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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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태왕의 은택이 황천에 두루 미쳤고, 태왕의 위무가 사해에 떨치셨다(恩澤洽于皇天, 武威振被四海).'''
'''『광개토대왕릉비』'''
'''광개토왕(廣開土王)의 이름은 담덕(談德)이며, 고국양왕(故國壤王)의 아들이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체격이 크고, 생각이 대범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 광개토왕 본기』'''
고구려의 제19대 군주. 담덕이라는 이름으로도 제법 알려져 있다. 삼국사기 기준으로는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의 13세손이다. 광개토대왕릉비에는 17세손으로 기록되었는데 아마 직계가 아닌 왕계를 기준으로 한 것 같다. 18세의 젊은 나이로 왕위에 올라 39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한국사에서 세종대왕과 더불어 대왕이라는 칭호를 '대중'들이 자주 붙여 부르는 몇 안되는 왕이기도 하다.
2. 명칭
광개토대왕의 공식적인 호칭은 당대에 쓰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며,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國罡上廣開土境好太王),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國罡上廣開土地好太王), '''국강상대개토지호태성왕'''(國岡上大開土地好太聖王) 등으로도 표기되었다. 삼국사기에서는 이것을 줄여 광개토왕이라 표기하였고 이것이 현대에 들어 공식적으로 주로 쓰이는 명칭이 되었다. 현대에 들어 여기에다 대왕이라는 존칭을 붙인 표기가 바로 '광개토대왕'이며, 이것이 일반인들 사이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표기이기도 하다. 한편 당대에 사용된 태왕 칭호를 존중하여 '국강상 광개토경 평안 호태왕'을 줄인 '광개토태왕'이라는 표기가 사용되기도 한다.
이하는 역사서와 비석에서 대왕을 칭하는 이름들이다.
2.1. 명칭의 의미와 이름 진위 논란
다음은 광개토대왕의 시호를 단어별로 구분하여 해석한 것이다.
2012년 중국 지린성에서 집안고구려비가 발견되어 비문 해석이 논란이 되고 있다. 중국 학자 장복유가 해석한 비문은 광개토대왕릉비와 내용이 얼추 비슷하며 임금의 본명이 평안이라는 기사를 적어 두었다.(국강상태왕 호평안) 또한 다른 중국 왕조의 사서들을 고찰해보면 임금의 이름을 '안'이라고 칭하는걸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집안고구려비의 진위를 강화시켜주기도 한다. '평안'이 임금의 진짜 본명이라고 단정하는 의견도 있으나 이는 많은 반론이 있다.
집안고구려비는 문서에 서술된 것처럼 중국 당국이 이 비석으로 동북공정을 시도했고 강화했으며 다른 유물은 공개하지 않으면서 비석만 공개하는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이전 문서에서 추모왕, 유리왕, 대주류왕 등의 이름을 시호에 전하는데 광개토대왕의 이름은 시호에 전하지 않는다는건 이상하다고 했는데 이는 전혀 이상하지 않다. 처음 고구려가 세워졌을 때는 중국식 시호 제도나 고구려식 시호 제도가 완전히 세워지지 않았고 초기에는 그저 이름만으로 전해지다가 이후에 가서야 묘지의 장소를 기입한다든지 초기와 다르게 발전했을 수도 있고 그렇기에 '평안'은 이름일 가능성이 있을뿐 '평안'이 임금의 이름인 것처럼 단정하기는 어렵다.
또한 우리나라 고대 임금들의 이름은 대부분 순우리말인데 이 이름들은 중국 왕조에서 기록될 때 많은 음차를 거쳤다. 대표적으로 삼국사기에 '추모'라고 전해진 이름을 중국에서는 '주몽'으로 전한다든지 백제 임금의 성은 부여씨로 복성인데 중국에서는 단성인 여씨로 표기했다든지 잦은 오류가 있기 때문에 중국 사서가 집안고구려비와 비슷하다고 무작정 교차 검증을 할 수는 없다.[13] 이러한 이유 때문에 광개토대왕의 이름이 평안이라는 것은 아직까지 주장 단계를 벗어나기 어렵다.
