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 복장유물
1. 개요
平昌 上院寺 木造文殊童子坐像 腹藏遺物. 조선 세조 때 만든 평창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에 복장된 보물급 유물 23점. 월정사 성보박물관에 소장 중이고 보물 제793호로 지정되었다.
2. 내용
1984년 7월 19일 문화재 관리국 주재 아래 문수동자좌상을 조사하여 복장유물 총 23점을 확인하였다. 복장유물의 구성은 크게 발원문과 중수문, 불경 등의 전적류와 범자다라니가 찍힌 황초폭자, 원통형의 후렴통, 수정 사리병과 사리, 비단 상의 2벌 등으로 고려 시대의 복장형식을 계승했다. 또한 왕실이 발원하고 주도한 복장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복장들보다 다양하고 화려한 품목으로 구성되었음이 특징이다.
불경류는 제작연대가 1399년부터 1567년까지이다. 중수문의 기록에 따르면 1599년에 중수문을 넣기 위해 복장을 한 번 개봉하였고, 불상을 첫 제작한 이후에도 복장물을 추가로 납입했음을 알 수 있다.
3. 구성
- 의숙공주 부부의 발원문 : 고급 푸른색 비단에 붉은 글씨로 적었다. 세조 12년(1466) 2월 세조의 딸 의숙공주가 석가여래, 약사여래, 아미타불, 문수보살, 보현보살, 미륵보살, 관음보살, 지장보살, 십육응진, 천제석왕을 오대산 문수사에서 정성스레 조성하였음을 밝혔다.
- 중수발원문 :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인 선조 32년(1599) 5월에 비구 지운과 보명 등이 절을 추가로 중수하고 지은 글. 승려 석준과 원어가 화사로 참여해 동자문수 일존, 노문수 일존, 십육성중, 화엄회도, 영산회도, 서방회도, 원각회도, 미타회도, 비로회도, 달마진영, 나옹진영 등 여러 그림들을 중수했음을 기록했다.
- 백지묵서제진언(白紙墨書諸眞言) : 세조 9년(1463)에 선종선사 내호(乃浩)가 백지에 먹으로 쓴 진언집. 진언 66개를 썼는데 한자로 진언의 제목을, 실담문자로 산스크리트어 진언을 적었다.
4. 의의
세조 때의 문수보살 감응설화를 뒷받침해주는, 세조 시기 숭불의식 연구에 좋은 자료이다. 나아가 신라시대부터 내려온 문수사상과 오대산 문수신앙에 대해 알아볼 수 있는 중요한 사료이다. 또한 고려 후기의 유물과 세조시기의 유물[1] , 이후 선조 때까지 왕실 출처 유물들이 큰 훼손 없이 전해져 소중한 한국의 문화재로 인정받는다.
5. 보물 제793호
평창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 복장유물(平昌 上院寺 木彫文殊童子坐像 腹藏遺物)은 강원도 평창군 오대산 상원사에 있는 목조문수동자상(국보 제221호)에서 1984년 7월 불상의 유래를 밝힐 수 있는 2개의 발원문(發願文)과 조선 전기의 복식, 전적류 등 23점의 복장유물이 발견된 유물이다.
발원문은 불상을 만들게 된 이유와 만든 사람들에 대한 기록을 담고 있으며 후대에 보수한 기록도 적어 놓고 있다. 첫번째 발원문은 세조 12년(1466)에 세조의 둘째 딸인 의숙공주와 남편 정현조가 세조와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고자 오대산 문수사에 여러 불·보살상을 만들어 모셨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크기는 세로 31.5㎝, 가로 24㎝의 낱장으로 되었고, 푸른 비단에 붉은색으로 글씨를 썼다. 또다른 발원문은 1599년에 2구의 문수동자상과 16구의 나한상 등에 금칠을 새로 하고 고쳤다는 내용이다. 크기는 세로 34.6㎝, 가로29.1㎝의 낱장으로 되었고 역시 푸른 비단에 붉은색으로 글씨로 썼다.
전적류는 모두 13종으로 백지묵서제진언, 대방광불화엄경, 오대진언, 묘법연화경 5종, 원각경 2종, 육경합부 3종이 발견되었다.
백지묵서제진언은 불교의 가르침 66가지를 범어로 옮겨 적은 것으로, 두루마리 형태이며 크기는 세로 41.8㎝, 가로 679.3㎝이다.
