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담 후세인

 

'''역대 이라크 대통령'''
[image]
5대

6대

연합군 행정관
아흐메드 하산 알바크르

'''사담 후세인'''

제이 가너

<v|1>{{{#!wiki style="margin:-5px -10px;"[image]
<rowcolor=#FFF>'''대통령 시절 모습'''
'''말년'''
}}}
<colbgcolor=#000><colcolor=#FFF> '''이름'''
사담 후사인 압드 알마지드 알티크리티
(صدام حسين عبد المجيد التكريتي)[1]
'''생몰년'''
1937년 4월 28일 ~ 2006년 12월 30일[2]
'''임기'''
1979년 7월 16일 ~ 2003년 4월 9일
'''출생지'''
[image] 이라크 왕국 티크리트
'''사망지'''
[image] 이라크 바그다드
'''신체'''
186cm, 95kg[3], A형[4]
'''정당'''
이라크 바트당
'''종교'''
수니파 이슬람
'''배우자'''
사지다 탈파[5]
사미라 샤반다르
니달 알함다니[6]
1. 개요
2. 생애
2.1. 젊은 시절
2.2. 정계 입문
2.3. 부통령 시절
2.4. 대통령 취임
2.6. 극악한 독재자
2.9. 최후
2.10. 후세인 정권의 말로
3. 가족
4. 평가
5. 미디어에서
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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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라크정치인. 제 6대 대통령이자 독재자.
부통령 재직 시절에는 석유국유화를 주도면밀하게 시행하고 유가 부양에도 앞장서서 쿠데타와 잦은 내부 분란으로 바람 잘날없었던 이라크의 정국을 안정시키면서 유가부양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고유가로 얻은 수익을 바탕으로 사회인프라를 대대적으로 정비시켜서 이라크의 1인당 국민소득을 중상위권 국가로까지 성장시킨 매우 유능한 인물이었지만[7] 막상 대통령이 되고 나서는 '''부통령이었을 때와는 정반대의 판단력과 능력을 보이며 이란-이라크 전쟁걸프 전쟁 등 두 차례에 걸쳐 전쟁을 일으킴으로써 나라를 거덜내버렸고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된 인물이다.'''[8][9] 하지만 후세인이 축출된 이후 경제 문제 해결은커녕 치안 악화에 시달리다보니 이라크 내전 이후로는 후세인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의 수가 많다. 물론 후세인 정권이 저지른 폭정의 피해자들은 현 이라크의 상황에 대한 평가와 별개로 최소한 후세인 정권을 옹호하지는 않는다.
이름이 하필 '후세인'이라서, 국내에서 이를 잘 모르던 사람들 사이에서는 후세인(後世人 = 그러니까 후세의 인물)이라는 뜻으로 통했던 적이 있었다(…). 막상 또 널리 알려지니 '이름에 후세인이 들어가는 인물들은 모두 아랍계'라는 말이 널리 퍼졌는데, 재미있게도 미국의 제44대 대통령인 버락 오바마의 풀 네임에 '후세인(Hussein)'이 들어간다(…). 2008년 대선 당시에도 이 사실 때문에 오바마를 꺼림칙한 인물로 여긴 사람들도 실제 많이 존재했었다.
후세인(حسین)이란 이름 자체는 후세인의 삼촌인 하산 알 마지드가 지어준 것으로 '멋진, 아름다운'의 의미를 지니는데, 시아파의 성자인 이맘 후세인 이븐 알리의 비극적인 죽음을 기려 후세인이라는 이름을 쓰는 것. 아랍인뿐만 아니라 무슬림이라면 많이 사용하는 이름 중 하나로 후세인이라는 인물 자체는 우마이야 가문이 시도하던 칼리프의 세습제 전환에 반대하며 저항하다가 우마이야 왕조에 의해 죽음을 맞은 인물로, 키케로정몽주 비슷한 인물이다.

2. 생애



2.1. 젊은 시절


이라크 티크리트의 수니파 무슬림 중에서 하층민 출신이었다. 그의 생모 수브하가 매춘부였다는 중상모략도 있으나[10] 후세인의 고향인 알 아주마 마을은 매춘부도 없을 정도로 빈곤하고 낙후된 곳인 데다가(...) 썰 외에는 입증할 근거가 없다. 공식적으로 1937년 4월 28일에 태어났고 이후 이라크 공화국의 국경절로 지정되었으나 실제로는 1939년 7월 1일에 태어났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사담 후세인의 첫 아내인 사지다 하이알라 탈파가 1937년생인데 나이 많은 여자와 결혼하는 것을 불명예로 간주하던 이라크의 정서상 괜한 욕을 먹지 않기 위해 자신이 실제 나이보다 2살 많다고 조작을 했다는 설과 정계에서 나이 많은 경쟁자와 싸우는 것을 터부시하는 전통이 강하던 이라크 정계에서 활약하기 위해 자신이 연륜 있는 지도자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나이를 적당히 올렸다는 설이 있다. 그의 생부인 후세인 알 마지드의 운명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은데 후세인이 태어나기 전에 사망했다는 설, 수브하와 싸우고는 가출했다가 행방불명되었다는 설, 강도에게 살해되었다는 설이 중구난방으로 나돌고 있다.
어려서는 재혼한 어머니의 의붓아버지[11] 하지 하산 이브라힘은 후세인을 두들겨패며 그를 농사일과 양치는 일에 내몰았다. 교육조차 받지 못했던 후세인은 사촌인 아드난 탈파가 제대로 된 교육을 받는 것을 보고 크게 부러워했으며 주변으로부터 고아라는 이유로 많은 괴롭힘을 당했다. 결국 이를 견디다 못해 1947년이 집을 떠나 평소에 자신이 존경하던 이라크 왕국군 육군 소위 출신인 교사 외삼촌 하이랄라 탈파의 집으로 옮겼다. 하이랄라 탈파는 1941년 라쉬드 알리 반란에 참여했다가 군에서 면직되어 5년간 투옥된 경력이 있었다. 하이랄라 탈파는 후세인을 맞아들여 교육을 시켜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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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의 후세인
1950년대 초반에 하이랄라 탈파와 같이 바그다드로 이사했고 바그다드 교외의 알 크하르크에 살았다. 하이랄라 탈파가 부유한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에 후세인은 막노동이나 택시 호객꾼, 담배 행상 등을 하며 학비를 벌었고 심지어 남색 취향이 있는 남자들의 추파를 받고 몹시 괴로워했다고 하기도 한다. 후세인은 1953년과 1954년에 두차례 사관학교 시험에 응시했으나 낙방했고 이것이 친영파의 농간이라고 여겨 영국과 이라크 왕국에 대해서 굉장한 앙심을 품게 되었다. 이후 하이랄라의 집에서 훗날 대통령이 되는 아마드 하산 알 바크르를 비롯한 티크리트 출신 장교들이 자주 회합했는데 덕분에 후세인은 1958년 쿠데타를 주도하게 되는 이라크 군부의 장교들과 두루 인맥을 쌓게 되었다. 따라서 젊은 후세인은 아랍 통일의 이념을 가지고 반정부 활동에 참여했다. 이에 따라 시리아의 기독교도인 미셸 아플라크가 창설한 아랍 사회주의 부흥당, 즉 바트당(부흥당)[12]에 가입하여 초급 당원으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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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의 후세인
이때 이라크의 수상이었던 압둘카림 카심 정권과 대립각을 세웠다. 이집트 나세르 대통령의 아랍통일주의를 지지하는 민중들의 지원을 받아 쿠데타에 성공한 이라크의 카심이 아랍통일을 등한시하고, 서구와 협력하여 이라크 내정 발전을 꾀했기 때문에, 후세인이 몸담고 있던 바트당은 그를 반역자로 규정하였으며, 이에 따라 바트당은 카심 암살을 기획하였으나, 사담 후세인이 포함된 암살팀이 작전의 허술함으로 실패, 사담 후세인과 동료들은 부상을 입은 채로 시리아로 탈출하여 해외 망명생활을 시작한다.
이 시점에서 아플라크의 눈에 들어 바트당에서 주목을 받게 되고, 나세르 정권의 지원을 받아 이집트에서 학교에 다니며 망명 생활을 계속하였다. 이곳 카이로의 카스르 알닐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그는 공부에 열중했다.

2.2. 정계 입문


그리고 1963년의 이라크 군부의 쿠데타로 카심 정권이 붕괴되고, 압둘살람 아리프 정권이 들어서자 바트당과 후세인은 이라크에 복귀하였다. 그러나 아리프 정권의 우유부단한 정책과 내부 갈등 봉합 실패로, 바트당과 시아파 등 내부 세력과 대립국면에 들어갔으며, 이때 사담 후세인은 체포, 수감되었다. 후에 어렵지 않게 탈출하고 군부를 설득하여, 1968년 당시 대통령이었던 압둘 라흐만 아리프(전 대통령인 아리프의 형)에 대한 쿠데타를 결행, 바트당 정권이 집권하였다. 허나 이때만 해도, 사담 후세인은 두드러지는 인물은 아니었다.
당시 아랍 특유의 '''피의 복수'''[13] 관습을 의식하여, 치안첩보를 전담하는 '일반 사무국'의 수장 자리는 아무도 맡으려고 하지 않았다.[14] 그때 사담 후세인이 '악역을 맡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모든 책임을 지고 일하겠다'고 공언하여, 그가 일반 사무국, 즉 첩보치안기구의 수장이 된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호랑이에게 이빨과 날개를 달아준 셈이 되었다. 이 또한 스탈린이 아무도 맡지 않으려던 혁명 자금책(=은행, 열차 강도)을 맡아 레닌의 신임을 얻었던 것과 비슷하다.
후일 후세인이 비상식적인 짓을 하면서도 대책 없는 낙관에 빠져 있었던 이유가 이게 아닐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2.3. 부통령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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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크르와 후세인
이미 대통령으로 취임한 아흐마드 하산 알바크르 대통령을 비롯해, 군부의 수장이 된 하이랄라 탈파흐의 조카였던 사담 후세인은 첩보기구의 능력을 이용하여 반정부운동을 효과적으로 차단함과 동시에, 정적들의 약점을 잡아두기 시작했고, 내각 요인들 중에서 위협이 되거나 그리 판단되는 사람을 처형하거나 암살하는 작업을 통하여 바트당의 독재 권력을 강화시켜 나아갔다. 안으로는 바크르의 신임을 받으며, 대통령 집무실 바로 옆에 사무실을 두고 정권 수뇌부와의 연대를 더욱 키워 나아갔으며, 이리하여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부통령 자리에 오른다.
또한 부통령 자리에 오르면서 매우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고, 이는 당시 이라크의 국력신장에 큰 영향을 끼쳤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업적은 IPC(이라크석유조합)의 국유화를 들 수 있다. 이라크 석유조합은 서방 석유화학기업의 이라크 유전개발 조합으로서, 이라크 유전의 수익은 모두 그들이 나눠 가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국유화 여론은 1950년대 당대부터있었지만 이라크 정국이 1958년 이후로도 상당기간 혼란에 처해있던탓에 전면 국유화는 미루워졌던 상황인데 사담 후세인은 서방국가의 반발을 각오하고 IPC의 국유화를 단행하면서, 최악의 경우를 대비하여 소련이나 폴란드 등의 공산국가들, 프랑스 등의 일부 국가를 새로운 수출고객으로 준비해놓고, 서구의 위협에 대응하여 소련의 지원을 약속받는 등 매우 주도면밀하고 다방면에서 철저한 준비를 했다. 당시 전문가들조차도 놀랄 만큼 세부적인 면까지 파악하고 있었다고 한다.
석유조합의 국유화는 후세인의 의도대로 성공하였으며, 기존의 고객과 새로운 고객이 더하여 수출처는 늘어났고, 이라크의 재정수입은 엄청나게 불어나서 이에 따라 사담 후세인은 이렇게 벌어들인 오일머니들을 대규모 인프라투자 사업에 쓰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정책은 문맹퇴치, 고속도로와 전기사업, 전화보급, 여성의 사회참여 강화, 의무교육 확대, 과학기술 발전, 사막화되어 가던 이라크 국토를 다시 메소포타미아 시대의 옥토로 부활시키는 거대 프로젝트, 시아파와 쿠르드족에 대한 사회간접자본 우선보급을 통한 이라크 통합정책 등이 있었다. 이러한 정책은 서방세계에 매우 긍정적인 인상을 주었고, 이라크에 대한 시각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으며, 특히 의무교육과 문맹퇴치 운동은 성공리에 마무리되어, 아랍에서 문맹률이 최저인 국가가 되었고 유네스코에서 극찬을 받고 수상까지 하게 되었다.
바크르 대통령은 사담 후세인 부통령의 뛰어난 성과, 자신을 깍듯이 모시는 그의 예의바른 행동 등을 통해 후세인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었으며, 모든 것을 후세인에게 맡기고 자신의 측근들의 불만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거나 모른 채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담의 권력이 점차 강화되어가자, 이에 위기를 느낀 바크르 대통령이 사담에 대한 통제력을 회복하고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정치공작을 시도하기 시작했는데, 이라크의 분열된 바트당 통합과 국가통일에 대해 바르그 대통령이 시리아와 논의하기 시작한 것이 그 계기가 되었다. 바크르는 대통령이라는 대표성으로 이 논의에 적극적으로 나섬으로써, 차후 통일국가에서 사담 후세인을 제3인자로 끌어내리되, 하페즈 알 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을 제1인자로 삼으려는 방향으로 논의하였다. 그런데 알 아사드와 후세인 모두 실질적으로 통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하페즈 아사드는 이라크가 강대한 국력과 인구수로 시리아를 집어삼킬 것이라 생각했으며,[15] 사담은 바크르와 하페즈가 전면에 나선다면, 자신은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나버릴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에, 이에 개입하여 결국 통일논의는 결렬되었다.
사담은 자신에 대한 바크르의 견제가 확실해지자 결국 바크르에게 퇴임을 강요했고, 내각 구성원들과 군부마저 사담을 지지했다. 때문에 바크르는 표면적으로 건강과 가족들의 죽음 등으로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가 없게 되었다고 발표하는 동시에, 부통령 사담 후세인을 차기 대통령으로 지목하며 정권을 내놓고 하야하고 순순히 대통령 자리를 내준 바크르는 1982년까지 살다 68세를 일기로 조용히 죽었다. 그러나 대통령이 된 후세인은 '''점점 타락하기 시작한다.'''