3. 생애
4. 평가
5. 태왕릉
광개토대왕의 무덤은 확실하진 않으나 집안시에 위치한 태왕릉으로 추정된다. 확증할만한 근거는 없으나 어쨌든 광개토왕비가 다른 곳에 있던 걸 뽑아다 박아놓은게 아니고서야 광개토왕비 주변에 왕릉이랄 만한 무덤이 장군총과 태왕릉 정도밖에 없어서 장군총이나 태왕릉 둘 중 하나가 광개토대왕의 릉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14] .
호태왕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동탁(銅鐸)이 출토되기도 하였는데, 이 호태왕이 일반명사인지 광개토대왕을 특정한 용어인지 견해가 나뉘어져 있다. 그러한 바 그 사실만으로 광개토대왕의 무덤이라고 말하진 않고 오히려 태왕릉에서 출토된 유물들의 동아시아 광역 편년 체계 속에서의 시간적 위치, 그에 따른 적석총 형태의 변화 등을 고려하여 볼 때, 태왕릉 출토 유물들은 대략 4세기 후반~5세기 전반 정도를 가리키고 있다는 점으로 인해서 '''태왕릉은 대체로 광개토대왕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비교적 소수론이지만 태왕릉을 고국양왕의 무덤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며 이런 경우에 광개토대왕의 무덤은 장군총이라고 본다.
하지만 태왕릉 출토 유물들은 태왕릉 묘실이나 봉토에서 출토된 것이 아니라 태왕릉의 능원 내에서 출토된 것으로, 도굴되었던 시점에 도굴꾼들이 나중에 가져가려고 퇴장한 것인지 아니면 태왕릉에 있었던 의례행위의 결과로 남은 것인지는 불명확하다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화랑세기》의 저자 박창화는 『광개토왕비』를 고려(왕건이 세운)에서 뽑아다가 현재의 위치에다 박아놓은 거라는 괴랄한 주장을 하기도 했다.
6. 동명성왕과의 관계
지안현의 광개토대왕릉비를 보면
는 구절이 있다.'''옛적 始祖 鄒牟王이 나라를 세웠는데 (王은) 北夫餘에서 태어났으며, 天帝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河伯(水神)의 따님이었다. ...(이하 중략)... 顧命을 이어받은 世子 儒留王은 道로서 나라를 잘 다스렸고, 大朱留王은 王業을 계승하여 발전시키었다. 17世孫에 이르러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 18세에 왕위에 올라 호(연호)를 永樂이라 하였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나 일연의 삼국유사에 의하면 광개토대왕은 동명성왕의 13세손이 된다.
'''동명성왕 - 유리명왕 - 재사 - 신대왕 - 산상왕 - 동천왕 - 중천왕 - 서천왕 - 돌고 - 미천왕 - 고국원왕 - 고국양왕 - 광개토대왕'''
만약 신채호처럼 차대왕, 신대왕을 태조왕의 서자로 본다 해도 1세대가 늘어나고, 진수의 삼국지의 설을 채택하여 신대왕을 차대왕의 아들로 본다 해도 2세대가 늘어난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다른 사서를 참고하지 않고, 연대 계산을 다시 해서 태조왕을 유리왕의 손자가 아니라 대무신왕의 손자라는 가설도 세웠다. 그렇게 보더라도
'''동명성왕 - 유리명왕 - 대무신왕 - 재사 - 태조왕 - 차대왕 - 신대왕 - 산상왕 - 동천왕 - 중천왕 - 서천왕 - 돌고 - 미천왕 - 고국원왕 - 고국양왕 - 광개토대왕'''
광개토대왕이 동명성왕의 자손인 것은 맞지만, 그렇게 보더라도 다소 앞뒤가 맞지 않는다.
