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증왕

 



'''시호'''
'''지증왕(智證王)'''
'''존호'''
'''지도로 갈문왕(智度路 葛文王)'''[1][2]
'''별호'''
지정 마립간(智訂 麻立干)
'''성씨'''
김(金)
''''''
지대로(智大路) / 지도로(智度路) / 지철로(智哲老) / 지정(智訂) / '''지증(智證)'''[3]
'''왕후'''
연제부인(延帝夫人) 박씨
'''왕자'''
김원종(金原宗), 김입종(金立宗)
'''부왕'''
습보 갈문왕(習寶 葛文王)
'''모후'''
조생부인(鳥生夫人) 김씨
'''생몰년도'''
음력
437년 ~ 514년 7월 (76-77세)
'''재위기간'''
음력
500년 ~ 514년 7월 (14년)
1. 개요
2. 크나큰 업적
2.1. 순장 폐지(502년)
2.2. 우경법 실시(502년)
2.3. '왕' 칭호를 사용(503년)
2.4. '신라' 국호 확정(503년)
2.5. 상복법 제정(504년)
2.6. 12성을 쌓다(504년)
2.7. 지방 조직인 군현제 정비(505년)
2.8. 얼음을 저장하고 선박 이용의 제도를 정비(505년)
2.9. 동시전 설치(509년)
2.10. 이사부우산국 정복(512년)
4. 기타
5. 삼국사기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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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4년 겨울 10월에 여러 신하들이 아뢰었다. "시조께서 나라를 창업하신 이래로 국호가 정해지지 않아 혹은 '사라'라 일컫고, 혹은 '사로'라 일컬었으며, 혹은 '신라'라고도 하였습니다. 저희들은 '신'이란 글자는 덕업이 날로 새로워진다는 뜻이고, '나'라는 글자는 사방을 망라한다는 뜻이라고 생각하니, 이를 나라 이름으로 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또 예로부터 나라를 가진 이들을 보면 모두 '제'나 '왕'을 일컬었으니, 우리 시조께서 나라를 세워 지금에 이르기까지 22세 동안 단지 우리 말로만 왕호를 일컫고 정식 칭호를 쓰지 않았습니다. 이제 여러 신하들이 한 뜻으로 삼가 '신라 국왕'이라는 칭호를 올립니다." 왕이 그대로 좇았다.

