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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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플라비우스 포카스 아우구스투스
(Flavius Phocas Augustus, 라틴어)
플라비오스 포카스(Φωκᾶς, Phokas, 그리스)
'''생몰 년도'''
547년 ~ 610년
'''재위 기간'''
602년 ~ 610년
1. 개요
2. 생애
2.1. 즉위 전의 삶
2.2. 황제 즉위와 숙청의 시작
2.3. 대숙청
2.4. 파멸로 치닫는 제국
2.5. "그대가 다스린다면 더 낫겠는가?"
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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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로마 제국의 65대 황제. 서기 602년 마우리키우스 황제를 몰아내고 제위에 오른 뒤 610년 헤라클리우스에 의해 폐위될 때까지 8년간 수많은 사람들을 살해하고 유대인을 학살해 제국에 분란을 야기했으며 롬바르드족, 아바르족, 슬라브족 등의 각종 야만족들과 사산조 페르시아의 침공을 막아내지 못해 수도 콘스탄티노플과 북아프리카를 제외한 제국 전역이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다행히 이 폭군을 몰아낸 헤라클리우스에 의해 동로마 제국은 멸망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그 여파는 실로 심각해 훗날 이슬람의 폭풍이 시작될 때 제국이 이를 막아내지 못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2. 생애



2.1. 즉위 전의 삶


황제로 즉위하기 전의 삶은 별로 알려진 바 없다. 다만 황제 즉위 직전에 백부장[1]이었던 것을 볼 때 빠른 출세를 위해 군에 입대해 오랫동안 경력을 쌓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동로마 제국의 마우리키우스 황제는 서방 및 동방과의 끊임없는 전쟁으로 국고가 바닥나자 지출을 줄이기 위해 군 감축을 진행하고 있었다. 서기 588년 모든 군량의 4분의 1을 감축하자 동방군이 폭동을 일으켜 이를 진압하는 데 상당한 희생을 치뤄야 했고 599년에는 아바르족이 잡아간 제국군 포로 1만 2천 명의 몸값을 지급하는 것을 거부해 포로들이 모조리 학살당하는 비극을 초래했다.
급기야 602년, 마우리키우스 황제는 도나우 강 너머에 진군한 군대에게 진지로 돌아오지 말고 거기서 겨울을 보내라는 말도 안 되는 지시를 내렸다. 마우리키우스 황제가 이런 지시를 내린 건 병사들이 귀환하기 위해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8개월 동안 도나우 강 너머의 야만족과 격전을 치룬 병사들은 심신이 고단한 상태였다. 그들은 상당량의 전리품을 가지고 있었으나 집에 돌아가서 시장에 팔기 전에는 그런건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게다가 야만족이 곳곳에 도사리는 위험한 곳에서 겨울을 보내는 것은 누가 봐도 너무 위험했다. 당연히 병사들은 분노했고 세쿠리스카 요새에 이르렀을 때 더이상의 진군을 거부했다.
이에 그들의 지휘관 페트루스는 조금만 더 참아보자고 호소했지만 병사들은 황제의 동생이니 황제 편을 드는 게 당연하다며 비웃고는 당시 백부장이었던 포카스를 방패 위에 올리고 지도자로 선출했다. 페트루스는 간신히 목숨을 건진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와 반란 소식을 전했다. 이때 페트루스는 반란군 측이 황제에게 전하는 전갈을 가지고 왔다. 이 전갈에 따르면, 반란군 병사들은 정작 포카스를 황제로 뽑은 것은 아니며 마우리키우스 황제를 거부할 뿐 황실에 대한 충성 자체를 포기한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 그들은 황제의 17살짜리 아들 테오도시우스나 장인 게르마누스를 새 황제로 받들겠다고 선언했다.
마우리키우스는 즉각 테오도시우스와 게르마누스를 반역자로 규정하고 소환했다. 테오도시우스는 매질을 당했고 게르마누스는 소피아 대성당으로 피신해 지지자들을 동원, 자신을 잡으러 온 황궁 근위대를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한편 황제는 원형 경기장에 민중을 소집한 후 지지를 호소했다. 당시 원형 경기장엔 청색당과 녹생당이 파벌을 나뉘어 수도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마우리키우스는 이 두 파벌의 충성을 확인한 후 두 당이 힘을 합쳐 반란군을 막는다면 위기를 넘길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청색당원의 지지는 확인했지만 녹색당원의 지지는 불확실했고 성난 군중은 이 모든 게 무능한 황제 탓이라며 폭동을 일으켜 황궁 앞 광장까지 진격했다.
602년 11월 22일 밤, 마우리키우스는 아내와 여덟 명의 자식, 그리고 동방의 민정 총독 콘스탄티누스 라르디스와 함께 변장을 하고 황궁을 빠져나간 다음 일전에 자신의 도움을 받아 제위에 오른 바 있던 사산조 페르시아 황제 호스로 2세에게 의탁하려 했다. 한편 게르마누스는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에서 나온 뒤 민중의 지지를 받아 제위에 오르려 했다. 그는 청색당 편에 속했지만 수적으로 더 많은 녹색당의 지지를 얻고자 녹색당의 지도자 세르기우스에게 지지를 부탁하고 황제가 될 경우 충분한 대가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녹색당은 게르마누스가 제위에 오르게 될 경우 입을 싹 씻고 청색당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정국을 이끌 것이라 판단해 이를 거부하고 포카스를 황제로 추대하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나라를 잘 다스리던 명군을 몰아내고 개막장인 쿠데타로 즉위한 황제가 바로 '''서양사, 아니 전 세계에서 손꼽히는 최악의 폭군 중 하나인 포카스이다.'''