신대왕을 차대왕의 아들로 보는 설을 채택해도 광개토대왕은 주몽의 16세손이 된다. 삼국지의 위서 동이전에는 주몽의 뒤를 여달이 잇고 여달의 뒤는 여율이 잇고 여율의 뒤를 막래가 이었다고 하는데 막래는 모본의 오타로도 추정된다. 그런데 여달을 유리명왕으로 보고, 위서 동이전에 막래가 부여를 쳤다는 기록을 근거로 막래를 모본왕이 아니라 대무신왕으로 본다면, 유리명왕과 대무신왕 사이에 한 사람이 더 있었다고 본다면 어떻게든 세대가 맞게는 된다.
한편, 위에서 나온 17세손의 의미는 직계가 아니라 왕계라는 견해도 있다.
태조대왕의 생몰년 의혹에서 따르면 대무신왕이 44년 사망하고 77년 재사와 부여인 태후가 7살의 태조대왕을 왕위에 앉히기까지 33년의 공백기간이 있기에 그 사이에 알려지지 않은 왕이 하나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재사는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자기 7살짜리 아들을 앉혔다고 하는데, 상식적으로 이상한 광경이니까. 17세손이 왕계라면 ?가 왕이었을 수도 있다는 소리가 된다.
7. 기타
7.1. 사료적 측면
광개토대왕과 관련된 사료로는 금석문으로는 『광개토대왕릉비』, 문헌으로는 《삼국사기》와 중국의 사서를 중심으로 여러 사료들이 전하고 있다. 『광개토대왕릉비』는 현전하는 한국 고대의 비문들 중 내용이 비교적 온전히 전해지는 거의 유일한 것으로 당대 역사를 전하는 내용이 많아서 사료적 가치가 대단히 크다. 《삼국사기》는 광개토대왕의 즉위부터 사망까지 고구려에서 일어난 사건을 연대순으로 서술했는데 『광개토대왕릉비』와 상호 보완적으로 작용하여 광개토대왕의 치세를 정리하는 가장 기본 사료이다. 중국 사서는 광개토대왕 시기 후연과 고구려의 관계를 중심으로 서술했다. 이외에도 《삼국유사》나 《일본서기》에 단편적인 사건들이 전하고 운좋게 살아남은 모두루 묘지명과 호우명그릇은 지워진 역사의 편린을 전해주고 있다. 광개토대왕 시기 사료는 한국사 전반에 걸쳐서 보면 적지만 한국 고대사로 한정한다면 매우 풍부한 편이다. 삼국사기에 전하는 광개토대왕 시기의 통치와 전쟁 기록이 고구려의 다른 왕들 기록보다 많고 고고학 발굴 성과도 광개토대왕 시기에 집중되어 있다. 무엇보다 광개토대왕릉비가 남아 있다는 점이 크다.
사실 광개토대왕은 고구려가 멸망한 뒤 한참 동안 잊혀졌고 재조명은 19세기 말이 되어서야 이루워졌다. 이렇게 된 이유로는 근초고왕이나 진흥왕과 비슷한 수준의 정복 군주로 평가된 부분도 있지만 무엇보다 광개토대왕릉비가 있던 압록강 이북의 경우에는 발해 멸망 이후로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 등 이민족 국가의 영토였던 데다가 특히 청나라가 들어선 이후로 봉금령으로 인해서 출입이 통제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랜 기간 동안 광개토대왕릉비의 내용이 알려지지 않은 채 금나라 황제가 세운 비석 정도로 여겨져서 재조명이 늦게 이루어진 것이다. 사실 우리가 잘 아는 문화재가 다른 것으로 오해받은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조선 후기까지만 해도 진흥왕 순수비가 무학대사비로 잘못 알려져 있었다. 해당 시기에 조선이 일본, 청나라, 영국, 미국, 러시아 등의 강대국들과 얽히면서 병인양요, 신미양요, 운요호 사건, 거문도 점령 사건 등 외세의 침탈에 시달렸던 때였기도 했고 그동안 삼전도의 굴욕을 씻어내지도 못했던지라 광개토대왕의 업적이 재조명되기에 시기적으로 타이밍이 맞았고 당연히 민족주의적 자긍심 고취의 관점에서 다시 부각된 측면이 크다. 물론 비문이 발표되는 과정에서 일본군이 개입해서 의도적으로 아전인수격의 해석을 내놓았지만 근본적인 해석이 크게 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여하튼 이 때문에 고구려가 망하고 근대에 이르기까지는 광개토대왕이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끽해봤자 고구려의 왕들 가운데 1명으로 소개되면서 특징으로 싸움을 잘했다거나 땅을 넓혔다고 언급되는 것이 전부다.