신라의 제22대 임금. 무려 64세에 왕위에 올랐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증왕보다 고령으로 즉위했다고 알려진 왕으로는 일성 이사금이 있으나 확실하다고 보기 어려워 신라의 왕으로는 사실상 최고령 즉위자라고 볼 수 있다. 한국사 전체로 확대해도 마찬가지인데 백제 혜왕이 기록을 역추적하면 60대 중반에 즉위한 것으로 추측되지만 생년이 확실하지 않아서 지증왕보다 고령이었는지 알 수가 없다.[4]
늦게 왕위에 올랐지만 14년을 재위하고 승하한 나이가 78세로 당시로는 장수했고 지금 기준으로도 천수를 누린 나이로 볼 수 있다. 이름인 지철로(智哲老)에서 한자 哲의 원음은 /tiet/에 가까워 "톗"에 가까운 발음이었고 종성 ㄷ과 ㄹ의 전호 현상을 감안하면 지대로(智大路)와 큰 차이가 없다. 신라의 관직인 '대등'을 속일본기에서는 마카리타로(萬加利陁魯)라는 훈을 써 놓은 점을 감안하면 '등'의 당시 음이 '타로'에 대응하는 것을 보여주며 이에 등(證)이라고 쓰고 "드르"에 가깝게 읽었을 것으로 보인다.
내물 마립간후손인데 이에 대해 삼국사기삼국유사의 내용에 다른 점이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내물 마립간의 증손자이자 습보(習寶) 갈문왕[5]의 아들, 삼국유사에서는 눌지 마립간의 동생 기보(期寶)[6] 갈문왕의 아들로 나온다. 지증왕의 어머니는 눌지 마립간의 딸 조생부인(鳥生夫人)인데 오생부인(烏生夫人)이라고도 한다. 맨 앞의 한자만 다른데 비슷하게 생겨서 헷갈리기 쉽다. 한 획이 있냐 없냐의 차이기 때문.
기보 갈문왕은 소지 마립간장인이기도 하다. 지증왕은 부계만 봤을 때 삼국사기에서는 소지 마립간의 6촌, 삼국유사에서는 소지 마립간의 5촌이며 처남이 된다. 지증왕이 내물 마립간의 증손자인지 손자인지에 대해서는 보통 삼국사기 기록이 옳다고 보며 보통 기보 갈문왕과 습보 갈문왕은 동일 인물로 여겨진다. 문제는 소지 마립간의 장인과 관련된 기록인데 이건 보통 삼국사기 내용 기준으로 보기에 습보 갈문왕이 소지 마립간의 장인이라고는 설명하지 않는 편이다. 일단 역사학계에서는 기보 갈문왕과 선혜부인의 아버지 내숙이 동일 인물일 가능성을 낮게 본다. 삼국유사 내용이 틀렸다고 보거나 소지 마립간이 왕비를 2번 맞이했다고 보는 편. 다만 후자의 경우 벽화부인까지 합쳐 소지 마립간의 왕비가 3명이나 되어버리는 문제가 생겨서 일반적으로는 내숙/잉숙의 딸이라고 서술한 삼국사기의 내용을 정설로 본다.
어찌 되었든 눌지 마립간의 직계가 끊긴 이후 왕위에 오르는데 이미 눌지 마립간 이후 왕들이 복호와 미사흔의 딸과 손녀를 왕비로 맞아들인 것으로 추정되는 기록이 남아 있어서 지증왕 역시 이미 왕비족의 일원으로 어느 정도 왕실에 영향력을 행사했을 가능성이 높고, 결국 이러한 영향력을 바탕으로 소지 마립간의 사후 왕위에 오를 수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소지 마립간의 경우 최후가 불분명하고 지증왕이 상당히 연로한 상황에서 왕위에 오른 점을 감안한다면 아래의 연제부인 설화나 이후 박씨들이 왕비족으로 꽤나 많이 등장한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의 즉위는 박씨 가문의 영향력도 배제할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를 종합해보자면 지속적으로 미사흔계에게 왕비 배출 가문이 밀리고 있던 복호계의 수장으로 박씨 가문과 손 잡고 신라 왕위를 차지했을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재위 도중에 신라 임금의 칭호를 마립간에서 으로 바꾸었기에 보통은 지증왕이라고 하지만 간혹 지증 마립간이라고도 한다. 왕비인 연제부인과의 사이에서 법흥왕김입종을 뒀다. 즉위했을 당시 고령이라서 업적 중 상당수도 지증왕 대신 젊은 아들 법흥왕이 태자로서 권력을 가지고 미리 진행했을 가능성이 높다.

2. 크나큰 업적


지증왕의 업적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전쟁은 멈추고 내정 개혁에 집중한 것이다. 한반도 동남쪽에 있어 대륙의 문물을 접하기 힘들던 신라는 삼국 중 고구려백제가 이미 율령제에 기반한 체계적인 통치를 하던 것에 비해 뒤쳐져 있었다. 그러나 지증왕과 법흥왕 때 엄청난 속도의 개혁으로 두 나라의 통치 구조를 따라잡은 것이다.
사실 지증왕 전까지 신라는 전성기 고구려의 남진 정책을 방어하느라 매년 전쟁이 일어났고 내정을 개혁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그러나 지증왕 재위기에는 갑자기 전쟁 기록이 끊긴다. 왜 그런지 삼국사기에 추가적인 기록이 없어 명확히는 알 수 없다.
대체 왜 고구려의 신라 공격이 계속되다가 지증왕 즉위 시점부터 갑자기 끊겼는지 추측하자면 고구려 장수왕문자명왕이 5세기까지는 백제와 신라를 번갈아 공격해보다가 나제동맹우주방어에 계속 막히니까 이래서는 아무도 못 잡겠다 생각하고 서기 500년쯤부터는 백제 공격에만 집중하고 신라와는 일종의 휴전을 맺었다던가 할 수도 있다. 마침 백제도 개로왕이 죽은 뒤 계속되던 혼란을 무령왕이라는 걸출한 지도자가 등장해 안정시키고 문자명왕의 고구려와 1:1로도 싸울 수 있는 국력에 다다른다. 신라 역시 소지 마립간 때까지는 고구려가 백제에 쳐들어가면 백제에 지원군을 파견하고는 했는데 지증왕 때부터는 40여 년간 지원군을 보내지 않는다. 물론 그 외에도 실제로는 고구려가 계속 쳐들어왔는데 기록이 누락됐다거나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어쨌든 지증왕과 차기 법흥왕은 큰 전쟁이 거의 없었던 6세기 초반의 40여 년간을 신라의 강도높은 내정 개혁, 국력 증대, 왕권 강화, 주변 소국 흡수에 집중해 많은 업적을 쌓아 6세기 중후반 신라 전성기의 토대를 닦은 명군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두 왕이 내실을 다져두지 않았다면 다음 진흥왕 때 폭발적인 신라의 영토 확장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지증왕은 즉위 당시에 이미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지증왕 대의 해당 업적들 상당수가 지증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는 법흥왕이 태자 신분으로 일종의 대리청정을 하면서 국정을 주도하며 미리 손을 써 놓은 것이 아니냐는 추정을 해볼 수 있다. 실제로 법흥왕 역시 즉위하자마자 엄청난 업적들을 순식간에 처리해버린다.

