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시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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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346년 백년전쟁 초반에 일어난 대규모 전투.
2. 크레시 전투의 배경
1341년 브르타뉴 계승 전쟁이 일어나자 브르타뉴 공작령의 후계를 놓고 잉글랜드와 프랑스가 갈등을 빚게 되면서 정전협정이 깨지고 1346년 에드워드 3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하면서 벌어진 전투다. 잉글랜드군은 에드워드 3세와 흑태자 에드워드, 프랑스군은 필리프 6세가 각각 지휘했다.
에드워드 3세는 노르망디에 상륙하여 캉을 공략하고 파리를 침공했으며 이후 보급의 문제로 플랑드르를 향해 북상했다. 잉글랜드군은 가는 곳마다 사정없이 털어먹으며 농촌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렸다.
한편 필리프 6세는 병력 모으는데 시간이 걸렸던 지라 잉글랜드군이 깽판을 치는 동안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못했으나 깽판 치고 다니는 것도 더 두고 볼 수 없고 병력도 모았고 해서 잉글랜드군을 추격, 8월 26일 크레시에서 잉글랜드군을 따라잡는다.
병력은 사료마다 다른데, 잉글랜드군은 6,000~12,000명. 프랑스군은 20,000~100,000명으로 나온다.
이처럼 사료에 따른 차이가 큰 이유는 당시의 연대기 사가들이 전반적으로 매우 과장된 서술을 하는 경우가 많았을 뿐 아니라,[1] 영국 측 자료들은 잉글랜드군은 최대한 줄이고 프랑스군은 최대한 늘려 잡고, 반대로 프랑스측은 프랑스군은 최대한 줄이고 잉글랜드군은 최대한 늘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 따라서 당대의 문헌을 통해서도 양군의 정확한 규모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고 한다.
아무튼 현대 역사가들이 여러 관련 자료를 바탕으로 추산한 것에 따르면 잉글랜드군은 대체로 10,000~15,000명, 프랑스군은 30,000~40,000명 가량으로 보는 게 중론이다.
당시 잉글랜드군 측 병력은 잉글랜드와 웨일즈의 군대로 이뤄진 원정군에 더해, 당시 동맹관계였던 브르타뉴와 플랑드르의 병력 일부와 약간의 독일 용병들이 가세해 있던 상태였다. 물론 그럼에도 프랑스군에 비하면 한참 적은 숫자였다.
'잉글랜드군'의 주축을 이룬 것은 2,300~3,000명 가량으로 추정되는 기사 및 맨앳암즈로 구성된 중기병과 5,000~7,000명 정도로 추정되는 장궁병[2] 들이었다.
그리고 그에 더해 2,500~3,000명 정도로 추정되는 "호블러 Hobelar"[3]경기병과 역시 2,000~3,000명 규모로 추정되는 창병(Spear men)이 포함되어 있었다.[4]
또한 당시 잉글랜드군이 소량의 - 정확한 숫자는 미확인이지만 대체로 총 5문 내외로 추정되는 - 리볼데퀸 및 사석포등 화포[5] 를 사용했다는 기록도 있다.[6]
프랑스군은 대체로 10,000~12,000명 정도의 중기병을 주축으로 이뤄진 것으로 추산하는 경우가 많다.[7] 또 프랑스군에는 2,000~6,000명 정도의 제노바 쇠뇌병들이 있었다.[8]
그리고 정확한 '숫자 미상'의 일반 보병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전반적으로 불확실하고 들쑥날쑥한 기록과 추정 중에서도 당시 프랑스군이 동원한 일반 보병의 정확한 규모나 내용에 대해서는 더욱 더 확인되는 바가 없다.[9][10] 역사가에 따라서는 이들 일반 보병 다수를 일종의 징집병으로 추정하는 경우도 있다. 다만 그 정확한 규모나 무장이나 훈련의 질 등등 구체적인 내역은 전혀 불명이지만, 아무튼 이들 일반 보병들만으로도 잉글랜드군 전체 병력보다도 많은 숫자였다는 것은 대체로 동의되는 모양이다.
