 1960년대를 거치면서 돈벌이가 안되는 놀이 문화나 오락, 취미 생활을 죄악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유교 선현들의 가르침은 지나치게 놀이에 심취하지 말라는 것이었지, 놀이 자체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었다. 당장 바둑만 해도 요 임금이 아들을 가르치기 위해 만들었다는 전설이 내려올 정도인데, 요 임금은 유교 문화권에서는 이상적 인간상으로 추앙받는 신화적 인물이다. 그런 신화적 인물이 아들에게 바둑을 권했던 것이다. 요 임금 이야기는 설화라 쳐도 공자는 직접적으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놀고 먹느니, 차라리 바둑이라도 하는 것이 낫다." 고 말했다. 맹자는 '''바둑에 빠져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것을 비판하긴 했지만 바둑을 비판한 적은 없었다.'''
조선 선비들의 삼신기는 시, 서, 화였다. 즉 시를 읊고 글을 쓰며 그림을 그리는 일인데, 글쓰기를 제외하면 모두 잡기로서 풍류에 해당하는 놀이 문화였다. 유학자인 정약전은 낚시의 달인이었고, 태조태종은 사냥을 즐겼고, 정종은 현대의 폴로와 비슷한 스포츠인 격구를 즐겼으고[44], 숙종은 애묘가였으며, 정조는 활쏘기의 달인이었다. 즉 유학자나 왕이라 하더라도 취미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

8. 성(性)의 금기시


대표적으로 서구 선진국에서는 모두 합법인 포르노가 유교적 전통이 강한 한국이나 중국에서는 불법이다.[45] 더군다나 최근 아청법 개정으로 인해 가상의 아동이 등장하는 야애니, 성인만화의 시청과 소지까지 징역으로 처벌하는 유일한 국가가 되었다. 유교 문화가 강한 한국, 중국[46]이나 이슬람 문화가 깊게 박혀 있는 이슬람 국가들을 제외하면 포르노를 금지하는 국가는 없다. 또한 많은 국가들에서 합법인 매춘에 대해서도 합법화에 대한 토론조차 금기시되어 있다. 성에 관한 담론을 제기하는 것을 성범죄자 취급하고 전원이 성인인 대학 수업에서조차 섹스에 대한 얘기를 제대로 꺼내기 힘들어하는 것이 부끄러운 현실이다. 특히 출산율 관련 문제가 심각한데도 불구하고 미혼부모를 위한 복지 확충이나 인식 개선 프로그램은 미미하고 전세계 최하위권 수준인 혼외 출산(곧, 동거자들의 육아)을 위한 지원이나 인식 개선도 없이 그저 성은 나쁜 것, 성욕이 성범죄를 일으킨다는 사고방식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것. 문제는 정작 성범죄 처벌은 솜방망이 처벌에 그친다는 점이다.
이것이 유교 탓인가한다면, '''아니다'''. 오히려 자세히 보면 한국이나 중국, 이슬람 국가들의 공통점은 독재에 있다. 자세한 것은 하술.
일단 본래 유교에서는 성(性) 자체를 금기시하지는 않았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유교라는 사상이 만들어진 지역부터가 농업 사회로서 인구가 많을수록 유리했는데, 그런 상황에서는 성을 장려하면 했을지언정 금기시했을 리가 없다. 중국의 하나라, 상나라, 주나라가 모두 군주의 탐색으로 망했기에 공자를 비롯한 초기 유학자들이 성에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고 볼 수도 있는데, 그것도 지나치게 색을 탐하지 말라는 얘기지 성 자체를 부정적으로 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유교 사회에서는 아들이 없어서 대를 잇지 못하는 걸 가장 큰 불효로 여겼다.''' 물론 이러한 관점은 현대 서구의 개방적인 성관념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며 성관계는 어디까지나 아이를 낳는 수단이자 일종의 의무로서만 본 것일 뿐이었으며, 아이러니하게도 자식 핑계를 대면서 첩을 들이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면서 자유 연애는 신문물로 생각한 것이다. 이는 마찬가지로 유학에서 비롯된 문제점인 유학 및 성리학과 같은 학문만 진짜 학문이고 과학 기술이나 실학과 같은 것들은 천대시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또한 불교가 성행하기는 했지만 유교의 가르침을 통치의 근간으로 삼았던 고려 시대에 만들어진 고려가요는 오늘날 기준으로도 19금에 해당될 정도로 외설적인 것들이 많으며 조선 시대에는 그 가운데에서도 정점을 찍은 쌍화점만전춘종묘제례악 중 하나로서 종묘에서 연주되었다. 조선 시대에 음악을 관장하는 기관이었던 장악서는 예조 소속이었으니, 다소 과감하게 해석해보면 종묘 제례에서 성적인 곡을 연주하는 것도 예에 합당한 일로 여겼던 것이다. 물론 너무 성적인 곡은 남녀상열지사 곡이라고 배격당하기도 했고 그러한 까닭에 고려가요 중에 사라진 곡들도 많았다.
