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미 메이컴
북아일랜드 출신의 가수.
'''1932년 11월 4일~2007년 8월 1일'''
국내 음악 사이트를 보면 토미 마켐으로 잘못 읽는 경우가 많은데, 정확한 발음은 토미 '메이컴' 이다. 1음절 강세를 받고 2음절은 슈워화된다.
북아일랜드의 영화배우, 가수, '''작곡가''', 시인. 아일랜드 포크 음악계의 소녀시대와 같은 존재인 클랜시 브라더스 멤버 출신이며, 이후 아일랜드 포크 음악계의 전설이 된 존재이다. 엄밀히 말해 클랜시 브라더스의 다른 멤버들과는 혈연관계가 전혀 없으니 '클랜시 브라더스' (클랜시 형제들)에 들어가진 않으므로, 그룹의 공식 이름도 '클랜시 형제들과 토미 메이컴' 인 것.
그러나 토미 메이컴 없는 클랜시 브라더스는 한 마디로 팥 없는 찐빵인 것이, 토미 메이컴 탈퇴 이후 클랜시 브라더스는 계속 하향곡선을 그렸다. 토미 메이컴을 대체하기 위해 들어온 멤버들은 토미 메이컴만큼의 역량을 발휘하지 못했기 때문. 반면 토미 메이컴은 탈퇴 이후로도 별다른 몰락이나 쇠퇴를 보이진 않았고, 오히려 1970년대 리엄 클랜시와 함께 듀엣으로 활동했을 때는 아일랜드 차트 1위에 오르기까지 했으니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토미 메이컴은 다른 멤버들과 달리 '''작곡가를 겸하는 싱어송라이터'''이다. 토미 메이컴은 작사, 작곡을 본인이 직접 할 수 있으며 이렇게 자기가 쓴 곡들 가운데 상당수는 본인이 부른 버전뿐만 아니라 다른 가수들이 부른 리메이크 버전이 존재한다. 뒤에 설명하겠지만 <Four Green Fields>나 <Farewell to Carlingford> 같은 몇몇 곡들은 아예 다른 고전 포크송들처럼 아일랜드 포크 음악계 전반에 걸쳐 널리 불릴 정도이다.
토미 메이컴은 다양한 악기들을 다루는데, 다음과 같다.
북아일랜드 출신이지만 가톨릭 신자이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정말 중요한 사실이다. 북아일랜드는 다수의 개신교 신자(친영파)와 소수의 가톨릭 신자(반영파)의 대립이 아주 격렬한 곳으로, 어떤 종파를 믿느냐에 따라 정치 성향과 사고방식이 천지차이이다.
메이컴이 작사 및 작곡한 곡들을 보면 메이컴 본인의 가톨릭 신앙에서 비롯된 영국 제국에 대한 저항 의식이 강하게 드러나는 곡들이 많이 있다. 메이컴의 대표곡인 <Four Green Fields>가 대표적인 작품. 아니 애초에 클랜시 브라더스 레퍼토리 자체가 영국 제국에 대한 저항 의식을 고취하는 곡들이 많이 있다. 클랜시 브라더스의 첫 앨범은 대놓고 그런 곡들만 모아 놓았을 정도.
메이컴은 여덟 살 때부터 15년간 다니던 성당의 성가대원이었다. 그리고 (어떻게 만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리엄 클랜시와 절친이기도 했다. (메이컴이 3살 위이긴 한데, 서양 사람들은 3살 위면 형도 아니다.) 23세가 되던 1955년 미국으로 건너갔는데, 이 때는 연기 활동을 하기 위해서였다고. 그런데 연기판에 뛰어들기 전 알바 자리를 전전할 때, 인쇄소에서 2톤짜리 프레스에 손이 깔리는 대형사고를 당하게 되었다. 이 사건 직후, 마찬가지로 미국으로 건너온 절친 리엄, 그리고 그 형들인 패디, 톰과 함께, 1956년 첫 번째 앨범을 발매하면서 음악계에 데뷔하게 되었다.