이처럼 양측이 동원한 정확한 실제 병력규모가 어느정도였는지에 대해서는 다소 불확실하지만, 하여튼 결론적으로 대체로 합의되는 것은 프랑스군이 잉글랜드군보다 3~4배는 많았다는 것이다.
3. 크레시 전투의 전개
3.1. 오게 두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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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군은 크레시 인근 구릉지에 진지를 구축한 채 프랑스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에드워드 3세는 모든 병사들에게 말에서 내리라고 명령했으며 하마(下馬) 기사와 보병들을 3개로 나누어 배치했다. 장궁병 부대는 역 V자의 양익에 배치되었는데 기병의 돌격을 저지하기 위해 구덩이와 통나무 등등 장애물을 설치했다. 그리고 자신과 측근은 후방의 언덕 풍차에 진을 치고서 전투를 지휘하기로 했다.[11] 흑태자 에드워드는 전방에서 보병대를 지휘하게 했다.
그리고 전투태세를 마쳤을 때 프랑스군이 도착했다.
미리 도착해 언덕에 진을 친 잉글랜드군은 식사를 하고 휴식을 취한 상태였지만, 프랑스군은 수일을 내리 행군해 온 다음 곧장 전투에 참여해야 했다. 게다가 이들이 도착한 직후 뜬금없이 폭풍우가 몰아쳤기에 프랑스군의 공격은 더욱 늦춰졌다.[12] 비가 그치고 다시 해가 뜨자 프랑스군은 공격을 시작했고, 잉글랜드군은 '태양을 등진 채' 그들을 맞이했다.
게다가 잉글랜드군이 언덕 위의 유리한 지형을 장악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프랑스군의 진입로에는 자연제방 같은 둑길이 가로놓여 있었다.[13]
때문에 프랑스군은 벌판을 가로질러 곧장 진격하지 못하고 빙 둘러 좁은 협곡을 통해서 잉글랜드군을 향해 접근해야 했다. 안 그래도 산만한 지휘체계로 혼란스러운데다가 지형조차 극악인 탓에 프랑스군은 효율적인 병력배치를 전혀 할 수 없었다. 뒤집어 말하면 잉글랜드군은 최상의 지형을 선점하고 있었고 프랑스군은 그곳으로 무턱대고 밀려들어간 셈.
애초 필리프 6세는 전열을 재정비한 후에 공격을 시작할 생각이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필리프 6세의 고문들은 - 그들 또한 프랑스군이 압도적으로 우세하다고 믿었으므로 - 승리를 확신했지만, 그럼에도 당일 곧장 전투를 시작하는 것에는 반대했다. 프랑스군이 크레시에 오후가 되어 도착했기 때문에 해가 질 때까지 4시간 정도밖에 없어 전투를 벌일 시간이 충분하지 않고, 또 행군으로 병사들이 지쳤고 대열도 흐트러졌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따라서 일단 군대를 재정비한 후 다음날 공격을 해야한다고 필리프 6세에게 조언했고, 필리프 또한 그에 동의했다. 그러나 다수의 귀족들은 잉글랜드군을 매우 만만하게 보고 쉬운 승리가 눈 앞에 있다고 믿고 있었고, 또한 프랑스군 사이에는 그동안 잉글랜드군의 약탈행위로 격앙된 분위기도 적잖았기에 많은 귀족들은 필리프에게 즉각 공격할 것을 독촉했다.
필리프 6세는 고문들의 조언을 받아들여서, 전방의 부대들에게 일단 멈춰서 전열을 정비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잉글랜드군이 시야에 들어오자 지나치게 흥분한 군사들이 앞을 가로막은 채 멈춰 선 아군 부대를 무시하고 꾸역꾸역 잉글랜드군을 향해 진군했고, 부대끼리 뒤섞이면서 끔찍한 혼란이 일어났다. 설상가상으로 필리프 6세는 상황을 수습하기는커녕 오히려 독촉에 밀려 곧장 공격을 시작하는데 동의한다.
