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터 플라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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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애[3]
1.1. 선수 생활
1.1.1. 클럽
플라처는 1925년부터 SC 메탈룸 빈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고 1926년에는 골키퍼로 포지션을 변경했다. 1927년에는 브리기테나우어에서 프로 커리어를 시작했고, 1927-28 시즌 브리기테나우어의 깜짝 오스트리아 1부 리그 준우승에 기여하였다.
1929년부터 1934년까지 플라처는 플로리드스도르프에서 뛰었지만 1933-34 시즌 도중에 플로리드스도르프의 지역 라이벌인 아드미라 빈으로 이적했고 아드미라 빈은 플라처의 이적 이후 바로 오스트리아 1부 리그 우승과 미트로파 컵 준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아드미라 빈은 30년대 오스트리아 1부 리그를 주름잡는 강팀으로 군림했지만 1938년 4월, 안슐루스가 터졌다. 그 이후 아드미라 빈은 독일의 가울리가 오스트마르크에 소속되었고 1939년 독일 축구 챔피언십에까지 진출했지만 최종전에서 샬케에 0대9의 기록적인 대패를 당하고 말았다.[4]
1940년에 플라처는 선수 생활을 마쳤다.
1.1.2. 국가대표팀
클럽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플라처는 1931년부터 국가대표팀에 발탁되었다. 하지만 당시 오스트리아 대표팀에는 루돌프 하이덴이 주전 골키퍼로 자리잡고 있어서 플라처에게는 출전 기회가 많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다 1933년, 하이덴이 프랑스로 떠난 이후 플라처는 기회를 잡을 수 있었고 이듬해의 월드컵에서 주전으로 오스트리아의 골문을 지켰다. 대회 내내 뛰어난 모습을 보여준 플라처였지만 4강전에서 호스트 이탈리아의 엔리케 구아이타에게 통한의 결승골을 허용, 월드컵 우승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안슐루스 이후 플라처는 독일 대표팀에서 2게임을 더 출전했다.
2. 플레이 스타일 & 평가
반사신경과 점프력에 강점을 가진 골키퍼.
3. 뒷이야기
- 1939년 독일 챔피언십 최종전의 대패 이후 아드미라 빈은 샬케와 리벤지 매치를 가졌는데 여기서 두 팀은 1대1로 비겼다. 하지만 아드미라의 2골이 취소되면서 비긴 결과로 끝났고 흥분한 오스트리아 팬들이 샬케 선수들을 공격하려 해 샬케 선수들은 경찰의 보호를 받으며 경기장을 빠져나가야 했다.
- 1930년대 중반부터 플라처는 에르트베르크에서 카페를 운영하였고 배우로도 활동하기도 했다.
4. 수상
4.1. 클럽
- 오스트리아 1부 리그 우승 3회: 1933-34, 1935-36, 1936-37(아드미라 빈)
- 가울리가 오스트마르크 우승 1회: 1938–39(아드미라 빈)
- 오스트리아 1부 리그 준우승 2회: 1926-27(브리기테나우어 AC), 1934-35(아드미라 빈)
- 독일 축구 챔피언십 준우승 1회: 1939(아드미라 빈)
- 미트로파 컵 준우승 1회: 1933-34(아드미라 빈)
4.2. 국가대표
- 중유럽 컵 우승 1회: 1931-32
- 중유럽 컵 준우승 1회: 1933-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