2.1. 순장 폐지(502년)


노동력 확보를 위해, 지증왕 대까지 삼한 땅에 내려오던 인신공양순장과 같은 악습을 전면 금지시켰다. 그 전까지 신라는 왕이 죽으면 남녀 5명씩 같이 묻었다고 한다. 사실 이 시대에 신라만 순장을 하던 것은 아니고 왕릉에 수십명씩 같이 묻은 옆동네 대가야중국의 후덜덜한 규모의 순장에 비하면 소박하긴 하지만 엄연히 이것도 악습이었던지라... 그리고 순장금지령은 지방 세력에게 이를 어길 경우 제재가 들어갈 수 있다고 통보한 것과도 다름없으므로 순장금지령도 지방 통제와 제민지배 강화의 일환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리고 이후 순장을 금지한 신라가 영토를 넓혀 가야, 한강 유역 등을 정복하면서 삼한 세계 전체에 이런 생각이 퍼져나가게 되었고, 인명 존중 사상이 상대적으로 발전하는 계기로도 작용하였다.[7]
참고로 중국에서는 이후 천 년 가까이 지난 명나라 때까지도 순장을 이어 왔다. 선례를 남기는 게 이토록 중요한 것. 다만 중국의 순장은 기원전인 춘추전국시대에 이미 폐지되어 병기나 토우 등을 대신 묻었다. 그러나 유목민족의 유입에 따라 일시적으로 다시 실행되기도 했고, 명나라의 경우는 전대 원나라가 몽골의 풍습에 따라 순장을 했었기 때문에 그 유습이 내려왔던 것이다. 고대부터 일관적으로 수천년 동안 순장이 시행됐던 것은 아니다.

2.2. 우경법 실시(502년)


를 이용해 농사를 짓는 것. 우경법 실시에 대해서는 말이 많다. 6세기가 될 때까지 신라 사람들이 농사짓는 데 소를 활용할 줄 몰랐었냐는 의문이 생기기 때문. 따라서 우경법이 시작됐다고 보기보다는 국가 차원에서 우경법 장려를 시작했다고 보는 입장도 있다. 즉 원래 우경이 존재했지만, 지방의 사정에 따라 암암리에 실행되었던 것을 국가에서 공인하여 전국적으로 시행했다는 의미이다.
우경 실시를 통해 신라의 왕권이 강화되고 지방 통제가 강화되었음을 방증한다는 견해가 있다. 사실 신라는 다른 국가에 비해 부체제의 영향력이 강력하게 남아있고 토착 지배층의 영향력이 상당한 수준이었다. 그런데 우경이 도입되면 농경이 원활하게 가능한 지역과 산악지대로 이루어진 지역의 격차가 심해지기 때문에 지배층 내에서 불평등이 심화된다. 이것을 방지하고 지배층의 불만을 무마하고자 신라는 국가 차원에서 도입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증왕의 우경 실시는 지배층의 이런 불만을 잠재울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해졌음과 동시에 국가 차원의 지방 통제가 강화되었다는 것이다.

2.3. '왕' 칭호를 사용(503년)


신라 고유의 군주의 칭호마립간의 칭호를 '공식적으로' 사용한 신라의 마지막 군주이다. 지증왕 이후로는 중국, 고구려, 백제처럼 왕호를 쓰게 된다.
비공식적으로는 그 다음 군주인 법흥왕도 마립간의 칭호를 썼었지만[8] 정책을 바꿀 때 한동안은 예전 방식도 혼용하는 건 어디에나 있는 일이고 어쨌든 공식적 변경은 지증왕 때였다.