메이컴은 1959년 첫 번째 앨범에 수록된 곡들을 다시 녹음할 때 보컬을 불렀을 뿐만 아니라 틴 휘슬과 드럼을 맡아 연주했으며, 이후 클랜시 브라더스 멤버들 가운데 유일하게 두 가지 악기(틴 휘슬 및 밴조)를 다루는 멤버로써 아주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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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경의 토미 메이컴. 손에 들고 있는 악기가 틴 휘슬이다.
메이컴은 1961년에 첫 솔로 앨범을 발매했다. 1960년대 초반에는 그룹이 문자 그대로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하는 바람에 솔로 앨범을 내지는 않았지만, 1966년 <Freedom's Sons> 앨범에 자작곡을 두 곡이나 수록하면서 본격적으로 개인 커리어를 쌓게 된다. 이후 나온 클랜시 브라더스 앨범들을 보면 메이컴의 자작곡이 수록된 경우가 많이 있는데, 이 가운데 1968년도 앨범인 <Home Boys Home>에 수록된 <Four Green Fields>와 <Sings of the Sea>에 수록된 <Farewell to Carlingford>는 이후 메이컴 본인의 솔로 앨범뿐만 아니라 다른 아일랜드 포크 아티스트들 앨범에도 여러 차례 수록되었다.
아일랜드 포크 음악계에서 큰 인기를 끈 <Four Green Fields>의 경우는 아일랜드를 의인화하여 아일랜드의 네 지역(얼스터, 먼스터, 코노트, 렌스터)을 강탈해 간 'stranger' (이상한 놈들), 곧 영국 제국에 대한 강력한 저항 의식을 유발하고, 여전히 영국 치하에 있는 북아일랜드의 절망적인 현실을 폭로하며, 그런 속에서도 밝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는 곡이다. 1970년대 우리 한국의 아침 이슬이나 임을 위한 행진곡에 독립군가를 합쳐 놓을 것이라 보면 되겠다. 토미 메이컴이 북아일랜드 출신 반영파 가톨릭 신자이기 때문에 이러한 걸작품이 등장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렇게 네 멤버들 가운데 특히 돋보이는 걸출한 활약을 보이던 메이컴은 1968년에 두 번째 개인 앨범을 발매했고, 이 무렵 1년 후 탈퇴하여 솔로로 활동하겠음을 예고한다. 그리고 1968년 말 마지막 앨범을 녹음하고, 1969년 4월 그룹을 탈퇴했다.
그룹을 탈퇴한 메이컴은 1974년까지 다량의 작곡과 앨범 발매를 통해 아주 성공적인 솔로 커리어를 이어 나갔다. 메이컴의 작곡 활동이 본격적으로 빛을 발한 것도 이 무렵이다. 게다가 이 곡들을 대부분 직접 불렀다는 것 또한 주목할 만하다. 어떤 곡을 가장 잘 연주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작곡자 자신일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Four Green Fields>처럼 정치적인 곡만 지은 것은 아니고, 다양한 주제의 곡들을 지었다.
1975년 토미 메이컴은 캐나다에서 TV 프로그램 MC로 잘 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 무렵 절친인 리엄 클랜시가 완전히 꿈이고 희망이고 없는 상황에서 메이컴을 만나게 되었다. 당시 리엄 클랜시는 클랜시 브라더스의 공중분해에 이어, 엄청난 빚을 지고 빛더미에 올라앉아 결국 파산을 신청하는 등 상황이 완전 막장이었다. 오죽하면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치즈 광고를 찍었을 정도. 이런 상황에서 잘 나가고 있던 절친 메이컴을 만났고, 메이컴이 MC를 맡았던 프로에 함께 출연했다.
이 때까지만 해도 리엄 클랜시는 자신이 아일랜드 음반 차트 1위에 오를 것이라고는 예측을 전혀 하지 못했으나...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메이컴과 리엄은 함께 방송에 출연한 것을 계기로 듀엣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룹 이름은 따로 없고 그냥 '토미 메이컴과 리엄 클랜시' 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스코틀랜드인 PD인 아치 피셔와 손을 잡고 첫 듀엣 앨범을 발매했고, 싱글도 냈다. 그런데 이 싱글이 '''아일랜드 음반 차트 1위를 차지하게 된다!''' 빚더미에 올라앉아 있던 리엄 클랜시에게는 문자 그대로 초초초초초대박이었을 뿐만 아니라, 1970년대 후반의 아일랜드 포크 음악계의 판도가 통째로 뒤집어지는 셈이었던 것.