역사서에서는 광개토대왕을 주로 무인의 기질이 있고 웅대한 야망을 품은 사람으로 묘사했다. 이 가운데 그나마 재미있는 건 두 조선 문인들의 평가이다. 14세기에 권근은 삼국사절요에서 '3년상도 다 안 치른 채 다른 나라로 쳐들어가고 복수한답시고 지난 일이나 들추는 몹쓸 사람'이라 평했고[15][16] 반대로 18세기 안정복은 '고작 22년밖에 안 지난 할아버지 고국원왕의 원수를 갚았는데 그게 바로 도리'라는 주장으로 반박하기도 했다.
2019년 11월에 최신 기술을 통해 그동안 장수왕이나 문자명왕 대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하던 충주 고구려비도 광개토대왕이 세웠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7.2. 오늘날의 광개토대왕
7.3. 야사
광개토대왕과 관련된 야사도 전해지는 것들이 있다. 물론 거의 출처 불명이다. 문제는 이런 것들이 종종 정사인 것마냥 소개되고 있다는 건데 요즘은 예전에 비하여 한국 고대사가 많이 정립되면서 사라지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상대적으로 학술적 접근이 관철되지 못한 동화책에는 이런 내용이 넘쳐나고 있다. 사실 동화 작가들이 지어낸게 설화마냥 퍼져나간 것들도 있을 것이다. 가장 유명한 설화로는 광개토대왕이 여자 때문에 싸움이 난 두 마을을 화해시켜 줬다는 이야기 등이 있다.
《환단고기》에도 광개토대왕과 관련된 부분이 나오는데 의외로 중원을 호령하고 어쩌고 하는 내용은 없다. 중국계인 후연이나 만주 대륙의 국가들과의 싸움은 없고 왜와 연결되어 있는 한반도를 공격하는 내용인데... 환단고기는 어느 정도 시대상을 잘 반영했다. 참고로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 광개토호열제라는 이름으로 나와있다. 야사나 다름없는 《조선상고사》에도 일반적으로 현대인들이 대표 업적으로 생각하는 대륙으로의 진출(?)보단 왜군과의 격돌에 비중을 두고 있다.
《화랑세기》 필사본의 저자로 유명한 박창화가 남긴 다른 책 고구려사초의 영락대제기도 광개토대왕의 치세를 다루고 있는데 자잘한 내정 기록, 왕실 비사 등을 제외하면 새로운 내용은 별로 없고 정사로 통용되는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정복 전쟁과 관련해서는 탐라국(제주도)가 항복했다는것 말고는 새로운 게 거의 없는데, 『광개토대왕릉비』나 《삼국사기》 같은 정사로 통용되는 사료의 기록을 살짝 비틀어놓거나 전투 기록 한 줄 더 추가한게 전부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탐라가 항복했다는 내용과 거란과의 전투 기록 하나를 제외하고는 전부 기존의 사료에 존재하는 내용들이다.[17] 그런데 광개토대왕 대에 활동했던 것이 확실한 진이나 모두루가 고구려 사초에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의 소설일 가능성도 높아진다. 진, 모두루 모두 박창화 사후에 확인된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7.4. 기타 학설
비려의 위치나 정체에 대해서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몽골의 유연이라고 했으나 근거 자체가 해괴하다. '... 어떤 기록에 의하면 부산 밑에 와룡이 있었는데 와룡이 유연의 별칭인 유유와 발음이 비슷(?)하니 와려(비려)는 유연인 것 같다...' 라는게 근거다.[18] 신채호가 해괴한 추론을 가끔 하기는 하지만 이건 매우 극악한 편에 속한다. 당시 유연은 나름대로 성장하고 있던데다가 유연과 고구려 사이를 북위가 가로막고 있던지라..
