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구 고분군

 

通溝 古墳群 / 通沟 古墓群
1. 개요
2. 구성
2.1. 우산하 고분군
2.2. 마선구 고분군
2.3. 산성하 고분군
2.4. 칠성산 고분군
2.5. 만보정 고분군
2.6. 하해방 고분군
2.7. 장천 고분군
3.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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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안시 소재 고구려 고분과 성곽 분포도. 거의 모든 산 경사면마다 고분이 있다고 보면 되는데, 다만 지형도와 같이 표시되어 있어서 더욱 진하게 표시되었다.

1. 개요


중국 지린성 지안시(이하 집안)에 위치하고 있다. 지금은 통구 고분군이라는 표현을 잘 쓰지않지만 집안에 있는 고구려 고분들의 총칭이며 가장 포괄적인 표현이다. 통구 고분군이 워낙 넓다보니 우산하, 마선구, 칠성산, 만보정, 산성하, 하해방 고분군으로 구분되어 불리고 있다. 최근에는 장천 고분군도 이 범주에 들었다.[1]
통구 고분군은 약 1만여 기 이상의 무덤이 분포해 있으며 1960년대 무덤 전체에 대한 측량조사가 이루어졌고 1997년 재차 측량조사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가 2002년 출간된 『洞沟 古墓群 - 1997年 调查测绘报告』[2]이다.

통구 고분군은 고구려 고분문화의 총체이기 때문에[3], 본격적인 서술에 앞서 왕릉급을 제외하고 그 이하의 규모의 준 왕릉급 고분 및 고구려 고분문화의 전개 과정 상의 주요한 고분들을 별도의 항목으로 나누는 것 보다는 이 항목에서 설명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된다.
공식적으로 통구 고분군을 관리하는 중국 측에서는 통구 고분군만을 고분군이라 부른다. 각 우산하, 마선구와 같은 구분은 '묘구'라고 하며 묘구 내에서도 지형적으로 구분되는 경우에는 '편' 또는 '구역'이라고 지칭한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이미 통구 고분군의 표현보다 우산하 고분군 이라는 식으로 부르는 것이 통용되고 있으므로 이에 따라 구분토록 한다. 편의 경우 구역으로 통일한다.
여담으로 집안 일대의 고분군을 구경해보면 통구 고분군이라고 써진 아주 오래된 나무팻말부터 새롭게 만든 석비까지 표지석들이 굉장히 많다.