클랜시 브라더스 시절의 인기가 하도 엄청났던 터라 묻힐 수 있지만, 사실 클랜시 브라더스가 1960년대에 구가했던 인기보다 토미 메이컴과 리엄 클랜시 듀엣이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반에 걸쳐 구가했던 인기가 더 엄청나다. 토미 메이컴과 리엄 클랜시는 이렇게 아일랜드 포크 음악계를 완전히 주도하며 엄청난 흥행을 거두었다. 1979년에는 차트 10위권에 두 번이나 오를 정도였고(3위 한 번, 7위 한 번) 1981년에는 '음악 프로그램+사극' 형태의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했다.
이렇게 엄청난 성공을 거둔 토미 메이컴과 리엄 클랜시는 1984년 클랜시 브라더스 1기 체제로 잠시 복귀하여, 패디와 톰 클랜시와 함께 리유니언 투어(Reunion Tour)에 뛰어들게 되었다. 이 리유니언 투어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 미국 뉴욕의 링컨 센터에서 공연을 할 때는 전석 매진을 기록하기도 했고, 아일랜드 RTE 방송국의 인기 토크쇼인 <The Late Late Show>에도 출연했으며, 심지어 스코틀랜드 방송에 출연하기도 했다.
이렇게 1985년 말까지 큰 흥행을 거두고, 메이컴과 리엄은 다시 듀엣 활동을 재개했으며 1986년에는 앨범을 발매했다. 이후 2년간 잘 활동하던 이 듀엣은 1988년 서로의 합의 하에 해체된다. 둘 다 40년 이상 절친이었는데 싸웠을 리는 없고, 서로가 솔로 활동에 대한 의지가 있으니 서로 합의하여 해체를 결정한 것.
이후 토미 메이컴은 솔로 활동을 재개했는데, 이 때 나온 앨범들을 보면 <The Town I Loved So Well>(마찬가지로 북아일랜드 출신 가톨릭 신자인 필 쿨터(Phil Coulter) 작사 및 작곡. 영국 통치 하에 있는 북아일랜드의 절망적인 현실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표현한 곡)이나(1989년도 앨범 <Rolling Home>에 수록), <The Winds are Singing Freedom>(메이컴 부인인 메리 메이컴 작사 및 작곡. 내용은 <The Town I Loved So Well>과 비슷하나, 더 직설적으로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같이 정치적으로 아주 강력한 메시지를 담아내는 곡들이 많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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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경의 토미 메이컴.
1992년 메이컴의 세 아들인 코너, 셰인, 로리 메이컴은 3인조 그룹인 메이컴 브라더스(The Makem Brothers)를 조직하여 음악계에 데뷔하였다. 이 셋은 토미 메이컴과 함께 앨범 작업을 하기도 했다. 1998년 토미 메이컴은 마지막 정규 앨범을 발표했으나, 이후로도 공연은 계속해서 했다. 아마도 아들들에게 정규 앨범을 발표할 기회를 주기 위한 차원인 듯.
메이컴은 2000년대 중반까지도 계속해서 공연을 했으나, 이 무렵 폐암 진단을 받게 된다. 그런데도 진짜 엄청난 투혼을 발휘하여 공연을 강행했던 것이다. 아들들과 함께 공연을 하는 경우도 많이 있었고. 메이컴은 2007년 8월 1일 미국 뉴햄프셔 주의 도버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죽음을 바로 눈앞에 두고도 공연에 나서 열창을 했다! 2007년 초까지도 진짜 엄청난 투혼을 발휘하여 공연에 나선 걸 보면... 그야말로 먼치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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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의 토미 메이컴.
메이컴의 세 아들로 구성된 메이컴 브라더스는 2004년 리엄과 미키 스페인 형제를 영입하여 이름을 메이컴&스페인 브라더스로 개편했다. 현재 세 메이컴 형제들 가운데 한 명이 탈퇴하긴 했지만, 여전히 4인조로 날아다니는 중.