현 한국 학계에서는 대체로 시라무렌 강 상류에 위치한 세력으로 보고 있다. 훗날 비려가 거란의 일원이 된 것으로 보곤 한다. 한 편 진서 동이전에 나오는 만주 중앙에 위치한 비리국이라는 설도 있고 중국 학계에서는 요동의 태자하 상류의 세력으로 보기도 하며 소수맥이라는 주장도 있다. 헌데 태자하 상류설이 말이 안되는게 광개토대왕이 비려를 격파하고 '''돌아오며''' 태자하를 거첬으므로 성립하기 어렵다. 더구나 소수맥은 수백년전인 유리왕 때 격파되고 이후로 전혀 등장하지 않았다.
이때 토벌한 비려는 391년 토벌한 거란과 같은 존재로 보기도 한다. 광개토대왕 비문에 광개토대왕 때 상대한 적들은 모두 기재했다는 가설에 의하면 거란이라고 빠뜨렸을리는 없으니 아마도 비려는 거란과 같은 존재일수도 있겠다. 더구나 비려는 광개토대왕 비문의 기로에 의하면 거란이 위치해있던 곳에 있었으니...
다만 이걸 딱히 실증할만한 또렷한 결정적인 근거는 없다. 주요 근거는 비려와 거란의 위치가 비슷한것같고 거란의 부족중에 필혈부가 있었는데 비려와 발음이 비슷하다는것. 위서에는 필혈부라고도 읽는 필결부(匹絜部)·려부(黎部), 통전에는 필려부(匹黎部), 북사에는 다시 필결부(匹潔部)·려부(黎部)라고 적혀 있는데[19] , 근데 이건 아예 당시부터 물길의 필려이국과 헷갈리고 있었으니(...) 더구나 발음이 비슷한 것으로 추정하는 것은 리스크가 매우 크다. 당장 고구려를 의미하는 무구리와 말갈만 해도 발음이 비슷한데 완전히 남남인 것을 보면. 발음이 비슷한데 남남인 경우가 매우 흔하다.
비려와의 전쟁터였던 부산, 염수 등의 위치를 고증하면 대강 실마리가 잡히겠으나 그마저도 힘든게 현실. 염수가 고유 명사일수도 있고 소금이 많이나서 붙은 이름일수도 있는데 만주 지방에 소금이 나는 곳이 한둘인가... 부산 같은 경우도 고유 명사라는 해석이 있는가하면 고구려인들이 이름 모르는 산을 아무개라고 부르거나 큰 산이라고 부른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어쨌든 비려는 고구려 국경에 근접한 거란을 먼저 토벌한 점이나 광개토대왕 비문에 장거리 원정이 있던 것마냥 기술한 점으로 보아 거란보다 서쪽의 내몽고 어딘가였던것 같다.
아니면 진서 동이전에 기술되어 있는 비리국일수도 있는데, 진서가 광개토대왕 시기를 기록하고 있고(이상한건 정작 고구려는 없다.) 진서 동이전에서 서술하는 비리국의 위치가 광개토대왕 비문의 비려처럼 고구려의 북쪽 어딘가이기 때문에 비리국일 가능성도 무시할수 없다. 또한 비리국이 광개토대왕 시기인 진서 동이전에만 잠깐 등장하고 사라지는 것도 묘하다. 광개토대왕 대에 고구려에게 먹혀서 이후로 등장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뭐 학계에서는 이 주장이 사장되긴 했다만...