2. 구성



2.1. 우산하 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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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하 540호분에 올라서서 바라본 우산하 고분군의 일부. 우산하 992호분과 901호 및 귀족묘구의 오회분들이 살짝 보인다.
집안 우산하 고분군(集安 禹山下 墓群, Jíān Yǔshānxià Mùqún)[4] 국내성의 북동쪽부터 동쪽을 아우르는 범위의 고분군이다. 우산의 아래에 해당하여 우산하 고분군으로 불린다. 통구 고분군 내에서도 가장 규모가 크고 무덤의 수도 많을 뿐 아니라 태왕릉, 장군총을 비롯해 무용총, 각저총 등 익히 보고 들었던 무덤 대부분이 여기에 분포해 있다.
  • 우산하 0001호 - 장군총
  • 우산하 0030호 - 황니강대묘. 무덤의 대부분이 파괴되어 그 형태를 정확히 알 수 없다. 최소 4~5단의 계단이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 우산하 0043호 - 임강총
  • 우산하 0400호 - 무용총
  • 우산하 0400호 - 각저총
  • 우산하 0540호 - 2000년대에 조사된 한변 30m 가량의 석실 적석총이다. 단면도상의 비율은 천추총, 태왕릉과 비슷하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적석총이 아닌 봉토분이다. 인근에 민가가 조성되어 훼손이 심해 석재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전형적인 적석총은 내부 채움을 돌로 하는 반면에 540호는 흙으로 되어 있다.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지만 봉토부분은 조사하지 않아서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또 태왕릉에 가깝게 축조되고 있는 점, 입지의 탁월성 및 고분 규모, 출토유물 등으로 미루어보아 왕릉 내지는 왕족묘임이 거의 확실한 고분이다. 여담으로 무덤에서 각종 동물뼈[5]가 확인되었다.
  • 우산하 0541호 - 태왕릉
  • 우산하 0901호 - 우산하 992호분의 동쪽의 다른 능선에 조성된 준 왕릉급 적석총. 가서 보면 992호분과 꽤나 닮은 형태임을 알 수 있다.
  • 우산하 0992호
  • 우산하 1042호 - 장군총의 면석처럼 가공이 잘 되어있는 석실 적석총이다. 석실의 형태가 동실묘처럼 작지만 벽화가 남아 있는 것이 특징이다. 우산하 992호분이 있는 능선 아래에 있다. 보존상태는 안습이다.
  • 우산하 2101호 ~ 2105호묘 - 5기의 무덤을 합쳐서 오회분(五盔墳)이라 부른다. 겉모습이 마치 투구(盔)모양같은 무덤이 서로 인접해 있기 때문에 붙은 이름. 1호, 2호, 3호는 아직 발굴되지 않았고 4호와 5호묘가 발굴되었으며 벽화무덤임이 확인되었다. 그 중 5호묘의 경우 내부를 볼 수 있게 되어있어 집안지역에 여행을 가면 관광코스로 인기가 있다. 그러나 외부 공기가 자주 유입되면서 벽화가 사라지는 백화현상이 진행중이며 머지않아 사라질 것이란 이야기가 있다.[6] 무덤 벽화가 마치 사진으로 보는 것 처럼 선명하게 잘 보일 것이라 착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실제 무덤은 어두워서 손전등으로 가까이 비추어야 겨우 보일정도이다. 사진을 찍을 때 플래시를 터트려 찍으면 잘 보이긴 하지만...그랬다간 공안의 제지를 받는다.(중국 공안이 무덤 내부에서 지켜보고 있다. 조심하자.)