2.2. 황제 즉위와 숙청의 시작


한편, 포카스는 당초 추대하고자 했던 테오도시우스와 게르마누스가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하자 비로소 황제가 되겠다는 야심을 품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군했다. 마침내 11월 23일, 포카스는 백마가 끄는 전차를 타고 노변에 운집한 군중에게 금가루를 뿌리며 수도에 당당하게 입성했다. 이튿날에는 병사들에게 전통적으로 주는 하사금을 내렸고 화려한 행사를 열어 백성들을 즐겁게 했으며 자신의 아내 레온티아에게 황후를 뜻하는 '아우구스타'의 직함을 수여했다. 그런데 마지막 행사에서 청색당과 녹색당 사이에 난투극이 벌어졌고 그 과정에서 청색당원 몇 명은 이렇게 외쳤다.

"마우리키우스는 죽지 않았다는 걸 명심해라!"

물론 포카스는 그걸 잊지 않았다. 얼마 후, 그는 병사들을 보내 도망치고 있던 마우리키우스 일행을 체포했다. 마우리키우스와 어린 자식들은 모조리 참살당했고 시신들은 갈기갈기 찢겨진 뒤 바다에 버려졌다. 또한 수급들은 따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송되어 햅도몬에 내걸렸다. 그러나 제국의 백성들은 얼마 안 가서 자신들이 마우리키우스를 죽음으로 몰아간 것이 치명적인 실수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2.3. 대숙청


당대 역사가들의 기록에 따르면, 포카스는 붉은 곱슬머리에 툭 튀어나온 짙은 눈썹, 추한 얼굴에 화를 낼 때마다 붉은색으로 변하는 커다란 상처 자국까지 있는 끔찍한 인상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성격은 외모만큼이나 끔찍했다. 그는 즉위 후 8년간 수많은 이들을 숙청했다. 마우리키우스와 함께 달아났던 민정 총독 콘스탄티누스 라르디스를 시작으로 선황제 마우리키우스의 동생 페트루스, 선황제의 태자 테오도시우스 같이 제위를 위협할 만한 이들에게 끔찍한 고문을 가한 뒤 살해했다. 다만 게르마누스는 포카스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사제가 된다는 조건하에 목숨을 건졌다. 마우리키우스 황제의 아내 콘스탄티나 황후는 세 황녀와 함께 수녀원에 감금되었고 마우리키우스에게 충성한다고 의심받는 이들은 모조리 죽음을 당했다. 도끼나 화살로 죽은 사람은 운이 좋은 편이었고 대개는 고문을 받으며 서서히 죽어갔다.
이무렵, 사산조 페르시아의 황제 호스로 2세는 자신의 은인인 마우리키우스가 비참하게 살해된 것을 명분으로 삼아 서기 603년에 대군을 동원해 비잔티움 제국을 공격했다. 당시 제국 동방군은 나르세스 장군이 통솔하고 있었다. 그는 뛰어난 전공을 여러차례 거두어 페르시아인들의 두려움을 샀지만 포카스를 따르기를 거부하고 에데사를 공략한 뒤 호스로 2세와 연합해 포카스의 진압군을 격파했다. 이에 포카스는 북방의 아바르족과 평화 협정을 체결한 뒤 전군을 동원해 페르시아에 맞섰으나 패배했다.
이에 포카스는 나르세스에게 신변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평화 협정을 맺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그것은 함정이었고 포카스는 수도에 도착한 나르세스를 체포한 뒤 산 채로 태워죽였다. 또한 다른 유능한 장군들을 반역을 일으킬 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체포해 감옥에 가둬버렸고 수도원에 갇혀있던 게르마누스가 여전히 황제가 될 뜻을 품고 반역을 도모한 것이 드러나자 곧바로 그를 비롯한 관계자들을 처형했다. 그중에는 콘스탄티나 황후와 세 황녀도 있었다.

