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주의
Asia(亜細亜)主義
Pan-Asianism
1. 개요
아시아 제국(諸國)들 간의 연대를 주장하는 사상. 범아시아주의, 대아시아주의, 흥아론, 혹은 당시 표기 기준에 따라 아세아주의라고도 한다.
일반적으로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에서 제기된 흥아론이 그 원류로 꼽히지만, 유사한 개념은 메이지 유신 이전부터 존재해왔으며 이후에도 각양각색의 형태로 변주되어 왔다. 대표적인 예가 쑨원의 범아시아주의이다. 때문에 그 범위 또한 다양하여 좁게는 동북아시아의 한중일 삼국에서 넓게는 인도를 비롯한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서아시아까지 포함할 수도 있다. (사실 이는 '아시아'라는 개념이 지나치게 대충 만들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2. 역사
2.1. 시초
아시아주의는 19세기 말 ~ 20세기 초까지는 그럭저럭 한중일 3국에서 인기가 있던 사상이었다. 19세기 중엽, 서구 열강의 동양 침략이 본격화하자 한중일 3국은 위기감을 느껴갔다. 청나라는 실제로 위협에 시달렸고, 일본은 매슈 페리 제독이 흑선을 끌고 나타난 뒤 불평등조약을 체결하면서 본격적으로 시대의 변화에 눈을 뜬다. 조선은 외부에서 들려오는 소식을 접하면서 "뭔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만, 상대적으로 일본과 청나라에 비해서 좀 늦게 반응했다.[1]
사상적 배경은 존황양이론과 일맥상통한다. 그 연장선상으로도 볼 수 있다. 서양의 일본 침략 위험에 무력한 에도 막부를 대신해 천황을 중심으로 한 존황양이파가 정권을 잡아서 메이지 유신과 메이지 정부를 수립했다. 이후 적극적으로 서양의 기술과 학문을 받아들였지만, 그렇다고 양이(攘夷)를 버린 것은 아니었다. 존황양이 사상을 아시아 전역으로 확대해서 일본이 아시아 맹주가 되어 유색인종 국가가 대동화합하여 서양 오랑캐 열강의 아시아 침략을 물리치자는 사상이었다.
2.2. 탈아론
2.3. 흥아론의 등장과 변질
후쿠자와의 이 주장에 대해서 안티테제로 등장한 것이 흥아론(아시아주의)이다. 도야마 미쓰루(頭山満), 가쓰 가이슈 등이 흥아론자였는데, 이들은 일본 단독으로 서구에 대항하는 것은 무리이므로, 조선 및 청나라와 연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특히 가쓰는 "조선은 비록 지금은 약소국이나 과거에는 일본에 문명의 종자를 전파한 스승이었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망명한 김옥균은 변해버린 후쿠자와 유키치와는 관계가 소원해지고, 대신 일본 내의 흥아론자들과 가까워지게 된다. 이들은 한중일의 연대를 강조하는 삼화주의(三和主義)를 제창했다. 한편 일본 정부는 김옥균을 '짐'으로 보았고, 오가사와라 제도 같은 외지로 '요양'보내기에 급급했다. 더군다나 조선 측에서도 끊임없이 김옥균의 암살을 시도한다. 이 상황에서 김옥균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높이기 위해서 이홍장과 담판을 하러 홍종우의 안내를 받아 상하이로 향하게 되는데, 사실 홍종우야말로 조선 정부가 준비한 함정카드였다. 홍종우는 상하이에 도착하자마자 암살자로 변해서 김옥균을 살해하고, 김옥균의 사망은 일본 내의 흥아론자들을 충격과 공포에 빠트려 버렸다.
일본 언론들은 이 사건을 "전근대적인 야만"이라고 비판하였고 청나라도 한통속이라고 디스하였으며, 후쿠자와의 탈아론이 힘을 얻게 된다. 심지어 흥아론자인 도야마 미쓰루마저도 김옥균의 복수를 하자는 소리를 외치게 되었다. 그리고 벌어진 사건이 을미사변. 이후로 아시아주의는 변질되고 정반대 주장인 탈아론과 연합하여 동아신질서, 아시아 먼로주의 등을 거처 대동아공영권이라는 불쏘시개 같은 주장을 낳게 된다.
2.4. 변질의 이유
사실 초창기의 흥아론은 근본적으로 나쁜 주장은 아니며 탈아론의 대항마로서 그 의미가 깊다. 그러나 이 주장을 일본 정부는 조선 침략의 명분으로 써먹었으며, 훗날 탈아론과 요상하게 섞여서 대동아공영권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이것 때문에 현대에는 한국에서는 물론이고 일본에서도 금기시된다.
