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 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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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현명왕 샤를 (Charles le Sage)[1]
'''생몰년도'''
1338년 1월 21일 ~ 1380년 9월 16일 (42세)
'''재위기간'''
1364년 4월 8일 ~ 1380년 9월 16일
'''출생지'''
프랑스 왕국 뱅센
'''사망지'''
프랑스 왕국 마르느
1. 개요
2. 생애
2.1. 왕자 및 섭정
2.2. 치세
2.2.2. 문화, 경제, 정치적 업적
3. 평가
4. 현대 매체에서


1. 개요


프랑스 왕국의 국왕. 발루아 왕조의 3대 왕이며 장 2세의 장남이다. 그의 어머니 룩셈부르크의 본은 신성로마제국 카를 4세동복동생이라서 '''카를 4세의 조카이다'''.[2]

2. 생애



2.1. 왕자 및 섭정


1356년 푸아티에 전투에서 참패해서 부왕 장 2세가 포로로 잡혀간 상태에서 왕태자 신분으로 섭정에 올라 국정을 이끌었다. 장 2세가 서남부 영토들을 선불로 주고 몸값은 후불로 주겠다는 보장을 하고 자신의 차남인 앙주 공작 루이를 대신 포로로 만든 뒤 돌아왔다가 루이가 탈출하는 바람에 스스로(...) 런던으로 가서 다시 포로가 되자 다시 섭정이 되었다.
백년전쟁의 참패 속에서 국정이 혼란스러워져 1358년에는 농민 반란인 자크리의 난이 일어나고 왕권을 약화시키고 대신 삼부회의 권한을 강화하려는 에티엔 마르셀의 난[3]이 동시에 일어났으나 현명하게 대처하며 진압하였고, 1360년에는 잉글랜드와 브레타니 화약을 맺었다. 포로로 있던 장 2세가 1364년 런던에서 죽자 정식으로 왕위에 올랐다.

2.2. 치세



2.2.1. 백년전쟁


먼저 카스티야 왕국과의 동맹을 성사시켜, 백년전쟁 초기에 궤멸되다시피 한 프랑스 해군을 대신할 해군력을 얻었다.
또한 카스티야 해군에 의존하지 않고 프랑스 해군을 재건하고[4] 해군의 수장인 프랑스 제독의 지위를 육군 대원수와 동등하게 해주어 해군의 위상을 격상시켰다. 특히 장 드 비앵(Jean de Vienne)이라는 젊은 기사[5]를 발탁하여 잉글랜드 해안을 약탈하게 해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게다가 라 로세르 해안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잉글랜드 해군이 프랑스 해군에게 참패하여 잉글랜드는 더이상 제해권에서 프랑스를 압도하지 못하게 된다.
한편 중소귀족 출신의 베르트랑 뒤 게클랭(Bertrand du Guesclin)을 발탁,[6] 그를 프랑스 육군을 총지휘하는 프랑스군 총사령관(Connétable de France)으로 임명, 잉글랜드군을 여러 차례 격파하여 그의 치세 말기에는 브레타니 화약으로 잃었던 영토를 대다수 회복하는 성과를 얻게 되었다.[7]

2.2.2. 문화, 경제, 정치적 업적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볼 만한 업적을 여럿 남겼는데, 먼저 필리프 2세 때의 건물인 루브르 궁을 고쳐 쌓고 도서관으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프랑스 혁명 때 프랑스왕립도서관에서 프랑스국립도서관으로 이름이 바뀌기는 했지만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있을 뿐 아니라 프랑스 문화부가 직접 관리하는 프랑스 최대의 도서관으로, 한국에서 귀중히 여기는 직지심체요절이 보관되어 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또 아리스토텔레스의 <국가론>이나 <정치학>, <윤리학>, <경제학> 등의 프랑스어판 번역을 주도하기도 했는데, 이때 번역된 것이 최초의 프랑스어 번역판이다.
한편 1370년부터 1382년까지 파리의 방어를 위해 새로운 성채를 지었는데, 이것은 루이 13세 때 감옥으로 개조. 프랑스 대혁명으로 유명해진 바스티유 감옥이 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프랑스 최초로 정기적으로 세금을 걷기 시작하여 '세금의 아버지'라는 별명도 얻었고, 상비군과 관료층을 갖추는 등의 개혁을 단행하여 절대왕정의 기초를 닦았다.
1377년에는 교황이 로마로 되돌아가서 교회의 대분열이 발생하였으며, 1378년에는 자신의 백부가 되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4세의 파리 방문을 성사시켜서 그의 입지를 강화시키기도 하였다.