메이컴은 외모지상주의가 판을 치는 한국이었다면 절대로 뜨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클랜시 브라더스의 다른 멤버들, 아니 아일랜드 포크 음악계 전반에 걸쳐서 외모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고 오직 음악적 능력에 따라서만 좌우되는 분위기가 퍼져 있지만, 토미 메이컴은 그 경우가 특히 심한 케이스. 여기 있는 사진들은 '''그나마 잘 나온 것'''을 올려 놓은 것이다. 아일랜드 포크 음악계에서는 절대로 아티스트를 외모로 평가하지 않으므로, 한국 아이돌 가수 평가하는 잣대로 토미 메이컴을 무슨 골룸이나 몬스터로 취급하는 짓거리는 하지 말자.
메이컴은 클랜시 형제들처럼 탈모는 없다. 1970년대 리엄과 듀엣으로 활동하던 시절에, 리엄은 이미 (아직 40대 초반인데도) 머리가 거의 다 빠져서 마스코드인 흰 모자를 푹 눌러 쓰고 다니던 시절에 메이컴은 (당대에 유행하던) 장발 스타일을 하였을 정도. 또 결정적인 것이 키가 굉장히 크다. 정확한 수치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클랜시 형제들과 나란히 서 있으면 머리 하나는 더 있다. '''메이컴과 톰 클랜시가 나란히 서 있으면 마치 유이와 써니가 나란히 서 있는 것을 보는 것 같을 정도이다.'''
메이컴 목소리는 로이킴 같은 중저음이지만, 결코 로이킴처럼 감미로운 목소리는 아니다. 메이컴 목소리는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아주 쫀득쫀득하고 탄력성 있는 목소리라 할 수 있겠다. 마치 쥐어 짜내는 듯한 목소리인데, 음역대가 비슷한 패디 클랜시가 좀 두루뭉술한 것과는 달리 메이컴 목소리는 아주 깔끔하고 명료하며, 강하고 힘찬 의지가 나타난다 할 수 있겠다.
메이컴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아일랜드 포크 음악계 전체의 먼치킨'''이라 할 수 있겠다. 단순히 보컬과 악기 연주 실력 때문만이 아니라, 메이컴의 가톨릭 신앙과 반영 저항의식, 그리고 거기에 입각하여 작사 및 작곡된 수많은 곡들에 나타나는 '아일랜드스러운' 정신이 미친 영향은 실로 지대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메이컴이 먼치킨일 수 있는 것은 다량의 작사, 작곡 때문. 메이컴이 없었다면 아일랜드 포크 음악계의 레퍼토리는 반토막이 날 것이다. 단순히 메이컴이 많은 곡을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 메이컴이 지은 곡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창작된 곡들이 많이 있기 때문.
1. 개요
'''1932년 11월 4일~2007년 8월 1일'''
국내 음악 사이트를 보면 토미 마켐으로 잘못 읽는 경우가 많은데, 정확한 발음은 토미 '메이컴' 이다. 1음절 강세를 받고 2음절은 슈워화된다.
북아일랜드의 영화배우, 가수, '''작곡가''', 시인. 아일랜드 포크 음악계의 소녀시대와 같은 존재인 클랜시 브라더스 멤버 출신이며, 이후 아일랜드 포크 음악계의 전설이 된 존재이다. 엄밀히 말해 클랜시 브라더스의 다른 멤버들과는 혈연관계가 전혀 없으니 '클랜시 브라더스' (클랜시 형제들)에 들어가진 않으므로, 그룹의 공식 이름도 '클랜시 형제들과 토미 메이컴' 인 것.