흥아론이 이상하게 변질된 것은 근본적으로 일본이라는 나라가 이를 실행할 역량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말이야 기세좋게 아시아 최고의 근대국가를 자임했지만, 한일병합 당시만 해도 일본은 재정적으로 좀 많이 취약한 상태였다. 일본은 19세기 말부터 줄줄이 벌어진 전쟁으로 빵꾸난 재정부터 채우고 봐야 하는 다급한 상황에 직면했다. 그 결과는 식민지 억압이었고 오죽하면 '''그 개판 오분전의''' 조선 말기를 겪었던 조선인들조차 차라리 그 시절이 나았다며 전국적으로 들고 일어날 지경이 되었다. 그리고 일본을 이끌던 지도자들은 메이지 유신 이후부터 2차대전 패전까지 아시아주의를 진지하게 취급하지 않고 그저 구실로만 써먹었다.
당시 조선의 개화파 지식인들은 아시아주의에 크게 동의했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도 이러한 생각에 기초한다. 하지만 안중근은 일본이 아시아주의를 주창하면서 스스로를 "아시아의 맹주"라 칭하고 "일본을 중심으로 모여 아시아가 연합하여야 한다"고 주장한 것을 비판하며, "한중일 3국의 연합이 반드시 수평적 연대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결국 안중근은 일본이 한국을 강점하고 깽판을 부리는 것을 보자,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였다.
당시 일본의 자유당, 우익단체, 자유민권운동가들은 조선 개화파 지식인들을 도왔다. 그러나 아시아주의가 아직은 멀쩡한 주장이던 시절에도 당시 일본의 관료계층과 자유당, 우익단체 같은 시민사회 계층은 아시아주의를 전혀 다르게 해석했다. 시민 사회와 우익정당들은 아시아주의를 정말로 믿었지만, 관료계층은 그저 제국주의적 팽창을 위한 명분으로 써먹었다.
그래서 개화파 지식인들은 순진하게도 "한국이라는 야만 상태의 나라가 빨리 깨어나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선 무력도 불사"해야 한다는 생각에 동조하고 말았다. 그들은 한일합병을 일종의 합중국 내지는 국가 연합으로 생각했지, 그저 병합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자포자기 상태에서 한일합방을 지지한 세력들 가운데 이만큼일 줄은 몰랐다고 후회하는 사람들이 뜻밖에 많았다. 대표적인 예가 일진회의 거물이었던 친일반민족행위자 이용구. 이용구는 당시 일본 극우파인 우치다 료헤이의 도움으로 일진회를 만들고 한일합방 건의서를 순종과 이완용에게 건의할 정도로 한일병합에 적극적이었는데, 막상 '합방'하니 1대1 합방이 아니라 일방적인 흡수합병이었다는 걸 깨닫자 일본이 주는 작위도 거절하고 얼마 안 가 사망했다. "우리는 바보짓을 했어요. 처음부터 속았나 봐요."라고 죽기 얼마 전에 우치다 료헤이에게 이야기했다니 이들의 아둔함을 짐작할 만하다. 도야마 미쓰루와 그의 단체 현양사는 이용구에게 사과까지 했고 끝내 동광회(同光會)를 결성하여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기까지 한다.
그런데 저 사람들 저게 진심인지 의심스러운게,
- 겐요샤는 백색 테러를 자행한 정치깡패이자 을미사변의 장본인들이고, 2차대전 시기에도 극단적인 극우강경파였으며, 해외 공격을 주장했고, 이 때문에 2차대전 종전 이후에 일본의 미국인 쇼군 더글라스 맥아더가 강제로 해산해버렸다.
- 도야마 미츠루의 단체 겐요샤의 실행부대가 우치다 료헤이의 흑룡회이고, 흑룡회는 2차대전 시기에는 만주에서 한국인 학살에 앞장섰고, 2차대전 시기에도 일본 정계에 엄청난 영향력을 지닌 주류 정치단체였다. 겐요샤가 해산된 이후에는 우익 야쿠자의 핵심이 되었고.
- 조선의 독립을 주장한다는 동광회의 한국인 회장이라고 앉힌 사람이 누구냐면, 박영효. 무엇보다 도야마 미츠루와 우치다 료헤이가 워낙에 확고부동한 제국주의자에 극우우익이라서, 민족문화대사전 동광회 문서를 포함한 대부분의 자료에서 동광회는 친일단체로, 이들의 독립청원은 기만적 정치행위로 분류된다.
- 이용구의 일진회는 토사구팽 당한 것이 맞고, 이용구의 경우도 처절하게 무시당했다. 일진회는 일본 총독에 의해서 강제 해산되었고, 일진회의 회장이자 동학을 분리해서 창설한 시천교의 교주였던 이용구는 병합 이후에 만주로 이전해서 만주국 건국에 참여하려고 했다.[2] 그 때 필요한 금액이라고 요구한 것이 300만엔, 일본에서 이용구에게 준 것은 10만원, 엔으로 15만엔이니 요구금액의 정확하게 5%.