춘향전의 경우 이몽룡과 춘향이 하룻밤을 보내는 과정을 묘사하는 장면에서 춘향이의 성기에 대한 묘사가 적나라하게 나오며, 이몽룡이 춘향이를 향해 섹드립을 날리는 것까지 대놓고 나온다. 그럼에도 조선시대에 춘향가나 춘향전이 금서로 지정되거나 금기시 되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심지어는 중국에 금병매, 홍루몽이 있다면 한국에는 춘향전이 있다고 할 정도로 춘향전 역시 금병매 못지 않게 상당히 수위묘사가 높은 소설이다. 물론 이는 양반 계층이 아닌 중인 이하 백성들의 문화라 생각하며 양반들은 이를 올바른 성정을 해치는 음란한(삿된)풍습이라며 매우 아니꼽게 여겼다. 그래놓고 다들 정실의 자식이 있어도 첩은 기본으로 들이고 노비와 간통을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47] 정조는 평범한 소설조차도 없애야 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런 음란물들은 어떻게 생각했겠는가? 조선 선비들이 모델로 삼았던 명나라 고위 계층들은 귀족적 풍류가 많이 있어서 이렇게까지 꼬장꼬장하거나 겉과 속이 다른 이중적인 면모는 훨씬 덜했다.
임진왜란 이후 성리학이 더욱 교조화되고, 강성해지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남녀칠세부동석, 곧 남녀 간의 엄격한 분리가 일어났고, 조선의 성리학을 논하는 주류파가 심각하게 보수화되었다. 처음에는 융통성이 있었지만 점차 환국을 이유로 당을 우선시하는 성향이 강해지면서 성리학과 유교를 자신에게 유리하게만 해석하는데 집중되어 타 학문과의 융합은 물론 새로운 해석을 모조리 거부하는 폐쇄적인 상태가 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당시 임진왜란과 두 차례의 호란으로 인해 남성 인구가 부족해지면서 자연스럽게 남성의 성적 지위권이 올라가고 양반 이하 피지배계층에도 성리학적 엄숙한 예법과 관념이 정착되었다. 이런 사회 분위기에 맞추어 '남자와 여자는 서로 하는 일이 정해져 있다'는 의미일 뿐인 음양사상에 남존여비라는 근거없는 사상을 넣어서는 이를 합리화하였다.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드물지 않았던 여성의 재가와 이혼이 후기로 가면 금기시되었다. 양반층이 백성들에게 충효를 각인시키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칭송한 것이 바로 '열녀'인데 쉽게 말해서 어린 나이에 결혼해서 20대에 남편이 요절하더라도 다른 남자 찾을 생각도 하지 말고, 혼인을 안 했더라도 함부로 외간 남자와 관계를 맺으면 안 된다 하는 식으로 여자는 어찌 됐든 얌전하게 정조를 지키며 자신의 욕구를 숨기고 남자를 위해 희생할 것을 강요했다.
따라서 현대 한국의 성 문화를 금기시하는 문화적 관념은 조선 후기에 생겨나서, 온갖 문화적 검열이 강화된 일제 강점기 후기에 강화되고 비슷한 수준의 국민 통제를 원했던 군사 독재 정권에 따라 오늘날까지 계승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정리하자면
  •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기독교 근본주의의 영향을 직통으로 받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으며, 그러한 이승만이 들여온 미국의 보수적인 개신교 문화[48]
  • 제3공화국 시절 새마을운동 등 경제 성장 정책으로 생긴 유흥 배격[49]
  • 군대식 권위주의
이 세 가지가 합쳐진 결과로, 현대 한국에서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성문화를 금기시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점은 같은 유교 문화권으로 인식되는 중국, 싱가포르 역시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단적으로 말해 중국은 현재 유교 문화권이라 볼 수 없으며[50] 오히려 공산주의 독재로 인한 금기시가 훨씬 영향이 크다. 그나마 유교 문화가 남아있는 싱가포르의 경우도 온건한 수준일 뿐 독재라는 부분에서는 중국 못지 않다.