그러나 토미 메이컴 없는 클랜시 브라더스는 한 마디로 팥 없는 찐빵인 것이, 토미 메이컴 탈퇴 이후 클랜시 브라더스는 계속 하향곡선을 그렸다. 토미 메이컴을 대체하기 위해 들어온 멤버들은 토미 메이컴만큼의 역량을 발휘하지 못했기 때문. 반면 토미 메이컴은 탈퇴 이후로도 별다른 몰락이나 쇠퇴를 보이진 않았고, 오히려 1970년대 리엄 클랜시와 함께 듀엣으로 활동했을 때는 아일랜드 차트 1위에 오르기까지 했으니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토미 메이컴은 다른 멤버들과 달리 '''작곡가를 겸하는 싱어송라이터'''이다. 토미 메이컴은 작사, 작곡을 본인이 직접 할 수 있으며 이렇게 자기가 쓴 곡들 가운데 상당수는 본인이 부른 버전뿐만 아니라 다른 가수들이 부른 리메이크 버전이 존재한다. 뒤에 설명하겠지만 <Four Green Fields>나 <Farewell to Carlingford> 같은 몇몇 곡들은 아예 다른 고전 포크송들처럼 아일랜드 포크 음악계 전반에 걸쳐 널리 불릴 정도이다.
토미 메이컴은 다양한 악기들을 다루는데, 다음과 같다.
- 틴 휘슬: 다루는 빈도수는 밴조에 비하면 낮지만, 토미 메이컴이 클랜시 브라더스 멤버로 활동하는 동안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했던 파트는 밴조가 아닌 틴 휘슬이라 할 수 있겠다. 실제로 토미 메이컴은 클랜시 브라더스 활동 초기에는 틴 휘슬 전담이었다.
- 밴조: 틴 휘슬보다는 늦게 시작했지만, 토미 메이컴에게 가장 중요한 악기. 메이컴은 기타를 거의 치지 않고 대부분의 반주를 밴조로 한다. 보통 포크 가수라 하면 기타를 들고 다니는 모습을 상상하는데, 토미 메이컴은 기타가 아닌 밴조를 들고 다니는 것이다. 토미 메이컴의 밴조는 지판이 긴 5현짜리 밴조이다.
- 드럼: 클랜시 브라더스 첫 앨범을 제외하면 공식적으로 연주한 적은 없지만, 이 앨범에서 리듬을 잡아 주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메이컴의 드럼 소리였다.
- 바우란(아일랜드 전통 타악기): 1970년대 솔로 활동을 할 때부터 치기 시작했다. 자주 치는 편은 아니지만, 메이컴 단독 앨범이나 메이컴과 리엄 클랜시 듀엣의 앨범에서는 리듬을 잡아 주는 역할을 한다.
- 백파이프: 스코틀랜드식 백파이프와 거의 다를 것이 없는 그레이트 워파이프(great warpipe)를 다룬다. 공식 앨범에서 연주한 적은 많지 않지만, 아일랜드식 소형 백파이프인 일리언 파이프(Uillean pipe)가 주류인 아일랜드 포크 음악계에서는 굉장히 특이한 케이스.
- 기타: 메이컴이 주로 다루는 악기는 밴조이지만, 아주아주 가끔 기타를 치기도 했다. 대체로 리엄 클랜시와 듀엣으로 활동할 때, 기타가 메인 악기인 리엄 클랜시가 콘서티나를 잡는 경우 리엄 것을 친 것으로 보인다.
2. 상세
북아일랜드 출신이지만 가톨릭 신자이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정말 중요한 사실이다. 북아일랜드는 다수의 개신교 신자(친영파)와 소수의 가톨릭 신자(반영파)의 대립이 아주 격렬한 곳으로, 어떤 종파를 믿느냐에 따라 정치 성향과 사고방식이 천지차이이다.
메이컴이 작사 및 작곡한 곡들을 보면 메이컴 본인의 가톨릭 신앙에서 비롯된 영국 제국에 대한 저항 의식이 강하게 드러나는 곡들이 많이 있다. 메이컴의 대표곡인 <Four Green Fields>가 대표적인 작품. 아니 애초에 클랜시 브라더스 레퍼토리 자체가 영국 제국에 대한 저항 의식을 고취하는 곡들이 많이 있다. 클랜시 브라더스의 첫 앨범은 대놓고 그런 곡들만 모아 놓았을 정도.