잉글랜드군이 비교적 일사분란한 지휘 통솔 하에 움직였던 반면, 프랑스군은 이처럼 지휘, 통솔부터 중구난방으로 흐른 것[14] 역시, 지형조건 및 잉글랜드군의 전술과 어우러져 전투의 결과에 매우 큰 영향을 끼친다.
3.2. 어택땅
프랑스군은 고용한 제노바 쇠뇌병을 앞에 세우고 후열에 기사들을 배치했으며 공격의 시작은 프랑스 궁수대의 사격으로 이루어졌다. 프랑스 궁수대가 선빵을 날린 것까지는 좋았으나 곧 쏟아지기 시작한 잉글랜드군 장궁병대의 화살세례에 그대로 개발살이 나버린다.
앞서 언급되었듯 원래 필리프 6세는 다음날 싸울 생각이었지만 지휘통제가 안되는 고질적인 문제 때문에 결국 당일 전투를 시작했다. 덕분에 이들 제노바 쇠뇌병 부대는 '''6일을 내리 걸어오자마자''' 곧장 투입된 것이었다. 그나마 전투에 필수적인 파비스는 후방에 여전히 대열 한참 더 후방의 수송마차에 실려 있어서 가져오지도 못했다. 이뭐병. 물론 전열을 재정비하지 않은 상태로 무턱대고 공격을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관통력은 석궁이 더 우수했지만 연사력과 사정거리에서 장궁에게 밀렸다. 특히 연사력은 분당 2~3발 대 10~12발로 몇 배나 밀린다. 하지만 석궁을 재장전하는 동안 화살을 막을 파비스는 여전히 후방에 그대로 남겨져 있었으니... 또 장궁도 철제 갑주를 관통시킬 수 있는건 마찬가지였다.[15] 게다가 잉글랜드 장궁병대는 언덕 위에서 공격하는 상황이었는데가, 긴 사거리에 대한 곡사사격에도 훨씬 더 익숙했다. 게다가 앞서 말한 괴랄한 지형 덕분에 협소한 진격로에 대병력이 밀려든 결과, 프랑스군의 석궁병들은 후방의 기병대에 거의 떠밀리다시피 원래 의도했던 것보다도 훨씬 잉글랜드군에 근접한 위치부터 진격해 들어가게 되었다.
당연히 가벼운 갑옷만 입은 석궁병들이 잉글랜드군의 소나기 같은 화살세례를 버텨낼 수 있을리 만무했고, 결국 프랑스 궁수대는 장궁대의 반격에 밀려 후방에 두고왔던 파비스를 가져오기 위해 후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뒤에 포진해있던 프랑스 기사들은 '''겁쟁이 쇠뇌수들이 도망간다'''고 생각하고 이들을 베어버렸다(…).[16] 후열의 프랑스 병사들은 앞에서 벌어지는 막장스러운 상황을 모른 채 팀킬당하는 아군 궁수대의 비명만 듣고 잉글랜드군을 때려 눕히고 있다고 착각을 하게 되고, 잉글랜드군 장궁병의 빗발치는 화살 세례로 돌격하는 미친 짓을 감행한다.
3.3. 이건 미친 짓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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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수대가 아무 힘도 못쓰고 발리자 후열의 기사들이 공격을 시작했다. 그러나 앞서 언급되었듯 프랑스군은 도착하자마자 행군해오는 동안 뒤엉킨 전열을 재정비하지도 않고 곧장 공격을 시작했기 때문에, 기사들의 공격은 체계고 뭐고 없이 산만하게 이뤄졌다. 쉬운 승리를 확신한 프랑스 기사들은 경쟁적으로, '너도 나도 한꺼번에, 하지만 전체로 보면 한무리씩 제멋대로'인 닥돌을 감행했다. 뒤엉킨 전열 속에서 함께 따라온 보병들 대부분은 (지휘고 뭐고 없이) 저만치 그대로 내버려 둔 채로.