대방광불화엄경은 화엄경 60권 가운데 권28에 해당하며 간행 시기는 12∼13세기로 추정된다.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으로 병풍처럼 펼쳐서 볼 수 있는 형태이며, 접었을 때의 크기는 세로 31.6㎝, 가로 12㎝이다.
오대진언은 다섯가지의 다라니 진언(眞言:부처님의 깨달음을 말한 글)을 범어, 한글, 한자순으로 적고 있다. 성종비인 인수대비의 명으로 당나라에서 원본을 구하여 한글로 음역하고, 성종 16년(1485)에 간행한 것이다. 글자를 하나하나 파서 고정된 틀에 끼우고 닥종이에 찍어낸 활자본으로 크기는 세로 27㎝, 가로 16㎝이다.
묘법연화경 권1-3, 4-7은 2권의 책으로 되었고, 크기는 세로 26.9㎝, 가로 16.8㎝이다. 작은 글자로 아주 정교하게 새겨 고려 정종 1년(1399)에 간행한 것으로 해린(海隣)이 1년에 걸쳐 새긴 것이며 인쇄 상태로 볼 때 판을 새기고 한참 후에 찍어낸 것으로 보인다. 묘법연화경 권1-7은 병풍처럼 펼쳐서 볼 수 있는 형태이며 모두 103장으로 되어 있는데, 접었을 때의 크기는 세로 24.1㎝, 가로 8.5㎝이다. 태종 4년(1404)에 간행된 목판본으로 표지는 검푸른 색이고 제목은 금색으로 쓰여있다. 묘법연화경 권6-7은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으로 1권의 책으로 되어 있으며, 크기는 세로 35㎝, 가로 25㎝이다. 세조 때 간행된 을해자본으로 인쇄직후 불상에 넣은 듯 매우 깨끗이 보관되어 있다. 묘법연화경 권1-3은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으로 1권의 책으로 되어있고 크기는 세로 27.6㎝, 가로 16.6㎝이다. 불상에 넣기 전에 읽으면서 달아놓은 토가 있는 것으로 보아 사용중에 복장유물로 넣은 것으로 보인다.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은 세조 11년(1465)에 간행된 목판활자본으로 크기는 세로 27.7㎝, 가로 18.5㎝이다. 세조가 1465년에 원각사를 세우고 난 뒤 효령대군에게 명하여 교정한 원각경을 정란종(鄭蘭宗)이 쓴 것으로 을유자(乙酉字)로 찍은 것이다. 을유자본은 을유년에 만든 활자로 찍은 책을 말하며 그해의 간지를 따서 을유자라고 부르며, 이 책은 현재 전하는 을유자본 가운데 가장 깨끗한 책이다. 또다른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은 권상·중·하 3권이 세로 25.1㎝, 가로 16.5㎝의 하나의 책으로 되어 있다. 이 책은 전에 강희안이 옮겨 적고 간행했던 간경도감판본을 명종 19년(1564)에 신흥사(臣興寺)에서 다시 새겨 찍어낸 것으로 그 새김이 매우 정교하다.
세로 29.3㎝, 가로 17.3㎝ 크기의 육경합부는 1440년에 영제암에서 판각한 목판을 인수대비가 성종 3년(1472)에 대대적으로 찍어낸 것 가운데 하나이다. 화암사에서 성종 19년(1488)에 다시 새긴 다른 육경합부는 보존상태가 양호하며, 크기는 세로 26.6㎝, 가로 15.7㎝이다. 진안(鎭安) 중대사(中臺寺)에서 세조∼명종년간에 간행한 것으로 추정되는 또다른 육경합부는 크기가 세로 26.4㎝, 가로 16.3㎝인데 상원사 복장유물 중 보존상태가 가장 좋지 않다.
당시 상류계층에서 입었을 것으로 보이는 명주 적삼 1점과 생명주 적삼 1점은 불상을 만드는데 도움을 준 사람들이 공덕을 쌓기 위해 다른 유물들과 같이 넣은 것으로 보인다. 황색 보자기는 불상에 들어갈 유물들을 싸는데 쓰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도 구슬 3개와 사리가 같이 발견되었다.
위의 유물 중 발원문은 상원사문수동자상 및 여러 불·보살의 조성연대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고, 전적 중 제진언은 조선 전기 필사본으로는 유례가 드문 것이며, 그밖에 활자본과 목판본은 나름대로의 서지학적 특징을 갖고 있다. 또한 복식류는 조선 전기의 의류로 현재까지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