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황양이

 

1. 개요
2. 사상적 기틀
3. 존황양이파의 등장
4. 존황양이파의 성격
5. 이후의 전개


1. 개요


존황양이(尊皇攘夷) 혹은 존왕양이(尊王攘夷).
한 글자가 다르긴 해도 일본어로는 똑같이 손노조이(そんのうじょうい)라고 읽는다. 천황을 받들고(존황) 외세를 배격(양이)하자는 표어이다. 일본 에도 막부 말기에 주로 사츠마, 초슈 등 웅번에 존황양이론이 퍼져 메이지 유신의 기틀이 되었다.
기원전 7세기 중국 춘추시대진문공이나 제환공 등은 제후들의 패자로서 '주나라 왕실을 받들고 오랑캐들을 물리치자.'는 뜻으로 존왕실 양이적(尊王室 攘夷狄)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1] 이것을 4자로 줄여 존왕양이(尊王攘夷), 더 줄여 존양(尊攘)이라 하였다. 중국에서는 한족왕조가 이민족 세력을 공격할 때마다 이 표어를 꺼내들었다.
일본에서는 13세기 가마쿠라 시대 즈음부터 천황을 받들어 적을 물리치자는 뜻으로 '존왕양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19세기 에도막부 말기에 명분론이 강해지자 '존'''황'''양이'라고 한 글자 바꾼 표현이 퍼져 지금까지 사용된다.

2. 사상적 기틀


존황론과 양이론이 결합된 것이다.
전반적인 핵심 개념은 일본식 유교국학의 일종이라 볼수 있는, 미토가쿠(水戸学) (후기) 사상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일본에서 유교중국조선에서보다는 그 영향력과 파급력이 작았다. 가장 큰 이유로 일본 특유의 정치적 상황 때문이었다. 천황의 조정과 쇼군막부로 대표되는 이원화된 정부체제 때문에 일본의 유학자로서는 누구에게 충성을 바쳐야 할지 아리까리했다. 유교동아시아 여러 왕조에서 왕권을 드높일 의도로 많이 연구하고 채택했지만, 유교에서 말하는 '군(君: 임금)'이 누구를 말하는지 일본에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에도 막부가 설립되고 사회가 안정화되자, 막부의 권위을 튼실히하고자 충효사상을 강조하는 주자학(강항) 등 유교를 본격적으로 이용했다. 원칙대로라면 충의 대상은 당연히 그 나라의 임금이어야 하지만, 일본에서는 쇼군이 실권을 쥐었다. 유교적 명분과 현실이 너무 다른 상황에서 타협하여 '천황이 군림하되 쇼군이 통치를 대행한다.'는 인식이 퍼졌다. 천황은 권력을 쇼군에게 잠깐 양도했을 따름이란 것이다. 이를 '대정위임론'이라고 부르지만 딱히 막부에서 공인한 것은 아니었다. 개개인이 그렇게 생각했을 뿐...[2] 같은 섬나라인 영국명예혁명이후 군림하는 왕과 실권자가 구별되는 것과는 다르다.[3] 오규 소라이고쿠가쿠(国学)도 이 점에 대해서는 두루뭉술 넘어갔다. 하여, 일본의 유교는 명분론보다는 실리론에 치우쳐진 경향이 크다.
미토가쿠 사상은 전기와 후기로 나뉘는데, 전기는 대일본사를 편찬한 미토 고몬이 시작한 학파로 유학(주자학, 양명학), 사학, 국학, 신토가 결합한 형태였다. 후기는 미토번주였고 열렬한 존황양이론자였던 도쿠가와 나리아키[4]가 주도했다. 오규 소라이와 국학의 사상에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에도 막부 말기에 이르러, 미토카쿠의 후지타 도코(藤田東湖), 아이자와 야스시(会沢安) 등이 중심이 되어 '임금을 받들고 오랑캐를 쫓아낸다.'는 고대 중국 춘추시대의 표어를 차용하여 존황양이론을 도입했다.
하지만 이들 유학자들이 결코 막부 타도를 바라진 않았다. 존황론을 주장했지만 에도 막부를 무너뜨려야 한다는 도막파와는 달리 천황의 권위를 바탕으로 막부 중심으로 정치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에도 막부도 도막파도 존황에는 찬동했다. 다만 조정과 막부에서 막부가 계속 실권을 잡고자 했던 도쿠가와 요시노부와 조정의 권위를 등에 엎고 중앙 정치 권력에 참여하고자 했던 힘있는 사츠마 · 조슈 · 토사 등 웅번 세력이 갈등했던 공무합체파 운동과,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공무합체 운동을 무력화한 후, 그 반발로 무력으로 에도 막부를 타도하고 천황에게 정권을 돌려주고 천황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정부를 만들려고 한 도막파와 끝까지 에도 막부를 지켜려 했던 좌막파(아이즈 번 · 구와나 번 등)의 대결(무진전쟁)이 에도 막부 말기의 혼란의 실체였다.