메이컴은 여덟 살 때부터 15년간 다니던 성당의 성가대원이었다. 그리고 (어떻게 만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리엄 클랜시와 절친이기도 했다. (메이컴이 3살 위이긴 한데, 서양 사람들은 3살 위면 형도 아니다.) 23세가 되던 1955년 미국으로 건너갔는데, 이 때는 연기 활동을 하기 위해서였다고. 그런데 연기판에 뛰어들기 전 알바 자리를 전전할 때, 인쇄소에서 2톤짜리 프레스에 손이 깔리는 대형사고를 당하게 되었다. 이 사건 직후, 마찬가지로 미국으로 건너온 절친 리엄, 그리고 그 형들인 패디, 톰과 함께, 1956년 첫 번째 앨범을 발매하면서 음악계에 데뷔하게 되었다.
메이컴은 1959년 첫 번째 앨범에 수록된 곡들을 다시 녹음할 때 보컬을 불렀을 뿐만 아니라 틴 휘슬과 드럼을 맡아 연주했으며, 이후 클랜시 브라더스 멤버들 가운데 유일하게 두 가지 악기(틴 휘슬 및 밴조)를 다루는 멤버로써 아주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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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경의 토미 메이컴. 손에 들고 있는 악기가 틴 휘슬이다.
메이컴은 1961년에 첫 솔로 앨범을 발매했다. 1960년대 초반에는 그룹이 문자 그대로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하는 바람에 솔로 앨범을 내지는 않았지만, 1966년 <Freedom's Sons> 앨범에 자작곡을 두 곡이나 수록하면서 본격적으로 개인 커리어를 쌓게 된다. 이후 나온 클랜시 브라더스 앨범들을 보면 메이컴의 자작곡이 수록된 경우가 많이 있는데, 이 가운데 1968년도 앨범인 <Home Boys Home>에 수록된 <Four Green Fields>와 <Sings of the Sea>에 수록된 <Farewell to Carlingford>는 이후 메이컴 본인의 솔로 앨범뿐만 아니라 다른 아일랜드 포크 아티스트들 앨범에도 여러 차례 수록되었다.
아일랜드 포크 음악계에서 큰 인기를 끈 <Four Green Fields>의 경우는 아일랜드를 의인화하여 아일랜드의 네 지역(얼스터, 먼스터, 코노트, 렌스터)을 강탈해 간 'stranger' (이상한 놈들), 곧 영국 제국에 대한 강력한 저항 의식을 유발하고, 여전히 영국 치하에 있는 북아일랜드의 절망적인 현실을 폭로하며, 그런 속에서도 밝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는 곡이다. 1970년대 우리 한국의 아침 이슬이나 임을 위한 행진곡에 독립군가를 합쳐 놓을 것이라 보면 되겠다. 토미 메이컴이 북아일랜드 출신 반영파 가톨릭 신자이기 때문에 이러한 걸작품이 등장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렇게 네 멤버들 가운데 특히 돋보이는 걸출한 활약을 보이던 메이컴은 1968년에 두 번째 개인 앨범을 발매했고, 이 무렵 1년 후 탈퇴하여 솔로로 활동하겠음을 예고한다. 그리고 1968년 말 마지막 앨범을 녹음하고, 1969년 4월 그룹을 탈퇴했다.
그룹을 탈퇴한 메이컴은 1974년까지 다량의 작곡과 앨범 발매를 통해 아주 성공적인 솔로 커리어를 이어 나갔다. 메이컴의 작곡 활동이 본격적으로 빛을 발한 것도 이 무렵이다. 게다가 이 곡들을 대부분 직접 불렀다는 것 또한 주목할 만하다. 어떤 곡을 가장 잘 연주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작곡자 자신일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Four Green Fields>처럼 정치적인 곡만 지은 것은 아니고, 다양한 주제의 곡들을 지었다.
1975년 토미 메이컴은 캐나다에서 TV 프로그램 MC로 잘 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 무렵 절친인 리엄 클랜시가 완전히 꿈이고 희망이고 없는 상황에서 메이컴을 만나게 되었다. 당시 리엄 클랜시는 클랜시 브라더스의 공중분해에 이어, 엄청난 빚을 지고 빛더미에 올라앉아 결국 파산을 신청하는 등 상황이 완전 막장이었다. 오죽하면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치즈 광고를 찍었을 정도. 이런 상황에서 잘 나가고 있던 절친 메이컴을 만났고, 메이컴이 MC를 맡았던 프로에 함께 출연했다.
