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 중성리 신라비
1. 소개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흥해읍 중성리에서 발견된 신라 시대의 비석. 대한민국의 국보 제318호[2] .
2. 설명
지증왕 시대인 501년에 만들었고 비교적 최근인 2009년에 발견됐다. 여러 신라시대 비석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비석이기도 하다. 눌지 마립간 21년(441)에 세워진 비석이란 설도 있고 발견 당시엔 상당히 논의가 분분했는데, 441년이라면 501년보다 사학계에 훨씬 충격적인 대발견이었겠지만 이후 현재는 501년이 유력한 편이다.
발견 경위가 드라마틱한데 2009년 5월 초순 경 포항시가 주민개선생활개선사업의 일환으로 중성리 일대에서 도로개설 작업을 하며 한 쪽에 돌들을 모아 놓았다고 한다. 그 중 편평한 돌 하나를 근처(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흥해읍 학성리)에 거주하는 김헌도(金憲道. 당시 46세)씨가 작업 현장에서 끄집어내서 집으로 가져가 마당의 화분 받침으로 사용할 생각이었는데 돌의 무게가 만만치 않아(약 110 kg) 곧바로 집으로 가져갈 수 없어 이틀 후 휴무일이 돌아오자(2009년 5월 9일 토요일로 추정) 그는 돌의 바닥에 지주목을 받치고 밧줄을 묶어서 조금씩 끌어당겨 10여m 떨어진 자신의 집 마당까지 겨우 운반했다고 한다. 그리고 5월 11일에 이 돌을 물로 씻다가 글씨가 쓰여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5월 13일 오후 경북매일신문사에 근무하는 친구 이창형 국장에게 제보했다고 한다.
신문사는 향토사학자들에게 알려 13일 오후 현장에서 비문을 1차 판독, 제작 시기는 5~6세기 초이며 국보급 이상의 가치를 지닌 것으로 추정했고 이튿날 5월 14일 아침 경북매일신문이 `국보급 추정 신라비석 발견`의 제목으로 특종보도를 하여 학계와 일반 국민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아래는 참고기사들.
국보급 추정 신라비석 발견 (경북매일. 2009-05-14)
<사람들> 最古 신라비 발견 김헌도씨 (연합뉴스. 2009-09-03)
포항 흥해 중성리비 발견 `그 이후` (경북매일. 2009-12-29)
`포항중성리신라비 국보 승격`에 부쳐 (경북매일. 2015-04-27)
김씨는 문화재청으로부터 보상금 5천만원을 받았다고 한다. 참고로 문화재 보상금은 보통 평가액의 절반에서 세금 22%를 제한 금액을 신고자에게 보상하는데 이러한 문화재청의 원칙은 작은 보상금 액수와 그에 대한 세금까지 더해져 낮은 문화재 신고율의 원인이라는 의견도 있다.
사진으로 알 수 있지만 좀 더 오래되어 그런지 다른 비석들에 비해서도 조금 조악하게 만들어져있고 전형적인 중국식 한문이 아니라서 해석하기도 매우 어려웠는데 그 내용은 '사간지궁'과 '일부지궁'이 '모단벌'의 재산을 빼앗는 분쟁이 발생했고 신라 중앙정부에서 여기에 개입하여 진상을 파악한 후 모단벌에게 재산을 돌려줄 것과 이에 대해 다시 말썽을 일으키는 자는 중벌에 처한다는 조치를 취한 후 이를 널리 공표하고 경계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냉수리 신라비와 비슷한 내용인만큼 당시 신라 조정이 지방의 재산분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일종의 판례를 남긴 것으로 보인다.
고대사는 삼국사기 등 사서 내용이 부실해서 알 수 없는 것이 많기 때문에, 신라인이 직접 신라의 육부(六部)명칭, 지명, 인명, 관명등 등 많은 정보를 기록한 이 비석은 당시 역사를 정확히 아는 데 매우 큰 도움이 됐다.
3. 내용
[image]
출처 페이지에서 학자마다 서로 다른 판독 견해를 볼 수 있다.辛巳▨▨中折盧䒑▨…▨, 喙部習智阿干支, 沙喙斯德智阿干支敎. 沙喙尒抽智奈麻, 喙部牟智奈麻, 本牟子喙沙利, 夷斯利白. 爭人喙評公斯弥, 沙喙夷須, 牟旦伐喙斯利壹伐, 皮朱智, 本波喙柴干支, 弗乃壹伐, 金評▨干支, 祭智壹伐. 使人奈蘇毒只道使喙念牟智, 沙喙鄒須智. 世令于居伐壹斯利, 蘇豆古利村仇鄒列支干支, 沸竹休壹金知, 那音支村卜受干支, 走斤壹金知, 珍伐壹昔云, 豆智沙干支宮, 日夫智宮奪尒, 今更還牟旦伐喙作民. 沙干支使人卑西牟利白口, 若後世更噵人者与重罪. 典書与牟豆, 故記. 沙喙心刀哩▨.
4. 바깥고리
5. 국보 제318호
포항 중성리 신라비는 2009년 5월에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흥해읍 중성리 에서 발견된 현존 최고(最古)의 신라비이다. 모양이 일정치 않은 화강암(花崗巖) 1면에서 전체 12행 20자로 음각(陰刻)된 도합 203자의 비문이 각자(刻字)되어 있다. 비석은 비면 상단부 일부와 우측면 일부가 떨어져 나갔을 뿐 비문의 대부분은 판독이 가능할 정도로 양호한 상태이다. 이 비의 비문은 신라 관등제의 성립 과정, 신라 6부의 내부 구조, 신라의 지방통치와 분쟁 해결절차, 궁(宮)의 의미, 사건 판결 후 재발 방지 조치 등 신라의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상황을 알려 주고 있어 역사적·학술적으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평가된다. 이 비의 글씨체는 예서로 분류되는데, 고구려의 광개토대왕비와 통하는 고예서(古隸書)로서 신라 특유의 진솔미를 보여준다. 가로획에서 수평을 유지하는 가운데 기울기가 거의 나타나지 않는 것에서 예서임을 알 수 있으며, 다소 보이는 해서의 필의(筆意)는 단양적성비 같은 고해서(古楷書)로 변해가는 전초(顚草)이며 선구가 된다는 점에서, 그리고 냉수리비와 봉평비보다도 더욱 신라스럽다는 점에서 더욱 그 가치가 있다. 또한 제작시기도 지증왕 4(503)년의 <포항 냉수리 신라비>보다도 2년이나 앞서는 신라 최고의 비이다. 더욱이 제작시기가 늦은 <울진 봉평리 신라비>(법흥왕 11, 524)도 이미 1988년에 국보 제242호로 지정되었고, <포항 냉수리 신라비>(지증왕 4, 503)도 1991년에 국보 제264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따라서 이와 같은 포항 중성리 신라비의 역사적·예술적·학술적 가치에 의거, 현재 보물 제1758호로 지정된 이 비를 국가문화재 국보로 승격 지정하여 연구하고 보존·관리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다.
6. 전시
2020년 11월 30일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와 국립경주박물관은 12월 8일부터 포항 중성리 신라비 실물을 국립경주박물관 신라역사관 3실에 상설 전시한다고 밝히면서 8일 이후로 실물 관람이 가능해질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