3. 존황양이파의 등장


에도 막부가 말기에 접어들면서 막부는 여러 문제로 속부터 곯아가며 그 영향력을 잃어갔고[5] 반대급부로 사츠마, 조슈, 미토, 토사등지의 군벌들의 영향력이 커지기 시작하면서 어느새 막부도 이들을 함부러 다룰수 없는 상황까지 오게된다.
쿠로후네 사건(흑선내항)이 일어나기 7년전인 1846년에 영국은 류큐에게 프랑스는 에도막부와 조선에게 각각 개항과 통상을 요구했었고 이에 대해 개국론과 양이론으로 찬반이 갈리자 결국 막부는 이도 저도 아닌 대답을 '''보류'''하는 것으로 몇년을 질질 끌게 된다.
이는 결국 1853년 벌어진 쿠로후네 사건[6]을 시작으로 그 다음해 채결된 미일화친조약 화친조약 4년뒤에 체결된 미일수호통상조약등 불합리 그 자체인 불평등조약을 여럿 맺으면서 금과 은이 서양으로 유출되며 일본 전국에서 심한 경제적 타격을 입게 된다. 이로인해 일본에선 반서양 적대감정과 도쿠가와 막부를 힐책하는 여론이 강해지기 시작했다.
위의 일들을 통해 지방의 웅번(군벌)들은 막부의 정치적 영향력에 대해 큰 불신감을 가지게 되었고 막부에 반대하기 위해 모이는 동시에 이 명분으로써 천황에게 직접 충성한다는 존황론이 대두되었으며 동시에 서양을 배척하자는 양이론또한 대두되어 이 둘이 합쳐진 존황-양이론이 발굴된다. 이후 후술할 정치적 사건들이 연달아 이어지면서 반(反_막부 정서가 점차 힘을 얻게 되었다.
1858년 7월 29일, 막부의 대로(大老)이자 실권자인 이이 나오스케미일수호통상조약고메이 덴노의 칙허를 '''받지않고''' 일본에게 불리한 불평등 조약을 독단적으로 체결해버린다.[7]

이유야 어쨌든 일본에게 악영향을 주는 조약을 막부의 대로가 단독으로 채결했다는 사실에 고메이 덴노는 분노했다. 여기에 양이파까지 덴노를 부추기자 그 해에 덴노가 직접 미토 번에 비밀칙서를 내린다.[8] 막부가 덴노의 허락을 받지않고 중요한 조약을 맡은 전례도 없었지만 반대로 덴노가 막부 몰래 다른 군벌에게 비밀 칙서를 내린 적도 없었기 때문에 이이 나오스케가 나중에 이 일을 알면서 천황과 막부 사이의 감정의 골이 깊어졌다.
결국 막부를 적대하고 천황을 옹립하자는 존황파들을 보다못한 이이 나오스케는 반막부 성향 웅번들(존황양이파 지사 + 히토쓰바시파 인사) 100명을 상대로 안세이의 대옥사로 불리는 1858년부터 1859년까지 대규모로 숙청해버린다.[9]
1860년 이이 나오스케는 대낮에 사쿠라다문밖의 변으로 암살당했다. 또한 막부의 개국파 고위관리와 일본 체류 외국인들을 암살하는 테러활동이 일어났다.
1860년 영국 공사 올콧이 군인들을 이끌고 후지산을 등산, 축포를 쏘고 영국 국가를 부르며 샴페인을 마셨다. 신앙의 대상이기도 한 후지산에 외국인이 올라갔단 소식에 양이의 기운이 달아올랐다. 다음해 영국공사관에 낭사 14명이 쳐들어가 영국인 3명을 다치게 했다.
결국 1861년 1월 14일, 미국 공사관 통역사 헨리 휴스켄이 칼에 맞아 다음날에 사망했다.