프랑스의 기사들은 궁수대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선발대의 전열을 향해서 그대로 돌격해버렸으나 오히려 아군과 병력이 뒤섞여 우왕좌왕할 수 밖에 없었다. 산만한 지휘 통솔에 전열도 제대로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 괴랄한 지형의 효과 또한 한층 배가되어 프랑스군은 한꺼번에 우르르 몰려들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영국군을 향해 일제히 쇄도하지도 못하고 좁은 진격로에서 자기들끼리 교통체증을 일으키며 더 큰 혼란에 빠져들 뿐이었다.
프랑스군이 그렇게 우왕좌왕하고 있는 사이 '''장궁병들이 이번에는 기사들을 향해 화살비를 퍼붓기 시작했다.''' 수 천명의 장궁병들이 일제히 화살을 퍼붓자 '하늘이 어두워질 정도였다'는 이야기까지 있다.
하필 비가 내려서 진창이었던 데다가 양익 장궁수의 사격을 피해 중앙으로 몰려있었기 때문에 프랑스 기사들은 비좁은 곳에서 무기 휘두를 공간도 확보 못하고 지들끼리 버둥거리며 밀치다가 넘어져 압사당하거나 짓밟히기 일쑤였다. 영국 장궁병들은 기사들보다도 말을 노리고 화살을 퍼부었다.[17]
장궁병들의 주요 역할은 기사들의 돌격속도를 늦추는 것이었다. 쓰러진 말과 낙마한 기사들이 후속부대의 돌격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는 난장판 속에서 프랑스군은 혼란에 빠졌다. 그 상황에서도 16차례나 돌격을 시도했지만 프랑스군은 진창과 장애물 때문에 쉽사리 돌파하지 못했고, 궁수대의 지원사격을 받는 영국군의 보병들과 하마 기사들은 만신창이가 되어 돈좌한 프랑스 기사들을 두들겨 잡았다. 콘월과 웨일스의 보병들은 특히 커다란 단검을 허리에 차고 다니면서 낙마한 기사를 덮쳐 재빠르게 투구의 면갑을 열고 얼굴을 찔러 죽이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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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크레시 전투의 결과
망했어요.
프랑스군은 최소 1만에서 3만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제후[18] 11명과 1,200명의 기사가 죽었으며 필리프 6세도 중상을 입었고, 필리프 6세의 동생인 알랑숑 백작 샤를 2세, 룩셈부르크 백작이자 보헤미아의 왕인 장님왕 얀[19] 등 화려한 인사들도 전사했다. 반면 영국군은 150~250명으로 나와있지만 이 통계는 다소 신빙성이 낮고 과소평가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허나 그걸 감안하고서라도 적은 사상자가 나왔을 것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크레시 전투에서 승리한 영국군은 약탈 행렬을 프랑스 전역으로 확대했으며 프랑스군은 몇 차례 같은 방식으로 덤볐지만 '''어택땅이 먹힐 리가 없었다.''' 기껏 모인 병력만 꼴아박기 일쑤.
결국 교황 클레멘스 6세의 중재로 휴전 협정에 들어갔고 그 와중에 흑사병이 돌았으며 필리프 6세가 사망하고 장 2세가 즉위하는 등의 사건이 일어났다. 하지만 1354년 교섭이 결렬되면서 1355년 다시 전쟁이 재개되었다.
'''하지만 프랑스군의 졸전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으니...''' 크레시 전투에서 죽어간 자신들의 아버지, 할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뛰어든 이들은 지난날의 패배를 만회하기는커녕, 거의 똑같은 짓을 반복하게 됨으로써 아버지들의 뒤를 따르게 된다. 푸아티에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병력이 적다는 이유로 잉글랜드군을 얕보지 않았고, 행군 이후 휴식을 취하면서 전열을 재정비했으며, 정찰을 통해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작전을 세웠기에 실전에서도 크레시 전투에서보다는 잘 싸웠다. 하지만 결국 적에게 유리하고 아군에게 불리한 지형에서 굳이 결전을 벌이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짓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결과만 초래했다.
