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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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王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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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지린성 지안시에 있는 고구려의 돌무덤(적석총)으로 무덤 형식은 돌무지 돌방무덤이다. 규모는 한 변이 62.5m~68m에 달하며 높이는 14m에 달한다. 태왕릉이라는 이름은 1913년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전(塼)돌에 '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원태왕릉안여산고여악)'[6] 이 새겨져 있던 데에서 유래하였으며 1966년 중국이 고구려 무덤에 대한 측량조사를 실시하면서 우산하541호분(JYM0541)이라 명명하였다.
주변에 위치한 약 1만여 기의 고구려 무덤(통구 고분군) 및 수도 유적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참고로 구글 지도에는 태왕릉 위치가 엉뚱한 곳으로 되어 있다. 엉뚱한 논두렁에 태왕릉 표시가 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오른쪽 대각선 아래로 내려야 실제 태왕릉의 위치가 나온다.
2. 무덤의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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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왕릉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어마어마한 크기를 자랑한다.(장군총의 약 2배...) 위 사진은 태왕릉을 지탱하는 호분석(護墳石)들로 가장 큰 돌 옆에 있는 사람과 견주어 보면 그 크기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7] 하지만 태왕릉은 현재까지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있는 장군총과 달리 파괴가 심해 원형을 잃은 지 오래이며 원래는 장군총처럼 피라미드 형태였다. 온전하게 남아있었다면 장군총보다도 주목을 받았을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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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의 내부는 장군총과 마찬가지로 돌방무덤이기 때문에 돌방이 구축되어 있으며 관을 올려놓는 관대(棺臺)가 두 개 있는 것으로 보아 부부합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관대가 있는 부분은 현재 유리로 가로막혀 들어갈 수 없지만 언제부터였는지 유리 너머로 돈을 넣는 문화(?)가 형성되어 관대에 저렇게 돈이 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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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중국에서 조사하였을 당시 돌방에서 맞배지붕을 가진 형태의 석곽(돌 덧널)이 발견되었다. 위의 도면은 석곽 복원 모습.[8] 돌방을 구축할 당시 저런 형태의 석곽을 구축한 후 그 안에 관대를 놓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3. 무덤의 주인은 누구인가
장군총과 함께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현재까지도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대표적으로 소수림왕설, 광개토대왕설, 고국양왕설이 있으며[9] 각각 장지명 왕호를 통한 비정, 기와 및 출토유물을 통한 비정 등 종합적인 검토가 이루어지고 있다. 논쟁거리 몇 가지만 간략하게 살펴보면 광개토대왕설을 주장하는 입장은 태왕릉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광개토대왕릉비가 있다는 점에서 광개토대왕의 무덤일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하지만 무덤의 방향과 광개토대왕릉비의 방향이 '''정반대'''라는 점에서 반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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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면[10] 에서 보듯이 태왕릉 돌방으로 들어가는 입구 방향과 광개토대왕릉비 정면의 방향이 서로 맞지 않는다. 광개토대왕릉비가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적은 비석인 만큼 태왕릉이 광개토대왕의 무덤이라면 상식적으로 무덤을 정면에서 바라보았을 때 비석을 무덤 앞에 세워야 한다. 하지만 무덤과 비석이 거의 정반대 방향의 수준으로 배치되었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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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태왕릉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청동방울에 '辛卯年好大[太]王陵造鈴九十六(신묘년호대[태]왕릉조령구십육)'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어 주목받았다. 하지만 신묘년을 광개토대왕의 재위기간인 391년으로 비정하는 견해(고국양왕설)와 장수왕의 재위기간인 451년(광개토대왕설)으로 비정하는견해가 있어 논쟁은 여전히 진행중에 있다. 특히 청동방울이 돌방 내부에서 출토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출토 정황'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고고학의 특성상 태왕릉의 축조시기와 같은 시기에 제작된 것인지, 아니면 후대에 제작된 것인지 파악이 어렵다는 한계도 존재한다.
4. 같이보기
[1]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2]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3]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4]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5] 특히 번복할 수 없는 변화의 영향으로 취약해졌을 때 환경이나 인간의 상호 작용이나 문화를 대변하는 전통적 정주지나 육지·바다의 사용을 예증하는 대표 사례[6] '바라건대 태왕릉이 산악처럼 안온하고 굳건하기를'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7] 사람이 잘 보이지 않는다면 맨 오른쪽 바위의 왼편을 유심히 볼 것.[8] 도면 출처 : 文物出版社, 2004, 集安高句丽王陵 / 중앙문화재연구원, 2015,고구려의 고분문화Ⅱ[9] 출처 : 임기환 외, 2009, 고구려 왕릉 연구, 동북아역사재단[10] 출처 : 文物出版社, 2004, 集安高句丽王陵 / 중앙문화재연구원, 2015, 고구려의 고분문화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