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아티에 전투

 

'''푸아티에 전투'''
'''시기'''
1356년 9월 19일
'''장소'''
프랑스 푸아티에 남쪽 모펠튜이 언덕
'''원인'''
브르타뉴 공작령 후계문제로 인한 백년전쟁 재개.
'''교전국'''
잉글랜드 왕국
가스코뉴 공국
프랑스 왕국
'''지휘관'''
'''흑태자 에드워드'''
'''장 2세'''
'''도팽 샤를'''
'''필리프 공작'''
'''병력'''
<^|1>총 병력 약 7000[1]
-맨앳암즈 3,000
-장궁병 3,000
-경무장병 1,000
총 병력 16,000~20,000
-맨앳암즈 13,000[2]
-석궁병 2000
-경무장병 1,000 이상
'''피해'''
피해 규모 불명
사상자 2500 명
투항자 2000 명[3]
'''결과'''
잉글랜드 대승.
'''영향'''
1360년 영국과 프랑스 휴전협정 체결.[4]
1. 개요
2. 푸아티에 전투의 배경
3. 푸아티에 전투 개시
4. 푸아티에 전투의 결과
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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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image]
'''Battle of Poitiers'''
크레시 전투에서의 참패 이후 프랑스군이 다시금 잉글랜드군에 박살난 전투.
프랑스는 이 전투에서 국왕이 포로로 잡히는 수모를 겪는다. 이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장 2세의 몸값이 훗날 아쟁쿠르 전투의 원인 중 하나가 된다.

2. 푸아티에 전투의 배경


1356년 흑태자 에드워드는 잉글랜드의 존 챈더스 경 휘하의 병력과 카프탈 드 부슈의 가스코뉴군을 합한 7000의 병력으로 프랑스 남부 아키텐 지방의 보르도에서부터 중부 프랑스까지 대규모 약탈을 수행했다. 잉글랜드-가스코뉴 연합군은 중부 프랑스까지 진출하면서 곳곳의 프랑스군을 격파하며 다수의 농촌을 철저히 약탈하고 불태워 없앴다. 그러면서 루아르 강 인근의 투르에 도착했는데 때마침 내린 폭우로 인해 더이상 진출하지 못하고 발이 묶여있었다.
[image]
▲전투 전 양 군의 기동. 붉은 색이 잉글랜드군의 기동이다.
흑태자의 잉글랜드군이 발이 묶이자 노르망디에서 랭커스터 공작 그로몽의 헨리와 대치 중이던 장 2세는 흑태자의 병력을 일망타진할 기회로 보고 샤르트르에 군대를 소집했다. 그러나 기동력을 높인다는 이유로 1만 5천에서 2만에 달하는 보병을 해산해버렸다.