크레시 전투는 궁수는 기사에게 무력하다는 기존의 통념을 깬 전투로 우수한 전술과 통찰력로 무적에 가까웠던 기사의 돌격을 보병으로 막아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인 데에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크레시 전투를 비롯해서 아쟁쿠르 전투까지 이어지는 잉글랜드군의 우세한 전술 운용의 많은 요소들은 거슬러 올라가면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을 포함해 13~14세기 영국에서 치렀던 여러 전쟁들의 전훈을 바탕으로 발전시킨 것들이었다.
5. 기타
워렌 엘리스(Warren Ellis)라는 영국의 만화가가 크레시 전투를 소재로 한 그래픽 노블, 크레시(Crécy)를 그렸다.
6. 관련 문서
[1] 일례로 당시의 어느 이탈리아 연대기 작가는 이 전투에 참여한 프랑스군의 규모가 기사와 맨앳암즈 등 중기병만 10만(!)에 일반보병 12,000명, 석궁병 5,000명 등(거의 몽골 제국 서역 원정군 규모의 대군...)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2] 이들은 주무기인 장궁과 함께, 부무장으로는 쇼트 소드와 더불어 말뚝을 휴대하고 다녔다.[3] 중세 유럽, 특히 잉글랜드의 경기병 또는 "승마 보병". 원래는 중세시절 아일랜드 지역에서 키우던 일종의 조랑말의 품종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대체로 경장에 창과 검으로 무장한 기병으로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을 비롯해 13~14세기 영국에서 벌어진 여러 전쟁에서 활약했던 병종이다. 정찰, 추격 및 산병전과 게릴라전에서 매우 유용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잉글랜드군이 프랑스 여러 지역의 촌락과 도시를 약탈하고 불태우는 일종의 초토화 전술(Chevauchée)을 썼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실제 당시 잉글랜드군의 구성에 이런 경기병이나 혹은 "승마보병" 형태의 병력의 규모가 꽤 컸을 수 있다. 또 당시 잉글랜드군 장궁병 중 일부는 말을 타고 이동하는 일종의 "승마 궁병"에 해당했고, 때문에 당시 잉글랜드군의 병력 중 경기병이나 승마보병으로 표현되는 병력 중 일부는 이들 "승마 장궁병"이었을 수 있다고 보는 경우도 있다.[4] 이들 '창병'들도 도보이동을 하는 '순수한' 보병인지, 일종의 '승마 보병'이었지는 불분명하다.[5] 슬로이스 해전 때 프랑스 함선에서 노획한 대포가 포함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6] 전장 유적에서 화포에서 발사된 것으로 보이는 철환 등이 나왔기 때문에 화포의 사용 자체는 확인되지만, 실제 전투에서 어느 정도의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불명이다. 기록에 따라 나름 활약했다고 나오기도 하고, 반대로 아예 화포가 언급도 안되기도 하는 모양이다. 일단 화포 자체나 화포 운용법이 초보적이던 시절로 당시 '리볼데퀸'의 경우 '하루에 한 번 쏜다'고 말해지던 수준이었고, 당시의 사석포들 역시 한번 발사하는데 매우 긴 시간을 소요했다. 따라서 화포 사격 자체로 프랑스군에 얼마나 피해를 주었는지와는 별개로, 일단 전투 동안 화포의 발사 자체가 그리 많이 이뤄지지는 못했을 것은 분명하다.