아둔하다 까기 전에 당시 이들이 처해 있던 현실을 생각해볼 필요도 있다. 이제 겨우 나라 밖으로 눈 돌리고 계몽이 될까말까한 어린아이나 다름없는 사람들을 시시각각 다가오는 엄청난 위기 앞에 던져놓고 그나마 개중에 가장 앞서간 사람들이 "내겐 이 상황을 해결할 방법이 있어. 모두들 나를 믿고 따라와 줘!"라며 이끌어 준다면 어지간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그 떡밥을 물지 않을 수 없다. 같은 매국노라도 처음부터 팔아버릴 생각으로 나섰던 것과 잘해보려고 노력했는데 결과가 시망인 것은 분명 다르다. 그야말로 의도는 좋았다의 전형적인 예.
3. 결과
어쨌든 이러한 연유로 구한말 개화파 엘리트 지식인 중심으로 진행되던 계몽운동 진영은 강제병합 이후 상당수 소극적/적극적 친일반민족행위자로 흘러가게 된다. 아시아주의를 그저 침략에 대한 명분으로만 써먹던 일본 정부를 너무 순진하게 바라봤던 것.
물론 계몽운동 진영 중에서도 아시아주의를 비판한 사람들은 있었다. 안창호는 이토 히로부미와 만났을 때, 이토가 '일본을 유신한 다음에는 조선을 유신하고 청나라를 유신하는 것이 나의 꿈'이라 한 말에 '조선을 유신하고 싶으면 조선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당신의 그 꿈을 이루는 데 있어서 더 좋은 방법이다. 미국이 일본을 유신하겠다고 했으면 지금 일본의 유신이 있었겠는가. 당장 당신부터 앞장서서 반대했을 것이다'라고 꼬집었다. 또 신채호는 문명화되는 것은 좋은데, 이것을 이루는 단위는 반드시 국가와 민족이어야 한다는 것, 즉, 문명화에는 반드시 독립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비판했다. 일본이 아시아주의를 주창하는 건 조선을 낚아채어 강제병합하려는 얄팍한 속임수에 불과하다고 보았지만[3] , 이들과 같은 사람은 비주류였다. 그리하여 이들과 같은 비주류 계몽운동 진영은 의병 항쟁과 결합하여 독립군으로 활동하게 된다. 다만 아시아주의가 원래 그런 의도가 담긴 사상은 아니다. 일본이 주창하고 신채호 등이 비판한 것은 변질된 아시아주의에 가깝다.
그리고 일본 우익도 아시아주의를 변질시켜 선전했지만 일본 좌익들도 이러저러 로망을 가지고 있는 사상이다. 이것은 본래 아시아주의의 의의는 탈아론의 안티테제임과 동시에 제국주의의 안티테제이기도 했기때문에, 일본은 제국주의를 선택했지만 만일 달랐다면 일본은 과오를 저지르지 않고 진정한 아시아의 연대를 이룰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데에서 비롯한다. 가장 제국주의의 안티테제로서의 아시아주의를 정의한 인물온 쑨원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는 대아시아주의로 서구식 제국주의를 패도, 그것에 저항하는 아시아주의를 왕도라고 구분했으며 일본의 아시아주의와 많은 영향을 주고받아 일본에도 아시아주의자이자 쑨원주의자가 많았다. 즉 일본의 대아시아주의가 일본의 팽창을 정당화하는 것이 되어갔다면 쑨원의 대아시아주의는 기본적으로 '열강에 대한 저항'에 의미를 두고있었다.
그도 조선의 개화파들처럼 혁명을 준비하면서는 아시아 국가로서 최초로 근대화를 이룬 일본을 많이 본받고 혁명에도 도움을 받았으나, 일본 대아시아주의의 변질과 제국주의 행보를 보고 일본에서의 연설에서 "일본은 이미 유럽 패도의 문화를 이룩했고 또 아시아 왕도의 본질도 갖고 있다. 이제부터 서구 패도의 주구가 될 것인지, 아니면 동방 왕도의 간성이 될 것인지 일본인 스스로 잘 선택하기를 바란다.” "일본은 열강을 본떠 중국 등 약소한 아시아 여러 나라를 침략의 대상으로 삼을 것인가, 아니면 같은 편에 설 것인가. 왕도를 취할 것인가. 아니면 패도를 취할 것인가." 라는 은근한 경고와 물음을 던졌다. 이 쑨원의 사상에 영향받은 일본 창작물, 혹은 쑨원의 대아시아주의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일본의 만화로 왕도의 개 가 있다. 주제부터가 왕도와 패도.