4. 존황양이파의 성격


존황양이라는 단어는 '''명분과 주장'''으로 이루어진 표어이다. 사실 존황론은 웅번들에게 명분에 지나지 않았다. 이들은 천황의 권력을 정말로 높이려고 하기보다는 천황의 이름을 빌려 막부를 찍어누르기를 원했다. 이와쿠라 도모미 같은 웅번 가신들은 각종 비밀칙서를 천황의 이름으로 다이묘들에게 하달하였다. 후에 메이지 유신 시대가 열림으로써 천황 중심의 정치체계로 제편되었지만, 허울 좋은 명분이었을 뿐 실제론 사츠마, 초슈의 가신들을 비롯한 세력이 중심이었고, 천황 또한 자신에게 돌아오는 권력의 집중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여 웅번들에게 휘둘렸다.
그렇다고 해서 웅번들이 진심으로 양이를 추구한 것도 아니었던 것이, 소위 ‘막말의 사현후’로 불리는 사쓰마, 도사, 에치젠 등 웅번의 영주들은 근대화를 통한 번정개혁 및 군사력 강화로 명성을 얻은 이들이었다. 미일수호통상조약 관련으로 막부와 조정이 대립하는 과정에서도 다이묘들 대부분은 막부의 개항 결정에 따라가는 경향을 보였다. 실제로 강한 양이 의지를 드러낸 것은 번정에 참여하거나 독립적으로 과격 행동에 나서기 시작한 각 웅번의 하급 무사들이었다. 웅번들이 주창한 양이론은 양이파 하급 무사들의 폭발력을 자신들에게 최대한 유리하게 이용하기 위한 측면이 강했고, 사쓰마의 시마즈 히사미쓰, 도사의 야마우치 도요시게처럼 정세가 바뀌자 번의 양이 과격파들을 토사구팽해 버리는 경우도 심심찮게 발생했다. 심지어 양이파 하급무사들 중에서도 개항과 서구화의 필요성 자체는 인식하면서도 막부 타도를 위한 명분으로서 양이를 내세운 자들이 상당했으며, 바로 이들이 훗날 양이를 슬쩍 포기하고 막부 타도에 성공하여 메이지 유신의 주역이 되었다.
결국 존황이든 양이든 막부 타도와 신체제 수립의 명분을 확보하기 위한 프로파간다에 불과했고, 이는 메이지 신정부에서의 급속한 근대화 및 서구화, 천황의 제한적 권력, 번벌의 정권 장악으로 증명된다.

5. 이후의 전개


타카스기 신사쿠, 이노우에 가오루 같은 영국 대사관 방화 사건(1862년)과 외국인·개화파를 암살, 테러하는 일이 일본 전역에서 일어났다. 이런 와중에 이이 나오스케가 암살되는 사쿠라다문밖의 변이 일어나는 등 반막부 활동은 더욱 극심해졌다. 그 와중에 사카모토 료마가 대표적인 개화파 인사 카츠 카이슈를 암살하려고 했지만. 그의 행동에 감화되어 개화파로 돌아서기도 했다.
그리고 1860년대에 이르면 웅번들의 활동도 큰 전환기를 맞았다.
사츠마 번은 선대의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가 서양문물을 좋아하는 개화파 인물이라, 서양 기술을 도입하여 번의 부국강국 정책을 취해서 양이론자는 아니었다. 정치적으로는 공무합체파였고, 조정과 막부가 연계하고 도자마 다이묘들도 중앙 정계에 참여하는 연합 정권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런 나리아키라가 병으로 급사한 후, 뒤를 이어 사츠마 번의 실권을 쥔 이는 번주의 친부인 나리아키라의 이복동생인 시마츠 히사미츠였다. 그 역시 형의 유지를 이어받아 공무합체파였다.
이런 상황에서 뜻하지 않게 나마무기 사건이 발생했다. 1862년 시마즈 히사미쓰의 다이묘 행사에 말에서 내리지 않고 행렬을 가로질러 가던 영국인을 무참히 살해한 사건이 벌어졌다. 영국은 이에 대해 범인의 색출 및 엄중한 처벌을 요구했으나, 사츠마는 이 요구를 거부했고, 막부는 대신 10만 파운드를 배상금으로 지불한다. 하지만 영국은 만족하지 않았고 사츠마에게 직접 합의금을 더 받고자 함대를 파견했다. 결과 사쓰에이 전쟁(1863년 8월 15일 ~ 1863년 8월 17일)이 발발했다. 결과 사츠마 번과 영국은 강화조약을 맺고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
한편, 초슈에서는 1864년 시모노세키 전쟁이 발발하여 서구 국가들의 힘을 직접적으로 느꼈다.
각 웅번들은 명분(존황)과 주장(양이) 중에서, 양이가 더 이상 불가능함을 알고는 실상 막부의 정책과 같은 길을 걸었다. 웅번들은 노선을 바꾸어 존황양이 중 양이를 버리고 명분론인 존황에 집중했다. 에도 막부도 조정과 연계하되 막부가 주도하는 정권을 지향했다. 사츠마 번 등 유력한 번들은 도자마 다이묘들도 중앙정치에도 참여하는 연합 정권을 원했다. 주도권을 누가 잡느냐 하는 문제였다.

