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울리노 알칸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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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패니시 필리피노[3] 축구 선수로 스페인과 필리핀에서 활동했다. 그가 스페인에서 뛴 클럽은 FC 바르셀로나이며 클럽 초창기의 레전드로 꼽힌다.
각종 매체에서 아시아 축구선수계 레전드, 유럽진출 아시아 선수 1호라는 수식어로도 추앙받지만, 후술할 그의 출신이력을 보면 아시아 선수로 분류해야 하는지 논란이 따르는데다[4] 아시아 내에서도 평가는 차범근에게 밀리는 편이다. 이유는 알칸타라는 1910~1920년대에 활약한 선수라 기록도 찾기 힘들고, 무엇보다 뛰었던 리그가 전국구 리그가 아닌 주립 리그였던 게 크다. ESPN에서 2015년 내놓은 아시아 선수 TOP10에는 알칸타라가 포함되어 있는데, 차범근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는 점이 공식적인 근거.#[5]
2. 바르셀로나 입단
필리핀에서 산 세월은 그리 길지 않으며, 그의 나이 3살 때 가족을 따라 바르셀로나로 건너갔다.# 1910년에 축구의 길로 들어가 FC 바르셀로나에 창단자인 조안 감페르가 파울리노를 유스 팀에 영입시켜 뛰었고, 1912년에 15살 나이[6] 로 Catala를 상대로 성인 팀에 첫 데뷔를 치른다.
이는 아직까지도 FC 바르셀로나 역사상 최연소 데뷔기록으로 남아있다.
첫 데뷔 무대에서 헤트트릭을 달성하여 9 - 0 대승을 거두었다. 리그 경기 첫 출장은 1912년 8월 14일의 사바델과의 경기였는데 이 경기에서도 해트트릭을 기록했다. 당시 바르셀로나 회장은 저 삐쩍마른 선수는 누구냐며 감탄을 했다고 한다.
이후 1915년에서 1924년까지 카탈루냐 대표팀에서 뛰었다. 이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3. 필리핀 리그 생활
리그 생활 도중에 알칸타라는 1916년부터 1918년까지는 필리핀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 보헤미안 스포팅 클럽(Bohemian Sporting Club)이란팀에서 뛰면서 필리핀 국가 대표로도 1년 정도 활약했다. 특히 1917년 아시안 게임의 전신인 극동 선수권 대회에서 맹활약하며 일본을 15-2로 격파하면서 일본 국대의 최다 실점 기록을 갱신해주었고 필리핀 대표팀에게도 최다 점수 차 승리로 남아있다. (그리고 반세기 뒤인 1967년에 치뤄진 올림픽 예선에서 일본은 필리핀을 15-0으로 대파하며 이 경기에 대한 설욕을 갚았다.)
1917년 경기의 스코어 기록은 남아있지만, 어떤 선수들이 득점을 기록했는지에 대해서는 불명확하다. 이 중 한 골은 알칸타라의 골로 확인되었기에 공식적으로는 1골을 득점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4. 바르셀로나 복귀
바르셀로나로 돌아온 그에게 영국 출신 감독 그린웰은 수비수 보직을 주었으나 바르셀로나 클럽 멤버들 요구로 다시 공격수로 복귀하였다. 1920년에는 스페인 올림픽 대표로 선발되었으나, 당시 그는 의학 시험을 보기 위해 팀에의 합류를 거부한다. 이후 1921년에 데뷔전을 치뤘으며, 스페인 대표팀에서의 기록은 5경기 6골.
5. 은퇴 그 후
알칸타라는 1927년 7월 5일 은퇴 후 의사면허에 합격 의사가 되었다. 바르셀로나와 스페인이 그를 위해 은퇴 경기를 마련하였고 알칸타라가 은퇴하는 걸 아쉬워했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그가 은퇴하고 나서인 1928~29 시즌부터 통합 프로리그인 라리가가 열리게 되었다.
다섯 번의 스페인컵 우승과 10번의 카탈루냐 리그 챔피언이었다. 그는 그의 전공을 살려 의사가 되려 했지만 스페인이 놓아주질 않았다. 1931년부터 3년간 클럽 이사로서 활동했고, 1951년에는 국가 대표팀의 코칭 스태프가 된다. 그가 있는 동안 스페인 국가 대표팀은 스위스, 벨기에, 스웨덴과의 3경기 에서 1승 2무를 기록했다.
그 뒤에 바르셀로나 구단 행정을 맡기도 하면서 조용히 살아가다가 1964년 2월 13일 바르셀로나에서 67살로 세상을 떠났다.
6. 기록
6.1. 대회 기록
- 보헤미안 스포르팅 클럽 (1916~1918)
- 필리핀 챔피언십: 1916-17, 1917-18
6.2. 그 외 기록
- 그는 비유럽 태생으로 스페인 국가 대표가 된 최초의 선수이기도 하다.
- 알칸타라가 바르셀로나에서 남긴 기록은 최연소 출장 기록이고 또 하나는 개인 최다 골이다. 기록은 무려 399경기 395골, 이후에 개인 최다 골 기록은 2015년이 되어서야 리오넬 메시에 의해 깨졌다. 그러나 메시가 396, 397호 골을 넣을 때가 464번째 경기였으므로 알칸타라의 경기당 1골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다. 물론 알칸타라가 활약한 리그는 전국구 리그가 아닌 주립 리그라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알칸타라 은퇴 이후에 라리가가 출범하였다.
- 알칸타라는 그의 기념비적인 두 사건으로 인해 잊을 수 없는 선수가 되었다. 하나는 1922년 4월 30일, 프랑스와의 경기에서 35 야드 거리에서 골을 넣었는데, 네트가 찢어진 것이다. 그는 그 경기 후에 네트 파괴자라는 애칭을 얻었다. 두번째는 같은 해 5월 20일, Les Corts stadium에서 또 네트를 찢었다는 것이다. 물론 옛날 네트 재질이 지금과는 달랐기에 찢어지는 게 말도 안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애칭이 생길 정도면 당시에도 인상 깊었다는 의미가 된다.
[1] 태어난 곳은 필리핀이었지만 후에 국적을 스페인으로 바꿨다.[2] FC 바르셀로나 공식 홈페이지 기준 출처[3] 스페인과 필리핀의 혼혈이라는 의미. 그는 1896년 필리핀 일로일로 시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스페인의 군인 출신이었고, 어머니는 알로알로 시티에서 살던 현지인.[4] 순수 아시아 출신 선수로 범위를 좁히면 일본의 오쿠데라 야스히코가 최초의 유럽진출 선수로 거론된다.[5] TOP10 안에는 한국, 이란, 일본 각 2명과 호주, 이라크, 사우디, 스페인/필리핀 각 1명이 이름을 올렸다. 사족으로 손흥민과 카가와 신지 등 선정 당시 현역으로 활약중인 선수들이 제외된 것을 보아 커리어가 마무리된 선수 위주의 선정으로 추정된다.[6] FC 바르셀로나 최연소 출장 기록을 가지고있다. 리오넬 메시는 클럽 역사상 세번째 최연소 선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