3. 평가


백년전쟁을 시작한 이후 잉글랜드가 23년 동안 어질러놓은 것을, 겨우 6년 만에 원상복구(까지는 아니더라도 대부분 복구)해낸 명군이다. 부왕인 장 2세가 흑태자 에드워드에게 포로로 잡혔을 때, 자신의 몸값을 프랑스 국민에게 부담시키지 못하겠다는 이유로 국왕 스스로 포로가 되었다. 당시 왕태자였던 샤를 5세는 국왕의 부재로 정치적 위기에 시달린 프랑스를 바로잡은 인물이기도 하다. 이러한 군사적 업적과 문화, 정치, 경제적 업적 등으로 인해 생전에 이미 프랑스 국민들로부터 '현명왕(Charles le Sage)'이라는 별칭을 얻었고, 역사가이자 군인인 필리프 드 메지에르(Philippe de Mézières, 1327?~1405)라는 인물은 샤를 5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샤를 6세에게 '무릇 정사를 돌보실 때에는, 부왕께서 하셨던 것처럼 하십시오' 라는 말을 하기까지 했을 정도다. 어쨌든 현명왕이라는 별명이 말해 주듯 중세 프랑스 최고의 명군 중 한 명. 특히 명장 뒤 게클랭이나 해군제독 장 드 비엔, 대학자 니콜 오렘[8] 등을 등용한 것에서 보이듯 사람을 보는 안목이 매우 뛰어났던 군주이다.
한국사로 치면 묘하게 고구려소수림왕을 연상시키는 인물. 둘 다 아버지가 전쟁에서 패하는 등 전란으로 피폐했던 나라를 재건해서 또다른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으며, 중앙집권적인 체제를 굳건히 다졌다는 점에서 비슷한 점이 많다. 다만 소수림왕의 경우 후계자인 동생조카 때에 국가가 폭발적으로 팽창했지만, 샤를 5세는 후계자안습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물론 샤를 5세의 치적이 뒷날 백년전쟁을 프랑스의 승리로 이끌게 되었지만.
참고지만 이 사람의 직계이자 발루아 왕조의 직계는 고손자인 샤를 8세가 사망하면서 단절된다. 그래서 방계 집안인 발루아-오를레앙 가문의 루이 12세와 그의 오촌 조카이자 발루아-앙굴렘 가문의 프랑수아 1세가 뒤를 잇는데 그들도 모두 샤를 5세의 후손이다. 장남 샤를 6세는 그의 뒤를 이었고 차남 오를레앙 공작 루이에게서 발루아-오를레앙 가문과 발루아-앙굴렘 가문이 분기된 것이다.

4. 현대 매체에서


코에이징기스칸 4에서는 PK 시나리오 4에서 프랑스 국왕으로 등장한다. 전투는 평범하지만 지모와 정치력이 우수하며, 부하로 니콜 오렘과 뒤 게클랭이 포진하고 있다. 비록 영국에 전투 기계 흑태자가 있고 국왕 에드워드 3세의 능력치도 우수하지만 영국왕 부자가 수명 때문에 얼마 못가 병사하는 경우가 많아서 장기적으로는 프랑스에 매우 유리하다. 어떤 의미에서는 시나리오 1 필리프 2세 치하의 프랑스보다도 플레이하기 더 쉬운 세력.
문제는 국왕 샤를 5세의 수명 역시 타국의 군주들과 마찬가지로 그리 길지는 않다는 점이고, 샤를 6세가 등장하지 않아서 사실상에서의 후계자는 없다. 그래도 샤를 5세의 능력치가 우수하고 도시 파리도 꽤 문화치가 좋은 곳이므로 충분히 우수한 후계자를 생산할 수 있다.

[1] 사실 Sage는 '현자'로 번역하는 경우가 더 많은 단어고, 이 별명은 샤를 5세의 뛰어난 학식에서 유래한 별명이라서 '현자 샤를'이라는 표현이 더 본래 의미에 가깝다. 그냥 '현왕(賢王)"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2] 카를 4세와 룩셈부르크의 본의 아들들인 지기스문트 황제와 샤를 6세가 서로 5촌 친척이다.(지기스문트(샤를 6세의 5촌 당숙), 샤를 6세(지기스문트의 5촌 조카)[3] 얼핏 보면, 프랑스 혁명사상과 비슷한 부분이 약~간 있다. 다만, 프랑스 혁명 때와 이때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던 게 문제.[4] 당시 프랑스 해군은 슬로이스 해전에서 잉글랜드 해군에게 전력의 대부분이 궤멸되어 제해권을 잉글랜드한테 빼앗긴 상황이었다.[5] 그때까지 한 일이 마땅히 없었던 인물. 하지만 프랑스 해군 총사령관에 해당되는 '프랑스 제독(Amiral de France)'에 임명되자 잉글랜드 해군을 상대로 해전에서 상당한 재능을 보여주었다.[6] 오늘날, 백년전쟁 전기 프랑스 최고의 명장으로 평가받는 사람이다.[7] 다만 샤를 5세는 아버지와 달리 몸이 병약했기에 전쟁터에는 직접 참전하지 못했고 장군들에게 지휘를 맡겼다.[8] Nicole Oresme. 1325~1382. 본업은 신부였지만 과학, 경제학, 수학 등 많은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중세 프랑스 최대의 학자 중 한 명. 한국으로 치면 정약용과 비슷한 유형의 인물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