유교가 아니지만 이슬람권의 대표적인 예시로는 이란을 들 수 있는데, 이란의 경우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에는 이슬람을 국교로 갖고 있을 뿐, 현 사우디아라비아나 브루나이와 비슷하게 어느 정도의 자유와 부가 약속된 나라였다.[51] 그러나 이슬람 교조주의 독재 정권인 이란 이슬람 공화국이 득세하면서 인권을 탄압하고 억압하게 되었다. 즉, 성 문화의 금기시는 종교 그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국가주의와 독재에 있다 볼 수 있다.

9. 결론


이 문서의 목적은 소위 말하는 유교의 영향 때문에 한국 사회가 문제다, 하는 부분이 과연 맞는지 아닌지 살피고, 그를 통해서 그 문제점을 더욱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다. 그를 통해서 개별적인 부분에서 한국 사회의 문제점을 말하는 어떤 주장의 논거를 검증하는 것이다.

10. 관련 문서



11. 둘러보기




[1] 서양의 왕권신수설과 비슷한 면이 있다.[2] 과거 중국 권력층의 유교 장려에 대해 '유가의 탈을 쓴 법가'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사실 공자의 '정명사상'만 봐도 '위에서 똑바로 안 하면 그것도 당연히 지탄받아야 한다'는 생각이기에 권력층에서 좋아할 내용은 아니다. 게다가 맹자는 왕조 시대를 기준으로 할 때 상당히 급진적인 민본사상을 주창하는 구절이 많다. 그래서 철저한 황제 독재를 추진한 명나라의 주원장은 아예 맹자의 3할 가량을 덜어낸 맹자절문을 만들어 과거 교재로 쓰게 했을 정도였다.[3] 근래에는 이와 같이 변질된 유교적 전통을 신봉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인 탈레반과 다를 바가 없다는 식으로 비하적 의미를 담아 '유교 탈레반'이라는 멸칭으로 부르기도 한다.[4] 기독교는 로마 제국의 국교로 공인되고나서 변질되었고, 불교는 동양의 군주들에 의해 중앙집권화, 권력정당화 수단으로 악용되었다.[5] 다만 이점에 대해 면신례에서 소고기를 먹은 관료들만 성토하기는 좀 그런게 조선시대는 위아래 할것없이 금지됬음에도 소고기를 먹었다. 물론 모범을 보여야할 양반 사대부들과 관료들이 대놓고 공식석상에서 소고기를 먹은건 결코 잘한건 아니다.[6] 예문관 검열에 제수된 조위가 면신례 하다가 기생이 맞아죽는 살인이 발생하고 소까지 잡아서 소고기를 처먹으며 잔치 벌인걸 넘어갔다.[7] 일본의 경우 에도시대 전후. 유교 자체는 5~6세기에 들어왔지만, 일본 사회에 폭넓게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이후다.[8] 《맹자》만장 하3 : 萬章問曰 敢問友 孟子曰 不挾長 不挾貴 不挾兄弟而友 友也者 友其德也 不可以有挾也[9] 대표적으로 군군신신부부자자가 있다. 뜻이 군주는 군주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아버지는 아버지답게 자식은 자식답게 즉 군주, 신하. 아버지, 자식 모두 그에 걸맞게 행동해야 그에 걸맞는 대접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10] 몰론 왕마다 달랐다. 영조도 조금만 잘못 간언하연 유배를 보내기도 했고 태종도 사관을 처벌한 경우도 있었고 연산군은 아예 막나가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연산군처럼 막나가면 반정이란 역풍을 맞는다.[11] 그런데 문제는 일본은 여기저기에서 이것저것 따왔는데 여러가지에서 자기에게 맞는걸 택한다는 취지는 좋았지만 사무라이 정신을 왜곡되게 따온 결과 일본군의 문제점의 원인의 상당수를 가져오게 되었다. 그러나 항복을 못하게 한다는 것은 한중일에서 공통되게 나타나는 특징이었다.[12] 물론 왕은 왕이기 때문에 기분 나쁘면 2,30대 왕이 조부모뻘인 대신들에게 반말을 하고 욕설도 서슴치 않게 하곤 했다. 대표적으로 다혈질로 유명한 영조와 정조[13] 후기고 뭐고 할거 없이 인수대비, 문정왕후는 각종 유교 서적을 읽었던 데다가 특히 인수대비는 여성들을 위한 성리학 저작인 내훈을 지을정도였으니 성리학자라 할 만했다. 한 나라의 대비조차 성리학자가 될 수 있을 정도였다면 그걸로 설명 끝.