비려의 인구는 35만 정도로 추정된다.[20] 기껏 3개 부락 격파했는데, 어떻게 35만이라는 숫자가 나온지 의아할 수 있는데, 부락이라는 단위는 고정된 수치를 갖고 있는게 아니라 쓰일 때마다 다르다. 마을 하나를 부락으로 칭할 수도 있고 부족 하나를 부락으로 칭할 수도 있다.
근데 이것도 비문의 판독에 따라 부락이 아니라 부(부족)로 판독할 수도 있어서... 참 애매하다. 3개 부의 의미를 부족이나 부락 3개를 격파했다는 게 아니라, 거란족이 스스로를 칭할 때 관용적으로 쓰는 3개 부라는 의미로 해석한 연구 결과도 있다. 하지만 그건 훨씬 후대의 일이라...
영락 6년에 점령한 58성 700촌은 대강 현재의 강원도, 충청북도와 경기도 북부에 이르는 지역이다. 58성 700촌의 위치 비정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다른데, 일각에서는 충청남도까지 남하한 걸로 보기도 한다.(그러면 충주고구려비가 영락 7년에 세워진 것이 맞는것이 된다) 그런데 이것이 비류백제설로 이어지곤 하니 문제.
7.4.1. 기년 수정론
'''『광개토대왕릉비』'''}}}'''대주류왕께서 국가의 기초를 이어받으신 후 17세손 광개토경평안호태왕에 이르렀다. 2·9에 등극하니 부르길 영락태왕이라 …… 하늘이 불쌍히 여기지 않아 39세에 나라를 버리고 돌아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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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의 탄생년도에 대해서는 능비를 통해 추론할 수 있으나, 《삼국사기》와 1년의 차이가 있고 또 사망연대와 맞춰 볼 때도 의아한 점이 있어 학계에 이론이 있다. 학계의 중론은 대체로 374년인 듯하나, 375년이라는 주장도 있다.
능비에 따르면 광개토대왕은 18세 되던 해 왕위에 올랐다. 그런데 이설은 즉위년에 대한 불일치에서 비롯된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따라가다 보면 광개토대왕은 392년에 즉위한 것이 되는데, 연표에 따르면 이 해는 바로 임진년이다. 그런데 능비에서는 광개토대왕의 즉위년을 391년이라고 [21] 하고 있다. 게다가 릉비는 육십갑자와 왕의 연호를 병기하고 있으므로, 릉비를 만든 고구려인들이 착각 했다고 이해하기 어렵다. 예를 들면,'영락 5년 을미(395년)', '영락 6년 병신(396년)' 등으로 정벌 기록마다 확인이 되고, 덕흥리 고분 등에서 교차 검증도 되는 사실이다. 반면에 삼국사기의 경우에는 왕의 연호만 이용하여 기록하기 때문에, 김부식이 사서나 문헌을 인용 할때 오산 했는지 추적이 불가능하다. 이에 따라 주류 학계에서는 능비문에 《삼국사기》를 맞추어 《삼국사기》의 기록을 한 해 앞당김으로서 광개토대왕이 신묘년 즉 391년에 즉위한 것으로 비정하고 있다.
그러나 즉위년만 앞당기게 되면 광개토대왕의 재위년 자체가 23년으로 40세에 사망한 것이 되어 《삼국사기》 본래의 기록은 물론이고 능비와도 그 내용이 근본적으로 달라지게 되며#, 혹시 전체 재위년을 한 해씩 당겨서 391년 즉위해 412년 사망한 것으로 한다면 중국 사서와 교차 검증되는 《삼국사기》의 연표 자체를 뜯어고쳐야 한다는 문제점이 생긴다.[22]#
이러한 점 때문에 일각에서 '사서의 연도에 능비의 간지(干支)를 맞춰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이것도 한국 고대사에서 유일하게 잘 정리된 연표의 간지를 무시하고 연대를 끼워맞춰야 한다는 문제가 있긴 하지만, 양 사료 간에 미묘하게 일치하는 부분도 있는 데다가 광개토대왕릉비에는 간지와 연호를 병기하고 있으므로 당대에 고구려인들이 년도에 착오가 있었다고 이해하기 어렵다. (ex. 병신년 = 396년 etc..)