2.4. 대통령 취임


대통령이 된 사담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당회의를 소집하는 것이었다. 보잘 것 없는 홀에서 삼엄한 경비 속에 열린 당회의에는 1천명의 당 간부들이 소집되었는데, 반역모의가 발각되었다는 당 개회연설로 참석자들이 당황하는 와중에 곧이어 다른 연설자가 당 중진 4명과 함께 시리아의 지령을 받고 후세인을 암살코자 했다는 자백문을 읽어내리면서 회의장이 완전히 얼어붙었고, 분위기를 파악한 몇몇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사담에 대한 충성맹세를 하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사담은 대표석에서 혼자 뻑뻑 시가를 피우며 참석자들에게 누가 상전인지 분명히 인상을 심어주고 있었다.
그런데 본격적인 연출은 아직 시작된 게 아니었다. 사담은 연설자에게 대표석 의자까지 내주면서 이름을 계속 불게 시켰고, 연단에서 내려가 진작에 고문으로 조작한 역적모의 자백을 경청했다. 자백이 전부 끝나자 사담은 다시 올라와 반역자들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약속하면서 이제는 자기 입으로 모의자 이름들을 한 번에 10명 씩 총 60여명의 이름을 읽어내리기 시작했다. 이 이름들 가운데에는 자신의 심복이자 바트당의 인텔리이며 후세인 집권을 도운 절친한 친구인 아드난 함다니도 끼어있었는데, 그의 이름을 읽다가 티슈로 눈물을 훔치는 것은 물론이고 숙청이 끝난 후 그의 유가족을 방문하여 새 집을 지어주는 등 무서운 연출력까지 보여주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참석자들은 자기 이름이 불리우지 않으려고 충성심을 과시하며 반역자들을 쏴죽이라느니, 지금까지 사담이 너무 관대했으나 이제는 바뀔 때가 되었다느니, 공산주의 러시아의 스탈린 식으로 대응을 하자느니 등 앞다투어 강경한 처벌을 외치기 시작했다. 이렇게 참석자들에게 거대한 공범 의식을 만들어내는 치밀한 모습까지 보였다.
사담은 이 숙청과정을 녹화하여 전국의 당 조직에 배포하여 시청케 함으로써 자신이 전권을 쥐었음을 과시하였는데, 오늘날 이 테이프가 완전히 남아있는 것은 없고 여기저기 흩어진 일부만이 전해지고 있다.
한편 이렇게 끌려나간 60여명 중 일부는 가혹한 고문만 당하고 살아나왔으나, 대다수는 처형되었고, 거기에 그치지 않고 그 심복들과 휘하 관리들까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숙청되었다. 특히 함다니는 이라크 기획부장관을 역임했기 때문에 사담 후세인의 경제개발계획을 함께 이끌어왔던 유능한 관료들이 많이 연루되어 죽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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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마르 카다피와 함께
'''절대권력은 절대부패한다'''고, 정작 대통령이 된 이후에는 부통령 시절의 치밀하고 심사숙고하며 예의바른 모습이 점차 사라지고, 권위적이며 즉흥적이고 앞뒤 생각 없는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후세인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처럼 갑자기 맛이 간 것도 아니기에,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행태인데, IPC국영화 시절에 보여주었던 그의 모습과는 반대되는 대표적인 것이 이란-이라크 전쟁이었다.

2.5. 이란-이라크 전쟁


이란-이라크 전쟁은 호메이니의 이란 혁명 이후, 이라크의 시아파에 가해지던 시아파 혁명 선동과 그에 따르는 온건 시아파 성직자 알 사드르의 반정부 항쟁 등에 대해, 내부적으로는 치안첩보의 강화를 통해 대처함과 동시에, 혁명 선동의 본거지인 이란에 대해 군사적인 승리를 거둠으로써, 정치, 외교적 우위를 명백히 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결행된 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분명 나름의 합리적인 근거를 갖고 추진한 것이기는 했다. 당시 이라크는 고유가로 국력을 착실히 키워 경제적으로 개도국의 수준을 충분히 넘어 이제는 어느정도 잘먹고 잘사는 국가가 되었고, 이러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군사력도 충실히 키웠지만 그럼에도 이란에 비하면 인구와 국토가 턱 없이 적은 나라였다.
이란이 제대로 마음먹고 부국강병을 추구할 경우에는 이라크가 뒤쳐질수밖에 없다는 불안감이 컸다. 이 상황에서 이란을 누르려면 기를 꺾을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호메이니에 대해 아직 확실하게 알 수 없는 상황이라 치명타를 입으면 국민들의 상태가 영 아니니 합리적으로 판단해서 협상 테이블에 앉을 거라고 기대하였다. 즉 초반에 이란의 기를 꺾어서 불리한 상황을 대등한 상황으로 바꾸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당시 이란군의 혼란 상황이나 어느 정도 준비된 이라크군의 상황을 감안하면 절대 비합리적이라고는 할 수 없는 판단이었다.
게다가 사담 후세인은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을 롤모델로 삼았다. 소비에트 폴란드 전쟁은 러시아 혁명과 뒤이어 벌어진 러시아 내전(적백내전)으로 혼란했던 러시아, 제1차 세계 대전을 막 끝내고 독일 제국으로부터 독립했던 폴란드 제2공화국과 독일-러시아 사이에 갑자기 생겨난 수많은 소국들(발트 3국,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등)이 혼란한 시점에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진 내부 충돌이 폴란드러시아가 개입하면서 정면 충돌로 발전했고, 결국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서구 열강의 지원을 받은 폴란드가 승리하여 폴란드 제2공화국소련의 공산주의 블록 확산을 저지하고 영토를 확장하였다. 사담 후세인은 폴란드 제2공화국을 승전으로 이끈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의 전략, 전술 운용에 감화를 느꼈다. 이란 혁명으로 혼란한 이란이 시아파 신정혁명을 중동 각국으로 수출하겠다고 덤비던 시점에, 이란의 길목인 이라크폴란드 제2공화국처럼 이란의 혁명 수출 기도를 눈앞에서 저지한다면 이라크중동 이슬람 국가들 사이에서 발언권이 커질 가능성이 높다. 사담 후세인은 이런 효과를 노리고 이란을 선제 공격한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이 것은 만들어진 국가의 통치자인 후세인의 오판이었다. 국민들을 강제로 끌고 가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 국가에서 통치를 너무 오래 하다 보니 상대도 그럴 거라고 착각을 심하게 한 것이다. 전쟁 전에는 이란군을 제대로 두들기면 국민 여론 때문에 알아서 협상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이란은 사실상 페르시안 민족 국가에 가까웠기에 전 국민이 애국심으로 단결했고, 호메이니는 초기의 열세에 기가 꺾이는 사람도 아니었으며, 게다가 이란과 이라크는 기본적인 규모가 달랐다. 이라크군은 초기 전역에서만 성과를 보였을 뿐 얼마 가지 않아 이란군의 반격에 밀려나 전황이 교착상태에 빠지면서 장기적인 소모전으로 흐르게 되었고, 또한 양국이 서로 전비를 댈려고 석유수출량을 경쟁적으로 늘리는 바람에 유가가 점차 하락세에 접어들면서 이란과 이라크 양국은 경제적으로 엄청난 손실을 입게 되었다. 결국 수니파 국가들의 지원을 등에 업어서 간신히 버티고 있던 후세인과 당시 이란 혁명으로 인해 국제적으로 고립이 심화되고 특히 전쟁 말기에 벌어졌던 도시간 탄도 미사일 공방전에서의 열세로 인해[16]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 여력이 바닥난 이란과의 이해타산이 맞으면서 종전을 맞이하게 된다.

