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베즈 무샤라프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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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베즈 무샤라프(우르두어: پرويز مشرف Pervez Musharraf, 1943년 8월 11일 ~ )
파키스탄의 전 대통령이자 독재자. 의원내각제 국가인 파키스탄에서 대통령으로서 권력을 휘두른 인물이다. 2001년부터 2008년까지 파키스탄의 대통령을 지냈다.
2. 생애
영국 식민통치기인 1943년 인도의 수도 델리에서 태어나서 인도와 파키스탄의 서로 분리독립한 이후 부모를 따라서 파키스탄으로 건너온 무하지르이다. 1964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포병장교로 군 생활을 시작했고, 특수부대 SSG 등 요직을 거친 다음 1991년 장성으로 진급했다. 중장 시절이던 1998년 나와즈 샤리프 총리에게 신임을 얻으면서, 파키스탄 육군 참모총장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1999년 카길 전쟁에서 파키스탄군이 수천명의 전사자를 내면서 패배하자, 무샤라프 참모총장과 샤리프 총리간의 사이가 벌어져서, 패배의 책임을 누가 지느냐에 대해서 서로가 서로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결국 열받은 샤리프 파키스탄 총리는 무샤라프 참모총장을 해임했고, 무샤라프는 군사 쿠데타로 반격했다. 무샤라프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임시헌법령을 발동하여 정권을 장악하면서 독재자가 되었다.
무샤라프의 쿠데타에 대해서 미국과 서방진영은 비난을 퍼부었고, 파키스탄은 국제적으로 고립되었다. 그러나 불과 2년 뒤인 2001년 9.11테러가 일어나자 모든 상황이 바뀌었다. 알 카에다가 은신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무력공격을 결정한 미국의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안전한 후방기지를 확보하기 위해서 파키스탄에 손을 내민것이다. 무샤라프가 잔인한 군부독재자에서 하루 아침에 테러와의 전쟁에 함께하는 믿음직한 동맹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미국은 모든 제제를 해제하고, 그동안 유보해 두었던 무기수출을 허용하는 등 무샤라프 정권에 대한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미국 입장에선 파키스탄의 이웃나라인 아프가니스탄에서 ‘테러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는 마당에, 그 전진기지로 삼은 파키스탄에서 정치적 불안이 계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계산 때문이였다.
이러한 미국과의 협력관계와 그의 독재로 인해 국내외에서 그는 많은 적을 만들었고 수차례에 걸쳐 그에 대한 암살 시도가 있었다. 2003년 12월 14일 무샤라프 대통령 일행이 지나던 다리에 장착돼 있던 원격 조정 고성능 폭탄이 터졌지만 폭탄은 차량 행렬이 지난 뒤에야 터져 암살은 실패로 돌아갔다. 폭발이 지체된 것은 무샤라프의 신변을 염려한 미국의 정보팀이 지원한, 원격신호 차단 장비 덕이었다.
2003년 12월 25일에는 2명의 자살폭탄 테러범이 각각 트럭을 타고 무샤라프의 리무진을 향해 돌진했다. 그러나 차량이 가까스로 무샤라프를 비껴갔고, 대신 테러범 2명을 포함한 15명이 숨지고 46명이 다쳤다. 이런 식으로 무샤라프는 2003년 4월 카라치에서 두 차례의 암살 시도에서 벗어난 데 이어서 2003년에만 무려 4차례의 암살 위기를 겪기도 했다.
무샤라프는 2004년에 간선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었지만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것을 이유로 자신의 독재를 정당화시켜 국내외의 많은 비난을 받게 되었. 특히 그를 몰락하게 만든 시위가 일어나게 된다. 2007년 무샤라프를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는데 이 시위에 무샤라프에 의해 축출되었던 나와지르 샤리프 전 총리와 망명 생활을 했던 베나지르 부토 전 총리도 반정부 시위에 가담하여 파키스탄 정국은 굉장히 혼란스러운 상황에 처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무샤라프는 2007년 9월 재선을 전제로 육군 참모총장직에서 사임하여 공식적으로 군복을 벗게 되었으나, 2007년 10월 대통령 선거에서는 야당의 참가가 제한된 가운데 간선 선거에서 97%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대신 그는 국민들을 무마하기 위해 부토 전 총리를 사면하고 귀국을 허가했다.