  • 우산하 2110호
  • 우산하 2112호 - 귀족묘구라 불리는 구역 내에 있다. 밀림방지턱이 남아 있는 계단식 적석총이다. 또 연화문 와당이 채집되었던 바 있어 4세기 말, 5세기 전반에 축조된 것으로 보고 있다.
  • 우산하 3105호 - 3개의 계단적석총이 연접한 연접묘이다. 보고내용에 따르면 무덤을 연접할 때 연접부에 해당하는 부분을 일부러 파괴하고 연접하였다고 한다. 무덤의 규모는 중형에 해당하지만 금제품과 은제품이 소량 출토되었다.
  • 우산하 3241호 - 적석총 2기가 연접한 연접묘이다. 먼저 축조된 무덤은 기단부를 축조한 후 중간에 분리되는 벽을 쌓아 위에서 보면 마치 두개의 무덤처럼 보이게 하였다.
  • 우산하 3283호 - 3단으로 이루어진 계단적석총이다. 금제 귀걸이, 금동제 관꾸미개 등을 비롯해 각종 금, 은, 금동제품이 출토되어 비교적 신분이 높았던 사람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 우산하 3319호

이외에도 산연화총, 통구12호분(마조총), 서강 110호분, 서강 220호분, 삼실총 등이 우산하 고분군 소속이다.

2.2. 마선구 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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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에 촬영된 마선구 고분군의 전경. 천추총 위에 올라서서 사진을 촬영하였다.
집안 마선구 고분군(集安 麻线乡 墓群, Jíān Máxiànxiāng Mùqún). 국내성의 서쪽이며 마선하를 중심으로 두고 있다. 집안고구려비가 확인된 곳이기도 하다. 마선향[7]이 있는 '''마선 구역'''과 홍성촌 인근의 '''홍성 구역'''과 건강촌 인근의 '''건강 구역'''으로 나뉜다. 가장 서쪽의 '''안자구''' 구역도 있으나 소형분 몇기만이 남아 있다. 우산하 고분군 다음으로 넓다.
- 마선구역
마선향의 인민정부 건물 뒤쪽의 구릉지와 천추총을 포함하는 범위의 구역이다.
- 홍성 구역
마선향의 약간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평야지대에는 고분이 거의 없도 홍성촌 뒷쪽의 칠성산 서쪽 사면에 대부분 고분이 자리하고 있다. 홍성구역의 고분 군집들은 거의 대부분이 동실묘 및 소형 봉토분으로 위계가 가장 낮다.
- 건강 구역
  • 마선구 0397~0399호 - 대형의 연접묘이다.
  • 마선구 0500호 - 서대총
  • 마선구 0626호
  • 마선구 0682호 - 우산하 3319와 더불어 전축분으로 보고되어 있다. 하지만 지금은 다 붕괴되어있고 가봐도 전돌의 흔적조차 없다.