2.6. 극악한 독재자


"비밀경찰 한 명이 내 살을 먹겠다며 손을 물어 뜯었다. 귀에 전기선을 연결해 전기고문을 했다. 담뱃불로 지지고 차마 다 얘기할 수 없다. 특히 콜라병에 앉게 하는 고문이 횡행했다. 이 고문을 받던 전직 경찰 간부 한 명은 항문이 터져 울면서 "차라리 죽여 달라"고 소리 쳤다. 이것은 단지 하나의 예다. 지금 우리는 수백만 건의 처형기록과 고문기록을 확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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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A 당원이자 이라크인권협의회 의장인 사타르 알 바이르의 증언

1980년대의 후세인은 극도로 무자비하고 권위주의적인 성격을 보였는데, 내각 관료들은 그와 차를 마실 때에 절대로 먼저 차를 마셔서는 안 되었으며, 그가 말하기 전에는 함부로 입을 놀려서도 안 되었고, 항상 정자세로 경청을 해야만 했으며, '''나갈 때에는 등을 보이지 않고 뒷걸음질로 나가야만 했다.''' 심지어 '''국회 연설 중 한 의원이 동료 의원에게 쪽지를 건네는 모습을 보고서, 음모를 꾸민다며 즉석에서 그 의원을 총으로 사살해버렸다'''. 그러자 국회는 한순간에 공포에 휩싸였고, 겁에 질린 의원들의 두려움 섞인 박수소리가 이어지자, 후세인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연설을 계속했다고 한다. 바빌론 유적 복원이 한창 진행될 때 후세인이 이곳에 왔다가 자기 이름이 없는 것을 보고 화가 나서 현장 기술자들을 모조리 처형해 버린 적이 있었다. 이후 겁을 먹은 다른 기술자들은 기존의 벽돌을 뜯어 내고 후세인의 이름을 새긴 벽돌을 박았다고 한다. 실제로 기자가 확인해보니 후세인의 이름이 적힌 벽돌은 모두 색깔도 다르고 새로 박은 듯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1979년에 살해된 의원들만 60명이었고, 집권 이후 3천명 이상의 정치가들이 처형당했다. 후세인의 이복동생인 바르잔 이브라힘 알 티그리티 또한 후세인 카멜 알 마지드에게 밀려서 숙청되었다. 원래 후세인의 어머니 수브하 툴하는 바르잔의 아들과 후세인의 딸을 결혼시켜 집안을 결집시키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후세인은 어머니의 유언을 씹고 자신의 딸을 후세인 카멜과 결혼시킨 다음에, 바르잔의 권력을 빼앗고 이라크에서 추방한다. 바르잔은 후세인이 자신을 숙청할 것을 눈치 채고 다시 그의 신임을 얻기 위해 발악했는데, 그 중 하나가 후술된 1982년의 두자일 학살사건이다. 하지만 이런 노력도 수포로 돌아가서 그는 쫓겨났고, 2003년에 이라크가 붕괴되자 체포되어 두자일 학살사건을 주도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훗날 이라크가 개박살나고 2003년부터 이라크 곳곳에서 사담 후세인 정권 당시 학살당한 사람들의 시체가 묻혀있는 대량무덤들이 발견되고 발굴되었는데 시체가 너무도 많았다고 한다. 사담 후세인은 1991년 걸프전 후 이라크 인구의 60%를 차지하는 시아파가 봉기하자 이를 무자비하게 진압하며 약 10만명의 시아파인들을 죽였다. 게다가 사담 후세인은 자신의 군대를 바그다드 남부에 주로 거주하는 시아파 마을에 들어가게 해 시아파 성인 남자, 여자 및 아이들을 체포한 후 벌판에서 무차별 사격 살해 후 땅에 파묻거나 살아있는 사람을 산채로 땅에 파묻어 죽였다. 심지어 일부 시민들에게 강제로 휘발유를 마시게 한 후 총을 쏘아 몸에 불을 붙여 죽였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대량무덤들이 이라크 곳곳에서 300개 이상 발견되었으며, 한 대량무덤에서는 수천구의 시체가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그에게 대항하거나 잘못 보인 자들의 가족까지 죽여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대표적인 사건이 두자일 사건이다.
두자일 사건은 1982년 사담 후세인이 두자일이란 마을 옆을 지나가다 암살 미수가 발생하자 그 책임을 이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서 마을 전체를 통째로 파괴해 버리고 무려 148명을 학살했으며 400여명이 쫓겨난 일이다. 살해된 148명 중 46명은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 또한 1980년에는 이란을 공격하여 10년간의 전쟁에서 백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고 다치게 만들었고, 1988년에는 이라크 내 쿠르드인을 심하게 차별하고 탄압하다보니 분노한 쿠르드인이 일으킨 반란에 대해서도 독가스와 화학무기로 진압했다.
흔히 이라크에는 대량학살무기가 없었다는 주장이 있지만 후세인이 잡힐 당시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남아있지 않았다가 정확한 표현이다. 1987년부터 이라크 정부는 쿠르드족 마을에 화학무기들을 뿌리기 시작했으며 약 40개 마을들에 사용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가장 유명한건 1988년 할라브자 마을에 화학무기가 사용된 사건이다. 이라크군은 하루 종일 마을에 제1차 세계대전에 사용되어 악명높은 겨자 가스를 뿌려 그 직후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은 질식되거나 눈이 멀었으며, 구토, 경련, 전신에 물집이 생기는 걸 느꼈다고 증언했고, 영구적으로 시력을 잃거나 암에 걸리거나 기형아를 출산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약 5000명의 사람들이 화학무기 사용 당일 사망했으며 10,000명 정도는 생존했지만 지금도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할라브자 마을에서도 현재까지도 기형아 출산이 빈번하며 사담 후세인의 사촌인 알리 하산 알-마자드가 이 화학전을 계획한 것 때문에 그는 "케미컬 알리"라는 별명을 얻었다. 게다가 1990년 쿠웨이트를 점령하는 걸프전을 일으켰을 당시 이라크군은 수백명의 민간인들을 납치, 고문,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패색이 짙어져 이라크군이 후퇴해야 하는 상황이 오자 후세인은 쿠웨이트의 모든 기름유정들은 다 태우라는 명령을 내렸고 약 1천만t 가량의 기름이 걸프만으로 흘러들어가 수많은 수원들이 기름에 잠겨버렸다. 결과적으로 후세인은 이때 미국에게 찍혀 자기무덤을 파게 된다.
하지만 위의 주장은 논점을 일탈하고 있다. 미국이 이라크 전의 명분으로 삼았던 대량살상무기는 사실상 핵무기였다. 쿠드르족 탄압에 화학 가스를 사용한 것은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는데, 그 존재를 증명하겠다고 미국이 전쟁을 일으키고 전후에 이라크를 뒤지고 다닐 이유는 전혀 없다. 또한 대량살상무기를 아무리 찾아도 없자 전쟁 명분을 독재정권 제거와 민주주의 전파로 바꾸고 부시가 회고록에서 '당혹하고 고통을 느꼈다' 고 변명할 이유도 없고. 또한 미국은 심지어 911 테러의 배후가 후세인이라는 주장도 했는데, 당시 중동에 대한 지식이 조금만 있으면 알겠지만 콧수염 다듬고 취미가 미국산 트레일러 수집인 후세인과 수염 잘라주는 이발사를 죽이고 다녔던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이 손을 잡는다는 것은, 마치 이라크 후세인 정권을 치기 위해 미국과 이란이 연합군을 편성한다는 것만큼이나 황당한 얘기였다. 후세인 정권이 악랄하다고 해서 미국의 엉터리 전쟁 명분이 옳았다고 끼워맞춰서는 안된다.
물론 우상화도 착착 진행하여 이라크 전역에 자신의 동상을 세웠고 관공서나 집집마다 자신의 사진을 걸도록 강요했으며 만약 사진을 걸지 않으면 반체제로 간주해 처벌했다.[17] 특히 이라크 곳곳에 비밀경찰들이 도사리고 있다가 반정부 인사들을 색출, 체포, 고문했는데, 여자와 아이들도 예외는 없었다. 경고로 사람들의 '''귀를 베고, 성기에 전기충격을 가하는가 하면 콜라병 위에 사람을 앉혀놓고 항문을 터뜨렸으며, 피해자들을 거꾸로 매달아 뼈가 부러지도록 구타'''하는 것은 일상이였다. 이런 무자비한 고문 때문에 잡혀 온 한 남자가 고문에 못 이겨 자기 부인의 이름을 말하는 경우도 있었다. 비밀경찰이 이 사람의 아들을 잡아와 벽에 머리를 부딪쳐 죽여버리자 겁에 질린 남자가 자기 부인의 이름을 이야기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잡혀 온 사람들의 입에서 이름이 나온 사람들은 곧바로 경찰에 연행되어 같은 식으로 고문을 받은 후 처형되었다. 이처럼 당시 이라크 내에서 고문이 합법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라크 경찰서에는 '''강간실까지''' 두고 사람들을 고문한 것으로 전해진다.
리비아의 한 TV 방송은 후세인 정권의 비밀경찰들이 체포한 젊은이들의 가슴에 다이너마이트를 장착해서 리모컨으로 폭파시켜 처형하는 장면을 방영했으며, 2003년 10월 30일 미국 폭스 뉴스와 CNN은 후세인 치하에서 군과 경찰이 정치적 반대자를 처참하게 고문하는 장면을 방영했다. 23분짜리 이 비디오 테이프에는 웃통이 벗겨진 채 두 팔이 기둥에 묶인 남자의 알몸을 철봉으로 수없이 내리치는 장면, 살아 있는 사람의 혀를 뽑거나 손목을 자르는 장면, 목을 치기 위해 머리를 나무받침에 끌어 올리는 장면, 두 손을 뒤로 묶은 채 10m 아래의 위에서 밀어떨어뜨려 관절을 골절시키는 장면 등이 담겨 있었다.# 이러한 무자비한 탄압으로 사담 후세인 재임 기간 중 살해당한 사람은 적어도 50만명인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이런 공포 정치가 사담 후세인 정권이 무너진 이후 많은 이라크인들이 미군을 환영한 이유로 꼽힌다. 결론적으로 후세인은 동정받을 이유가 없는 피의 독재자였다.

2.7. 걸프 전쟁


이라크는 막대한 전쟁비용에다 저유가로 인한 국고수입 저하까지 더해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그런 와중에 이란-이라크 전쟁이 종전되면서 더 이상 이라크를 지원할 동기가 없어진 쿠웨이트가 전쟁부채 상환을 촉구하자, 전후 남아도는 게 군사력이었던 후세인은 또다시 즉흥적인 판단으로 쿠웨이트를 침공하여 점령하였다. 하지만 이는 걸프전이라는 후세인 입장에서는 사상 최악의 실책이 되고 말았다. 그동안 이슬람 근본주의에 대한 방파제로써 국제사회에서 암암리에 용인 되었던 후세인의 지지기반이 순식간에 사라지면서 UN 차원에서 공공의 적으로 낙인찍힌 이라크는 결국 미국을 위시한 다국적 연합군에 그야말로 참패 당했고, 이후 UN결의안에 따른 광범위한 수출입금지 조치까지 당해 ‘가난한 돌의 왕국’이라는 멸칭(蔑稱)으로 불리며, 한때 1인당 GDP가 4000달러대 돌파를 눈앞에 두던 아랍의 신흥국가에서 1인당 국민소득이 1000달러대인 후진 개발도상국으로 전락하였다.
하지만 미국이 쿠웨이트를 해방시키고, 정전 협정만 맺고 신속히 철수했기 때문에, 후세인은 간신히 권력을 지킬 수 있었으나, 반기를 든 쿠르드족을 독가스로 학살하다가 비행금지구역 제재를 당하고, 그 보복으로 UN무기사찰단 등을 추방했다가 대량살상무기 개발 의혹을 스스로 만들었고[18], 게다가 1993년 4월에는 쿠웨이트를 방문한 미국의 전 대통령 조지 H. W. 부시를 암살하려다가 실패하는 등[19] 대미관계든 국제관계든 내정이든 온갖 어그로를 끌면서 폭정에 실정을 거듭하게 되었는데 그 결과...