3. 푸아티에 전투 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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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전개. 붉은 색이 잉글랜드군이다.
프랑스군의 진군 소식을 들은 흑태자는 주저없이 군을 돌려 다시 남쪽으로 행군을 시작했으나 보병을 해산하면서까지 기동성을 높인 장 2세에게 푸아티에 남서쪽 수마일 밖에서 따라잡혔다. 흑태자는 크레시 전투에 참전한 경험이 있었고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크레시 전투와 동일한 대형을 구축했다. 잉글랜드군은 좌측이 개천으로, 후방이 숲으로 막힌 방어가 용이한 지형에 포진했으며 상대적으로 방어가 취약한 우측면은 그간 약탈했던 막대한 양의 전리품들로 방벽을 구축했다. 이 우측면은 푸아티에에서 보르도로 이어지는 로마 시대의 가도가 위치해 있었다. 흑태자는 크레시 전투와 유사하게 기사들에게 하마를 명령하고 말에서 내린 기사들을 두세 개의 분견대로 나누어 중앙에 포진시키고 장궁병대를 V자 형태의 양 날개에 배치했다. 물론 그때와 동일하게 장궁병대의 앞에는 끝을 날카롭게 깎은 나무 말뚝 등 기병의 진군을 막기 위한 온갖 장애물들을 설치해 두었다. 그러는 한편 소수의 기병대를 장 드 그레이 3세의 휘하로 두고 후방의 숲 속에 감추어 두었다.
한편 프랑스군은 4개의 제대로 편성되었는데 최전방에는 클레르몽 휘하의 300명가량의 기사들과 독일 용병대가 포진했다. 이 최전방의 임무는 아군 보병대가 활의 사거리 안에서 진군하는 동안 장궁병대를 무력화시키는 것이었다. 이들의 배후에는 말에서 내린 맨앳암즈로 구성된 세 개의 부대가 배치되었다. 그 지휘관은 각각 후일 샤를 5세가 되는 샤를 도팽, 오를레앙 공작, 국왕 장 2세였다.
잉글랜드군 좌익이 거짓으로 퇴각하자 선봉에 선 300명의 프랑스 기사들이 그 미끼를 물고 돌격을 개시했다. 산울타리와 가시덤불이 깔려 있는 험지였기에 기병이 진입할 수 있는 길은 가운데 뚫려 있는 도로 하나 밖에 없었고, 잉글랜드 궁병들은 손쉽게 기사들의 측면을 노리고 사격을 퍼부었다. 마갑을 입지 않았거나 마갑이 얇은 측면에 화살을 맞은 말들이 무더기로 쓰러지면서 기사들이 낙마하자 길가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잉글랜드 맨앳암즈들이 뛰쳐나가서 그들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이때 선봉대의 지휘관 중 하나였던 장 드 클레르몽이 전사했는데, 그가 전투 직전의 회담에서 잉글랜드군 지휘관 존 챈더스를 모욕한 일[5] 때문에 포로로 잡히지 않고 살해당한 것이라는 소문이 당대에 돌았다.
제1파가 무너지자 뒤따라오던 독일 용병대와 샤를 도팽의 중보병대가 공격을 개시했다. 프랑스군의 맨앳암즈의 수가 더 많았으나 갑옷을 입고 가시덤불을 헤치며 언덕을 오르느라 지쳐 있었다. 한편 선봉대를 순식간에 전멸시키고 사기가 오른 잉글랜드군은 성 조지의 이름을 외치며 맹렬하게 반격을 가했고, 말을 탄 궁수들과 이들을 보호하는 맨앳암즈로 구성된 잉글랜드군 분견대가 언덕을 돌아 내려와서 프랑스군 측면에 자리를 잡고 화살을 쏘아댔다. 결국 치열한 전투 끝에 도팽의 부대가 패주하기 시작했고, 나이가 어렸기에 800명의 호위대와 함께 안전한 후방에서 전투를 관전하던 도팽과 다른 왕자들도 퇴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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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즈음 해서 잉글랜드 장궁병대는 모든 화살을 소진한 상태였고 만약 프랑스군의 남은 두 개의 부대가 통제 하에 들어왔다면 역전을 노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를레앙 공작의 제3파가 패주하는 샤를 도팽의 부대를 보고 공황에 빠져 도망쳐버렸다.
오를레앙 공작의 부대가 전투를 시작하지도 않고 도망치는 것을 본 장 2세는 바로 공격을 개시했고 화살이 다 떨어진 장궁병대의 견제 없이 잉글랜드의 전열에 도달하여 격전이 벌어졌다. 화살을 모두 소진한 장궁병대는 신속하게 보병들에게 합류하여 진형을 형성하였고 일부는 즉흥적으로 기병으로 전환했다. 흑태자는 말에서 내려 싸우던 기사들을 다시 말에 태워 프랑스군의 정면을 향해 중기병 돌격을 감행하고 숲에 숨겨둔 200명의 기병대를 프랑스군 제4파의 측면과 후방을 향해 돌격시켰다. 사방에서 잉글랜드의 중기병들이 덮쳐 도륙을 해대자 포위의 두려움에 프랑스군은 그대로 도주를 시작하였다. 그 와중에 장 2세는 끝까지 싸우다 측근들과 포로로 잡혔다.

4. 푸아티에 전투의 결과


프랑스는 군사적으로만이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완전히 무너질 뻔했다. 프랑스는 왕의 몸값으로 국가 전체의 1년치 수익의 두 배인 300만 크라운을 지불해야 했다. 그러나 포로로 잡힌 장 2세는 런던에서 꽤나 좋은 대접을 받았고 몸값 마련을 위해 잠시 귀국했으나 마련할 수 없자 다시 잉글랜드로 들어가버렸다. 그는 런던에서 수개월 후 병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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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면에서 크레시 전투의 재판이었는데 이번에도 프랑스 기사들은 장궁병대에게 호되게 당했고 침착하게 대응한 잉글랜드군과는 달리 패퇴하는 아군을 보며 덩달아 도망치는 추태를 보이는 등 체면도 완전히 구겨버렸다.
이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의 기병, 보병, 궁병의 협동 플레이는 매우 매끄러웠다. 잉글랜드군은 기사가 보병으로 전환한 뒤에도 장궁병대의 엄호를 받아가며 싸울 수 있었고, 장궁병대 또한 말에서 내린 기사들의 보호를 받으며 싸울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엔 말에서 내려 싸우던 기사들이 다시 기병으로 전환하여 중기병 차지를 통해 가장 치명적인 결정타를 먹이며 전투를 마무리했다. 잉글랜드군하면 주로 장궁병과 하마기사들이 부각이 많이 되는 편이지만 푸아티에 전투에서 가장 강력한 한방을 먹인건 바로 중기병이었다.
즉 이 전투는 잘 짜여진 전략, 전술, 시스템이 질적으로 우월한 적을 찍어누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전투이다.

5. 관련 문서



[1] 프루아사르의 연대기에 의하면 대략 맨앳암즈 2,000. 장궁병 4,000, 경무장병 1,500[2] 잉글랜드의 3배인 8-9,000 정도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연대기에 의하면 25명의 백작들과 공작들이 참전했고, 당시 프랑스의 백작들은 각각 400명 이상의 맨앳암즈를 동원할 수 있었다[3] 포로 중에는 고위 귀족(lords) 17 명, 백작 13 명, 자작 5 명, 기사 100명 이상 그리고 '''프랑스 국왕 장 2세'''가 포함되었다.[4] 프랑스는 영국의 아키텐, 칼레, 퐁티웨, 푸아투 점령을 인정하는 대신 영국은 프랑스 왕위 계승권 주장을 철회하였다.[5] 챈더스의 문장이 자신의 것과 비슷한 걸 보고, 잉글랜드인은 독창성이 없어서 남들이 발명한 좋은 것을 훔치는 것밖에 못한다고 비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