이 때까지만 해도 리엄 클랜시는 자신이 아일랜드 음반 차트 1위에 오를 것이라고는 예측을 전혀 하지 못했으나...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메이컴과 리엄은 함께 방송에 출연한 것을 계기로 듀엣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룹 이름은 따로 없고 그냥 '토미 메이컴과 리엄 클랜시' 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스코틀랜드인 PD인 아치 피셔와 손을 잡고 첫 듀엣 앨범을 발매했고, 싱글도 냈다. 그런데 이 싱글이 '''아일랜드 음반 차트 1위를 차지하게 된다!''' 빚더미에 올라앉아 있던 리엄 클랜시에게는 문자 그대로 초초초초초대박이었을 뿐만 아니라, 1970년대 후반의 아일랜드 포크 음악계의 판도가 통째로 뒤집어지는 셈이었던 것.
클랜시 브라더스 시절의 인기가 하도 엄청났던 터라 묻힐 수 있지만, 사실 클랜시 브라더스가 1960년대에 구가했던 인기보다 토미 메이컴과 리엄 클랜시 듀엣이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반에 걸쳐 구가했던 인기가 더 엄청나다. 토미 메이컴과 리엄 클랜시는 이렇게 아일랜드 포크 음악계를 완전히 주도하며 엄청난 흥행을 거두었다. 1979년에는 차트 10위권에 두 번이나 오를 정도였고(3위 한 번, 7위 한 번) 1981년에는 '음악 프로그램+사극' 형태의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했다.
이렇게 엄청난 성공을 거둔 토미 메이컴과 리엄 클랜시는 1984년 클랜시 브라더스 1기 체제로 잠시 복귀하여, 패디와 톰 클랜시와 함께 리유니언 투어(Reunion Tour)에 뛰어들게 되었다. 이 리유니언 투어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 미국 뉴욕의 링컨 센터에서 공연을 할 때는 전석 매진을 기록하기도 했고, 아일랜드 RTE 방송국의 인기 토크쇼인 <The Late Late Show>에도 출연했으며, 심지어 스코틀랜드 방송에 출연하기도 했다.
이렇게 1985년 말까지 큰 흥행을 거두고, 메이컴과 리엄은 다시 듀엣 활동을 재개했으며 1986년에는 앨범을 발매했다. 이후 2년간 잘 활동하던 이 듀엣은 1988년 서로의 합의 하에 해체된다. 둘 다 40년 이상 절친이었는데 싸웠을 리는 없고, 서로가 솔로 활동에 대한 의지가 있으니 서로 합의하여 해체를 결정한 것.
이후 토미 메이컴은 솔로 활동을 재개했는데, 이 때 나온 앨범들을 보면 <The Town I Loved So Well>(마찬가지로 북아일랜드 출신 가톨릭 신자인 필 쿨터(Phil Coulter) 작사 및 작곡. 영국 통치 하에 있는 북아일랜드의 절망적인 현실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표현한 곡)이나(1989년도 앨범 <Rolling Home>에 수록), <The Winds are Singing Freedom>(메이컴 부인인 메리 메이컴 작사 및 작곡. 내용은 <The Town I Loved So Well>과 비슷하나, 더 직설적으로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같이 정치적으로 아주 강력한 메시지를 담아내는 곡들이 많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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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경의 토미 메이컴.
1992년 메이컴의 세 아들인 코너, 셰인, 로리 메이컴은 3인조 그룹인 메이컴 브라더스(The Makem Brothers)를 조직하여 음악계에 데뷔하였다. 이 셋은 토미 메이컴과 함께 앨범 작업을 하기도 했다. 1998년 토미 메이컴은 마지막 정규 앨범을 발표했으나, 이후로도 공연은 계속해서 했다. 아마도 아들들에게 정규 앨범을 발표할 기회를 주기 위한 차원인 듯.