중국식인 (王) 칭호를 사용한 신라 최초의 군주이며, 시호를 한국사 최초로 받기도 했다.

2.4. '신라' 국호 확정(503년)


공식 국호를 '신라'로 확정했다. 이전에는 신라 국호의 한자 표기가 통일되지 않았던 상태로, 삼국지사로국(斯盧國), 포항 냉수리 신라비사라(斯羅), 그 외에 신로(新盧), 서나(徐那)·서야(徐耶), 서라(徐羅), 서벌(徐伐), 신라, 계림 등 여러가지 표기가 혼용됐다. 이것을 지증왕 때 공식 국호가 신라로 확정되어 멸망할 때까지 유지된다. 신라라는 국호 자체가 지증왕 때 처음 사용된 것은 아니며 이미 내물 마립간 이전부터 사용되어 왔다.[9] 그러나 신라는 사로, 신라, 계림, 사로 등의 국호가 혼용되고 있었고 주변국이나 중국에서는 기록상 사로라는 명칭을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것을 지증왕 때 제도를 정비하면서 신라로 확정한 것이다.
지증왕은 신라라는 이름 의미를 뜻풀이했는데, "왕의 덕업이 나날이 새로워지고, 사방의 영역을 두루 망라한다(新者德業日'''新''' 羅者網'''羅'''四方之義)."에서 앞뒤 두 글자를 취한 것으로 해석했다.

2.5. 상복법 제정(504년)


504년 음력 4월 장례식에 입는 옷 등 예식을 규정하는 상복법(喪服)을 제정한다. 장례는 가장 기초적인 문화고, 여기에 대해 국가가 주도적으로 정리한다는 것은 국가의 지배력이 백성들의 가정 생활까지 영향을 미칠 만큼 강해졌음을 뜻한다.

2.6. 12성을 쌓다(504년)


음력 9월에 파리[10], 미실[11], 진덕, 골화 등 12성을 쌓는 등 고대 국가로서의 기반을 다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2.7. 지방 조직인 군현제 정비(505년)


몸소 나라 안의 주군현 행정구역을 정비했다. 통일 전 신라의 수도, 지방 행정 조직은 6부 5주 였는데, 지증왕 때 최초로 실직주(지금의 강원도 삼척시)를 설치하고 이곳의 군주이사부를 파견했다.

2.8. 얼음을 저장하고 선박 이용의 제도를 정비(505년)


505년 11월 처음으로 담당 관청에 명하여 얼음을 저장했다.
505년에 선박 이용의 제도를 정하는데 원래 신라는 바다에서 배를 타고 항해하는 것에 약했다. 앞서 유례 이사금 시대 기록을 보면 '신라는 주변국보다 수전에 약하다'고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지증왕 시대에 바닷길 개척을 함으로써 이사부가 몇 년 후 수군을 이끌고 우산국을 정복한 것도 가능했고, 그 전 소지 마립간 시대까지 서라벌에 자주 쳐들어오던 왜군이 쳐들어오는 기록도 지증왕 시대부터 거의 사라진다. 적어도 동해안에 왜구가 상륙해서 수도 월성이 포위되는 상황은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다.

2.9. 동시전 설치(509년)


수도 동쪽에 상설 재래시장인 동시(東市)를 설치하고 시장 감독 기구인 관청 동시전을 지었다.[12]
삼국사기에 따르면 소지왕 때 수도에 시장을 처음으로 개설하였고, 지증왕 때 동시와 함께 동시전을 설치하였다. 동시의 설치가 추가 설치된 것인지, 확대 개편된 것인지, 복구된 것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당시 신라에서 물자의 유통이 이전보다 활발하였음을 보여주고, 중앙은 이를 관리할 필요성을 느껴 동시전을 설치한 것 같다.
이는 소지왕 때부터 등장한 부체제의 한계와 중앙집권화가 지증왕 때 표출된 것으로 보인다. 소지왕 때 설치된 우역과 시장은 지역에 따른 경제력 차이를 해결해줌과 동시에 중앙의 왕권이 부체제의 한계를 넘어서서 지방 통제를 강화하고 있는 모습이다. 특히 지증왕 때 동시와 동시전의 설치는 우경과 함께 봐야하는데, 우경으로 인한 지역의 경제적 편차의 증가와 잉여 생산물의 유통은 당시 지방 지배층 간 경제적 갈등을 중앙에서 해결해야 하는 문제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지방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조절할 수 있을만큼 왕권과 지방통제력이 강화되고 있음을 나타난다. 이를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인 사건은 지증왕 때 처음으로 '왕' 칭호를 사용하고 국호를 '신라'로 비정한 점이다.