[7] 경우에 따라 이 중기병의 숫자가 실제로 순수한 기병 병력의 숫자인지, 아니면 중기병인 기사나 맨앳암즈뿐 아니라 그들에 동반되는 - 이를테면 종자와 같은 - 보조인력까지 계산한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나타내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이는 프랑스군만 아니라 잉글랜드군의 중기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8] 이 석궁병의 숫자가 모두 제노바 쇠뇌병이었는지에 대해서도 설이 갈린다. 즉 당시의 시점에서 제노바 한 곳에서만 적게 잡아도 2,000명 이상의 석궁병을 모아서 보내는 게 실제로 가능했는지에 의구심을 나타내는 역사가도 있다. 그에 따르면 2,000~6,000명의 숫자는 그 전부가 제노바 쇠뇌병의 숫자보다는, (전력으로서는 제노바 쇠뇌병이 그 주축일 수 있으나) 당시 시점에서 프랑스가 보유한 석궁병 전체의 규모라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하다는 것.[9] 당연히 이 시기 일반적인 병력동원 방식은 잘 알려져있다시피 이를테면 국왕이 귀족들을 소집하고, 귀족들이 자기 휘하의 기사와 맨앳암즈를 데려오고, 더 필요하면 용병을 고용하는 식이다. 그나마 귀족들과 그들이 데려온 기사 및 맨앳암즈나 혹은 제노바 쇠뇌병처럼 정식으로 계약을 해서 데려온 용병이라면 그 규모에 대해 - 기록에 따라 들쑥날쑥해도 - 최소한 참조할 '숫자 자체'는 나올 수 있다. 하지만 그나마 '정식'으로 모은 병력의 규모에 대해서조차 저렇게 기록마다 중구난방인 마당인데, 그 외의 (주로 일반 보병에 해당할) 병력이나 부대 인력을 여기저기에서 징집 혹은 모집해서 충원했다면 그 실제 규모나 내역을 확인할 방법은...[10] 그런데 사실은 당시 필리프 6세가 군대를 동원하기 위해 지출한 비용에 대한 - 당연히 병사들에 지급한 급료 등을 포함하여 - 의 '회계기록'이 이후 유실되어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사실은 아무 것도 제대로 된 기록이 없는 셈...[11] 이렇게 잉글랜드군은 기병을 말에서 내리게 해 밀집한 전형을 자주 짰는데 이는 잉글랜드군이 비교적 소수였기에 방어적인 진형을 짜는게 유리했고 기병은 방어적인 진형엔 이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에서 기병들을 하마시킨 것일 뿐 잉글랜드 또한 기병의 전력이 매우 우수했다. 그리고 말에서 내린 기병들은 계속 보병으로서 싸운 게 아니라 보병으로서의 방어전투를 마치고 다시 본진에 뒀던 자신들의 말에 탑승, 중기병 차지를 감행해 타격을 입힌 뒤 본진으로 귀환하였고 이후 또다시 말에서 내려 방어진을 짜는 등 유동적으로 활약했다.[12] 이 때문에 제노바 석궁병들의 활시위가 젖어 전투 때 제 성능을 발휘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도 간혹 주장되는 것. 반면 잉글랜드 장궁병들은 활시위를 풀어 투구 속에 (기록에 따라서는 품 속에) 넣어두어 비에 젖지 않게 했다.[13] 근처에 큰 하천 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지형이 형성되어있다. 따라서 해당 지역을 실제로 살펴보기 전에는 예상하기 어려운 매우 뜬금스런 지형이다. Channel 4의 다큐멘터리 '영국을 만든 무기들'의 "장궁" 편에 이에 대해 잘 소개되어 있다. 동영상 링크. 32분 정도에 해당 내용이 나온다.[14] 당시 잉글랜드군은 군대를 이끌던 주요'귀족'은 국왕인 에드워드 3세와 흑태자 에드워드, 그리고 노샘프턴 공 윌리엄 정도로 비교적 단촐했고, 어쨌거나 귀족은 아닌 평민인 요먼 출신의 장궁병들처럼 평민층 병사들이 주요 전력인(또한 이들 평민층 병사들 다수가 이미 전투를 여러번 치러본 숙련된 병사들이기도 했다) 반면, 프랑스군은 여러 내로라하는 귀족들 휘하의 병력을 모아 구성한 군대였던 것과 무관할 수 없다.