메이컴은 2000년대 중반까지도 계속해서 공연을 했으나, 이 무렵 폐암 진단을 받게 된다. 그런데도 진짜 엄청난 투혼을 발휘하여 공연을 강행했던 것이다. 아들들과 함께 공연을 하는 경우도 많이 있었고. 메이컴은 2007년 8월 1일 미국 뉴햄프셔 주의 도버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죽음을 바로 눈앞에 두고도 공연에 나서 열창을 했다! 2007년 초까지도 진짜 엄청난 투혼을 발휘하여 공연에 나선 걸 보면... 그야말로 먼치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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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의 토미 메이컴.
메이컴의 세 아들로 구성된 메이컴 브라더스는 2004년 리엄과 미키 스페인 형제를 영입하여 이름을 메이컴&스페인 브라더스로 개편했다. 현재 세 메이컴 형제들 가운데 한 명이 탈퇴하긴 했지만, 여전히 4인조로 날아다니는 중.
메이컴은 외모지상주의가 판을 치는 한국이었다면 절대로 뜨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클랜시 브라더스의 다른 멤버들, 아니 아일랜드 포크 음악계 전반에 걸쳐서 외모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고 오직 음악적 능력에 따라서만 좌우되는 분위기가 퍼져 있지만, 토미 메이컴은 그 경우가 특히 심한 케이스. 여기 있는 사진들은 '''그나마 잘 나온 것'''을 올려 놓은 것이다. 아일랜드 포크 음악계에서는 절대로 아티스트를 외모로 평가하지 않으므로, 한국 아이돌 가수 평가하는 잣대로 토미 메이컴을 무슨 골룸이나 몬스터로 취급하는 짓거리는 하지 말자.
메이컴은 클랜시 형제들처럼 탈모는 없다. 1970년대 리엄과 듀엣으로 활동하던 시절에, 리엄은 이미 (아직 40대 초반인데도) 머리가 거의 다 빠져서 마스코드인 흰 모자를 푹 눌러 쓰고 다니던 시절에 메이컴은 (당대에 유행하던) 장발 스타일을 하였을 정도. 또 결정적인 것이 키가 굉장히 크다. 정확한 수치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클랜시 형제들과 나란히 서 있으면 머리 하나는 더 있다. '''메이컴과 톰 클랜시가 나란히 서 있으면 마치 유이와 써니가 나란히 서 있는 것을 보는 것 같을 정도이다.'''
메이컴 목소리는 로이킴 같은 중저음이지만, 결코 로이킴처럼 감미로운 목소리는 아니다. 메이컴 목소리는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아주 쫀득쫀득하고 탄력성 있는 목소리라 할 수 있겠다. 마치 쥐어 짜내는 듯한 목소리인데, 음역대가 비슷한 패디 클랜시가 좀 두루뭉술한 것과는 달리 메이컴 목소리는 아주 깔끔하고 명료하며, 강하고 힘찬 의지가 나타난다 할 수 있겠다.
메이컴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아일랜드 포크 음악계 전체의 먼치킨'''이라 할 수 있겠다. 단순히 보컬과 악기 연주 실력 때문만이 아니라, 메이컴의 가톨릭 신앙과 반영 저항의식, 그리고 거기에 입각하여 작사 및 작곡된 수많은 곡들에 나타나는 '아일랜드스러운' 정신이 미친 영향은 실로 지대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메이컴이 먼치킨일 수 있는 것은 다량의 작사, 작곡 때문. 메이컴이 없었다면 아일랜드 포크 음악계의 레퍼토리는 반토막이 날 것이다. 단순히 메이컴이 많은 곡을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 메이컴이 지은 곡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창작된 곡들이 많이 있기 때문.
3. 음반
- Songs of Tommy Makem (1961)
- Tommy Makem Sings Tommy Makem (1968)
- In the Dark Green Wood (1969)
- The Bard of Armagh (1970)
- Love Is Lord of All (1971) - 이상 2개 앨범이 합본으로 1995년에 재발매되었다.
- Listen...for the rafters are ringing (1972)
- Recorded Live - A Roomfull of Song (1973)
- In the Dark Green Woods (1974)
- Ever the Winds (1975)
- 4 Green Fields (1975)
- Lonesome Waters (1985)
- Rolling Home (1989)
- Songbag (1990)
- Live at the Irish Pavilion (1993)
- Christmas (1995)
- Ancient Pulsing Poetry With Music (1996)
- The Song Tradition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