2.10. 이사부우산국 정복(512년)


실직주 이후 하슬라(지금의 강릉시)의 군주가 된 이사부에게 명해 해군을 이끌고 바다 건너 우산국(울릉도)를 정복한 것도 지증왕 재위 시기다.
이사부의 우산국 정복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이사부 문서 참조.
그 외에 아시촌 소경(514년)을 설치해 지증왕 대의 업적을 마무리 했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업적들을 자랑하지만 금석문 기록에 따르면 지증왕 초기까지도 여전히 신라 왕실은 한 부의 지배자 정도로 머물러 있었다고 나온다. 이런 것을 지증왕과 이후 법흥왕 2대에 대대적으로 나라를 고치면서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로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3. 크나큰 그것(...)


한국사 교과과정에서는 위의 내정 업적을 중요하게 가르치지만 흥미 위주의 일화로는 신체적인 특징과 관련한 기담 역시 유명하다. 삼국유사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기 때문.

(전략)... 그의 음경의 길이는 무려 1자 5치나 되었는데, 음경이 너무 큰 관계로 마땅한 신붓감을 구하기가 어려웠다.[13]

(너무 커도 고생이다.) 이 탓에 처녀들은 사랑을 나누려 하면 너무 아파 울면서 도망갔다고. 그래서 지증왕은 각 지방에 사자를 보내 자기의 음경을 능히 감당할 만한 처녀를 수소문하였다. 어느 날 지증왕이 보낸 한 사자가 모량부에 도착해 동로수(冬老樹) 아래에 쉬고 있는데, 큰 2마리가 북만 한 누런 똥[14]을 양쪽에서 물고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이것을 본 사자는 쾌재를 부르며 마을로 내려가 그 커다란 똥덩이의 주인이 누구냐고 물었다. 그러자 한 소녀가 말했다.

'''"아, 그거요? 그것은 모량부 상공의 딸이 빨래를 하다 숲속에 숨어서 눈 똥입니다."'''

사자가 그 집을 찾아가 소녀가 말한 처녀를 보니 정말로 키가 큰 여자였다. 보니 키가 7자 5치[15]

나 되었다. 사자는 급히 지증왕에게 그 처녀를 소개했고, 지증왕은 수레를 보내 궁중으로 불러 왕비로 삼았다.