2.8. 이라크 전쟁


90년대 동안 후세인은 국제적으로 꾸준히 어그로를 끌던 와중 조지 W. 부시대통령에 당선되고난 후 '''2001년, 오사마 빈 라덴세계무역센터에 비행기를 들이받는 미친짓을 해서 보복대상을 찾고 있던 미국에게,''' 후세인은 '''"신의 천벌을 받았다"'''고 조롱했다. 하지만 후세인 본인도 아차 싶었던지, '''"우리 이라크도 테러로 고생하는데 테러와의 전쟁에 적극 협조할 용의가 있다."'''고 물밑접촉을 시도했지만 이미 어그로는 끌 대로 끌어댄 상황. 어차피 9.11 테러를 통해 형성된 국제적 분위기를 이용해 골치 아픈 후세인을 제거하기로 결정을 내린 상태였기 때문에 결국 2003년 미군의 전면 침공을 불러일으키게 된다.[20]
사실 당시 후세인이 말조심만 제대로 했어도 후세인 정권의 불행한 운명을 막지 못할지언정 적어도 후세인 정권의 붕괴를 늦출 수는 있었다. 후세인 본인부터가 세속주의를 표방하며 이라크를 통치했기 때문에,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이라는 공동의 적을 없애기 위해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미국과 협력하여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 토벌에 적극 나설 수도 있었다. 그리고 후세인 정권 자체가 당시에 이미 수많은 이라크 국민들의 증오를 받고 있었음을 감안하면, 자국민들의 불만을 외부의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으로 돌려 정권의 안정을 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이라크 국민들은 시아파가 다수라서 자신들의 적인 수니파 극단주의 세력과 싸우는 데 거리낌이 없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말조심만 제대로 했으면, 당시 미국의 상황이 후세인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미국과의 협력으로 정권의 수명을 연장시킬 절호의 기회가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이쯤 되면 절대권력에 취하여 말을 함부로 한 것이 후세인 본인의 권력과 목숨을 모두 끝장내버린 게 아니냐는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는 셈이다.
하지만 앞의 얘기는 너무 순진한 발상이다. 첫번째, 당시 적어도 당시의 정책 결정 권한이 있었던 높은 사람들 중에 이라크 문제를 잘못 처리하면 IS 같은 세력이 튀어나와 더 큰 골치가 아파질 거라도 예상했던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반대로 911 테러를 일으킨 알카에다를 끼고 도는 이슬람 극단주의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권을 박살내고 이 참에 눈에 거슬렸던 이라크 후세인 정권도 박살내면 나머지는 알아서 기겠지라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두번째, 미국이 전쟁을 일으키는데 가장 걸림돌은 무엇보다도 국내의 반전 여론이다. 하지만 911 테러 덕분에 그게 깔끔하게 없어졌다. 미국 공화당 내 보수강경파가 이 기회를 놓칠 이유가 없었다. 세번째, 이라크는 당시에 오랫동안 UN 경제제재를 겪고 있었다. 경제제재를 단순히 경제제제로만 보는 것 역시 순진한 사고 방식이다. 안 그럴 나라가 있겠나만은, 미국은 항상 미군 주둔(혹은 철수)이나 경제 원조(혹은 경제 원조 삭감) 등을 그 나라에 대한 압력 수단으로 활용했다. 경제제재도 마찬가지다. 경제난은 반대파를 키울 수 있고, 또 이에 후세인이 과민반응해서 반대파를 숙청하면 그 과정에서 반대파의 적개심은 더욱 커진다. 게다가 경제난으로 인해 후세인 정권에 충성하는 이라크 정부군의 전투력도 타격을 입었다. 만약 후세인과 관계를 개선했다가 나중에 후세인이 다시 뒷통수를 치면 미국은 UN 결의안, UN 경제제재부터 시작해서 다시 기회를 엿봐야 하는데, 그런 모험을 하느니 911 테러 배후가 후세인이라거나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얼굴에 철판 깐(본인 스스로도 안 믿을) 주장을 하면서 지금 완벽하게 갖추어진 이라크 침공 기회를 이용하는게 백번 나았다. (참고로 위에서 화학 가스나 탄도미사일을 가지고 대량살상무기라도 하는데, 미국이 이라크 전의 명분으로 삼았던 대량살상무기는 사실상 핵무기였다. 탄도미사일은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이라크가 굳이 숨기지도 않았고, 쿠드르족 탄압에 화학 가스를 쓴 것도 아는 사람은 다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는데, 미국이 그거 찾겠다고 전쟁을 일으켜가며 이라크를 뒤질 이유는 없다.)
미국은 이미 2002년부터 후세인 정권 심장부에까지 공작원을 심어둘 정도로 후세인의 동선을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라크 자유 작전 개시 하루 전 후세인의 활동이 잦게 포착되던 도라 농장의 벙커에 후세인과 그 일가가 거주하고 있다고 판단한 미국은 F-117 스텔스기와 BGM-109 토마호크 순항미사일로 벙커를 완전히 박살내버리지만 후세인은 그 벙커에 있지 않았다.
바그다드 시내 진입 직전 후세인과 최고위층이 바그다드의 어느 레스토랑에서 회의를 갖는다는 첩보를 입수한 미국은 이번에 B-1B 폭격기를 동원해 JDAM으로 레스토랑을 파괴해버렸지만 이번에도 후세인 제거를 실패해버렸다. 그러나 후세인은 바그다드가 미국의 수중에 넘어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던 것은 물론 자신의 아들과 손자도 죽임을 당하는 것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후세인의 동상도 성난 군중들에 의해 철거되면서 30여년동안 수백만의 고귀한 생명들의 핏값을 강제로 앗아가며 세운 후세인만을 위한 왕국은 미군에 의해 한 달만에 지구상에서 소멸되었다.
바그다드가 한 달만에 미군에 의해 점령된 이후 후세인은 지하 저항세력으로 전환하여 도피행각을 이어갔지만, 실권을 잃은 상태에서 더 이상 권력을 회복할 가망은 없었고, 아들까지 폭사하는 등 계속 궁지에 몰리고 최후의 순간에는 어느 민가의 지하 땅굴에 숨어 있다가, 12월 13일에 있었던 레드 던 작전(Operation Red Dawn) 때 미군 특수부대에 체포되어[21] 기소되었다.

2.9.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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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계 미국인인 미 육군 통역병 사미르 알 자심에게 잡혀서 끌려나오는 사진. 사미르는 아버지가 후세인 부하들에게 고문을 당했고 친척들은 살해당했다며 자신의 상관에게 후세인 체포 증명사진을 찍게 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상관은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결국 마지못해 허락했다고. 이 통역병은 이후 백악관에 초청받기도 했다. 관련 냇지오 다큐 이 작전을 지휘했던 미 육군 제4보병사단장 레이먼드 오디에어노 장군은 이후 이라크 주둔군 사령관, 미 육군참모총장까지 영전하였다.[22][23]
후세인이 붙잡히자 중국과 러시아를 포함한 전 세계 수 많은 국가들은 지지와 기대의 반응을 보였으며 미국과 앙숙이던 그 이란조차도 후세인에게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크게 데인 경험 때문에 '이란인 상대로 많은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가 드디어 붙잡혔다'며 환호했다.
재판 과정에서 후세인은 갑자기 제정신이 돌아왔는지, 자신을 굉장히 잘 변호했다. 그의 말만 들으면, 서방(西方)과 특히 미국, 영국은 천하의 개자식이자, 아랍의 독립을 두고 못 보는 제국주의자였다.[24] 그리고 사담 후세인은 이러한 자들의 방해공작에 맞서 이라크를 지키려고 하였으나 희생된 불우한 처지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또한 죽인 사람들의 여부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하거나, "그들은 반역자이고 이란인들"[25]이라고 주장하고, 피해자들의 증언에 대해서는, "나는 그러한 명령을 하지 않았으며, 억울한 피해자를 피하라고 항상 강조하였다."라고 하거나, "당신들 중 누가 도둑이자 반역자들인 이란인들에게 물어보았는가?"라며 책임소재에서 벗어나려 들거나, 증언 자체가 허위라는 식으로 몰고 갔다. 그의 학살명령으로 온 식구를 잃은 쿠르드인 노인이 법정에 나와 진술한 적이 있는데, 그가 울면서 후세인에게 대놓고 분노할 때, 후세인은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면서 꼬박꼬박 논리적으로 반론을 하여, 그 노인은 기가 막혀서 이후 인터뷰에서 말하길, "뻔뻔하면서도 논리적인 말발이 쎈 놈이다."라고 혀를 차기도 했다. 물론 그 노인은 후세인이 처형당했을 때 굉장히 기뻐했다.
1년간에 이르는 긴 재판을 받았는데, 주된 공판 내용은 두자일 학살을 비롯하여 이라크인에게 저지른 학살에 대한 처벌 문제였다. 시아파 정부는 그의 모든 혐의를 증명하고 싶어 했지만, 이슬람의 율법이 문제였다. 70세 이상인 범죄자에게는 사형집행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후세인의 나이가 70이 가까워진 상황에서 사형을 시키려면, 단기간 내에 사형이 가능한 혐의를 유죄로 입증해야 했으므로, 일단 두자일 학살 등 몇 가지로 국한시켜 기소했고,[26] 사담 후세인은 체포되어 수감된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법정에서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자기 논리를 주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그간의 나약한 독재자들의 최후와 대비되어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사형을 당할 때도 용수[27]를 거부[28]를 하는 등, 비교적 의젓한 자세로 최후를 맞았다. 사실 사담 후세인은 군 통수권자이자 군인이라면서 군인의 전통적 사형 방법인 총살형으로 사형을 집행 해 줄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군 지휘관 처형에는 총살형이 적절한 방법이며 군인답게 의젓한 최후를 맞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기각되었고 불명예 사형 방법인 교수형으로 집행되었다.[29]
후세인은 세속주의자이면서도, 정작 재판정에는 코란을 들고 나와서 신앙인임을 강조하면서, 판사와의 싸움이 격해지면 '알라후 아크바르'를 외치면서 분위기를 자기 주도로 몰고 나아갔고[30] 때문에 사담을 재판하는 것은 굉장히 힘들었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아무튼 자기가 항상 잘했거나, 아니면 나는 잘하려고 했는데 다른 놈들이 지 멋대로 굴었다는 식이었고, 또 이러한 논리가 완전 허위가 아니라, 상당 부분 사실에 기반을 둔 것이었기 때문에, 피고를 굴복시키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을 정도였다.
이에 분노한 이라크 민중들이 이에 사담 측 변호인들을 사살하거나 할 정도였는데, 결국 사담 후세인이 변호인단의 조언을 뿌리치고, 자신은 예나 지금이나 오직 단 한 명뿐인 이라크 대통령이며, 지금의 대통령은 가짜이고 이라크 정책의 모든 책임자임을 인정하는 발언을 하는 바람에, 재판부는 후세인 유죄 입증의 가닥을 잡았고, 결국 사형 판결이 내려졌다. 검사 측의 사형 구형이 낭독되는 때에는 이복동생인 바르잔과 함께 썩소를 지으며 같잖다는 표정으로 실실 웃어댔고, 사형 판결이 내려지는 순간에도 사담 후세인은 종교적 구호를 외치고, 재판정과 부시에게 죽음을 내리라고 큰소리를 치며, 끝까지 목숨을 구걸하지 않는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미국은 후세인을 포섭하여 이후 후세인 지지세력의 저항을 예방하기 위해, 도널드 럼즈펠드를 보내서 후세인과 살아남은 가족들의 안위를 보장해주는 조건으로 협상을 제시했지만, 후세인은 럼즈펠드를 비웃으며, "죽은 국민들 목숨을 돌려주면 생각해보겠다."라고 협상을 사실상 거부했다. 그는 럼즈펠드에게 "대량살상무기는 찾았냐?"라고 조롱하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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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형당하는 후세인
이후 항소했지만 기각되고, 눈엣가시 같았던 후세인을 이라크 정부는 항소를 기각한 다음 고작 '''3일'''만인 2006년 12월 30일에 사형을 집행해 버렸다. 31일에 집행하는 건 너무 가혹하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후세인은 죽기 전 이란을 믿지 말라는 것과 종파적인 감정에 휩쓸려서는 안 된다는 유언을 남겼다.
이렇듯 무리하며 급히 사형 집행을 한 이유는 전후 이라크 정권의 주요 세력이 후세인이 밀어주던 수니파의 '''철천지 원수 시아파. 그 중에서도 손꼽히는 초강경파들'''이었기 때문이다.[31] 이 사람들은 안 그래도 폭정에 엄청나게 시달렸었기에 후세인을 죽이려고 벼르고 있던 데다, 전술(前述)했듯이 이슬람 율법상 70세가 넘으면 사형 집행이 불가능해서 빨리 죽이지 않으면 자기들 법 때문에 못 죽이기 때문에 저질러 버린 것이다. 사형 집행일이 12월 30일이었고, 이틀 뒤면 후세인이 70세가 되는 상황이었으며, 그렇다고 해서 31일에 집행하는 건 시아파 입장에서 봐도 지나치게 가혹한 데다 꼼수 쓰는 게 눈에 보이니, 확실히 그 당시에 후세인을 죽일 수 있던 시간은 30일. 그것도 30일 아침이 마지막이었다. 그때 사형을 시키지 않고 쿠르드족 학살 같은 다른 재판으로 넘어가면, 후세인에게 선고할 수 있는 형량은 무기징역까지였고, 게다가 후세인이 사형을 받지 않게 되어 버리면, 수괴(首魁)가 사형이 아닌데, 그 수하들이었던 그의 측근들에게 사형을 내리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게 되니, 측근들도 죽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처형할 놈들 다 처형하고 싶으면 후세인부터 일단 처형해야 했다. 아니면 그들을 모두 다 살려줘야 했으니까. 시아파는 전자(前者)를 선택했던 것이다. 이렇게 당시 시아파 정부가 감정만 앞세워서 망쳐버린 일이 한두개가 아니며 이라크 군대와 정보부의 해산도 시아파 망명자들의 바람잡이로 이뤄졌던 일이었다. 그리고 그 대가는 이라크인들이 치르고 있다.
심지어 후세인의 처형 동영상이 유출되기도 했다. 다만 이를 시아파 정부의 잘못이라고 하기엔 조금 곤란하다. 사실 후세인의 사형 집행 과정은 그들의 법률을 준수했다. 실상은 사형 집행인들이 멋대로 한 것으로, 원래 집행리(執行吏)들이 후세인을 데리고 나와 교수대에 세우고 유언도 물어보고 용수를 씌우는 것까지는 공개되었다. 하지만 곧 용수를 도로 벗기고[32] 처형한 후, 사망한 후세인 얼굴까지 나오는 충격적인 동영상이 나돌았고, 이는 그야말로 국제적인 파문을 일으켰다. 수사결과 당시 처형 감독관의 휴대전화로 촬영한 것으로 밝혀졌고, 관련자들은 무더기로 처벌되었지만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그래서 후세인의 처형 목적을 정의라기보다는 복수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리고 이는 후세인의 죽음을 정치적, 종교적으로 선전하고 또 활용하려는 세력에게 좋은 빌미가 되었다. 그가 죽은 후, 시아파가 다수인 도시에선 주민들이 축포를 쏘면서 만세를 불렀으며, 바그다드의 시민들은 그의 죽음을 차분하게, 그리고 대체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후세인의 고향인 티그리트에서 후세인은 순교자가 되었다고 애도 분위기에 휩싸였다. 그리고 그들은 8년 후, ISIL에 가담함으로써 시아파 정부에 대한 분노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물론 그 IS가 시아파 정부보다 더 미쳤다는 건 그땐 몰랐지만. 이 때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막 취임한 후였는데, 이 일을 크게 비판했다.
그리고 사형당하기 전 후세인이 마지막으로 한 경고대로, '''이라크는 각종 반군 단체 및 과격파 종교 단체들의 무장 봉기 및 테러로 인해, 오히려 더 큰 혼돈 속에 빠지게 되었다. 결국 최악의 형태로 변하고 말았다.''' 후세인은 평소 체제가 이슬람 원리주의에 빠지는 상황을 극히 경계했는데 결국 권력의 구심점이었던 후세인이 제거되면서 이라크 전체가 전국시대에 돌입하게 된 셈이 되었다.[33]
2014년 6월, 사담 후세인에게 사형을 선고했던 판사가 반군 수니파에게 잡혀 살해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보도에 따르면, 라오프 압둘 라흐만 판사는 6월 12일, ISIL의 위협이 닥쳐오자, 수도 바그바드에 위치한 거주 지역에서 변장한 채 탈출하다 붙잡혔으며, '''이틀'''만에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당했다. 특히 그의 처형 사유는, 후세인에게 사형을 선고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알려졌다. #