이런 대립의 결과, 1865년부터 막부를 무력으로라도 타도하자는 도막파(倒幕派)와 막부를 옹호하는 좌막파(佐幕派)[10]로 갈린다.
에도 막부는 당연히 반정부 세력인 도막파 세력을 뭉개버리려고 조슈를 두 차례나 정벌하기 위해 전투를 벌였으나, 좌막파였던 사츠마 번도 내부사정이 변해서 도막파로 돌아섰다. 사카모토 료마가 중재하여 이른바 '삿쵸 동맹'을 맺자 사츠마는 제2차 초슈 정벌에 군대를 보내지 않았다. 그 결과 에도 막부군이 패퇴하고 막부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에도 막부의 몰락의 위기에 처했다.
이러한 혼란기에 제15대 쇼군에 취임한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정권을 천황에게 되돌려주기로 결심하고 대정봉환을 결행했다.
1867년 대정봉환으로 신정부가 성립되고 무진전쟁으로 좌막파 잔존 세력이 어느 정도 정리되자, 실상 도막파, 좌막파의 이분화된 구조도 유명무실해졌다. 존황양이의 세력을 이끌었던 두 주요세력인 사츠마, 초슈 중심으로 한바츠(藩閥) 시대가 열렸다. 명분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들의 최대 이념이었던 존황론은 발전·심화되어 메이지 유신 이후, 국가신토로 격상되고 더 나아가, 극단적인 천황 숭배 사상으로 발전하여 천황은 곧 현인신(現人神), 현존하는 살아있는 신으로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1] 그래서 존왕실(尊王室) 대신 존주실(尊周室)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2] 대정위임론을 명확히 규정함은 참으로 얄궂게도 막부의 생명이 끝나는 대정봉환 때에나 되었다. [3] 영국은 실권이 의회에 있더라도 어쨌든 최종결제권은 왕에게 있었고, 명예혁명 이전까지는 의회 해산권이 국왕에게 있었기 때문에 국왕이 마음에 안 들면 마음대로 의회를 무기한 해산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막부 시기에 천황은 그저 뒷방 늙은이 ,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고 모든 실권과 결정권이 전부 쇼군에게 있었다. 사실 쇼군들이 천황 자리를 차지하지 않은 것도 초기에는 '신토의 중심인 천황의 자리를 빼앗았다가는 전 일본을 상대해야 하는 위험을 안게 되어서', 후기에는 '이미 모든 권력이 쇼군에게 있는 만큼 굳이 천황의 자리를 차지할 필요가 없어서'였다.[4] 15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친부.[5] 막부 자체가 말기에 접어들면서 말그대로 권력투쟁이 심해지기도 했고 특히 13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사다가 정치적으로 활동을 안하는데다가 서양의 진입까지 가속화 되면서 영향력이 더 빨리 없어지는 부분이 있다.[6] 요약하면 에도의 항구에 대놓고 군함을 들이밀어 개항을 요구한 사건. 일본은 그 당시 상술한 각주대로 도쿠가와 이에사다의 후계자를 정하기 위한 권력투쟁으로 바빠서 외세에 신경쓸 여력이 없었고 에도는 항구가 막히면 그대로 물자보급이 사실상 끊기게 되므로 불평등조약으로라도 빨리 처리할 수 밖에 없었다.[7] 사실 천황이 사실상 허수아비라곤 해도 오랫동안 이어져온 의례로서 중요한 과정이기도 했는데, 이를 처음으로 무시해버린게 되는 것. 물론 천황 본인이 거부했다거나 한건 아니고 양이파가 칙서 전달을 방해하면서 시간을 끌자 어쩔수없이 나오스케 독단으로 처리해버린 것이다.[8] 이를 무오년(1858년)에 내렸다 하여 '무오의 밀칙(戊午の密勅)'이라고 부른다.[9] 이때 죽은 핵심인사 중에는 조슈 지방의 요시다 쇼인이 있다. 쇼인 본인은 사상만 존황양이일뿐 큰 활동은 하지 않던 인물이었으나 하필 그의 제자들이 이토 히로부미, 기도 다카요시, 타카스기 신사쿠, 이노우에 가오루, 야마가타 아리토모같은 근대 일본을 수립했을 정도로 그 당시 영향력이 있었던 인물들이라 사상이 존황양이라는 이유만으로 붙잡혀 사형당해야 했던 스승을 잃은 뒤로 이들은 극단주의자가 되었다.[10] 대표적인 좌막파 조직은 그 유명한 신선조아이즈 번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