이렇듯 아시아주의는 역사가 깊은 사상이다. 간단히 말하면 아시아주의는 동아시아의 인종주의였기 때문에 많은 부분에서 서구 문명과의 충돌이 계속되면서 끊이지 않는 떡밥으로 작용한 것. "북쪽에서는 로스케가 쳐들어오고 태평양 건너에선 양키가 쳐들어 오고 인도는 이미 영국에게 먹혔는데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 되겠냐?" 라는 생각은 동아시아인으로 하여금 위기감을 느끼게 했다.
아시아주의는 결국 서구의 침략에 대항하는 단결된 아시아를 주장했기 때문에 1945년에 일본 제국이 패망하는 시점까지도 일본의 일부 이상주의자들은 이것을 믿었다. 대표적인 예가 신해혁명에도 참여했고 2.26 사건에도 참여한 기타 잇키, 만주사변의 주모자이자 만주국의 흑막 중 하나였던 이시와라 간지이다. 그런데 이 사람들에 더해서 도야마 미츠루와 현양사까지 죄다 일련종에 걸려 있다.
태평양전쟁 패전 이후로는 일본의 보수보다는 진보 진영에서 더 많이 대두되는 사상이다. 일본 진보진영의 아시아주의에 대한 이상은 정말 만만치 않고, 전후 평화주의가 뿌리내리면서 더 심화되었다. 90년대까지는 그야말로 로망에 불과했으나 한국의 민주화와 경제문화적인 성장, 중국의 굴기와 맞물려서 어느정도 현실성까지 갖추게 되었다.
일본 민주당이 정권을 잡고 편 외교기조도 이런 현실인식에서 아시아주의에 기반해 중국, 한국과 화해하고 아시아끼리 협력하는 정책이었지만[4] 중국과의 센카쿠 분쟁과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상륙작전으로 일본 국민의 지지를 상당수 잃어버렸고 아베 신조의 자민당으로 다시 정권교체가 되면서는 많이 빛이 바랜 기조이다.
한국인들 입장에서는 평소 친한 발언을 하던 일본의 진보진영 정치인들이 어떤 때에는 한국 입장에서 상당히 듣기 거북한 발언을 하기도 해서 헷갈려하는 경우가 많은데 아시아주의의 영향이 크다.
앞서 말한 안중근에 대한 일본에서의 재평가도 이 아시아주의의 영향이 있다. 아시아주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입장에서 안중근은 동양 평화를 위한 진정한 아시아주의자라는 고평가를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진보 진영을 제외하고도 아직도 잔흔이 남았는지 혐한을 표방하는 중장년층 넷우익들의 입에서 종종 나오기도 한다. 이 경우엔 대동아공영권을 온건하게 변형한 것에 가깝고 상당히 복잡한 심경을 드러내는데 프랑스와 프랑스의 아프리카 구식민지의 관계나 영국의 커먼웰스처럼 일본이 맹주가 되어 한국을 계도해 중국(혹은 미국)에 대항했으면 하는 바람을 은연중에 내비치기도 하면서, 한국에서 친중적인 행보가 나올 때마다 극렬하게 비판하기도 하며 한국이 일본제국의 존재와 일본의 주장에 긍정과 동의만 해주면 같은 아시아 국가끼리 잘해볼 수 있다는 심리를 은근슬쩍 꺼내기도 한다.
지금은 중국에서 이것과 유사하게 서방 국가에 대항해서 아시아가 단결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 역시 주변에 중화민국 등의 적이 많았던 일제와 비슷하게 일본, 인도, 한국 등의 많은 아시아 국가들이 이 주장에 동조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실현 가능성은 거의 없다.
4. 관련항목
[1] 물론 이필제의 난 같은 경우를 보더라도 일부 극소수의 인물들은 알음알음 국제 정세에 민감했음을 알 수 있다.[2] 이런 장면에서 이시하라 간지와 같은 일련종 계통의 냄새가 풍긴다.[3] "혹자는 또 일컫되, 저 동양주의를 외치는 자도 진실로 동양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 주의를 이용하여 국가를 구하고자 함이라 하나, 우리가 보건대 한국인이 동양주의를 이용하여 국가를 구하는 자는 없고 외국인이 동양주의를 이용하여 국혼을 찬탈하는 자가 있으니 경계하며 삼갈 것이다." - 신채호, '동양주의에 대한 비평',「대한매일신보」,1909년 8월 8,10일[4] 가령 2010년 간 나오토 총리가 최초로 한국을 콕 집어서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해 사과했다. 그때까지 일본은 아시아 국가 전체에게만 사과했지 한국을 따로 거론하면서 개별 사과를 한 적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