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봉산
1. 개요
광주광역시 북구 신안동 121번지 일원에 있었던 조그만 산.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산이 있던 곳을 지나가는 무등로에 '태봉산 유래비'가 세워져 있다.
2. 역사
2.1. 태봉산 설화
조선 시대 1624년(인조 2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와 왕비는 피난을 가게 되었고, 피난 중에 왕자를 얻었으나 어린 왕자가 잔병이 많아 걱정이 많았다고 한다. 근심 끝에 왕비가 백일 불공을 드리자 꿈에 도사가 나타나 "왕자의 태를 묻은 곳은 땅 기운이 불순하여 태를 괴롭혔기 때문이니 광주 고을 복판에 있는 여의주(如意珠) 모양의 둥글고 작은 산에 태를 옮기고 금을 태와 함께 묻으라."고 하여서 왕자의 태를 이곳에 이장하였더니 병이 나았고, 그래서 태봉산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2.2. 태실 발견
1929년 7월, 광주에 가뭄이 심하게 들자 마을의 나이 많은 노인들은 태봉산에 누군가 몰래 무덤을 써서 재앙이 닥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1] 산 꼭대기를 파헤쳤는데, 이때 태를 담은 백자 항아리와 태실(胎室), 금박(金箔) 1돈 5푼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어 '태를 묻었다'는 전설이 사실로 확인되었다.皇明天啓四年九月初三日辰時 誕生王 王男大君阿只氏胎 天啓五年三月二十五日藏
천계 4년(1624년) 9월 3일 진시에 대군 아기씨(阿只)를 낳았고 그 태를 천계 5년(1625년) 3월 25일에 묻는다
- 석판에 적힌 명문
2.3. 역사 속으로 사라지다
사실 태봉산은 1939년 "광주시가지계획"이 수립되었을 때부터 헐릴 예정이었다. 이 계획은 1960년대 후반에 와서 거의 그대로 시행된다. 태봉산이 사라진다고 했을 때 근처 어르신들은 '화룡승천'이란 풍수지리를 들먹이며 완강하게 반대했는데, "여의주인 태봉산이 있어야만 용이 하늘에 오를 수 있어 광주가 재난을 받지 않고 발전할 수 있다.", "만약 태봉산을 헐어 없애면 10여년내로 광주에는 큰 난리가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칠 것이다."라는 극단적인 도참설까지 들고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반대 의견은 지역 주민들에 국한되었으며 시민들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아쉽지만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자"였다고 한다.# 결국 1967년∼1969년 광주시가지 정리계획에 따라서 경양방죽과 함께 사라지게 되었다.
3. 여담
4. 참고문헌
- 광주광역시 시청각자료실, 태봉산
-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태봉산 태실, 2018.
- 조광철, [광주갈피갈피]태봉산, 2008.
- 조광철, [광주갈피갈피]경양방죽과 운명 함께 한 태봉산, 2017.
[1] 우리나라 시골 마을에서 꽤 흔하게 존재하는 전설이다. 마을의 진산에 어떤 명당이 있으나, 그 명당에 묘를 쓰면 묘를 쓴 집안은 복을 받되 마을에는 가뭄 등 재앙이 닥친다는 것이다. 이런 전설이 전해지는 산에는 툭하면 누군가가 남몰래 관을 묻어, 마을 사람들이 청년들을 데리고 뒤져보면 발견되곤 했다. 운 좋게 안 들킬 수도 있는데, 마을 사람들 몰래 관을 쓰고 봉분도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무덤의 위치가 정확히 어디인 줄도 모르고 드러내놓고 성묘도 할 수 없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