2.3. 산성하 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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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도산성에서 내려다본 산성하 고분군 산성하 구역 일대. 통구 고분군에서 가장 멋있는 경치로도 꼽힌다.[8] 해당 사진은 2014년 촬영한 것으로 2018년 현재는 정비가 안 됐던 나머지 무덤들(군데군데 잡목이 우거진 부분)을 정비중에 있다.
환도산성 아래의 일군을 산성하 고분군이라 칭한다. 사곡천인 통구하에 의해서 지형적인 구분이 심하다. 지금의 산성촌이 있는 곳이 '''대천 구역''', 우산의 뒷쪽인 '''우산후편 구역'''[9], 환도산성의 바로 아래인 '''산성하 구역''', 환도산성으로 들어가는 다리 앞의 산성외[10]의 '''남대만자 구역''', 그 뒤의 우산 서쪽 완사면에 입지하는 '''동대파 구역''', 국내성의 바로 북쪽 산지인 '''전창 구역'''으로 구분된다.[11]
- 대천 구역
집안 산성하 대천 묘구(集安 山城下 大川 墓群, Jíān Shānchéngxià Dàchuān Mùqún). 대천 구역은 산성하 소속이지만 별도의 번호로 편호되었다.[12] 대천 00호, JSDM 00호라는 식으로 부른다.
  • 대천 0023호
  • 대천 0024호
- 전창 구역
집안 산성하 전창 묘구(集安 山城下 砖厂 墓群, Jíān Shānchéngxià Zhuānchǎng Mùqún). 벽돌공장이 있어 전창구역으로 불리고 있다. 통구 고분군 내애서도 빠른 시기의 적석총들이 몰려있다. 전창 및 동대파 구역이 초기 집안 고분군 형성의 중심지로 추정된다. 고군분의 명칭이 세분되기 전부터 전창이라는 명칭으로 불렸기 때문에 보통 산성하 전창 00호 또는 전창 00호, JSZM 00호 라고 부른다.
  • 전창 0001호 - 전창 구역에서 비교적 늦은 적석총이다. 적석총 구조 상으로 석곽인데다 가공이 그다지 이뤄지지 않은 적석총임에도 유물의 연대는 5세기까지도 늦어지는 다소 특이한 고분이다. [13]
  • 전창 0036호
  • 전창 0145호 - 또 다른 초기의 왕릉급 적석총. 145호가 위치한 능선 주변은 일찍이 발굴이 되었는데 60~70년대의 발굴이다 보니 보고서 내용이 소략하다. 초기관련 자료가 증가하고 누적되면 재조명될 여지가 있다.
- 산성하 구역
산성하 고분군의 산성하 구역은 환도산성 바로 아래의 적석총을 지칭한다. 2018년 4월인 현재 정비가 한창 진행중이다.
  • 산성하 0635호 - 제총
  • 산성하 0636호 - 형총
  • 산성하 -666, -665, 666, 665호묘 - 봉토석실묘[14]와 적석총 3기가 연접한 독특한 형태의 무덤이다. 무덤 번호 앞에 '-'가 붙은 것은 1960년대 및 1997년 측량조사 때 누락되었거나 조사결과 새롭게 추가된 무덤들에 붙는 표시이다.[15]
  • 산성하 0725호
  • 산성하 1298호 - 절천정총, 일제강점기에 조사된 고분. 천정이 올라가다가 꺾여서 맞배형 지붕 형태가 되는 석실로써 이실이 재조사에서 확인되었다. 이런 구조로 절천정총이라 불린다. 장군총처럼 밀림방지턱이 있고 석재의 가공도도 중대형급 치고 잘 되어 있다. 5세기 전반경의 연대로 추정되고 있다.
  • 산성하 1305호
  • 귀갑묘
  • 사아천정총 - 일제강점기 조사자료. 환도산성 아래에서 조사된건 확실한데, 대상 고분이 뭔지 아직도 모른다. 하지만 5세기 대의 적석총은 장군총 비율처럼 도드라지기 때문에 대상이 될만한 고분은 1301호분 정도밖에 없다.
- 남대만자 구역
환도산성을 갈 때 건너야하는 다리 앞의 하안대지 상의 구역을 지칭한다. 남대만자라는 구역분류는 잘 알려지지 않아서인지 남대만자 몇 호라고 부르지는 않고 대부분 산성하 00호 라는 식으로 부르고 있다.
  • 연화총
  • 산성하 1069, 1075, 1017호묘[16] - 계단적석총과 봉토석실묘, 무기단 적석총이 서로 연접한 독특한 형태의 연접묘이다.
- 동대파 구역
남대만자 구역의 바로 뒷편으로 우산(禹山) 서쪽 경사면 일대를 지칭한다. 지금은 산성로(山城路)라는 도로로 구분이 되어서 그렇지 남대만자 구역과 마찬가지로 묘실의 방향이 대체로 서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같은 집단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동대파 구역은 연구자에 따라서 동대파로 구분되어 불리는 경우가 있다.
  • 동대파 0331호 - 왕자묘(王墓), 王자의 패턴으로 벽화가 장식된 이실이 있는 석실봉토분이다. 이실이 있는 석실의 변천, 벽화분의 장식요소와 적석총에서 확인되는 장막걸이쇠와의 관계 등을 파악하는데 주요한 고분이다. 특히 사이부장경옹이 출토되어 고구려 석실의 전개 상에서 꼭 언급되는 고분이다.
  • 동대파 0356호 - 연접묘로 2기의 고분이 연접되어 있다.[17] 계장식의 형태로 축조되어 있으며 잔존상태가 양호하여 환인의 고력묘자 고분군의 무덤들과 비교자료로 활용된다.

