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이베르크 전투

 


1. 개요
2. 배경
3. 양측의 전력
3.1. 프로이센군
3.2. 오스트리아군
4. 전개
5. 결과


1. 개요


1762년 10월 29일 작센프라이베르크에서 프로이센 왕국군과 오스트리아군이 맞붙은 전투.이 전투를 끝으로 7년 전쟁이 막을 내린다.

2. 배경


7년 전쟁 말기 프로이센은 전쟁으로 피폐해져 있는 상황이었다. 120명의 장군, 1500명의 장교, 10만 명이 넘는 병력을 잃는 등 군사적 역량이 한계에 달해 가는 상황이었고, 프리드리히 2세는 자살할 것까지 고려할 정도였다. 1762년 1월에 러시아의 옐리자베타 여제가 사망하고 그녀의 조카인 표트르 3세가 제위에 올랐다. 표트르는 황제가 되기 전부터 프리드리히를 숭배한다는 것을 드러내놓고 다닐 정도였으며, 즉위하자마자 프로이센과의 평화교섭에 나섰다. 결국 같은 해 3월, 5월에 휴전조약과 평화조약이 맺어지고 거기다가 스웨덴마저 휴전을 시키면서 프로이센 왕국은 기사회생을 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 소식을 들은 영국 역시 대륙의 승리를 위해 프로이센에게 적극적으로 지원을 하기로 하고 북아메리카 전선외에도 많은 병력과 지원을 하노버에 보냈다. 그 결과 1762년 6월 24일의 빌헴스타흘 전투에서 영국-프로이센 연합군이 이기면서 프랑스는 전쟁 수행의지를 잃어가고 있었고 결국 전선에서 이탈하고 말았다. 이에 따라 오스트리아만이 프로이센군과 싸우게 된다.

3. 양측의 전력



3.1. 프로이센군



3.2. 오스트리아군


  • 사령관: 스톨베르크 공
  • 병력: 31,000명

4. 전개


프리드리히 대왕의 남동생 프로이센의 하인리히 공은 2진 부대와 비정규 대대로 구성된 22,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오스트리아군과 맞서게 되었다. 10월 29일 하인리히 공은 소규모 병력으로 적 주력을 묶고 주력으로 좌측면을 치기로 했다. 이러한 측면 돌격과 동시에, 오스트리아 군의 공세를 막아내고 역으로 기병대로 오스트리아 군 전선 중앙에 대한 대규모 돌격을 단행, 오스트리아 군을 철저히 분단시킨 프로이센 군은 대대적인 총공격으로 결국 승리하게 된다.

5. 결과


전투에서 패한 오스트리아군은 피르나로 퇴각했고, 프로이센군은 그런 적을 추격하여 11월에 나움베르크, 뷔르츠부르크, 레겐스부르크를 공략했다. 이렇듯 아군이 속절없이 밀리고 프로이센군이 오스트리아 본토까지 노리게 되자, 마리아 테레지아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1763년 2월 15일 라이프치히 교외의 후베르투스부르크에서 프로이센과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이로서 장장 7년간 수많은 인명을 살상한 전쟁은 마침내 막을 내렸다.