2.10. 후세인 정권의 말로


후세인의 이복동생 바르잔 이브라힘 알-티크리티는 2007년에 사형 당했는데 목이 잘려서 참혹하게 죽었다. 교수형이었음에도 처형 도중 목이 잘렸는데, 이라크는 다른 중동국가들과 달리 세속 국가들처럼 집행 시작과 동시에 사형이 바로 끝나지만 대신 목뼈가 부러지는 수하식 교수형을 집행하기에 꽤 흔하게 벌어지는 일이라고 한다.
독가스로 사람을 하도 죽여대고, 할리브자에서만 5천명 이상을 죽인 후세인의 사촌, "케미컬 알리" 알리 하산 알 마지드는 2010년 1월에 사형당했다. 원래 2003년, 이라크 전쟁이 터진 직후, 영국군은 자신들이 알리 하산 알 마지드를 죽였으며 시체도 확인했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했는데, 어이없게도 그는 멀쩡히 살아서 체포되어 2010년 교수대에 섰다.
후세인 치하에서 부통령을 지낸 타하 야신 라마단은 2005년에 체포되어, 처음에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항소에서 사형으로 뒤집혀서 처형당했다.
외무장관이자 부총리를 지냈고, 후세인 정권의 유일한 기독교도였으며, 후세인이 가족이라고 불렀던 타리크 아지즈는 바그다드가 함락된 후에 체포되었는데, 워낙에 순순히 붙잡혀서 후세인을 배신하여 투항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있었고, 지금은 2010년에 사형을 선고받고 수감 생활을 하다가 2015년 6월 5일 옥사했다. 사형이 확정되는 대로 바로 바로 처형을 하던 이라크 정부였으나, 70세를 넘긴 상태여서인지 집행되진 않았다.
후세인의 경호실장이자 비서실장을 지냈고, 쿠사이 후세인과 함께 공안기구의 담당자였던[34] 아비드 하미드 마흐무드는 2003년에 체포되어 2012년에 처형당했다.
이자트 이브라힘 알 두리 전 혁명평의회 부의장은 현재 잔존하는 후세인 충성파를 이끌고 있는 수장이며, 후세인의 측근들이 줄줄이 목이 날아가는 상황에서도 잡히지 않다가, '''2014년, 이라크 내전에서 양지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와 그의 세력은 다에쉬랑 손을 잡고 이라크군을 조지고 있다.''' 다만 2015년 4월 경 티크리트 공방전에서의 사망설이 돌았으나, 2016년 4월에 비디오에서 그 모습을 다시 드러냈다. 비디오에서 이자트 이브라힘은 수니파 국민들에게 사우디아라비아가 제안하여 구성된 '테러 대항을 위한 이슬람 군사동맹'에 가담할 것을 촉구하여, IS와 사실상 결별하였음을 시사하였다. 2016년 10월 모술 대공세에서 후세인 충성파가 이라크 정부군과 협력하여(...) 다에시와 교전하였다.
후세인의 아들 둘은 죽었지만, 그보다 수가 훨씬 많은 들도 아버지의 복수를 외치며 다에시 지지를 천명한 상황이다. 특히 집안의 장녀인 라기드 후세인은 이라크 저항세력과 다에시에게, 아버지가 남긴 막대한 재산을 그대로 퍼다 준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라크 지역에서의 다에쉬 세력 확장은 사실상 이들의 공이라고 봐도 무방한 상황. 미국이 후세인을 절대 죽이면 안 된다고 경고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는데, 그 경고를 무시하고 자기들 꼴리는 대로 마구 저지른 대가를, 이라크 정부는 지금 몇 곱절로 치르고 있는 셈이다.
이라크 전쟁 당시 서방에게 독설을 여러 차례 날려 유명해진 공보장관 무함마드 사이드 알-사하프는, 이라크가 미국에 의해 함락된 뒤 잠적했다가 미군에게 자수, 체포됐다. 자살설이 돌기도 했지만, 포로로 잡히고 얼마 뒤 석방되어 2008년 3월에 아랍에미리트로 이주해 조용히 살고 있다.# 이 양반은 후세인의 측근 치고는 딱히 전쟁범죄 같은 건 저지른 적도 없는 평범한 외교관 출신인 데다, 유명세를 탄 이유도 허세 쩌는 공보활동 정도가 전부라 죽이거나 빵 보낼 만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전쟁 당시 허세를 부린 이유를 이라크 군에서 잘못된 정보를 줬고 자신은 그걸 토대로 언론에 발표했기 때문이라 주장했다.