그러던 중 광개토왕릉비의 기년 문제에 대해 의문을 해소해줄 유물이 2004년에 중국 집안에서 발견되었는데, 이 청동 방울에는 호태왕 신묘년이라고 적혀 있었다. 고로 광개토대왕의 원년은 신묘년(391)년이거나 그 이전이라는게 중론이 되었다. 다시 말해 적어도 391년 = 신묘년이나 그 이전에 광개토왕이 즉위한 것이 확실시 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삼국사기에서 말하는 광개토왕의 392년 즉위 기사가 오기 되었다는 증거로 작용하는 셈이다. https://news.joins.com/article/283056 상식적으로 년도가 기록 되어있는 유물이라면 해당년도에 만들어졌을 공산이 크므로 오기 했을리가 없다. 고로 광개토왕릉비의 기년 오기 문제 제기는 자연스럽게 소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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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문제를 간단히 정리하자면, 능비의 '신라 구원 요청(9년 기해) - 신라 구원군 파견('''10년 경자''')'에 비정되는 사기의 '신라 내구마 울음('''9년 경자''') - 실성 귀환(10년 신축)'를 굵은 글씨에 주목하며 비교해보자.
혹자들은 이 차이가 칭원법에서 기인한게 아닐까 추측하기도 한다. 칭원법은 간단히 말해서 선왕이 승하하고 새로운 왕이 즉위하면 그 해를 새로운 왕의 원년으로 삼을 것이냐 아니면 이 해를 선왕의 마지막 연호로 보고, 그 이듬해를 새로운 왕이 즉위한 원년으로 볼 것이냐이다.
또 릉비는 광개토대왕이 승하한지 3년이 되는 해에 이장이 된것으로 기록 되어있다. 릉비의 기록대로라면 광개토왕은 412년에 승하해서 414년에 릉을 이전 했다고 기록 되어있다. 이를 토대로 본다면, 장수왕이 광개토왕을 삼년동안 [23] 상을 치뤘다고 볼수 있다.그도 그럴 것이 중국의 사서에는 고구려인들은 부모가 죽었을때 삼년상을 치뤘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릉비에 맞추어 1년 당겨 온다면, 릉비에서 증언하는 릉비의 이장 기록은 광개토왕이 승하한지 딱 24개월 차이가 난다. 이를 본다면 릉비의 기록이 삼국사기보다 더 정확하고 디테일함을 알수 있고, 광개토대왕이 승하한 년도를 오산해서 향년 (태어난 년도와 승하한 년도)을 오기 했을 가능성이 낮다는 것이다. [24] 삼국사기에는 10월에 사망 했다고 기록 되어있고, 릉묘를 이전한 날짜는 3년후인 (만 24개월) 9월 29일이다. 그 당시에도 만 24개월 ~ 27 개월동안 상을 치뤘다는 사례는 무령왕과 그의 왕비의 경우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삼국사기의 기록이 1년 늦다는 학설에 힘이 실린다.
<北史 列傳 - 高麗 >
<廣開土太王碑文>死者,殡在屋内,经三年,择吉日而葬。居父母及夫丧,服皆三年,兄弟三月。初终哭泣,葬则鼓舞作乐以送之.埋讫,取死者生时服玩车马置墓侧,会葬者争取而去.
사람이 죽으면 염하여 집안에 놓는데, 삼년 후에 길일을 택하여 장사지낸다. 부모나 남편이 상을 당하면 옷을 삼년간 입고 형제는 삼개월간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울며 읍하는데, 장사의 법칙은 북치고, 춤추고, 음악하면서 죽은 자를 보내는 것이다. 묻을 때에는 죽은 자가 태어났을 때의 옷과 익숙한 수레 말을 묘의 곁에 두는데, 장사에 모인 자들이 다투어 취한 후 가지고 간다.