정국 혼란이 계속되자 그는 의회를 해산하고 비상사태를 선포하는 한편 2008년 1월 조기 총선을 약속했으나, 부토 총리가 암살되는 일까지 일어나게 된다. 2007년 말 파키스탄의 총리를 지낸 여성 정치인인 베나지르 부토가 지지 집회에 참석했다가 암살을 당했다. 파키스탄 당국은 알카에다 등 테러조직을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했지만, 부토 지지자들 사이에선 정적이던 페르베즈 무샤라프 당시 대통령의 암살공작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이에 지지자들이 더 분노하여 무샤라프에 대한 비난이 거세지며 파키스탄은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 되었다. 결국 이러한 이유로 총선은 연기되었고 2008년 2월 치러진 총선 결과 야당이 압승을 거두었고 무샤라프 대한 사임 압력이 더욱 거세졌다.
두 개의 주요 당으로 이뤄진 파키스탄 집권연정은 무샤라프 대통령이 사임하지 않을 경우 헌정질서 파괴 등의 이유로 탄핵 절차에 들어가겠다고 경고했다. 이에 페르베즈 무샤라프는 결국 백기를 들고, 탄핵 절차 개시를 하루 앞둔 시점에 tv생중계를 통한 대국민연설에서 자신의 미래를 국민의 손에 맡긴다며 사임을 공식 발표했다.
그가 이렇게 무력하게 사퇴한 이유는 파키스탄 인민당 등이 주도하는 집권연정이 2008년 2월 총선에서 대통령 탄핵이 가능한 상하원 3분의 2에 육박하는 의석을 확보했고 자신의 지지세력에서도 이탈자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무샤라프의 권력기반인 군부와 정보부가 중립을 선언하고 미국마저 등을 돌리면서 무샤라프는 결국 사임으로 내몰리게 됐다.'''"국가를 위해 사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결국 물러난 이후에 그는 2014년 3월 31일 특별 법원에서 반역 등 5개 혐의로 정식 기소됐다 그 중에서도 부토의 암살이 정말로 무샤라프에 의한 암살인지에 대해서 상당히 많은 관심이 모이고 있는 상황이다. 1947년 건국 이래 군부가 집권해 온 파키스탄에서 고위 군 장교가 법정에 출석한 것은 처음이라고 한다.
2017년 7월 27일에 마이니치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무샤라프는 2002년에 인도와 무력 대치할 당시 핵무기공격(!)을 검토했다고 밝혔다. #
그리고 2019년 12월 17일에 특별 법원에 의해 사형이 선고되었다. #
하지만, 고등법원이 이를 사형 선고를 무효라고 뒤집었다.#
그러나 무샤라프는 이러한 법원의 사형선고를 떠나서 사형이 집행될 가능성은 없는데, 이미 나이 70을 넘겼기 때문이다. 이슬람 법에서 나이 70넘으면 그만큼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으니 사형시킬 수 없다라고 하기 때문. 사담 후세인도 이래서 만 70살이 되는 2007년을 딱 이틀 남겨두고 얼른 사형을 선고하고 교수형시켰다. 비록 재판으로 사형이 선고된 것은 아니고 잠적 도주 중에 총살된 무아마르 카다피도 후세인과 같은 69살이었다.
3. 평가
군말없이 독재자이고 위에 서술하듯이 문제도 많지만 그나마 세속적인 정책을 취하여 여성 교육 확대 및 여러 모로 진보적인 정책을 취한 점은 높게 평가받는다. 물론 그가 물러난 뒤로 죄다 물거품이 되고 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