3. 가족


자녀로는 아들인 우다이 후세인쿠사이 후세인이 있었고 나머지는 모두 딸이다. 그리고 손자로 무스타파 후세인(쿠사이 후세인의 아들)이 있었다. 그런데 우다이와 쿠사이는 사담이 잡히기 전에 미군과 교전 중 험비에 장착된 TOWAH-64 아파치 공격헬기의 AGM-114 헬파이어 세례를 맞아 죽었고,[35] 무스타파는 항복을 거부하고 교전을 계속하다가 미군에게 사살되었다. 이때 우다이는 향년 40세, 쿠사이는 향년 38세, 무스타파는 향년 15세(...)였다.
시리아의 아사드 집안과 마찬가지로 이쪽도 장신 집안으로 유명하다. 사담 후세인의 키도 약 186cm이고, 다른 가족들도 모두 컸다. 문제는 집안이 콩가루 집안이라는 사실...
사담 후세인의 일족들 중에서 남자들은 사위를 포함해 전부 다 죽어서 현재 대가 완전히 끊어졌으며 현재 살아있는 사담 후세인의 집안 사람들은 전원 여자들밖에 안 남았다. 그나마 여자 일족들조차 요르단 어딘가에 숨어있을 뿐 정확히는 어디에서 살고 있는지 모른다.
  • 사지다 탈파: 사담 후세인의 아내. 1963년 사담 후세인과 맞선으로 결혼했다. 힘 있는 바트당 수뇌부 가문 출신이지자 사담의 외사촌, 즉 사담을 아들처럼 돌봐준 외삼촌인 하이랄라 탈파의 딸이기도 해서 사담이 권좌에 오르는데 큰 힘이 되었다. 이 아줌마도 만만치 않아서 우다이가 카멜 한나를 증오하다 못해 살해하게 된 것도 사지다가 옆에서 계속 원수를 갚아달라고 충동질한 탓. 그 외에 자기 정적들을 고문하라고 지시하는 등 이쪽도 심히 무시무시한 아줌마. 2003년 이후 행적을 감추었다. 현재 이라크 반군을 금전적으로 지원한 혐의를 받고 있다[36].
  • 우다이 후세인: 사담 후세인의 장남. 진성 돌아이! 임해군, 순화군의 아랍인 버젼. 나이트클럽에서 춤추다가 천장에 총질하는 건 기본. 아버지의 둘째 아내를 소개시켜줬다며 파티장(그것도 이집트 대통령 영부인까지 참석한 파티서)에서 자기 아버지 최측근 카멜 한나를 지팡이로 죽을 때까지 두드려 팬 다음 죽어가는 카멜 한나를 전동식 음식 자르는 칼로 숨통을 끊어버렸으며[37] 이라크 올림픽 위원장 시절에는 경기에서 진 선수들 고문하는 게 취미였다고[38]. 거기다가 자기 집 지하에 감옥을 만들곤 정치범들을 수시로 고문하였으며 반송장이 된 수감자를 바로 옆의 개인 동물원 표범들에게 던져주며 즐거워한 진성 사이코패스였다. 참다 못한 아버지 사담이 카멜 한나 사건 때는 개인 감옥에 4년 처박은 후[39] 스위스 대사관 직원으로 쫓아버렸다. 물론 우다이는 얼마 후 어느 레스토랑 직원을 찔러 죽이겠다고 위협한 죄로 재송환당했다(...) 결국은 1996년에 테러를 당해 총알을 한 다발 얻어맞고는 절름발이 신세가 되었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당시 동생 쿠사이와 함께 도피생활 도중 발각, 치열한 교전 중 미군이 발사한 미사일에 맞아 사망. 끝도 지저분해서 죽은 후 미군은 죽은 우다이와 동생 쿠사이 후세인의 시체의 사진과 동영상을 찍어 전세계 기자들에게 배포했다. 흠좀무.
  • 쿠사이 후세인: 사담 후세인의 차남. 그나마 이 콩가루 집안에선 가장 제정신인 사람. 여자를 매일 갈아치운 데다 부인과도 이혼한 우다이와는 달리 결혼생활도 나름 평온했고 아들도 낳았다. 그러나 잔학성 자체는 만만치 않아서 1991년 걸프전 직후 벌어진 시아파 반란 분쇄와 남부 습지대 파괴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언젠가는 감옥이 꽉 들어찼다고 수천 명에 달하는 정치범들을 빈 공간 만들려고 쓸어버리는 짓을 감행한 적도 있다. 역시 2003년 우다이와 함께 도피 중 폭사. 당시 만14살(!)이었던 아들 무스타파도 아버지와 같이 미군을 향해 AK를 난사하다가 그때 같이 죽었다.
  • 후세인 카멜 & 사담 카멜 형제: 사담 후세인의 사위들이자 먼 친척. 각자 사담의 장녀 라가드 후세인, 그리고 차녀 라나 후세인과 1986년 결혼했다. 우다이를 바보라며 멸시하고 우다이도 벼락출세한 이 둘[40]을 "골든 보이" 라고 부르며 이죽대긴 했어도 사이가 그렇게까지 나쁘진 않았지만 88년 카멜 한나 사건 당시 후세인이 카멜 한나 사건과 그 이전에 우다이가 벌인 기행을 죄다 일러바치면서 사이가 급격히 틀어졌다.
그 후에는 우다이가 사사건건 후세인에게 총을 들이대는 등 목숨이 위험해지자 1996년 전격적으로 아내들을 데리고 요르단으로 망명했다. 미국에게 이라크 무기개발 정보를 넘겨주고 CIA의 도움을 받아 사담 대신 권좌를 차지하려는 속셈. 그러나 그 후 사담이 무기개발 혐의를 죄다 카멜 형제에게 넘기면서 오갈 데가 없어지자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는 사담의 꼬임에 넘어가 다시 이라크로 돌아왔다. 그 직후 강제로 이혼당했으며 얼마 후 같은 집안 사람들이 "배신자를 처단하러 왔다" 며 총을 난사하며 그들의 집에 쳐들어와 둘을 살해했다. 사담 본인은 살려주겠다고 약속을 한 터라 죽일 수 없으니 '같은 집안 사람이 너희 명예에 똥칠을 했으니 너희가 처리해라' 며 둘의 가문인 알-마지드 가문을 협박한 것.
  • 라가드 후세인: 사담 후세인의 장녀. 2007년 수니파 무장세력에게 재정지원 혐의로 이라크 내무장관으로부터 고발을 당했으며 현재 인터폴의 적색 리스트에 올라 있으며 현재까지도 사치스러운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데, 보석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는 라가드는 2015년 1월에는 요르단의 한 보석 팸플릿에 반지, 팔찌, 귀걸이, 펜던트 등을 소개하면서 이를 판매한 돈으로 IS를 지원할 것이라고 말하는 짓을 터뜨렸다 가격은 펜던트는 1,000파운드(164만원) 정도이고 청록색 10피스 팔찌는 1,320파운드(217만원)라고... 그녀는 현재도 구찌 등 명품을 사는데 수백만달러를 사용하는 등 여전히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으며 그녀의 한 측근은 “신발을 살 때에는 아예 자루를 들고 간다” “핸드백과 부츠를 사면서 달러를 물 쓰듯이 뿌린다”라고 증언했다. 또 성형수술을 위해 요르단의 최고 성형외과의사가 항상 대기를 한다고 하며 아버지 사담 후세인이 생포된 후 당시미국 법무장관인 존 애슈크로프트에게 편지를 보내 “아버지가 살던 왕궁에서 나온 현금과 보석은 나에게 달라”고 요구해 병신 인증을 했다.

4. 평가


미국이나 서방은 말할 것도 없지만 이렇게 별의별 전쟁을 일으키면서 깽판을 쳐댄 덕분에 똑같이 반서방 성향이 강한 중동에서도 그에 대한 평가는 '''아주 안 좋다.'''
일단 독립 직후부터 이라크의 끊임없는 영유권 주장에 시달리고, 심지어는 이라크에게 강제합병까지 당한 '''쿠웨이트는 사담 후세인을 매우 증오한다.''' 2006년 후세인이 사형당할 당시에 쿠웨이트 정치권과 쿠웨이트 국민들은 당연히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똑같이 반미국가였지만 종파가 다르고 이라크와의 8년에 걸친 전쟁으로 피폐된 '''이란의 입장에서 후세인은 그야말로 절대악, 파괴신 그 자체나 다름없다.''' 애초에 전쟁 자체가 이라크의 기습으로 시작된 데다가, 사망자가 너무 많아 지금도 이란-이라크전에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없는 곳이 없을 정도. 시아파 교단 입장에서는, 시아파 이슬람 혁명 수출을 좌절시킨 장본인이기도 하기 때문에 후세인을 싫어할 수밖에 없다.
'''같은 수니파 정권이었음에도 사우디아라비아 역시 사담 후세인을 매우 증오한다.''' 걸프전 당시 쿠웨이트 사바흐 왕족들은 사우디로 도피했고 이라크군은 사우디에도 포탄을 발사했다. 그리고 사우디는 미군이 주도하는 다국적군으로 걸프전에 참전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사우디를 비롯한 아랍의 왕정 국가들은 이란 이슬람 혁명에 대항하는 대리전을 후세인 당시 이라크에게 사주하고 치르게 한 장본인들이지만, 그 결과로 이라크가 부도 위기에 몰리자, 채무 상환을 독촉하며 전쟁을 초래하였다는 사실은 깔끔하게 잊어버리고, 이라크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자신들을 배신한 천하의 개쌍놈으로 여기는 수준. 당연히 이라크 측은 이뭐병 취급. 이라크가 전통적 앙숙관계인 이란과 쿠웨이트 못지 않게 사우디아라비아와 사이가 안 좋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41] 게다가 심지어 이라크는 사담 후세인 정권이 이라크 전쟁으로 붕괴된지 수년 뒤인 2017년에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 에미리트, 바레인, 리비아, 이집트등 아랍의 수니파 국가들이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하던 카타르[42]에 대해 단교 보복 조치를 가할 때도 이에 동참하지 않고 카타르와의 정식 수교 관계를 유지하여 카타르를 지지했다.
국가의 체제가 가장 비슷한 이웃나라이고 똑같이 반미친소국가였던 시리아에서도 공식적으로는 사담 후세인을 반대한다. 바트당의 분열을 고착화시켰다는 점도 있고, 물밑으로는 첩보전을 비롯해 대립관계가 심각했기 때문. 어느 정도냐면 똑같이 바트당 지도자임에도 하페즈 알 아사드 당시 시리아 대통령과 사담 후세인은 서로 정상회담 한번 한적 없었을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그래서 이란-이라크전 당시에는 적극적으로 이란에 무기를 제공하는 중간 상인 역할을 수행했고, 걸프전 당시에는 이라크를 공격하는 미국, 서방 주도의 다국적군의 일원으로 참전하기도 했으며, 이라크가 무너진 이후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에 적극 협력하면서, 난민을 수용하고 저항세력에 대한 첩보를 제공하기도 했다.[43] 하지만 시리아 국민들은 반미정서가 매우 강한 편이어서, 사담 후세인을 어느 정도 동정하는 정서[44]가 있으며, 사담 후세인이 잡히지 않았을 때 그를 사칭하는 저항방송(…)을 송신했을 정도였다. 시리아 대다수 국민이 후세인과 마찬가지로 이슬람 수니파였던 점도 있고...
이집트모로코에서도 반(反) 후세인 정서가 크다. 이들도 역시 걸프 전쟁에서 다국적군으로 참전했다. 그나마 리비아는 똑같이 반미를 외치면서 껄끄러운 사이는 아니었으나 주변정세가 이라크 왕따였으니 대놓고 친하게 지내지는 못 했다.
이렇듯 걸프전 이후로는 주변 국가들에 국경까지 패쇄당하는 등 그야말로 고립을 당했다. 걸프전 이후 유일하게 정상회담을 한 해외 국가원수는 베네수엘라우고 차베스 대통령뿐이었고, 그나마도 유가부양에 협조하려고 권한 수준이었다. 초기에는 친소련 성향이었음에도 당시 소련의 후신인 러시아는 자국 내 문제처리에도 바빴으니 신경 쓸 여력이 있을 리가 없었다.
아랍, 이슬람권 국가들뿐만 아니라 당연히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등 서방세계 국가들에서도 독재자, 전쟁 범죄자로 지탄을 받고 있다. 다만 후세인이 죽은 뒤 이라크가 돌아가는 꼴을 보면서, 그의 통치력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재평가가 되고 있는 상황이다.
스리랑카에는 사담 후세인 마을이 있다. 지역 무슬림들이 거주하는 이 마을은 1978년 홍수피해를 입었을 때 이라크 대사관에 도움을 요청했더니 사담 후세인이 통크게 재건을 해줘서 사담의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스리랑카에서 극소수인 무슬림들은 대다수인 불교도나 2번째로 수가 많은 힌두교도 타밀족과도 사이가 나빠서 별다른 지원을 받지 못한 터에 이런 은혜를 입었기에 당연히 이 마을 주민들은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크게 비난하였다. 후세인 이상으로 악랄하던 폴 포트조차도 지원을 받고 큰 도움이 되어 존경하며 더 나아가 신성시하던 소수 민족들이 있듯이.
비록 한국이나 이외 다른 아시아권 나라에선 후세인으로부터 직접적인 피해를 받지 않아서 서방이나 아랍권보다는 악감정은 덜하지만, 이쪽에서도 엄연히 멀쩡한 나라를 전쟁, 가난으로 말아먹은 독재자인 이상 평판은 영 좋지 않다.[45] 특히 한국에선 2002년, 미선이, 효순이 사건 이후 전국적 반미 분위기로 인해, 후세인을 옹호하는 분위기도 있었지만, 한국은 이라크의 후세인 독재정권을 초월하는 최악의 독재꼴통집단 북한과 휴전, 대립하는 정치적인 상황으로, 객관적으로 그의 업적을 인정하는 수준을 넘어, 후세인을 적극 옹호하는 것 자체가 그야말로 비상식적이고 정신병자 취급 받기 십상이다. 국내 언론도 이랬지만 조선일보월간조선을 통해 대대적으로 후세인 과오만을 보도하며 이라크 전쟁을 지지하는 데 노골적이었기에 한겨레로부터 후세인이야 당연히 악랄하지만, 그런 후세인을 이득에 따라서라고 하지만 미국이 지원하던 건 쏙 빼먹냐며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물론 한겨레도 후세인의 악랄함을 인정했으니 한국인들도 결과적으로는 좌우파를 막론하고 사담 후세인을 욕한 셈이다.
'''우습게도 미국이 과거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후세인 편을 들어줬고, 럼즈펠드 전 미국 국방장관이 손수 이라크로 가서 후세인과 반갑게 악수하면서 우애를 과시하던 적도 있다.''' 이는 이란을 견제하기 위함이었지만. 이 사진이나 영상은 이라크 전쟁 당시 럼즈펠드를 비난하는 측에서 쓰면서 실컷 럼즈펠드를 놀렸다.
하지만, 후세인이 죽고, 이라크에 남은 기독교 같은 소수 종교인들이나 집시들은 지금은 애절하게 후세인을 그리워하고 있다. 그들이 따르기만 하면, 그들의 종교를 인정하고 경제적 기초나 치안을 보장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후세인이 죽은 뒤, 미국은 여러 계산과 입장 때문에 나서지 않고 있고, 이라크 과도정부는 이들에게 일절 무관심이라서, 이들은 어떤 보호도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온갖 집단에게 학살과 약탈을 당하는 등 여러 끔찍한 일들을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아랍의 세속주의 독재자들이 일관적으로 보이는 모습으로, 알 아사드도 기독교도와 알라위파를 비롯한 소수 종파의 지지를 받고 있으며 무바라크, 사다트 등의 이집트의 독재자들도 콥트 교도들을 보호했다. 아랍은 아니지만, 이란의 팔라비 국왕도 조로아스터 교도, 유대인, 아르메니아 인들을 우대했고, 이후 호메이니 시대까지 그게 이어진다.[46]
한마디로 후세인은 '''어떻게든 조금만 더 도망 다녔거나 최소한 재판 절차를 잘 이용했으면 살 수 있었다.''' 그러나 후세인 본인이 이를 포기하고 죽음을 자초한 것이다. 이 때문에 권력을 잃은 후세인이 스스로 죽음을 택함으로써, 이라크 시아파 정부를 약화시키고 수니파를 결집시키려 했다는 추론도 있다. 권력도 잃고, 대를 이을 아들도 다 죽고, 측근들도 사형장 직행이 예정되어 있고, 그렇지 않은 작자들은 다 배신자들이고, 남은 가족들의 삶을 그나마 지키자면 누군가의 후원이 있어야 하고, 이 과정에서 한때 권력을 잡았던 폭군답게 당당하게 죽어서 영웅으로 남자고 스스로 죽음을 결정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 살아서 감옥에 갇혀 있으면, 그가 한 악행에 비해 이라크 정부가 관용을 베푼 게 되어, 그만큼 후세인에 대한 동정론도 옅어지지만, 덜컥 죽는 바람에 지금까지의 악행이 대부분 잊히고, 오직 시아파 보복의 희생자로만 기억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현재 이라크는 후세인이 예측한 그대로 돌아가고 있다.'''

