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양왕

 


'''고구려 18대 국왕'''
'''故國壤王 | 고국양왕'''
'''시호'''
'''고국양왕(故國壤王)''', '''국양왕(國壤王)'''
'''성씨'''
고(高)
''''''
이련(伊連) / 어지지(於只支)
'''왕태자'''
고담덕(高談德)
'''묘지'''
고국양(故國壤)
'''생몰연도'''
음력
340년? ~ 392년
'''재위기간'''
음력
384년 12월 ~ 391년 5월 (6년 5개월)
1. 개요
2. 생애
3. 삼국사기 기록
4.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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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구려의 제18대 임금.

2. 생애


'''등극한 고국원왕의 아들'''
'''17대'''
'''18대'''
'''소수림왕(少獸林王)'''
'''고국양왕(故國壤王)'''

故國壤王 諱伊連 【或云於只支】 小獸林王之弟也 小獸林王在位十四年薨 無嗣 弟伊連卽位

고국양왕(故國壤王)의 이름은 이련(伊連)【혹은 어지지(於只支)라고도 하였다.】이고 소수림왕의 아우이다. 소수림왕이 재위 14년 만에 죽었는데 아들이 없었으므로 아우 이련이 즉위하였다.

ㅡ《삼국사기》 고국양왕 본기

고국원왕의 아들이자 소수림왕의 동생. 광개토대왕의 부왕이기도 하다. 할아버지, 형님, 아들, 손자가 워낙 거물인지라 묻히는 감이 있지만 형인 소수림왕의 뒤를 이어 광개토대왕의 정복 사업을 위한 기반을 단단히 쌓았다.
소수림왕 시절에는 부견전진이라는 거대 국가가 중국의 화북 지역을 확 휘어 잡고 있어서 요동 방향으로 진출을 할 수 없었지만, 마침 고국양왕이 즉위한 383년~384년은 전진이 비수대전에서 패배해 순식간에 무너지고 다시 화북 지역의 혼란이 시작되어 여러 나라로 나뉘어지던 시기였다. 그리고 고구려와 가까운 요동에는 후연이 세워지게 되는데, 바로 고국원왕 시절 고구려 수도까지 침입해서 왕릉까지 도굴해갔던 철천지 원수 모용선비족이 다시 재건한 국가였다. 고구려로서는 후연이 자리잡기 이전에 후연을 철저히 밟아놓을 필요가 있었다.
385년 6월 고구려는 후연을 습격해 요동군현도군 2군을 빼앗고 남녀 1만 명을 포로로 삼았다. 태조왕이 처음으로 요동군을 공격한 이래 처음으로 요동을 고구려가 얻어본 것이다. 그리고 옛 북부여 유민이던 여암(餘巖)이 385년 7월 요서에서 반란을 일으켜 후연의 상황은 더욱 더 악화되어만 갔다.
그러나 후연의 건국자 모용수의 아들 모용농이 3만의 군사를 이끌고 반격에 나서 385년 11월 요서의 여암을 토벌한 후 고구려가 차지한 요동 땅도 도로 빼앗아갔다. 모용수는 386년 황제로 즉위하면서 완전히 자리를 잡게 되었고 고구려는 요동 진출을 뒤로 미뤄야 했다. 다만 이때의 요동 공략은 훗날 광개토대왕이 요동을 완전히 장악하는 데 전초전이 되었다고 보기도 하고 요동 주민들을 끌고 오는 등 아예 소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390년 백제 진사왕이 보낸 진가모의 군대에게 도곤성을 빼앗겼다. 392년에는 불교를 권장하고 종묘 사직을 수리했다. 또한 당시 외교적으로 고립된 상태였던 신라로부터 실성인질로 받아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대로 연결되는 고구려의 신라 복속 외교를 위한 전초전을 마련했다.[1]
광개토대왕의 (릉비의) 원년과 고국양왕의 (삼국사기 기사의) 말년이 겹치는 것은 승하한 후 즉위한 것이 아니라 생전에 양위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이와 비슷한 사례들을 종종 볼 수 있는데 태조대왕 또한 왕태제인 차대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으며 진성여왕도 죽기 전에 효공왕에게 물려주고 몇 달 뒤에 승하했으며 조선태종세종에게 양위했다.
실제로 선왕이 양위를 했을 경우, 그 선왕이 양위한 해당 년도까지를 그의 치세기로 보고 유년 칭원을 하는게 유교 예법이었다. 삼국사기에서는 유월칭원법을 사용해 기사가 작성 되었지만, 고국양왕이 양위를 했다고 가정 했을 경우에 391년을 고국양왕의 치세기로 보고 유년칭원법을 사용했다고 가정하면, 삼국사기에서는 392년을 광개토왕의 원년이라고 해석할 수 있으며, 설득력이 있는 논리이다. 그러나 이것은 능비에 기록된 광개토왕 원년에 대한 《삼국사기》 기사와의 1년 오차를 설명 해줄 순 있어도, 《삼국사기》와 능비에 기록된 대왕의 사망 기사와의 1년 오차를 설명 해줄 순 없다는 점에서 한계를 드러낸다. 정말로 고국양왕이 광개토왕에게 선위해서 삼국사기에서 유교 예법으로 391년을 고국양왕의 치세기로 인정 했다면, 즉위년도에서 1년 격절이 나는 것은 이해할수 있어도 광개토왕이 승하한 연도까지 1년 격절이 생기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단순히 《삼국사기》의 일괄적이고 기계적인 오류로 해석하는 게 합당하다.