지증왕의 왕비가 바로 연제부인. 지증왕의 크고 아름다운 (물건) 음경 1자 5치를 현대 수치로 계산해보면 1자를 18cm라고 잡아도 27cm는 족히 되니 무척 크다. 허나 연제부인의 키를 생각하면 아마도 1자=23cm를 적용해야 할텐데 이러면 34.5cm나 되니 더더욱 거대해진다. 처녀의 키 7자 5치 역시 어마어마하다. 1자를 30cm라고 볼 경우 약 225cm. 현대에도 거인증에 걸리지 않는 이상 이런 키는 나올 수가 없다. 1자를 18cm로 보면 135cm. 이러면 아무리 과거라도 도저히 크다는 말이 나올 리가 없다. 1자를 23cm로 적용하면 172.5cm로 그럭저럭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키이면서 고대 여성 기준으로는 엄청나게 큰 키이므로 이 기준이 맞을 듯. 현대 한국인 기준으로도 여성의 키로는 장신이니 지증왕 시대에는 큰 덩치가 농업 생산력을 의미한다는 해석이 있다.
물론 상징적인 설화인데다가 왕의 신체적 위엄을 내세우는 기록이므로 실제로도 큰 편이었음에도 더욱 부풀렸을 가능성이 높다. 지증왕의 실제 크기를 기반으로 하되 왕의 위대함을 '''신격화하기 위해 실제보다 과장해서 퍼뜨린 전설'''이라는 것이다. 사실 왕의 위대함을 과장하기 위해 이런저런 소재를 쓰기는 하지만 성기의 크기를 소재로 쓰는 경우는 매우 드물기 때문에 눈에 띈다. 다만 거시기라는 소재 자체가 좀 거시기해서 그런지 어린이역사 만화책들 - 예를 들면 능인에서 나온 '''만화로 보는 신라왕조 1000년'''에서는 지증왕의 덩치가 너무 커서 장가를 못 갔다고 변형하기도 했다. 이 만화에서는 덩치가 큰 나머지 옥좌에 앉아도 몸이 꽉 찰 정도로 묘사되며, 색시감을 찾아오라는 지증왕의 명에 신하들이 "어디서 저런 거인의 배필을 찾으란 말인가."라며 한숨을 쉰다.[16] 이런 키가 크다(=덩치가 크다)는 묘사는 진평왕이나 진덕여왕 등 신라 역대 왕의 외모를 설명할 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계속 반복해서 나오기 때문에 이 시절 경주 김씨 왕가의 유전일 수도 있겠다.
이 설화에 대해서 단순한 해프닝이 아닌 단군 신화의 정치적인 해석처럼 현실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도 있다. 지증왕이 박씨 귀족 세력과 정치적으로 손을 잡은 것을 은유한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17] 박씨는 8대 아달라 이사금 이후로 왕위를 잃고 신라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난 상태였다. 신라/역대 왕비 문서를 보면 알 수 있지만 박씨는 지증왕 이전에 오랫동안 왕비를 배출하지 못하고 있었고 자비 마립간소지 마립간의 경우 눌지 마립간의 형제들에 해당하는 복호미사흔의 자손들이 왕비를 배출하고 있었다. '음경이 크니까 훌륭한 배필을 구하기가 어려워서 자기 조건에 맞는 연제부인 박씨를 찾아내다.'는 것은 당시 전통적으로 하던 방식으로 결혼 상대를 찾지 않았다는 의미다. 실제로도 지증왕 대부터 법흥왕, 진흥왕, 진지왕까지 갑자기 박씨에서 왕비가 많이 나온다. 박혁거세 추모 시설로 추정되는 시조묘(始祖廟)를 신궁(神宮)으로 업그레이드한 게 소지 마립간 시기(지증왕이 즉위 전 젊어서 활동하던 때)인 것도 이와 연관짓기도 한다. 또한 젊은 소지 마립간의 죽음 이후 핏줄로는 한참 먼 지증왕이 연로한 나이에 즉위한 점도 결국 박씨들의 도움을 받아서 이루어진 것 아니냐 볼 수 있으며 지증왕 즉위시 나이가 꽤나 어렸던 법흥왕이 지증왕의 뒤를 이을 수 있었던 것도 역시 박씨들의 도움이 어느 정도 뒤에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 유추해볼 수 있다.
사실 설화를 따로 해석하지 않아도 과장된 수치만 제거하면 나름 현실적인 일화이기도 하다. 고대 사회에 전제군주제국왕이 어마어마하게 큰 성기 길이로 인해 평범한 처녀와의 합방을 하지 못하고 그로 인해 후손을 보지 못하여 근심거리인데 '우연찮게 신하가 거대한 을 보고서 국왕과 합을 맞출 수 있는 체구의 여인을 찾게 되어 둘이 혼인을 맺었다'라고 말하면 딱히 예시를 빗대지 않아도 말이 된다.

4. 기타


  • 왕릉은 문헌상 비정되는 곳은 없으나, 현대 고고학적 연구를 통해 대릉원천마총이 바로 지증왕의 왕릉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 2017년 5월 국내 최초로 성벽의 기초층에서 인신공양으로 추정되는 인골 2구가 발굴됐다. 6세기 지증왕 때까지 순장을 했으니 인신공양 문화 자체는 충분히 예상 가능했지만, 실제 근거가 밝혀졌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5.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 지증 마립간 본기'''
一年 지증 마립간이 즉위하다
'''三年春二月 순장을 금지하다'''
三年 신궁에 제사지내다
'''三年春三月 농사를 권장하고 를 부려서 논밭을 갈다'''
'''四年冬十月 나라 이름의 칭호를 정하다'''
五年夏四月 상복에 관한 을 제정하여 시행하다
五年秋九月 인부를 징발하여 12성을 쌓다
'''六年春二月 나라 안의 주·군·현을 정하다'''
六年 실직주를 설치하고 이사부를 군주로 삼다
六年冬十一月 얼음을 저장하고 선박 이용의 제도를 정하다
七年 굶주린 백성들을 진휼하다
十年春一月 서울에 동시를 설치하다
六年春三月 함정을 설치하여 맹수의 피해를 없애다
六年秋七月 서리가 내려 콩이 죽다
十一年夏五月 지진이 일어나 사람이 죽다
十一年冬十月 천둥이 치다
'''十三年夏六月 우산국을 정벌하다'''
'''十五年春一月 아시촌에 소경을 설치하다'''
十五年秋七月 6부와 지방 사람들을 옮기다
十五年 왕이 죽다
기록 자체는 소략한 편에 속하지만, 매우 중요한 업적들이 다 적혀있다. 특히 진한 글씨로 표시된 것들은 현행 국가시험의 한국사 과목에 매우 빈번하게 출제되므로 반드시 알아두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우산국 정벌 기사는 '''현재에 와서도 상당히 중요하다.'''
지증왕부터 삼국사기 4권이 시작된다.