[14] 그것도 노론의 명문가[15] 가수저라 혹은 설고라고 한다.[16] 당시의 식료로 사용되는 곡물로서는 카스텔라를 만들 수 없었다. 게다가 카스테라에 사용되는 우유, 설탕, 계란은 당시 매우 귀한 식재료였다. '요리하는 조선 남자'에서는 다른 원인도 제시하였는데, 당시 카스테라를 만드는 것을 시도했다는 기록이나 방법 중난백에 거품을 치는 공립법이나 별립법이 언급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냥 달디 단 계란떡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제시하기도 했다.[17] 설령 유별난 양반들의 행적이라면 당연히 유별난 일이라는 기록이 있어야 하는데 그 식탐으로 맹비난을 산 허균조차 그런 소리는 안 들었다. 단지 탐식가라 욕먹었을 뿐 허균이 당시 시대 기준으로는 심각한 이단아임을 감안해보면 그를 철저히 까내리지 못해 안달이었을 텐데 정작 탐식가라고만 욕할 뿐 요리를 했네 마네의 욕은 없다.[18] 이렇게 떠난 대령숙수들은 대개 민간의 요정(음식점)에 취직하였다.[19] 왕족을 가까이 모시는 지밀, 침방, 수방의 대우가 어땠는지 생각해보자. 이 세 부서는 견습나인조차 생각시라 불리며 새앙머리를 하고 특정한 댕기를 드려 제 소속을 나타냈다. 대장금에서 나온 것과 달리 수라간(소주방)은 견습나인이 생각시라 불릴 수도, 제조상궁이 나올 수도 없는 부서였다.[20] 가뭄 등 특별한 사정이 생겨서 왕이 식사에 올라가는 반찬을 줄이는 일 등이 있긴 하지만 그것도 왕 한정[21] 가령 아내가 대를 이을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었거나 연로한 부모님이 있는데 죽은 경우[22] 부모에 대해 광신적이 아니더라도, 남성으로서 체면을 차리느라 부모를 고생시키는 것은 당대에서나 지금에서나 좋게 평가받지는 못한다.[23] 조선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자네"라는 말은 부부가 서로를 부르는 말이기도 했다.[24] 그나마 이를 거부하던 양반가도 적지 않았고, 차등을 둔다 하더라도 자식 취급은 하는등 딸을 하대하는 기록이 있긴 하지만, 딸의 편을 들어주던 기록도 적지않다.[25] 공자의 수많은 제자 가운데 자공이 상인 출신이긴 했지만 어쨌든 그 본인도 상인의 급을 그리 높게 여기진 않았다.[26] 코미디 영화이기는 하지만 전우치에서 현대 사회에 깨어난 전우치와 3도사의 대화에서 이런 사상이 드러난다. 왕이 없는데 누가 백성을 먹여살리냐는 전우치의 질문에 막내 도사는 "기업... 그러니까 상인들이 먹여살립니다."라고 대답했고, 이때 전우치가 "상인들은 자기들 이익만 챙기는 족속들인데 그런 자들이 백성들을 먹여 살린다니 말세가 다 왔구나..."라는 식으로 독백한다. 흥미롭지만 유럽에도 적으나마 이런 관점이 있었는데, 클래런스 대로의 책 "Crime and Criminals: Address to the prisoners in the cook county jail" 이 대표적인 예다.[27] 공업 분야도 유대인의 비중이 상당히 높다.[28] 스페인, 프랑스 등.[29] 영국에서. 그리고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건 표어는 스미스는 지나가듯이 언급한 정도인데, 이 슬로건의 완벽한 함축성과, 이 표어의 은유에 내재하는 세계관이 지닌 미적인 아름다움, 그리고 이 제창이 자신들에게 가져다 줄 이로움에 감명을 받은 유산계급들이 입이 닳듯이 언급했다.[30] 정작 애덤 스미스가 극도로 경계한 한집단에 의한 재화독점을 국가에서 유산계급이 그자리를 차지하여 보이지 않는 손이란 의미가 변질되었다.[31] 이쪽은 지형을 보면 알겠지만 농경으로 먹고 사는거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다. 사우디의 경우 현대에 돈을 엄청나게 처발라가며 농업 생산에 나서고 있지만 그렇다고 만족할만한 양이 아니다.[32] 더욱이 유럽 끝 러시아에 당도하기까지 약 100년이 걸렸다.[33] 일본은 빨리 잡아도 19세기 후반이었고, 중국은 청말 민국초의 혼란과 국공내전, 공산화 직후의 혼란 때문에 공업화가 더 늦었다. 한국은 1960년대부터 산업화가 시작되었다.