2.4. 칠성산 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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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성산 고분군 전경. 여타의 고분군을 통틀어 가장 경사진 곳에 입지하고 있다.
집안 칠성산 고분군(集安 七星山 墓群, Jíān Qīxīngshān Mùqún). 칠성산의 사면에 위치한 고분군으로 칠성산에서는 국내성이 한눈에 보일정도로 가깝다. 일부 무덤들은 급경사에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
  • 칠성산 0065, 0066, 0066A호 - 적석총(66A)호 위에 석실봉토분(65호와 66호)이 설치된 독특한 형태로 보고되었다. 하지만 그냥 석실봉토분으로의 전이과정 중에서 과도기적 성격의 석실적석총으로 봐도 무리가 없다.
  • 칠성산 0211호
  • 칠성산 0871호
  • 칠성산 1096호 - 4세기 중후엽 경의 석실적석총. 보고가 간략해 확실친 않지만 연접묘 내지는 삼실(3室)의 형태로 남아있다.[18] 여기서 나온 등자가 태왕릉과 다른 등자들을 고고학적으로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였다. 등자 외에도 행엽, 청동제 초두 등이 확인되어 고구려 무덤의 편년을 언급할 때 항상 등장한다.

2.5. 만보정 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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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성산 고분군과 산성하 고분군, 전창 구역의 사이에 위치하는 고분군.[19] 중하위 위계의 고분군이 많이 분포하고 있어 조사된 고분들이 고구려 적석총 및 석실분의 발전과정에 주요한 연대 근거가되는 고분이 되지만.... 발굴조사 아래에 서술한 3기가 전부로 미진한 편이다.
집안 만보정 고분군(集安 万宝渟 墓群, Jíān Wànbǎotíng Mùqún). 만보정 고분군은 맨 위의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산성하 고분군과 통구하(通溝河)를 사이에 둔 채 마주보고 있다. 그러나 통구하를 경계로 두 지역이 뚜렷한 차이를 보이지 않고 있고 만보정 고분군의 규모가 작은 점을 토대로 산성하 고분군과 만보정 고분군을 합쳐서 산성하·만보정 고분군으로 보는 입장도 있다.
  • 만보정 0000호 - 만보정 0호라는 위치를 알 수 없지만 조사했던 고분이 있다. 광구사이부장경호만이 도면으로 남아있고 발굴조사 위치에 대한 기록이 없어 0호분으로 불리고 있다.
  • 만보정 0242호 - 3세기 말 4세기 초의 연접묘. 도합 4기의 고분이 연접되어 있다. 최초로 석실을 채용하는 적석총으로 보고 있으며 가장 이른 시기의 계단 적석총으로 보는 입장도 있다. 흉노계 내지는 후한계의 말재갈이 출토된 바 있다.
  • 만보정 1078호 - 5세기 전반 경의 적석총. 기단부는 5세기대의 여느 중대형 적석총과 비슷하지만 고분 상부가 다 날아가버렸다. 하지만 다행히도 출토유물이-특히 마구류 일괄- 다량으로 함몰부에서 확인되어 교차연대의 주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 만보정 1365호 - 고구려 벽화무덤의 초현으로 거론되는 석실봉토분 중 하나이다. 벽화의 주제는 집 기둥모양이 전부이지만 벽화의 내용이 집을 중심으로한 생활풍속도에서 불교적, 도교적 영향의 벽화로 변하는 점 때문에 주목된 바 있는 석실봉토분이다.

2.6. 하해방 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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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루총(염모묘)에서 바라본 하해방 고분군. 사진 속에서 약간 높게 솟았다 싶은 구릉이 전부 봉토분이다.
집안 하해방 고분군(集安 下解放 墓群,Jíān Xiàjiěfàng Mùqún). 하해방 고분군의 가장 큰 특징으로는 적석총이 하나도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적어도 적석총이 한창 축조되는 4세기까지도 하해방 일대는 무덤이 축조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해방 고분군은 맨 위의 지도에도 표시가 되지 않았는데 '우산하 고분군' 글씨가 있는 부분의 산을 넘어가야 있다. 적석총이 하나도 없다는 점, 지형적으로 살짝 멀다는 점을 토대로 하해방 고분군을 통구 고분군에서 제외해 별도로 구분하는 사람도 있다.
  • 하해방 0001호 - 모두루총(牟頭樓塚) 또는 모두루묘(牟頭樓墓). 석실봉토분으로 석실 내부에는 묵서가 확인되었다. 고구려의 직책과 왕을 부르는 호칭 등의 내용이 담겨있다. 그 판독과 해석의 차이로 인해 한국에서는 모두루총이라 부르고 중국에서는 염모묘(冉牟墓)라고 부른다. 모두루 항목 참조.
  • 하해방 0031호 - 환문총의 거의 바로 뒤에 있다. 원래는 벽화가 있었지만 다 지워지고 없다. 지금도 시원하게 석실 입구가 뚤려있어 그냥 들어가 볼 수 있다.
  • 하해방 0033호 - 환문총(環紋塚), 이중(二重)의 동심원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내부 벽화의 주제는 사신도이다. 동심원 문양으로 패턴화된 벽화는 환문총이 유일하다. 사신도를 채용하고 있어 5세기 중엽 이후의 석실봉토분으로 추정하고 있다.

