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양방죽

 


'''경양방죽'''
景陽防築[1]


'''위치'''
광주광역시 동구 계림동 일대
'''수심'''
약 10m, 1차 매립 후 1~4m
'''면적'''
약 150,000㎡, 1차 매립 후 60,000㎡
1. 소개
2. 역사
2.1. 1차 매립
2.2. 2차 매립
2.3. 현재의 모습
3. 여담
4. 참고문헌

1946년, 만수위가 된 경양방죽의 풍경.[2]

1. 소개


경양방죽은 1960년대까지 현 광주광역시 동구 계림동(계림1동)에 있었던 저수지이다.

2. 역사


[image]
1910년대 경양방죽의 모습이 나타나 있는 지도. 출처
1440년 조선 세종 22년에 광주목사로 부임한 김방이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한 목적으로 3년의 공사기간을 들여 완공했다는 설, 또는 삼국시대에 축조되었고 조선 시대에 보수했다는 설이 있다. 규모는 대략 15 헥타르, 수심은 10m에 달했고 규모로 볼 때 호남 지역 최대의 인공호수였다.
경양방죽 안에는 두 개의 작은 섬이 있었고 호수의 주변으로는 수백년된 팽나무, 왕버드나무, 귀목나무 고목들이 즐비했다고 한다.
1940년대~50년대까지만 해도 광주시민들의 사랑받는 명소였는데, 여름에는 피서객들이 모여들어 뱃놀이를 했고 겨울에는 얼어붙은 경양방죽 위에서 썰매스케이트를 탔다고 한다.

2.1. 1차 매립


'''"장차 광주가 대도시로 발전할 때를 대비해서 경관이 수려한 풍치지구로 보전되어야 한다."'''

-경양방죽 매립반대투쟁위원회의 매립 반대 이유 중에서.

1935년, 당시 전라남도 도지사였던 야지마 스기조(矢島杉造)를 중심으로 매립 계획이 세워졌다. '일본건국기념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계림초등학교 뒤에 있던 경호대라는 산을 헐고 일본인들의 거주구역을 만드는 계획이었다. 1936년 광주부는 공유수면 4만여 평의 매립을 허가한다. 당시 급격히 증가하던 인구를 수용하고, 공유수면매립을 통해 땅을 팔아 재원을 충당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광주부민들은 이에 반대해 저명한 인사였던 최흥종 목사를 위원장으로 하여 '경양방죽 매립반대투쟁위원회'를 결성했다. 조선총독부에 청원을 하는 등 반대운동을 벌였지만 총독부는 이를 묵살했고 결국 매립이 강행되었다. 다만 여론을 의식했는지 본래의 전면 매립에서 계획이 변경되어 1/3은 호수로 남게 되었다.
매립 이후 1940년부터 2년간 매각이 진행되었고, 1941년에는 매립지에 부영주택을 건설하기도 했다.

2.2. 2차 매립


8.15 광복 이후 광주의 인구는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했다.[3] 이런 가운데 제대로 된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아 1950년대에 경양방죽은 늘어난 광주 인구로 인해 오염되어 저수지 기능을 상실했고 수질은 점점 악화되었다.
1966년, 광주시는 위와 같은 이유로 남은 경양방죽마저 매립을 결정했다. 태봉산을 헐어 그 토사로 경양방죽을 매립했는데, 여기에는 다른 이유가 숨어있었다. 광주시는 시내의 중심도로인 금남로를 당시로선 파격적인 8차로로 확장하려고 했는데 정부는 '''광주같은 작은 도시에 왕복 8차로 도로가 가당키나 하나'''[4]라면서 예산을 주지 않았다.[5] 그 때문에 돈이 필요해진 광주시는 태봉산을 헐어 그 토사의 일부를 팔고 경양방죽을 매립해 만든 계림동 신시가지를 분양해 그 돈으로 금남로 확장공사를 했다. 1968년의 일이다.
[image]
-1930년대 1차 매립, -1960년대 2차 매립

2.3. 현재의 모습


경양방죽은 사라졌지만 골목길 구획으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동계천로6번길 [6]-무등로306번길-무등로307번길 라인이 원래 경양방죽의 서쪽 경계, 경양로217번길과 중흥로209번길을 반달 모양으로 잇는 골목길 라인이 1960년대 매립 직전 경양방죽의 동쪽 경계였다. 이 길들은 2011년에 '''경양방죽 둑방길'''(일명 '개미길')이라는 산책길로 조성되었다.
경양방죽이 메워진 자리에는 1969년 시청을 지어 이전하였다.[7] 2004년에 다시 상무지구로 이전해 건물은 빈 상태가 되었다가 철거되었고 지금은 홈플러스 계림점이 들어서 있다.
사라진 것이 상당히 아쉬운 명소로, 오늘날까지 남아있었다면 시내 중심부에 거대한 호수가 있는 도시로 널리 유명해졌을 테지만 이제 와서 복구하는 것도 무리라서 결국 추억의 명소로만 남게 되었다.

3. 여담


  • 계림동에 있었던 유은학원에 속한 학교들의 교가에 경양호가 등장한다.

4. 참고문헌



[1] 한자음 그대로 읽으면 경양방'''축'''이지만, '방죽'으로 고유어가 되었다. 다만, 방축이건, 방죽이건 '''모두 둑이라는 의미'''이지 저수지라는 이름이 아니다. 둑을 막아서 만들어진 인공호라서 그냥 둑 이름이 호수 이름으로 굳어진 것.[2] 이때 이미 3분의 2가 매립된 상황임에도 이런 풍경을 보여주었을 정도니...#[3] 불과 5년 사이 8만(1944년)에서 14만(1949년) 가까이 증가하여 남한 5대 도시가 되었다.[4] 이 때도 광주가 전라남도 도청이 소재한 전남의 중심도시 이기는 했지만 지금의 광주에 비해서는 인구나 여러 면에서 전국적으로 봤을 때는 작은 도시이긴 했다.[5] 사실 1968년이면 한국에 8차선 이상 도로가 정말 드물긴 했다. 기껏해야 서울 세종로정도였는데 이 도로는 조선 건국 때부터 계획된 도로였다. 비슷한 규모의 도시였던 인천 역시 왕복 6차선 도로가 가장 넓은 도로였다. 1970년대 들어서야 넓은 도로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1968년 자동차 대수는 전국에 약 35,000대였고, 당시 광주 인구는 60만 명 정도였다. 당연히 정부에서 부정적인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6] 현재 아파트 공사로 도로가 사라졌다.[7] 최초의 시청은 광산동(서남동)에 있었다. 흔히 '구시청'이라 불리는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