[34] 특히 이런 식으로 양명학 어쩌고 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은 조선을 비판하는 일군의 인터넷 사상가들이 있는데, 대개 그들이 주로 이용하는 커뮤니티의 주장, 즉 한반도에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였다는 공로를 지나칠 정도로 찬양하는 정치색과 통하는 바가 있어서 이런 주장을 많이 한다. 그러나 이들과 대화해 보면 왕양명의 책 한 글자도 읽어보지 않고 양명학을 받아들이지 않은 조선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35] 당장에 조선 주변국들은 조선이 상대할 수 없거나 중국의 조공국이었다. 여기에 지형적으로도 중국과 일본에 포위되어 있었다. 여기에 노예 문제는 노예가 늘어봐야 국가에 좋을게 없었다.[36] 면직물 말고 다른 산업, 공업, 상업이 잉글랜드에서 발달하지 않은건 아닌데 산업혁명에 있어서 면직업을 뺀 다른 산업이 고려할 만한 영향을 끼쳤다고 보는 이름있는 학자는 없다.[37] 그나마 중국이 자국의 도자기, 비단, 차로 영국과의 교역에서 엄청난 흑자를 올렸다. 그로 인해 엄청난 은이 중국으로 유입되자 영국이 아편을 팔아야 했다. 아편 판매는 좋지 않은 선택이었고 아편전쟁의 원인이 되었지만 만 달리 보면 당시 영국의 사정은 그거라도 팔아서 부의 유출을 막아야 할 상황이었다.[38] 독재와 종교적 억압은 견디면 된다지만 기근은 신체적 한계 때문에 견딘다고 견딜 수 있는게 아니다.[39] 실제로 제사와 성묘 등 대표되는 종가 중심의 문화도 북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설득력과 우월함, 정통성의 아이덴티티를 인정받기 위해서 당시 독재 정권 체제 아래서 전통문화를 손대어 급조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한마디로 코스프레이면서 일종의 문화적 프로파간다라는 것. 옆동네 메이지 유신을 생각하면 납득하기 쉽다.[40] 당장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절대적인 기준이었던 주자가례에도 없다. 애시당초 주자는 제사 자체에도 부정적이었지만 정적들의 비난에 어쩔 수 없이 제사를 인정한 편에 가깝다.[41] 단 홍동백서 등은 현대에 창작된 건 아니고 원래부터 있었다. 다만 원래 유교에도 없는 게 어느 순간부터 생겨서 송시열도 이것들에 대한 정확한 출처를 몰랐다. 즉 관습적으로 내려오던걸 현대에 아예 정착시켜버린 것이다. 하지만 결국은 유교와는 관계없다는 결론만은 바뀌지 않는다.[42] 퇴계 이황종가에서 차리는 설 차례상을 보면 과일 3~4종류를 1개씩 총 1접시, 전(두부부침) 1접시, 건어물포 하나, 떡국은 모시는 조상 1명당 1그릇이 끝이다. 민간에서는 상다리가 휘어지다못해 상차리는 사람들의 몸과 재정이 휘어지는데, 정작 한국 유교의 대표격인 이황 선생의 종가에서는 저렇게 간소하다. 애초에 저 떡국도 원래 차 한 잔이었던것을 떡국으로 대신한 것 뿐이니, 실제로는 더 간소하다는 걸 알 수 있다.[43] 단적인 예로, 제주도 지역에서는 제사상에 ''''''을 올린다. 제주도의 지리 특성상 쌀을 구하기 힘들기 때문이라고 한다.[44] 단, 군사훈련에 가까운 기마식 격구가 아니라 정구식 격구를 주로 했다.[45] 다만 서술은 이렇게 했지만 중국은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유교적 요소가 많이 사라졌다. 이는 후술.[46] 단, 중국은 포르노를 서양 문화로 생각해서이기도 하다.[47] 물론 예외는 있어서 조광조처럼 진짜로 죽을 때까지 일부일처를 유지했던 사례도 있다.[48] 대한민국의 개신교는 미국에서 가장 보수적이고 근본주의적인 청교도 개신교에서 영향을 받았기에, 미국 남부를 뺨칠 정도로 성 엄숙주의가 강하다.[49] 모두가 잘 사는 대한민국을 위해 고생해야 하는데 유흥이나 하고 있으면 국가에 도움도 안 되는 말종이라는 시각으로, 박정희 집권기에 국가주의 차원에서 나온 인식이다.[50] 문화대혁명으로 공자 묘를 파헤친 것을 생각해보자.[51] 물론 황제 팔라비 2세의 독재 탓에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민주주의 공화국만큼 자유롭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