2.7. 장천 고분군


집안 장천 고분군(集安 长川 墓群,Jian Changchuan Muqun). 집안시 장천촌에 위치하고 있다. 집안시로부터 약 30km 가량 떨어져 있고 근처 맞은편에는 북한 만포시 문악동 고분군[20]이 있다. 장천 분지에는 평지에 장천 고성, 장천 적석총군이 있고, 장천 1~5호분이 주변의 구릉 정상부에 위치한다. 조사가 많이 진행되지는 않았지만 장천 분지의 양상은 집안의 미니어처판이라고 해도될 만큼 닮아 있다.
장천 고분군은 통구 고분군에 속하는 다른 고분군들이 국내성을 중심으로 비교적 가까운 곳에 위치해있는 것과 달리 북쪽으로 좀 더 올라가야 있다. 이러한 위치적 문제, 무덤의 규모, 장천고성의 존재 등으로 인해 국내 및 중국, 일본의 고구려 연구자들 중에는 장천 고분군을 통구 고분군의 범주에 포함시키지 않는 견해도 많이 있다.[21] 본 글에서는 장천 고분군의 무덤 중 일부가 국내성 주변에 위치한 다른 무덤들과 함께 세계 유산에 등재되었다는 점, 장천 고분군에 대한 내용이 그렇게 길지 않아 별도로 구분할 필요가 없다는 점 등을 토대로 통구 고분군의 범주에 포함시켜 서술하였다. 통구 고분군에 포함되는지 아닌지 여부는 본인의 판단에 맡긴다.
  • 장천 1호 - 대형의 석실봉토분으로 벽화분이다. 장천 2호의 동쪽에 있다. 생활풍속도의 범주 안에 들며 다양한 벽화들이 표현되어 있다. 특히 서역계의 인물로 추정[22]되고 있다. 또 현실 내부에는 사신도도 일부 표현이 되어 있는데 이러한 점에서 벽화 제재의 생활풍속도에서 사신도로의 변화를 추론하기도 한다. 현재 무덤의 벽화는 도굴되어 사라졌다. [23][24]
  • 장천 2호 - 대형의 석실봉토분으로 벽화분이다. 연화문(蓮花紋)을 비롯해 王자 무늬 등이 그려져 있으며 현실의 입구 쪽에는 실물 크기의 여인이 그려져 있다. 5세기 경의 석실봉토분으로 추정되고 있다.
  • 장천 3호 - 장군총이랑 거의 똑같이 생긴 대형 석실적석총이다. 4호분의 뒤에 위치하고 있다. 5세기 대의 적석총으로 추정되고 있다.
  • 장천 4호 - 석실봉토분. 장천 5호의 바로 뒤에 있다. [25]
  • 장천 5호 - 장천 분지 내의 대형 적석총으로 우산하 901호와 거의 유사하다. 우산하 901호는 또 992호와 상관성이 있어보이는데, 연대는 확실하진 않지만 장천 1~5호 가운데서는 가장 이른 무덤으로 추정된다.