2.4. 파멸로 치닫는 제국


유능한 장군들을 모조리 처형한 뒤, 포카스는 제국군 최고 지휘관 자리에 조카 도멘치올루스를 앉혔다. 그러나 그는 전투 경험도 없고 유능하지도 않은 풋내기에 불과했다. 이에 호스로 2세는 대대적인 공세를 감행해 메소포타미아 서부와 시리아, 아르메니아, 카파도키아, 파플라고니아, 갈라티아 등지를 모조리 휩쓸었다. 그리고 마침내 608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빤히 바라다보이는 칼케돈까지 이르렀다. 한편 슬라브족과 아바르족도 발칸 반도로 물밀듯 내려와 제국의 안위를 위협했다.
사정이 여기에 이르렀는데도 포카스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또다시 병크를 터트렸다. 그는 유대교도들을 박해하고 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유대인들은 제국 동부 속주에 살고 있어 페르시아의 공세에 노출된 상태였다. 그런 마당에 유대인들을 박해한다는 것은 너무도 어리석은 행위였다. 그 결과, 안티오키아의 유대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현지의 그리스도교들을 학살하였고 이후 제국의 동방 영토에서는 그리스도교도들과 유대인들 간에 꼬리에 꼬리를 무는 유혈극이 벌어졌다.
포카스는 제국이 파멸을 향해 달려가자 편집증적인 불안 상태로 빠져 들어가 수많은 이들을 고문하고 끔찍하게 죽였다. 이에 녹색당이 더 이상 참다 못해 봉기를 일으켜 공공건물을 불태웠고 팔레스타인에서는 내전이 발발해 수많은 이들이 희생당했다. 그야말로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고 제국은 마침내 사산조 페르시아에게 정복당하는 듯했다.

2.5. "그대가 다스린다면 더 낫겠는가?"


그러던 608년, 카르타고 총독 헤라클리우스는 존망의 위기에 빠진 제국을 구하기 위해 거병했다. 그는 테살로니카로 진군해 유럽의 모든 불만분자들을 병사로 받아들이고 610년 여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군했다. 헤라클리우스는 수도로 진군하는 동안 여러 도시에 들러 지지자들을 확보했고 10월 3일 마르마라 해를 거쳐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입성했다. 이틀 뒤, 포카스는 포로로 잡혀 헤라클리우스 앞으로 끌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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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바로 제국을 이 꼴로 만든 자인가?"

헤라클리우스가 이렇게 묻자, 포카스는 기세 좋게 대꾸했다.

"그대가 다스린다면 더 낫겠는가?"[2]

헤라클리우스는 그의 뻔뻔한 태도에 격노해 포카스의 몸을 여러 조각으로 잘라낸 뒤 사냥개들의 먹이로 던졌다.[3] 이리하여 제국을 멸망 직전으로 몰아간 폭군은 마침내 최후를 맞이했다.

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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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로마를 가보면 포로 로마노 한가운데에 포카스를 기리는 기둥이 서있다. 포로 로마노에서 제일 나중에 세워진 로마 건물. 이 기둥 밑에는 포카스를 아부하는 내용의 라틴어 글이 적혀 있다. 원래는 꼭대기에 동상도 있었는데 포카스가 죽으면서 기록말살형으로 동상도 같이 끌어내려졌다.

[1] 로마 시대의 군 직책으로 병사 100명을 지휘하는 하급 장교다.[2] 헤라클리우스는 이슬람의 발흥만 아니었으면 대제 칭호를 받고도 남았을 사람이다. 당연히 포카스보다 몇배는 나았다.[3] 일설에는 청색당과 녹색당의 공동 처분에 맡겨진 뒤 그들의 손에 처형당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