5. 미디어에서


걸프전 이후, 10여 년간 미디어에서 '아랍의 독재자' 이미지로서 수도 없이 후세인을 자신, 혹은 그를 모티브로 한 인물이 등장했다. 죽은 뒤에는 관심이 줄어든 편이다.
  • 못 말리는 람보》에서 최종 보스로 등장한다(전작 <못말리는 비행사>에서도 마지막에 아주 잠깐 등장하는데, 한가롭게 일광욕을 하던 중 주인공이 떨어뜨린 폭탄이 배 위에 떨어진다...어떻게 살아난 거야?). 병맛 코미디 영화 답게 첫 등장부터 끝까지 정신신 나가 있으며, 그와 대적하는 주인공 및 미국 대통령 역시 단단히 정신 나가 있다. 주인공이 후세인과 일기토에서 밀리자 미국 대통령이 대신 출동해서 스타워즈다스 베이더오비완 케노비 간 결투를 재연하지 않나, 나중에는 애완견과 함께 냉동질소를 뒤집어쓰고 얼었다가 깨졌다가 다시 합쳐지면서 둘이 뒤섞이는 바람에 강아지 인간이 되지 않나...(이 모습을 보고 부하들도 얼이 빠진다).
  • BBCHBO의 합작 4부작 드라마 《하우스 오브 사담》이 이 사람의 일대기를 그리고 있다. 이 사람 가정은 알고 보면 콩가루 집안이다. 유대계 이라크 배우 이갈 나오르가 후세인 역을 맡았다.
  • 우다이 후세인의 대역인 라티프 야히아를 다룬 영화인 《데블스 더블》에선 필립 쿼스트가 후세인 역을 맡았는데, 이갈 나오르 만큼의 싱크로율을 보여준다.
  • 미국의 밀덕판 VS놀이라 할 수 있는 프로그램 《Deadliest Warrior》에선 폴 포트크메르 루주와 후세인의 국경수비대가 가상으로 맞붙는 에피소드가 나온 바 있다. 폴 포트의 기습공격으로 5:5에서 2:1로 밀려 버리지만, 크메르 루쥬 대원을 뒤치기 해서 죽이고, 그 시체에 자신의 상의를 입히는 훼이크로 폴 포트를 낚아 사살해서 승리한다. 메리야스 입고선 '알라후 아크바르!'를 외치는 모습이 은근히 패기 넘친다(…).
  • 사우스 파크》에서는 사담 후세인이 캐나다를 계속 정복하려 하다가, 결국 생화학 무기에 질식사 했다. 극장판에서는 최종보스로 나오며, 지옥에서 사탄과 함께 지옥을 정복한다고 나와 있는데, 사탄과 섹스만 하려는 사담 후세인이 지구를 혼자 정복하려 하다가, 사탄이 결국 사담 후세인을 죽여 버리고 지옥으로 다시 돌아간다. 하지만 사담 후세인도 다시 지옥으로 돌아와 있어서[47] 사탄이 하느님과 얘기한 후에, 사담 후세인은 천국으로 추방당한다.[48] 하지만 사담은 천국에서도 무기 공장을 만들면서 다시 캐나다를 정복할 기회를 노린다. 나중에 천국에서 탈출하고, 캐나다의 새로운 국무총리가 된 후에 이상한 법들을 적용하다가, 결국에는 사담 후세인이었단 것이 들통 나서 처형됐다. 이후로는 소식이 없지만, 다시 지옥으로 돌아간 걸로 추정된다.
  • SNL에서《사담과 오사마》라는 풍자 애니메이션을 방영했다. 여러모로 약빤 애니메이션이라는 평가.
  • 도학위룡에선 주성치가 뜬금포로 대문짝하게 후세인의 얼굴이 인쇄된 티셔츠를 입고 다닌다. 작중 배경이 걸프전 때문에 무기 수요 폭증해서 이를 노린 삼합회의 무기 밀매를 추적하는 내용이라지만 그걸 감안해도 매우 뜬금포(...).
  • 사자나 여러 동물들을 애완동물로 키웠다. 그리고, 후세인 몰락과 같이 이 동물들은 총살당하거나 동물원으로 끌려가 굶어죽는 비참한 최후를 당했다.

6. 기타


실제로 신전을 짓기도 했다. 후세인은 고대 바빌론 왕국의 2대 국왕인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궁궐 유적터 위에 자신의 여름 별장을 지었는데 이에 고고학자들은 매우 기뻐했다.
이 건물을 간략하게 묘사하면 네부카드네자르를 칭송하는 고대 상형문자가 새겨진 2~3피트 높이의 옛 벽돌 유적 위에는 6000만개가 넘는 모래 벽돌이 새로 올려졌고, 그 벽돌에는 '''"이라크의 수호자, 사담 후세인이 바빌론의 영광을 재현한다"'''는 문구가 새겨졌다. 지구라트 모양으로 지어진 사담 후세인의 별장은 축구 경기장 5개를 합친 크기였는데, 이를 위해 마을 주민 1000여명이 강제이주를 당해야 했다. 4층 높이의 건물에는 네부카드네자르의 궁궐과 똑같이 600개의 방이 있었으며, 바닥에 깔린 대리석의 넓이만 수만㎡에 달했다. 벽의 사면에는 고대 바빌론과 바빌론탑을 그린 벽화가 새겨졌고, 화장실에는 금으로 만든 변기가 놓였을 정도로 호화스러웠다.
하지만 이 별장은 그가 지은 수십개의 궁궐 중 하나일 뿐이고 사담 후세인은 이곳에 머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렇게 돈을 퍼붓고도 말이다. 이 건물은 말 그대로 그가 바빌론 왕의 반열에 오른 것처럼 포장하기 위한 치적용 궁궐을 짓는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물론 이 건물 짓기 위해 수많은 이라크인들이 그 모든 것들을 뒤집어 썼다.
이라크 전쟁 당시 그의 현상금은 자그마치 한화로 '''250억원'''에 달했다. 그러나 미군 특수부대에 체포돼서 아무도 250억을 받지 못했다.
후세인 처형 직후 2007년 1월까지 전세계에서 그의 교수형을 모방하다 죽은 어린이가 속출하기도 했는데, 2007년 1월 9일 기준으로 사망자는 12명에 달했다.
사우스 파크 극장판에서 사탄의 애인으로 나오는데 사탄을 제치고 지옥을 지배하려다가 지옥으로 떨어져 끔살된다...