<隋書 列傳 - 高麗>昊天不弔, 卅有九, 宴駕棄國. 以甲寅年九月卄九日乙酉, 遷就山陵.
(광개토태왕은) 하늘이 돌보지 아니하시어 39세(서기 412년/영락(永樂) 22년)에 세상을 떠나 나라를 버리시었도다. 이후 갑인년(甲寅年, 서기414년, 長壽王3년) 9월 29일 을유(乙酉)에 산릉(山陵)으로 능을 옮겨 모셨다.
하지만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광개토왕 모든 기록을 1년 올려 해석할 순 없다. 전연과의 전쟁 기록은 자치통감에서 비롯됐고 백제와의 전쟁 기록이 백제 측 전승일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死者, 殯於屋內, 經三年, 擇吉日而葬. 居父母及夫之喪, 服皆三年, 兄弟三月. 初終哭泣, 葬則鼓舞作樂以送之. 埋訖, 悉取死者生時服玩車馬置於墓側, 會葬者爭取而去.
죽은 자는 집안에서 염을 하고 삼년 후에 길일을 택하여 장사지낸다. 부모나 지아비의 상에는 복을 삼년간 입고 형제는 3개월을 지낸다. 처음부터 끝까지 슬피 우는데, 장례를 치를 때에 북치고 음악을 하여 춤추며 이를 보낸다. 이에 이르러 시신을 묻는데 모두 죽은 자가 살아있을 때의 옷이나 수레 말 등을 묘의 곁에 두는데 장사지내는데 모였던 자들이 다투어 취한 후 가지고 간다.
7.4.2. 유사역사학
민족을 숭배하는 한국의 유사역사학과 엮이기 좋은 소재이다보니 광개토대왕과 관련된 유사역사학적인 주장들도 많다.
광개토대왕이 젊은 나이에 죽고 나서 아틸라가 등장했기 때문에 광개토대왕이 유럽으로 건너가서 아틸라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아틸라는 선대의 계보가 명확해서 당연히 말이 안되는 소리다. 인지도는 후달리지만 한국판 미나모토 요시츠네 = 칭기즈 칸 설이랄까...
광개토대왕 비문에 등장하는 '식신토곡'이라는 세력명에서 토곡만 떼와서 토곡이 토욕혼과 발음이 유사하여 광개토대왕이 토욕혼을 정벌했다는 주장도 있다. 식신토곡이라는 말은 식신땅의 곡이라는 의미지 토곡 자체가 어떤 세력명을 지칭하는 고유 명사가 아니다. 더구나 당시 토욕혼은 백란으로 국호를 바꾸었다. 토욕혼이 고구려의 원수인 모용씨의 나라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어느 정도 그럴싸하기도 한데 환빠들은 토곡 = 토욕혼 주장을 할때 이런 근거는 들지 않는다. 식신토곡이라는 세력명은 판독자에 따라 백신토곡도 되는데 신자를 어거지로 란자로 판독해서 백란 정벌설을 내세우면 꽤나 그럴싸한데 아직까지 그런 괴인은 안보인다.
398년 북위의 수도 업에 고구려인 46만과 기술자 10만이 가득차서 수도를 평성으로 옮겼는데 사실은 고구려가 북위 수도 업을 함락해서 북위가 불가피하게 수도를 평성으로 옮긴 거라고 해석하는 주장도 있다. 사료에서 확인되는 고구려와 북위의 최초 접촉은 장수왕 때다. 둘다 공동의 적으로 후연을 마주하고 있었지만 굳이 동맹을 맺을 만큼 이해 관계가 맞아떨어지지도 않았고(서로 눈치보면서 후연을 공격하는 수준) 국경이 닿아있지 않은 관계로 직접적으로 접촉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