3.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 고국양왕 본기'''
一年冬十一月 고국양왕이 즉위하다
二年夏六月 요동군과 현도군을 점령하다
二年冬十一月 요동군과 현도군을 다시 후연에 빼앗기다
二年冬十二月 지진이 발생하다
三年春一月 담덕을 태자로 삼다
三年秋八月 백제를 공격하다
三年冬十月 겨울에 복숭아와 자두 꽃이 피고, 소가 말을 낳다
五年夏四月 큰 가뭄이 들다
五年秋八月 농작물이 풀무치 피해를 입다
六年 기근이 들어 창고를 열어 구제하다
六年秋九月 백제가 남쪽 변경 지역을 약탈하다
七年秋九月 백제가 고구려 도압성을 침략하다
八年 신라가 실성을 보내 인질로 삼았다
八年春三月 불교를 숭상하고 사직을 세우고 종묘를 수리하다
八年夏五月 고국양왕이 죽다

4. 대중매체에서


이렇듯 대외적으로 공격적인 확장을 개시했으며 국가 기반을 착실히 다져 광개토대왕이 정복 사업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지만 대중매체 속에서의 취급은 좋지 않다. 말 그대로 아들인 광개토대왕에게 모든 포스를 잡아먹혔다. 시종일관 유약하거나 선한 모습으로 그려지는 것은 기본이거니와 심지어 치세 중에 일궈낸 업적이 태자의 업적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이때 광개토대왕은 고작 10대라는 사실. 이렇게 된 이유는 사람들에게 인지도가 떨어져서인데 이전 왕은 한국사를 공부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소수림왕이고 이후의 두 왕이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인지라 앞뒤로 업적이 밀리는 나머지 잊혀지기 일쑤다.
  • 만화 태왕북벌기에서는 고구려의 대장군으로 듬직한 마초적 포스를 보여주었지만 큰 비중은 없다. 이 만화부터가 소수림왕의 뒤를 이어 고국양왕이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광개토왕의 작품이라고 소설을 쓰고 있으니 고국양왕이 왕으로서 한 일에 대해서는 무시당하고 있는 상황.
  • 2007년작 MBC 드라마 태왕사신기에서는 독고영재가 고국양왕을 맡았다. 권력 기반도 없는 상태에서 형 소수림왕의 뒤를 이어 즉위했기에 귀족들에게 휘둘리다가 화천회의 음모로 석실에서 자살하며 이때 석실에 같이 있던 기하가 고국양왕을 살해한 것으로 본 호위무사 각단이 화천회의 포위망을 탈출해 담덕에게 알려주며 담덕과 기하의 관계가 꼬여버리는 단초가 되어버린다.
  • 2010년작 KBS 드라마 근초고왕에서는 아역이 소수림왕만 등장해서 '설마 부여화의 아들이 고국양왕이 된다는 막장 드라마를 쓰는 건 아니겠지'라는 의혹을 사다가 평양성 전투에서 무사히 장성한 모습으로 등장해 간신히 모든 의혹을 마무리했다. 고국원왕이 평양성 전투에서 왕족들을 데리고 수도 국내성으로 튀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배우김주환.
  • 2011년작 KBS 드라마 광개토태왕에서는 송용태가 고국양왕을 맡았는데 대신들의 내란과 반목에 시달리며 아내를 잃은 이후 아들 담덕에게 왕위를 물려 주면서 허망하게 지병으로 사망한 모습을 보였으니 시청자 입장에서는 "나의 고국양왕은 그렇지 않아!"라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모습. 재미있는 것은 송용태는 위의 드라마 근초고왕에서는 적국인 전연황제 모용황이었다는 거다.[2] 포스는 괜찮은 편이지만 여기서도 모용황의 아들 모용수에게 밀리는 역할이라서 보는 이들로 하여금 상당히 묘한 느낌이 들게 하는 캐스팅.
[1] 원래 이 대목에는 '이상 391년 조의 기록이 동사강목에는 광개토왕 원년의 것으로 되어있다'는 말이 들어가 있었지만 사실 당연한 것이다. 고국양왕 말년이 바로 광개토왕 원년이기 때문이다. 틀린 것은 고국양왕이 신라와 수교한 사건이 391년이 아니라 392년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이다.한국고전종합DB 동사강목 제2하 임진년조 참조.[2] 드라마 대조영에서는 당태종 역할을 맡았었다. 역시 선비족혼혈 계통인 당태종과 그의 아들이 고구려를 멸망으로 몰고 갔음을 생각하면 묘한 캐스팅. 덧붙여 티몬과 품바 한국어판의 품바 더빙을 맡은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