[15] 당시는 아직 플레이트 아머가 일반화되기 이전으로 체인메일이나 부분적으로 판금갑주를 사용한 트랜지셔널 아머가 주류를 이루던 시기였기에 장궁으로도 갑주를 입은 상대에 대해 살상력을 기대할 수 있었다. 때문에 석궁의 관통력의 우위는 상대적으로 덜 큰 메리트가 된다. 또한 마갑의 활용도 더 적었기 때문에 기병돌격을 방어하는 잉글랜드군의 입장에선 말을 노리고 쏴버리면 장궁이 석궁보다 위력이 떨어지는 것이 아주 큰 문제도 아니다. 유일한 문제는 활이 석궁보다 많은 숙련도를 요구하기에 궁병의 확보가 쉽지 않다는 것인데, 당시 잉글랜드는 이미 거의 12세기 경부터 장궁병 양성에 노력을 기울여왔다. 이는 노르만 정복 시기 웨일즈의 장궁병들이 노르만 군대에 적잖은 피해를 입혔던 역사적 경험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이후 에드워드 1세 때는, 일요일에 궁술을 연마하는 것을 제외한 모든 '쓸모 없는' 스포츠를 법으로 금지시키고 사실상 '자유민' 남성 모두가 의무적으로 궁술을 연마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이처럼 궁술연마를 '국가시책'으로 장려하는 것은 에드워드 3세의 시기에 오면 한층 더 강화되었다. 덕분에 잉글랜드는 석궁에 비해 훨씬 값싼 무기인 장궁으로 무장한 궁병 수천명을 동원할 수 있었다.[16] 다만 현대인들의 눈에는 이런 행동이 미친 짓으로 보일지 모르나, 중세를 살던 기사들의 시각에서는 적에게 등을 보이고 도망간 겁쟁이들은 기사도를 버린 비열한 자들이기 때문에 죽여야 마땅하다고 여겼다. 또한 비단 중세 유럽이 아니더라도 근대 이전까지 세계 각지의 군대에서는 전투에서 도망간 자들은 군법을 어긴 것으로 간주하여 처형시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로마군만 하더라도 데키마티오라고 하여 전투에서 도망간 자들은 다른 동료들이 몽둥이로 때려죽이는 형벌이 버젓이 있었다.[17] 앞서도 언급되었듯, 아직까지 마갑의 사용이 적었던 시기였기에 그 효과는 더 컸다. 물론 영국군은 장궁병대를 양익에 배치해 프랑스 기사들을 측면에서 공격했으므로, 마갑을 더 충실히 갖추는 이후 시대에도 측면의 마갑은 상대적으로 허술했기에 - 일단 안장을 얹고 사람이 타야 하는 부분이고, 또 갑옷을 입은 기사의 다리로 어느정도 커버되므로 이 부분에는 일부만 갑주로 덮거나, 혹은 경우에 따라 생략되기도 했다 - 여전히 일정한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백년전쟁 동안 계속 벌어졌듯, 수천명의 궁수들이 집중사격을 퍼붓는 상황이 되면 일반적으로 맞을 일이 없을 것 같은 곳에, 마갑의 허술한 틈은 물론 이를테면 말의 다리 같은 곳에 맞게 되는 답없는 상황도 나올 수 있다.[18] Prince[19] 얀 루쳄부르스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7세의 아들이자, 역시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는 카를 4세의 부친이기도 하다. 한때는 폴란드 왕위도 가지고 있었고, 헝가리 왕위를 노린 적도 있으며, 당연히 신성 로마 제국 황위 계승전에 참여했다. 백년전쟁 이전에 이미 안염으로 시력을 상실해서 장님왕이라고 불릴 정도였기 때문에, 생전에도 보헤미아 왕위는 아들 카렐 4세가 대리청정을 했다. 그런데도 크레시 전투에서 참전해서 돌진하고 싶다고, 다른 기사들과 몸을 쇠사슬로 연결해서 돌진하고 죽었다는 일화가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