3. 같이보기



[1] 뒤에 장천고분군에 대한 내용에서 언급하겠지만 장천 고분군을 통구 고분군과 구분하여 보는 입장도 상당히 많다.[2] 책 제목은 통구(通沟)가 아닌 동구(洞沟)인데, 중국에서는 두 가지를 혼용하고 있다. 이는 집안(集安)과 집안(輯安)을 혼용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 책은 본문 뒤에서도 언급되겠지만 무덤의 수가 너무 많아 햇갈렸는지 오류가 상당히 많다. 도면에 표시된 위치와 실제 위치가 차이를 보인다거나, 편호가 누락된 무덤, 발굴조사 결과 새롭게 확인된 무덤, 발굴조사 결과 무덤의 형식 및 규모가 다른 무덤 등등... 이는 발굴조사가 아닌 측량조사이기 때문에 따라올 수 밖에 없는 한계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렇게 오류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고구려 고분 연구자들에게는 한 번 쯤 꼭 봐야 하는 책이다. 왜냐하면 이 책은 현재까지 통구 고분군에 분포하는 무덤들을 측량하고 편호한 유일한 책이기 때문이다. [3] 평양 천도 후에도 지속적으로 고분이 축조된다.[4] 중국어 발음 표시에서 대문자로 표시된 부분이 고분의 약칭이다. JYM 0001는 장군총을 뜻한다. 이하 아래의 모든 중국어 발음을 별도로 표시해둔 고분군 및 구역은 이러한 약칭이 있는 경우를 뜻한다.[5] 개, 산토끼, 돼지, 곰, 꿩, 가물치 등등[6] 중국에서 해당 무덤을 개방할 때 입구를 일부러 굴곡지게 만듦으로써 외부 공기가 최대한 들어오지 못하도록 했다고 하지만 큰 효과는 보지 못한 듯 하다.더군다나 무덤 내부에는 조명이 설치되어 있어 조명에서 나오는 열기가 백화현상을 촉진시켰다는 이야기도 있다.[7] 중국 행정구역의 단위 중 하나이다.[8] 실제 우리나라나 중국이나 통구 고분군에 대한 설명을 찾아보면 비슷한 구도의 사진을 많이 볼 수 있다.[9] 우산후편 구역은 자세한 도면이나 상황이 잘 전해지지 않아 항목에서는 생략한다.[10] 마을 이름이 산성외다.[11] 산성하 고분군은 너무 많이 세분되는 감이 있다. 하지만 좀 중요한 이유는 지형이 뚜렷하게 구분되다보니 무덤의 축조 양상도 각 구역마다 공통점을 띠고 있다. 각 구역의 고분군들이 집단적, 혈연적 관계 등의 모종의 관계망을 형성하였음을 시사한다.[12] 산성하 24호와 산성하 대천 24호는 다른 고분인 셈이다.[13] 그래서 고구려 고분 연구에서 구조적인 부분에서는 은근슬쩍 빠지기도 한다.(...) 한편 중국의 일부 연구자는 이 전창 1호를 왕릉으로 비정하기도 했다.[14] 횡혈식석실분(굴식돌방무덤)의 중국식 표현[15] 측량조사 내용과 발굴조사 내용이 다르다. 측량조사에서는 동실묘(洞室墓)로 보고되었다[16] 이 고분에 대한 실측조사기관의 문제도 있는데 정식조사가 아니라 통화사범대에서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출처 확인 要) 하지만 내용이 너무 소략한데다 일단 고분 호수가 분명히 틀렸다. 남대만자 구역 안에서는 실측도면에 따라서 볼 때 M1069호분의 장축이 약 20m으로 되어 있는데 이 정도 규모의 적석총에 적석총+봉토분+적석총의 연접방식이 된 형태는 산성하 1016, 1017, 1018호분 밖에 없다. 실제로 가서 연화총 옆에 답사를 가서 보면 1997 실측 조사 보고서 상의 1016~8호분 자리에는 1069, 1075, 1017호라고 팻말이 박혀있다. 너무 많아서 헷갈리는 것이 이해는 되지만 이러한 기본조차 틀린 경우가 매우 많다.[17] 사람에 따라 3기 연접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조사내용을 살펴보면 가장 먼저 축조된 무덤은 분구 두 개가 하나의 기단을 공유하고 있고 그 위에서 격벽(隔壁)을 구축하여 분리된 형태이다. 따라서 하나의 무덤으로 보아야 한다.[18] 집안현문물지에서는 연접묘로 설명하고 있고 손인걸(孫仁杰) 역시 연접묘라고 언급하였다. 하지만 정작 발굴조사를 실시한 장설암(張雪岩)은 세 개의 묘실을 갖는 단독묘로 보는 듯 하다.[19] 사진 가운데로 보이는 큰 골짜기가 바로 환도산성이다. [20] 중국쪽 압록강에서 엎어지면 닿을 거리에 있다. [21] 장천 고분군을 통구 고분군에 포함시켜 보는 입장은 중국의 장복유(張福有)가 대표적이다.[22] 각저총에서 씨름하는 인물도 눈과 코의 표현에서 서역계 인물로 추정되고 있다.[23] 조선족 3명이 꾸민 범죄였는데 사형이 판결나 집행되었다고 알려져있다. 삼실총 벽화조각과 함께 일부 벽화조각이 한국쪽으로 유입되었고 한다.관련 기사 혹은 벽화 도굴에 한국인이 연관되어 있다는 이야기도 있다. [24] 전호태, 2014, 세계문화유산 - 고구려벽화고분의 현황과 과제, 고구려 유산의 현황과 활용 그리고 전망, 고구려발해학회 pp.119~120. 각주 11. 삼실총과 함께 도굴의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삼실총은 이 벽화도굴로 유네스코 등재 대상에서 제외되었다고..[25] 장천 고분군의 1, 2, 4호는 모두 벽화가 그려진 석실봉토분으로써 고대 고구려 왕국의 수도와 무덤군으로 세계 유산에 등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