[1] ''Ṣaddām Ḥusayn ʿAbd al-Maǧīd al-Tikrītī''[2] 사형을 최종 선고받고 교수형으로 처형당했다.[3] https://www.howtallis.org/saddam-hussein-height-weight-shoe-size/[4] https://web.yonsei.ac.kr/ibody/abo_fan/foreigners.htm[5] 본처[6] 애인[7] 1980년 당시 세계 평균보다 조금 잘살던 대한민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1704달러였는데 이라크는 3911달러로 4000달러에 육박하여 한국의 2.3배에 달했고, 부의 재분배도 어느정도 이루워져서 사우디 아라비아나 아랍 에미리트, 카타르, 쿠웨이트급까지는 아니었지만 국민들은 상당히 윤택한 삶을 살았으며, 이 당시의 이라크는 이대로 가면 오래치 않아 선진국으로 진입할것이라는 전망이 나올정도로 유망했던 국가였다. 괜히 전쟁자금으로 1000억 달러를 빌릴수있던게 아니었다. 참고로 대한민국은 88올림픽을 개최할때인 1988년이 되어서야 1인당 국민소득 4000달러를 달성하게 된다.[8] 특히 걸프전의 경우 아예 쿠웨이트가 영국이 식민제국주의 시절에 분단시킨 이라크 땅이라는 주장을 내세워 이라크에 강제합병하는 미친 짓까지 벌였다. 사실 이 주장도 맞지 않는 것이 이 양국은 같은 아랍/이슬람권이라는 점 빼면 역사적으로도 원래 단일 주권 국가로 지내 본 적조차 없는 다른 나라가 맞다. 자세한 건 쿠웨이트 문서 참조.[9] 다만 이란-이라크 전쟁의 경우 이라크내 시아파들의 반란 움직임을 제압한다는 명분으로 시아파 국가인 이란을 억제, 예방하겠다는 명분 아래에 후세인이 전쟁을 일으킨 측면도 있었다.[10] 근데 당대 아랍 여성치고 굉장히 기가 세서 집안에서 남편을 압도했으며 공공장소에서 팔을 드러내길 서슴지 않는 등 눈총을 사는 행동을 많이 하긴 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매춘부라는 비방이 생겼을지도...[11] 거짓말쟁이 하산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이유는 이 사람이 무슬림으로서 성지 메카를 순례해야만 받을 수 있던 명예로운 칭호인 '하지'라는 칭호를, 순례도 안하고 자처하고 다녔기 때문.[12] 아랍어로는 حزب البعث(Ḥizb Al-Ba‘ath)라 하는데 아랍어 발음은 '바트'보다는 '바스'에 가깝다.[13] 부족사회인 아랍인들 사이에서는, 부족의 구성원이 살해당하면 그 살해범에게 반드시 보복을 해야만 부족의 명예를 유지할 수 있다는 관습이 굳건했다. 이런 보복을 면하려면 정당한 이유가 있든지, 사죄와 보상이 함께 이루어져야만 했다.[14] 카심, 아리프 정권은 정보기구를 이용하여 반정부 세력을 잡아들이거나 죽였고, 당연히 그 수장은 피의 복수 규율에 의해 나날이 생명 위협에 시달리는 처지였다. 또한 국민감정도 그런 기구를 증오하고 있었으며, 아랍인으로서의 사회 규율이나, 개인적인 보신 차원에서 맡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맡는 순간 수천 수만 명의 살해 위협에 시달리게 되기 때문이었다.[15] 더군다나 이미 이전에 이집트와 같이 국가통합을 했다가 시리아가 손해보는 바람에 재분리된 전적도 있었다.[16] 당시 이란은 탄도 미사일 공격에서 열세에 처했으며 거기에 후세인이 탄도 미사일에 핵이나 화학무기를 탑재하고 공격할 수 있다는 공포로 인해 혁명의 수도 테헤란이 공황상태에 빠질 정도였다.[17] 이 때문에 후세인이 몰락하자마자 이라크인들이 후세인의 동상들을 파괴하고 사진들도 모조리 태웠다.[18] 예를 들어 어느 날 한국 정부가 국내에 있는 IAEA사찰단을 모두 추방시킨 후 "한국은 핵개발을 안할 것이다." 라는 성명을 발표한다고 해 보자. 국제사회의 어느 누구가 그걸 믿겠는가?[19] 차량폭탄 테러로 죽이려 했다.[20] 후세인도 조지 W. 부시의 침공 의도를 명확히 인지한 시점에서는 살아남기 위해 전쟁을 피하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몇 년 전에 추방했던 UN의 무기사찰을 다시 허용한 것이다. UN의 사찰에 의해 이라크 내의 대량살상무기 개발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는 인증까지 받아내었고 그로 인해 이라크 전쟁이 UN차원의 국제적 지지를 얻지는 못하는 성과까지는 만들었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역부족이었다.[21] 후세인 소재파악에 혈안이 되어 있었던 미군이 공식발표 기자회견장에서 던진 첫마디는, "Ladies and gentlemen, we got him!(신사숙녀 여러분, 드디어 그를 잡았습니다!)" 이 표현은 영문위키백과의 공식 항목에도 병기되어 있다. 미군의 선전효과와 쇼맨십을 엿볼 수 있는 대목.[22] 이 당시 지하 비밀장소에서 후세인은 난로 및 가스 오븐 전문 업체인 한국 《파세코》사의 난로로 서늘한 지하에서 추위를 이겨내고 있었다(…). 파세코 대표이사가 《월간 신동아》에서 한 인터뷰에 따르면, 이 소식을 듣고 농담조로 이를 활용해 자사 홍보를 할까 우스갯소리를 했다가, 후세인을 광고모델로 썻다가는 별로 듣기 좋은 소리 못 들으니 그냥 넘어가자고 간부들이 진지하게 말한 바 있었다 한다. 다만 이는 '파세코' 사가 (극단적으로 더운 낮과 반대로 밤에는 인정사정없이 추워지는)중동 일대 및 세계 각국에서 광장히 가성비 좋은 난로 평가를 받아 사담 후세인도 어쩌다 쓴 것일 뿐, 큰 의미를 갖지 않는다는 의견이 중론이다.[23] 사담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사담의 두 아들인 우다이와 쿠사이는 미 육군 공수부대원들의 농성 중인 건물에 대한 TOW 미사일 공격에 직격당해 신체에 심각한 손상을 입은 채 전사했으며, 미군은 이들의 신분을 확인하고자 시신을 다 짜 맞추고 봉합수술까지 해야 했다. 이후 봉합된 시신은 티크리트로 보내져 장례를 치렀다.[24] 후세인이라는 인간의 잔혹성과는 별개로 이라크 전쟁만 놓고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쿠웨이트를 인정하지 않고 침략전쟁을 자행한 시점에서 아랍의 독립 운운은 설득력을 잃는다. 이라크전 이후 알아낸 대량살상무기 부재가 이라크전쟁의 정당성을 훼손했다고는 하지만 애초에 이란-이라크 전쟁 시절부터 화학무기와 탄도탄과 같은 대량살상무기를 실전에서 사용해 왔던 전과자가 다름 아닌 후세인이다. 게다가 전후 알아낸 사실은 후세인이 착해서 대량살상무기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90년대에 지속되었던 UN의 경제제재가 생각 외로 너무나도 효과적이어서 후세인의 많은 무기개발 계획들이 페이퍼플랜에 머무를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25] 단 두자일 학살이 아닌, 이란-이라크 전쟁 중에 벌어진 쿠르드족 학살은 이란의 공격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26] 나머지 학살극은 나중에 다른 측근들에게 적용되어, 그들이 사형 선고를 받는 증거로 사용되었다.[27] 교수형 집행 때 사형수 머리에 씌우는 일종의 두건이다.[28] 대신 목에 천을 감았다고 한다.[29] 그러나 후세인 변호사는 후세인은 제네바 협정의 보호를 받았어야 했다며 교수형이 아닌 총살형을 집행했어야 한다고 했으며 유엔에 조사를 촉구했다.링크 왜냐면 후세인이 죽기 전까지는 전쟁 포로로 간주됐다며 이에 따라 그는 1949년 제네바 협약의 보호 혜택을 받았어야 했다고 주장했다. 제네바 협약에 따르면 후세인은 교수형이 아닌 군인의 사형 방법인 총살형을 받았어야 했다고 했다.[30] 판사든 검사든 어차피 이슬람교도이기 때문에, "신은 위대하다." 등의 구호를 외치면 그에 대놓고 일침을 놓거나 반대하기가 곤란해지는 정서가 있다. 사실 법정 소란이 일어나거나 하면, 판사들이 쿠란의 구절을 인용하거나 해서 피고들을 진정시키는 방법도 자주 쓰이던 거라 사담 후세인만 탓할 수는 없다. 특히 쿠르드 판사 라우프 압델 라흐만은 이 방식으로 소란을 막아보려다, 사담이 오히려 신은 위대하다는 구호를 외쳐 조용히 수긍하고 마는 모습도 보여주었다.[31] 수니파와 시아파는 '''천년을 아득히 넘은''' 원수 관계라 공공의 적이 있어도 그냥 각자 해결하려고 하지, 서로 힘을 합치는 일 자체가 없고 오히려 한쪽이 상대방 엿먹으라는 심리로 그 적이랑 손잡지 않으면 다행일 정도로 사이가 정말정말 나쁘다(...).[32] 다만 사형집행인들이 처음부터 용수를 씌우지 않고 멋대로 집행한 것은 아니다. 후세인 본인이 용수를 쓰는 것을 거부하여 그냥 안 씌운 채로 했다고 한다.[33] 다만 이는 후세인 자신도 하등의 도움을 준 바가 없었던 부분으로 후세인은 바로 그 세속적인 권력의 유지를 위해서 세속적으로 수니파를 우대하고 세속적으로 출신부족을 우대하면서 종교갈등에 더해 부족갈등을 오히려 더 부추긴 장본인이다. 즉 후세인의 세속주의라는 것이 자신의 권좌유지를 부족과 종파에 우선시한다는 의미의 세속주의라는 것이지 부족과 종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세속주의가 아니었다는 것. 애초에 후세인이 종파와 부족화합에 힘쓰는 지도자 였다면 그렇게 처참하게 몰락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침략주의에 의해 자멸하지도 않았을 것이다.[34] 한때 국가 서열 4위였는데, 후세인, 쿠사이, 우다이 다음이었다.[35] 이 당시 이 미사일 세례를 퍼부었던 토우 험비와 아파치 모두 제101공수사단 소속이었다고 한다.[36] 미국이 침공할 당시 이라크 중앙은행 금고를 싹싹 긁어갔다고 한다. 흠좀무[37] 말이 좋아 음식 자르는 칼이지 전동식 나이프였단다. 그 정도면 반쯤 전기톱 수준이다.[38] 축구선수들에게 맨발로 몇 시간씩 콘크리트로 만든 축구공을 차라고 했단다. 흠좀무[39] 그나마도 죽이겠다고 펄펄 뛰는 걸 아내 사지다와 요르단 국왕이 뜯어말려서 참았다고 한다.[40] 특히 이라크 무기 개발 책임자가 된 후세인[41] 물론 최근에는 두 나라가 외교 관계개선을 펼치면서 후세인 정권기때보다는 조금 나아지기는 했다.[42] 헌데 웃긴 건 카타르도 수니파 국가이다.[43] 그래서 걸프전 이후 90년대에 하페즈 알 아사드빌 클린턴이 정상회담을 하고 국교 정상화를 하기도 했다. 물론 현재는 시리아 내전으로 도로 단교(...).[44] 사담 후세인의 성급한 처형과, 그의 처형 동영상 유출이 이를 부채질했다는 비판도 꽤 있다.[45] 사실, 후세인이 집권하기 이전에도, 이라크 역시 군부의 쿠데타가 자주 일어나서 정권이 뒤엎어지고 바뀌는 등 그다지 멀쩡한 나라는 아니었다.[46] 다만 무바라크가 시위로 쫓겨나갈 당시, 콥트 정교회 신자 다수가 되레 시위에 참여하며 지지했는데, 무바라크 시절 경제적인 어려움에 빠지고, 이들도 차별을 많이 당했기 때문이다. 샤한샤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가 퇴위당하여 추방당할 때 되레 아르메니아인들이 호메이니를 지지하던 것과 같이, 소수파들도 이득에 따라 갈라지기야 하지만.[47] 이때 사담이 "내가 어디로 갔을 거 같았어, 디트로이트?"라고 말한다(…).[48] 《사우스 파크》의 천국은 몰몬교 교도인들만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