[1] 본명 + 갈문왕.[2] 윤진석 박사라는 분의 의견에 따르면 지증왕이 전왕과 직접적인 혈연관계가 없는 상태에서 새롭게 왕위에 오르면서 이렇게 표기되었다고 하는데, 장남인 법흥왕과 차남인 입종갈문왕의 금석문에서의 표기명인 '탁부 모즉지매금왕'과 '사탁부 사부지갈문왕'을 생각해 보면 가능성이 있기는 하다.(소지는 탁부 매금왕이였는데, 그의 후계로 사촌이며 사탁부의 수장인 지증이 신라의 전체 통치권을 계승하고, 지증의 장남인 법흥이 탁부의 수장직을, 차남인 입종이 사탁부의 수장직을 이어받았다고 보는 것이다.)[3] 마립간 호칭 앞에 붙는 것은 일반적으로 이름이므로, 지정(智訂)과 지증(智證)이 같은 이름의 다른 표기라면 지증 자체가 이름이다.[4] 혜왕은 재위 1년만에 사망했다. 즉위부터 나이가 많았어서 자연사일 수도 있고 암살 정황도 있다.[5] 복호의 아들[6] 일반적으로 사보(斯寶)의 오기로 본다.[7] 물론 프랑스 대혁명의 인권 선언과 동일선상으로 볼 수는 없다. 이 당시의 인명 존중은 본격적인 삼국 간 회전력 싸움이 슬슬 시작되던 시기에 동원할 수 있는 인원을 순장으로 소모시키는 것이 아니라 전쟁터에 활용하고 동시에 귀족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시키는 목적에서 출발했다고 보는 게 맞다.[8] 울진 봉평리 신라비에 '모즉지매금왕牟卽智 寐錦王'이란 이름이 등장하고 이는 법흥왕으로 비정되는데, 매금은 마립간으로 추정되는 신라의 지배자의 호칭이므로 이 때까지는 마립간과 왕이 혼용된 것으로 보인다.[9] 내물 마립간 때 중국 전진에 사신을 보낼 때 국호를 '신라'라고 했는데, 중국 사서에 사로가 아닌 신라로 기록된 첫 사례다.[10] 프랑스가 아니다. [11] 참고로 화랑세기 필사본에 나오고 선덕여왕(드라마)으로 유명해진 미실과는 한자가 다르다. 화랑세기 미실은 美室, 삼국사기에 나오는 이 지명 미실은 彌實. 단 이 시절 신라는 사람 이름이나 지명에 쓰는 한자가 고정돼있지 않고 음이 같거나 비슷하면 혼용하기도 하는데, 필사본 화랑세기가 만약 박창화의 창작물이라면 신라인스러운 이름을 만들기 위해 박창화가 삼국사기의 이런 부분에서 참고해 따 온 이름일 수도 있다.[12] 소시왕이 최초로 시장을 열었다. 훗날 효소왕 때 서시, 남시도 만들게 된다.[13] 실제로 현대에도 40cm에 달하는 성기를 가진 인물이 너무 커서 성관계를 한번도 하지 못했다는 사례가 있기는 하다.[14] 농업 생산력의 강화를 의미한다는 해석 있음[15]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172 cm 장신이다.[16] 물론 삼국사기에서 기골이 장대하고 덩치가 크다고 했고 덩치가 크면 당연히 성기의 크기도 몸집에 비례하기 마련이므로 애둘러 표현했을 뿐 아주 왜곡한 건 아닌 셈이다.[17] 물론 당시에 김, 박 같은 성씨를 직접 쓰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높지만 훗날 김씨, 박씨로 소급될 혈족 집단은 존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